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판넨베르크

2장: 1. '하나님'이라는 말

은바리라이프 2018. 1. 9. 19:07

2장:
1. '하나님'이라는 말

근대 이전의 문화에는 ?하나님?과 ?신들?이라는 말들이 문화 세계와 연관해서 다소간 정확하게 규정되는 자리가 있었다. 인간의 언어 세계에서도 역시, 즉 우주적인 질서처럼 사회적인 질서의 궁극적 토대가 관건인 곳에, 또한 그 토대를 보증하는 법정이 관건인 곳에 늘 그런 자리가 있었다. 그런 질서에 어울리는 외경, 관심, 지향이 이런 법정에 돌려졌다. 그런데 근대의 세속 문화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기능과 의미를 시나브로 상실했다. 이런 현상이 공적인 의식세계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언급된 현실성이 불확실해졌다.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진 공적인 의식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옹호하는 일은 진술로서의 그 진술이 자기 대상의 실존을 전제한다는 한계 안에서 다루어졌다. 이것은 철학적 신학의 전통에 대한 진술과 아울러 기독교 전승과 선포에도 해당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진술은 순수하게 세속화된 공적인 문화의 맥락에서 우선 단순 주장(bloße Behauptungen)으로 서술된다. 그 단순 주장의 진리는 미결인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진술의 진리나 또는 그 진술의 (명제적) 핵심내용이 갖는 진리가 더 이상 검증될 필요도 없이 명백하거나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비록 모든 논쟁들이 별로 특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개인들은 주관적으로 결정할 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 진리 요청이 세속 사태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경우에, 그리고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학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에 세속문화의 공적인 의식은 이런 단순 주장의 진리요청을 기꺼이 타당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주장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이것이 간혹 인문학자들의 유명한 명제에서 발견되는 경우보다 훨씬 진지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적인 의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주장은 언급하는 자의 주관성으로 간주되는 ?단순? 주장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진리 요청이 긍정적으로 숙고되기 전에 일반적으로 시험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시험이 아무 쓸모가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진술의 진리 요청이 진지한 공적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역시 그렇다. 
물론 앞서 거론된 것의 결과로 인한 그 다음의 변화가 훨씬 심각하다. 즉 신관이 문화 세계의 공적인 의식에서 아무런 기능을 감당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신관의 내용도 역시 불명확해진다. 칼 라너는 명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자신의 저서 ?신앙 개요?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현대인들에게 마치 ?일종의 눈먼 얼굴처럼? 불가사의하게 비친다고 말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류의 역사적 문화에서 신관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사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무미건조한 현재의 세계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아바카다브라(Abakadabra)로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 언어의 다른 구성 요소와 더불어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신학자들에게 기독교 선포에서 일종의 부담감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선포를 이해하는데 방해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단어 없이는 나사렛 예수를 믿으라는 초청은 그 토대를 상실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자기의 가르침과 자기 삶의 역사가 갖는 모든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간과 똑같았던 그를 다른 인간과 구별해서 원시 기독교가 선포한 그런 의미로 믿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를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특히 그에 의해서 전승된 많은 말과 또한 그의 자명성이 과장된 것으로, 또한 역사의 진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포와 기독교 신앙은 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포기할 수 없다. 예수는 이 말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에서 그 토대로 삼았다. 그래서 이런 언급들은 그 하나님이라는 말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이 말의 ?눈먼 얼굴?을 포괄하거나 은폐시키는 그 통로가 어떻게 새롭게 획득될 수 있을까?
