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12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1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3~28)

 


중요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 권세자들,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은 시편 2편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계속해서 시편 2편의 단어와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부터 내용을 보면 헤롯가 빌라도는 무슨 죄입니까? 하나님이 뜻하신 것을 이루려 그분이 모으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럼 그들은 이용만 당하고 지옥 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헤롯과 빌라도가 한 일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행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무식한 자들의 질문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손에 못 하나라도 박았습니까? 그들이 한 것은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이런 인생을 허락하신 존재가 우리보다 약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죽일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가기의 목적이 이 세상의 것인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보다 크게 느낍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내려오면 다시 한 번 단합하여 그분을 살해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감히 헤롯과 빌라도는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까?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은 "나야말로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데"하는 마음을 종교심으로 꽉꽉 누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보다 그 잘난 돈이 더 좋고, 썩어 없어질 육신의 건강이 더 좋고, 천국 가면 만나지 못할 수 있는 자식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 것들은, 하나님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목숨처럼 여기는 것들을 놓을 수 있니? 하시며 놓으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꼭 붙들고 우리의 자아를 살찌우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품일 수 있습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소품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왕 행세를 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고작 50~60세에 죽었습니다. 50~60년 동안 배 터지게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살라고 하면, 그 삶과 바꾸시겠습니까? 분명 여기서 조금 고생하고 영원 속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삼성 같은 회사에 가면 처음에 극기훈련 같은 것을 진행하는데, 그 과정을 못 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다며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일주일이나 열흘을 못 견뎌서 삼성에서의 회사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지만, 마찬가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고 교육받아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의 백성으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내 중심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배우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데, 다 내 중심이고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책을 읽어 본 적 있습니까? 그 책에는 인간들이 아담 이후로 그려왔던 유토피아에 대한 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어떤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왜 그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사탄 같은 목사가 앞에 서서 "착하게 잘 삽시다, 병 고쳐줄 테니 나오세요"라며 소경이 소경을 끌고 있으니까 다들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 보면 진짜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우리 인류는 어디서 창조되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루에 5분씩만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해 놓고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시며, 그 안에서 우리는 깨우쳐 배우는 것입니다.


 제대로 배워야 하는데, 그저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하는 것에 집중하며 세계 선교까지 기도합니다. 그것이 진심입니까?

 물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거만 주구장창 기도하면서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그 자신도 잘못 알고 있는 복음을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이 진정 슬프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알아야 하는데 무조건 가겠다고만 합니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아프리카든 가겠다는데, 어떤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그냥 착한 일 하고 자기의 가득 쌓아서 올 것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독교가 부흥하는게 진짜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오셨는데 누가 그분을 죽였습니까? 유일하게 그분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가 오면 누가 그분을 죽일 것 같습니까? 교회가 에수를 죽일 것입니다. 지금 예수가 오셔서 "너희가 추구하는 그것 아니라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해 놓았는데 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제발 눈을 떠! 나는 그런 것을 주는 게 아니야. 하늘의 떡인 만나 주러 왔잖아. 그런데 왜 세상 떡 달라고 쫓아다녀? 그게 아니라니까!"라고 교회에 설교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저를 향해 쏘는 화살을 예수에게 쏠 것입니다. "너는 또 무엇이냐?" 항상 하나님의 적은 그분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담합을 하여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실제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는 항상 묵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하나님의 시간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사건을 통하여 묵시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역사로만 읽습니다. 그것이 세대주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안에서 묵시을 읽어내야 합니다. 비유로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비유는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겨자씨, 씨앗, 등불. 일상 이야기 속에 묵시를 캐내는 것이 비유듯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는 묵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섬겼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해서 그 돈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남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십일조를 안 드린 곡식으로 밥을 했을까봐 자기 먹을 것을 들고 가고, 전쟁이 일어나 뒤에 칼을 들고 오는데도 안식일이라 뛰면 안된다며 절대 뛰지 않는 이들은 우리와 상대도 안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천국에 가려면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는 나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발톱만큼이라도 쫓아갑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고자 애썼지만, 바로 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교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유대주의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국의 화려함과 풍요를 누릴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건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보상해 주시겠지.'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행위 열심히 해서 원하는 것 보상받자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천국이어도 큰 문제입니다. '난 천국 가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하는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려고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뚫고 들어온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그리고 있는 환경이 아니더라도 그분을 예배하는 자체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어디든 괜찮은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부인되어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내가 부인되기는커녕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 오늘날 교리입니다. 개혁주의 교리인 것입니다. 개혁주의도 이제 마귀화되어 갑니다.


