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14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2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4;29~33)

 

 초대교회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죽인 권세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핍박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그 말은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죽인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33절에 나옵니다."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위협을 당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말씀만은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설교했습니다.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라는 것만으로 왜 안 됩니까? 왜 부활 신앙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신약에서는 부활을 계속해서 강조하는데, 고린도전서 15장의 경우는 거의 전체가 부활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 가장 공격받은 교리가 부활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같은 것은 교리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깁니다. 제가 배웠던 교수 중 한 명도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의 특성상 그분 안에 수분이 너무 빨리 빠져나가서 예수님이 가루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훔쳐갔다고도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거짓으로 전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학교, 병원, 구제 같은 것들이 다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병원, 의술, 의사도 선생님, 교육기관 등도 교회에서 먼저 가르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나마 세상이 이 정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 교회 덕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서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교회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이 자곶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 이쪽에 폭풍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효과라는 이론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가 성도가운 삶을 살아낼 때 폭풍 같은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게 됩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 자신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선한 영향력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나를 스쳐 지나간 누군가가 우리에게 영향을 받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로 D.L무디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둣방 주인의 영향을 받고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갔더니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칭찬을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나에게 영향을 받은 어떤 이들이 세상을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분명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영향력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교회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기꾼들이 만들어놓은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던 제자들의 말이 거짓이라면 성경은 다 사기입니다. 구약부터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구약부터 제자들이 부활에 대해 쓴 신약까지 모두 다 거짓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기꾼들이 쓴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까? 그리고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거짓말로 세상 권세자들에게 공격받고 심지어 순교까지 당하는데, 그 거짓말에 목숨을 거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들은 진짜 보았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자들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약시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시작된 은혜의 시대, 교회의 시대인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본 다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다른 것에는 회의론에 빠져서 이것저것 많이 의심을 해봤는데, 천국과 지옥, 심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는 것, 그분이 다시 사신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은혜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몸을 입고 살아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뚜렷한 사람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가지 시도를 많이 해봤습니다. 그래서 수입의 90% 이상을 구제와 선교에 다 쓰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뭐라고 해도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라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저 사람 착하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막 뜯어먹으려 합니다.

 

 저번에 차 사고가 났습니다. 멀쩡히 차를 타고 있는데 뒤차가 와서 박았습니다. 별로 다치진 않았지만 뒤차 운전자는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기에 안 다쳤으니 차나 빨리 고쳐 달라고 했더니, 그 회사 사람들이 소송 안 할 거냐며 놀랐습니다. 사실 그런 사고는 100% 소송 처리해서 돈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험회사는 병원을 무조건 다니면서 돈을 타라고 했고, 난 안 다쳤으니 차만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는 어디든 가서 가장 먼저 제 차를 고치겠다고 했고, 사고 낸 사람도 너무 감사하다며 인사를 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전에 한 번 더 있었습니다. 그때도 뒤차가 박았는데, 차의 뒤쪽 반이 없어질 정도로 파손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구급차에 실려갔는데, 그냥 괜찮다고 했습니다. 무릎이 부딪혀서 아팠지만 걸어갈 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병원 갈 필요는 없을 거 같다며 차나 빨리 고쳐 달라고 했으나, 고칠 수 없는 상태라 결국 차는 폐차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상황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저를 잘못한 사람으로 몰았습니다. 자기가 받히고 그렇게 넘어가는 사람이 없다며 제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아는데 변호사가 일을 그렇게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잘못하면 그 모든 것을 다 물어줄 뻔했는데, 다행히 하나님이 증인을 보내주셔서 그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당하며 섬기고 용서해 주려 해도, 세상은 자기의 유익이 되면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자기를 물에서 건져준 이의 짐을 빼앗기 위해 그를 물에 던지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우상 삼아 사는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서 더 착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려 애씁니다.

 

 티베트나 몽골같은 데 가면 '라마'라는 불교가 있는데, 그들이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를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를 하는데, 그것은 마음과 말과 몸을 부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2,000-3,000km 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것도 맨 땅이 아닌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산악인도 아닌 가난해서 잘 먹지도 못한 그들이 자신의 말과 마음과 몸을 부처님께 드려서 선하게 살고 싶다고, 다음 생에 조금 더 복된 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그렇게 힘든 오체투지를 살아있는 동안 여러번 합니다. 나중에 그것이 끝나면 이마와 무릎에 혹이 생기는데, 그게 다 굳은 살입니다.

