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8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54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한절을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구주"라는 것에 주목하여 보겠습니다. "구주"는 '소테르'라는 단어이고, "임금"이라는 단어는 '알티코스'로 통치자,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이사,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정하사 우리의 통치자이자 지배자로 삼으시고 구원을 선물하는 주체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선물하는 유일한 주체는 예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인간의 다른 모든 시도는 길이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으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구주'는 우리를 옛 죄에서 사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죄 사함에서 끝나는 것입니까? 죄 사함만 받으면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죄 사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근거로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고 나오고, 고린도후서에도 화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목이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한다는 것인데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화목해집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수 있으나 우리에겐 부담이요 짐이 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분이 굉장히 미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목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목이라는 진짜 깊은 교제는 자유로운 사랑을 말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 어떤 상태일지라도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자유로운 사랑, 화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깊고 친밀한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친구 사이에서 한 친구가 그의 치부나 어두운 면을 드러냈을 때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지저분한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을 교제, 화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진짜 깊은 교제와 화목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그분이 만족할 만한 깨끗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 된 모습과 악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그것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그분을 진짜 친구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바리새인처럼 도덕적 윤리적으로 정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습니다. 자녀가 아파서 죽어갈 지경인데도 안식일 지킨다고 병원도 못 갔습니다. 병원 가서 일정한 행위 이상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 집에 가는데 먹을 것을 싸 가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그런데 혹시 친구가 십일조 드리지 않은 곡식으로 빵을 만들었을까 봐 먹을 것을 싸 갔습니다.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는 하나님이었을까요? 그분과 깊은 교제가 되었을까요? 안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셨을 때 때려죽인 것입니다. "너 참 불편해. 율법이나 도덕으로 나를 가리고 있는데 네가 뭔데 계속 회개하라고 하고 나의 어두운 면을 자꾸 폭로시켜?" 예수님은 그 죄를 폭로하시면서 "너는 나빠. 지옥 가야 해"가 아니라 "그러니까 나를 믿어"라고 하신 것인데, 그 죄인들이 "너 때문에 폭로당한 자존심으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만 죽어주면 돼"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그분의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더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아, 이 존재는 내가 어떤 부끄러운 면을 내어놓아도 나와 함께 울어줄 분이다. 율법으로 나를 정죄할 분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과 친해지고 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알량한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괜찮은 존재가 되기 위해 착한 일을 하려 합니다. 그것은 기특하고 좋은 일 같지만 사실은 죄입니다.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예장 통합 합동 측 교단도 이미 하나님의 예정과 같은 은혜의 교리를 버렸습니다. 합동 신학교는 한국 신학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힘과 노력을 내놓아 그분 앞에 괜찮은 사람이 되자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을 내서 봉사와 섬김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착한 일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열심을 부려라"로 이어지고, 교회에 열심을 내라는 것은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해서 교회 잘 돌아가게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내는 헌금이나 봉사나 선교 또는 구제는 모두 죄입니다. 이제 그만하고 은혜를 먼저 배우세요"라고 하면, 일단 헌금이 반으로 줄고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맞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어렵게 굴러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면 세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개혁주의조차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화론으로 결론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친구에게 부끄러울 만한 일을 털어놓았는데 그가 정색을 하면서 우리 죄를 낱낱이 지적만 한다면 그 친구와 어떻게 화목하겠습니까? 어떻게 그에게 내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나를 좀 감싸 안아 줘. 나를 불쌍히 여겨 줘. 나를 위로해 줘"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꾸 죄에 대한 문제 때문에, 성경의 서신서에 죄에 대한 경고가 너무 많이 나오니까 그러한 것을 자꾸 죄라 여기고 '아휴 그것은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깨끗해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통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를 범한 것이 우리아에 대한 죄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아를 죽였는데 나중에 나단의 질책을 받고 나서 깨닫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에게 행한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께 항복하면서 살지 않고 내 만족과 행복과 쾌락만을 위해 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죄에 속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생각으로 짓는 죄도 행위로 지은 죄와 똑같은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생각까지 막습니까?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꾸 그 위에 가면을 씁니다. 그것을 '나'로 착각하고 오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십니다. 도덕과 율법과 윤리 뒤에 숨어 있는 존재들의 가면을 계속 뜯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면은 강력한 접착제로 붙어 있습니다.

