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판넨베르크

3. 조직신학으로서의 교의학

은바리라이프 2018. 1. 9. 19:03

3. 조직신학으로서의 교의학

'교의학'이라는 명칭의 등장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교의학이 교회 교리의 내용만을 확대시킨 게 아니라 도그마의 진리에 대해서 질문했다는 사실에 그 특징이 있다. 이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 설명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신학 훈련에서 ?교의학?이라는 명칭은 17세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멜랑히톤은 이미 1550년에 성서 증언의 교의적 내용을 역사적 자료와 구분해서 교의적으로 특징화했다(CR 14, 147f.). 그를 뒤이어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는 1610년 자신 저서 Loci theologici 제1권(Ⅰ, n. 52)에서 말씀의 내용을 dogmatica와 historica로 구분했다. theologia dogmatica라는 명칭은 요한 아틀링(Johann Atling)이 1635년에 역사 신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미 일년 전에 그는 게오르크 칼릭스트(Georg Calixt)와 더불어 윤리학과의 경계 설정을 분명히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중반 이후로 theologia dogmatica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저서들이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그에 해당되는 doctrina 개념을 사용했다. 이 개념의 특징은 곧 토마스 아퀴나스가 규정하고 있는 sacra doctrina와 아주 비슷하며, 그리고 멜랑히톤이 doctrina evangelii로서 신학 개념에 부가했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물론 어거스틴도 이런 특징들을 이미 기독교 신앙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제목으로 사용했었다. 기독교 사상에서 볼 때 이 근원은 신약성서로 소급된다. 특별히 목회서신을 보면 didaskalia가 사도적 가르침의 총괄 개념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그렇다(딛 1:9, 2:1, 딤전 1:10, 딤후 4:3).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Didache로 표현된다(예를 들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하는 요한복음 7:16). 가르치는 일이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교리의 내용은 특별히 디다케와 분리되지 않았다(막 1:27, 마 7:28 이하 참조). 물론 전반적으로 가르침의 내용이 강조되긴 했다(롬 6:17, 원형적 내용, 전형, 사도적 전승으로서의 그리스도). 교리를 하나님에 의해서 전권이 부여된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학 개념의 근원적 의미와 밀접한 상태에 있다. 이런 이해는 교리의 자리에 등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을 명료하게 하거나 또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명료하게 한다(Athenagoras leg. 10.4f.). 그런데 이와 달리 교의학 개념은 원래부터 기독교 교리의 전체와 상관된다. 그래서 도그마로서의 교리는 교의학이 감당해야할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교리의 주관적인 순간과 객관적인 순간은 도그마, 교리 공부, 교의학을 구분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 경우에 교의학은 (교리의 내용이라 할) 도그마와 연관된 학문적 훈련으로서 신학대학의 학문적 틀에, 즉 교의신학(theologia dogmatica)이라는 틀에 등장함으로써 교회의 교리 선포와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교의학은 우선 말씀이나 신조(articuli fidei)의 내용을 집약하고 연관시켜야 할 과업이 있다. 더욱이 '실증적으로' 재생한다는 의미에, 또는 ?학문적인? 논증 형식에 그런 과업이 있다.
18세기 초 이후로 기독교 교리를 집약하고 연관시키는 과업에서 ?조직신학? 개념이 확산되었다. 이 개념은 1727년 요한 프란쯔 부데우스(Joh. Franz Buddeus)에 의해서 철저하게 논의되었다. 따라서 신학적 서술이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요청을 만족시킬 때 '조직적'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a) 서술할 자료를 포괄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부데우스의 경우에 이 신학적 서술은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이다. 
b) 그러나 그 내용을 개별적으로 제공하고, 증명하고, 강화시켜야 한다(explicet, probet, atque confirmet).
