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5 강
히브리서 12장: 12장 11절 부터 보죠.
<말씀:히브리서 12:11-12:17>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은혜의 십자가 예수의 이야기..우리 귀에 우리 마음에 들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징계의 이야기, 아들 만들기, 자식 만들기 이야기라 그랬죠! 징계의 이야기 이어서 거기에 붙어 있는 내용 이예요
그래서 언뜻 보면 너네 거룩하게 평화롭게 살아라! 안 그러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애써라 그러니까 열심히 그 은혜에 이르도록 달려라 그리고 쓴 뿌리 같은 걸로 사람들 더럽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라 음행하지 말어라 장자의 명분을 팔지 말어라 ..
이런 권고 명령..이렇게 보이죠. 언뜻 보면..그럼 여태까지 이어진 이 일관성이 깨지는 거잖아요
금방 모든 율법은 옛성전 구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대 제사장 예수 안에서 성취됐다가 히브리서 전체 맥이고 주제인데 여기서 또다시 인간의 어떤행함을 그렇게 강조하고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죠?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의 책 중에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이 있죠! “
소유냐 존재냐” 우리 인간은 소유형인간이 있고 존재형인간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소유형의 인간은 이기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존재형인간은 이타적인 삶을 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존재를 지향하는 그런 인간이 되자. 에리히 프롬의 주장인데 제가 보기에는 그 소유냐 존재냐를 따지고 그리고 인간의 형을 구별하는 그 자체가 인간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그 책 전체를 한마디로 줄이면 그냥 죄예요 죄..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가 되느냐 이기적인 존재가 되느냐 이걸..어떤걸 지향하느냐 거기에 관심을 둘 시간이 없어요. 사실은..
그러니까 인간 존재라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 실체를 알면 그래요
왜 우리는 살아야하지를 고민해야지 왜 우리는 존재하는 거지 왜 살고 있는 거지를 먼저 고민해야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는 이미 내 존재에서 발출되는 고민이란 말이에요.
나는 여기 있고 이 존재..그러니까 모든 신앙이라는 거자체가 이 인간 존재론에서 출발하면 나는 있어요. 이미..
내가 중심이고 나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교회.. 가정.. 나라 ..사회.. 이게 이제 우리 인간 존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는 사고..사고의 틀..그건 다 죄라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
그러니까 나는 없는 존재인데 죽은 존재..시체란 말이에요 나는요
그런데 이 내가 어떻게 존재가 되고 그리고 말씀에 적혀 있는 데로 하나님나라의 백성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지를 고민하는 거지 그리고 그걸 조금씩 인제 배워가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거는 건방진 고민인거예요, 사실은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하는데, 죄와 허물로 죽은건 시체죠. 근데 시체가 하는 그 어떤 행위가 살아있는 이에게 아름답게 보이겠습니까?
시체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는(?) 사람을 경악케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바퀴벌레는 그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해가 되는 거예요. 근데 그 바퀴벌레가 인간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설겆이 좀 도와주고 뭐 그럴수록 해되는 거죠?
바퀴벌레가 닦아놓은 그릇에 자꾸 돌아다니며 지가 설거지를 돕는다고 해줘봐요. 그러면 그거 밟아 죽여야죠 그거를.
근데 우리는 자기가 죽었다고, 죄와 허물로 죽은자라고 , 그리고 여전히 지금 죄를 짖고 있다라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고민한다니깐요.
기특한 고민인거 같지만 여전히 나를 챙기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를 챙기기 위해 자살까지 하는 존재예요.
그리고 솔직히 한 번 우리가 마음에 손을 얹고 고백해보잔말이예요.
“아, 나 빨리 천국가고 싶어. 나 하나님 나라 빨리 가고 싶어. 하나님 너무 만나고 싶어. “ 그거 지금 살기 힘들어서 그러는거 아니예요?
그렇다면 결국은 뭐예요? 편하게 살고 싶어하죠. 그니깐 인간은 천국가고 싶어. 나 하나님 만나고 싶어. 이것도 결국은 지를 위해서 . 그니깐 신앙이 뭐냐면 눈에 보이는 “나” , 이 “나”가 전부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무슨 뿌리 이런것들을 다 눈에 가시라고 이야기 해요.
그니깐 보이는 걸 신앙하게 만드는거죠. 보이는 “나” 만큼 진리가 어딨어요, “나” 만큼 현실이고 사실인게 어딨냐구요.
그러니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못 보는거죠. 믿음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보여지는 나, 그리고 이 “나” 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고상하고 훌룡하고 멋지고 힘이 센, 그러니까 착한 일도 많이하고 순결하고, 멋지게 발전된 나, 번영된 나, 그런 나 가 되어야 되는거예요.
이걸 근사한 말로 성화라고 바꾸어놓은거예요.
그래놓고는 자기가 한 그 행위, 그리고 그 행위를 한 “나”를 신앙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의 목적이 전부 착해지는 것 성숙해 지는 것,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자가 되는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나’ 잖아요, 그건요.
