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직신학의 주제인 기독교 교리의 진리 문제
최근의 교의학 역사에서도 역시 기독교 교의학은 기독교 교리의 진리 문제를 단지 전제하기보다는 그 이상의 문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 진리 문제는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의학 입장에서 이런 사태는 16세기 이후로 교의학의 프로레고메나가 발전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기독교 교리의 원천이나 원리를 결정함으로써 그 진리에 대한 질문이 교의학의 주제로 논의되지도 않은 채 선취적으로 결정되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주제로 설정하는 일은 변증의 소관이 되었다. 교의학은 물론 예외가 있긴 했지만 단지 그 내용에만 관심을 쏟았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기초신학과 교의학의 구별이 유비적으로 전개되었다. 기초신학이 기독교 계시의 신뢰성을 강화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교의학은 그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 과업을 분리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정당한가? 이런 교리가 역사적 골동품점의 재고목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신적인 계시로서 수행되는 경우에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 그 진리와 그 참된 의미에 대한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면 안 되는가? 사실상 교의학적 서술과 진리론적 질문의 철저한 분리는 결코 타당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교의학을 말할 때는 교의학에서 확대된 교리내용을 논증적으로 주장하며 진리로 강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교의학은 조직적인 서술 형식을 통해서 이러한 과업을 실제로 늘 지각했다(앞의 3절 참조). 신관에 토대를 둔 그 내용의 보편성과 연관해서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이 내용은 창조로부터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현실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사의 단일성이 세계의 죄와 악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됨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의 단일성은 세계 창조자, 속죄자, 구원자로서 강조되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와 신성이 강조된다.
역으로 교의학의 모든 개별적 문제는 하나님의 행위와 연관됨으로써 동시에 철저하게 세계와 연관된다. 이것은 특별히 기독교에 어울리는 일이다. 이 문제는 그 이외의 모든 개별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에서도 축소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신적인 로고스와 갖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신관에 토대하고 있는, 그리고 교의학적 서술의 포괄적 체계에서 알려지고 있는 교의학적 주제의 보편성은 의심할 바 없이 무언가 기독교 교리의 진리요청과 관계되며, 또한 교의학을 통해서 그것을 인지하는 것과 관계된다. 크게 보면 인간, 세계, 역사에 대한 신학 외적 지식이, 그리고 특별히 현실성에 대한 질문과 철저하게 관계된 이런 주제의 철학적 진술이 세계, 인간, 역사에 대한 교의학적 서술에 편입되는 것이 이런 국면에 속한다. 이 교의학적 서술은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핵심은 결집력이며,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교리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교의학이 주로 기독교 교리의 진리를 형식적으로 주제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전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곧 기독교 교리의 진리 요청이 명시적으로, 더구나 체계적으로는 전혀 자기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오히려 현저하게 단언적으로 인지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조치에는 교의학의 신(神)중심적 경향성과 연관되는 동기가, 따라서 명백하게 서술되어야 한다는 동기가 잠복해 있다. 세계, 인간, 역사의 실증적 확실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제화된다. 이것은 신관의 독특성을 통해서 그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계시와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세계?를 통해서 교의학과 더불어 고려된다는 사실이 배제되지도 않는다. 하나님 현실성과 그 계시의 현실성이 세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간주되어야만 할 세계 현실성에 속하는 문제다. 기독교 교리의 주장은 세계로부터 발생하는 하나님 현실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그리고 그 논쟁과 그것의 회피를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의식에 대한 질문 안에서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세계 현실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변죽 만 울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제기되는 하나님 현실성의 논란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게 분명하다면 당연히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안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의 서술은 그것이 진리의 전제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그 서술의 자명성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그것은 실제로 그런 것인데, 세계 안에서 제기되는 하나님 현실성과 그 계시 현실성의 논쟁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기독교 교리에 어떤 전제가 없을 수 없다는 말은 분명히 옳다. 