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3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49

17. 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 이러라

 


17절 앞에 "그때에"라는 단어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를 능멸하고 자기 자랑을 위해 엉뚱한 종교 행위를 하다가 죽고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인해 두려워했는데, 그 반대편에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부정하려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17절부터 설명해 줍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들이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옥으로 번역된 '데스모테리온'이라는 단어는 '공동감옥'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감옥이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에 극악한 범죄자들을 아주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하는 곳이 공동감옥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치소와 교도소로 나뉘는데 구치소에서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만 기결수가 되어 교도소로 가면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게 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감옥 중에서도 지독한 곳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인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혔는데 천사들이 끌어내 이 모습만 보고 사람들은 '아, 하나님은 우리가 감옥에 갇혀도 꺼내주시는 분이구나'하고 막연한 기대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계속 가둬 놓으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거의 반평생을 보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복음 전파라는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옥에 처한 상황을 해결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또다시 잡혀올 텐데 성전에 보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사도들에게 성전으로 가라고 합니다. 거기에 그들을 가둔 산헤드린 공회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시기가 가득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라고 합니다. 시기는 분노와 질투를 뜻합니다. 왜 세상은 분노하는 걸까요? 그것이 불신의 세상, 마귀입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세상은 그것을 전하는 자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다른 게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오신 예수를 믿자.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다 도말하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그분을 믿자." 그 말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는 티끌이고 죽은 흙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정하면 됩니다.


 누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폭로당한, 자타가 공인하는 간음한 여인이나 세리 또는 창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법으로도 죄인임이 증명되었지만 자신도 죄인임을 압니다. 그래서 돌로 치려는 자들 앞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8년 된 병자 같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못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38년을 누워 있었으니 온몸이 욕창으로 썩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 희망도 기대도 없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자의 병이 낫는다는 세상적 기대를 한껏 품고 있는 자들이 그의 주변에 가득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수로 제일 먼저 내려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늘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만 예수를 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 때에 우리에게 첫 번째 일어나는 현상이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여야 합니다. "나는 죄인인데 어떻게 하면 좋죠? 도대체 어떻게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네요."라는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은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무력하고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자신의 힘과 행위와 지혜 같은 것을 동원하여 착하게 살려고 합니다.


 세상에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선한 일이지만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이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선은 절대적인 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했는데 그 일로 어떤 사람이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일은 선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착한 일했으니까 괜찮아'같은 생각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까지 다 보십니다.


 개척 당시에 굉장히 어려움을 당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차도 주고 생활비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그 아이가 직장을 갖지 않고 무슨 일만 있으면 저에게 왔습니다. 그에게 준 도움이 오히려 그가 살아가는 힘을 막은 것입니다. 목사가 돕자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도와주니까 자신을 그렇게 도움을 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맺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예수님이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나오는데, 선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행위와 사고를 말합

니다. 그래서 다말이 시아버지와 통간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게 선입니다. 가나안에 가서 아이들까지 죽여 버리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선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긴 자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의 땅 빼앗고 어린아이들까지 도륙하는 것은 전부 사형시켜야 합니다. 왜 남 잘 살고 있는 땅에 가서 땅을 빼앗고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립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합니다. 그럼 그런 하나님은 조폭 두목입니까?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는 판단으로 우리가 판단 받고, 우리가 하는 그 판단이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선악은 하나님만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시험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자 인간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강함과 괜찮음을 입증하고 자랑하기 위해 항상 착한 일 뒤로 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도 착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와서 "너희의 착함은 진짜 착함이 아니야. 너희의 종교 행위도 마찬가지야. 예수를 믿으라니까. 그분만 의지해야 해"라고 했더니 분이 나서 예수를 전하는 이들을 공동감옥에 가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의 논리를 추구하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개혁주의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냥 "착하게 잘 살자"라며 "예수 믿었으면 그때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거룩에 이르는 사람이 되자"라고 하는데, 정말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내가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라"고 하셨듯이, 거룩에는 점수가 있다고 합니다. 커트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점수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9,999개를 잘 지키다가 1개를 안 지키면 9,999개도 안 지킨 것이 되는 게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까지 괜찮게 살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착하게 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한 회사의 입사 시험 합격 점수가 100점이라고 하면, 2점 맞은 사람과 99점 맞은 사람이 다릅니까? 둘 다 떨어지는 것은 똑같습니다. 떨어지면 다 탈락입니다. 그런데 커트라인이 하나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만 붙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나를 부인할 때에 내 삶에서 예수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을 진짜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지 못하고 도덕과 양심 뒤에 숨어서 '나는 할 수 있어. 왜 내가 예수만 믿어야 돼? 착한 일하니까 보람도 되더라'고

합니다.

