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0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6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령이 온 교회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요한일서에 두려워하는 것은 죄라고 나와 있지만 그것은 구원에 대한 두려움, '내가 이러고도 진짜 구원을 받을 수 있나?'하는 행위에 의한 구원관을 지닌 이들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자체는 믿음이 없는 것이므로 형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경외하라"는 것은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항상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방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성령이 교회에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외에 다른 것은 다 내려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나온 것은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외에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그것은 맘모나스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를 믿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믿음이 더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맞습니까? 현재 우리 모습을 보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과거 시제는 미래에 완성될 결과를 끌어다가 우리에게 결과로 환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딱 쪼개 버리면 우리 안에는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이 상태에서 "나는 구원받았어요."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죽으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약속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의인이 되는 것이지, 지금 현재의 실체는 죄인,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그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세상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파들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의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청년들이 구원파 목사들이 하는 말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만났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던 때라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이야기하는 것에 헬라어 성경까지 가져가서 설명을 다 해줬습니다. 헬라어를 모르길래 한글 개역으로 설명해 주었는데도 무조건 자기주장이 맞다고 우겼습니다. 우기는 데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덮고 "당신은 안 죽느냐?"라고 물었더니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은 없느냐고 하니 가끔 실수는 하지만 죄는 안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실수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죄가 아니라 실수랍니다. 정말 어이없는 모습이라 더는 상관 안 하기로 했는데,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LA에 제대로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서머나교회밖에 없다고 하며 구원파 몇십 명이 대거 몰려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맨 앞에 앉아서 헌금도 가장 많이 내며 다니다가, 어느 날 제가 강단에서 구원파를 난도질했더니 메일도 보내고 전화하고 협박하더니 확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서 자신들은 죄를 안 짓는다고 주장합니다. '구원파'라는 자체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인간들이 갖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개념입니다. 예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그 사실을 믿을 때 그것이 나를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흔들립니다.

마틴 루터도 죽기 얼마 전까지 흔들렸는데 "나는 구원의 확신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들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직 개념 정리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죄라는 것은 행위로 저지른 것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각으로 움튼 것도 동일하게 죄로 취급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결국 우리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을 죄라고 하는데, 그 율법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아기 낳으면 부정하니까 제사 지내라, 월경하면 또 부정하니까 제사 지내라"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지킬 만한 것입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것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설명하시고자 세목화하여 주신 것입니다.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을 먹는 것이 죄입니까? 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식으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같은 도덕법에 반한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그것만 안 하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행위는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죄는 "나는 이제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내 능력을 발휘하여 이제는 죄도 안 짓는 자가 되었어. 잘 참았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파는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자와 완전한 방종주의자로, 그들끼리도 서로 싸웁니다. 그리고 이 두 극단이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끌어당깁니다.


 대학교 다닐 때 알프스의 수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만년설이 있는 알프스는 굉장히 추운데 수도원은 난방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명옷을 입은 수사들이, 종을 치면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17세 아이부터 시작해서 90세 된 노인까지 너무 고단하니까 힘겨운 걸음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너무 불쌍하다 그렇게 힘든데 뭐 하러 올라왔을까? 그냥 내려가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억지로 가서 졸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는 라틴어로 된 그들만의 정경을 읽고 온종일 무언가를 합니다. 스스로 때리기도 하는데 음욕이 일어났으면 자신에게 벌주는 것입니다.


