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2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8

11.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전 재산을 팔아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다 교회에 헌금을 한 이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누가의 친구인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굉장히 큰 벼슬이 있고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두 책은 한 책입니다.


 누가가 예수를 잘 믿는 데오빌로에게 겁을 주려고 편지를 보냈을까요? 편지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데오빌로는 우리 모든 교회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셔서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11절에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 그 일을 들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따른다고 합니다. 왜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두려움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책'에는 벌치적 죄책과 책치적 죄책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다른 것으로 표현했지만 제 생각에는 박형용 박사 같은 사람이 한문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오히려 더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고 사망으로 결론 맺는 죄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면 그 두려움은 형벌을 받아야 할 두려움입니다. 그런 벌치적 죄책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책치적 죄책은 다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죄에 대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도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 것도 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죄를 왜곡해서 전합니다. 그들을 절대로 쫓아가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자들이 LA에 많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럽고 피폐한 곳입니다. 한국에도 이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버지니아 집회에 가서 보니 버지니아 주립대가 있어서 유명할 뿐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도시의 반이 학교 부속 건물이고 그곳의 70~80%의 인구가 학교에 관련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아닌데도 다른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데 듣는 자들 중 80%가 다 박사나 교수들이었습니다. 그럼 그들이 굉장히 교만할 것 아닙니까? 장로님들과 재직들이 앉아 있는데 전부 제 대학 선배였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부흥사들이 와서 헛소리를 하고 가니까 기대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두 시간씩 과격하게 설교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끌려왔습니다. 최근 들어 그렇게 잘 알아듣는 이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버지니아 주립대 학생들이 몇 명 앉아 있어서 더 열심히 부르짖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못 알아들어도 청년들은 알아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파고들어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잘못 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경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예를 몇 가지 들면서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큐티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성경의 한 부분을 떼어서 나에게 적용시켜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그에 반격할 수 있는 성경신학을 알려준 것입니다. 어떤 부분을 봐도 그 부분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성경의 구약 신약의 다른 부분과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보는 것은 토정비결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결론을 얻어내더라고 그것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에서 쭉 설명을 하고 나니 나중에 "아 목사님들이나 성경을 그렇게 볼 수 있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그렇게 봅니까?"라고 합니다.

그럼 목사만 천국 가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각자가 보는 것이지 목사한테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는 그렇게 봐야 하고 자신들은 대충 해도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미국에 유학 올 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느냐? 영어 공부도 하고 미국 문화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아보고 대학 시험도 공부하고 그렇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온 것 아니냐? 그런데 하늘나라의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하늘나라의 말은 성경 단 하나밖에 없는데, 고작 미국에 오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준비는 하지 않느냐?"


 목사에게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한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목사는 성도가 성경을 잘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면서 길게 설명을 하는 것은 그렇게 보라는 의미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강해 설교하지 않은 부분은 평생 읽지 않으실 것입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 외에는 다른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집중하여 공부한다고 해도 십분의 일도 알지 못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다른 것을 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냥 알아도 되고 못 알아도 되는 정도로만 넘어갑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제가 "너희는 솔직히 천국에 가고 싶지 않지? 아니 천국이라는 것을 알기나 해? 아는데 그렇게 아무 준비 없이 넋 놓고 살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한 번은 대학생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데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쌓아놓은 것을 터뜨려 놓는데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언제 용서해 주었다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그들이 참 예뻤습니다.


 그런데 고민을 하면서도 정작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해 앍고 싶은 마음만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버지니아 주립대 교수들과 칠레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다른 것은 박식한 그들도 성경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중 지질학 교수라는 한 명이 자기들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칠레에서 일어난 것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일곱 군데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큰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해가 일어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LA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칠레보다 큰 지진이 LA에 닥치면 사망자가 100만 명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지질학계에서는 계속해서 그런 연구 결과가 보고되는데 민심이 혼란스러워진다고 정부에서 막고 있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진짜 마지막 때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지진이나 쓰나미가 하나님의 나팔로 계속 불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궁금하도 없고 진짜 그 나라가 우리에게 닥쳤을 때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거기서 말기 암 환자인 후배를 만났습니다. 대장암에 걸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암세포 연구를 하다가 암이 직장과 항문까지 퍼져서 다 들어내고 인조 항문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제 40세도 안 되었는데 몸이 그렇게 되니까 삶에 아무 소망 없이 살았는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많은 집회에 참석해서 듣다가 어는 날 마지막 집회 전에 저를 찾아오더니 제 손을 잡고 "목사님, 저 죽을 준비 안 되었는데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엉엉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위로가 아니라 후배인 그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저 천국에서 너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내 손을 붙들고 살려 달라고 하면 어떡하느냐? 내 손 놓고 하나님의 손잡을 준비를 해야지, 지금 나에게 구걸해서 몇 년 더 살아도 그때 또 똑같은 고통 속에서 살려 달라고 할 것이다. 왜 나한테 매달리듯이 하나님한테 매달려서 하나님 손 붙들고 언제든지 자신 있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못 해? 내가 뭐라고 나한테 살려 달라고 하느냐? 나는 너한테 그런 능력도 없고 혹 할 수 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어. 천국이 좋은 곳이라면서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해? 하나님이 널 언제 죽이실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내 손 놓고 하나님 손잡아. 여기저기 약 찾아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평안을 찾아."


