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4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9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행5;19~20)


 하나님의 사자가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가 지금 2,000년 넘게 이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금 기독교가 어떤 사람들의 철학적 고찰이나 사상의 유희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과연 이렇게 전 세계의 어마어마한 사람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까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새벽에 서신서를 쭉 읽다가 시간이 다 된 줄 모르고 잘못하면 못 나올 뻔했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어떻게 이 책 한 권이 전 세계를 사로잡아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칠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 성경은 사람들이 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교회를 이렇게 유지시키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다서를 읽다 왔는데, 유다서는 초대교회 안에 들어왔던 영지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단들이 들어왔을 때 조심하라면서 믿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희들을 반드시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있기를 원하노라"하고 축도로 마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믿음을 지키라는 그 말씀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들은 믿음을 지켜라, 초대교회 때 들어온 거짓 복음, 다른 복음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속지 마라"는 말씀을 쭉 해놓고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너희들을 굳게 서게 하실, 반드시 서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라는 축도로 마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을 곡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행함이라는 건 반드시 어떤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제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야고보서에서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행함을 예로 들어 "이제 성도들아 너희도 행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아브라함이 언제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느냐 믿음으로 받았지"라고 합니다. 과거에 저는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들의 삶 속에서는 행함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와 바울이 같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그 행함은 우리가 도덕과 윤리를 아주 근사하게 지켜서 업그레이드된 삶을 내놓는 행함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듯이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은 우리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았는 지를 보여주는 모형으로, 그가 대단히 훌륭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교회의 대표인 아브라함 대신에, 아브라함을 건지고 그의 의를 위해 무죄한 이삭이 죽는 행위, 그 행함이 아브라함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리아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아브라함을 건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이 만들어 낸 아브라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하게 살아라, 도덕을 지켜라, 윤리를 지켜라"가 아니라 예수의 행함을 의지하라는 의미에서 야고보가 행함을 말한 것입니다. 유다가 유다서에서 이야기한 것도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초대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 다른 복음을 갖고 있는 이들, 방종을 주장하거나 너무 지나친 금욕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서 믿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또 너희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율법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율법주의자들을 대항하여 믿음을 지켜라고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는 그 마음을 버리자는 뜻입니다.


 결국 믿음을 지키라는 것은 이를 악물고 행실을 올바르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예쁘게 보시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지와 결단을 의존하고 있는 이들은 예수를 붙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잡고 살아가는 그건 야곱과 같은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지탱하고 있는 지팡이인 하나님이 나를 받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인 교회를 갔습니다. 교인이 120명 정도 된다는데 예배당을 굉장히 근사하게 지어 놓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를 부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 장로 무리가 목사님을 쫓아내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엄청 어수선했습니다. 가서 앉아 있는데 어떤 장로가 나와서 기도하면서 울었습니다.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형국이 마음이 아파서도 그랬겠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있는 억울함과 분함 때문에 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은혜 받아서 그런 줄 알고 뒤에서 같이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설교할 순서가 되어 강단에 딱 올라갔는데 갑자기 너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들끼리 싸우려면 싸우지 뭘 하라고 날 부른 건가? 거기까지 가는 것도 오래 걸렸는데 신경도 날카롭고 화가 났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도 못 가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라며 갔더니 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건축한다고 헌금 쪼고, 장로들은 쫓아내려고 하고, 게다가 설교 전에는 양쪽에서 와서 상대를 막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곳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그래서 한 시간 반 동안 아주 난도질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 맞느냐?"