이 경우에 '증명'과 '강화'는 특히 조직적 서술 형식으로 전개된다. 즉 기독교의 교리적 진술 사이에, 또한 그 이외에도 ?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 사이에 어떤 연관작용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을 증명해냄으로써 그것이 증명되고 강화된다.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조직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진리이어야 한다는 요청과 연관 선상에 있다. 이것은 서술된 것의 진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진리가 오직 그것 하나일 경우에, 그리고 반박될 수 없고 합의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참된 것으로 수용됨으로써 소위 진리에 대한 모든 요청의 기본 요소와 연루되어 있다면 말이다. 이런 한에서 신조가 조직적으로 서술되는 경우에 바로 그 서술의 진리가 관건이며, 또한 그 진리의 확증이 관건이다. 이것은 조직적 서술 형식에 부가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의 진리에 대한 질문이 조직적 서술 형식 자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사신(使信)을 선포하는 조직신학적 봉사가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즉 이것은 틀림없이 조직신학의 내용이 참되게 수행됨으로써 발생한다. 물론 기독교 교리의 진리와 맺는 관계는 복음선포와 조직신학 사이에 다르게 나타난다. 복음선포는 개별적인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참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교리적 연관을 함축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조직신학에서는 이런 연관이 교리 내용을 연구하고 서술하는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특징이 등장한 이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서술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이미 2세기 영지주의의 사상적 체계에서 이런 조직적 서술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기독교 호교론자들의 문헌이, 그리고 리옹의 이레네우스 같은 반 영지주의 교부들의 문헌이 매우 함축적인 체계학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오리게네스 같은 이는 근원(περὶ ἄρχών)에 대한 자신의 작품에서 기독교의 신론을 형식에 맞추어 조직적으로 제시했다. 그 뒤로 조직적 서술 형식은 중세기 라틴 스콜라 학자들의 경우에 신학의 학문성을 논의하는 고유한 방식이었다. 그 형식이 기독교 교리의 독자적인 전체 서술로서의 총체에서 가장 적절한 형태를 발견한 것이라면, 판단에 대한 주석의 논증도 역시 기독교 교리의 진술이 상호간에 조화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에, 또한 이성 인식의 원칙에 조화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 신학의 학문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실행된 모든 개별적 논쟁에 앞서 이런 주제에서는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단일성이 핵심이며, 또한 동시에 이성적 지식의 원리와 맺어야 할 그 관계가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의 학문성 문제는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개념에 의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이런 질문은 외관상 논박 당할 수 있는 교부들의 진술들 사이에 변증법인 중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있은 이후로 아벨라르(Abaelard)의 유명한 작품인 Sic et Non을 통해서, 그리고 방법론적으로 아벨라르에게서 영향을 받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어록집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이런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지적인 ?훈련?은 신학이 학문적이어야 한다는 요청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이 관철되기 위해 필요한 상이한 형식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개념에 의존되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한정된 반면에, 또한 오늘날에는 이미 진부해진 반면에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단일성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은, 그리고 이로써 이성의 원리에 여전히 타당한 것과의 일치에 대한 관심은 보존된다. 
신학작업에서 이성을 사용한다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입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 학문성에 대한 질문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세기 스콜라주의와 그 뒤로 구(舊)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이성 원리를 신학에 적용하는 문제에서 명백하게 제한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또한 후자가 이성을 규범적인 게 아니라 도구적으로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한 동기가 다시금 이성과 이성적 인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성을 통해서 주어졌다. 소위 엄밀한 이성 인식이 연역적으로 일반적 원리에 속하는 것이라면 기독교 교리의 진술은 그 어떤 곳에서도 그런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그 역사적 근원에 의해서 주어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토마스 아퀴나스의 S. theol. Ⅰ, 32, 1 ad 2참조). 이성과 이성적 인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신학에서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루터는 신앙을 통해서 이성을 갱신시켜야 한다는 점만을 가르친 게 아니었다. 그는 신학에서 이성이 필연적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특히 루터는 날카롭게 공식화된 신학적 명제들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논리적 귀결의 타당성과 진리의 단일성에 대해서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결론의 오류와 판단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사용될 때 신학적 주제의 특별한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인간을 전반적으로 죄인과 신자로 이등분하는 작업에서 실제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그 구체적인 요구는 중세기 신학에서보다는 루터와 초기 루터주의 교의학에서 훨씬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신학에서 이성의 기능을 판단할 때는 이성과 그 개념의 상이하고 구체적인 명확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나 동일성과 모순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학에서 그 어떤 논증도 가능하지 않다. 이런 법칙들은 특히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일치를 서술하기 위한 노력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신학 작업의 학문성은 그런 법칙들의 일반적 사용에 기인한다. 