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판넨베르크

2. 자연적 하나님 인식과 자연신학

은바리라이프 2018. 1. 9. 19:09

2. 자연적 하나님 인식과 ?자연신학?

구(舊)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은 신학개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로, 즉 요한 게르하르트 이후로 루터교 교의학에서 나그네 신학(theologia viatorum) 개념이라는 의미로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구별했다. 이런 구별은 가톨릭의 바로크 스콜라주의에서 예시되었지만 13세기의 고(高)스콜라주의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자연적 앎이나 또는 하나님 인식(cognitio 또는 notitia naturalis)이 로마서 1:19 이하에서 바울이 언급한 의미로 언급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세계 창조로부터? 인간의 인식에 계시된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앎의 사태는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초기부터 강조되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자명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이 사태는 물론 상이하게 해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개신교 신학에서 20세기 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계시와 구별된 하나님 인식의 형식이 관건이라는 사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독교 사신은 하나님 인식을 바로 그 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잠정적 앎이라고 간주함으로써 그 인식과 연관된다. 그 한 하나님은 바로 기독교 사신이 선포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적 인식(cognitio naturalis)이 하나님을 통해서 역사적 계시와 중재된 초자연적 인식(cognitio supernaturalis)과 구별된다고 언급했다. 루터는 이러한 앎이 인간에게서 실제로 왜곡된다고 날카롭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은, 비록 ?우상숭배자들?이라고 해도 역시,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는 일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사도의 진술을 지적했다. 이러한 사태는 칼빈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후기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루터주의 입장에 대해서 요구하기를 기독교 이전과 기독교 외부의 하나님 인식을 훨씬 적극적으로 평가해야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 이전의 철학자들의 진술이라는 관점에서 그렇다. 쉴라이에르마허 이후로 자리가 잡힌 자연신학 개념에 대한 비판도 역시 칼 바르트 이전에는 그리스도 계시에 선행하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를 쟁점화 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바르트의 로마서 1:20 이하의 주석에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덕분으로 창조로부터 … 익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KD Ⅰ/2, 1938, 335).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계시로부터 유래하는 이러한 지식을 그리스도 계시 사건으로 돌렸다(KD Ⅱ/1, §26, 특히 124, 131ff.).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그들을 뛰어넘는 진리에 대한 책임을 자기들 스스로 져야한다는 뜻이며, 그렇게 간주되며, 그렇게 전가된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그리고 그 진리와 더불어서 진리가 인간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133). 여기서의 핵심은 늘 은폐되어 있는, 그래서 우상 숭배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 내부에 소유하고 있는 앎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들에게 전가된 앎에 있다. 로마서 1:18이 진술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되었다는 선포가 인간으로 하여금 바로 이 하나님을 이미 앞서서 알 수 있게 한다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바르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계시로서의 그리스도 계시를 인간이 이해한다는 사실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 계시에 대한 바르트의 고유한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스도 계시가 세계와 인간이 복음에서 선포된 하나님과 그를 아는 것에 귀속된다는 전제는 이 그리스도 계시의 특성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러한 지식과 이러한 귀속성은 그리스도 계시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불빛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어서 남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에? 오신 것이다(요 1:11). 더구나 그의 백성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간이 낯선 이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이 훨씬 모욕적인 사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의 백성들은 아예 없는 것이며, 그들의 지식은 피상적인 데에 머물 뿐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존재는, 또한 죄인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적 현재를 통해서,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세계 창조 이래로? 하나님을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앎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롬 1:2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가 발생하기 훨씬 오래 전에 말이다. 보른캄(Günter Bornkamm)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이 앎은 무언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현실화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토대를 둔 사실이다. 인간은 이 사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한 이 사실은 인간의 우상숭배가 면책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물의 근원이며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인식?될 수 있다?