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16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4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 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치고 나서 굉장한 핍박을 받고 무리에게 돌아와 그들의 위협과 경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줬더니 믿는 무리가 함께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만 계속 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로 그들이 모인 곳에 진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요즘에도 하나님이 그러한 진동을 나타내실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게 있어서 진동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도 성령이 온 이후이지만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이 병자를 고쳐주시고 성령의 임재하심도 경험하게 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예수님도, 성령은 바람처럼 온다고 하셨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사도행전에서만 성령이 불의 혀처럼 내려옵니다. 그때는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도 "온전한 것이 오면 그동안 있던 모든 것이 폐하게 되니라"고 나옵니다. 그 구절에 나오는 '온전한 것'은 성경을 말하는 것으로, 성경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도 기록된 정도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으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너희가 그분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그만큼만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추론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뱅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열심히 달려가고 멈추라 하는 데서 서야 합니다. 거기서 계속 달리게 되면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갖고 말들이 많은데 성경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1년 365일이 예수님 오신 날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항상 새롭게 인식이 되고 각인이 되고 나는 예수 때문에 이렇게 살아난 자가 되었으니 365일이 성탄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절기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다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365일 예수와 함께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반응을 하시자 그들이 확신을 얻었습니다. 신앙의 여정 가운데 말씀에서 오는 확신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담대하고 용감해집니다. 그 증거가 본문에 나옵니다. 자기 집과 밭을 다 팔아 교회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념으로 삼는 풍경이 바로 이 부분인데, 이것은 원시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와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완전히 다릅니다. 공산주의는 무력과 강압에 의한 것이고 초대교회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칼 마르크스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교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목사로 살면서 너무 어렵게 사니까 세상에 대해 복수심을 갖고 있다가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해서 공산주의를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망했습니다. 남아 있는 나라가 얼마 없는데 안타깝게도 그중에 북한이 있습니다. 몇 명이 자기들의 체계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제가 온누리교회 청년부 사역할 때 그 청년부에 탈북자가 있었는데 그는 공산당 간부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1967년생이었는데 중고등부 시절인 1970년대-80년대 초에 소니 컴퓨터가 5대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첼로를 연주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가들을 평양에 불러다가 공산당 간부 자녀인 열몇 명만 앉혀 놓고 공연을 하게 한답니다. 그들만 보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상위 계급 몇 명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계급을 다 없애고 유무상통하는 시대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그들이 상위 계급에 오르고, 하위 계급은 자기들끼리 잡아먹기까지 할 정도로 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막걸리를 사오라고 딸을 보냈는데 안 돌아와서 보니까 남자들 서너 명이 논두렁에서 그 아이를 잡아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먹고 싶어서 먹겠습니까? 너무 배가 고프니까 눈이 뒤집혀서 사람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 공산주의를 어떻게 초대교회와 비교할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는 70년 동안 1억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숙청해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그들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예베소서 2장 14절에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막힌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성전에 가면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인의 뜰이 있고 유대인의 뜰이 있고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넘어가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그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의 그 담이 헐려서 이제는 서로 개 취급을 했던 관계조차도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면 우리 사이의 막힌 담들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평화안을 내놓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류가 교육을 받지 못해서 평화롭지 못한 거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지성이 있는 이들은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양 있고 지성이 있는 사람들이 안싸웁니까? 그들이 더 싸웁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무식하게 싸우지 않을 뿐입니다. 제가 정당에 있을 때 총재를 가까이에서 봤는데 그는 말다툼도 안 하고 거친 말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행동으로 싸웁니다. 침묵으로 싸우는데 얼마나 사람 피를 말리는 줄 모릅니다. 나중에 사모님이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동안 사모님은 침묵으로 맞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전쟁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교양과 지성을 쌓아도 다툼과 분열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가 그에 비해 하위 계급에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때 사람들은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노숙자가 이건희 회장을 질투합니까? 아닙니다. 노숙자끼리 어떤 사람이 담요 한 장을 더 받으면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있어야 하고 그 수준에서는 내가 왕이어야 하는데, 누군가 나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나보다 잘난 것 같으면 반드시 그를 끄집어내려야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험담, 뒷담화입니다. 험담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을 평가절하 시킵니다. 거기에는 '나는 그 사람보다 낫지 않아?'라는 사고가 개입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이 가정 이야기를 상담하러 오면 안 듣습니다. 부부관계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상대방을 굉장히 비방하고 욕합니다. 저에게 그 상대방의 비밀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목사님, 혹시 앞으로 제가 이혼하더라도 저에게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것입니다."라며 저를 설득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내든 남편이든 그 상대방이 저에게 와서 또 욕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쓰레기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가 좋아지면, 서로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제 욕을 막 합니다. 그래서 부부 이야기를 하러 오는 사람의 말은 안 듣습니다. 가정사는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죄인임이 폭로되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이 스스로 발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처럼 사탄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러한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왜 우리에게 왔는지, 그러한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음을 조금씩 배우면서 내 안에 복음을 쌓아갈 때에 우리 삶에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상대방이 어떤 화살을 맞으면 추락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꼭 끝까지 갑니다. 그래서 작은 것으로 부딪혔다가 꼭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맙니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는 절대 네 앞에 굴복할 수 없다는 아담의 속성이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구나.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이에요" 맞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가 나입니다. "나는 너에게 공격당해도 싸고 네가 지적한 모든 게 맞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지적한 내용이 진짜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화가 안 납니다. 그것이 실제로 작은 것이라도 내 안에 죄책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누가 그것을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완전히 죽은 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면 상대방이 무슨 공격을 해도 "그래 맞아. 그게 나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경쟁자나 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금방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나온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초대교회는 진짜 천국이었겠다'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서신서를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초대교회에는 지금도 용납할 수 없는 근친상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수시로 핍박하고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싫어했고 술 먹고 가난한 자들이 왔을 때 자존심 상해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유무상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면을 보여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가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이고 그럼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어?"라는 뜻입니다. 복음, 예수의 은혜를 배우고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에도 조금씩 좋은 모습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 그 공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런 좋은 모습들을 보면서 "한 번 우리 힘으로 해보자"하면 꼭 싸움이 나게 됩니다. 홰 이 세상 수많은 구호단체 안에 엄청난 비리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다 좋은 일을 하려 모였고 처음부터 사기 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구호단체 대표도 수십억을 빼돌려서 땅 사고 집 사고 자기 재산을 착복합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좋은 마음으로 모였다가 맘몬 앞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행복의 근거로 삼아 살아야 하며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성령을 통해 조금씩 배우게 되면,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렇게 조금씩 성취해 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털어 다른 이를 섬겨 주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며 끌고 가시는데, 그 말씀을 잘 듣지도 않고 내 것을 더 달라고 자꾸 응석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인이 신문에 난 기사를 보내줬습니다. 미국에 38만 명을 회원으로 둔 목사 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예배드리는 장면을 사진 한 장으로 담았는데 그들은 헌금을, 목사가 설교하는 강대상 아래 던지고 가야 합니다. 목사는 누가 얼마 냈는지 다 아는 것입니다. 그 목사가 말하는 것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내 기도를 받고 우리의 예배에 참여하면, 돈이 어디로 흐르고 어디 있어야 할지 아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거야. 그리고 이 집회에 와서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병을 치유받아라."


