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판넨베르크

4.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 문제

은바리라이프 2018. 1. 9. 19:04

4.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 문제

이 주제를 즉시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이 주제의 서술에서 그 주제에 대한 몇몇 관점들을, 그리고 이 서술에서 따라오는 조치들을 미리 말해두는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의 서술도 역시 이런 기본적 착상으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페트루스 롬마르두스(Petrus Lombardus)의 간단한 작품의 머리말이나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첫 Queastio(질문), 또는 멜랑히톤 자신의 저서 Loci communes(1521)과 Loci theologici(1559)에 쓴 서론이 이에 해당된다. 16세기 말 이후로 구(舊)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명확하게 서술하기 위한 서론이, 즉 Praecognita 혹은 Prolegomena가 늘 포괄적으로, 또한 주제 중심에서 점차로 가지를 쳐 나갔다. 멜랑히톤은 1521년 그리스도의 인식과 구원 행위의 인식이 의존되어 있는 topoi(loci, 장소)에 집중했었는데(e quibus locis solis Christi cognitio pendet: CR 21,85), 그것에 소급된 신론은 1535년 이후로 다시 기독교 교리를 제시하는 앞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에 야콥 헤어브란트(Jacob Heerbrand)는 1573년 자신의 신학 개요를 principium theologiae로서의 말씀에 대한 한 장(章)으로 시작했다. 물론 헤어브란트와 요한 게르하르트의 경우에도 1610년 말씀에 대한 교리를 앞에 두는 것이 결코 서론적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 교리의 전체 서술의 착점으로 이해되었다. 이 제시는 전적으로 성서의 하나님 계시를 요약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게르하르트는 1625년 로키(Loci)에 덧붙인 프레미움(Proemium)에서 신학개념에 대한 선이해가 성서론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그 뒤로는 성서론이 이런 서론의 신학개념에 구성적이라는 의미로 인해서 병렬의 자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서술은 이제 다시금 고대 전통에 걸맞게 신론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이미 재판(再版)된 멜랑히톤의 저서 로키에서 볼 수 있듯이 명백히 기독교 교리 자체의 실상에 토대를 둔 신론의 우선권이 루터의 영향으로 인해서, 즉 하나님의 본질을 추정하는 사변에 대한 신학 개념을 통해서 해체하는 작업이, 그리고 인간을 구원받은 죄인으로 생각하는 작업이 놓여 있었다. 이런 경향은 다음의 사실과 연관된다. 참된 종교의 원천인 성서 말씀이 논란 가운데 빠져들기 전 1655년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이후로 종교 개념이 신학의 일반적 대상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과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의학에 대한 초기 루터교적 프로레고메나가 다양한 주제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성서적 교리의 요약이라 할 신조에 대한 학설이, 또한 신학에서 이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여전히 성서론에 첨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의학에 대한 구프로테스탄트의 프로레고메나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서, 다음과 같은 주제를 포괄하게 되었다. 
1. 신학개념
2. 신학의 보편적 객관으로서의 기독교
3. 신학 원리로서의 성서
4. 신조
5. 이성 사용
성서를 신학의 원리로 간주하는 학설은 이로 인해 경계 설정된 틀에서 가장 넒은 공간을 확보한다. 이 학설은 교의학에서 구프로테스탄트의 프로레고메나에 담지된 고유한 핵심 부분이 되었다. 신학 과업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토대를 놓기 위해서 구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은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신학과 반대로 권위에 대한 이해와 말씀의 표준적인 의미를 신학에 적용시켜 나가야만 했다. 
중세기에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분리가 구프로테스탄트 성서론의 배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사태의 기점은 성서의 문자적-역사적 해석의 수위권 확보였다. 이를 통해서 이제 교회 행정 당국의 요청에 맞서 바른 성서 해석이 독립적인 법정이 되었다. 또한 이것은 종교개혁이 성서를 이해하는 착상이 되었다. 이것은 곧 다른 것들에 비해 우월한 최고의 신학적 인식원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표준적인 인식 원리로 간주되었다(Luther WA 18,653ff. 참조). 이런 주장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비판은, 특히 로베르트 벨라르민(Robert Bellarmin)을 통한 비판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으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를 특징적(affectiones) 교수 항목으로 확장시키도록 했는데, 이것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특징화하는 것이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토대가 잡힌 성서의 권위는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고대의 교회 교육에까지 소급한다. 성서의 충분성과 완전성, 또한 성서의 명료성과 명백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타당성을 나타내는 그 이외의 특징들은 종교개혁의 성서원리를 향한 로마 가톨릭의 비판을 막아내기 위해서 구프로테스탄트 성서론이 전반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충분성과 완전성에 대한 교리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해서 로마 가톨릭의 전통 원리에 반대했다. 이 전통 원리는 1546년 트렌트 공의회의 제4차 회의에서 형성된 것이다(DS 1501). 이 공의회에 따르면 생명을 주는 진리(salutaris veritas)는 성서와 또한 기록되지 않은 전승에 포함되어 있다(in libris scriptis et sine scripto traditionibus). 이는 곧 뒤이어 양측의 입장에서 성서 진술의 내용적 보충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된 공식화를 말하며, 또한 도그마에 대한 교회의 정의를 합법화하는 것인데, 이 도그마에 대한 교회의 정의는 나중에 성서의 증언을 능가하게 되었다.