 유대주의와 오늘날 개혁주의가 무엇이 다릅니까? 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행위에서는 더 악해지고 유대주의보다 나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100% 죽입니다. 지금도 그분의 심장에 도끼질을 하고 있는 게 교회입니다. 통탄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의 심장에 도끼질을 해대는 세상에 살면서 우울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내 것만 잘되고 내가 원하는 것만 이뤄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하나님 나라에 가면 준다던 유산이나 미리 주세요. 여기서 창기, 세상과 함께 간음하다 갈 테니까 미리 줘요. 부자되게 해 주세요. 소원 들어주세요. 열심히 놀다 갈 테니." 이런 게 바로 탕자의 모습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욕했지만 사실은 우리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어 주세요"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주면 아버지로서 자격을 잃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그것을 달라고 떼를 쓰더니 갖고 도망갔습니다. 아버지가 죽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아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똑같이 이 땅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나라가 완료되면 주겠다고 하시는데, 여기서는 무언가 배우고 오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계속 미리 달라고 합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한 번을 읽어본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은 온통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을 뚫고 들어와 있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전부 이 세상을 살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사는 것이 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짓눌려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불평과 원망은 인류의 죄가 생산해 놓은 열매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원망합니까?


 여전히 그 중심은 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지금도 삿대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비결을 말씀을 통해 터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떠나는 날 하나님이 생경해서 그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달라고는 해봤지만 한 번도 친밀하게 교제한 적이 없고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지참금을 받고 평생 보지 못한 남자를 신랑으로 정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이 스물이 넘은 여자를 신랑이 있는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기쁘게 잘 수 있겠습니까? 들어가 보니 생전 보지 못한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합니까? 평소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런 생경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해놓고 그분이 말씀하시려 하면 일어나 훅 가버립니다. 그래서 기도가 짧아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분에 대해 알고 배우겠습니까? 다른 것 안 해도, 괜찮은데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다른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하나님께 연결시켜 보십시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일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존 원주민들은 턱에 고리를 끼고 다닙니다. 어려서부터 턱을 찢어서 고리를 끼고 다니는데, 그것을 끼지 않으면 그 부족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못생긴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끼는지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어보면 "우리 할아버지가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빼면 더 좋아 보이는데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아프면서도 끼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인생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똑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교회 다녔다고 뭐하러 오는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그냥 다닙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 삶에 질문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하나님과 대면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언제까지 뭐 달라고 하실 것입니까?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떼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줘도 잘 모릅니다. "왜 쟤는 사탕을 한 뭉텅이 주고 나한테는 두개만 줘요?"라며 불평합니다. "너는 당뇨잖아. 그래서 조금씩 나눠주려 한 거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냥 갑니다. "왜 쟤는 부자로 만들고 나는 가난하게 만들었어요? 빨리 채워 줘요."라며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려 하는데도 다음날 또 그렇게 갑니다. "너에게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조금씩 나눠 주려는 거야. 그리고 이것으로도 잘 살 수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거든." 이 말을 듣지고 않고 가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은 우리가 하는 말보다 듣는 말이 더 많아야 합니다. 그것을 교제요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아,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구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시편의 이야기를 끌고 오는 것입니다. '아, 이 일은 시편 2편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전부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여 방해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구나'하고 금방 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모르면 기도도 못합니다. 듣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환청으로 들리는 것은 정신질환이니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성령을 아는 데서 옵니다. 시편 2편에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이 기꺼이 나서서 분노하느냐?"라고 합니다. '분노하다'라는 말은 파도가 밑에 있는 찌꺼기들을 확 끌어올려서 모래밭으로 밀어버리는 그 상태을 뜻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더러운 것들을 계속해서 자기들의 열매로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분노입니다. 화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지금 얼마나 더럽습니까? 생활하면서도 힘이 없어서 억지인 줄 알지만 당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억지가 점점 더 많아집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은 그 억지를 계속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상위 1%를 위해서 나머지 99%가 희생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게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필리핀, 한국, 미국, 일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프리메이슨 같은 자들이 위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고, 우리는 겨우 먹을 만큼 먹고살면서 다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떨어뜨려 주는 부스러기 먹으면서 사는 밥상 밑에 개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세상을 그냥 보고 계시겠습니까? 시편 2편에 어떻게 나옵니까? "철장으로 깨알같이 부수어 버리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여전히 거기에 붙어서 하나님이 철장으로 부수실 때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곧 끝납니다. 그렇다고 불성실하라는 게 아닙니다. 성실하게 사십시오. 정확한 통계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패역하고 타락한 자녀들을 조사해 보니 부모의 직업으로 부동산 부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부동산으로 갑자기 졸부가 된 자들의 자녀들은 부모가 주는 돈으로 즐기다가 타락해서 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부럽습니까?