따라서 교의학은 여러 가지 전제로 작업한다. 우선적으로 교의학은 기독교 교리의 사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교의학은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지평으로 나타나는 리얼리티나 또는 기독교에서 출발하는 문화작용이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선포나 예배를 다룰 수도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미 일찌감치 성서에 돌려졌던 기능이 교리와 신학적 학설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관계 척도라는 점은 전제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신학적 반성에서 출발하며, 이것과 연결된 진리 요청과 더불어서 역사적 리얼리티로서 이 신학적 반성에 소여 되었다. 물론 기독교 교리 전승이 필요로 하는 신적 진리가 이미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요청은 신학에서 서술되고 강화될 수 있도록 검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요청이 선취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 개방된 것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신학은 이제 직접 이런 요청의 정당성이 신학적 사유와 그 논증 과정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개인들의 주관적 관심은 기독교 신앙이 기독교 사신(使信)과 기독교 교리 전승의 진리에 대해서 부단한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신학 작업에 열중하는 기독교인은 본격적으로 신학 연구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믿음을 통해서 사신의 진리에 관계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에 신학의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고려되지 않아도 된다. 원칙적으로 신앙은 분명히 신학적 반성에서 시작한다. 물론 신앙이 확실하다고 해서 기독교 교리의 진리에 대한 신학적 확증이 그저 간단히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학적 확증은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분명하게 이런 신앙에서 중요한 기능을 감당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신앙을 진리론적인 면에서 개인적으로 확증하는 일은 경험과 반성을 통해서 부단히 검증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이런 확증은 그 본성상 논증 영역에서 개방적이다. 이 논증에서는 믿음의 대상이 된 진리의 보편타당성이 핵심이다. 그 어떤 진리도 단지 주관적일 수는 없다. 진리의 보편성과 보편타당성은 주관적 진리 확실성을 근본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에 긴장이 상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나의 진리는 단지 나만의 것일 수 없다. 그 진리가 적어도 근본적으로 모두를 위한 진리로 제시될 수 없다면, 비록 그 이외의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에게도 역시 절대로 진리일 수 없다.
신학에서는 계시 진리의 보편성이 핵심이며, 따라서 계시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비록 신학이 권위적 학문으로 이해되거나 주관적, 또는 공동체적 신앙 거점의 자기 서술로 이해되며, 따라서 진리 질문이 이미 앞서 결정되어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다루어진 문제와 똑같다. 기독교 진리의식에 대한 신학의 기여도 역시 신학의 과업을 규정하면서 이렇게 진리 문제가 자체 안에서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게 되면 현저하게 침해당한다. 이런 상태에서 도출된 신학적 논증의 합리적 형식은 무언가 사상(事象)의 핵심이나 신앙과 전혀 관계되지 않는 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림없다. 이러한 논증은 별로 진지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결과의 개방성과, 그리고 단지 진리에만 묶이려하는 모험이 부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이는 ?변호사 같은 사유?라는 말을 했다. 즉 이런 사유에서는 그 논증의 무게와 상관없이 결과가 뻔하다. 그래서 이것은 설득의 수사적 기능을, 즉 합리적으로 가장된 증언을 통해서 설득하는 수사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논증에 대한 이러한 상들이 얼마나 엄청나게 공적인 의식에서 신학의 신용을 하락시켰는지, 또한 계속 그렇게 했는지 그 어떤 특별한 증거를 댈 필요도 없이 확실하다. 대상에 대한 반성의 공허함 속으로 사라지는 어떤 ?신학?의 무대를 수없이 만날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소위 ?신(神)죽음의 신학?이 그것이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신학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주관적인 신앙의 대상은 신학적 논증의 영역에서 오직 합리적으로(sola ratione) 연구된다고 했으며, 또한 주관적 신앙의 전제를 논증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오직 논거의 무게만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논증의 가능하고 유용한 형식에 대한 의견은, 무엇보다도 논리적 필연성의 강제력이 그것에 전가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은 안셀름 시대 이후로 많은 변천을 거쳤다. 그러나 신앙이 전제로서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경우에는 합리적 명백성만을 목표로 하는 논증도 역시 불가능하다. 무언가 논거가 소진되어버리는 사적인 앙가주망이 보증되는 일없이 이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개방되는 경우에 신앙의 내용에 대한 보편 타당한 진리는 합리적으로 확증된다. 기독교인은 자기 신앙의 내용에 충분한 신뢰성을 확보함으로써 신앙의 신적인 진리를 이런 내용의 빛으로부터 조명해야만 하지, 결코 선행하는 안전망에 의지하면 안 된다.
