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18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5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4;36~5;6)



 초대교회 때 교회의 감격스러운 모습이 나오다가 갑자기 우리가 당혹스러울 만한 사건이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부부가 합의를 한 후에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성도의 소유는 다 교회 것이니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치라는 지침이 있었다면 그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는 그 누구도 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갑자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대조적으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15세기에 나눠진 것이므로 굳이 장으로 성경을 나눠서 읽지는 마십시오. 될 수 있으면 성경을 한 번에 쭉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거의 서신서인데, 우리가 편지를 서두만 조금 읽었다가 내일 본론을 읽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편지는 궁금해서 쭉 읽게 됩니다.


 바나바는 권위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 그의 진짜 이름은 요셉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가 밭을 다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는 것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또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표준을 설명해 주십니다. 즉, 초대교회 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이상적인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에서나 완성될 수 있는 교회의 표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기특한 생각인 거 같지만, 우리가 초대교회로 못 돌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각당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역사가 완료된 시점에서야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들이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이끌지 않으시면 그 상태로 못 가겠구나'라는 것을 폭로당하며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로 지어져 가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고 어떻게 보면 극악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구약 때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탈취한 전리품을 조금 숨겼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시켜서 아간과 그의 식솔과 짐승들까지 다 때려죽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또 다른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갑절의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영적 장자권이 엘리사에게 전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능력을 받고 벧엘에 갔는데 아이들이 "대머리야 올라가라"고 하니까 곰을 불러서 아이들을 다 찢어버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선지자가 그 능력으로 처음 행한 일이 아이들을 찢어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을 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입니까?


 초대교회에 와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조금 감춰두었는데 그냥 죽여버렸습니다. 이 내용을 어떤 주석가는 "베드로가 아나니아의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폭로해 버리니까 아나니아가 깜짝 놀라며 그 충격을 받아 죽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정말 어이없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너도 죽을 것이다"라고 한 예언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그분의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항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는데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벧엘이란 곳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 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나의 행복과 안위와 존재를 위해 어떤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은혜로만 존재하고 영위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대머리야 올라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 대머리야, 네가 믿는 하나님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우상에게 제사 지내면서 잘 살고 있으니까 우리 삶에 간섭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 대머리를 놀린 게 아니라 "네가 섬기는 하나님과 그 능력, 우리에게 필요 없어. 우리는 얼마든지 이 세상의 힘으로 잘 살 수 있어"라며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모세에게 조롱하고 불평할 때도 하나님이 막아서서 "저들이 너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나를 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 우상을 의지해서 살려 하는 것은 곰이 나와 찢어 죽여도 할 말 없는 것으로 심판받을 자들의 행위다. 그러면 거기서 죽은 아이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소품으로 쓰인 죽은 흙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딱 두 가지로 나뉘어 내려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는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가 난 새끼가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그것으로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세력을 합하여 마귀라고 하는데, 그 마귀가 내 안에 있다고 하면 바로 내가 마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마귀와 싸운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은 나, 나의 옛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란 존재는 내 안의 속성이 연합한 것을 실제적인 한 존재를 세워서 상징적으로 그와 하나님이 싸운다고 그림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뿐입니다.


 아간이 여리고에서 탈취한 전리품을 훔친 곳은 벧엘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벧엘 옆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동거하며 끌고 가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은 성전으로, 그 성전을 히브리어로 벧엘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존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 그분이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신 것입니다. 성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 구름이 딱 떠오르면 그때 출발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백만 명이 훨씬 넘는 무리가 움직인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市시'가 이동하는 것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수고하지 않고 먹이와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아침이면 만나가 쏟아지고 저녁이 되면 메추라기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 공급을 해주신 것입니다. 바위를 쳤더니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경험하면서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겠구나. 어떻게 40년 동안 의복과 신발이 닳지도 않는 거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분이 다 제공해 주시는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인데 아간은 그렇게 하지 못 했습니다.