또한 이 경우에 그 구체적인 형태는 합리적 연역법의 형식보다는 오히려 관습적 논증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논증 형식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개념보다는, 오히려 주어진 현상을 묘사하기 위한 가설명제와 이론모델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 학문적 논증에 대한 오늘의 견해에 훨씬 근접해 있다. 따라서 신학이 신앙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학문적 논증의 필요성을 유보함으로써 근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학문적 논증의 이해가 여러 면에서 선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틴 스콜라주의 이후로 교의학이나 ?theologia?에서 요청된 특별한 학문성은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연구하고 서술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아울러 이렇게 서술된 내용의 진리에 대한 질문이 이런 문제와 관계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조직적 연구와 서술에서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포함되었다. 모든 참된 것을 모아들이는 결집력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었다는 말이다. 기독교 교리의 진리를 체계화하는 신학은 이제 기독교 교리의 각 부분들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외의 앎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기독교 교리의 결집력을 연구하고 서술함으로써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직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권위를 통해서, 또한 도그마의 내용에 대한 교회의 동의를 통해서 서술된 모든 조직적 확증에 앞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가 이미 선취적으로 확정하고 있는 이해와 불가피하게 긴장 관계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이해는 전통적 교의학과 입장을 같이 하며, 또한 그것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서 앞서 언급된 긴장은 교의학 내부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처럼 초기 루터주의 교의학에서 신조의 근원은 말씀 속에서 독자적으로 충분한 진리의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성은 단지 이런 전제된 진리를 해명하고 제시하는 과업에만 해당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리는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와 조직적으로 연관된다. 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내적인 결집력이 교리 문제에서 간과되면 안 된다. 이것은 확실히 조직적 서술이 결집되는 데서 증명되었는데, 이것은 우선적으로 조직적 서술에서 이 문제가 아주 명백하게 인식되는 경우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도 역시 신조의 진리는 전제된 것이었지 신학적 서술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신조는 신학의 원리로서 계시를 통해서 전달되었다(S. theol. Ⅰ, 1 a 2). 따라서 신학적 논증은 계시의 진리로부터 종결되는 형식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약간 후기의 교의학에서는 사실상 이런 시도가 드물지 않게 추구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 이것은 물론 눈에 드러날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 그가 신학 대계를 세워나가는 논증 방식은 피조된 세계와 인간의 장본인인 하나님을 사유함으로써 기독교 교리의 진술을 조직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신학 개념을 진술함으로써 추정되는 것보다는 캔터베리 안셀름의 신학적 방법에, 즉 신앙적 진리의 합리적 재건이라는 프로그램에 훨씬 근접해 있는 셈이다. 그래서 토마스의 신학적 대계는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서술이 일종의 전제로서의 진리를 수용하는 것과 긴장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배울만한 게 많은 한 예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제는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는 과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는, 비록 기독교 교리의 이론적 ?실증?에 대한 정서적이고 실천적인 확증이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보증하고 확증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하다.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사변적으로?) 재건하는 작업은 몇몇 이유들 때문에 그 진리의 질문을 확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의 진리가 이미 확실하기 때문에 이런 재건작업이 이런 질문에 별로 기여할 게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학적 반성과 재건의 과정에는 사실상 전승 자체의 진리 내용이 달려 있다. 신학적 확신의 이런 측면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전승된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곳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18세기 이후로 근대 신학에서 두드러졌다. 전승된 교리를 실증적으로 재건하는 작업에도 역시 이미 비판적 계기가 있다. 도그마와 신학사 연구는 이미 원시 기독교에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듯이 기독교 사유의 모든 발전 국면에서 신학적 확증을 전승의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변화시켰다. 비록 신학자들이 바로 그것을 단지 전승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의 진리를 가르치는 (마틴 켈러) 새로운 방식이 실제로 전통의 양식들처럼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인지라는 문제가 늘 반복해서 쟁점화 될 수 있었다.
전승된 진리를 확증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전제된 진리를 단순히 습득해서 해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전승을 진리 요청에 내맡기는 것인데, 이 두 입장을 대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 전승이 획득될 때 전적으로 상호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전망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즉 전승된 교리를 이미 전제된 진리라고 주관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고유한 인식이 진리에 도달하는 한에서만 이것을 오직 진리로서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으로 전승과 맺는 아주 분명한 비판적 관계도 역시 그 전승의 참된 의미와 내용을 임의적이며 비판적인 구성의 성과로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비판을 통해서 드러난 참된 사태를 소여된 그 관계의 복원으로 보아야만 한다. 진리는 그 본질상 주관적인 통찰과 상관없이 미리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인식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참된 사태와 조우하거나 아니면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승의 진리 요청에 대한 관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연질서의 인식에도 역시 해당된다. 사태가 앞서 주어진 게 아니라면 인식하려고 노력한 자가 그것을 놓칠 까닭이 없다. 대상이나 사태와 ?일치하는? 순간을 말이다. 