기독칼럼·논문·서적/기독서적

기독교 문학 산책ㅣ⑦ 이승우의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은바리라이프 2009. 6. 11. 18:06

창세기 ‘행간’, 소설로 읽다
기독교 문학 산책ㅣ⑦ 이승우의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2008년 12월 12일 (금) 15:56:32 조준영 joshua@kidok.com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창세기의 숨은 행간에 새로운 붓칠을 더한다는 것은 어쩌면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과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다.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기도 하지만, 차마 신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기엔 두려움이 앞선다. 선악과를 따먹은 날의 징벌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우(1959∼)의 소설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는 엄청난 용기와 글쓰기를 향한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성경을 다룬 여느 소설들이 인본주의적 시각으로 성경을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단했다면,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에서는 작가의 기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부정되지 않는다. 도리어 신학교 출신인 작가의 풍부한 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창세기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빈틈없이 한 올 한 올 세련된 매듭으로 이어진다.

창세기가 기원과 본질에 대한 기록이기에 소설 속 작가의 시선 또한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본다. 에덴동산은 작가에게 있어 유혹의 또 다른 표상이다. 뱀의 유혹은 비단 하와와 아담을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인류에게도 혀를 낼름거린다. 금지된 하나를 얻고자 허락된 아흔아홉을 포기하겠는가 묻는다. 질문에 대해 신앙심을 들먹이는 것은 섣부른 대답이다. 유혹의 결과가 신과 인간의 단절이기에, 무엇보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이다. 작가의 시선이 단순한 유혹의 과정과 결과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옮아가는 것은 작품의 또 다른 성과다.

에덴동산이 유혹이었다면, 카인은 질투의 상징이다. 카인은 신 앞에서 제사 문제를 들먹이지만, 신의 관심은 아우 아벨을 질투하는 카인 자신이었다. 신과 카인의 갈등과 오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제사보다 자세가 먼저라는 소설 외적 가르침을 얻는다.

작품은 이어 카인이 만든 도시의 타락과 노아 시대의 심판, 니므롯의 인류 최초의 전쟁, 바벨탑까지 이어지며, 인간의 교만과 폭력, 그에 따른 신의 심판과 재창조를 그려낸다. 이쯤 되면 숱한 시대 인간과 소설의 관심이 창세기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비단 작가만의 지식은 아니다. 소설의 원형인 창세기를 침범했기에 마지막까지 인간에 대한 작가의 탐구가 진지한 것은 물론이다.

원전(元典)이 있는 소설은 상상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늘 위태롭다. 창세기가 원전임에야 그 긴장이 오죽했을까? 다행히 〈태초의 유혹이 있었다〉는 원전을 훼손시키거나 퇴색시키는 경계를 넘어섰다. 도리어 작가의 의도를 넘어 창세기가 단순한 신화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으로 승화된 진지한 신학적 탐구이자 작가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을 향한 깨우침이다.

조준영의 다른기사 보기  
ⓒ 기독신문(http://www.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