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롬6:3-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뜻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의 삶도 역시 일반적인 세상살이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 속에 파묻혀 익명으로(Incognito ) 살아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특징을 찾아보려고 할 경우에는 자칫 자기의(義)와 경건성에 빠질 위험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인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임재 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의 삶에서 혁명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용서이며,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롭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혹시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과장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바울의 이 어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두 가지의 오해를 가려내야 합니다. 첫 번 째 오해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를 그리스도가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죄에서 자유하며, 죄에서 사면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죄를 우리의 현재적 삶과 매우 밀착된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삶에서 손쉽게 떼어낼 수 있거나, 다른 이에게 넘겨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오해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지난날 범한 죄를 거듭해서 용서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새로운 삶"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통해서 완성해야만 할 도덕적인 긴장의 한 메타포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죄의 심각한 깊이를 간과하게 됩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그 뿌리로부터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만만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에서 지적한 첫 번 째의 방식이나 두 번 째의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6:7). 죄, 이것은 곧 고집입니다. 이 고집은 인간이 죽어야 멈춥니다. 이것은 소위 자연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죄의 작용이며, 죄와 "고용관계"에 있습니다. 바울은 "죄"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생물학적인 구조에서 그 심연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홀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다가 치르게된 그 값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추구한 이 자유는 매우 특이하고 드문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자유니 뭐니 하는 게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결국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출구 없는 이 상황에서 하나의 출구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홀로 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가 끝나버리는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살아있는 한에서는 죄가 쉽사리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이 딜레마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어느 정도나 그 해결의 시야를 열어놓을까요? 죽음의 운명과 비슷한 것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공동의 경험은 우리를 무언가로 묶어줍니다. 이것은 곧 동료관계의 경험입니다. 고난을 함께 나눈 일체감은 우리에게 신뢰의 마음을 허락합니다. 특별히 고난과 죽음 앞에서 우리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의 전형이 우리에게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다음의 경구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나누어 가진 고통은 반으로 줄어든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마지막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운명의 연대나 유사성도 무(無)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운명의 일치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동일시됩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실존철학이 몹시도 강조했던 사실과 전혀 다른 죽음입니다. 즉 각자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처하게된다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관계된 모든 것은 자신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부활하게 된다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릅니다. 그것은 종착역이 아니라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라 할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이러한 동일시가 발생합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죽을 운명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감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전액계산제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개별적인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특별한 행위가, 특별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한다고 말입니다. 이 동일시는 세례 받을 때 발생합니다. 세례는 아주 특별하게 개개인들에게 베풀어집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각자의 이름이 불려지며, 그의 이름과 묶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와 관계된 모든 것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동일시는 예전적 마술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한 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든 분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죽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의 미래를 보장받을 경우에, 또한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묶임으로써 그에게서 일어난 부활의 길에 서게될 경우에 우리는 해방된 자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죄로부터의 자유와 우리가 죽음의 저편에서 갖게될 일종의 미래가 우리에게 약속되어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역사적인 사건이며, 단 한번으로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에 편입되는 것도 역시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예수님의 죽음에서처럼 우리에게서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이는 흡사 전쟁의 노예들이 이 세상에서 휘두르던 손이 끝나버린 것과 같습니다. 세례도 역시 우리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것 역시 우리 뒤에 놓여있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뒤로 물러나 버린 게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죽음은 선취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죽음은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죽어야할 그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감당해야할 바로 이 죽음은 세례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사용되던 세례탕이 이를 증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지금 죽음과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1945년 5월 마지막 날 쉴레스비히-홀스타인에서 연습하던 것처럼 세상에서의 사건들은 절뚝거리며 물러갑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과 죄에서 이미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교범(敎範)은 계속됩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교범에서 뛰쳐나올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죽음이 이미 세례를 통해서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미 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사라져버릴 세상의 사물에서 그 어떤 궁극적인 연결고리를 더 이상 승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고집과 자기 성취가 자기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세상에서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죽음이 우리에게서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경우에 이 세상의 사물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거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부활한 자를 희망함으로써 우리는 오늘 이미 이런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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