1957년에 이르러서야 공의회의 공식화에 대한 이런 해석은 후베르트 예딘(Hubert Jedin)과 특히 요제프 루페르트 가이젤만(Josef Rupert Geiselmann)에 의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이 공의회 문서에서 트렌트 공의회의 공식화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최소한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를 밝혀냈다. 즉 바로 그 내용이 성서 증언의 형태에서나 또는 교회에 구전된 전승 형태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공의회에 제안되었으나 기각된 공식화(partim … partim) 사이에서 성서가 구원 진리로서 내용적인 면에서 충분하다는 사실은 공의회 문서에서 볼 때 결코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어서 성서와 전통의 단일성을 강조했으며(Dei Verbum 9), 또한 성서를 교회의 교리 선포와 기독교적 경건의 원천이며 기준이라고 했다. Omnis ergo praedicatio ecclesiastica sicut ipsa religio christiana Sacra Scriptura nutriatur et regatur oportet (21). 따라서 구(舊)프로테스탄트에 확고했던 그 대립은 오늘날 그 강도가 약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달리 성서 해석에 대한 해석학적 질문에서는 종파적 차이가 여전히 완전하게 극복되지는 못했다.
성서 해석 문제에 놓여 있는 종파적 대립은 종교개혁의 교리에 따라서 성서의 본질적인 내용이 자명하게 인식되었다는 점에, 또한 성서가 그 해석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 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는 그 다층다기성과 그 진술의 부분적인 비명료성 때문에 그것을 해석해줄 수 있는 권위적 법정을 필요로 한다. 이 해석의 법정은 성서적 증언의 다음성(多音聲)으로 인해서 구속력 있는 계시의 진리를 부각시킨다. 성서의 본질적인 내용에 관해서 그 명료성에 대한 명제는 이미 1525년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erdam)를 반대하는 루터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었다(WA 18,606ff.). 이 명제는 벨라르민이나 이 이외의 다른 가톨릭 논쟁 신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성서의 명료성 학설을 주장한 초기 루터교 교의학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 학설에서 주장된 성서의 명료성은 물론 성서의 본질적인 내용과만 관계된다. 즉 삼위일체, 성육신,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기독교적 도그마나 신조에 관계된다는 말이다(Luther WA 18,606,26-28). 이 경우에는 초기 루터교 교의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evidentia rerum(세계의 자명성)이 아니라 오직 claritas verborum(말씀의 명확성)이 핵심이다. 구프로테스탄트 학설에 따르면 논리적이며 수사적인 법칙 및 고대언어가 풍부하게 인식되는 성서의 내용은 개개 진술의 목표(Skopus)와 맥락과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숙독하고 또한 본문을 비교함으로써 그런 한도 내에서 성서적 진술 자체에서 취해진 것이다. 모든 성서의 각 대목에서만 타당한 문자적 의미는 성서 자체에서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상이한 전통의 그 어떤 것에서 생각되면 안 된다고 본 것이었다. 이 문자적 의미는 exactissima verborum et sensuum cohaerentia(말씀의 정확성과 결합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를 해석할 때 성서의 명료성이라는 명제와 문자 의미의 수위권이 결합함으로써 성서 진술의 의미를 확증할 때 상이한 기능이 이런 규칙적인 성서 해석에 해당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종파적 대립에서 불거지는 핵심 질문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런 성서 해석의 상이한 기능이 교회 행정당국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성서를 교회에서 정한 의미와 달리 자기 취향에 따라 왜곡시키는 자들을(sacram Scripturam ad suos sensus contorquens) 파문했다(DS 1507). 교회 당국과의 관계에서 학문적 성서해석의 의미에 대한 논쟁적 질문은 이런 공식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미 마틴 켐니츠(Martin Chemnitz)는 공의회의 진술에서 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러한 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봉합되었다. 제2차 공의회는 트렌트 공의회에 비해서 Dei Verbum(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 항목에서 성서 해석의 해석학적 법칙에 대해, 그리고 성서해석의 신학적 학문성 기여라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성서해석은 성서 기자들에 의해서 의도된 의미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언급되었다(DV 12). 이 경우에 문학적 유형에 주목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역사적 환경에 대해서도 주목해야한다. 성서 해석에 관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이런 교회의 판단은 우선 학문적 주석을 통해서 사전에 준비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DV 12에 기록된 진술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면, 즉 교회 당국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위에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돕는다는 확신(DV 10)과 또한 교회가 성서 안에서 그 신앙의 최고 규범이라는 설명을(supremam fidei suae regulam, DV 21) 결합한 것으로 본다면 이 공의회 진술에는 당연히 교회 당국의 성서 해석이 성서의 고유한 의미와, 그리고 그 어떤 해석의 법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원래 성서에 있는 그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포괄적으로 전제된다. 이 의미는 모범적으로 주석이 이루어져야할 대상을 말한다. 이로써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서의 명료성에 대한 종교개혁의 학설에 접근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반면에 성서와 그 해석의 전통 비판적 기능에 대한 진술은 여전히 부족하다.