교의학의 진리가 기독교 교리의 연관적 서술인 교의학에서 이미 전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논의의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면 합리적인 논증은 신앙의 진리를 위한 (또는 반대하는) 결정적 법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교의학은 합리적 판단형성의 준거에 의존적이지 않다는 것인가? 또한 이로써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 사유의 주체인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다는 것인가?
진위의 판단은 분명히 모든 판단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주관적인 조건 밑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진리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리를 전제하며 그것에 맞는 것을 모색한다. 진리는 모든 것에 구속력이 있는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주관적 판단에 소여 되어있다. 이런 통찰은 진리의 신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증에서 결정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De lib. arb. Ⅱ,10; 또한 12참조).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논증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거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는 어거스틴이 진리관념과 신관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즉 이러한 연결로 인해서 이제 진리가 주관적 판단을 위해서 마음대로 처리되지 못한다는 점이 분명해졌으며, 또한 이 경우에 이런 사태에 담겨 있는 특별히 신학적인 의미가 부각되었다. 즉 하나님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과, 이로 인해서 도그마의 진리도 역시 하나님의 도그마(dogma theou)라는 의미로 부각되었다.
진리관념과 신관을 연결한 어거스틴의 생각과 반대로 판단 진리로서의 진리이해가, 즉 판단 행위에서 진위(眞僞)를 구별하는 자리가 늘 거듭해서 설득력을 획득했다. 어거스틴은 진(眞)을 마땅히 그렇게 있어야 할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위(僞)와 구별하면서 id quod est(사실, Solil Ⅱ,5)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의 개념에 있어야 할 판단 관계가, 즉 지성(intellectus)과 사실(res)의 일치가 간과된다. 이런 경우를 분명히 파르메니데스의 본체론적 진리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경우에 진의 단일성 안에 있는 모든 진의 일치하는 자기 동일성만이 그 개념을 결정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개념에 대한 어거스틴의 정의에 주목했다. 어거스틴에게는 고유한 ratio veri(참된 이성)이, 즉 correspondentia(일치)나 또는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사실과 지성의 일치)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De ver. Ⅰ,1 resp., ad 1). 따라서 누가 판단행위로부터 진리개념을 규정하는지 실제로 판단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충분한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진리개념과 진리이론에 대한 오늘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도 역시 일치 사상이, 즉 판단 진리가 놓여 있다. 그리고 상이한 진리이론들은 일치사상의 불확실성을 명료화함으로써 고양시키고, 또한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이런 일치가 소여 되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준거를 지정해보려고 한다. 하나의 진술이 참되다고 말이다. 니콜라스 레셔(Nicholas Rescher, 1973)에 의해서 분명하게 주장된 진리의 결집력 이론이 가리키는 바는 (부합이라는 면에서) 진리 개념과 진리 준거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즉 그 이외의 모든 것에 참된 것으로 작용하는 것과의 일치는 그 대상과의 일치(부합)라는 의미에서 그 주장의 진리에 대한 준거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진리의 준거와 개념의 구별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개념에 속하지 않는 것도 역시 진리의 준거가 될 수 있는가? 레셔는 이런 반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반박될 수 없는 모든 참된 것의 단일성이나 결집력이 진리 자체의 개념에 속한다면 판단과 사태의 ?부합?이 어떻게 여기에 관계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최소한 이런 ?부합?에서 결집력의 특별한 형식을 보게 됨으로써 (권한이 있는 판단의 ?승인?이라는 점과 마찬가지로) 결집력 사상이 고유한 토대로서 진리 개념에서 제시된다. 판단 전망은, 즉 판단과 사태의 부합은 판단하는 자에 대한 동의와 마찬가지로 진리 개념의 파생 순간이 된다. 이것은 진리가 결집력으로부터 이해되는 경우에 곧 불가피하게 본체론적인 것을 지향하게 된다. 사물 자체에 대한 결집력은, 그러나 그것에 대한 판단이 아닌 그 결집력은 우리의 판단에 대한 진리를 구성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파르메니데스적이며 또한 어거스틴적인 진리 그 이상의 무게가 다시 새롭게 유효해진다는 것이다. 즉 진리관념이 존재 개념과 공속적이며, 또한 절대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관에 공속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참된 것의 단일성으로 결집된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단일성이 갖는 본체론적 장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진리 자체라는 어거스틴의 사상(De lib. arb. Ⅱ,15)은 모든 참된 것의 결집력과 그것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단일성의 궁극적 거처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일한 (이런 점에서 ?불변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모든 참된 것을 포괄하며, 자신 안에서 결정한다(위의 책 Ⅱ,12). 결집력을 위한 모든 인간적 수고는 늘 불완전하며 미완료의 상태로 남아 있는 추가집행일 뿐이다. 즉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모든 진리의 단일성을 숙고하는 것일 뿐이다. 