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히브리서

히브리서 67강

은바리라이프 2016. 1. 13. 22:18

히브리서 67강

 

<말씀; 히브리서13;1-6>

 

히브리서 13장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이 아침에도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공로로 그 속박된 줄을 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와 사랑과 은혜 안에서 마음껏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갑자기 여태까지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징계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신다. 이렇게 쭉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예수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해놓고 갑자기 13장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렇게 나오죠?

근데 여기에서 그렇게 인간들의 행위를 강조하는, 그런 내용이 나와 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럼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일까.. *** 응?

 

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안에 진짜 생명의 씨가 심겨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분명히 바뀌게 돼 있어요. 행위가 바뀐다는 말이 아니라 분명히 예전에 아무런 불편함 없이 행했던 모든 것들이 많이 불편해지고 어떤 지향성, 삶의 지향성 같은 것들이 이제 생기죠.

 

그러니까..그런 거예요. 사랑을 은혜를 진짜 이렇게 받아 본 사람의 그 삶속에서 분명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런 어떤 변화나 이런 것들이 본인에게도 감지가 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전에 그런 기사를 봤는데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이제 죽었어요.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송아지가 죽었는가. 수의사가 그거를 갖다가 열심히 찾아서 올라가 보니까, 송아지는 낳으면은 엄마소가 혀로 계속 핥아줘야 된대요. 그래야 그 송아지가 인제.. 어미의 사랑이죠 그것이. 관심이고. 근데 그 죽은 송아지의 어미소가 어떻게 태어났냐면 어미소가 이 송아지를 낳다가 난산이라 죽은 거예요. 그래갖구 혀로 핥아주지 못했는데 그거를 소주인들이 손으로 이렇게 계~속 어미소가 하는 것처럼 해줘서 겨우 살렸대요.

근데 이 소가 자기가 새끼를 낳고 어미소가 자기를 핥아준 기억이 없어요. 경험이 없으니까 그 애기소를 핥아야 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주인도 당연히 어미소가 있으니까 그냥 자기들이 할건 다했다 그러고 가 버리고 이래 버리는 바람에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예요.

 

 

. 그런거죠. 우리 안에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심으셨다 그러죠. 하나님의 법이라는 건 말씀이잖아요, 그죠? 말씀이라는 건 예수 그리스도, 창조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건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심겨졌다라는 건 은혜를 안다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다른 게 아니에요. 근데 너무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이에요.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그런 어떤 삶의 지향성이나 이런 것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내는 그런 데에는 아주 익숙한데~ 그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익숙한 그런 것들이 전부 이제 자기의 자랑이나 공로로 쌓이게 되는 거예요.

 

한국에서 크게 부흥하는 교회들이 특징이 뭐냐면 그런 어떤 사람들의 종교행위 이런 것들을 부추겨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벽기도로 유명한 그 강남의 어떤 그 교회는 육만 명에서 칠만 명이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주일예배도 아니고 뭐 새벽기도를 6부, 7부까지 한다니까.. 근데 그 새벽기도에서 설교되어 지는 내용이 뭐냐면? 그렇게 열심을 부려야,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 라는 내용이에요. 매일 매일 100%. 그러니까 그 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렇게 나와서 저 사람들이 분명히 그렇게 해서 복을 받을텐데 내가 안 나와서 내가 복을 못받으면 내가 뒤쳐지는 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애까지 다~ 데리고서 이케 나오는 거죠. 그거를 하나님이 정말 기쁘게 받으실까요, 여러분? 내가 나를 위해 하나님께 뭔가를 드릴려고 하는 행위.