이 순간은 진리 개념의 인식론적 전망에서 기본적인 요소다. 이는 곧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하는지? 혹은 않는지라는 질문에서 이미 드러난다. 또한 판단과 주장의 진리에 대한 질문에도 이에 상응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리를 인식할 경우에만 인식에서 무엇이 참된 것으로 앞서 주어졌는지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진리의 준거에 대한 질문이 제고된다. 논쟁적인 여러 입장 중에서 어떤 것이 대상이나 사태에 상응하는지, 혹은 어떤 것이 아닌지 이런 준거에서 인식될 수 있다. 판단형성의 동의와 해석의 결집력은 이러한 준거로서 타당한 효과를 담보한다. 결국은 판단의 과정에서는 진리요청을 시험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한에서 사상(事象)의 진리가 이런 과정에 달려 있다. 판단의 결과는 분명히 원칙적으로 교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실상 미래에 전개될 보다 나은 통찰를 향해서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제된 진리가 그 인식을 매개로 해서만 진리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런 사태에 대한 인식이 신학의 역사에서는 거의 고수될 수 없었다. 오늘날도 이런 사태에 대한 인식이 별로 명백하지 못하다. 주관적 진리확증에서 관건이라 할 진리의 선행성은 신학에서, 특히 신학의 자명성 확보에서 아주 중요하다. 즉 여기서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모든 인간적 생각과 판단에 선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로 여기에 중세기와 구(舊)프로테스탄트가 신학을 권위에 대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는 실질적인 사실이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행한다는 사실이 곧 신학과 인간적 법정을 동일시 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 법정은 신적 진리를 통해서 권위가 주어진 기독교 교리의 원천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는 곧 그 사실이 말씀이나 교리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서 벌어진 문제는 중세기 스콜라 신학에서 명백해졌다. 성서에 전가된 권위신앙을 고유한, 즉 하나님 자체를 향한 신앙행위의 유일한 지침(dispositio)으로 여기든지, 아니면 역으로 창조에 토대를 둔 인간과 최고선(善)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서의 권위에 대한 동의의 동기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미 둔수 스코투스도 역시 후자의 해결책을, 즉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개발된 해결책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동의는 지성적 사안이며, 따라서 아퀴나스는 이 특별한 대상으로부터 동의개념으로 생각을 발전시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성서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의 무게로 믿을만한 준거임에 틀림없다. 물론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성서를 신적으로 영감 되었다고 증거하는 교회의 권위는 거의 어거스틴(PL 42, 176)과 마찬가지로 말씀의 권위가 믿을만하다는 결정적인 근거였다. 그래서 그는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 사이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성서에 작용한 동일한 성령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말씀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의 교리에 실제적으로 늘 이런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얼마 되지 않아서 빌헬름 오캄(Wilhelm von Ockham)과 마르실리우스 폰 파두아(Marsilius von Padua)는 교회와 성서 사이의 이러한 조화를 의심스러워했다. 곧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권위 사이에 첫 갈등이 등장한 셈이다. 이런 갈등은 종교개혁에서 첨예화되었다. 서로 다른 입장으로 갈등하는 양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학설을 지속적으로 권위 있는 법정으로 소급시키려고 했다. 즉 구(舊)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이 법정이 자기 내부적으로 명백한 성서였는데, 이 성서는 곧 하나님의 계시를 지시하는 원전이었다. 이와 달리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는 그것이 곧 교회를 통해서 허용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번역된 성서였다. 양측은 뒤이어서 상대방의 입장이 그렇게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증해보려고 애를 썼다. 즉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교회 교리가 성서에서 비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곧 교회 교리가 성서의 증거로부터 빗겨나갔다는 뜻이다. 반면에 가톨릭 신학은 교의상 그 어떤 보충 없이는 통전시킬 수 없는 성서 진술의 다성음(多聲音)을 강조했으며, 따라서 권위를 갖고 결정하고 해석할 수 있는 법정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계몽주의의 전통 비판은 양측에서 제기된 종파적 입장의 비판적 요소를 결합시켰다. 이 비판은 교회의 교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비판을 지속시켰으며, 더 나아가서 이 비판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의해서 과도하게 제기된 교회 교리의 전통적 요소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확대시켰다. 또한 계몽주의는 구프로테스탄트의 성서론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비판을 강화시켰는데, 그것은 곧 성서론의 단일성에 대한 명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구프로테스탄트의 성서원리를 다음과 같이 세 방식을 통해서 파괴시켰다. 하나는 성서의 진술이 담고 있는 여러 모순과 대립을 증명하는 것이며, 둘째는 저자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비판하는 것이고, 셋째는 여러 성서 해석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서와 교리에 대한 계몽주의의 이런 비판으로 인해서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교리를 서술할 때 성서나 교리를 불편 부당하게 신적인 계시의 법정이라는 토대에 놓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흡사 중세기나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그렇게 한 것과 같이, 그리고 저들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그게 가능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新)프로테스탄트 신학이나 가톨릭 신학은 한결같이 반(反)근대주의 시대에 기독교 교리 문제를 다룰 때 진리가 확실하게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반적으로 집착해 있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결정은 이 시기에 완전히 교회의 행정당국에 집중되어 있었던 반면에 신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신앙에 옮겨져 있었다. 이런 변화 과정은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소위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의 발전에서 그 진면목이 잘 드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