는(certo cognosci posse)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의 공식화는 최소한 오해를 살만한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공식화가 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 이성의 능력(naturali humanae rationis lumine)이 핵심이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앎의 사실성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실적인 앎에는 분명히 언어에 담긴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앎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인간이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도 여전히 가까이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은 외면할 수 없다. 이런 공식화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간에게 맡겨진 가능성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라는 언급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아니었다(KD Ⅱ/1, 86). 왜냐하면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이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 인식될 수 있다?(같은 곳)는 기본명제가 훼손 당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공의회 문서는 바울과 달리 모든 창조의 활동에서 발현하는 모든 하나님 인식을 하나님이 선언하는 작용이라고 명백하게 서술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공의회 문서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KD Ⅱ/1, 91f.) 하나님으로부터 발현하는 이러한 인식의 확증을 배제하거나, 또는 ?신관의 분리?를 변호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없었다. 창조 사역에서 발현하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이라는 사실을 인간 이성의 불빛에 근거해서 확증하는 게 중요하다면 공의회의 진술은 신약성서와 모순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사실은 창조에서부터 자신의 신성 안에서 인간에게 인식되는 하나님에게 토대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계시항목에(DV 6)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진술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자연적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계시의지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사적 틀 안에 자리매김 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앎은 모든 인간에게 상존하는 사실이었다. 반면에 ?자연신학?은 결코 그렇게 일반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그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앎을, 이미 앞서 자세하게 언급된 것처럼, ?자연신학?의 현상과 엄격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 현상은 그 앎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관될 수는 있지만 동일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자연신학?이라는 주제에 대한 최근 논쟁에서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구(舊)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의 언어관용이 이미 그 원인을 제공했다. 그 교의학은 theologia naturalis(자연신학) 개념 하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앎(cognitio insita)과 하나님에 대한 습득된 앎(cognitio acquisita)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철학적 하나님 인식이라는 점을 종합적으로 주장했다. 구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의 언어관용에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역시 각각의 신관이 ?신학?의 한 종류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서 이제 ?자연신학?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 개념사(史)적으로 증거될 수 있는 사태가, 즉 ?자연신학?을 역사적 특수 현상으로 증명하는 이 사태가 해소될 것이다. 이 사태에서는 사실상 완전히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이 핵심이다. 즉 논증적으로 발전된 철학자들의 신론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자연신학?이라는 표현은 특히 중기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인 파나이티오스(Panaitios)에게서 발견된다.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스토아 사상은 파나이티오스가 젊은 스키피오(Scipio) 학파와 연결됨으로써 로마에 전달되었다. 파나이티오스는 철학적 신론을 한편으로 시인들의 ?신화적 신학?과 달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권위로 설정된, 그리고 국가에 의해서 고수된 예배의 ?정치신학?과 달리 ?자연신학?으로 특징화했다. 이것은 ?본래적으로?(von Natur aus)라는 말에 대한 궤변철학의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즉 참된 것 자체로부터라는 뜻은 인간적 정립(定立, thesis) 덕분으로만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과 달리 관습과 유래를 통해서, 또는 정치적 확정을 통해서 주어진다. ?자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바로 그 언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언급은 신적인 본성과 본질에 상응하는 것이지 국가 숭배와 연결되어 있는 정치적 흥미를 통해서 변조된 것이 아니다. 또한 시인의 ?거짓말?이나 시인의 표상에 뿌리를 둔 변조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철학적 하나님 인식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 이성의 원리와 이해력에 적합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정립에 기인하는 ?실증적? 종교 형태에서 인식이 변조되는 것과 반대로 신적인 것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연적?이다. 
스토아 철학의 언어적 각인은 초기 밀레토스 자연철학 이후로 철학적 신론의 목표였던 것을 개념화 시켰다. 베르너 예거는 신적인 세계 근원의 참된 형태에 대한 질문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발전에서 추구된 동기였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물리학자?로서는 가장 고대에 속하는 철학자들의 서술과는, 즉 소크라테스에게 소급되는 서술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스 도시들이 무역활동을 통해서 낯선 문화를 알아 가는 연관 속에 내재한 역사적 동기에 대해서는, 또한 페르시아가 소아시아를 정복해 가는 연관 속에 내재한 역사적 동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러한 질문에서 중요한 전제들은 세 가지인데, 첫째로 그리스인들은 아주 확실히 자신들의 신과 비슷하게 기능하는 낯선 신들을 자신들의 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런 기능의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특징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기능이나 특성을 신적인 것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조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이미 세계의 사물들을 향한 근원자의 기능에 집중된 신(神)이해는 분명히 코스모스의 근원에 대한 천지개벽적이며 제신계도(諸神系圖)적 표상의 고대 오리엔탈적인 유래와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셋째로 만물의 근원인 그것이 시작과 끝도 없이 불가사적이며 모든 것을 ?