또는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모든 참된 것의 단일성이 역사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단일성이 시간의 과정에서 성취되게 하는 선(先)기획이다. 교의학에서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서술에 해당되는 것은 그 단일성이 단지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둔 세계와 역사의 단일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계시의 추가 실행이며 추가 기획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교의학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런 것으로 확정시킬 수 없다. 그리고 양식화할 수 없다. 이러한 교의학적 수고가 진리를 파악해내고 그것을 서술하려는 목표를 정하면 정할수록 더욱 교의학과 하나님의 진리와의 일치는 우리의 신학이 인간의 인식론적 수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식과, 그리고 이런 것으로써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의식과 연결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
신학 지식의 유한성은 전체 전승이 확인하고 있는 무한한 ?대상?에 대해서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 및 그런 작업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이런 지식이 시간에 묶여 있다는 사실에 토대하고 있다. 즉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성은 우선 모든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이 이르러야 결정적으로, 또한 의심할 나위 없이 드러날 것이다. 시간 내에 있는 모든 거점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바는 우선 무엇이 참되게 항존적인지, 따라서 무엇이 신뢰할 만 하며, 이런 의미에서 무엇이 ?참된?지가 미래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의 진리 이해는 그리스 사유와 마찬가지로 진(眞)을 항존적이고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에게서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것의 자기 동일성을 시간의 흐름 뒤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파악하려고 한 게 아니라 시간의 진행에서 항존적으로 확증되고 보증되는 것으로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다. 시간은 존재자의 경험이나 그 진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 방식은 근대의 후기 관념주의 사상의 경험에도 부합한다. 특히 역사적 자리에 대한 모든 경험의 상대성에 부합한다. 이 상대성은 역사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역사적 자리에서 이 상대성이 획득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대성이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렇게 늘 절대적으로 상존하는 진리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상대성은 절대에 대한 사유에 대해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런 절대를 사유함으로써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에게서는 진리의 절대성이 우리 경험과 반성의 상대성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것은 딜타이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경험의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한에서 우리가 우리 세계의 사물과 생기(生起)에 담지된 참된 의미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그런 의미에 둠으로써 사물과 생기의 의미를 실제로 규정한다. 물론 이러한 의미 부여와 주장들은 선취에 기인한다. 더욱이 이것은 대략 동형적으로 회귀하는 자연 생기의 영역에 해당된다. 천동(天動)의 대략적인 동형성을 선취하지 않은 채 날(日)과 해(年)를 헤아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이런 낱말들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우리가 생명사(史)의 사건과 사회사(史)의 생기에 부여하는 의미는 역사에서 발전하는 이런 구성물의 전체와 미래의 선취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옳다. 그리고 이러한 선취는 경험이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변경된다. 왜냐하면 경험의 지평이 선두의 자리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시간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마지막 세계에서는 무엇이 항존적이며 ?참된? 것으로 증명되는지, 그리고 이와 달리 무엇이 불확실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지, 또한 그렇게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렷이 드러날 것이다. 인간 경험의 역사에 주어진 제한은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 경험에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동거한 이 세계에서 어느 한 순간도 그 정체가 파악될 수 없었던 대상이며, 또한 그의 현실성은 세계와 역사를 초월하는 능력에 대한 경험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능력의 역사는 세계를 초월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계의 마지막 미래와 그 역사의 미래야말로 하나님의 현실성을 최종적이며 반박될 수 없도록 증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그리고 역사 진행에 내재한 하나님의 영속성을 잠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에 관련된 모든 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언급에서 특수하게 드러난 방식으로 세계 전체를 선취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 역사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인간 경험과 반성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하나님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언급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인식 앞에서 불가피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고찰하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라는 근거에서 하나님 인식에도 해당된다. 