성서의 충분성과 명료성에 대한 종교개혁적 논쟁은 신적인 영감에 기인하고 있는 권위에 대한 학설을 전제한다. 이것은 물론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성서의 충분성과 명료성 학설에 대해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인데,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선포와 기독교 초기의 선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서만을 주목하는 고찰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만약 성서가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는 계시 문서로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면 이 문서가 이런 목표를 이루는 데 충분하다는 전제는 명백하다.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된 그 전제에 근거해서, 곧 성서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찬가지로 이 내용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런 성서의 내용은 일관성이 있으며 모순이 없다. 말씀의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전제 없이는 말씀이 갖는 의미의 명료성이 설명될 수 없다. 
종교개혁 신학에서 성서의 권위는 그것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토대하고 있다. 이 경우에 초기 루터 신학은 구전 형태와 기록 형태로서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반면에 칼빈은 신론(coelestis doctrina)과 인간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성서 기록과의 관계를 날카롭게 구분했다(Inst. Ⅰ,6,3). 그렇지만 16세기 말 이후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표상의 핵심이 점차적으로 성서의 기록 행위에 담지된 영감으로 이동했다. 17세기 초에도 여전히 요한 게르하르트는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사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받은 말씀을 받아쓰게 했다는 의미에서 성서 영감설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게르하르트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론과 대립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치니아주의자들과 대립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본문을 동일시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미 아만두스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610년 졸)는 하나님을 성서의 명실상부한 저자(auctor)라고 주장했다. 그 하나님은 성서의 무오류성을 보장하는 분이다 그렇지만 엄격한 영감론은 루터교의 입장에서 우선 17세기 중반 경에 아브라함 칼로프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칼로프는 영감론에 대한 사유를 성서의 원문에 확대시키지 않고 그 내용에 한정된 것으로 보려고 한 게오르크 칼릭스트의 ?혼합주의적인? 견해와 논쟁을 벌였다. 루터교 교의학자들의 대다수가 극단적인 축자영감설 표상으로 기울어진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하려면 다음의 사태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성서 전체가, 또는 개체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인간의 모든 판단 행위가 개입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적인 자리에 설 수 없게 되자, 곧 종교개혁적 성서원리가 전체적으로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요한 안드레아스 크벤슈테트는 이런 염려를 분명하게 언급했다. 즉 성서에서 무언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유래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신적인 권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단 하나의 절이라도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사탄은 곧 이것을 전체 장에, 전체 책에, 결국에는 전체 성서에 적용시키게 될 것이며, 이로써 성서의 모든 권위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가장 철저한 축자영감설로 발전된 이러한 성서영감론은 성서가 모든 신학적 진술이 산출되는 신학의 원리라는 루터의 견해를 철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성서가 그 내용과 신적인 진리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판단 보다 앞서 주어진 게 틀림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감론의 객관주의를 피할 수 없었다. 이는 곧 성서의 구속력 있는 내용을 성령에 견인된 교회 당국의 과업으로 설명한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다. 루터 신학은 가톨릭의 적대자를 통해서, 그리고 전통원리와 타협함으로써 이러한 극단적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성서원리로부터 파생된 귀결은 이제 완전히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들었다.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과 역사적인 해석이 우선한다는 사상을 통해서 이제 신학을 이러한 해석 과업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성서의 내용이나 그 진리에 관한 그 결과를 선취하는 일이 없이 말이다. 소치니아주의자들과 아르메니아주의자들, 그리고 후기의 계몽주의 신학자들이 이런 길을 갔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기독교 교리의 내용이나 진리가 모든 인간적 해석에 앞서서 주어졌으며, 또한 선취적으로 보증되었다는 의미에서 성서는 이제 더 이상 신학의 원리가 아니었다. 
구프로테스탄트 성서 영감론의 객관주의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주관적으로 확증하려는 직관의 근원적인 형태에 부합한다. 이 경우에 성서에 적용되는, 해석자의 주관성에서 작용하는, 그리고 성서를 증명해주는 법정이 관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서 소여된 성서의 내용이 담지하고 있는 자기 증명이, 또한 성서가 인간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 성서영감론의 원조라 할 칼빈은 이미 말씀과 성령의 공속을 강조함으로써 이와 비슷하게 진술했다. 칼빈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선포를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했다고(고후 3:8) 보았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성령은 말씀의 진리에 분명하게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존엄과 영광이 용인되는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현시킨다. 결국 모든 인간적 판단에 앞서 소여된 것으로서 성서의 신적인 권위에 대한 학설이 불분명해지자 곧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internum)라는 학설이 외면적인 말씀에 보충적으로 등장해야할 주관적인 경험과 확실성 원리의 의미를 확보했다. 이 원리는 성서의 진리 요청과 진리 내용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성서의 내적 증언이라는 학설은 모든 인간적 판단에 앞서서 하나님의 진리가 주어졌다는 종교개혁 명제로부터 주관적 경험을 신앙과 기독교 교리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신프로테스탄트의 확신으로 비약되는 축점이 되었다. 이런 발전의 동기는 성서 해석과 성서 본문 비평의 문제로부터 발생했다. 