저는 대학 때 아침마다 아는 선교사님들 한 사람씩 다 기도하고 제 용돈도 다 나눠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님이 사진을 보냈는데, 스키장에서 멋진 스키복을 입고 노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진짜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어가면서 과외비 받은 것을 대부분 헌금했는데, 그 사진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렇게 착한 일을 하다 보면 내가 굉장히 훌륭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선교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일을 하면서 여러분 스스로 점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십 억씩 기부한다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런 사람은 전 국민의 영웅이 되었기에 이제는 멈출 수 없습니다. 계속 명분을 쫓아 좀 더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칭찬에 한 번 맛 들이면 끝이 없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그 칭찬을 위해 사는데 그것은 다 악마적 속성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다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내가 중심이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떨어지는데도 그들을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꽁꽁 가두어 감추면 자신의 착함이 유지되는 줄 알고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꾸 죄인이라고 하니까 그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는, "너희들 꽝이다. 너희 행위 같은 것은 하나님이 헤아리지 않으신다."라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소리를 지르고 왜 사람을 폄하하느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그냥 죽은 흙입니다. 그 죽은 흙에 하나님이 들어오셨을 때 비로소 신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분수도 모르고 자신의 업적을 쌓아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표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다 불탄 세상입니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암담한 것입니다.


교회가 힘의 원리를 쫓아 세력을 키우려 하고 멋진 예배당을 지어서 자랑하려 합니다. 목사의 비전이 크면 성도들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목사가 무슨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까? 방송국에서 자꾸 저에게 비전이 무엇인지를 인터뷰하자고 하기에, "다른 질문하면 답하겠지만 비전 같은 것은 없으니까 오지도 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전 없다. 나도 비전 없고."


 천국이란 비전이 이미 우리에게 있는데, 교회가 또 무슨 비전을 갖습니까?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주변에 어려운 이들 돕는 것도 비전으로 봐야 합니까?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계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전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교지에 가서 그냥 공장 같은 것을 지어 놓고 그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습니다. 공장을 지어서 빵 주고 국수 주니까 더 큰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맛있게 먹여 놓으면 감사하는 게 아니라 더 줄 것 없느냐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쫄쫄 굶더라도 맨몸으로 생명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 중 '그래, 이 세상은 마귀에게 속하여 이렇게 먹을 것도 없고 가난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대하자.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그것이 진짜

선교입니다.

가서 배 터지게 먹이고 전할 것 하나 없이 그냥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거예요. 보세요, 교회가 이렇게 예수 잘 믿으니까 국수 공장, 빵 공장도 지어주잖아요. 예수 잘 믿으세요. 그럼 여러분도 이런 힘을 얻게 돼요"하는 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엉뚱하게 예수를 전해서 그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거기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죽으라고 일해서 헌금한 돈으로 선교지로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매한 인간들이 착한 일을 하면 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면 그것이 선인 줄 압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복음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가난한 자를 돕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복음과 은혜와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업적을 쌓고자 하는 데서 시작하면 그것 자체가 우리를 죽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 헌금이나 봉사 같은 것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모른다면 죽을 때까지 하지 마십시오. 헌금하거나 봉사하거나 구제한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수첩에 다 적힙니다. "너희의 행실로 너희가 심판을 받는다."라고 했는데, 그 행실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는 그렇게 살자고 합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데 은혜를 설명해 주지 않고 무조건 무언가를 하자고만

합니다.

"교회를 개혁하자, 사회를 개혁하자!" 교회를 어떻게 개혁해야 합니까? 교회가 내규에 따라 잘 운영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그것이

개혁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얼마나 악하며 그중에 있는 진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교회답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난장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된 교회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드러납니다. 진짜 온전한 개혁이 된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만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분의 백성과 가라지를 함께 심어놓은 이유는 그 가라지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배우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문제가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없어지는 것을 교회라고 착각하니까 그냥 댐처럼 막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안 되면 폭발합니다.