 

하나님은 분명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래요. 순종이라고 번역된 말이 들음이에요, 사실은요 그게. 듣는 거. 말을 듣는 거. 올바른 말씀이죠. 예수를 듣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낫다. 이게 better가 아니라. 제사는 아니고 듣는 거 순종. 순종이라는게 상대방의 말을 듣는 거 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야지 니들이 하는, 몸으로 하는 희생제사는 하나님이 그러잖아요. 내가 무슨 고기 타는 냄새가 구수해서 니들한테 제사 지내라고 그러는게(?) 아니면 내가 그걸 먹겠니. 난 이미 질렸어.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제사의 행위는 하나님이 그 속에 담긴, 담아 놓으신 말을 들으라고 준건데 사람들은 그걸 계속 행함의 차원으로 이해를 하는거죠.

 

그러니까 은혜를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보면 사람이 굉장히 무기력해지고 연약해지는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에게. 왜냐면은 그 전에 그렇게 막 목숨걸고 나의 자존심을 지킬려고 하고 나의 가치를 지킬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인간 보편의 욕망이잖아요, 그것이. 그런 것들이 별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거지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세상은 그렇게 '나' 라는 이 육의 존재가 소멸 되어질 때 그렇게 인간이 몸으로 내어놓는 모든 것이 함께 소멸 되는거 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별반 관심이 없어지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대응을 저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고 그래? 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사실은~ 보세요. 여기보면은 사랑하세요 그러구, 용서하세요 그러구, 나그네를 대접하세요 그러죠.

그럼 이게 누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냈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잖아요. 당신의 뜻, 아가페, 이게 존재적 기능이란 말이에요? 그.. 아가페, 당신을 담아서 아들의, 아들 안에 담아서 우리에게 보낸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될때 그걸 우리가 '사랑 받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을 받았어요. 우리가 사랑받았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다 그래요. 요한일서에 보면은) 사랑받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거잖아요. 용서라는 게 창조의 개념이에요. 뭐 죄를 짓고 그래서 죽어야 할 자들인데 그 죄를 짓고 죽어야 할 자라는 게 제가 '예수 밖'이라는, '은혜 밖' 이라는 개념이고 거기에서 '예수 안'으로 끌어들이는 걸 창조라고 하는데. '없음'이니까, 그죠?

.. '창조'라고 하는데, 그걸 '용서' 라는 단어로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라구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셔요. '창조'하신 거란 말이에요. 왜. 용서하지 않으면, 창조하지 않으면 예수 밖의 없음이니까 먼지니까. 그죠? 용서가 내게 내려와야 우리에게 음...  창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보고 누구를 '용서하라' 라는 말은 너희들 가갖구 니들이 그냥 용서의 권세를 내가 줬으니까 가서 사람을 막 용서하고 다녀라 이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후~ ' 하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아라' 그러죠. 성령을 받아라 그래놓구 뭐라 그러냐면?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래요.

 

근데 그 평강이 뭐라 그랬어요, 제가. 성전을 완성했을때 쓰는 단어가 솨람~ , 샬롬, 평강이에요. 완성되다. 이제는 완성했다 내가. 가라 그래요.

 

가라~ 그래놓고 뭐라 그러냐면 '너희들이 용서하는 자는 하늘도 용서하고 너희들이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늘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요. 그 말은 용서하시는 권세를 줬다는 말이 아니라 그 용서가 무엇인지를 내가 너희들 마음에 두어서 이제, 너희들의 삶으로 입으로 그 은혜, 십자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살게 할 것인데 내가 완성해 놓은, 샬롬, 완성해 놓은 자들은 그걸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가 용서한다.

 

! 나는 용서받은 거구나~! 그걸 전해 주는 거지요? 그게 '용서'한다는 뜻이에요.

 

근데 선택을 받지 못해서 귀가 막힌 이들은 못알아 듣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을 못받는 거예요.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게 아니라. 어... 뭐 바꿔서 말하면 권세가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죠. 왜. 말씀이 들어왔으니깐요. 그리고 그걸 전할 수 있게 해서 그.. 내가 통로가 되고 통로가 되어서 말씀, 예수가 전해졌을 때 그걸 또 누군가 듣고 받아들이는 게 내가 '용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용서를 전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제가 여기서 설교를 하는 건 여러분을 '사랑' 하는 거고 말씀을, 사랑을 던지는.. '용서' 하는 거예요, 그죠? 용서를 전하는 거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셨어요, 사랑하셨어요, 용서하셨어요."

