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7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54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 5;31)



 이 구절에 있는 회개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회개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가 무엇인지 정리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개는 영어로 'repent'입니다. 이 영단어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라틴어로는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다시 사고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로 회개를 정리해 보면, 생각하고 사는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고하다' 그 생각을 하나님 나라의 사고로 다시 고쳐먹는 것입니다. 회개를 지은 죄를 반성하면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다시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까?


 진짜 회개는 자기를 향해 열심히 달리던 삶을 하나님께 돌려서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만 섬겨서는 천국,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정작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잔치라고 한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아들이 하나인데 굳이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은혜를 부으러 오신 분으로 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혼인잔치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이용하려 하는 자아숭배자, 죄인이자 악인이라 하는 그들이 일상을 통해 자아를 살찌우고 자아 성취를 하려 하던 것에서 벗어나 왕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 그분이 있는 자리에 가서 박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의 혼인잔치에 가서 박수하는 것이지, 자신의 일상에 하나님의 힘을 끌어당겨 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회개라 하면 계속해서 개차반으로 살다가 돌이키고 사람답게 사는 것인 줄로 아는데, 그것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일 뿐 그것을 회개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에 대한 신뢰를 끌어내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저는 하나님 없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라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죄짓고 개차반처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시고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파서 통곡하게 하십니다.


 분명 선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몸뚱이가 나를 즐겁게 하고 쾌락을 느끼는 것에 끌려갑니다. 그것이 육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육신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이 육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았다면 저는 이 육신을 갖고 영원을 살 뻔했는데, 하나님이 바꿔주신 대로 살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반복될수록 그것에 치를 떨게 되는 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 빼앗긴 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잘 정리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강간한 것은 다 돌로 쳐서 죽일 죄입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극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라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은 자기들끼리 도덕과 윤리로 '죄다, 아니다'라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고 죄를 가까이도 못 하고 죄와 공존할 수도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분이 살인을 명령합니까? 어떻게 다말이 격동하여 시아버지와 간음을 하게 만들고, 라합을 격동하여 나라를 팔아넘기게 하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시키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는 일로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 옳습니다. 그 옳은 하나님께 그냥 나를 드리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우리아와 밧세바는 다윗에게 당한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실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죄는 악한 것이고 완전히 마귀의 것인데 다윗이 저지른 죄가 우리아와 밧세바의 선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단어이고 그 죄를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너 가서 싹 죽이고 와! 가축이든 왕이든 다 죽이고 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살려놓고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칭찬하실 줄 알았습니다. 제사 지낼 때 쓰려고 흠 없고 튼실한 것을 살리고 아각 왕까지도 살려두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남자답지 않습니까? 적의 왕을 살렸고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자 소까지 살려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 하시고 사울을 폐위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왜 이러느냐?", "이 세상이 왜 이따위로 굴러가느냐?",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하고 더럽냐?"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고치겠다고 나서도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 내 주변이 정화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선악을 마음대로 판단하여 개혁하고 보수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주의는 그러한 것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건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들 자신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저는 말씀에 의거하는 정직한 설교를 한다고 하는 개혁주의 목사들을 주로 만납니다. 그런데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의 목적은 전부 나와 나의 교회뿐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거나 교회가 건축을 하거나 교인이 많아지면 그 안에서 왕따가 됩니다. 정말 유치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고치겠다고 개혁해 보겠다고 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고칠 수도 없는데 무엇을 고치겠다는 것입니까? 세상을 고쳐서 이 땅을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까 하나님 나라, 하나님 왕국이 이 나라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면 여기에서 더 큰 집을 얻고 상도 받으며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싫다는데도 계속해서 찾아가고 전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유황불 못에 들어가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죽는 날까지 배우고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해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내가 죽도록 예수 믿었거늘 당신이 뭔데 나를 지옥에 보내세요?"라는 말을 안 할 때까지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을 회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설교가 대부분 "이러이러하니까 착하게 잘 살자"입니다. "신비주의, 기복주의 같은 것은 나쁘니까 그런데 가지 마.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서 본보기가 되자"로 끝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십자가 한 번 지고 마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역사 전체에 서 있습니다.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서 있던 십자가는 역사 전체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 인생 전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의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순간에 내려놓을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갖고 가는 십자가라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단들은 십자가의 용서를 받았으니까 이제 행복하게 살자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자기만을 위해 살면서 십자가는 이미 필요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내가 날마다 죽는다"라고 했겠습니까? '날마다'라면 하루에 한 번만 죽으면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매 순간 죽는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 십자가로 매 순간 죽어야 합니다. 즉, 예수가 나를 품에 안고 매 순간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세상적인 행복이 어디에 끼어들 수 있습니까?