집회 끝나고 나니 목사님은 어디로 사라져 없어지고 장로들은 울그락불그락해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교인들 중에 제 설교 CD를 듣는 사람이 10명 정도 있어서 그들이 저를 둘러싸고 데려다 줘서 겨우 차에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쪽이 너무 법과 질서, 올바른 행위에 꼭꼭 묶여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법과 규범 같은 것을 상대방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죽이는 데 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옳은데 그 옳음이 살아 있는 이들을 자꾸 죽여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렇게 자신을 자타가 공인하는 옳고 깨끗한 자가 되려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안은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내 그릇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부활을 곡해해서 새로운 몸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활, 두 번째 부활이 있는데 자신을 첫 번째 부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성자에 가까운 존재로 다듬어지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활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점점 내 의지와 내 뜻, 그리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까지도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부인이 되고 죽어갈수록 내 안에 있는 예수만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가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계속 부인되고 죽어간다면 네 안에 계신 그 선한 예수가 밖으로 튀어나와서 너도 그렇게 선한 모습으로 변해 가야 되는 것 아니냐? 어차피 그렇다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굉장히 훌륭한 사람으로 변하며 되는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예수로만 가득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진행은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사는 모습이 밖으로 나온다는 게 아니라 그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죽은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연약해지면 그 예수의 은혜와 영광만이 점점 부각되는 것입니다. 내가 같이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영광이 자꾸 희미하게 죽어갑니다. 나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박수 받는 그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관절과 골수와 영혼을 쪼개버린다고 합니다. 쪼개 버린다는 건 우리는 죽인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아브라함과 예수의 가운데 있습니다. 복음의 설명이 그렇게 이어집니다. 다윗이 위대한 시편 51편을 어떻게 쓰게 된 것입니까? 그는 가장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범하고 아이까지 배게 한 상황에서 우리아 장군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단이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는데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누치를 못 챕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나는 지금 당장 하나님이 지옥 불에 던져 넣어도 할 말 없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신앙생활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에게 주는 점수를 깎지 않기에, 그때 하나님이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 부지런하고 전쟁에서도 항상 전투에 서서 지휘했던 다윗이, 그때에 왕궁에서 자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왜 깨어서 지붕 위에 올라가서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둘러보고 있었을까요? 게다가 그 여자는 왜 하필 그때 목욕을 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윗을 진짜 아들로 만들어내기 위해 하나님이 세팅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 안에 들어 있던 욕정과 욕망이 하나님에 의해 폭로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모르니까 나단을 보내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 확 폭로하고 '그래도 하나님은 널 용서하실 거야'로 끝내 버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밧세바가 낳은 아들이 생깁니다. 성경에서는 그 아들의 이름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병이 들어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합니다. 나라 전체가 다 금식을 선포하고 앉아서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미쳤는지 일어나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다윗이 구원을 받고 잔치에 참여하여 돼지같이 갑자기 음식을 먹은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 내가 회개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 하면서 착하게 살 테니까 나의 구원을 성취해 주세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세요"하는 게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용서를 받는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다윗이 용서받는다면 욕망의 산물인 아이가 살아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윗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열심을 부리고 회개를 하고 최선을 다해 종교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내 생각대로 아이를 살려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죽여 버리셨습니다. 다윗이 거기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은 너희의 종교 행위나 열심으로 주는 게 아니라 너희의 욕망의 산물인 그 죄가 무죄한 어떤 이에게 전가되어 그가 죽어야 잔치가 이루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조상인 다윗이 진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데 세 사람의 희생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아, 밧세바, 아이. 그것은 다 예수의 모형의 한 부분입니다.


 무죄한 우리아의 뼈가 꺾임으로 다윗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꺾으신 뼈로 내가 질고하나이다"라고 다윗이 시편을 쓴 것입니다. 밧세바, 잘 살던 여인이 다윗 때문에 불륜 속으로 부정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말의 모형입니다. 

예수가 바로 우리 때문에 부정한 육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 상태, 불륜의 관계입니다. 불륜한 자가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부정한 자식을 낳았는데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밧세바와 다윗의 죄의 열매가 예수에게 전가되어 죽게 됩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다윗은 아이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의 후예인 우리 교회는 예수의 불륜, 예수의 부정함, 예수의 죽으심 때문에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착하고 경건한 척하면서 살 수 있지만 스스로 자꾸 실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죄의 시체입니다.


 말씀 본문을 보면 천사들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고 합니다. "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어떤 한 부분만으로 설명하면 안 됩니다. 다 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일단 죄와 타락에 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다음에 구속과 심판 그리고 회복까지 이 모든 말씀을 다 전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다 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치우치면 안 됩니다.


 개혁주의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다 전해야 하는데 성화에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제가 비유를 강의하면서 대단한 신학자들의 책을 읽어 보면 비유가 전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책은 어려운 단어를 써서 한 권 읽으려면 정말 몇 달 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부 성화에서 딱 그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은혜의 비평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예수와 십자가로 못 풀어내는 것입니다. 비유에 대한 책 30권을 뒤져봐도 그렇게 풀어낸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전부 개혁주의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성화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절정인 줄 압니다.