나를 신앙하는 거예요. 나의 행위, 내가 내놓은 열매, 그걸로 행복해하고 기뻐하는거 나를 신앙하는 거란말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대해서 고민들을 하지 않으니깐 , 그냥 남들이 다 그렇게 가니깐 그렇게 가는거예요. 왜냐면 온 세상이 다~ 그리로 가고 있거든요. 안 돼서 그렇치. 아니예요?
그래서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거예요, 전부.
그런데 그 모든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거예요. 자기를(?). 자식들 위해서 산다구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집이라도 한채 남겨두고 가야지~, 그러고 열심히 돈 모으고 계시죠? 내가 뭐 해준거는 없는데, 그래도 저놈 저거 “ 아유, 나 죽으면 어떻게 살어~ 저거. 집이라도 한채 마련해 줘야지. 그건요, 죽어서까지도 저 놈은 내꺼야 를 주장하는 마귀적 본성인거예요.
여러분, 죽으면 다 끝이예요. 죽으면 그냥, 하나님나라에 가서 어떤 놈은 지옥, 어떤 놈은 천국 이렇게 갈라지고 모든 관계는 다 끊어져요. 근데 “너, 내가 죽어서도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돼” 라는 요게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이게 악마적 근성이라니깐요.
저 새끼는, 죽어서도 , 내가 죽어도 저거는 나를 기억해야돼., 나에게 고마워해야돼. 그리고 내가 뭘 남겨준다는 자체가, 그건 나아, 내꺼야 , 넌 내꺼야 를 끝까지 주장 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놓고 우린 지금 사랑한다고 그러고, 희생한다고 그러고 , 전부 마귀새끼들의 짓인거예요 이게요. 성경은 유일하게 죄를 “너를 위해서 사는것” 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사야서 5장 8절에 보면, 전토에 전토를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다그래요.
그리고 너를 위해 사는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말이예요. 그놈들은 다 죽일거야, 그런다니깐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그거죠. 자아확장. 나 구축하기 잖아요. 그죠? 나 쌓기. 그니깐 죽어서 까지도 못 놓은거예요.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내 편한거 찾아가는 거예요. 왜 자살해요? 살기 힘들어서 자살한다는 그 자체는, 정말 자기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다른말로 바꾸면, 너무 살고싶어서 죽는거예요. 너무 살고 싶어서 죽는거예요.
그러니깐 인간에서 나오는 그 어떤것도 선 한것일수가 없어요.
선한 행위는 살아있는 것에서 나올때 “행위”가 돼요,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위.
죽은 것에서 나오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예요.
강씨들이 돌아다니면 그거는 공포예요, 공포. 죽은건 죽은자답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걸 감추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내놓고 심지어 죽어있는 시체에까지 화장을 시켜놓고 있더라구요. 뭐가 달라요, 그거요.
죽음이 무서우니까 자꾸 그걸 직시하기 싫어서 화장해놓고 가려놓고 그러는거예요. 자기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죽음이 무서워서.
그런데 우리들이 하는 신앙생활이 전부 뭐예요?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징계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내가 니들이 살겠다하는걸 부수겠다 , 이게 아들만들기, 자식 만들기, 채찍이란 말이예요, 그것이.
12절 부터 보세요.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손 발 무릎이 나와요. 이거는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제 전존재, 인간의 전 존재.
그거를 일으켜 세우다. 이게 뭐냐하면 성전을 올바로 짓다 라는 단어거든요, 이게.
사도행전 15장으로 가면 나와요. 부활의 언어예요, 이것이.
너희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우리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하는거예요. 없는자 인거예요, 이거요.
그럴 일으켜 세워야 된데요.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라고 하는데, 그니깐 이거 완전히 길을 만들어 내라 라는말로 보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과 다르죠. “내가 길”이라고 그랬는데, 우리더러 길을 만들라고, 그게 말이 되겠어요?
이 단어는 행위의 그 진로를 바로 잡아라 란 뜻이예요.
그니깐 개역성경을 그냥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으로 보게 되면 여러분 다 오해하게 돼있어요.
그렇치 않아요? 성경은 성도만 알아봐야 돼요. 그니깐 설교를요, 불교인도 알아듣고, 이슬람교인도 알아듣고, 그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매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거, 설교가.
그러면 불교인이 알어들어야 돼요, 못알아 들어야 돼요. 못 알아 들어야 돼요!
그런데 설교 시간에, 착하게 사세요, 성숙한 삶을 사세요, 사회에 영향을 미치세요. 이거 불교인 알아 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알어 들어요!
그럼 이거 설교라고 그래요? 안 그래요? 이건 도덕 강연이라고 하는거예요. 성도만 알아들어야 설교라니깐요.