 제가 언젠가 코스타에서 만난 원로 목사님에게 "목사님, 틀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천 명 학생에게 그런 설교를 하십니까? 하며 언쟁하는대 그때 몇몇 강사들은 제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들은 LA로 다 왔습니다. 학생 교회는 커질 가망이 없고 LA로 사람들이 들어온다니까 교회를 크게 해보고 싶은 마음에 온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외쳤던 설교는 다 무엇입니까? 그들과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을 때 서로 원고를 주고받으며 교정해 줬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지금 개혁을 하고 큰 교회를 세워보겠다고 하는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무슨 개혁입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 안에서 계속 죽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개혁해 나가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은혜 속으로 처절한 자기 인식과 자기 부인의 마음을 갖고 낮아지지 않았을 때는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이 눈물로 나오고 그 눈물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속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인내입니다. 고난의 연속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남들 앞에서 깨끗하게 산다고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죄는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완전 범죄자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며, 자기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입버릇처럼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피해를 입은 쪽에서 오히려 그분을 욕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신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서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 주려고 갔는데, 그 살인자가 평온한 얼굴로 "저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자가 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네가 뭔데 내가 용서하기 전에 저 인간을 용서해?"라고 소리칩니다.


 결국 그 여자는 "나는 이제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라는 자기 자랑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나는 용서했다"와 같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 놓고 내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깊이가 1cm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나는 이 땅에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 행복하게 살면 돼"라며 착하고 열심히 살아서 다른 이들의 존경받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착하고 선하고 올바르게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법정 스님이나 성철 스님처럼 착하게 산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저도 이 세상의 목사들에게 너무 질려서 스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까?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그러한 삶입니까?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까? 자기 부인이 그 정도라면 그 스님들 다 천국 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청렴결백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요 죽은 흙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다른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독당하고 있습니다. 인간들만 자기들 잘났다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 다해 놓고 하나님께 자랑합니다. 전능자가 비웃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아직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목적과 의도를 잘 모르고 있구나. 여전히 너희는 내 앞에서까지 자랑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천국에 와서 내가 너희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시키게 되면 너희는 나마저도 정죄할 것 같구나." 우리가 지금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여 열심히 착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갔더니 하나님이 엉뚱한 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 하나님.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 따 먹은 아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한 일을 시키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 지정한 악한 일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악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생각에 이것은 옳지 않은 것 같은데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자로 여전히 남아 있다면, 우리는 지옥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키시든지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내 빈 그릇으로 받아내겠습니다."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이 못 알아듣습니다. 설교를 하면서도 이것을 알아들으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바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 말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온통 관심은 역사가 쏟아놓은 옳고 바른 것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나중에 돈은 이렇게 이 정도만 써야겠다', '교회 일들은 이렇게 해서 전부 민주적으로 해야겠다'라는 식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돈을 어디에 써야 올바로 쓰는 것입니까? 2,100억 원이라는 돈을 예배당 짓는 데 쓰면 잘못된 것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비를 대주면 될까요? 선교지에 가서 교회를 100채 정도 지어줄까요? 그것이 선을 구현하는 것입니까? 실제로 성공회 교회가 소련이 무너졌을 때 러시아로 들어가서 2조 원도 더 되는 돈을 갖고 가서 교회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대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로써 맺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러시아의 교회가 죽었습니다.


 과연 그 돈을 잘 쓴 것입니까? 어디에 써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들어온 돈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필요 없는 똥이기 때문에 어디에 버려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무언가를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교회가 전기공을 사서 공사를 한다고 했는데 그 전기공이 사기를 쳐서 공사는 공사대로 망치고 돈은 돈대로 날렸습니다. 그래서 당회가 열렸는데 그 일을 맡았던 장로가 문책을 당했다고 합니다. "당신 때문에 피 같은 돈 몇 억이 날아갔다" 그때 목사님이 "날린 돈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의 악함과 돈의 무가치함을 배웠으면 그 돈은 가치 있게 쓰인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맞다. 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선함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려 했을까?'