기독교의 신학적 지식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드러나는 최종적인 하나님 계시와 비교할 때 ?부분?일 뿐이다(고전 13:12). 기독교인은 신학적 앎의 유한성을 기억하기 위해서 경험의 역사성에 주어진 우리 지식의 유한성에 대한 근대의 반성을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런 가르침을 이미 인간의 상황에 대한, 즉 하나님 앞에 있는 신앙인의 상황에 대한 성서의 진술에서 획득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 언급의 유한성과 부적절성에 대한 지식은 신학의 자기 제한적 성격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진술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진술이 진리론적 조건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송영론(Doxologie)이 될 뿐이다. 고유한 유한성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은 이 송영론에서 자기의 유한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고양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사유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송영론은 전적으로 조직적 반성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기독교 교리의 서술에 바로 기독교의 진리가 달려 있다고 해서 교의학자가 이런 진리를 결정하는 법정일지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의 단일성을, 그리고 이로 인한 세계의 단일성과 그 역사와 그 미래적 완성의 단일성을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표현으로 생각하려는 교의학자의 시도는 신적인 진리의 결집력을 추가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며 앞서 기획하는 것이다. 교의학적 시도는 종말의 선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추후 성취되는 예견에, 또한 하나님에 대한 송영론적 기능이라 할 예견에 기인한다. 이러한 시도가 진리라는 사실은 하나님에게서 결정된다. 그 결정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때 최종적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성령의 확인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잠정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가설의 자리가 교의학적 진술에 전가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또한 교의학적으로 서술된 기독교 교리에 전가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양자의 경우에 관건은 자기를 증명한다거나, 또한 자기 증명 명제로부터 파생되는 필연적 결과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형상 거짓인지, 또는 참인지 판단될 수 있는 주장들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주장들이 적당한지 아닌지, 즉 참인지 아닌지, 따라서 그 진리가 그 주장에 이미 주어지지 않은 조건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닌지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문장은 역사적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진리 요청은 일반적인 역사적 준거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할 역사적 주장이다.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주장은 죽은 자의 부활과 비슷한 종류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사건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런 전제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사실이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나 또는 이와 연결되어 확증된 그의 지상 활동을 전제한다. 이러한 모든 주장은 이 진리가 다른 여러 생각의 대상이 되는 조건들과 실재적인 조건들에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해당되는 모든 사항에서 현실성 일반에 대한 전체 이해와 맞닿아 있는 조건들에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이 주장들은 그 조건에 들어맞을 경우에 진리이다. 그것에 의심이 가는 한에서 그 진리 타당성은 훨씬 넓은 의미에서 ?가설적?이다. 따라서 이제 그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그 진리를 미결인 채로 남겨둘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신앙적 진술의 성격과 실제로 모순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이미 주장 일반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주장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언급된 것의 진리가 확실하게 요청된다. 따라서 청자와 독자가 그 주장이 실제적인지 아닌지, 또한 진리 요청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장의 논리적 구조에 속한다. 주장이 진리 요청과 연결되어 있다는, 또한 그 주장이 단순히 정서적 진술이 아니라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주장이 적합한지 아닌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청자와 독자가 주장하는 ?명제?가 (또는 반성 수준에서 주장되는 그것이) 최초로 시험받아야 할, 그리고 반드시 그 이상의 것까지 생각해보아야 할, 바로 그 ?가설?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언설이 그 언설이나 거기서 나타나는 주관과 다른 사태에 대한 주장으로서 진지하게 수용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바로 그 조건이다. 반성적 수준에서 신앙적 진술이 가설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그 진술의 단언적 성격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이로써 그와는 반대로 신앙적 진술의 단언적 성격이 진지하게 수용될 것이다. 만약 신앙적 진술의 주장이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한다면 이 단언적 성격이 제거되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신앙적 진술은 여전히 ?인식론적? 진리요청 없이 여전히 주관적 상태의 언설로서만 다루어질지도 모른다.