그니깐 여러분이 어렵다고 하는건 여러분이 아직 불교인이시기 때문에 ㅎㅎ 그런거예요. ㅎㅎ
아들을, 예수를 이야기 하는데 못알아듣겠다고 하면, 뭔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니깐 똑같이 불교 강설을 해달라는 거예요, 뭐예요.
곧은길을 만들어, 행위의 진로를 이렇게 바로 잡아서, 저는 다리, 이 저는 다리는복음서에 나오는 왜 절뚝발이, 절름발이, 뭐 여러가지로 번역돼있지만, 이게 부정한 자의대명사예요. 응? 저는 자가 일어서고, 할때 쓰는, 그 이사야서에서도 나오죠. 예수님이 그 요한에게 전하는 말에도 그 단어를 쓰잖아요.
그니깐 부정한자 , 이 죄인이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되는 길, 구원을 받게 되는 길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행위의 진로를 바로 잡는 거래요.
그니깐 행위의 진로를 바로 잡는다라는 건 니들이 내어 놓는 인간적인 그런 행위 율법적인 행위, 그 행위는 안된다는 거예요.
진로를 똑바로 잡아라 가, 하마르티아 가 진로를 어긋난거니까, 제대로 된 진리의 길로 들어서라는 얘기인데, 그게 뭐냐면, 예수 믿어라 라는 얘기예요. 그걸 위해 내가 너희들에게 징계를 준다 라는 뜻이란말 입니다.
그럼 14절을 보세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그럼,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는 모든 사람과 함께 그니깐 “모든 사람이” 란 뜻이예요.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이렇게 해야돼” 이런 뜻이예요.
그니깐, 여럿 모든 사람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기를 애써라, 이런 말 아니예요.
모든 사람과 함께 화평, 그니깐 모든 사람은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교회로 선택된 자들아, 너희들은 모두 화평: 에이레네, 거룩, 화평과 거룩을 쫓아 따라가야한다 라는 뜻이예요.
그럼, 거룩은 뭐다? 예수님이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 그러잖아요.
거룩은 여러분이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들어간 예수가 거룩이예요. 그죠?
거룩이 되셨다, 누가?, 예수가~. 그니깐 거룩을 쫓아가라. 쫓아가라는 건 예수 믿으라는 말이예요.
그럼 화평함을 쫓으라는건 뭐예요, 화평.
예레미야서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뭘 얘기 해요?
화평을 이야기한다 그러죠?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님은 “아니다, 니네는 이세상속에서 평화를 추구해서는 안되는거야, 내가 니들을 바벨론에게 아주 팔아버릴거야.” 그러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뭐라고 그러는데요 “ 아니야, 평화롭다, 평화롭다” 근데 하나님은 “나는 그런 놈들 보낸적 없다” 그랬죠, 예레미야서에서.
그럼 평화를 이야기하는건 누구다? 역사속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건 거짓선지자예요.
그러면 화평을 쫓으라는 건 뭐냔 말이예요, 도대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와서, 내가 화평을 주노니, 평화를 주노니, 내 안에 있는, 세상이 줄수 없는 평화, 내안에 있는 평화를 준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예수님이 말하는 평화는 다른거죠.
열왕기상으로 한번 가보세요.
열왕기상 9장으로, 열왕기상 9장 25절 한번 보세요.
자, 솔로몬이, 솔로몬이, 샬로몬, 평화의 왕, 단어자체가~. “솔로몬이( 평강의 왕)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제단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리라 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 여기에서 솨옴(?) 샴, 샬롬, 이 단어가 어디에 쓰였는지 아세요?
솔로몬에 쓰였지만, 그 뒤에 성전짓는 일을 마치다 가 샬롬인거예요. 솨람.
그러면, 평화/ 평강이라는 건 하나님이 성전짓는일을 완성하셨을때 오는 것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이제 교회라는 성전이 새성전이 완성됐잖아요. 그때 “평강”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완성했어. 텔레테스타이. 다 이루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평강.
그럼 화평은 이 세상속에서 우리가 심히 인간들끼리 착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면서 서로 서로 사이좋게 애쓰면서 우리의 행함을 갈고 닦고 연마하여 만들어 낼수 있는게아니라는거죠.
진짜 화평, 평화는 뭐라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료되는 성전짓기의 완료, 그게 화평/평강이예요.
그래서 여호와 샬롬, 그 샬롬이라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이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나오죠.
죽어야 되는 놈인데, 내가 여호와를 봤을때 죽어야 되는 죄인인데, 근데 반석의 일, 반석이 불을 내어 제물을 태움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십자가로 평화/화평이 완료되는거예요.
그래서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이 거기 한 번 나오는 거예요.
그니깐 평화/화평이라는 건, 여러분이 그냥 미움이나 분노 이런걸 꾸욱 참고 옆사람하고 이렇게 그냥 평화로운 척, 아무일 없는 척, 하는 그게 아니예요.
거짓 선지가가 말하는 게 그거예요. 평화롭다, 평화롭다. 다 거짓말이예요.
이 세상은 평화로울수가 없다 라고 솔직히 얘기해 줘야 돼요.