 

나그네를 대접한 것도 마태복음 7장에서 뭐라 그래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들에게 대접받기위해 먼저 대접했다.' 그 단어 똑같은 단어거든요?

 

어떻게 대접했냐구.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율법을 완.료.하시면서 테 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라고 완.료.하시므로 우리를 '대접' 했잖아요. 우리가 나그네라면서요, 그죠. 나그네를 대접한 분이 누구예요? 예수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나그네를 대접한 예수를 전해주는 거.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는줄 아세요?' 라고 전해주는 게 나그네를 대접하는 거란 말예요.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그냥 대접해 가지구 뭐..  혹시 그중에 하나 예수가 있으면 오케이 뭐 없어두 이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그네 대접이라는 게 여기서 이제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브라함과 롯이겠죠. 부지 중에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건 당시 고대시대 때는 나그네라는 건 지나가면 안 올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나그네를 대접한다 라는 것 자체가... 내가 부정되는 거예요. 내 유익과 ..그런 것들은 다.. 부정이 되고 내 손실을..  손해. 무조건 손해예요. 나그네를 대접하는 건. 고대시대 때는. 내 께 나가는 거고 내가 불편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롯과 아브라함이 어떻게 나그네를 대접했어요? 나그네가 찾아간 거란 말이에요. 그 집에. 그 양반들이 뭐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나그네가 찾아가서 그 나그네를 영접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누구예요?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예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예수님이 찾아가서 먼저 그들에게 대접을 해줘요. 믿음을 심어주면, 그들이 예수님을 '대접' 하는 거예요. 그게 나그네를 대접이예요.

 

음행이라는거 혼인이라는거 이 이야기도 뭐냐면?

하나님과 혼인을 한 이들이. 예수님이 보세요. 우리가 아담이 하와를... (믿게? 있게?) 할 때에 그게 이제 묵시 속에서 일어난 일을 모형해서 베레쉬트하는 거잖아요?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내가 된 거잖아요. 응?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근데 우리는 다 고멜같은 인간들이..이 역사 속에서.. 그런데 그런 아내는 버려야죠 백번이나~ 그죠? 근데 고멜같은 우리를 신랑이 끝까지 안버린 게 음행 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음행을 안한 거는 예수예요.

 

이혼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면? 예수님이 우리와 백 번, 천 번 이혼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이혼 안했단 뜻이지.

우리에게 뭐 너네들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말어.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먼저 우리를 대접하고 음행하지 않고 사랑했고 용서했고 다 한 거예요.

그걸 갖다가 우리가 이해를 하고~  "아^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났구나! " 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음행하지 않는 거요~, 나그네를 대접하는 거요~, 용서하는 거요~, 사랑하는 거요~, 그런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은 7절 보세요. 6절 보세요. 아니 5절~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이 왜 들어가 있겠어요. 여기에. '이거 해야 돼~' 이게 끝이라면 이 말이 여기 들어가면 안되죠.

 