주장의 진리 요청이 가설적이라는 것은 우선 의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반성의 차원에 (또는 청자와 독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주장 자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것이 자신의 주장을 가능한 대로 회의적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더불어 반성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장의 행위에서는 대개 주장된 것의 진리가 완전히 비반성적으로 요청된다. 우선 청자와 독자는 주장과 그것이 참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 사이를 구별한다. 청자와 독자에게 그것은 ?단순 주장?이 된다. 그 단순 주장은 그 진리가 단순히 ?내버려져? 있는 게 아닌 경우에 시험받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주장에는 모순이 없으며 그 진리 의도가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신앙적 주장과 또한 그것과의 신학적 관계에서도 역시 타당하다. 이런 신앙적 주장은 생각할 것도 없이 옳다고 우긴다고 해서 주장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시험의 진리 요청에 그럴만하다는 점이 발견됨으로써 그렇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앙적 진술의 차이에도 부합한다. 이 하나님의 진리는 그 차이를 피력하고 있으며, 또한 참되게 믿는 자들은 이 진리가 늘 자기들이 말한 것이나 생각보다 무한정으로 우월하다는 점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주장과 그것의 수용 사이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진리는 이러한 수용의 궁극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은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측정할 수 없다.
신학적 반성의 이러한 차원은 신학 명제의 논쟁이나 거기서 주장된 현실성의 논쟁과 마찬가지로 신앙적 진술의 논쟁이 하나님 현실성의 첫 자리에서 숙고될 수 있으며 숙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신앙 고백적 진술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신학적 반성의 차원은 세계 현실성과 역사 현실성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 현실성은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세계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화해되고 용서받는 세계로서 서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신성은 창조된 세계와 그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영광을 받아야 할는지 서술된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현존과 본질에 대한 논쟁도 역시 하나님 안에 그 토대가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논쟁이 하나님의 무능력을 나타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이의로서 타당한 게 아닐 경우에 말이다.
기독교 교리의 조직적 서술에서 세계, 인간과 역사는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인간과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변화해 가는 과정과 하나님과의 대립을 중재한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구원사로서의 역사에 담긴 의미이다. 창조, 죄, 화해, 완성이라는 순서에서 기독교 교리의 자료는 이미 인간 구원과 창조의 갱신으로 정향된 역사의 전망에서 고려되었으며 구성되었다. 이러한 신적인 구원 경륜(經綸)이라는 주제에서 하나님 곁에 있어야할 무언가 보충적인 것이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역사와 신학적 서술에서는 역시 하나님의 신성이 그 중심이다. 이런 한에서만 이런 역사의 서술은 신학적이다. 그 서술이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가 있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단일성을 발견하는 경우에 말이다. 세계, 인간, 역사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에도 역시 교의학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핵심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또한 바로 그런 이유에서만 인간과 세계도 역시 중요하다. 하나님은 신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서도 포괄적이고 유일한 주제이다.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주제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화해와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게 한다. 하나님을 신학의 유일한 주제로 삼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 이외에 창조와 인간론적 주제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정당성을 보증한다는 뜻에서 그런 주제의 현존 정당성이 타당한 자리를 잡게 된다. 세계와 인간의 현존에서, 그리고 그 성취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표명된다. 그러나 거꾸로 세계와 인간이 그 창조자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써만 그 고유한 현존이 확보되고 그 성취된다는 사실도 옳다.
기독교 교리를 서술하는 교의학은 조직 신학이어야만 한다. 즉 조직적 신론이어야만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기독교 교리가 자신의 모든 각각의 주제를 하나님의 현실성과 연결시킴으로써 조직적으로 서술되고, 따라서 조직신학으로 서술됨으로써 기독교 교리의 진리도 역시 주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의 모든 진술은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의 진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술은 자신의 현실성과 더불어서 존립되거나 쓰러진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세계가 오직 한번뿐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창조자, 유지자, 화해자, 성취자인 하나님의 존엄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서 토대가 잡히고, 화해되고, 성취된 것으로서의 세계, 인간, 역사를 조직적으로 제시하게 되는 경우에 하나님 자체의 현실이 바로 핵심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이런 서술에 달려 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 교리의 진리가 하나님의 현존에 달려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현존, 본질, 특성에 대한 특수한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종말론에 이르는 일련의 교의학적 주제에 나타난 모든 항목에서 그렇다.