그니깐 복음이 들어가면 우리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가 폭로가 돼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내꺼로서가 아니라 정말 객관적인 대상을 사랑할수 없는지가 자기에게 자각이 되는 거예요. 드러난다니깐요.
근데 오히려 우리는 그냥, 사랑하세요, 사랑하세요, 이러고 앉아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들에게 내가 칼을 주러 왔다, 이건 예수님이외에 그 어떤 것도 너희들의 생명이 될수 없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제 고지해 주는 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진짜 우리가 내껄로 끌어 당기고 있는것들을 내가 진짜 얼마나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고 있다) 나만 사랑하기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는건 미워하는 거예요. 그렇치않아요? 그건 이용하는 거거든요.
그걸 내 존재의 확장으로 내가 이용하는 거를 우리는 사랑으로, 이라고, 이야기해요. 내 편 만들기 위해서 사랑하죠, 다아~.
그러니까 내편 안들어주면 돌아서서 배나 더 흉악한 적이 되는게 인간이잖아요. 그걸 무슨 사랑이라고 그래요, 그거를. 응?
저 앞에 와서 제 앞에서 무릎꿇었던 사람이 세명이나 있어요. 나는 죽을때 까지 목사님하고 갈거예요. 그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지금 저를 가장 괴롭히는 있는 사람들이예요. 내 앞에서 딱 세 명 무릎 꿇었거든요. 사무실에 와서. 그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랑은 다 그 정도예요.
그건, 내가 너를 이용해서 네 측근이라는 것을 힘으로 누려보겠다 라는거였지 사랑이 아니예요.
근데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 그 수준이예요. 대 부분.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복음이 니 안에 들어가면 니들이 얼마나 미워하는 자들인지를 알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이게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는 그말이예요. 미워한다는 뜻이예요.
억지로 그냥 자식을 미워해야 되나, 아내를 미워해야 되나,그런거 자연스럽게 되죠. ㅎㅎ
남편, 자식 미워하는거 그냥 , 성경말씀중에 자연스럽게 되는건 그거 하나인것 같애~. 살다보면 자연히 ㅎㅎ 저거 웬수되는거~. ㅎㅎ
그게 아니라, 억지로 미워해야 된다, 이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사랑할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해준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렇게, 어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나를 확장하고 내 존재를 쌓아서 그 하나님앞에 세상앞에 훌룡한 존재로 이렇게 증명될려고 그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는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예요.
화평과 거룩함, 예수예요, 예수. 그거 쫓아가라, 믿음 쫓아가라. 안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왜? 그게 “주”인데, 그게 없이 어떻게 “주”를 봐요.
그러니까 이런거를 갖고, 너! 거룩하게 살아야 돼, 모든 사람과 아주 화평하게 살아야 돼, 안 그러면 너 지옥간다” 이렇게 설명하는게, 이게 성경을 거꾸로 설명하는 거예요, 그건요.
근데 그거를 올바른 설교라고 그래요. 그거는 불교인들도 알아듣는 설교예요.
자, 제가 불교인들 앞에, 절에 가서 이렇게 설교를 했어요, 그 사람들이 알아 들을까요?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하나? 그럴꺼 아니예요. 그래야 설교예요.
모든 사람이 공감하면 설교 아니라니깐요. 그거 말씀 아니라구요.
근데 무슨 적용, 어플리케이션, 그건 아무나 다 알아들을수 있는 거를.
(히)15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보세요. 금방 은혜가 나오잖아요.
은혜는 뭐예요.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선물로 주는게 은혜예요. 카리스.
그러니까, 니들이 화평과 거룩함을 니들이 만들어 낼려고 하면 절대 은혜에 못 이르게 된다라는 뜻이예요.
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했을때 , 예수님이 그런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거야, 믿어” 믿는거예요.
그러니깐 예수님이 그러죠. 요한의 제자들에게 뭐라고 그러냐하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죠. 나를 말미암아 실족치 아니하는~ 뭐, 이러지만,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이있다고 그래요.
군데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에게 걸려 넘어져요. 어떻게 걸려 넘어져요?
예수 믿으면 내가 뭔가 어떻게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어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라고 이렇게 알메니안주의로 그렇게 받아들여요 . 아니라고 그러는데 대분분 그렇게 받아들여요.
그게 예수에게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하고, 믿어 지옥가는거예요.
그러니깐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나한테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있어. 그래서 바울도 예수를 걸림돌이라고 그래요.
다시 보세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나니”
그러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라고 하면서, 또 라는 단어은 없어요 헬라어에. 그냥 쓴 뿌리가 나서, 쓴 뿌리가 뭐겠어요?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는 쓴뿌리, 더럽게 하는 쓴 뿌리. 율법주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가 율법과 은혜를 대조하면서 나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안에서 은혜 그리고 화평과 거룩이신 예수, 이것이 아닌 다른것, 이걸 쓴 뿌리라고 그러죠.