 마귀를 보고 싶으면 그곳에 가면 됩니다. 굉장히 선한 천사 같지만 그것은 마귀의 속성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수녀가 되려던 사람이 있고 가톨릭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당도 다니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십자가와 예수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그 말씀으로 구원받고 은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끝까지 쫓아가면서 그 교리를 놓지 않고 그것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100% 가짜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헨리 나우웬을 신뢰하지 못 합니다. 그는 하버드와 예일대의 교수 자리도 버리고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장애인들을 돌보며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행위를 하나님의 일에 보태려 하는 가톨릭의 교리가 그의 삶에 큰 힘을 발휘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선한 행위를 선하게만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들을 돌봤다면 가톨릭에서 나왔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끝까지 교리를 붙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은혜를 모릅니다. 제가 왜 계속해서 서머나교회의 2기 사역을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1기 때는 구약성경의 내용으로 로마 가톨릭과 마찬가지인데, 일단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연약함과 죄악성을 폭로해야 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5년 동안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불교나 이슬람교 교인들과 무엇이 다르냐?"라는 것을 다소 과격하게 밀어붙여서 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3년 정도 하고 그다음 2기 사역 때는 은혜로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리 외치면서 이야기해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가짜다"라면서 계속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천국 가려면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짜 그러한 것들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가 바리새인들의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의를 행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1기 때 그것을 강력하게 가르치고 여러분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을 때에 "그러니까 은혜로 가자"를 덮어씌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렇게 잘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나는 못 해요."라는 항복을 받아내고 싶어서 몇 년 동안 계속 외치고 있는데 듣는 사람들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는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후반기부터 '이제 은혜로 돌아서야겠다' 생각하던 중 마침 집 이사도 겹쳐서 터닝포인트로 삼고 은혜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잘 지키고 살지도 못했으면서 목사님이 은혜에 대한 설교를 하시니까 자신들이 자꾸 게을러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의 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의 힘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결단을 뛰어넘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렇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외쳤지만 사람들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안 만드실 수도 있었고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왜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놓아두셨는가? 죽은 흙인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자리로 회귀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죽은 흙이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그분의 자녀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지를 성도와 교회에게 설명해 주시고 역사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배우라고 죄와 선악과라는 소품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배워야 합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죽은 흙이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그런데 죽은 흙이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알미니안주의이고 로마 가톨릭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기지 비유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던져 놓으면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고 '나는 성격에 대해 굉장히 무식하구나'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완벽하게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은혜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은혜를 배우면서 행위로 버텨왔기 때문에 그 내용을 10%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졸업한 사람이 40명에 목사가 20명이나 되는 자리에서도 많은 사람이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고 전 세계에서 5명 정도 되는 사람이 요약해서 "목사님 말씀하신 것이 이게 맞습니까?"하면서 그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소수지만 그들은 깜짝 놀랄 만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어떻게 행위와 은혜를 조화를 이룰 것인가?'같은 내용을 고민한 것입니다.