오늘날 특별히 이런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새롭게 규정하는 원천으로서의 경험, 즉 종교적 경험의 갈망을 통해서 대답하는 일이 현안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구성된 시대정신에 부합된다. 대답은 물론 외면상 보이는 것보다는 별로 자명하지 못하다. 이것은 이미 신앙과 경험의 관계에 대한 전망을 가리킨다. 양자는 특히 종교개혁 전통에서 루터와 밀접하게 상호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동일하지 않다. 신앙은 교회의 선포와 교리를 통해서 중재되는 하나님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루터에 따르면 이러한 신앙은 율법에 대한 절망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신은, 또한 그것으로 인한 신앙은 확신 경험에 대한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확신 경험이 아무리 나름대로 위로와 신뢰의 새로운 경험에 토대를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에서 복음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확신경험의 연결은 개신교 신앙의 역사에서 볼 때 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을 통해서 지속적인 의미를 유지시켜 나갔다. 물론 이런 전개 과정에서 신앙의 토대가 점점 더 죄의식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은 니체와 프로이트 이후로 몹시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인간다운 유효 적절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통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제기되는 질문의 주제에서는 이런 전통적인 신관이 확신 경험에 토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해석하는 데 이미 전제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신관을 종교적 경험으로 되돌아가서 해명해보려는 사람은 종교 경험의 훨씬 넓은 개념에서 작업해야만 한다. 이런 개념은 특히 근대 영국의 종교철학에서 다루어졌다. 루이스(Hywel D. Lewis)는 1959년 기적(wonder)을 종교의식의 출발점이라고 했는데, 이 종교의식은 모든 일들과 비밀 가득한 현실성의 ?뒤? 또는 ?위?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실성에 모든 다른 것들이 의존해 있다. 이런 묘사는 윌리엄 제임스나 루돌프 오토의 고전적 설명과 근사하다. 이보다 2년 전에(1957) 출판된, 그리고 그 이후로 많은 논의가 전개된 램시의 진술이 이것과 연결된다. 램시는 언어분석적 철학을 통한 신학의 요청에 대해서 종교 경험의 개념을 어떤 이에게 갑자기 무언가가 노출되는(disclosure) ?상황?에 관련시킴으로써 답변했다. 마치 사람들이 ?푼돈이 땅에 떨어졌다?거나 또는 ?얼음이 깨졌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듯이 말이다. 램시는 루이스보다 훨씬 강력하게 종교 경험의 비예측성을 강조했다. 일종의 주관적 앙가주망과 연결되어 있는 통찰로서의 성격과 비슷하게 말이다. 즉 전체 삶은 그것을 통해서 달라진다. 이것은 쉴라이에르마허가 1799년 종교론에서 직관과 감정을 연결시킨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데, 이게 우연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램시는 쉴라이에르마허와 흡사하게 이런 종교적 경험을 ?전체 우주?(the whole univers)와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게 묘사된 종교경험은 신관을 명백하게 규정할 수 있는 통행로를 개척하는가? 이미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볼 수 있듯이 램시의 경우에 사정은 정반대다. 즉 신관은 이런 경험을 해석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태는 분석적 종교철학의 후기 논의에서 훨씬 명백하게 제기되었다. 하나님과의 (혹은 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 종교경험은 나름대로 신관을 통한 해석에서 서술된다. 특히 존 히크(John Hick)는 종교 경험이 다른 모든 경험과 마찬가지로 지각된 것을 ?어떤 것으로서? 지각하고 이해하는 해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경우에 개인적 경험의 해석은 일반적 특징화에 의존하고 있다. 이 특징화는 순간적인 인상과 개별적인 인상을 건너뛰고, 보다 넓은 이해 연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전(全) 해석과정에서 경험 개념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님을 언급하게 될 때 ?기반?인 경험을 부차적 요소인 해석 앞에서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또한 그것에 대립시키는 것이 바로 문제다. 이것은 경험 개념을 뒤늦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과 달리 지각(知覺)하는 작업에 제한시킬 수 있다면 납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종류의 이해는 고수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형태 지각?으로서의 지각은 이미 훨씬 넓은 바탕에서 역사적이며 사회적으로 중재된 이해연관을 포괄하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다음에 경험연관 속으로 배열됨으로써 해석학적인 면에서 분명해지거나, 또는 제한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이라는 말이 종교 경험과 연관해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추론 상황?에서 발생하는 지각에서 추론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것을 해명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상황의 내용에 대한 유일한 해명 및 이해 가능성이 핵심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추론상황에서 추론되는 것을 해명하고 이해할 때 어떤 종류가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는지 좀더 정확하게 설명되어야만 한다. 여기서는 우선 이런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추론상황에서 경험되는 대상이 특징화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만 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추론상황은 그 상황과 연결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사람에 의해서 대상과의 ?조우?로 경험된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런 대상을 특징화 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말은 고유명사로 작용하는가? 아니면 동일화하는 기술(記述)로 작용하는가? 이런 질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경우에 신학적 신(神)개념과 형이상학적 신개념의 관계가 그 배경에 놓여 있다. 철학적 분석이 기술적인 특징화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일종의 존재론적 범주가 유일하게 사용되는 경우라고 가정한다면 신학적 언어관용은 ?하나님?이라는 말의 기능을 주로 고유명사로 보려는 경향에 무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언어관용은 이러한 기능에 한정되면 안 된다. 이 말의 술어적인 관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서적 신(神)이해의 발전은 야웨와 엘로힘이라는 이중적 특징으로 전개되었다. 이 경우에 야웨는 배타적인 고유명사이지만, 엘로힘은 비록 이것이 자주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유(類)명칭이다. ?하나님?이라는 유명칭이 유일한 존재의 이름이 된다는 것은 유일신론적 종교의 언어관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우선 유명칭이, 또는 일반적인 특징화가 핵심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만 언어의 술어적 관용은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런 기초에서만 유일신론적 요청은 신성의 범주가 이런 한 하나님에게 한정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기독교 이전에, 그리고 기독교 외부에서 각인되었다?는 사실은 야웨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기독교적 언급에 나타났듯이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삼위일체 하나님인 야웨의 ?유일한 신성?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이다. 즉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범주를 그 주장이 현실화 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에 한정시킨다는 것에 달려 있다. 이 주장은 기독교 외부의 언어관용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같은 표현의 사용이 여기서 ?동일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증거로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같은 것에 대한 언급, 오직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즉 근본적인 교정의 방식으로 그렇다. 