이 쓴뿌리를 이 서신서, 아니 서신서가 아니라. 선지서 이쪽으로 가면 눈에 가시, 엉겅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뭐냐면, 눈에 보이는 것 이란 뜻이예요. 안목의 정욕이라고도 이야기를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그니깐 눈에 보이는 어떤 변화 나 성숙이나 이런것들을 갖고 신앙을 판단하려고 하는것, 그리고 그걸 쫓아갈려고 하는것.
이건 정말 저급한 수준이예요, 여러분. 나쁘다라는게 아니라 저급한.
여러분, 애기들 한번 보세요.
애기들은요, 애기들은 지 엄마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그 산소위에서 재밌게 놀죠, 흙장난 하고. 힘들어서 우는데.
웬만큰 철든애는 그 앞에서 그렇게 못 놀아요, 왜. 이제 난 어떻게 살지? 부담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되는데 이제 어떡하지? 애들은 그걸 몰라요. 그니깐즐거운 거예요. 참된 평화.ㅎㅎ 참된 안식.
아니 , 전쟁이 일어났는데 탱크에 올라가서 노는게 애들이라니깐요. 적군의 탱크에 올라가서.
근데 하나님이 이 어린 애기들같지 않으면 니네들 천국 못 들어간다 그래요.
무슨 말이냐면, 니들 인생 니들이 책임질려고 하면 니들은 걱정 근심 눈물 고통속에서 헤메게 돼, 거기가 지옥이야. 나에게 맡기라니깐,
그게, Infant 애기가 되지 않으면 너희들은 절대 천국 못들어간다,라는 이말이란 말이예요.
애기들이 지들 행위에 신경을 써요, 뭐에 신경을 써요. 변소에 빠져도 와갖구 “빨리 닦아줘” 라고 이렇게 엄마한테 명령을 하는게 애기들이라니깐요. 왜 안 닦아줘, 마치엄마는 닦아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인것 처럼.
그렇게 하라는게 아니라 , 그렇게 그냥 자기 존재를 스스로 살려야된다라는 이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는거예요.
그게 예수를의존하는거예요. 근데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의존한다 말이예요.
그래서 그게 어떻게 근사하게 나오면 구원의 확신이 있다가, 그게 쪼금 덜 나오면 구원의 확신이 사라지고.
그니깐 요즈음도 맨 구원의 확신에 대한거만 진리인양.
구원의 확신을 왜 여러분의 꼴을 보고, 가졌다, 안가졌다 그러냐구요.
아니, 우리는 “없음”이라면서.”없음”이란 존재가 왜, 꼭~ 나는 천국에 가야돼, 라는 거기에 집착해야 되는거냐구요. 너무 아플까봐? 힘들까봐? 누가? 내가~. 고 마귀라니까요, 그게.
그걸 사라지게 만드는게 복음이며 징계란 말이예요.
내가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게 뭐예요? 요 “나”가 고통당할까봐 그러는 거 아니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거? 그거 예수 믿는거 아니예요, “나” 믿는거죠.
그럼 결국 우리는 어는 지점까지 가냐면 “ 하나님, 하나님이 나 지옥보내도 아무 할말 하나도 없어요 “ 이렇게 힘이 쭉 빠져야 되는거예요.
근데 그 자리로는 죽어~도 그냥 안 내려갈려고 다들 그러고..
자,16절 보세요.
“음행하는 자, 혹 한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파는 에서”
자, 음행하는 자, 즉 한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파는 자,
거래라는단어가 나와요 장사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게 망령된 자예요.
자, 에서가 팥죽으로 장자권을 팔았다는것 자체가 , 장자권이라는 것은 이젠 구원, 영생을 모형하는거였어요.
이스라엘은 내 장자다,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그니깐 “우리”를 얘기 하는거예요, 교회.
하나님이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예수안에 우리가 들어가 우리는 다 맏아들이예요, 사실은요.
다 맏아들, 아들이예요, 아들.
그 구원, 영생이라는 것을 뭐와 바꿨다고 그래요?
영생은 예수 믿어서 그니깐 야곱처럼 형옷, 장자의 옷을 슬쩍 훔쳐입고, 엄마가 해준 은혜의 밥을 아빠에게 드리는게 구원인데, 에서는 어떻게 했어요?
“팥죽먹고 힘내어 내가 아버지께 기쁜일을 해야지” 가 에서였죠.
밥을 왜 먹어요? 힘 낼려고 먹죠, 나를 살리려고 먹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고 그래요.
“내가 떡이다, 내가. 나에게 와야 산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나를 마셔야 된다”고 그러고” 나를 먹어야 된다”고 그랬단 말이예요.
그러니깐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란 말이예요.
야곱은 예수를 먹은거고, 에서는 이 땅의 떡을 먹은 거예요. 힘 내서 훌룡한 사람 되기 위해서.
그래서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에서가 만들어 온다니깐요.
