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옳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고전13: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어떤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오해받을 위험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하는 말을 아주 정확하게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가 사용한 낱말 중에서 독특하거나, 오랫동안 익숙했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사랑 예찬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낱말을 들을 때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 연대감과 일체감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또는 우리 마음의 빈곳을 채우고 우리를 완성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없다면 우리 삶은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결코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모든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이런 정도의 서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과 온갖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을 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즉 세상의 좋은 것들과 더불어서 사랑도 역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말은 약간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요? 문학적 수사가 아닐까요?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른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육체의 건강과 외모의 아름다움, 지성적인 능력과 예술적인 재능, 손재주나 감각적인 기능, 순수한 마음이나 단호한 결단력 같은 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요? 우리가 이런 은사를 통해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음악세계에서 무언가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어떤 깊이들을 경험합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멜로디와 하모니가 충만해지는 걸 들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영적 넓이를 발견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개척하며, 더 나아가 그 세계를 한 걸음 씩 발전시켜 나갑니다. 음악이 없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해질는지요! 다른 은사들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자연적 은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랑과 절대로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은사의 광채는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당분간 남아있는 희미한 기억일 뿐입니다.
이제 여기 또 다른 종류의 은사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계시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자연적 은사가 우리의 자연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영적인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묶이도록 해줍니다. 이런 은사 중의 하나가 방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계몽된 시대에 낯선 말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임재해서 비밀스런 언어를 입 밖으로 내게 하는지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언제 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게 아닐까요? 이들의 방언에는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열광과 몰아적 경험이 수반됩니다. 이런 경험에는 확실히 영원성과의 일치가, 또한 거룩한 것과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나 몰아적 경험을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의 계몽된 이들이 이런 열광주의적 경험을 혐오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직접 이런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방언도, 그 어떤 깨달음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마 위에서 말한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한 그 근거가 불확실한 좋은 것들의 목록에 여전히 어떤 것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방언이나 몰아적 인식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즉 돈독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무언가 다르고 위대하다는 말은 열광주의적 경험을 예찬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덜 낯설어 보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의 삶은 신앙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굳게 믿는다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가 종교개혁자들을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편을 드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업적들, 자선, 전 재산을 내어놓는 희생, 순교를 통해서 자기 생명을 드리는 헌신, 이와 같은 모든 것들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업적과 행위로도 나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돈독한 믿음도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강철같은 믿음으로 무장해도 "열려라. 참깨!" 식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믿음을 그럴듯한 업적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매우 부당하게 자기의 방패로 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랑을 가장 종교적인 가치나, 영적으로 충만한 교리들, 혹은 은혜로운 깨달음, 믿음과 희생 같은 것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피력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모든 선한 것들이 사랑의 뒷자리로 물러나야 한다면 과연 어떤 자리에 놓여야 합니까?
바울에게서 깨달음과 예언과 믿음은 "은사"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사랑은 "은사"라는 말로 일컬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은사처럼 사람에게 주어져 있거나, 사람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거나, 혹은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가 아주 확실하게 그의 개성이 되며, 더 나아가 그의 소유물이 되어서 그 은사를 통해 그가 이웃과 구별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이 은사는 그를 다른 이들 가운데서 돋보이게 합니다. 이 은사는 사람들이 왜 이런 은사를 가진 이들을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런 이들을 친구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근거입니다. 은사의 차이는 인간의 차이를 확대시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로 연결합니다. 다른 이와 일치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깨달음과 지혜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하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다른 은사에도 통용됩니다. 은사들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하고 유별나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차이를 밖으로 드러낼 때까지, 그리고 자기 명성에 이를 때까지 그것만을 고집합니다. 이 은사들은 교만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은 사람을 서로 하나가 되게 하고 친교를 나누게 합니다.