 여리고는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은 망치질 한 번 못하게 하시며 무너뜨리셨습니다. "너희의 앞날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뜻으로 일부러 그들은 아무것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는 굉장히 튼튼한 성이었습니다. 그 두께가 실로 대단해서 쉽게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이 무너진 후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창고에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게 되면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것들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이니까 다 창고에 넣어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은 몇 덩이와 외투 한 벌을 감추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만 의지하느냐며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것을 써보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그런 잡티도 허락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인 벧엘에 저주를 퍼부으신 것입니다.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너희가 이 세상 어떤 것에라도 마음을 준다면 내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볼래?"하며 아기까지 돌로 쳐서 죽이고 돌무더기로 쌓아 버리셨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것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주고 있으면 아나님은 죽여 버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 앉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그분 없이도 이 세상의 것들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아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성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교회 안에 지옥 갈 사람이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나 윤리나 도덕 뒤로 교묘하게 자기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스스로 속습니다. 정말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진짜 하나님 나라입니다.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다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행위가 등장합니다. 조금 바쳤습니다. 조금 감춘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힘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는 것에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입니다. 만약 초대교회 때처럼 하나님이 행하셨다면 우리는 다 죽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합니까? 자식이나 부모, 돈, 명예가 나의 신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못 참으십니다.


 그래서 돌로 때려죽이는 모습을 여러 군데에 그려 놓으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땅에 내려오시자마자 "내가 검 주러 왔으니까 그 검으로 다 끊어내어라"고 하셨습니다. 관계든 돈이든 명예든 다 끊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검으로 정작 끊어내어야 하는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항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야, 너는 내 은혜만 의지해야 해. 너는 그렇게 무력한 존재야"라는 것을 하나님이 폭로시키려고 하는데, '내가 왜 무력해? 나는 당신을 끝까지 살려내서 다윗 왕국의 화려한 흥왕을 다시 한 번 보고 말거야'라며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아직도 이 세상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네 힘과 검을 의지하는구나"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바로 그 내용인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두려워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쫓아다니면서 즉시 징계와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 안에서도 마귀적인 속성을 막 폭로시키신 다음에 그것들이 왜 안 되는지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앞서 봤듯이 초대교회에 모인 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실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진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동이 있자마자 그들이 "하나님, 우리가 죽어도 되니 복음만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그 자리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있었습니다.


 결국 어떤 종교 행위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 속에서 콕콕 집어서 마귀들을 드러내십니다.

착한 행위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여전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려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마귀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것은 돈을 얼마나 내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렙돈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를 내놓고 "이게 다입니다"라고 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이것을 팔았는데 이만큼만 갖고 있을 테니 이만큼만 받으세요"라고 했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감춰놓고 "이게 다입니다"라고 한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 좀 알아줘"라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런 행위는 차라리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이들이 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이 땅에서 잘 배우고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다 벗어 두고 "하나님, 저 이제 갑니다"하고 기쁘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한 기도나 전도 또는 착한 일은 다 못 갖고 올라갑니다. 이 업적을 하나라도 갖고 올라가면 그것 때문에 지옥 갈 것입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 공평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상급을 기대하고 실제로 메일로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도대체 천국 가서 어떤 상을 받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며 이렇게 답합니다. "상을 받고 싶다는 것은 천국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같은데, 그 마음 버리지 못하면 지옥 갈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지옥입니다." 상급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며 옛 사람이 죽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들이 하나씩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완성이 되어 부활한 몸으로 그 완성된 예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상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상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유업이요 나의 기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좋은 것이 더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또 상으로 받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율법주의, 유대주의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업적들을 쌓아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칭찬 받아야지!' 더 많이 칭찬받는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모두 작은 예수로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착한 일 많이 한다고 해도 칭찬이 더 쌓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성령이 소원들 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계속 행하게 하기 때문에 내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고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한 행위나 업적을 목적으로 사는 삶과는 다릅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다른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말하는 것이고 이슬람교나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선행입니다. 그것이 내 공로가 되어 '나는 다른 세상에서 더 행복한 존재로 태어나야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로나 행위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쌓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이렇게 못 하니?" 거기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 쓰레기입니다. 그렇게 할 것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면서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겠구나' 하고 그 예수와 동행하며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때, 모든 행위가 내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내게 스스로 점수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새벽기도든 봉사든 섬김이든 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더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부인되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혜와 능력을 내 악함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자는 바지 입으면 안 된다, 파마하면 안 된다, 화장을 진하게 하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교회에 올 때 예쁘게  하고 오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자유함을 누리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율법에 꽁꽁 묶여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보이려 애쓰지 마십시오. 자유하십시오. 그 속에서 약함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우리가 부모님 앞에 갈 때 항상 정장에 경건한 모습으로 갑니까? 그러면 부모님이 더 불편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 앞에서 어리광도 부리며 자유를 누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아들과 딸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아버지를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게 해드려야 할지 모릅니다. 아들과 딸은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말썽을 부려도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잊고, 그 아버지를 기숙사 사감 선생님처럼 대하고 있으니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시겠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자유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의뢰하는 참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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