조직신학으로서의 교의학은 세계, 인간, 역사에 대한 모델을 하나님 안에 토대하고 있는 것으로 기획됨으로써 단언적이며 가설적으로 작용한다. 이 모델은, 그것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의 현실성과 기독교 교리의 진리를 ?증명한다.? 말하자면 서술 형식을 통해서 그것을 보증하고 한층 강화시킨다. 교의학은 이로써 기독교 교리의 진리 요청을 해석한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이런 교리가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과의 연관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세계, 인간, 역사가 하나님 안에 토대하고 있다는 교의학적 해석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은 당연히 교의학적 구상의 증거력과 진리에 대한 결정이 그 교의학적 구상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조건은 세계, 인간, 역사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이런 모델에서 재인식되었는지 아닌지, 또한 그것이 실제로 세계, 인간, 그 역사의 리얼리티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이 리얼리티는 이런 모델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규정된 것으로 서술된다. 이 조건은 다른 한편으로 교의학이 서술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를 증거로 삼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이 두 질문은 비판적 논쟁의 대상이다. 또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앞서의 서술을 비판하도록 자극하며, 또한 보다 향상된 모델을, 즉 기독교 교리의 의도에 훨씬 타당한 모델을, 또한 세계, 인간, 역사의 리얼리티에 훨씬 적합한 모델을 발전시키려는 각각의 새로운 시도를 비판하게 한다. 앞선 모델이나 보다 새로운 교의학적 모델의 견실성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학문적 논쟁을 전개시킴으로써 모델과 하나님 진리 사이의 차이는 창조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증명되고, 그리고 그 역사의 과정에서 사실적으로 증명되듯이 명증하게 드러난다. 물론 신학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신학자들 자신의 통찰만 제한적인 게 아니라 신학자를 비판하는 이들의 통찰도 역시 제한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상이한 모델들이 자신들의 모든 제한 가운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취적으로 서술하는 기능을 다룬다는 점이 고려되어도 좋을 것이다. 최종적인 계시는 신앙의 세계에서 이 하나님의 진리를 기다린다.
기독교 교리의 교의학적 서술은 지금까지 내려온, 즉 진리 지향에 대한 이런 저런 관점에 적합하지 않은 표현 형식을 비판한다. 당연히 기독교 교리가 교의학적 서술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 교리의 형식만 검열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진리 요청 자체가 허약하다고 본다. 이러한 비판은 물론 전체를 다룰 경우에 서술 형식을 받아들여야만 하며, 기독교 교리의 재구성을 시도해야만 한다. 이 교리의 재구성으로 인해서 기독교 교리는 순수 인간학적이며 세계 내적인 동기와 그 요소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비판이 견실하다면 미래와 연관된 대상은 더 이상 논의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러한 비판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현실성 일반을 이미 완료된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비판의 논증도 교의학에서 중요하다. 이 논증이 명백하게, 또는 함축적으로 자신을 서술해감으로써 하나님의 현실성과 기독교 교리의 진리에 대한 교의학적 증명을 강화시킨다.
교의학은 신론(sub ratione Dei)에 연관된 다른 모든 주제를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 보고, 그래서 신관이 전개되는 특징 가운데서 논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현실성은 우선 인간의 표상과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사유로서만 주어져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표상과 사유에서 의도된 현실성으로, 그러나 그것과는 구별된 현실성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논쟁의 대상이며, 또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는지가 바로 논쟁의 대상이다. 이런 논쟁의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사람은 훨씬 비싼 값을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이 오직 인간적 표상이라는 사실만 남게 된다. 이런 값을 치르지 않으려면 이러한 싸움에 나서야만 한다. 이미 인간 일반이 어떻게 현실성으로서의 하나님을 계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세심한 해명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핵심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성서가 증거한 하나님의 현실성은 공적 논의에서 현실성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독특한 의미의 교의학적 서술이 개입할 수 있는 자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러한 논의의 준비는 앞서 신앙의 제전제(praeambula fidei)라고 일컬어졌다. 오늘날 이러한 논의는 당연히 교의학의 기초를 정화시킨 ?기초신학?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경우에 바로 그런 상론들이 방법론적 의미에서 ?기초적?이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에서는 하나님 자신만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만이 기초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3:11). 이와 마찬가지로 신관, 신증명, 종교에 대한 주도적인 논의는 교의학의 과정에서 신론으로 지양된다. 그리고 모든 더 많은 설명들은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 현실성을 전개하는 것으로써 수행된다. 이로써 신학적 기초를 다지는 작업의 연관은 전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론에 따라오는 모든 것은 신관과 종교에 대한 설명으로 둘러싸이게 되는 논쟁의 자리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현실성이 논의되는 자리이다. 바로 이 자리에 교의학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실존과 교회가 거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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