 그것은 그 후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태신앙에 주일학교 교사부터 시작해서 청년부 간사까지 했던 사람인데 죽음이 코앞에 닥치니까 살려 달라고 매달립니다. 제가 어떻게 살립니까? 하나님이 살리셔야 합니다. 그분이 영으로, 부활로 살려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은 심각함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우울하고 외로워합니다. 온 세상 걱정 근심을 다 짊어진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보면 슬퍼할 것 같습니다. 그곳은 다 준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갈 인간들은 하나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차재선 전도사님이라고 손양원 목사님과 감방 동기인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자가 할아버지가 쓴 1920년대에설교집을 주었는데, 정말 제 설교와 다른 게 거의 없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바라본 분이었는데 안타깝게도 33세에 죽었습니다. 그러한 분들이 오래 살아서 계속 후학들을 가르쳤다면 한국교회가 좀 달라졌을 것입니다.

설교집을 다 읽고 난 후 그 손자에게 읽어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책에 한자도 많고 자신은 한글도 잘 읽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거 봐, 너희 할아버지와 너는 질적으로 달라. 어디 가서 너희 할아버지 자랑하지 마. 할아버지와 너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것은 전부 교회 건축하는 데 얼마나 헌금했는지 와 같은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 교인이 교수나 학생뿐이니 많아 봐야 120명 정도 되는데, 그 집회에 서머나 인터넷교회 교인들이 멀리서 백몇 명이 왔습니다. 그 마을 역사상 가장 붐볐던 때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들끼리 모여 이야기하고 식사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뿌듯했습니다.

한편 앞서 말했듯이 차재선 전도사님 손자가 사업 잘 되게 해 달라며 정말 많은 금액을 한 번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래서 벌써 지금의 두 배 정도 되는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어떻게 유지해 갈지가 걱정이 됩니다. 돈이 들어오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집부터 짓는 것입니다. 마을 전체에 한인 가구 수가 100개가 안 되니까 그들도 지어놓고 어떻게 유지할지 벌써부터 막막한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선교단체의 건물을 거의 독채처럼 공짜로 쓰고 있는데 그 단체가 아예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거기를 못 채우니까 그냥 가만히 쓰면 되는데 왜 굳이 새 건물을 지어서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헌금이 적은데 어떻게 그 큰 건물을 유지합니까?


 기독교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알고 배워도 그것이 삶으로 우러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만이라도,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때는 곧 옵니다. 그에 대한 기대에 찬 두려움,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로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넋 놓고 다른 것을 신경 쓰면서 언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합니까?


 TV에서 하는 피겨 스케이팅 경기 봐야 한다고 교회 예배를 안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서로 자기 네가 이겨야 한다고 비방하며 싸웁니다. 그게 마귀이지 뭡니까? 그들끼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를 추앙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응원하는 그 선수가 우리를 천국 보내 줍니까?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응원하는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기쁘지 않았습니까? 스포츠를 굉장히 즐기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경쟁 관계에 있는 인간의 죄 된 속성이며 본성입니다. 그냥 이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생산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러한 경기를 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즐길 것은 즐기되 그것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때로 표적과 기사로 오시는 것입니다. 말씀 본문을 보면 초대 교회 사람들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자 다들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 모이는데 모임에 상종하지 않는 이들이 멀리서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회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만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상종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가는 일부러 그것을 그려놓았습니다. 역사가인 누가가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하여 정확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 기록은, 기적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두렵게 하여 그분께 더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전도의 도구로 쓰겠다는 생각은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일어나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절대 구원 못 받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진 게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 시대처럼 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기적을 일으켰던 선지자는 엘리야, 엘리사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처음 사람들로, 그들이 선지자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 그들의 삶 속에 기적을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선지자들은 전부 두들겨 맞아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같은 사람은 왕족이고 귀족이었는데 전부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가 많으니까 표적과 기사들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인생 말미 때부터 기적이 안 나타납니다. 바울이 디모데의 병도 못 고칩니다.


 지금은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 가끔씩 성령의 임재가 눈에 보이듯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00~200년마다 한 번씩, 그리고 기적은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꼭 필요한 때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집사님은 손이 마른 채로 수십 년을 지내다가 설교를 듣는 가운데 손이 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 한 일이 주방에 가서 일 도와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기적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과 그분에 대한 지식에 더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지금도 제 설교 CD를 한 개당 열댓 번씩 듣습니다. 자신의 손이 그렇게 고침 받았는데 "난 이렇게 나았어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 손이 나은 기적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행복하죠?"라고 합니다. 그때 주위 사람들에게 그 기적이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손 마른 것이 나았는데 그것보다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기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진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홍해가 갈라졌는데 그곳을 며칠 동안 걸어서 건넌 사람이 건너자마자 "하나님이 어디 있어?"하지 않았습니까?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더욱 크게 하여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지, 기적으로 감격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 보다 기적이 더 좋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신비주의가 잘못 짚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종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TV에 나오는 지진 장면을 보면 고가도로가 무너져 차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고층 빌딩이 와르르 무너져서 납작한 찹쌀떡이 됩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겁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으니까 몇 명 죽은 것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과 종말과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라도 하나님이 두려워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에 진지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더욱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로 이끌어가고 계신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너무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들이 모인 곳을 진동시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신 것처럼,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이 땅을 흔들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경각시켜 주시고 깨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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