일반적 특징을 나타내는 ?하나님?이라는 말의 특성은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언급과 기독교적 언급의 근원적 역사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도 항존적인 의미가 있다. 고유명사는 유명칭과의 연결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명칭이 유일한 현실화에 한정되는 특별한 경우에도 역시 해당된다. ?신들?에 대한 유명칭으로서의 ?신적인 것?의 개념은 물론 이미 자체적으로 신적인 단일성을 한 우주의 근원으로서 포괄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신(神)개념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형이상학적 신개념은 틀림없이 일반적 기술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동일한 기능을 성취할 수 있었다. 성서적 하나님 이해가 시작될 때, 특히 야웨의 유일한 신성에 대한 주장을 이해하는 경우에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보편개념이 작용한 것처럼 말이다. 즉 형이상학적 신개념은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언급이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다신교적 민족 신앙이 신들을 다수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철학이 이미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한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성서의 한 하나님에게서 참되게 존재한다.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해서 성서 외부의 언어관용은 유일신으로서의 야웨가 민족 신들과 대립해 있는 것과 같이 더 이상 극단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의 선교적 사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할 때 사람들이 이미 앞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던 ?바로 그 분?에 대해서 말한다는 사실은 더욱 명백해졌다.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적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지 그 어떤 다른 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오늘날 하나님을 단일성으로 생각한 철학적 신학의 신관을 거부한다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민족 종교에서 주장되었던 신들의 다수성이라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언급은 다른 여러 신들 중에 하나로서의 성서적 하나님과, 즉 그렇게 규정된 하나님과 관련된다. 이렇게 논증하는 사람은 언어 분석적으로 토대가 잡힌 하나님의 유일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신관의 철학적 논의를 유일신론 내부로 끌어들이는 논증을 동시에 요구할 수 없다. 이 작업이 반대로 수행될 경우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한 언어관용의 이러한 기술이 형이상학에 연루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사실을 초기부터 충분하게 이해했으며, 또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이로써 민족 신앙의 다신론이나 호국적 예배와 맞선 한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갖는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언급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최소한 기독교 신학이 근대의 문화적 의식에서 수행된 철학적 신학의 전통에 있는 ?형이상학?으로부터 무턱대고 돌아서 버렸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언급의 구속력에 따르는 결과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첨예화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핵심 사안은 기독교가 때에 따라서 번번이 조급하게 시대정신에 야합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언급을 명료하게 하는 작업에서 기여한 것이 별로 없었다. 종교경험에 대한 상환청구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해명해내지 못한다는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거꾸로 종교 경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해석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종교 경험에 대한 암시는 다른 곳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신관에 해당되는 리얼리티가 있는지 없는지, 또한 어떤 리얼리티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때 의미가 있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신관은 종교 경험의 내용을 해명할 때 이미 전제되어 있다. 보편적인 형식에서, 또한 보다 근접해서 규정될 수 있는 형식에서 전제되어 있다. 신관의 이러한 일반적 내용에 한 철학적 신학의 전통은 그 어떤 특별한 경험을 숙고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다. 이 경우에 핵심은 세계 이해다. 철학적 신학은 우주의 단일성을 제공하는 근원이 바로 그 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이 철학적 신학은 종교적 전승이 신들에 대해서 말한 것과 오직 제한적으로 대립된다. 종교도 역시 그 토대를 언급할 때 우주적 질서와 기능 내에 있는 활동영역을 신들에게 돌린다. 철학적 신학은 신적인 근원이 다층적 전망에서 부차적으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우주의 단일성이 궁극적으로 그 신적 근원의 단일성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종교적 전승과 비판적으로 맞섰다. 유비적으로 말해서 단일성과 세계와의 관계는, 그리고 그 자리매김과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발전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제2 이사야가 언급한 것처럼(이 40:12f.; 45:18-21) 창조 사상으로부터 야웨의 유일무이한 신성에 대한 확증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언급도 역시 철학적 신학이 세계와 관계하고, 즉 전체적으로 세계와 관계하고, 신관의 준거에 관계한다는 사실과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 초기 기독교 신학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자와, 그리고 유일한 한 하나님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신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의 기초적 기능이다. 