무슨 죄를 졌어요.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만들어 왔는데.
근데 왜 그가 에돔의 조상이 되고 모든 저주 받은 자들의 그 상징이 돼냐구요.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 했고 야곱새끼는 집 나갔을때 아버지 모신게 에서란 말이예요.
장자~. 탕자의 형.
그 얘기 잖아요, 탕자의 형.
그런데 그렇게 해 놓으면 인간은 항상 어떻게 된다구요?
에서의 이야기가 탕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는거예요.
아버지,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왜 나에게는 상 안주세요, 이렇게 나가는거죠.
이놈들이 지옥간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내가 양식으로 먹어서 이거를 힘삼아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훌룡한 사람으로 한 번 살아볼께, 굉장히 훌룡한 신앙인인거 같지만, 귀있는이만 들으세요. 그게 죄예요.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냐.
예수라는 밥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십자가로 끌고 가는 그 삶이 선한 행위예요. 예수 믿는거예요. 그게 선한 행위예요.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사망의 몸. 사도 바울은 죽기 전까지 자기를 사망의 몸, 시체라 그랬단 말이예요.
난 시체다. 여기서 누가 나를 건져주겠어. 너무 힘들어서 자기가 매일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지가 탄식으로 내놓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하셨어요! 다 얘기 해 놓고, 자기의 실존으로 돌아가 보면, 아! 이 시체 이거 어떡하면 좋아, 이거. 썩은내 풀풀나는 이 시체 어떡하면 좋아.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한 모든 행위가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고백하고 간거예요.
내가 내 놓은게 다 똥이구나, 그랬다고요. 모양은 있는데 영양분은 다 빠져버린것. 헛 것이라는 거예요. 헛 것.
그래서 배설물이라고 한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아무런 가치 없게 놔두신거 아니예요. 하나님은 그걸 선용하셔서 선에 사용하세요. 이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고, 그래놓고 하나님이 그걸로 우리에게 상 주는 거예요. 니가 이렇게 잘 해서 내가 너 구원했다, 이렇게 칭찬해주시는거.
그 앞에서 면목없어 면류관 벗어서 “하나님, 이거 하나님 다 해주신거잖아요. 왜 저에게 자꾸 면류관 씌워주세요. 이거 아버지거잖아요, 원래” 이게 24장로 얘기예요.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아들의 이야기. 24장로. 열둘이 아들이라구요, 아들. 그래서 예수님이 열두살에 옛성전에 올라가서 박살낸거예요, 말씀으로.
아들로 올라간거라구요. 열한살, 열세살이면 안돼요. 열둘이어야 돼요. 아들로 올라가야 돼거든요.
음행하는거, 그거 음행이라는 단어가 콜로스라는 단어인데, 요 단어가 타프라스코, 이게 장사하다 라는 단어예요, 원래가. 장사하는, 장사하다 라는 단어에서 남창, 남자가 몸을 파는것, 이걸 인제 음행이라는 단어로 쓰는데, 장사하다라는 거예요, 원래는.
그니깐 음행, 간음, 성경에 이렇게 많이 나오죠. 이 이야기가 뭐냐면 나를 위해, 나의 유익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음행,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걸 장사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고요. 내 몸을 위해 장자권파는거~. 그 이야기 하는거예요.
나의 어떤 가치나 아니면 사람들의 평판이나 아니면 나의 보람 이런걸 위해 말씀까지도 예수까지도 사용해 버리는거. 이게 인간들의 악마성이예요. 그러니깐 섬짓섬짓해요. 성경,성경을 보면. 성경이 마귀라고 하는 그런것들이 내 안에 다 발견이 되니까.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 은혜, 피, 이리로 안 돌아갈수가 없는거예요.
예수만 믿어야 돼요, 예수를 의지 해야돼요. 안 살려줘도 상관없는데, 아니 할 말 없는데, 상관없으면 안돼죠.
할말은 없는데, 나는 예수. 그니깐 사도행전에서 그러는 거예요. 천하 인간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다고. 자식, 돈, 어떤것도 준적이 없어요. 예수만 줬데요.
그런데 보란 말이예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예수때문에 자살하는 사람 보셨어요?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봤죠. 예수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도 자식때문에는 자살 해요.
왜? 예수는 돈보다도 못한거예요. 자식보다도 못한거예요. 우리에게 있어서. 그러찮아요?
ㅎㅎ 예수믿고, 뭐야, 이사 비용을 좀 마련할려고 집에 있는 금을 많진 않지만 졸업반지, 옛날 결혼반지나 이거는 신학교때 이미 다 팔어먹었고, ㅎㅎㅎ 그런걸 팔았어요. 근데 얼마 안되더라구요. 속으로 그런거예요. 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해서는 안되는거구나.
황금을 보기를 금같이 봐야됐던건데, 아 그동안 내가 이걸 왜 이렇게 홀대를 했던가.
금방 내 필요앞에서는 무슨 결심이고 나발이고 이런게 초개처럼 사라져요.