포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써 그 만물의 근원이 제신들의 특성을 이러한 높은 기준으로 제고시키며, 그 결과 신성이라는 점에서 고유한 신화적 전승의 제신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초기 ?자연신학?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논증해내려고 하지 않았다. 신적인 근원의 현존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전제되었다. 그 현존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신적인 특성에 대한 질문이 철학적 신학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신적인 근원에 대한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들?의 상이한 명제가 이것과 관련되었다. 여기서 이런 차이들은 그것을 해소해보려는 시도와 연관된 문제 제기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신화적 전승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제 곧 신적인 근원에 대한 단일성과 영적인 것에 관해서, 또한 불가사성과 시작이 없는 영원성에 관해서 동의를 얻기 위한 높은 기준이 제시되었다. 모든 변화의 최상 근거로서의 그런 기능에서 계속 그 근원 자체가 불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추론되었다. 물론 최소한 신적인 근원의 고유성을 밝히려는 몇몇 논증들은 이러한 신성의 현존을 증명하는데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크세노폰의 설명에 따르면 이미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근원의 영성(Geistigkeit)에 대한 논증을, 이 논증은 아낙사고라스에게 소급되고 있는데, 자연적 세계에 적합한 질서라는 근거에서 ?지혜롭고 친절한 직공장?의 현존을 증거하는 토대로서 사용했다(Memorabilien Ⅰ,4,2ff.). 플라톤이 영혼의 원리는 육체운동을 설명하는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씀으로써,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로 인해서 이러한 논증이 수정됨으로써 운동을 통한 하나님 증명이 시작된다. 따라서 신적인 근원의 독특성에 대한 질문은 그 현존에 대한 증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성의 독특성과 그 ?본성?에 대한 질문은 철학자들의 ?자연신학?에서 핵심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에서만 신화적 전승에 대한 자연신학의 비판적 관계가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 신학이 철학자들의 ?자연신학?을 왜 받아들였는지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철학자들의 생활태도나 우상숭배에 대한 논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de facto) 모든 교부신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단지 기독교 복음이 확실하게 선포되어야 할 문화세계의 정신적인 풍토에 대한 적응이라고 보는 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소위 교육적 ?접촉? 문제 그 이상이다. 이 경우에 기독교의 하나님이 단지 유대인의 민족신이 아니라 만민의 한 하나님인 한에서 그 하나님의 진리가 핵심이다. 철학자들의 ?자연신학?은 주장된 어떤 한 신이 어떤 조건에서 전체 우주의 장본인으로 진지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지에 대한 준거를 마련했다. 따라서 기독교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 천지의 창조자이며, 또한 모든 인간의 참된 신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타당성을 확보하려면 이런 준거에 당당히 맞서야만 했다. 철학적 신학의 준거에 맞선다는 것은 그 양식의 비판적 검열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검열은 교부신학에서 너무 준엄하다고 불평을 사지 않았다. 오히려 불충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이러한 검열은 유일한 한 하나님의 진리가 그 안에서 알려지는 일반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철학적 논증의 토대에서 증명해야만 했다. 
이런 과업은 함축적으로 이미 사도 바울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 제시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회심하기 이전에 섬기던 우상들을 기독교 사신의 하나님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본성적으로 신들이 아닌?(ϕύσει μὴ οὖσ θεοίς, 갈 4:8) 것들이라고 했다. 이런 진술은 성서의 하나님이, 바울의 복음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했는데,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즉 ?자신의 본성상?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바울의 이런 공식화는 낱말의 근원적 의미로 볼 때 ?자연신학?의 철학적 질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자기 본성상?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과 일치한다. 이로서 기독교 사상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화된 참된 신성에 대한 준거와 불가피하게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즉 기독교인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이 이런 준거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말하든지 (그리고 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화된 그 특성을 확보하든지), 아니면 이러한 준거가 한 하나님에 대한 언급에 불가결한 근원자 기능을 충분하게 서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기독교의 교부신학이 그렇게 설정된 과업을 실제로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신학? 개념은 그에 비해서 별로 명시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터툴리안의 부수적인 언급(ad Nationes 2), 케라시아의 에우세비오스의 언급(Praeparatio Evangelica Ⅳ,1)과 더불어서 특히 어거스틴의 De Civitate Dei(하나님의 도성)에서만 진술되었을 뿐이다. 어거스틴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에 의해서 주어진, 그리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에게서 전승된 형식 안에 있는 신학개념의 스토아적인 삼등분을 알고 있었다. 이 형식에서 그 삼등분은 ?국가종교를 방어하기 위해서? 변형되었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학식을 경탄해마지 않던 파로(Varro)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파로가 단지 신화적 신학만 비난했지 정치적 신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인데, 반면에 그는 철학자들의 자연 신학에 대해서는 과실에 대한 논의에 한정시켜서 알아보려고 했다(Civ. Dei Ⅵ,5). 