정통적 교의학자들이 상이한 성서 기자들의 언어와 양식의 차이점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특성들을 성령이 각기 성서 기자들의 언어와 표현방식에 적응한(Akkommodation)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적응 사상은 훨씬 확대된 의미에서, 즉 성서 기자들의 제한적인 표상 방식에 대한 적응으로서 사용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요한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태양과 달이 정지했다는 구절(수 10:12f.)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사상을 이용했다. 크리스토프 비티히(Christoph Wittig)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1654년 이렇게 확대된 적응 사상을 성서 영감론과 새로운 자연과학적 인식과의 조화를 위해서 포괄적으로 그 타당성을 모색했다. 비티히가 말하기를 성서 진술의 ?목표점?(Skopus)은 인간의 구원이지 자연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성서 권위의 현재적 효력은 특별히 신학적인 영역에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은 모든 성서 진술의 무오적 진리에 대한 정통주의적 확증과 일치될 수는 없었다. 또한 지엽적인 문제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제외시킨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치될 수 없었다. 그래서 네델란드 위트레히트 신학자인 레데커(Melchior Leydeker)는 1677년 적응 사상이 이렇게 확대되는 것을 비판했다. 비티히와 다른 학자들의 이 명제는 하나님이 오류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오류를 믿으라고 요청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성서의 증언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성서의 신뢰성은 레데커가 분명하게 내다보았듯이 이런 근거에서 신조를 제한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러한 전제로 인해서 파손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 이론의 승리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성서의 신적인 진리를 신학의 목표라기 보다는 전제로서 다루는 정통주의 입장에 내재한 취약성이 노출되었다. 영감론이라는 의미에서 전제로서의 이 취약성은 기독교 교리의 진리 요청에서 그 통합을 이루어내기 보다는 모든 새로운 진리 인식과 대립적인 관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적응 사상은 영감론을 직접 반대하는 게 아니라, 성서 기자들의 직관에 놓여있는 역사적 조건과 상대성을 통찰해냄으로써 그 영감론의 내면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로써 결국 말씀 가운데서 대립과 모순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리차드 시몬이 1679년에 구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가한 이후로 텍스트 및 문학비평이 발전되었다. 그렇지만 성서 권위에 대한 구프로테스탄트의 학설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적응 사상이 보다 효과적인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변화된 물리적, 지질학적, 역사적 인식이 (특별히 새로운 역사적 연대기도 역시 이에 포함된다) 그 적응 사상을 통해서 성서적 진술로 하여금 이 시대의 변화된 세계상 안에서 자리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요한 잘로모 제믈러가 언급한 것처럼 성서의 이중 정경은 결코 더 이상 중요한 교리가 되지 못했다. 전체, 즉 totum homogenum(동질의 전체)가 아니라 오직 totum historicum(역사적인 전체)였다는 말이다. 1771-1775년 사이에 정경사(史)에 대한 제믈러의 연구는 이미 스피노자에 의해서 제기된 ?말씀의 역사?에 대한 요청을 해석의 토대로 삼은 것이었다. 이로써 성서 말씀은 전체적으로 현재와의 역사적 간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간격은 도대체 무엇이 성서 말씀을 현재와 연결시키며 진리의 담지자임을 여전히 요구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진리에 대한 질문은 해석학의 과업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고 제시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에 대한 질문이 더 이상 전제로서가 아니라 이러한 연구와 서술의 목표로 다루어짐으로써 답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개신교 신학은 성서 권위의 객관적 구속력을 해명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신학적 연구와 서술 이전에 계시 진리의 선(先)소여성을 고수했다. 물론 계시 진리의 선소여성은 이제 더 이상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성서의 신적인 권위로 사용될 수 없었으며, 또한 이미 중세기 신학과 후기에 특별히 소치니아주의자들과 아르미니아주의자들이 성서의 신뢰성에 토대를 놓기 위해 사용했던 객관적 준거로 사용될 수 없었다. 제믈러가 비록 인간의 역사적 형식에 담겨있는 그 개체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역사적 통찰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내용에 관해서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고수했다면 그는 이런 내용을 구별하고 신뢰하게 하는 작업에서 단지 성령의 증거라는 과거의 학설만을 증거로 삼았을 것이다. 이미 언급된 대로 여기서 이 학설의 기능이 변화되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서 주관적 경험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실성의 당연한 토대가 되었다. 성서의 신적인 권위는 기독교인이 성서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경험하는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교의학적 프로레고메나의 발전에서, 특히 17세기 말 이후로 시작된 두 가지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변화는 그 뒤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자는 독일 루터교 신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이 루터교 신학은 17세기가 시작되면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버렸으며, 또한 네델란드에서는 데카르트주의를 통해서, 그리고 영국에서는 이신론 논쟁을 통해서 출현했다. 그래서 이 루터교 신학은 오랫동안 정통주의적 교의학을 고수했으며, 따라서 서유럽에서 발생했던 것보다 훨씬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문제를 새롭게 야기했다. 