선풍기 아줌마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까? 공업용 유지를 얼굴에 넣어서 얼굴이 엄청 커졌는데, 그것을 빼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 공업용 유지가 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빼지 못하고 살을 잘라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괜찮은 존재로 올려놓기 위해 쓴 가면들이 내 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도려내려 오셨으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아픔을 역사와 인생 속에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라지려면 내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계속 발각되어야 합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야. 잘하고 있어'로 가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콩기름과 공업용 유지를 메스로 도려내고 있는 아픔으로 와야 합니다. 그렇게 잘라진 더러운 것들의 실체가 나의 아름다움과 자랑을 위해 내가 직접 넣은 이물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폭로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올바로 믿게 되면 괴롭고 고통스러워야 합니다. '착하게 잘 살자'.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라는 것은 모두 가면입니다. 은혜에서 나온 행위들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착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한 번 해보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사도 바울의 그 표현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은혜가 왕 노릇을 해야 하는데 내 의지가 왕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배워야 하고 삶 속에서 더 많이 체험해야 합니다.


 혼인잔치의 비유에 나오듯이 주인은 잔치에 들어온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당시 혼인잔치에는 주인이 주는 잔치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옷을 만들 때 나는 바느질을 한 땀도 한 적 없는데 그 옷을 받아 있는다는 것은, 내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옷을 포기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때 "너는 왜 내가 지어준 옷 안 입고 네 옷 입고 있어?"하시는데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것이 좋아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자는 끌어내어 결박시켜 죽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의를 입어야 합니다. 그 의의 흰옷만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그분과의 화목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윤리 전문가, 도덕 전문가 같은 전문가가 너무 많습니다.


 <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달인"이라고 하는 코너가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인물은 무엇이든지 잘한다고 하지만 결국 완전 엉터리로 폭로가 됩니다. 그 코너가 인기 많은 이유는 이 세상에 전문가를 자처하는 권위들이 많은데 그 권위가 왕창 해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알기에 그것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엉터리 권위자들을 해체하려 오셨습니다. "너희는 왜 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배워라. 나는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존재니까 나와 친해지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오해해서 사감 선생님처럼 생각합니다. 절대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죄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내 속에 나를 지배하는 또 다른 법이 있다"라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처럼 죄에 대한 편향성이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잉태된 생명이 어머니를 망가뜨리고 결국 생명으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내 안에 잉태된 은혜의 예수가 나의 옛사람을 먹는 것입니다. 나를 먹고 조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자들이 임신하면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이 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사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변장까지 하지만 생명이 잉태되면 그것은 무너집니다. 임신하면 열심히 먹습니다. 그것이 본 모습인데 참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는 것은 죄에 대해서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벼르는 것입니다. 그 본 모습이 폭로되고 내가 망가집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나를 근사하게 조정했지만 예수가 들어와서 나를 발각시키면 내 몸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을 위한 망가짐입니다.

그러한 것을 경험한 자는 절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지 못 합니다.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뭘'하는 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8~11절까지는 예수님이 품에 안고 죽으시고 살아나셨기 때문에,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그 런데 12절에 보면 "그러므로"가 나옵니다. 이는 앞에 나온 대로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으므로'를 뜻합니다. 그리고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하면서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12절의 내용은 예수님이 다 이루어놓으셨고 은혜의 왕 노릇으로 너희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 스스로 점수 주고 있는 것을 가짜라는 것을 폭로시키실 거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은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괜찮은 존재로 살 수 있어요"라며 이 세상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죄인데, 은혜의 왕 노릇이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우리를 계속 두들겨 패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과 윤리의 짐에 눌려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식의 죄를 짓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이메일을 주었는데, 제가 요한계시록 말씀을 전하면서 '백마를 타고 철장을 든 예수님과 세마포를 입고 그분을 쫓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설명한 내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전쟁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전쟁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메일은 세마포를 입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마귀의 세력을 치러 갈 때 그들이 도우러 가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마귀와 전쟁하러 가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창조주는 피조물을 훅 불면 그냥 죽은 흙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백마를 타고 철장을 들고 간다는 것입니까? 세마포를 입고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영원한 묵시 속의 나라 백성인 우리가, 가시적인 역사 속에 내려와서 완결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위해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앞장 세워 어떤 전쟁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종식되면 마귀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그냥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전쟁입니까?


 아마겟돈 같은 전쟁은 지금 성도가 치르고 있는 어떤 전쟁을 극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종결되기 때문에 그 마지막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성도들의 전쟁입니다. 마지막에 있을 그 전쟁과 함께 이 전쟁을 뭉뚱그려서 아마겟돈이라 하는 것입니다. 세마포를 입었다는 것은 이미 완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데 그때 또 전쟁이 동원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는 내 안에 있는 마귀의 세력을 폭로당하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선악과 따 먹고 마귀가 되었는데 어떻게 내가 이것을 토해냅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마귀화되어 독이 다 퍼져 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와서 드러내시면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일을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데 백마 타고 철장을 든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신 예수가 내 대장이구나. 그분을 꼭 붙들어야겠다'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안 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참으니까 일본의 경우에도 황혼 이혼이 많은 것입니다. 평생 벼르고 참다가 나이 먹어서 찔러 죽이거나 이혼을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교제가 아니고 순종도 인내도 아닙니다.


