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1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7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7~11)

 


 계속해서 앞 장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본문을 보면 사람과 성령이라는 단어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 찰 수 있다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떡을 먹는 자가 나를 해할 것이다."라며 유다에게 떡을 주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 내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사탄이 계속 가만히 있다가 떡을 주자마자 홀랑 들어간 것입니까? 도대체 사탄이 가득 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탄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개별적인 존재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존재입니까? 사탄도, 마귀도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 귀한 그분의 백성에게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구속사의 과정 중에 예수님이 유다에게 떡을 주었는데 그때 유다에게 사탄이 쏙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아 이제 들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즉,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예수님이 "이제 가서 네가 할 일해"라고 떡을 찍어 주신 것입니다. "네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했더니 사탄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고 주도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사탄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성령이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가 하는 행위는 어떻게 마귀 같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성령이 가득 차 있다고 성령다운 삶을 얼마나 살아냅니까? 여러 종교 행위나 선행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 사람에게 나오는 것은 시기와 질투 또는 자기의 인기나 자랑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가득한데 왜 우리에게 마귀적인 것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입니까? 마귀, 사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피조물이 처한 상태나 추구하는 계획이나 행위나 사고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다른 매체에서 본 이미지로 오해하는데 마귀는 실존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품고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측에 선한 세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그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시도나 상태가 마귀인 것입니다. 그 둘을 분리시켜서 설명해 주는 것이 역사이며 성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마귀 자체를 죽은 흙이라 보면 됩니다. 처음 자리, 자궁 속에서 무력한 그 자리, 핏덩이의 자리가 마귀입니다. 결국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고 무력하게 지옥을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마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 마귀를 어떻게 그분의 백성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한 그분의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시려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통해 마귀 같은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환골탈태하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귀가 가득 찬 세상을 보면서 '저게 마귀구나'하는 것을 분별해낼 수 있어야 하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옛사람의 모양으로 발각되는 마귀적 속성을 보면서 '나는 이런 마귀 같은 상태로 계속해서 공허하고 악하고 폭력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텐데, 하나님이 어떻게 내 안에 성령으로 가득 채워 주셨을까?' 하며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생을 허락하시고, 기독교를 이 땅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란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우리는 그 마귀에게 벗어나 하나님의 선한 세력으로 편입이 되었는지를 경험하고 배우면 됩니다.  그리고 점점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마귀가 성령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영광스러운 경험도 하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배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입니다. 성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잠식되어 가는 삶의 엄청난 가치를 모르고 이 세상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도 팽배해 있고 계속해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가난과 이혼을 부끄러워합니다. 구역장들을 임명했는데 전화를 하면 전부 "저같이 자격 없는 사람을..."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한두 번은 겸손이라 하지만 계속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혼했다며 못 한다고 고사합니다. 이혼했다고 구역장 못 합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의 신부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추악한 창녀들입니다.

하물며 구원받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세상을 좋아합니까? 솔직해지십시오. 누구나 세상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폭로당하고, 그럼에도 보아스가 룻을 옷자락으로 덮은 것처럼 신랑이 우리를 어떻게 덮는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 세상과 간음하고 있습니다. 모두 이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고멜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호세아라는 이름 자체는 히브리어로 예수입니다. 예수가 창녀인 신부를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 여기서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열다섯이므로 결국 은 삼십으로 사오는데 그것이 인생입니다.


 따라서 그 속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나 같은 존재를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삼아주셨는지를 감사해하며 그분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을 안다는 이들이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직분 하나 하라고 하면 왜 "사업이 망해서 안 된다, 이혼을 해서 안 된다."라고 말합니까? 왜 그러한 조건과 배경을 자신의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갖고 있습니까? 결국 아니라고 하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욕하면서 스스로 폭력을 가합니다. "너는 실패자야, 너는 못 배운 자야, 가난한 자야"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이 가득 차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열심히 배워가면서 이미 완성된 결론을 지니고 살아가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풍성함을 약속받은 이들이 이 세상의 힘을 구한다고 전부 새벽에 나와 부르짖는 것입니다.

돈 벌게 해 달라, 자식 문제 해결해 달라, 큰 집 사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종교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새벽기도는 다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는 전부 그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을 힘 삼아서 주어진 하루를 찬양으로 열겠다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 나와 빌었으니까 꼭 그 기도제목을 들어주셔야 한다는 목적으로  새벽기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하지 마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훈련시켜야 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훈련시키면 아이를 종교 기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알게 해서 자발적인 기도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 깨워서 성경 읽고 기도하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아이들 안에는 분노만 쌓입니다. 올바른 복음을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 행위를 훈련시켜 놓으면 그들은 부모를 떠나 있을 때 100% 교회를 떠납니다. 신앙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통치하여 때가 되면 어느 순간 그분의  보좌 앞으로 끌어내십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교회 교육부가 체계적으로 되어 있어서 선물도 잘 주고 유아교육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와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좋다고 합니다. 이제 두 살 된 아이가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이 엄마에게 기도하는 법을 언제 배웠느냐고 물어보니 엄마도 세 살 때 배웠답니다. 지금도 기도 열심히 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현재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 살 때 그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운 게 그들의 삶과 신앙생활에 무슨 유익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엄마들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쫓아 교회를 옮겨 다닙니다.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도 은혜의 복음이 어려워도 전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이해력으로 복음이 설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자체로 힘이 있습니다. 지금 저스틴이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제 설교를 그대로 한 시간이 넘게 전합니다. 어른들도 못 알아듣는 어려운 내용인데 아이들이 계속 듣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이 13세 때부터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9세 때 복음을 제대로 이해했고 4년을 준비해서 설교한 것입니다. 불과 얼마전 사람인 그도 그렇게 했는데 이 시대의 중고등부 아이들이 그렇게 못 한다고 생각합니까? 찰스 스펄전이 한 설교보다 제 설교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다 이해했고 어떤 이는 설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시대에는 어렵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대해 무식한 것이지 설교가 어려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세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몽매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형식이나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만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에 대해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외우게만 합니다. 그것은 주문일 뿐 기도가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외우게만 했지 그 안에 담긴 깊은 내용을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얼중얼하며 가톨릭 기도문처럼 효력이 있는 듯 외웁니다. 종교 행위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무속신앙입니다.