 그들이 목사를 추종하는 것은 바로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똑같은 이야기만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성경 한 구절 읽ㅇ러 놓고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나씩 헌금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는 말씀 준비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렇게 일주일 중 5일을 체육관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소유의 자가 비행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진짜 극적으로 들켜버린 사기꾼에게 속는 자들이 문제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우고 추구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똑같은 짓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게 아니라 대부분일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적이 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어떻게 하면 복음이 성도의 삶을 바꾸어 낼까?'라고 고민하는 교회가 몇 군데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말씀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10분의 1이라도 다 이해합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가 더해가는 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지식도 애착도 진지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연애편지라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든 그 안에 누군가가 나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면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입니까?


 저에게 기존의 기독교를 많이 비판한다고 하는데, 저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고 사기치는 자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고 그 계시의 습득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살 수 있도록 변해가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저 이 땅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타종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약속된 언약을 배우십시오.


 어떤 가톨릭 신자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하자마자 엉엉 우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느냐고 했더니 그는 할머니가 초기 가톨릭 순교자로 몇 대에 걸쳐 가톨릭 신자인데, 제 설교를 듣게 되면서 자기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너무 무서워 잠을 못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설교에 따르면 자신은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수천 번 고해성사를 했는데도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자손으로 50년간 성당에 다니며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인데도 수시로 음란한 것들이 떠오르고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당신의 삶 속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많이 우세요. 당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더 폭로당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너무 경건한 사람으로 곡해되고 있었는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는 것을 폭로당하세요. 그리고 그 추악한 자리에 떨어진 예수님의 은혜를 배우세요. 그때 그 죄책감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착하게 살아야 제가 이 죄를 해결할 수 있어요?" 계속 이런 말만 하는 것입니다. "50년간 착하게 살았는데 안 되었다면서요? 그런데 뭘 착하게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50년을 줬는데도 안 되었으면 앞으로 50년을 더 줘도 당신은 그렇게 못 살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배우란 말입니다." 그제야 조금 이해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폭로당해야 합니다. '왜 난 이 모양일까? 예수를 믿고도 왜 계속 이럴까?'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의 은혜를 붙들고 가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마음까지 다스립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행위와 마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어야 합니다.


 행위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만 내 안에 떠오르는 욕심과 음욕과 미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 아니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지 않는 게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형제를 다 사랑합니까? 결국 우리는 계속 살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그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잘못했어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란 가지를 꼭 붙들면 포도나무의 열매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속에서 그 가지를 붙들고 성경을 잘 읽고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내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세 치 혀와 생각과 마음으로 이웃을 죽이면서도 근사한 종교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 "하나님, 이 정도면 됐죠?"하고 너스레를 떱니다.

 하나님, 우리의 그러한 교만을 더욱더 잘게 부수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떠한 선한 것도 내놓을 수 없는 존재이고 내 안에서 나오는 선과 착함은 바로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인정하며 더 낮아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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