어거스틴 자신은 무엇보다도 신화적 신학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한 정치신학과 투쟁했다(Ⅵ,7). 반면에 그는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의 자연신학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왜냐하면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철학자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해당된다는 것은 아니다. 상이한 철학 학파를 개괄적으로 검토해보면(Ⅷ,2ff.) 그들 중에서 플라톤주의자들이 기독교인에게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특히 그들이 하나님을 영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Ⅷ,5). 그들에게는 바울이 로마서 1:19에서 언급한 말씀이 특별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가시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신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Ⅷ,6). 어거스틴은 이런 근친성에도 불구하고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을 무비판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비판은 인간론과 영혼론에 집중된다. 그들의 신론에 대해서는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즉 어거스틴에 따르면 비록 삼위일체론에 대한 플라톤주의자들의 표현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Ⅹ,23과 29). 다만 그들은 성육신론만을 몰랐다(Ⅹ,29). 
어거스틴은 분명히 기독교의 신론이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의 ?자연신학?과 원칙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런 자연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그 어떤 전단계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 신론은 어거스틴의 경우에 참으로 ?자연적인?, 즉 하나님의 본성에 적합한 신학의 정화된 형식과 동일했다. 이 신학은 가장 명쾌한 증명 방식을 성서의 증언에서 발견했다.
성서의 하나님 계시와 자연신학의 관계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라틴 중세기에 이르러서 변질되었다. 12세기 이후로, 특별히 질베르(Gilbert von Poitiers)를 통해서 하나님의 단일성만이 이성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 삼위일체는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대신해서 당시에 적합한 철학자가 되었을 때 철학적 신학의 이러한 한계는 훨씬 첨예한 상태에 이르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이성적 인식(cognitio naturalis)에 적합한 것은 신조(articuli fidei)와 아주 날카롭게 구별되었으며, 후자를 다루기 위한 일종의 서론(praeambla)으로 간주되었다(S. theol. Ⅰ,2 ad 1).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는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세계의 제일 원인이라는 신개념으로부터 일관되게 자기의 논증을 견인해나감으로써 삼위일체론을 포괄하는 신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이라는 두 인식체계가 아직은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았었다. 후기 토마스주의에 이르러서야, 즉 바로크 스콜라주의와 신스콜라주의에 이르러서야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의 ?이층구조?가 완결되었다. 이 이층구조는 오늘날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비판받고 있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주의가 바로크 스콜라주의와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계시신학과의 대립개념으로 재등장함으로써 자연신학의 개념은 그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자연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라는 의미가 되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실성과의 관계에서 우선 인간적 본성의 한계가, 특별히 인간 이성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이해된 ?자연신학?은 인간에 따른, 즉 인간의 본성에 따른 하나님 인식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17세기와 18세기에 퓌시스(ϕύσις)와 테시스(θέσις) 사이의 해묵은 대립이, 즉 자연의 강제성 상실과 인간적 전통과 정립의 실증성 사이의 해묵은 대립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종교전쟁이라는 대재난이 일어나자 기독교 종파 사이에서 단순히 전승을 수호한다는 차원에서 서로 대립적인 계시가 요청되었다. 상호간에 신용을 떨어뜨리는 종교적 진리 요청의 이러한 실증성으로 인해서 새로운 사회질서와 문화의 기초로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 숙고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여기서 이제 계몽주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히 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자요, 이성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인간적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 바로 실제로 하나님과 어울리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인간상(像)에서 인간 현실성의 파손 문제가 별로 신중하게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난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정당한 비난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 문제는 사실 이것과 관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루어진 질문의 이러한 사태가 차지하고 있는 파급력은 한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비동일성 의식은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지식과 동일성의 금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의 왜곡에 대한 강조는 신학적으로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로 간주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이제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창조한 자 사이에 일종의 조화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창조자가 존재할 때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인간과 그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어떤 확실성이 요구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증명 문제이다. 그런데 이 증명은 자연신학의 근대적 형태가 비판받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