이러한 변화의 첫째 문제는 신학자들이 신학 개념에서 신학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데에 있었다. 아브라함 칼로프는 이미 1652년에 자신의 Isagoges ad SS Theologiam libri duo 두번째 책에서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다루었다. 요한 안드레아스 크벤슈테트는 자신의 Theologia didactico polemica sive Systema theologicum 첫 장의 37명제에서 신학자들을 신학의 주체로 다루는 것과 신학개념을 연결시켰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제공한 신학적 인식의 태도는 개인적으로 신실하지 않은, 또한 중생하지 못한 이들이 소유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문자적으로 완전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그들도 역시 신학자들이다. 크벤슈테트는 신학을 여전히 그 신학의 대상으로부터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진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비드 홀라쯔(1707)에 이르기까지 후기 루터교 교의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그를 추종했다. 물론 홀라쯔는 경건주의적 주관주의에 맞서 이런 입장을 수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주의는 신학자들의 신앙을 신학적 인식과 학설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십년 후에(1718) 이런 논쟁은 요한 게오르크 노이만에 의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첨예화되었다. 동시에 뢰셔(Valentin E. Loescher)는 경건주의와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 논쟁은 분명히 주체 문제를 신학 개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계시의 진리를 파손시키려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1724년 에 프란쯔 부데우스는 경건주의적 견해를 정통주의 교의학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신학자의 개인적인 신앙을 신학개념의 일반적 조건으로 설명했다.부데우스도 역시 신학의 과업을 성서적 가르침의 개괄적 재생산에 두지 않고 신학자의 경건성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과 확실하게 거리를 두었다. 신학의 과업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철저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기 전에 우선 구프로테스탄티즘에서 자리를 잡은 신학 이해의 두 번째 변화가 철저하게 작동되었는데, 이것은 곧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에서 떨어져 나갔던 것을 말한다. 
이 두 번째 변화는 종교 개념이 점증하는 말씀 외부의 기준에 따라서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의미가 획득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을 같은 것으로 보았던 과거의 생각이 해체되면 될 수록 앞으로의 변화는 더욱 확실해졌다. 칼로프와 크벤슈테트가 종교 개념을 가리켜 신학적 대상에 대한 보편적 서술이라고 정의한 다음에 이 종교 개념은 요한 무제우스(Johamm Musäus, 1679) 이래로 religio naturalis(자연종교)와 religio revelata(계시종교)이라는 아종(亞種)을 거느린 대(大)개념이 되었다. 그 뒤로 자연적 하나님 인식과 계시된 하나님 인식의 관계는 종교개념의 토대에서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매튜 틴달(Matthew Tindal, 1730)의 견해가 등장할 때까지 이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는 (적응 사상의 도움으로 초자연적 내용이 훨씬 제거된) 복음의 계시가 자연종교의 정화된 재생산이라고 보았다. 18세기의 루터 신학은 이와 달랐다. 루터 신학에서는 대체적으로 자연종교가 계시를 통해 반드시 보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실했다. 따라서 부데우스는 자연종교의 한계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종교는 하나님의 현존과 그의 명령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인간이 자기의 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에 빠져든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수단을 모른다.반세기가 흐른 다음에 요한 잘로모 제믈러는 틴달을 회상하며 이렇게 진술했다. 틴달이 ?애초부터 자연 종교를 이러한 완전의 차원에서 생각했다면 무엇이 계시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지, 또한 무엇이 중요한 부가물을 판단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는 필요한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구원이 그런 완전의 차원에서 거론되는 자연 종교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종교는 증명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곳에서 ?시작은 완전과 다른 것?이다.
부데우스도 역시 종교개념을 완전히 교의학의 시작으로 본다. 종교 개념이 신학개념과 연결되어 있으며, 더욱이 신학개념 앞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신학자는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을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종교의 선생으로 이해된다(§48). 왜냐하면 이런 기능에서만 신학자와 일반 신자들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와 신학에 대한 제믈러 사상의 결정적인 취약성이 노출된 셈이다. 제믈러의 경우에 ?아카데미? 신학으로서의 공적이고 기구적인 형태에서 신학은 교회에 의해 ?인준 받은 선생이 준비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분명한 종파 교회에서 준비된다. 따라서 이런 공적인 신학의 과업은 단순히 하나님 인식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카데미 신학이 견인해온 교회의 신조나 기본 개조(箇條)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개조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한 종파 교회에서만 특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학의 종파적 차이에 대해서 제믈러는 크리스토프 마태우스 파프(1719)에 의해서 발전된 ?교육법?의 다원(多元) 사상을 같은 종교의 토대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교회의 기본 개조와 ?교의(敎義)?가 기독교 신앙의 공통되는 기본 개조와 구별되고, 또한 성서의 가르침과 구별되기 때문에 제믈러가 기독교 신앙의 일반성과 대립적인 의미에서 ?신학을 선생과 학자들에게 속했다?고 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교회의 교의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이렇게 공식화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야만 하는가? ?교육법?의 다원에 대한 단순한 반성은 대립적인 교육법에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과 그 진리성이 핵심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논쟁을 조정할 수 없다. 신학과 종교에 대한 제믈러의 입장은 구체적인 교회 학설의 교의를 서술하는 신학작업에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이렇게 서술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칼 고트리프 브레트슈나이더는 1814년에 출판된 ?교의학?에서 교의학의 과업이 종파적 교회의 공적인 ?종교론?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책의 프로레고메나는 분명히 종교개념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것과 연관해서 신학개념을 문제삼았다. 즉 공적인 종교론의 원천은 성서가 아니라 각 종파의 신앙고백 문서라는 것이다. 브레트슈나이더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성서는 ?교회 교의학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원리이다.? 