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25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50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5;29~32)


 이 이야기는, 세상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셔서 하늘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어도 해가 될 것은 없지만 앞의 문맥과 연결해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세상의 문제는 하나님을 잊고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사람의 대표인 '나'에게 순종하고 나을 위하고 나만의 가치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하나님과 예수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웅들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독일은 히틀러에게,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에게, 러시아는 스탈린에게, 프랑스는 나폴레옹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구세주처럼 여깁니다. 요즘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위로를 알지 못하니까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투영시키는데, 그것이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를 투영시켜서 내가 높아지는 인간의 죄성을 잘 자극해 주면 인간들은 광분합니다.


 저에게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제가 알고 있는 인간의 죄성을 전부 쏟아부어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임스 카메룬 감독을 넘어 대단한 인기를 얻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진짜 예수를 잘 아는 이들이 마음먹고 세상을 조롱하려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예수를 알면 그러한 것들이 쓰레기처럼 여겨져서 안 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은 그 정체가 너무 얕습니다.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살짝 긁어만 주면 교회는 크게 부흥합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리나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게 어설픈 탈을 쓰고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양의 탈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탈이라는 단어는 가면이 아니라 분신을 뜻합니다. 지금 기독교에 들어와 있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나 성공주의 같은 것은 양의 탈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적나라하게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짜 양의 탈은, 지금 그러한 것을 거부하고 부인하면서 잘난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개혁주의를 부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무언가 기여를 할 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든 타종교이든 무신론자이든 그들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함입니다. 수십억 수백억씩 기부하는 사람들도 그 행복이 없으면 그런 것 안 합니다. 만약 그 기부가 신앙에서 나왔다면 매일 저녁 술 마시면 안 되는데, 기부를 하면서도 매일 밤 여자들 바꿔가며 놀고 술 마십니다. 그것은 양쪽의 행복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착한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슈바이처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도 50년 이상 아프리카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행복은 대단한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 보면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2~3주씩 참으면서 그곳에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 가면 소똥으로 만든 집에서 자야 되는데 그 집안 전체에 벌레가 가득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리 모기장을 치고 자도 온몸에 수만 군데에 벌레 물린 자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먹을 것도 없고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런 곳에 중 고등부 아이들까지 데리고 갔는데 다 견딥니다.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닌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놓고 뿌듯함을 느끼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싫어하는데 우리는 죄의 본질을 잘 이해하기 전에 세상을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교수님과도 갈렸는데 그 교수님은 사람들에게 깨끗함, 도덕, 윤리를 강조하면서 사석에서는 음담패설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사람들을 두들겨 패서 청렴결백만을 결과물로 내야 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저는 독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노력들을 했기에 허벅지에 흉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제 자신이 미워서 피가 철철 나는데도 볼펜 같은 것으로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머릿속에 욕망이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개혁을 할 수 있다, 깨끗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비수가 됩니다. 절대 좋은 영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교수님에게 "다른 이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르쳐주기 전에 '성도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라는 것을 먼저 알려주려 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 자기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아예 소진되거나 가면을 쓰게 된다. 그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풍성함을 가르쳐야지, 번지르르한 외적인 형식을 가르치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을 존경하는 팬들이 나타나고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을 놓을 수 없어 내려오지를 못 합니다. 자신이 더럽다고 폭로되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저를 지금 당장 지옥에 보낸다고 해도 저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흙입니다."라는 생각을 죽는 날까지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셔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추악함 같은 것들을 스스로 많이 들켜야 하고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던지실 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자체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밖에서 나에게 선물하여 그분이 주도권을 잡고 끌고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결과가 맞이하든지 그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신앙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도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데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내 안에 신념으로 갖기 위해서 또 다른 종교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하나님, 어떻게 저는 하나님 없으면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로 계속 무력하게 폭로가 될까요? 저 좀 제발 붙들어 주세요."라며 가슴 아프고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옥을 믿음 속에서 인식하고, 하나님이 나를 놓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라는 자각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속에 경외감이 없겠습니까? 그런 경외감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못 배웠습니다. 온통 나 중심이라서 하나님이 내 소원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을 때 그분을 향해 서슴없이 삿대질합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 아니면 죽은 흙에 불과합니다."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히 하나님께 삿대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는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당신 말만 들어야 해요"하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장 모독하는 것은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아니고 기독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가장 모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우리만 그분께 삿대질하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다르게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라고 하는 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공식도 없이 마구 헷갈리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조금 타락하고 게으르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시는 것과 같은 공식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떨 때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이 가만 놓아두시고, 어떨 때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계속 나락으로 밀어내십니다. 공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 삶이 끌려갈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네 행위와 상관없이 어떻게 끌고 가든지 너는 그분이 붓는 그 생명력으로만 살 자신 있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 하나님 나라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와 상관없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이가 그러한 자유로운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랑을 실제로 가시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예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 그렇게 사는 거야"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하나님의 침묵과 공식 없음과 구제성과 은밀성 속에서 키워갑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내 삶에 개입하셔서 어떤 것으로도 보상을 해주지 않는데도 나는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있지?' 하는 것이 그분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셨고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라는 복음을 전하자 죄의 삶을 산 바리새인들이 "너희는 세상인 우리에게 순종해야 해. 복음 전하지 마. 하나님께 순종하지 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제자가 말씀 29절에 나온 것처럼 "내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수가 너희의 죄와 무력함을 지적하십니다. 그분이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능력을 붙들고 있는 유대주의, 율법주의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는 인간이 내놓은 '나'라는 존재의 배설물이자 열매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기각한다는 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힘으로 절대 안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들이 그분을 나무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30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리시고'라는 말은 부활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에게이로'라는 단어는 '일으키다'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세웠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