니네들이 이걸 법으로 받아서 법으로 지켜낼려고 하면 그게 곧 죄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너희들을 징계, 자식 만들기 그 과정을 통과시키면서 예수가 너희에게 행한 이 진짜 섬김, 진짜 사랑, 진짜 용서를 할 수 있게 만들겠다라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게 예수를 나타내는 빛으로 살게 만들어 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죠.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면 곰방 이걸 법으로 받아 들여요. 율법으로 받아 들인다니까요? 그래서 '해 봐야지? 할까?'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먼저 이걸 하다보면 우리는 우리를 너무 기특하게 생각하게 돼요. 그래놓고는 그 진짜 예수의 사랑과 섬김과 나그네 대접과 용서를 자꾸 잊어버린다니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걸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기 위해 일단, 법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법을.. 그 법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진짜 살 수 있는가를 경험하게 해 주신 다음에 결국은 '아니지? 니들은 예수 믿어야 되는 거지?' 니들이 뭘 하라는게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그 행위를 믿으라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근데~ 그걸 믿게 되면 그렇게 그런 세상의 그 어떤 짐들 있잖아요. 그런 것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돼요. 그냥 내가 마음속에 꼭! 붙들고 있던, 요런 것들~ 내 마음이 가 있는, 그런 것들이 많을수록 그게 나에게 짐이 되잖아요. 자식에게 내 마음이 가 있으면 내 생명이 되고 돈에 내 마음이 가 있으면 그게 또 내 생명이 되고 또 내 명예나 자존심 이런 게 내 생명이 되고 또 나의 업적과 공로. 왜 목사들이 교회를 그렇게 키울려고 그래요? 여러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대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부터 사실 하나님이 마음을 끊어내 주시는 것이... 그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멍에예요. 멍에.

 

왜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살았거든. 하늘의 모든 권세를 다 차압 당하는 삶을 사시고는 결국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냥 완전히 죽어 버리는 삶을 사셨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그게 진짜 하나님 아들의 삶이다를 보여주는 십자가 이후에 하나님이 진짜로 그를 살려버리는, 그죠?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놓구 뭐라 그러냐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고~. 라고 이야기를 해요. 마음이 쉼을 얻는다는 건 '니들 마음이 가 있는 그것들을 내가 끊어준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멍에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 그때 당시의 멍에는 둘이 같이 지는 멍에거든요 항상 두 소가. 그러니까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처럼 젖 내놓는 암소처럼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멍에를 너와 같이 지고 내가 끌고 가겠다는 뜻이란 말예요, 그게. 그럼 그게 짐이 더 무거울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래야 짐이 가볍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내 짐은 쉽고 가벼우니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게 진짜 쉬는 삶이고 그게 진짜 자유에 이르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신앙생활마저.. 나의 가치를 높이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게 되면 정말 거긴 지옥이 돼요. 아주.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세요, 십자가를 지세요, 이런 말씀이 너~~무 그러니까 라면 한.. 밤 열두 시에 라면 두개 끓여먹고 자다가 체한 것처럼 이렇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불편하고 그래요.

 

우리 교회서 신앙생활하다가 다른 데로 가신 분이 저에게 이메일을 써 왔어요.  어휴 서머나를 떠났더니 그렇게 자유롭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대요. 허...ㅎㅎ  '잘 되셨네요.', 어 너무너무 자유롭고 마음이~ 너무너무 편하다구. 그니까 굉장히 불편했단 거죠. 여기서 앉아서 그 말을 듣고 있는 게 너무너무 짐이었고 막 속박이고. 그런데 그 말을 안 들으니까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로운지 모르겠대요. 몇 사람이 그렇게.

 

내가.. 그러면 나를 얼마나 미워했길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했겠어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그냥 말로 맨날 뚜들겨 팼으니..

이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 거라구요. 아.. 불편하다.. 그만 듣고 싶다....

근데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그 과정을 겪지 않으면 절대로~ 절대로..... 우리는 천국에 못 들어가요.

 

아니. 좌우에 양날 선 검이라고 하는데. 그 양날 선 검이 우리 안으로 헤집고 들어오는 게 말씀을 듣는 거거든요? 그게 마구마구 들어와서 나를 후벼파고 찢어내야 그래야 '예수님의 은혜, 그 보혈로 수혈받지 않으면 나는 죽는 거구나' 를 알게 되지, 그 말이 떨어지면 계속해서 막 기가 살구 '그래 맞아 나는 잘 하고 있는거야~ 비젼을 갖고 야망을 갖고 할 수 있다! 하면?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뜻대로 뭔가를 성취하고 이뤄낼 수 있어.' 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죠.