뭐를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해요. 예수를 보기를 돌같이 하죠, 우리는요. 거의 잊고사니깐.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 지지 않았으면 어떡할뻔했어요, 우리요.
그런데 그 분께 감사가 안 나와요? 여러분…
자 , 다시요.
한그릇 음식을 위하여, 이거는 우리를 살리는 에너지 세상것들, 뭐 어떤, 우리의 보람을 챙겨주는 그 어떤것, 그게 한 그릇 음식이예요.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펴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거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를 구할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러분, 우리는요, 아니라고 하지만 모두가 여전히 창조주의 자리에 서 있어요.
여러분이 여러분을 이렇게 변화시킬려고 하는거 자체가 새로운 나를 창조할려고 하는 창조주의 욕구예요.
자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살아줘야돼, 라는 이 희망과 비젼이, 나는 창조주야 너는 내가 원하는대로 창조돼야돼. 이거거든요.
피조물의 자리로 그가 내려가면 어떻게 되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거 그게 선이야, 그러니까 그게 어떤것이라도 나는 수긍하고 받아드릴거야, 이리로 가요.
근데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게 뭐냐하면, 인간이하나님 흉내내기란 말이예요.
근데 우리는 성화라는거 자체, 그거 가지고도 하나님을 흉내내고 있는거 라니까요.
하나님이 변하게 해주셔야 변해요. 변하지 않게 하시면 안 변해요.
그러면 그거를 확실히 안다면 내 안에서 나오는 모든게 다 예수의 것이 되는 거죠. 자주 나오지도 않지만, 가끔 나오는 어떤거. 나머지건 다 진짜 내거고.
가끔 나오는 그 어떤것도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걸 우리가 올바른 신앙이라 그런다고요. 올바른 신앙.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요, 우리의 모든걸 다 품어 안고 먼저 설명해주시는 분이예요.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묵시의 완료된 하나님의 나라, 성전을, 진짜 성전이 옛 성전을 입고 내려와서 옛 성전이 깨지므로 말미암아 진짜 성전을 설명해 준거 잖아요. 그죠?
부활이라는게 뭐예요. 이 땅의 육의 삶은 이건 헛 것이다. 그죠?
새로운 삶이, 진짜 완료 되어 있는 어떤 삶이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게 부활이예요.
그래서, 부활신앙, 부활신앙들 하는데, 그거 무언지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서 뭐 줒어 들은건 있어갖구 부활 신앙, 부활 신앙, 겨우 한번 한다는 얘기가, 나중에 죽어도 다시 살려준다면서요. 에유. 헹? ㅎㅎ 그것도 역시 “나”죠. 죽어있는나, 이거 불쾌하니까. 나중에 또 다시 살려준다면서요. 이걸 부활신앙이라고. ㅎㅎ
그게 아니라, 이거 자체, 너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게 부활신앙이예요. 진짜 “너”, 이거는 하늘에 완료돼있고, 이 땅에 너는 아바타라는 거예요.
아바타, 컴퓨터에서 아무리 뭐 깜찍하게 얘기 해도 그 아바타를 진짜 사랑하는 놈 있어요?
요즘 정신병자들이 많아 갖고 뭐, 만화 케랙터를 진짜 사랑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그러던데.
우리는 아바타라니깐요. 진짜 여러분은 하늘에 완료돼있어요.
그걸 부활이라고 그래요. 그걸 믿는걸. “이렇게 죽어도 다시 살려준대” 가 아니라 이미 살아있는 여러분을 믿는거. 이거 아바타라는 거예요. 이거 헛것이라는 거. 이거는내안에 있는 진짜 말씀, 진짜 아들 , 진짜 것, 이걸 깨닫게 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요 수단이요 도구라는 것.
주일날 살펴보겠지만 , 아,, 제가 ,,,그 요번 주에 설교할, 여러분은 별로 흥미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이렇게 하루종일 읽으면서, 그 헬라어로 읽는데 , 아, 사도 바울은 정말 천재더라구요, 천재.
우리 보통, 글을 쓸때 문법이나 맞춤법 이런거, 완벽하게 쓰는 사람 별로 못봤어요. 예?
지금까지 딱 세명 봤는데, 하여튼 여러분 그러죠? 말하면서, 제가 지금 하는 말도 문법에 안 맞는 말이 굉장히 많아요. 맞춤법 바로 틀린것 많고 그죠? 성경에는 그런것없을까요? 근데 없어요.
누가 다 교정을 본걸까요? 한 열번씩?
그런데 성령이 편집을 하니깐요, 그거를 쭉 보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도 수단이라고 표현을 해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수 ,인간 적인 예수, 인간 예수.
옛 성전을 입고 온 참 성전인 예수도 방법이라고, 수단이라고, 도구 라고 그래요.
진짜 하나님을 설명하긴 위한 도구.
하물며 여러분은요. 마찬가지예요.
