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 5;31)
사람들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 눈과 귀가 열린 제자들이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 안 한다. 세상의 부와 가치, 명예나 인기 같은 것 심지어 육신의 죽음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하나님께만 순종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자아숭배교에 빠져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음성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신다. 너희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메시아의 힘과 능력과 은혜와 사랑만을 의지하고 회개해야 해!"라고 외치는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너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자꾸 율법이나 도덕이나 윤리를 어기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정의부터 제대로 알고 있어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 나온 단어 정의 같은 것으로 보니까 성경을 이솝우화 수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들이 죄를 짓는 바람에 하나님이 노하셔서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이 나가서도 여전히 죄를 지으니까 노아의 홍수로 싹 쓸어버리셨다." 이렇게 옛날이야기 수준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다릅니다. 하나님께 죄라는 것이 도덕이나 윤리 또는 사회법을 어기거나 불건전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절대 의존적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 '우리도 우리 힘으로 살 수 있고 스스로 개발하고 개혁해서 이 세상에 지상낙원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메시아가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람에게 순종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인과 대제사장 앞에서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순종할 거야. 너희는 회개시키려 오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지 않았느냐? 너희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분을 세우신 이유가 본문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인간은 인류와 이 세상의 문제를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 공산주의의 경우는 계급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면서 혁명을 일으켜 계급을 없애고 일할 수 있을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면 지상낙원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공산주의가 70년 동안 1억 명을 죽였습니다. 지상낙원이 아니라 생지옥을 만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북한에 가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와서 북한의 인권 윤리를 해결해 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의 폭력성이나 추악함 앞에서 '아,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의 죄악을 보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같은 경우도 교육이 안 되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므로 잘 가르치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식해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지 잘 가르쳐 놓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이 세상에 지상낙원이 올 거라면서 교육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양차 세계 대전으로 르네상스는 왕창 무너졌습니다. 잘 가르쳐놓았더니 사람 죽여서 이빨로 단추 만들고 머리카락으로 무언가를 짜기나 하니, 가르쳐도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또 창세기 6장 13절에서도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를 일으키기 전에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바벨탑도 쌓고 에녹성도 쌓고 문명과 문화예술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려 합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나 문명은 좋은 것입니다. 성령이 수면 중에 운행하고 계시므로 계속해서 창조하시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입니다. 의술이나 과학 문명 등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빵을 주실 때 빵 나무를 주신 게 아니라 밀을 허락하시고, 거기에 빵이 나올 때까지 인간의 손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빵 나무 같은 것을 종류별로 당연히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밀을 심고 거두고 탈곡하고 밀가루 빻고 빵을 굽는 과정에 인간들을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쓰니까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고 발달해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죄와 악을 빼면 그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질병도 눈물도 고통도 없어지게 해서 그들 스스로 지상낙원을 이룰 것이라는데 거기에 죄가 개입되면 절대 안 됩니다. 공산주의도 그 이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음 자체가 더럽고 부패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고치기 전에는 계속해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또 계급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끊임없이 투쟁과 분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죄가 싹 빠진 상태에서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가져다 쓰고 싶은 만큼 쓴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겠습니까? 천국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들의 죄와 악이 개입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같은 집단도 그렇고 북한에서도 자기네 집 앞 호박은 굉장히 큰데 농장에 있는 호박은 훨씬 작다고 합니다. 100% 내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같은 것이 어떻게 인간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31장, 에스겔 27장에 나온 새 언약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와서 그 마음을 치워 버리시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는 말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에서 '천'은 복수, 하늘들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 삼층천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늘을 모형으로 이 땅이 창조된 것입니다.