 

예수께로 가도록 그 말씀이 몽학선생이 되어야지 인간의 어떤 가치, 자존심을 챙기는. 그런 데는 아니 *습니까?

 

여러분 생활지수라는 게 있고 행복지수라는 게 있죠? 생활지수라는 건 돈이 많아지면 생활지수가 높아져요. 경제학에서 하는 이야긴데.

 

근데 여러분, 생활지수가 높아지면서 반비례하여 행복지수가 낮아진다라는 거 아세요? 대한민국의 GNP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국민소득이 뭐 20,000$ 이상이 인제 돼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생활지수는 높아지고.. 윤택해지고 편안해져요. 그래서 그런 어떤 편의주의나 실용주의 이런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행복인 줄 알아요.

 

근데 전체적인 행복지수를 재 보면 행복지수는 그거와 반대로 뚝뚝뚝 떨어져요. 미국의 행복지수가 100위 밖인가 그래요. 전 세계에. 그니까 여기는 편안한 곳이에요, 그죠? 뭐~ 웬만한 사람들 다 자동차 가지고 다니고 아무 때나 물틀으면 뜨듯한 물 쓸수 있고 그렇게 아무 때나 물을 틀어서 그 물을 마실수 있고 또 그 뜨듯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3% 밖에 안돼요. 근데 적어도 우리는 그 3%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죠.

 

먹을 거 없으면 다운타운에 나가서 줄만 좀, 시간투자만 하면 빵도 주고~ 밥도 주고~ 슾도 주고~ 뭐 여기선 굶어 죽을 일은 없어요, 사실. 근데 그거 이외에 더 다른, 또 다른 그게 공허하니까 또 다른 쾌락을 쫓아서 그걸로 술 먹고 마약하고 이러니까 사람들이 죽는 거지. 여러분, 굶어죽는 건 여기선 없어요. 그런 삶이 너무 그냥 쪽 팔리고 지긋지긋하고 해서 낙심되어 우울증 걸려 죽구~ 그거 어떻게 잊어 보겠다고 술 먹고 술취해서 죽구~ 이런거지 굶어서 죽는 사람 없어요. 홈리스들 살찐 거 보세요, 여러분. 세상에 배가 막 남산만큼 나와있어 뭘 먹었는지. 근데 그러한 나라에서 살면서도 사람들이 행복하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그런 반증이란 말입니다.

 

그니까 그렇게 인간들이 행복해야 돼! 이 세상에 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는 행복해야 돼! 이걸 탐심이라고 하는데 이 행복을 향한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행복을 쟁취할 수 있고 우리는 그리로 달려가야 한다라는, 요 마음, 이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구 이게 결국 이 세상을 지옥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나는 행복해야 돼! 이것이.

 

여러분, 지금 5초에 한 명씩 애기들이 굶어 죽는다고 그래요? 아프리카나 저런 아시아 오지같은데 보면 진짜 5초에 하나씩 애들이 굶어 죽는대요‥. 그리고 하루에 십만 명이 굶어 죽는다나..  하여튼. 어마어마한 거죠.

 

근데 그들을 다, 장지르노? 의 책을 보면은 그들을 다 먹여 살리는 데에 560억 달러면 된대요. 그러면 한 사람도 안 굶어 죽을 수 있대요. 560억 달러면. 근데 전 세계에 각 국가들이 군비로 지출하는, 그거 그냥 없어지는 거예요. 그게 7,800억 달러예요. 사람들이 하나도 굶어 죽지않고 살 수 있는 그 비용의 열 배 이상이 '저 새끼를 죽여야지' 하는데 사용되는 거예요. 그게 다 뭐예요. 내가 너한테 지지 않겠다라는 그 인간들의. 내가 너에게 지지 않겠다는 건 인간들은 상대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거야 라는 이것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거...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양식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무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조건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줬는데 우리의 이 악마성이 나만 행복할거야 저이 보다는 상을 내가 더 받을거야. 쟤보다는 내가 더 행복해야 돼 이게 결국 지옥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뭐 그런 새벽기도나 아니면 무슨 제자훈련이나 이런 거 하면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왜. 그렇게 하면 내가 뭔가 하고 있다. 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아니, 예수님이 직접 와서 제자훈련해서 홀랑 망했는데 무슨 제자훈련은. 하나님이 와서 제자훈련 해갖구 망했다니까요. 열두 놈 다 도망갔잖아요.