즉 세계의 창조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현재화되었으며, 계시되었다고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의 이러한 내용은 나중에 많은 논란거리로 등장한 것처럼 종교 경험의 특성이 이런 말을 통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절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개별 경험에서, 종교적 개별 경험에서 약화될 수 없다. 고대 문화의 세계 해석에 종교적 근원과 성격이 담지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고대 문화의 연관에서 신관이 발전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램시(Ian T. Ramsey)의 입을 빌려 말한다면 단수로 사용될 때 종교적으로 토대가 잡힌 세계 이해의 ?단서가 되는 말?이다. 즉 이 말은 개별 지각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런 기술의 연관에서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컨대 창조 진술을 통해서 세계 존재에 대한 ?궁극적 설명?을 전체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말은 여기서 동시에 각각의 무조건적인 앙가주망을 표현하며 자리매김 한다. 이 앙가주망은 종교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기능에 대한 기억은 근대 세속주의의 상황에서도 역시 ?하나님?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눈먼 얼굴?처럼 보임으로써 그것의 이질성을 통해서 근대적 생명 세계의 의미결핍을 불러왔다. 이 근대 생명 세계에서는 그 단일성과 전체성의 주제가 상실되었으며, 또한 인간 현존의 전체성도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 되고 말았다. 이런 말이 완전히 상실되어버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칼 라너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이런 것으로서의 현실성 전체를, 또한 이것으로서의 자기 현존 전체를 견인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전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 ? 이것은 아마 늘 ?하나님?이라는 말의 기능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들의 다수를 고려했기 때문에 세계 전체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특별한 질문으로, 즉 부가적인 조치 없이는 이미 신들의 현존을 통해서 대답될 수 없는 질문으로 제기되었다. 이 질문은 우선 코스모스의 질서에서 현현하고 인간 세계의 공동질서에 토대하고 있는 신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질서를 직관함으로써 그 대답을 발견했다. 물론 신들의 다수성이 한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한 하나님이라는 사상으로 축소된 이래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사실상 전체로서의 세계 의식에, 그리고 인간 삶의 전체성 의식에 ?단서가 되는 말?이 되었다. 여기에 유일신 사상(Monolatrie), 즉 유일무이한 하나님 숭배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의 발전과 더불어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신학은 획기적으로 이러한 한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것으로서의 유일신론이 되었다. 이 철학적 신학은 특별히 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의 타당성과 명백성의 조건이었다. 이 한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살전 1:9f., 롬 3:29f.) 해당된다. 이런 한에서 여기서는 이방인 교회의 기독교가 그렇게 두말없이, 그리고 신중성이나 일관성 없이 떼어 내버린 그 유산이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태는 개신교 신학 내부에서 알프레히트 리츨과 그의 학파 이후로 자주 곡해되었으며 잘못 평가되었다. 칼 바르트가 ?자연 신학?을 거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리츨 학파 때문이었다. 헬레니즘 정신과 특별히 그리스인의 철학적 신학은 외면상, 그리고 소위 복음의 순수 도덕적 사신을 오도시키는 요인처럼 그렇게 두말없이 기독교의 이해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이방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의 교회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모든 인간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전제를 파기하지 않고 이 사태를 그렇게 무분별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와 연관해서 이러한 철학적 신학과 ?자연신학?에 해당되는 기능이 언급된 것은 별로 없다.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통해서 중재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인식과 철학적 신학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단히 확인한다고 해서 해명될 수 없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이런 확인은 하나님의 계시 옆에 무언가 하나님 없는 하나님 인식이, 즉 하나님 자신에게서 발현되지 않는 하나님 인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미 앞에서 신관의 이러한 전제가 지양되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자연 신학?이 이와 같은 그 무엇인가를 주장했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해명되어야 할 문제이지 처음부터 결정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신론의 ?자연신학?에 반대하여 지난 2백년 전개되어온 탁월한 개신교 신학자의 투쟁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리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배제하면 안 되고 오히려 예측해야만 한다. 이 경우에 계시신학과 구별된 ?자연신학? 개념이 이러한 사상(事象)에 어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포기된다는 사실이 부각될 수도 있다. 이로써 기독교적 신론의 틀 안에 있는 이 본질적 성격이 철학적 신학의 전통에서 박탈당해야만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접어둔다면 말이다. 이 철학적 신학의 전통은 신관을 실증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필요한 신증명과 그 준거를 병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한 얼마간의 근거를 판단하기 전에 우선 자연신학이 해명되어야 하며, 또한 전통적인 교의학적 신론에서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