 

 우리는 선하게 살려고 그들만큼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저 평범한 불교 신자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들을 보면 너무 불쌍해서 말리고 싶습니다. 일년에 여섯달이 겨울이니 먹을 것도 많지 않고 집도 얼기설기 짓고 그렇게 가나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인데, 나중에 더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오체투지를 하는 것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삶이 바로 그와 똑같습니다. 오체투지하면서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행복이 다인 줄 알고 그것을 쫓아 이 세상의 가치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들 모두 너무 불쌍합니다. 사람들은 그 공허를 심심하다고 이해하고 그 심심함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애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는다고 시를 쓴 것은 전쟁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도 인생이 무엇인지, 사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 것입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는 정말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하나님이 이순신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삶을 고민하고 진리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습니까?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오히려 전쟁이 그의 공허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마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바쁘고 분주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심심함과 공허함을 채워주기 때문인데, 그것은 잠시일 뿐 일이 끝나면 다시 공허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그 공허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체투지도 당연히 소용없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모든 이의 평화를 빈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다음 생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함이지, 다른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이는 없습니다. 죽도록 절하면서 히말라야 올라가지만, 그것은 그저 지옥으로 가는 티켓을 사는 것입니다.

 

 그건데 그와 같은 우매한 짓을 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떠한 선한 일이 나올 수 있습니까? 도덕적 윤리적으로 착한 일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은 다릅니다. 착한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착한 일을 하고 기분 나쁜 이는 없습니다. 그것이 슈바이처를 수십 년간 아프리카에 머물게 한 힘이었습니다. 반면 선한 일은 간혹 자신에게도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우리 자신이 부인되고 결국 하나님의 복만 가득 채워지는 '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선한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 등이 다 포함됩니다. '이렇게 정말 살아야되나'할 정도로 힘이 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꾸 착한 일을 하려 하면 안됩니다. 불쌍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 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의'로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그러한 일을 차곡차곡 쌓아서 나중에 심판대 예수님 앞에서 내려놓습니다.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야"라고 하십니다. 그가 한 착한 일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죄와 은혜가 무엇인지 올바로 알면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내 자랑으로 절대 쌓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제 부활을 그것과 연결시키며 봅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죄와 육신과 세상과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육신과 세상과 율법이 삯으로 주는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이 사망을 이기셔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다 가져야 할 사망이 그분에게 떨어졌는데 그분이 사망의 반대편에서 살아 올라오셔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죽은 흙이었던 우리가 그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영생을 얻어 그분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무관한 자로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예 선악과를 안 먹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필 가장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그것을 먹게 내버려두신 것은, 우리에게 죄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시고 죄의 삯이 죽음의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영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음과 같은 손해를 감수하고 은혜를 쏟아부어서 비로소 우리가 그분의 자녀 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선용된 것이 예수와 십자가입니다.

 

 그 중요한 내용을 그저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겨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을 배우고 죽은 흙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육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배우고 성령이 어떻게 내 안에서 실제로 시시는지를 잘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영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원하는 것도 많고 쌓아놓는 것도 많습니까? 노후준비나 은퇴준비 같은 것 안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시면 천국에 빨리 가야지'하는 마음일 수 없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려 하시는데 솔직히 천국가기 싫은 것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돈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곳은 다 굶어 죽어가지만 한편에서는 음식이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식이나 펀드에 마음이 휘둘리기도 합니다. 돈이라는 것은 무형의 힘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폐에는 힘이 없습니다. 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며 살아있는 신인 것입니다.

 

 최근에 한 기사를 봤는데, 영국에서 8년 전 180억짜리 로또에 당첨된 30세 청녀이 8년 만에 그 돈을 다 날리고 지금 정부 보조금으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180억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며 살 수 있었던 그때보다 지금 정부 보조금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삶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 돈이 생기자마자 그가 얼마나 유세를 떨었는지, 아내가 돈도 다 필요 없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날마다 성적인 쾌락을 즐기고 마약을 하고 과소비를 하며 살았답니다. 돈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더해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집니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 같다더니 왜 이렇게 내 하루는 긴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면 살수록 이 세상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안의 예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그때 세상의 초목과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의 배설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즐거워하지 마십시오. 그까짓 명품가방, 좋은 차에 마음을 쏟는 것은 내 안에 무언가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다른 것으로 자꾸 감싸서 그것을 자랑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아하고 스스로 명품이 되십시오. 옛날에 구상 선생이 하루에 야채 한 끼만 먹고 살았답니다. 그리고 늘 무릎꿇고 앉아서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나요?"라고 하면서 지내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불쌍했겠습니까? 그래도 제 눈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 굉장히 큰 사람입니다. 뭘 입으면 어떻습니까?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위대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들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왕들이 세상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을 즐기는 게 말이 됩니까? 아마존에서 그 부족이 장식하려고 몸을 뚫고 문신하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와서 해보라고 권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마냥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왕자, 공주라는 자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치장하는 것들에 마음을 쏟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약속받은 자로, 그때부터가 진짜 삶입니다.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십시오. 말씀에 나오듯이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전했던 그 부활, 첫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 연연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짜, 적그리스도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배설물을 누리라고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부활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바람같이 지나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서 이곳에서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얻어내지 못한 이들을 가난하고 연약하고 못난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만이 진짜 가치라고 하면서 사는 삶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그 삶을 살다 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수 목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6  (0) 2016.01.12
사도행전 15  (0) 2016.01.12
사도행전 13  (0) 2016.01.12
사도행전 12  (0) 2016.01.12
사도행전11  (0) 201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