사람이 자신들의 은사를 통해서 서로 구별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점에서도 역시 이런 재능들은 사랑과 다릅니다. 은사의 열매를 맛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열심히 돌보아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역시 성실하게 음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내적 즐거움을 만끽하게되고, 음악이 그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훈련을 거쳐야만 하듯이 말입니다. 모든 은사는 이와 같습니다. 즉 우리가 꾸준히 연습할 경우에만 이 은사가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영적인" 은사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한번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 깨달음은 확실하게 유지되어야합니다. 그것을 거듭해서 기억하고, 거듭해서 심화시켜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약 이 깨달음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버린다면, 만약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식을 모든 삶의 상황에서 예민하게 감지해나가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자비심을 증명할 수 있는 연습은 가능합니다. 매 주일이나 평일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연습도 가능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 선하고 복 받을만한 습관들이 참된 상태에 도달됩니다. 인생의 많은 부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한다는 것도 역시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질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느 누구도 연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익숙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사랑이 우리 삶의 심층에 자리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 놓여있는 매 순간들, 어떤 형태로든지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고 있는 매 순간들은 유일회적이며, 반복이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가가 되는 일은 가능합니다. 또한 어떤 기술이나 설교의 대가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감정과 종교적 깨달음과 신실한 믿음에서도 역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대가가 없습니다. 아주 노련하고 교양 있게 산다는 것은 여기서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도 연습으로 가능합니다. 남을 도와주거나 손님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일도 연습을 통해서 익숙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습관은 결코 어느 한계를 넘어서 행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런 일에는 결정적인 요소들이 부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일이 말입니다. 친절과 동정심은 가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숨어서 우리의 선한 양심을 유지한 채, 우리 자신은 내어주지 않는 그런 가면 말입니다. 이러한 이중성 앞에서 우리의 헌신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재산을 통한 헌신이나 자기의 삶을 통한 헌신도 역시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의 생각이 아주 예민하게 작동합니다. 자칫 헌신과 사랑이 하나인 것처럼,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친구를 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남에게 헌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랑은 헌신의 덕, 즉 자선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삶을 희생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헌신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헌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이 그렇게 도달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의 마지막 전심전력을 통해서도, 우리 삶의 전적인 희생을 통해서도 사랑을 성취할 수 없다면 사랑은 과연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들을 조정하고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사랑을 이루어내고 공고히 만들려는 모든 노력은 쓸 데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어보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우리를 소유하는 힘이며, 우리를 강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은사와 구별됩니다. 은사는 우리가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재능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내맡겨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불듯이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완전히 사랑만 의지할 뿐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불어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할 것입니다. 우리의 은사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사를 통해서 이룩해 놓은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 깨달은 하나님은 이론적인 짜맞추기에 불과할 것이며, 그의 독실한 신앙은 고집스러운 집착에 불과할 것이며, 또한 그의 헌신도 역시 자기 삶에서 자기를 채워보려는 불확실한 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 재능들은 역시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다운 가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그것들은 모두 살아 숨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고 연습해야만 할 은사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이끌어가고 우리의 좁은 세계를 풀어내어 열어놓는 힘이라는 사실, 이것을 우리 기독교 공동체보다는 이 세상이 훨씬 잘 알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시인들이 노래하는 사랑,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묶어주는 사랑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임하는 자연 현상적 능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랑을 생각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세기 때의 미술품들을 보면 하늘의 신성한 사랑과 땅의 세속적인 사랑을 뜻하는 두 여인상이 종종 나옵니다. 온전히 삶에 대한 흥미를 가진 땅의 사랑과 세상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린 하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그림들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이 세상과는 상관없이 그저 허공에 떠도는 주변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오히려 우리 삶의 매 순간에서 작동하는 중심입니다. 이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만하고 넘치게 실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이 기독교적인 사랑 안에 그 근원을 갖습니다. 프리즘을 통과하여 꺾여진 햇살이 여러 색깔로 비추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의 현실성이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말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고 경험한 그런 사랑과는 완전히 다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집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그저 쾌적하게 살아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뜻을 따르도록 사랑의 이름으로 요구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손에서 갈망으로, 즉 가장 좋은 것들을 소유하려는 갈망으로 변질됩니다. 갈망으로 변질된 이런 사랑은 항상 이기적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실제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내재한 갈망의 환영과 연결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갈망의 환영 뒤에 숨어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대방을 실제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자기 자신을 추구해나갑니다. 상대방에게서 자기를 성취해내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어긋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모색해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길일뿐만 아니라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것에 맡기지도 않고, 사랑 자체에게도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국 지나가 버리고 말 은사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도 쉽게 만족해버리는 걸까요? 만약 사랑이 선물처럼 마구 뿌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방자한 마음을 먹게 될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가 틀림없이 차지한다고 믿게되는 경우에만 그를 훼손시키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리운 사람이 떠나는 경우나 우리가 원하는 갈망의 환영이 실제로 성취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초조해집니다. 우리의 갈망에서 질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도처에서 악의와 시기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파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를 사로잡고자 하는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의 갈망에서 빚어진 환영이 우리를 속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그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자기 집착에 묶어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충만하게 넘쳐나는 사랑의 현실성 뒤로 무한정 숨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랑의 현실성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집요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거듭해서 사랑이 우리에게 발생한다는 건 얼마나 신기한 지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집착에 떨어지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거듭해서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와 함께 하는 이런 사랑은 어디서 실제로 구체적인 모습을 이룹니까? 바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고전13:4-7).
이 사랑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한 예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죄인으로 죽는 길을 가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이 이 세상에서 그 모습을 획득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궁극적인 사실이 언급됩니다. 사랑의 현실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사랑이 모든 은사와 대립해 있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사랑, 이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집착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이 여하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서 항상 활동하고 있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현재가 불순종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현재는 우리의 생명과 모든 인간의 생명을 견인해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덕성도 아니고,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사랑은 물론 자연의 힘이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은사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과제로서 우리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은사는 우리가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통해서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그 신뢰도 역시 우리의 깨달음과 우리의 신뢰에 불과하며, 그것 자체만으로는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한 사랑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은사를 철저하게 영적으로 만들며, 우리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은사와 달리 영원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귀한 은사라 하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기 집착을 극복해 주시는 그 길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이 자기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은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군데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만이, 지난 삶을 벗어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가슴에 충만하게 공급하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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