 한국 교회도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국 교회 개혁주의의 선두주자이자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목사님이 성화에서 딱 그치고 성화 주의자로 머물러 버렸기 때문에 한국교회 개혁주의 전체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거기서 머물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자기 스스로 실망을 해서 다른 것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요즘 어떤 목사님은 "1부 예배는 순복음교회에서 뜨겁게 드리고 2부 예배는 그 교회 와서 말씀을 들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화에서 머물러 있었더니 뜨거움이라도 한 번 맛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 묶이면 안 됩니다. 나를 나중에 완전하게 만들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알고 그 예수를 붙드는 지경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자신의 죄 됨과 어두움과 더러움을 폭로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나라는 걸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들어와서 "야, 우리 아버지 벌거벗었네"하고 선악과 율법으로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판단하는데, 바로 그가 저주받는 자이고 그것이 성화주의, 성화론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셈처럼 '어, 우리 아버지가 벌거벗었네'하며 뒷걸음질해 들어가서 아예 안 봐야 합니다. 나도 똑같은 인간이니까 부끄러움을 그냥 덮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의 결론입니다.


 노아의 언약은 "나는 이제 다시 너희들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홍수로 멸한다면 너희들은 앞으로도 계속 다 죽어야 되거든. 그래서 나는 은혜로 덮을 거야"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이유를 대시는데 사람이 나면서부터 악하니까 다시는 그들을 안 죽일 거라고 하십니다.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알려면 우리가 정말 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밝히 폭로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그때 그 십자가가 나를 덮는 것이고, 그래서 걱정이 없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이나 김대두가 같은 고생을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억울할까요? "나는 하버드, 예일대 교수 자리 버리고 죽도록 고생하다 오고, 김대두는 평생 사람만 죽이다 왔는데 어떻게 똑같은 대우를 해주느냐? 도덕과 윤리를 계산하면 나보다 한참 아래일 텐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도 헤아려주지 않고 왜 나와 김대두를 같은 곳으로 보내느냐?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아마 헨리 나우웬이 진짜 천국에 갔다면 라르쉬 공동체에서 고생할 때 '왜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사랑스럽지 않지? 왜 이렇게 내 맘속에서 진심 어린 사랑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알고 갔다면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예일과 하버드대 교수 자리를 버리고 이렇게 열심히 선행과 봉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저 사람들과는 달라'는 우월감을 조금이라도 누리면서 죽었다면 그는 지금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후자일 경우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 요구하는 인간에 대한 행위가 그를 움직였다면 그는 절대 천국에 가지 못 합니다. 우리는 은혜에 쌓여서 천국에 가야 합니다. 이 은혜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다툴 일이 조금씩 생깁니다. 교회 안의 분열과 깨어짐이 나타납니다.


 '나는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죽은 흙, 핏덩이, 자궁 속의 첫 자리에 불과합니다.'를 깨닫지 못한 이들이, '나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고 잘나서 다른 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다'라는 우월감이나 그런 의식이 분열과 깨어짐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입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뒷걸음질해 들어오셔서 나를 살살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분이 계신 곳에 가고 싶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늘 나에게 바르고 깨끗한 것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면 그분이 계신 곳에 진짜 가고 싶겠습니까? 그 사랑을 알아야 나중에 정말 우리가 새 몸을 입었을 때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준 이를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벼르고 지키다가 가서는, 결국 '아휴, 내가 저런 잔소리꾼 옆에서 영원히 사느니 차라리 지옥 가겠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살기 싫은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 짐입니다. 악당 같은 사람이 "밥 많이 먹어. 물 말아서 밥 먹어"하는 것은 완전 독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계신 곳이 천국이고 거기에 가고 싶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진화론에 물들어서 계속 성도가 진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진화론은 진짜 무서운 것입니다. 진화론 자체는, 인간이 완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점점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완전한 진화에 이르면 이 땅은 지상낙원이 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후천년설 소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진화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완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을 때 어떠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지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배우고 다시 완전한 상태, 이제 다시는 모반과 반역을 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고생이라는 걸 충분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생과 수고가 다 사라지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임종 때에도 하나님의 손을 덥석 잡고 미련 없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모든 것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오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입으로만 '오직'이라고 하면서 자꾸 우리 자신의 조건과 자격 같은 것을 보태려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의 지평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주셔서 더욱더 자유롭고 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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