 사람들에게 종교 행위를 잘 가르쳐주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굉장히 뿌듯해합니다. 그래서 종교 행위를 강조하면 교인들이 늘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를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어서 특별새벽기도를 막 돌립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목록을 주어 헌금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진절머리 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도 따 먹은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거나 헌금하거나 단기선교 한 번씩 다녀오면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신안적 손해는 봤어도 신앙적 포만감이 내 안에 채워지고, 그렇게 서로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주님의 영적 군사들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두 명이 로또 맞듯이 사업이 잘 되거나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런 본보기가 나오면 모든 이가 그것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하면서 바글바글 모이게 됩니다.


 조엘 오스틴이 바로 그 방법을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교회에 모이는 인원이 수십만 명인데 그 교회에서는 긍정의 힘, '자기가 기도하고 기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 복으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머릿속으로 원하는 것을 계속 드려라 그러면 준다'라는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왜 그것에 광분할까요? 수십만 명 중에 소수가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간증을 하면 나머지 수많은 이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계속 봉사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미국에서 유명한 찬양 가수들을 고용해서 그들이 찬양을 하고 수많은 이들은 그것을 보며 전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입니다. 거기는 교회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에 우리가 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자랑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에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풍성하게 여러 세대에 나타나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가 드러나고 은혜를 입은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수시로 폭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연약한 자로 내려가야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큰 은혜로 덮는지를 경험해서 나중에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외에 믿었던 것을 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믿고 돈도 믿는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맘모나스와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정의입니다. 예수를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 외에 사랑했던 것을 하나씩 놓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동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도 믿고 내가 원하는 큰 집과 돈과 명예도 긍정적 사고로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복음입니까?

 

 사도행전 5장 3절을 보십시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시작하기 전에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때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사탄이 예수님에게 세상의 떡, 인기, 명예를 준다고 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봐. 사람들이 너를 진짜 메시아로 인정할 거야" "성전에서 뛰어내려 봐. 천사들이 수종들 것 아니야? 그럼 사람들이 얼마나 우러러보겠어?" "나한테 절 한 번만 해. 이 세상 다 줄게" 예수님은 다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에 흠모할 것이 하나도 없고 볼 것도 하나도 없는 존재로 오셔서 십자가 지고 죽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래, 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굉장히 비웃었을 것입니다. 실컷 두드려 맞고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나는 하늘나라의 왕이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약속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영생을 주었고 이 세상의 왕은 세상의 힘과 인기와 명예를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진짜 풍요를 담고 있는 영생, 하나님 나라의 삶을 주어서 모든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믿음과 함께 주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왕은 이 세상의 가치라고 여기는 것들을 주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 너무 매력적인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많이 갖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많이 그분을 섬길 것 같습니까? 돈의 힘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중독되면 도박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히려 그것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얘들아, 그것 말고 나를 봐. 왜 자꾸 네 자식, 네 재산, 네 인기를 보니?" 즉, 우리의 사업 실패나 이혼이나 사별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 달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 없이 살게 해주세요. 내가 아는 이것으로 잘 살 테니까 그냥 내 소원이나 들어주세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발 잘 알아 들으십시오. 세상의 재미는 진짜 재미가 아닙니다. 드라마에 너무 빠지지 마십시오. 허구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국 이 시대는 TV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TV가 먼저 세상의 지저분한 것들을 방영해 버리면 불륜이나 범죄 같은 것들이 조금씩 TV를 쫓아갑니다. 옛날엔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도 TV에 자꾸 나오면 해도 되는 일이 됩니다.


 그런 것은 재미가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를 속여서 우리의 시간을 죽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속 터지는 일입니다. 성경 읽는 것보다 남이 써놓은 허구의 이야기를 보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 보는 것을 미루기 때문에 계속해서 도태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반면 어떤 이는 그나마 알던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다른 것에 투자하는 십분의 일만이라도 진득하게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상당히 재미납니다. 그리고 어휘력이나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어질 것입니다. 성경만 열심히 읽어도 무식하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진진해지십시오. 사탄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렇게 속아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충만하게 느끼고 그 성령을 쫓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의 외침 같은 것은 우습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 속에서 느끼는 풍요와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면 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또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하지 않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너무나 원망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원하는 세상의 욕심을 얻어 보겠다고 열심히 구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협박하기까지 하면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행위를 하고 있으니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배우고 찾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올바른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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