 버지니아 한 교회에서 장로가 다른 장로를 권총으로 쏴 죽였다고 합니다. 둘 다 존경받는 사람이었는데 공동의회를 하다가 갑자기 발표를 하는 장로를 다른 장로가 총으로 머리를 쏴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벼르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차라리 찢고 싸우다가 '아휴 내가 이러고도 장로냐?' 하고 자기 부인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냥 뭐라고 해도 다 참는 것처럼 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다가 총으로 쏘거나 마음으로 '저 사람 어디 가서 교통사고나 안 나나'하는데, 그 마음은 살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지,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있으며 오직 예수의 은혜만 붙들고 있는지만 계속 돌아보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가슴 벅차게 가득하게 됩니다. 그럼 그때 뭐든 하면 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예수의 심장으로 돕고 자연재해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돕고 진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전하고 싶으면 선교 가십시오. 선교 다녀와서 '그래도 올해는 단기선교 다녀왔으니까 하나님이 몇 가지 죄는 넘어가 주시겠지'할 거면 가지 마십시오. 그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진짜 선한 일을 하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밭에 나가 일하고 돌아와 주인의 밥상을 차려주고 그 주인이 다 먹으면 정리까지 해도 나는 무익한 종이고 아무 보상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데 그분 앞에서 감히 뭘 잘했다고 자랑합니까?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여러분의 일상 속에 흔히 지나갔던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들, 배웠던 의학 지식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우주의 운해, 호흡과 재채기 같은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어떤 원리로 그것이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전능자가, 어떤 지혜자가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꼭꼭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분이 이끄시는 자리까지 한 걸음씩 오라고 목표 지점에서 박수로 맞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마치 종 부리듯이 대합니다. "이거 줘, 저거 줘" 안 주면 떼쓰고 자해하고 철야합니다. 죽어도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입니다.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내 뜻을 이뤄내세요." 그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마귀요 아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묻지도 않고 내 뜻은 이러하니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선악 판단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들어주면 원망합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으로, 선악 판단을 자기가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기독교가 옳습니까? 예수 믿는 것, 천국 가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으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고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게 우리를 덮은 것인지 더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저는 설교할 것만 없으면 온종일 읽고 싶을 정도로 성경이 재미있습니다. 반면 비유 해석하면서 읽는 비유의 대가이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은 대부분 쓰레기입니다. 거기서 단 한 줄도 인용하지 못 했습니다. 어렵게만 쓰여 있지 그들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니라 진짜 구구절절한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성경을 온종일 보고 싶습니다. 저를 더 희생해서 다른 것까지 열심히 더 봐서 "여러분 그건 아닙니다."라고 가르쳐드릴 테니까 여러분은 그런 것을 토대로 하여 재미나게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사랑하면 또 연락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처럼 그분을 진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성경을 더 열심히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멍하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목사인 저에게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버지니아 교회에서도 성경을 열심히 읽고 모르면 목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자기한테 질문하라고 했다고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부 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이 질문하면 머리만 커져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 좀 하세요. 목사가 성경을 모르고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성경 잘 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르면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답해 주지 못하면 "이런 것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라며 면박을 좀 주십시오. 그러려면 여러분이 공부해야 합니다. 꼭 남들보다 훈련 더 받고 성경 좀 읽으면 자기들이 마치 성경 박사인 것처럼 구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똥 덩어리만 갖고 온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인데 가르쳐 주세요" 그것이 안 되면 "내가 가르치는 은사를 준 목사를 너에게 보냈으니 가서 물어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럼 물어보십시오. 멍하니 '목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 맞겠지'하며 듣는데, 그러다가 제가 지옥에 가면 여러분도 같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사람 믿지 말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그런 분별은 여러분 스스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족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복음이 우리를 해체시키고 공격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폭로하며 들어오니 어찌 우리가 그 복음을 기쁘게 받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그 복음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여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과 긍휼을 풍성히 받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조금씩 맛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결국 우리가 도달할 그 하나님 나라만을 꼭 붙들고 소망하는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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