즉, 말씀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야. 그런데 너희를 무시한다고 너희가 죽였잖아"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이 오시면 또다시 교회는 예수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절에 가시면 안 죽습니다. 교회는 지금 손에 손을 잡고 한 방향, 이 세상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가난은 저주다' '성공한 자가 승리자이며 부자가 성공한 자다'라고 외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성공과 부를 얻어내는 방법과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거 아니라니까, 나는 세상에 그런 떡 주러 온 것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놓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끊임없이 세상과 자신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너희에 대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렸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만이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 우리에게 그분이 사랑의 대상으로 서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자식보다, 재산보다, 명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설교가 길어지는데 자꾸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주변의 선배님들이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있는 데 가서 외쳐보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저도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에 큰 교회에서 청빙이 왔을 때 '그렇게 해볼까? 내가 작은 교회에 있다고 무시하고 공격하는데 한 번 큰 교회에 가서 해볼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모여도 복음을 알아듣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접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저 여기서 예배할 뿐인데 하나님이 알아서 전 세계에 있는 그분의 백성에게 전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누군가 창문에서 CD를 던져서 그것을 치우려 하다가 무슨 내용인가 하고 들어봤더니 우리 교회 설교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한 번 듣고 깜짝 놀라서 인터넷으로 찾아 쭉 들었고 요한계시록을 들었답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자기가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해서 이제는 우리 교회 CD를 받아서 나눠주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다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복음에 목마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저에게 힘내라고 이메일을 전했습니다.