 어느 날 죽음이 닥쳐서 그분이 손 내밀었을 때 기꺼이 잡을 상태가 안 되면 스스로 그분이 없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불편하고 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나에게 도덕과 윤리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분으로 오해했다면 그분이 손 내미는 게 "이제 진짜 내가 있는 곳에 왔구나. 넌 죽었다"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성화론입니다. 따라서 그때 그 손을 잡기는 어렵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독교를 엉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좌우로 돌아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을 가장 모독하고 있습니다. 다 세력이나 인기를 얻으려 하고 자기의 깨끗함으로 찬사를 받으려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세상에게도 칭찬받는 교회를 만들자 해서 일간지에서도 칭찬할 정도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기특한 교회도 많은데, 그것은 오히려 친목단체라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는 만큼 세상은 교회를 미워한다고 했는데 왜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입니까? '재정이 투명한 교회' '구제를 열심히 하는 교회' 재력으로 장로 선출하지 않는 교회'라며 여기저기서 너무 칭찬해 줍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진짜 바른 것이 아니고 행복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하지 말고 정말 구제하고 섬기려면 진심 어린 마음으로 몰래 도와주십시오. 더불어 그 힘들고 어려운 자들에게 참 행복과 참 의의 길이 무엇인지도 함께 전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세상이 욕합니다. "저들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다. 본회퍼의 책도 못 읽어봤느냐?"


 저는 본회퍼가 천국에 갔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교회에 너무나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사참배 안 한 것이 대단한 게 아니라 하고 나서 "하나님 저는 이런 존재밖에 안 돼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그분 앞에 무릎 꿇은 배신자 목사들이 대단한 것입니다. "나는 신사참배 안 했어. 그러니까 신사참배 한 사람 다 색출해서 그들에게 잘못 준 명예 끄집어내리자." 지금 고신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 년도 넘은 신사참배를 운운하며 "우리는 안 했다"를 아직까지 우려먹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안 사람입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신사참배를 안 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정말 그것을 안 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안 하게 된 것입니다. 눈앞에 죽어가는 자식을 무시하고 "아가야, 잠시 후면 너와 내가 천국에서 만날 거야"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진짜 있습니까? 저는 그것이 마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할 수 있게 했다면 가능하지만 인간이라면 무너지는 것이 맞습니다. 무너지고 나서 "하나님 그래서 제게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로 가야지. 자식이라도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죽일 수 있는 것은 마귀입니다.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안 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깊이가 없습니다. "그냥 개혁해서 올바로 잘 삽시다." "기복주의나 신비주의 같은 것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하면 무조건 좋은 교회, 좋은 설교인 줄 압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기복이나 신비를 교묘하게 감추고 그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면서 잘난 행세는 다 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에 서 있다고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왔을 때 몇 명이 견뎌냅니까? 전부 저를 욕하고 나갑니다. 그들이 했던 신앙고백은 가짜인 것입니다.


 양의 탈은 진짜 구별하기 힘든 깨끗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양은 깨끗하고 바르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인간이 있어서 "내가 해낼 수 있고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로 만들어갈 수 있다"라는 것이 가장 위험한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력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추측하는 방법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죽은 흙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 나는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빠져나가면 그냥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지옥에 보내셔도 나는 할 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그 생기를 제게서 거두지 말아 주세요.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시면 안 먹을게요. 어떻게 또 선악과를 먹고 이 지긋지긋한 지옥 같은 인생을 통과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의 살 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흙이 되다 보면 진짜 죽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던 마귀 같은 인간들이 별것 아닌 게 됩니다. 내가 마귀니까 그런 취급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낮아지다 보면 용서가 나오고 그러다 안 되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계속 나를 덮으시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하게 되면 나중에 예수님이 손 내밀 때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그 하나님과 민감하게 교제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민감하게 교제하려면 친구와 교제하듯 그분 앞에서 많이 울고 원망도 하며 지내야 합니다. 내 잘못도 폭로당하고 면목 없어하기도 하고 잠수 탔다가 연락해서 사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 속에서 그냥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을 하려 합니까? 그냥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그 길에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있는 대로 폭로당하면 폭로당하고 칭찬받을 때는 칭찬도 받으면서 사십시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훌훌 털고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그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더 많이 알게 해주옵소서. 우리는 그 은혜와 긍휼 없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 주옵소서. 하나님은 구주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삶에 개입하셔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상황과 현실을 부담스러워합니까? 왜 하나님을 침묵하는 현실이라고 오해합니까? 하나님, 그것이 원망이더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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