교의를 언급할 때는 소위 비판적 요소가 개입되어야만 한다. 이 요소는 교의를 신앙고백적 문서의 요청에 따라서 성서에 근거해서 검증하며, 더 나아가 그 교의의 내적인 결집력과 이성적 진리와 맺는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브레트슈나이더는 교회의 교의 체계를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시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의학적 비판, 역사적 비판, 철학적 비판은 제믈러와 달리 ?교회의 교의학적 체계가 근거와 진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시험에서 교의학이 전반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교의의 개별성과 기독교 신앙의 일반성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한 제믈러의 시도는 다시 지양되었다. 그러나 교의의 진리를 판단하는 준거는 명백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성서 권위가 이성을 통해서 시험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 시험은 성서와 그 저자가 신뢰할만한지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 원리에 제한된다. 이 질문이 이미 소치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아주의자들에 의해서 논란을 빚었던 것과 같다. 또한 이 질문이 구프로테스탄트 교의학에 의해서 fides humana(사람의 신앙)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성서의 신적인 권위를 증거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도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개념의 방향을 주관적 경험의 준거와 연결시킴으로써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신앙론은 종교개념과 경건성을 교의학적인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독교는 일반적 종교 주제를 특별하게 각인시키는 것으로 서술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계속해서 제믈러에게 소급되는 관찰방법에 동의했다. 즉 제믈러는 교의학의 대상이 ?기독교의 교회 공동체가 그 시대에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 학설?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제믈러와는 달리 공적인 신학과 사적인 신학을 구별했으며, 또한 그는 브레트슈나이더 같은 이들처럼 교회 교의를 서술하는 경우에 성서에 대한 시험을, 또한 이성의 척도에 대한 시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함으로써 양자를 결합시키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의 교리를 ?기독교의 경건한 마음?이 진술 형식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공적인 신학과 사적인 신학을 연계시켰다. 그래서 교의학은 신학자의 종교적 주관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바로 여기서 기독교 교의의 근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교의와 교의학을 ?경건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파악했다는 것을 보면 쉴라이에르마허가 신앙적 태도와 신학적 인식에 대한 정통주의의 구별을 theologia irregenitorum(오류의 신학)의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사실은 이해할만하다. 이 가능성은 불신앙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경건한 주관성과 대립해서 교의학의 대상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쉴라이에르마허가 교의학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정통주의와 비정통주의를 연결시켜보도록 했다는 사실도 역시 분명하다. 정통주의와 비정통주의의 이런 연결은 교회의 신앙적 의식이 개인적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교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여전히 살아있는 발전 과정에 있다는 관점에서도 역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로써 공적인 신학과 사적인 신학에 대한 제믈러의 이원론은 사실상 지양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브레트슈나이더에게서 논리적으로,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검증 받아야 했던 교회 교리의 진리에 대한 질문은 다시금 교의학적 서술이 신앙 의식에서 전제된다는 사실이 되었다. 비록 쉴라이에르마허가 교의를 아주 엄격하게 검열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방법론적 토대를 진리론적 관점에서 모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신앙 내용의 ?독특한?, 그러나 편향된 공식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증거로 삼았다. 이 교의가 ?신조문서의 문자보다 개신교회의 정신에 훨씬 잘 어울려서? 이런 공식화가 여기서 진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에 대한 준거는 성서의 문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말씀에 적합한 교의학에서는 ?모두에게 잘 알려진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이 성서에서 단지 지역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희생되거나, 또는 편향된 성서 해석에 희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교의학적 서술의 준거는 교회론의 해석이라기 보다는 단지 신앙 의식일 뿐이다. 이런 전제에서 진리에 대한 질문은 이미 예단되어 있는 것이며, 더구나 구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의 영감론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런 방식에서 결정된 문제다.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신앙적 일치 의식과 연결된 주관적 신앙의식은 성서원리라는 자리에 등장한다. 이 신앙의식은 개인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주관적 신앙이 교의학의 토대라는 점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규정은 경건주의적 신앙 주관주의를, 또한 교회 일치와의 관계와 그 학습 전통과의 관계를, 그리고 전승의 비판적 경향 원리로서의 개인적 관점과의 관계를 하나로 묶어냈다. 그래서 그는 신학으로 하여금 전승된 교리와 마찬가지로 성서 증언의 진리에 대한 비판적 질문과는 달리 자명한 확실성의 토대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은 듯이 보였다. 여기서 이제 교의학을 신앙의식의 표현이며 서술이라고 보았던 쉴라이에르마허의 생각이 19-20세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생각은 성서원리에 의해 토대가 잡힌 구프로테스탄트 신학과 분명하게 단절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중재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각성신학은, 특별히 율리우스 뮬러(Julius Müller) 같은 이들, 그리고 그 후세대인 그라이프스발더(Greifswalder)와 할레의 성서신학자인 마틴 캘러(Martin Kähler)는 성서원리와 성서권위를 다시 밀착시켜서 상호적으로 연계시켜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주관적 신앙경험은 여전히 그 기초로 남아 있었다 에어랑겐 학파의 루터 신학도 역시 말씀과 구원사 안에서 교리와 그 기초를 쉴라이에르마허가 시도했던 것보다 훨씬 밀접하게 상호적으로 연결시켜 보려고 했는데, 이 경우에 신앙 경험은 늘 그 토대가 되었다. 이작 아우구스트 도르너에 따르면 ?기독교 경험이나 신앙?은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교의학의 ?인식 원천?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를 신앙론(Pisteologie)에 근거해서 새롭게 조형했다. 여기서 그는 신앙과 연결되는, 그리고 신앙 개념에 타당한 역사적 중재를 모색했다. 그래서 결국 회심 경험에서 고유한 종교적 확실성의 토대를 발견했다. 이런 확실성에서 이제 ?학문적 확실성이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다시 한번 구별된다는 것이다.