 설교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자리로 밀어내신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이나 유다의 배신이 다 똑같은데,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핏덩이의 자리, 자궁의 자리, 무력함의 자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이는 엄마가 먹는 영양소를 받지 않고서는 자기 힘으로 절대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엄마로부터 연결된 생명선이 끊어지면 그 아이는 그 속에서 죽습니다. 그것이 죽은 흙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죽은 흙의 자리가 확 드러나면 죽은 흙을 지키고 있던 진짜 아버지, 진짜 어머니의 존재가 드러나게 됩니다. 자궁 속의 핏덩이 같은 내 모습이 폭로가 되고 드러나면 아버지가  진짜 누구인지, 그 아버지가 붙들고 있는 자녀가 누구인지를 딱 분류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도 자꾸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너를 붙들고 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너도 알고 세상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떤 행위를 그 은혜에 보탤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에서는 행위가 열매로 맺히지만, 행위를 은혜에 보태서 죄 사함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마귀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 바리새인을 보고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행위를 이야기하는 알미니안주의는 마귀인 것입니다. 제가 과격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양심대로 살면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갑니다. '왜 내 안에 있는 양심과 나는 싸울 수밖에 없는가?' '왜 나는 여전히 죽은 흙이고 어미 자궁 속의 무력한 존재이고 선을 행하려 하는데 전혀 선이 나오지 않지?'라는 자리로 가서 내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개혁주의가 이 개념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옳다고만 합니다.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땅한 대답을 못 하고 그냥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죠"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그렇게 성경에 쓰게 하셨는지도 추적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를 두고 어떻게 번영의 신학이 복음일 수 있느냐고 해왔는데 진짜 무서운 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다 알아듣습니다. 제가 얼마 전 주례를 섰는데 그 자리에 목사님들이 여러 명 왔습니다. 전부 기복주의를 가르치며 설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주례를 하고 그들이 기도를 하는데 말을 조심하는데도 은연중에 그 특징이 나옵니다. "축복을 주시고... 가정의 행복을 허락하시고...."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저에게 상당히 조심한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어떤 설교를 하는지 아니까 기복주의니 신비주의니 이런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진짜 대적은 개혁주의입니다. 그들은 기복주의나 신비주의는 아니라면서 개혁주의라고 하는데, 그 개혁주의 안에 감춰진 기복과 행위주의나 알미니안주의를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에서 원래의 폼으로 돌아온 그 개혁주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는 것은 '이 시대에 진짜 교회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이 진짜 있는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진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 어중이떠중이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 오는 것을 그냥 출석해주면 하나님이 해코지하진 않으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기도하며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와서 딴생각하고 졸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부모들은 자기 자식 돌보느라고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 합니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침 일찍 와서 말씀은 듣지고 않고 일한다면서 계속 왔다 갔다만 하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합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단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쉽게 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썼다 지웠다 하면서 준비한 설교인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자식 본다고 나가고 전화받는다고 나가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하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저는 "이거 모르면 당신들은 죽어요. 꼭 알아야 돼요!"라고 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남의 일로 여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뒤로 숨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없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 앞에 서면 내 안에서 나오는 예수의 행위를 칭찬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치고 목마르고 배고플 때 네가 나를 도와줬잖아."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것을 하면 칭찬받겠지'라고 행위로 한 모든 것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선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예수입니다. "내 행위 말고 예수 믿었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행위를 왕창 적어 갔는데 예수님이 "네가 믿었던 것 다 내려놓고 나만 믿었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패역함과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목사가 강단에서 던지는 메시지를 전부 받아서 자기가 궁금했던 것을 푸는 열쇠로 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밥이나 먹고 잡담이나 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알고 있으니까 정말 한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심이 없고 자기의 죄에 대해 고민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내가 하나님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여버리신 것입니다.


 예수가 왜 이러한 행위를 공격하여 사망으로 결론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배의 자리, 교회 앞에서 헌금이라는 행위를 했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많은 액수를 내어놓은 것인데 그것은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헌금, 십일조. 그런데 하나님이 그 행위를 두들겨패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얼마 되지 않은 액수를 숨겨 놓고 다 내놓은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못 해서 안달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이나 부모 생각하는 것을 보면 뭐라도 더 해주고 싶지 않습니까?


 가끔 한국에 갔을 때 어머니는 저에게 뭐라도 더 주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에 오실 때도 바리바리 한 보따리를 싸 들고 오십니다. 너무 많아서 다 썩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마음에서 은혜를 아는 이들도 그런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부모 중에 자신을 잘 보이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려면 내가 처음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자꾸 폭로당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내가 악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자기 행위나 의로 꽉 틀어막아서 "나는 잘하고 있어"하니까 은혜가 아니라 내가 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하게 만드셔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은혜의 복음을 더 많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예배드리러 오기 전에는 반드시 말씀에 집중할 준비를 하고 오십시오. 저는 사람들이 졸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나서 허공을 보면서 설교합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다.

누군가 똘망똘망 보면서 들으면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군데군데 조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서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도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많이 읽어야 목사의 설교가 한방에 확 들어옵니다. 어떤 이들은 한 번 듣고도 '여태까지 50년 동안 몰랐던 것을 어떻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까?'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스위스로 이민 간 지 50년 되어서 우리말도 어눌한 사람도 알아듣는데 왜 우리말도 잘하는 사람들이 왜 못 알아듣는 것입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붙여서 설명해 줬는데도 이해하지 못 합니다. 모르면 여러 번 읽어서 질문도 해야 하는데 뭘 아는 게 없으니 질문도 못 하고 그냥 조용합니다. 말씀을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이야기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합니까? 사랑하고 의지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이 계신 곳을 소망합니까?

이 시대의 기독교는 다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싶습니다.

그들을 우리에게 보여부옵소서. 실제로 이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서 엘리야의 칠천이 남아 있다는 그 사실로 우리가 위로받고 격려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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