아, 그러찮아요. 창세전에 언약이 있었어요.
우리라는 이 존재, 이거는 생각지도 마세요. 그냥 이 우주가 생겨나기전, 시간이 생겨나기전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 있었다는 거, 그게 에베소서 1장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그 언약에 의해 창세, 시간이 이제 역사가 창조됐다면 , 그 언약을 풀어내고 , 그 말씀을 풀어내고 설명하는 도구들로 역사가 시작된거고 우리가 시작된거라는 뜻아니예요. 예?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다 라고 분명히 성경에 이야기 하는데 창세기에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거예요. 뭐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해내는 도구로아담이 쓰인거예요.
그러니까 선악과니 뭐니 이게 다 그냥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작정과 뜻속에서 다 있었던 거예요.
만약에 그거를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이라면 불완전한 하나님이 되는거죠.
그러찮아요. 하나님은 온전하신분이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데 어떤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분은 불완전한 하나님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죄나 뭐나 뱀새끼나 뭐나 다~ 하나님의 계획속에 들어있던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라고 하지 아담이 죄를 처음 시작했다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어디서 들어왔겠냐구요, 이미 있었다는거예요, 그러면은.
이걸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마귀가 루시퍼가 반역을 했기때문에 죄가… 그러면 그 죄는 피조물이 창조해 낸 죄에요? 그러면?
피조물이 뭘 창조를 할수가 있어요. 죄를, 죄도 못 창조해내는게 피조물이예요.
모든건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속에 들어있는거란 말이예요.
그리고는 뭘 설명해 내시는 것 뿐이예요.
그러니깐 아담을 너무 미워하고 그러지 마세요.
아, 그놈 때문에 우리가 지금 뭐냔 말이야, 이거. 그러지 말고, 그 아담을 통하여 뭘 설명해주기 위해 아담이 있었고, 선악과도 있었고, 다~ 있었던 거예요.
그러한 없음, 있음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 열심히 달리려고 하는 그런 놈들의 팔 다리 짤라 버리고 대가리 부셔내는게 뱀이예요, 뱀.
하나님이 뱀을 저주할때 뭐라고 그래요? 너 인제 부터 기어 다녀! 그죠?
그러면 다리가 있었다는거예요. 팔 다리 짤라버려서 땅에다가 기게 만들고 , 나중에는 대가리 까지 부셔버리는게 하나님의 구원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뱀이 되어 죽은거예요. 그러니 팔 다리 짤려 나가는 , 제가 이거는 히브리 랍비 책에서 봤더니, 그러더라구요. 에덴동산에 뱀의 팔 다리 짤려나가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었다고 인제 랍비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거든요,썼더라고요.
웃었지만, 거기서 많은 인사이트Insight를 얻었어요. 맞다 . 이게 인생이다.
우리가 뱀이예요. 교할한 뱀. 근데 하나님이 팔 다리 짤라서 대가리 부수고 십자가에다가 오체를 매달아 버리는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이 뱀이 받는 저주, 그걸 이 땅에서 신명기 28장의 저주를 이땅에서 받는거예요.
그걸 사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해다가 내가 뱀이 받는 저주를 사도인데 받고있다 그렇게 쓴게, 고린도 후서 11장이예요 .
잘 알아 들으세요, 여러분
말씀을 그렇게 여러분의 인간의 존재론에서 출발하여 읽게 되면 절대 “아들”로 풀수 없어요.
예수로 결론 나지 않는 큐티QT 다 집어치우세요.
어떤 분들이 그러드라구요, 목사님이 자꾸 그냥 그 안에 진의가 들어있는데 표피적으로 보지 말라 하니깐, 옛날에는 그래도 힘들때 성경펴서 이렇게 봤는데, 요즘엔 이거진짜 맞아? 잘못 보는거 아냐? 그래서 성경을 안본대요. ㅎㅎㅎ 아, 그 지들이 안 보는거면서 왜 나한테 그러냐구., ㅎㅎ 보기 싫었던거면서. 아 그래도 보세요. 왜.
아니 그럼 여러분 안에 그 아들이 있다면 이게 아들로 보이지 왜 안보여요. 자기 눈에 그게 안보이니깐 자꾸 안볼라고 하는거지.
그러면서 저한테 뭐~, 욕찌거리를 해대면서. 당신이 나의 신앙생활 전체를 망쳤다구,
내가 언제 성경보지 말랬냐구요, 진짜 진의를 알자 그랬지. 네? 아이 썅, 빨리 천국 가야지, 진짜.
여러분 , 무슨 뭘 별 말만 하면 욕찌거리들을 해대갖구. 잘 보세요. “아들”로 잘 보세요.
그러면 분명히 보여요. 왜 안 보여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는데.
기도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말씀안에 숨어있는 예수 , 아들, 십자가 보혈,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 아들 의지 하고 의존 하여 우리의 역사속 이 존재를 투신할수 있는 그러한 하루를 오늘도 살수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우리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