 교회가 민주적으로 움직이는 게 옳습니까? 다수결은 인간들이 힘을 합쳐서 옳다고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오만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은 우리가 옳다고 합의해 놓은 것이니까 진리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국입니다. 그분 혼자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쫓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 뜻을 비우는 자로 살아야지, 내 뜻을 관철시켜서 옳음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면 안 됩니다.


 깨끗하고 올바른 교회에 가면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기윤실이나 이러한 쪽에서 저에게 자꾸 연락하는데, 저는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다릅니다. 기존의 교회를 지적하고 정죄할 때 그들이 어떻게 운영하는지 행정적인 문제를 들먹였습니까? 말씀이 올바로 전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목사들 세금 내자'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무슨 집회 같은 것만 있으면 맨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까? 목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를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열 편 이상씩 들어봤는데, 그들의 설교는 결국 '올바로 살자'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고 우기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들의 설교에 하나님이 없고 십자가가 없습니다. 어디에 자기 부인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잘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그 조바심이 커지니까 설교가 자꾸 길어집니다. 엉뚱하게 손에 손을 잡고 한 무리는 이쪽 다른 무리는 저쪽,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이라며 자기들이 잘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그분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청렴결백도 좋습니다. 그렇게 살면 마음도 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 편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법정 스님처럼 살라고 이 땅에서 훈련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선악과 먹지 마"라고 하시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데 왜 하지 말라고 해요?"하면서 먹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말씀의 더 깊은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하는 설교는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꾸 말씀을 근거로 예화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바니까 설교자의 생각이라고 여기지 말고 다시 한 번 성경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이 "목사님도 예전에는 똑바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구약 다음에 신약이 있듯이, 몇 년 동안 똑바로 살라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왜 이것이 내 맘속에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해결책이 무엇일까?'하고 그동안 고민을 했다면 이제 은혜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교회 개척할 때 인간의 죄인 됨을 확 드러내 버리는 구약의 율법 설교를 원래 3년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도와 은혜를 못 알아채고 은혜의 지평으로 못 들어갑니다. 은혜의 바닷속을 들어가야 하는데 찰랑거리는 물결을 보고 못 들어갑니다.


 성도의 삶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가 하나님의 왕 노릇 안으로 들어온 것이지 않습니까? 마귀에게 이끌리듯 살아가다가 하나님에 의해 은혜의 왕 노릇에 잡히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분이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마귀의 것,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티끌입니다. 거기에 무슨 자유 의지가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 영역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시는 일을 경험하면서 그분을 배우면 됩니다.


 말씀에 계속 깨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잘 될 거야'하면서 살고 있는데 말씀에서는 아니라고 하니까, 이것이 충돌을 일으키고 그렇게 말씀에 먹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신과 인생과 사람은 묵시에게 먹히는 역사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의 은혜만 놓지 마십시오. 그럼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점령하여 회개하는 자로 만들 것입니다. 로마서 2장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온 것처럼 그 은혜가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회개하라"했더니 아무도 안 해서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회개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회개가 되어가고 있고, 그 일은 반드시 완료될 것이기에 '회개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섰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일 뿐입니다. 그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공이 있고 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해주는 칭찬은 듣지도 마십시오.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존경과 신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또한 악담하는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자기 일에 신경 쓰느라 다 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을 '상처'라 하면서 평생 갖고 갑니다. 그것 때문에 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티끌이요 죽은 흙일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의 자리로 가면 죽은 흙을 덮는 아버지의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나라에 데리고 산다고 하시기에, 그저 감사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보겠다고 경거망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서 꼭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하여 등지고 있던 하나님을 부둥켜안는 그 일이 죄 사함이요 죄 문제의 해결이며 구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수 목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29  (0) 2016.01.12
사도행전 28  (0) 2016.01.12
사도행전 26  (0) 2016.01.12
사도행전 25  (0) 2016.01.12
사도행전 24  (0) 201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