 과연 그 모든 일이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진짜 은혜의 복음을 알아듣고 그 예수 앞에 납작 엎드려 "나는 죽은 흙이고 티끌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부어주세요. 하나님이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시면 안 먹을게요. 저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면 그냥 이렇게 살게요"하는 데까지 내려간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여전히 '나'입니다. 심방을 가면 낙심이 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은혜라고 하고 모든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내 상황이 안 되어 봐서 그렇지 내 상황이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결국 이제는 아무도 못 믿겠습니다. 제 앞에 앉아서 알아듣는 척해도 '또 속으로 내 욕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필요한 것만 대충 알아듣고 나머지 필요 없는 것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 계시고 우리는 곧 그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 손 내밀어 주실 때 덥석 그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 지식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를 못 이끄는 것입니까?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가운데 박혀 있으니까 성경 지식이 전부 나를 유익하게 하고 내 힘을 강하게 하는 데 쓰이지, 나를 무력화시키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성도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임종 직전에 있는 장로님을 보러 갔는데 가슴을 치고 왔습니다. 60년간 예수를 믿고 전 재산을 구제하고 예배당을 짓는 데 헌신했는데도 죽기 전에 나는 아직 죽을 준비 안 되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려 한다며 나 좀 살려 달라고 마지막 남은 힘을 제 손을 잡는데 다 쓰는 것입니다.


 60년 신앙생활은 도대체 다 어디 간 것입니까? 성도는 죽음 앞에서 훌훌 다 털고 "나 이 세상에서 다 털었더니 네가 털어 갈 것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테니 사망아 문이나 열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털리는 것입니다. 내 옛사람과 내 인격과 나 자신이 된 소유를 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간단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엉뚱하게 개혁을 하자고, 깨끗이 살자고 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다수가 원하는, 선해 보이는 운영 법칙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더러운 똥 덩어리 같은 모습을 폭로당하면서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의견이 무시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견뎌내고 약한 데서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가 뭔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폭로시키시면 폭로당하고 고통을 주시면 그 고통을 다 겪어야 합니다. 견디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살아 있으십시오. 그것을 다 겪고 정금같이 단련이 될 것입니다. 그냥 겪으시면 하나님이 이기에 해주십니다.


 사랑의 교회가 주변에 그렇게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이 많은데 2,100억 원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고 비난한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서 그 기자한테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너는 왜 자가용 타고 다니느냐? 그런 기사 쓰려면 네 집부터 팔아. 그럼 이 세상에 건물 갖고 있는 교회는 다 팔아야 되느냐? 그냥 놔둬. 거기에 올바른 복음이 전해질 수 있게 힘을 써. 진짜 올바른 복음이 전해질 수만 있다면 2조 원이 들어도 지어야지"라고 했습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큰 예배당을 지어 놓고 성공주의 번영의 신학으로 헛소리하는 거야. 그 사람이 안 지어도 또 누가 지어. 왜 그것을 막으려고 해? 너희가 그것을 막는다고 막힐 것 같아? 그게 아니라 더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진짜 복음이 거기서 전해질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다른 노력을 해보자." 그런데 전부 일단 막고 보자는 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남은 신경 쓰지 않고 수천 억씩 들여 예배당을 짓는 모습 속에서도 그분의 백성을 살려내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들은 깨끗한 사람인 것처럼 비난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시면 그 속에서 내가 부인되고 그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그분에 의해 완성되어갑니다. 그렇게 무력하게 끌려가면 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것이 선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때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 주신 것 가운데 열심히 해보십시오. 하다가 안 되면 또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고 잘되었을 때에는 '하나님 은혜가 이렇게 강력하게 임하니까 이 쓰레기 같은 인간 속에서도 예수의 삶이 나오는구나. 감사하다'라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나에게 점수를 주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자랐구나'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싹 빠지면 자란 게 없습니다. 자랐다면 그 상태에 머물러야 되는데 왜 다시 주저앉습니까?


 성도는 자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붙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꽉 붙들고 내가 비워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점수를 조금이라도 주게 되면 은혜를 붙들지 않고 나를 신뢰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들어 있는 예수와 은혜를 더 분명하게 배우십시오. 엉뚱한 종교 행위들로 자기를 치장하여 잘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혹시 새벽기도 나오면서 자기에게 점수를 주는 것이라면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콤한 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궁금하고 그분 앞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면 목숨 걸고 나오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 우리 삶 속에서 더욱더 폭로되고 경험할 수 있게 하시고, 또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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