 

근데 왜 그런 거에 사람들이 혹하고 몰리냐면 그니까 어떤 프로그램 같은 거를 뭐~ 두 날개니 뭐니 하여튼 이름 근사하게 붙여갖구 딱 내놓으면 사람들은 하여튼 일시적으로나마 거기에 광분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사람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해주고 이거를 잘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거고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께 뭔~가 다른 대우를 받지 않겠니? 요런 마음을 심어주는 거 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주 그냥 전쟁이에요. 그것이~. 너보다는 내가 더 열심을 부릴거야 이게 전쟁이지 뭐예요. 그래서 저는 가끔 한국에 가면 기독교 TV에서 나오는, 새벽기도 몇만 명이 모여 있는 그런데 보면은 아, 저기가 지옥이구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러니까 코피가 질질 나도 그냥 앉아 있는거죠. 피곤해 죽겠는데 앉아 있는거죠. 아니 세상에~ 매일 같이요.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것도 다섯 분. 왜 미친 짓입니까요? 그게요? 그걸 목사님이 그냥 자랑스럽게 자서전에다 쓰구 ***이러구 ..  아니 어떻게 매일같이 비행기를 타고 새벽기도를 오냐고요. 뭐하는 사람이길래 도대체. 새벽기도를 꼭 거기와서 해야 돼요? 그니까 성전의 개념, 구원의 개념, 복의 개념 이런 것들이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냥 엉터리 그런 열심을 부리는 거죠.

 

여러분은 예수께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로 은혜로 가야지 절대로 내가 기특해지고 내 가치가 챙겨지는 그 곳으로 가면 실패하는 신앙인 거예요. 내가 ****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어떤 예수님이 당하신,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대접하고 음행하지 않고 한 게 예수님이 다 자기 존재를 그냥 부정당한 상태에서 했던 거잖아요. 예?

 

사랑이라는 건 예수 자체를 우리에게 목숨을 줘 버린 거고.. 용서도 마찬가지 예수가 무한이신 그 분이 유한으로 관입되어 내려와서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창조된 거니까. 예수가 머리가 됐다라는 거 자체가 유한의 영역에 머물겠다 라는 하나님의 의지였으니까 그게 신의 죽음이란 말이에요. 그게 피란 말이에요, 피.

대접! 마찬가지잖아요. 그리로 우리가 끌려가는 게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겠어요. 계속 당하는 거예요, 여러분. 배신 당하고 고통받고 핍박받고.

 

그런 거를 피해가면서 지식으로만 그걸 알고 있는 걸 귀신들도 갖고 있는 믿음이라고 그래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건 항상 예수의 십자가의 행함, 그 행함이 우리의 삶속에서의 에르곤. 이 일로 분명히 나와야 되는데 그것도 안 나오면서 그런 자기부인, 십자가의 삶이 행함으로 나오지도 않으면서 '나는 십자가 알아요. 피 알아요. 보혈 알아요.' 이게 아니래는 거예요.

 

저는 산상수훈을 이렇게 보면서 '야 내가 진짜 산상수훈을 강해를 할 수 있다라는 것 이 자체가 기적이구나...' 저는 정말 성경의 진면목을 봤다고나 할까요?

 

난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이런 것들이. 아, 율법이 완료됐다. 분명히 지난 주에 제가 설교했잖아요. 근데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ㅎ^ 그 밑에 쭉 나와요.

이거 도대체 무슨 뜻일까..아주? 어떻게 설교를 해야 될까. 피가 바짝바짝 말라요. 바짝바짝.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저는 이틀동안 밥을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밥맛, 입맛이 없어 가지고.