신학을, 특히 교의학의 토대를 잠정적인 신앙의 확실성이나 신앙 경험에서 찾는 일은 각성적 경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한 19세기의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 누구보다도 리츨의 경우가 그렇다. 리츨은 ?칭의와 사죄? 제3권에서 자신의 교의학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발전시켰다. 예수의 역사적 활동에 해당되는 ?전체 넓이?는 ?예수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에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의 모든 구성 요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거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며 판단되어야만 한다. 리츨은 여기서 명시적으로 theologia regenitorum(갱신의 신학)에 대한 요청이라는 점에서 슈페너의 입장을 따른다고 했다. 이러한 착상에 근거해서 1892년 빌헬름 헤어만(Wilhelm Herrmann)에 의해서 제기된 질문은, 즉 신앙의 토대인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은 철저하게 유지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앙은 이미 논증의 전제라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문제는 헤어만의 제자인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에게서 변증법 신학으로 전환되었다. 불트만은 1929년에 기독교 교리는 ?나의 함축적인 현존 이해를 명백하게 한다?고 진술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의미에서 1953년 불트만의 신약성서 신학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신학은 ?신앙에 포함된 인식의 전개?이어야만 한다. 칼 바르트는 신학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1927년에 분명하게 주장했다. 그는 쉴라이에르마허 이후로 교의학의 토대를 신앙에 설정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의 자기 증명에 대한 교의학적 자리 매김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이에 상응해서 ?인간의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확실성으로부터 이해해야지 그 반대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말씀의 현실성을 고려하는 용기?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이러한 용기에는 논리적으로 ?정식적인 petitio principii(선결 문제 요구의 허위)의 형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용기?는 ?하나님 말씀의 현실성을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한 출발점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르트 자신도 역시 다시 한 번 더 교의학의 토대를 사실상(de facto) 신앙에 놓은 것이 아닐까? 비록 ?경험?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용기?로서의 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1932년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교의학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신앙 행위다.? 그래서 바르트가 신학의 토대를 신앙에 놓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일까? 이런 토대는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의 단초로서, 바르트 자신이 이미 1927년에 비판했던 것인데 말이다. 교의학이 ?신앙 행위?라는 견해의 토대는 1932년에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교의학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놓였다. 이로써 1927년부터 양식화된 그 문제는 분명히 다른 길로 접어든 게 틀림없다. 이런 양식에 따르면 교의학은 모험의 행위를, 즉 petitio principii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앙 행위와 신앙적 전제의 자리매김에 대한 불가피한 질문 안에 늘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바르트에 의하면 신앙적 전제는 교의학의 화두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중의 가정을 고수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현실성은 한편으로 신앙을 전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의학에서도 원래부터 확고한 요소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신앙행위의 개념을 통해서만 견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에 의해서 의도된 하나님과 그 말씀의 우선권이 신앙행위 앞에서 더 이상 명백한 주제로 부각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불가피하다. 바르트와 더불어서 신앙행위와 신앙경험보다는 하나님이 우선한다는 생각을 확증하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현실성이 교의학에서 원래부터 전제된다는 가정은 포기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바르트는 1927년에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신앙을 교의학의 토대로 삼는 신(新)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했다. ? … 교의학의 의미와 가능성과 그 대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토대가 잡히고 유지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토대가 잡히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아주 대립적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 관점이다. 이런 관계를 전도시키는 경우에 전체 방향에서,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게 된다.? 바르트의 이 언급은 발렌틴 뢰셔(Valentin Loescher)가 경건주의를 비판한 것에 대한 맞장구처럼 들린다. 발렌틴은 경건주의가 신학의 가능성을 신앙하는 주체와 연결시킨 것에 대해서 비판한 바 있다. 신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이러한 비판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바르트는 이 신프로테스탄트의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언급을 인간 중심적인 개념으로 돌려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바르트 이전에 이미 에리히 쉐더(Erich Schäder)가 그렇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진단의 정당성은 분명히 구(舊)프테스탄트의 교의학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었다. 성서 영감설에 대한 구프로테스탄트의 견해는 재생산될 수 없다. 바르트도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 말씀이 우위에 있다는 구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선포와 성서와 계시 안에 있는 말씀의 세 형태론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초점은 모험과 용기, 그리고 petitio principii에 대한 반성으로서 여전히 신앙주관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었다. 바르트는 원래 이런 주관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이런 문제는 1932년에 교회가 교의학의 주체라는 증거를 통해서 해명되기보다는 오히려 은폐되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우선 교회 개념이 교의학의 입구에서 발전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이런 것과 아무 상관없는 종교 일치 현상만이 관건으로 부각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신프로테스탄트가 교의학에 토대를 놓은 이 신앙 주관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은, 또한 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우월성을 새로운 형태로 갱신하려는 사람은 우선 18세기 어간 이후로 교의학에 토대를 놓는 작업에서 각각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해명해야만 한다. 