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15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3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4;29~31)


다른 구절 하나 더 보겠습니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5~6)


 본문에서는 권세자들에게 협박을 당한 사도가 "내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게 옳으냐, 인간의 말을 듣는 게 옳으냐?"라며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불과 몇 주 전에 그는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안에도 도둑이나 싸우던 자들이 많아서 성전 내에 치안부대가 있었는데, 그들과 로마 병정들 600명이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내용을 보면서, '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이렇게 다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고서 제자들에게 "내가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설교하려고 18~21장을 쭉 읽는데 요한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그 내용도 없습니다. 그냥 강 건너갔더니 바로 유다가 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네가 누구를 찾으러 만나러 왔느냐?"하고 예수님이 물으시니 그들이 예수라 답하고 이에 그분이 "내가 그라"하시니 그들이 물러났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600명 이상의 군병들이 찾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그 한 명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행전 본문에서 성전 맡은 자들이 지금 두 제자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너희들 이거 전하지 마. 앞으로 부활의 예수를 전하면 죽여 버릴거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우리가 어떻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언제 그렇게 변했습니까?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시고 나서 변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예수님이 "기다려라 떠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권능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무리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어마어마한 교인들이 생겼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남자만 삼천 명이 돌아왔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출애굽의 오순절을 봅시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이 유월절이며 그 후로 50일 뒤가 시내산 사건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오는데 그 율법이 산 아래의 범죄의 땅과 맞닥뜨리게 되자 심판이 일어납니다. 돌판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이 삼천 명을 죽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오순절에 와서는 달라집니다. 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었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은혜로 삼천 명이 돌아옵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학적 과학적으로 그려져 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서 살아보려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배영을 배울 때 잘하는 방법은 몸을 물에 확 맡기는 것입니다. 물에 머리가 들어가는 것을 신경 쓰지 말고 집어넣어 버리면 그때 비로소 몸이 물에 뜨고 물길에 따라 흘러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하심과 섭리가 어떤 목적에 따라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경륜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 섭리가 어떤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륜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때 나는 자유해집니다. 비로소 복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 자신을 부려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선악의 기준에 따라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를 만들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에서는 양심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은 율법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은혜의 복음 아래에서 율법을 쫓는 자들은 하나님께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먹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양심을 쫓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양심껏 살면서 그 시대의 도덕과 윤리를 철저히 지키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을까요? 선악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여 스스로 선한 일로 하나님의 점수를 받아 보겠다고 하는 인간들의 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긴 상태에서 그분이 내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과 다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 살아 볼 거야'하는 이들은 대부분 양심의 법을 쫓아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것은 100% 자기 안에 자기 의, 자기 선으로 쌓입니다. 바로 그것이 악입니다.


 제가 초창기 목회 때 실수한 것이 그 부분입니다. 그때 제 설교를 들었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듣는 사람들은 "아, 어떻게 이렇게 살아?", "당신은 그렇게 사십니까?"라고 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그때는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은혜와 성화의 균형을 못 맞추고 너무 한쪽에 치우쳐 설교하는 바람에 표독스럽고 무서운 목사가 되어 버렸고, 지금도 그것을 만회하느라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저에게 가르쳤던 목사님께 "왜 목사님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 목사님은 "아니야, 그것을 어떻게 하겠어? 창피해서 그런 거야"라고 답했습니다. 그의 말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창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창피를 당해도 됩니다. 그 속에서 은혜를 붙들 수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다른 종교인들이 얼마나 착하게 삽니까? 지금 이슬람 교인들을 오사마 빈 라덴 때문에 테러범으로 인식하는데, 사실 그들은 굉장히 착합니다. 전쟁과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왜곡된 신앙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고, '우리 기독교가 전 세게에 선교하는 것이 바로 이 모양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현 선교는 그 모양입니다. 가짜 십자가를 들고 가서 다 때려죽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 배웠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아무리 공부해 봐도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성도의 역할을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세상에 예수를 전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지금 공부하는 사도행전 본문의 주된 키가 성령입니다. 성령은 주관적 객관적인 역사를 공의하시는데, 요한복음 16장에도 나오는 것처럼 조이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했습니다. 책망은 '죄를 입증하다, 설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특히 성도들에게 집중됩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 "예수가 왔는데 너희가 그분을 못 알아보고 죽인 거 아니냐?"라고 했더니, 그것을 들은 자들이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갈 정도로 분을 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입증이 되고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 감추고 있는 자신을 성령이 오셔서 확 드러내시니까 그렇게 분을 낸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의는 반드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부터만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의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분명히 있는데 예수를 믿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죄를 입증해 주시고 설복하실 때, '맞아, 예수만 붙들어야지'하면 내가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라는 것이 폭로가 될 때 예수의 의를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의 의를 확실히 붙들게 되면, 그 예수가 내 삶을 운행하시기를 기도하면서 그분 앞에서 계속 폭로당하고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가 얼마나 잘났고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고 그런 능력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고 자기 안에 그 힘이 있다고 여겨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그 죄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처절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복음의 실제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첫 단계는, 죄가 무엇이고 그 죄에 빠진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과 더러움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무엇인지 그 은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경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냥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살인을 안 하면 되는지 알았지만, 그것은 양심에 따라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다 해냈는데도 하나님이 "너 아니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해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이것과 전혀 관계없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내가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인지가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처절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첫사랑을 잃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첫사랑이 마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가슴속에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는 것은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닙니다.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구나"라고 폭로당할 때마다 우리는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절대 첫사랑으로부터 떨어지는 게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성숙은 '나는 예수 없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라는 그 믿음을 더 공고히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만 믿을래요'이지, '하나님, 이제 제 실력이 쌓여서 하나님이 점점 안 좋아져도 괜찮아요'가 아닙니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생명력을 온전히 풍성하게 부을 수 있도록 바꿔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헨리 나우웬의 책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이 "가톨릭 신부인 그가 그렇게 열심히 살다 갔는데 천구에 갔겠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가톨릭 사제로, 박사 학위 다 내려놓고 교수직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라르쉬 공동체에 가서 평생 장애인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대단한 삶을 살았다며 찬사를 보내고 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죽는 날까지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 저는 이렇게 많은 것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저 괜찮죠?라고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누가복음 16장의 바리새인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참 감사합니다."