 

그니까 설교를 어떻게 만들어 낼까.. 가 아니라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어떻게 일관성을 갖고, 분명히 성령은 일관성을 갖고 이걸 쓰셨을텐데 왜 나에게는 이게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이거를 구약부터 다~.. 찾아 봤어요. 다 찾아보구 이게 진짜 율법이 가진, 정말 '마음까지 다스려야 한다' 라는 그것만을 설명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에게 '니네 마음까지 다스려라.' 형제를 보고 라가라고 하는 것도 살인이니까 '니네 마음까지 다스려라.' 이걸 우리에게 하는 말일까. 그러면 이 안에 도대체 예수는 어디에 들어가 있나. 이틀 굶고 찾았잖아요. 깜짝! 놀랬어요. 산상수훈은 그야말로 말씀의 보고예요.  로마서랑 똑같아요. 그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이 '이렇게 일관성있게 예수로 하나로 연결이 돼 있는 거구나.' 이게 요즘 정말 새록새록 깨달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별반 다른 게 뭐 이렇게 대단하게 나를 괴롭히거나 그러질 않아요.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되지 뭐. 이! 이거예요. 그리고 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시는 거라면 분명히 나에게 필요한 거니까 흘러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변화예요. 어떡해서든지 나를 증명하고 입증하려고 악다구니를 쓰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고통스럽고. 근데 그 와중에 말씀에 푹 빠져가지구 그거는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고 이게.. 야! 이게 이런 뜻이야? 이게 또 예수와 십자가가 이렇게 숨어있어? 이걸로 행복한 거~.

 

여러분, 그게 어떻게 성령받지 못한 자의 삶 속에서 그게 어떻게 그런 것이 기쁨이 될 수 있고. 근데 그거보다 기쁜 게 없는 거예요. 그거보다 큰 은혜가 없는 거, 그거보다 큰 선물이 없는 거예요. 그걸 그게 내가 부인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했든 내가 나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된다라는 그 마음을 예수! 말씀에게 빼앗기는 거. 그리구 다른 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니까 하나님이 또 해결해 주시겠지 뭐.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에너지가 거의 이제 소진이 돼갖구 말씀을 이케 깨닫구 정리하구 하면 할수록 저의 이 육적 삶은 더욱더 피폐해지고 아프고 어둡고 우울하고 .. 아 근데 그게 나아요. 말씀이 나를 잠식해 들어오면 이 내 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면 자랄수록 엄마가 망가지죠?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런 어떤 삶의 지향성이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우리 삶에서 나타나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도 그렇게 많이 사람들에게 오해 받고 손가락질 받고 핍박 받고 식구들로부터도 '너 니가 무슨 예수야?' 이딴 소리나 ㅎㅎ 듣게 되고. 그런 길을 겪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잘 감수하시고 쉬세요. 말씀 안에서.

 

저야말로 빨리 쉼이 필요한데 지리산에 들어가야 되는데..한 열흘 정도.. 이 기를 ㅎㅎ 좀 받아야 되는데~ 아유 계~~속해서 이렇게. 이제는 거의 탈진. 쓰러질 것 같아요.

 

근데 참 그 말씀 안에서 그 상태에서 행복할 수 있다 라는 게 이건 정말 기적인 거예요. 여러분도 그 말씀, 제가 하여튼 하나님이 주신 그것들은 남김없이 쏟아놓을 거니까. 잘 배우시고 잘 들으셔서 진짜 그러한가. 또~ 말씀을 상고하시고 하나님과 그 삶을 잘 살아 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저희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주고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근데 이 말씀이 이렇게 살아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 이거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이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시켜내고 우리의 살 바를 우리에게 지시해줍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놀라운 기적 속에 이 은혜 속에 선물 속에 있는 우리 실존을 행복하게 받아 들이게 하시고 그걸 누릴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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