이 패러다임 변화는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것을 말한다. 바르트는 이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명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사 서술에서 새로운 신학의 인간 중심적 변화를 18세기 문화, 사회사와 연관해서 완전히 일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 중심주의 탓으로 돌렸다. 물론 이런 서술에서 바르트에 의해서 핵심적인 이유로 제시된 판단은, 또한 그런 동기가 바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항거라고 하는 그의 설명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이 문제가 비록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 종파적 대립의 미궁에 의한 강요를 통해서, 또한 특별히 17세기의 종교전쟁 이후 종파적 비김수에 의한 강요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신학이나 교의학의 자리설정에서 패러다임 변화를 전적으로 일반적 문화 변화의 기능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즉 이러한 견해는 종교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 외부의 문제가 중요하다거나, 또는 그 외부 문제에 대한 반향으로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신학적 패러다임이 변화된 이유는 신학적 논의가 발전되었다는 데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감론에서 공식화된 구프로테스탄트 성서원리의 신뢰성이 해체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정리해보자면,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그 내용의 규범인 성서에 설정하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축자영감설에 근거해서 성서의 신적인 진리를 모든 부분에서, 즉 신학적 (또는 교의학적) 논의 과정에서 더 이상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전제로 자리잡게 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새로운 자연과학적인, 역사적이며 지리학적인 인식에 맞서서 계속해서 고수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모든 개개 성서 낱말의 신적인 근원을 방어하기 위해서 도입된 적응 사상은 더욱더 공동화(空洞化) 되고 말았다. 
이제 원칙적으로 성서를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역사적 문서로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내용의 모든 역사적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항존적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제믈러 이래로 점차 명확해진 것처럼 성서와 하나님 말씀이 이런 방향에서 구별되었다. 문제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진 성서로부터 어떻게 또렷이 구별되어야 하는지, 또한 이에 대해서 어떤 준거가 작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믈러와 특히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internum)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해가, 또한 신앙경험이라는 증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생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발생하는 유혹은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모든 내용에 대한 과거의 보증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데에 있다. 즉 이 유혹이 정통적 영감론과 묶여버린다면 이제는 경험의 주관성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에 고대 영감론의 권위주의 및 객관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경험을 강조하면 그 자체로는 충분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확실한 것을 참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고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험원리가 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인해서 일종의 구체적인 경험 안으로, 즉 회심경험 안으로 축소되어버리는 경향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험을 다시 증거로 삼아, 흡사 영감론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그 주제의 모든 개별논의에 앞서 교리의 진리를 보증하는 법정을 통해서 확실하게 하려는 작업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시도 앞에서 이미 구프로테스탄트 성서론이 좌초되었으며, 또한 기독교 교리의 토대를 신앙행위의 주관성에 설정하려는 신프로테스탄트의 작업도 역시 여기서 좌초되었다. 이 작업은 곧 신앙행위의 주관성에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성을 신자들에게 선취적으로 보증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의 이러한 주관성은 이러한 조치가 하나님 진리의 절대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신학적 문제 제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신학이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한 혼란에 휩싸인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그 내용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확증하려고 하는 한 교회당국의 무오적 교권으로부터 돌아선다고 해도, 또한 구프로테스탄트의 영감론을 극복한다고 해도 경험이냐 또는 ?모험?이냐 하는 선택 문제에서 신앙행위를 증거로 삼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의식을 자기 자신에게서 확보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고수될 수 없다는 주장은 영감론의 경우와 똑같이 오늘날 외부로부터 개신교 신학을 향해 강요되고 있다. 경험을 준거로 삼는 이런 논증이 모순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개별 경험은 결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확실성과 중재되는 게 아니라, 대신 경험의 연속적인 진행에 근거한 해명과 확증을 필요로 하는 그런 확실성과 중재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 확실성에서 이미 진리의 현재와 그 무조건성의 현재가 경험된다. 그러나 경험과정이 진행되면서 그 확실성이 선취적으로 확인되고 검증될 때만 그렇다. 모든 주관적 확실성의 이러한 조건은 인간 경험의 유한성에 속한다. 무조건적인 확실성이 계속적으로 모든 시험과 검증에 의존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주관적 앙가주망(Engagement)의 강제력으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신앙하는 자아(Ich)는 절대적 진리라는 장소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현상은 부당하게도 비합리적인 열광의 변종을 통해서 확인되는 게 아니다. 이런 열광이 기독교인들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이런 현상들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심리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주관주의는, 즉 ?앙가주망으로의 도피?는 기독교 신앙을 실제로 무신론적 종교 심리학으로 양도하게 된다. 이 종교 심리학은 신앙의 필요성을 그 비합리성이란 면에서 세속적 뿌리로 회귀시킨다. 바르트는 이런 연관을 아주 날카롭게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통찰의 확실성은 바르트 자신이 기독교 진리의식을 신앙 주관주의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또한 무신론적 종교비판에 직면한 자신의 붕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의 진리의식에 대한 이러한 확증을 포기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식과 교의학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로 인해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요청이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오히려 이런 요청을 주제로 고양시켜나가는 일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