 학비도 대주지 마십시오. 자기들이 알아서 다니고 갚는 힘을 키우게 하십시오. 왜 다 해주려고 합니까? 오히려 그것이 자식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청소를 하든 서빙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 괜찮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천국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의 삶을 업그레이드하려 하니까 그 삶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저도 목회 쉽게 하고 싶습니다. 때 되어서 앞에 나오라고 안수해 준다고 하면 적어도 거기에 10명은 걸립니다. 설교를 들으러 모인 자들을 쭉 모아서 안수하고 축복 기도해 주고 그들에게 신뢰를 준다고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다며 "잘 될 거예요. 열심히 해 보세요"라고 하면 10명은 걸립니다. 그보다 더 적은 5명만 걸려도 저는 신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합니까? 자주 그렇게 하면 그중에는 병 낫는 사람도 있고 횡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또 소문이 몇 사람에게 퍼져나가면, 이제 영험한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쉽습니다.


 할렐루야기도원의 원장이 몇 명 고쳤을 것 같습니까? 초등학교도 못 나온 그가 어느 날 약수를 먹다가 하나님께 "너는 내가 병 고치는 은사를 줄 테니 병을 고쳐라"해서 사역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았는데 수만 명 중에 한 명이 나았습니다. 바로 그 한 명에게 떨어진 복이 내게도 임하길 바라면서 집을 팔고 땅을 팔아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나은 사람은 몇 명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언변과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행동 등 몇가지만 있으면, 사람의 몸에는 자연치유의 힘이 있으므로 수만 명 중에 몇 명은 낫는 것입니다.


 아마존에 있는 어떤 여자가 브라질 시내에 나와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고 부족에게 돌아가 거기서 죽겠다며 아마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의 추장인 그 여자의 아버지가 굿을 해주었고, 한 달 만에 자궁암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방송에도 나왔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입니까? 한편 그 이후로 그 추장에게 자궁암 환자들이 무수히 몰려갔는데 한 사람도 낫지 않았답니다.

 성도는 그런 것을 쫓아다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십시오. '몸은 아프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천국에 사는 거 같아. 이렇게 죽으면 이게 바로 천국 아니야? 어떻게 죽음이 이렇게 안 두렵지?라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죄인 됨과 티끌 됨을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음을 알고 그분만 붙들고 가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 것을 하나씩 놓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도대체 왜 왔고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성도라 자처하고, 그런 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손에 못을 박고 있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아멘"과 "할렐루야"가 연신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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