만약에 헨리 나우웬이 그렇게 다 버리고 봉사하고 저술 활동에 애쓰면서 내심 스스로 즐기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조금이라도 내놓았다면, 그는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헨리 나우웬이 있는 반면, 세상에는 도끼로 십수 명을 죽인 살인자도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갈 때까지 도덕적 윤리적으로 망나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판 뒤집기로 감옥에 가서 예수 믿고 전도하며 살다가 사형 집행일에 간수들에게 "꼭 예수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저만 천국 가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꼭 전하고 싶습니다. 꼭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그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고 합니다. "내가 용서 못했는데 누가 너를 용서해?" 그 살인자와 헨리 나우웬이 지금 다른 곳에 있을까요?

 만약 둘 다 천국에 갔다면 헨리 나우웬은 좋은 집에 살인자는 판잣집에 있겠습니까?


 이 땅의 성도가 어떤 행위를 많이 하는지, 적게 하는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착한 일만 할 것인데, 이 세상에서 그것 몇 번 더 하고 더 배우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새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배우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계속해서 폭로당하게 됩니다.


 제가 간혹 '어느 산골에 가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은 100% 진심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능력도 마음에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붙들고 세우셔서 하는 것뿐이지, 저는 사명감 같은 것도 전혀 없습니다. 저 한 몸도 못 가누는데 무슨 사명감이 있겠습니까?" 깨끗이 잘 살고 개혁하여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자"라는 개혁주의도 성경에 비추어본다면 이단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내서 하나님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단한 일을 많이 해서 세상을 밝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부인당하면서 처절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삶을 살아갈 때, 그분이 알아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만 필요한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 구원의 근거인가?'를 철저하게 깨닫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불도저가 밀고 간 오징어포처럼 완전히 벌겨벗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를 감싸 안고 있는지, 그분만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당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책망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장악하시고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예수가 내 껍데기 때문에 밖에 못 나가고 있는데 진짜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야기를 지우면서 오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도망갔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다 지우더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칭하는 것을 거절하고 예수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것보다 좋아해서 갔다"라고 써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라가 커튼 뒤에서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내가 무슨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지우더니 이야기를 다시 쓰셨습니다. "사라는 믿음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너무 방종에 빠지지 않을가'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처음에 방종에 빠지더라고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불편해서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망가집니다. 여자들은 임신하면 입맛이 좋다면서 막 먹습니다. 살쪄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임신했으니 그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예수라는 새 생명이 싹트게 되면 우리는 망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보배인 줄 아는데 계속해서 우리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것이 폭로되어야 합니다. '나는 질그릇이구나. 내 안에 있는 보화인 예수 때문에 내가 귀한 것이구나'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에게 우습게 여겨지는 사람이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전부 그것을 철저하게 숨기고 '나는 예배당에서는 절대 믿음 없는 자로 보여서는 안 돼'라며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쇼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은 죄인이 우글우글한 곳입니다. 우리는 유교 사회에서 살아서 자꾸 창피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앙 좋은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이들이 성도의 교제 속에서 힘을 얻는 게 아니라 불편하고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 솔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탕자의 비유에 나오듯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에 우리를 찾으러 오시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다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0% 하나님이 하고 100% 우리가 한다"라는 말은, 우리가 100% 열심히 노력해서 성화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100% 이방 땅 돼지우리에서 그 삶을 경험해 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100% 100%성화의 이론입니다. 100% 너희가 다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꾸 바보가 되고 보잘것없는 자로 폭로당하면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기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랑하시는구나'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드러나야지, '그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저렇게 만드시는구나'하고 그 사람이 드러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나님이 완전히 우리를 장악할 때 내놓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혼자 있을 때 바라보는 내가 진짜 '나'입니다. 그런데 자구 무리 속에 있을 때 '나'를 '나'로 착각하면 자신도 그것이 진짜인 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심리학의 가장 기본 전제입니다. 가짜 '나'에 속지 마십시오. 진짜 '나'를 폭로당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붙드는 게 신앙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보잘것없고 무력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만을 붙듭니다. 그 은혜 없이 우리는 그냥 죽은 흙일뿐이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 속에서 더욱더 밝히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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