하늘은 원래 있는 거 아닌가? 하는데 하나님은 형체가 없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늘, 그분의 나라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지닌 인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나라가 필요하고 그것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를 만드시고 그것을 모형으로 이 땅을 지으셔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악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악이 왜 하늘나라에 있으면 안 되는지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거기에 소품으로 개입이 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까이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그분과 연합되어 그분의 나라에 함께 살 존재는 그릇이 완전히 비워져 순종의 상태가 되어 하나님의 것을 완전히 받아내기 전에는 그분과 연합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자존심이나 야망과 비전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너희는 내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가까이하지 못하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도 인격도 없는 로봇들과 함께 살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된, 생각과 인격과 지성이 있는 존재가 '죽은 흙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그분과 함께 살게 되었지?' '어떻게 내가 이런 존재가 되었지?'를 모르면 자신에 대한 자만감에 반드시 빠지게 됩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구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인격과 이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분이 어떤 속내를 감수하면서 만들어낸 것인 줄 아니?"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빠져나간 상태가 죄와 악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왜 안 되는지를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아,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을 풍성히 받아서 존재하게 된 것이구나'라고 깨닫고 나에 대해 절대 자만감을 갖거나 내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께 관철시키려는 식으로 그 나라에서 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 진짜 선악과 먹지 마"라고 하시면 "당연히 안 먹지요. 세상에서 그것을 배우고 왔는데요"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착하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착한 일을 남보다 몇 번 더 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 받을 줄 아십니까? 천국에서 다 그렇게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이 고작 그런 것 하라고 인생을 허락하셨겠습니까? 마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도 피조물로, 피조물은 창조주가 불면 그냥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그것과 대결하는 것처럼 하게 하시고 우리 인생에서 마귀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마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그 자리가 마귀란 말입니다.
마귀라 하면 험악한 존재를 떠올리며 선한 하나님과 막 대결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귀 자체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고와 행위와 모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존하는 어떤 존재을 세우고 그 안에 마귀의 세력을 다 편입시킴으로써 그분이 그것을 어떻게 밟고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었는지가 바로 성경에 나온 내용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일에 엄청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신 거야"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누가 대신 대속을 해야 하고 바로 예수님이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아기 수준에 있는 사람의 설명입니다. 조금 더 알았으면 조금 더 깊은 이해와 지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야겠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는 그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라고 하는데 먼저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 것 챙겨놓고 나머지로 생색내는 것 말고 진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다 팔아 보십시오.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착한 일을 생색내면서 하려 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 안에 예수가 차기 시작하면 당연히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저도 책을 찍어서 신학생들에게 나눠준다니까 어떤 목사님들이 저를 찾아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자기들도 어려운 내용인데 그들이 그것을 읽겠느냐고 하면서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을 천오백 권 찍는데 만 달러가 드는데 그중 반을 나눠주면 저는 늘 오천 달러씩 늘 밑지고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바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는데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교인들이 가끔 "왜 목사님은 이해도 못 하는데 자꾸 신학생 수준으로 설교를 하십니까?"라고 하는데 제가 신학생 수준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수준이 떨어진 것입니다. 재미나고 바쁜 일들이 너무 많아져서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원고와 같은 종류는 설교보다 더 자세하게 씁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 잘 읽고 잘 가르치기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도 말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바에 경각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쳐가면서 "너희가 정신없이 따르고 있는 신학이 영원히 옳은 게 아니니까 정신 차리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연구하라"고 진짜 하나님의 백성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 깨어나 신앙생활에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해졌으면 합니다. 제 생각에 이대로 가다가는 천국이 텅텅 빌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고 안 가고는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저는 더 많은 사람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는 이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누가 하나님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까?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죄사함입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연합하고자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과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화목이 연합으로, 이 역사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그분 자체를 모르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나 문제만 논하며 그분을 해결사로만 동원하는 자들이 무슨 하나님과 화목을 하겠습니까? 참 답답한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기독교의 유일한 목적지라면, 주위에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가족부터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분과 화목합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부터 기도하십시오. "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방법과 도구로만 동원하고 있을까?" 왜 그것을 기도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까? 부모들은 자녀가 성령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선교 몇 번 다녀오면 다 구원받은 줄 압니다. 천만의 말씀. 진짜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알고 있습니까? 정신 놓고 하루하루 사느라고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소리를 안 지릅니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한 발만 더 가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는 평생 예수 믿었어요"라며 넋 놓고 그냥 가고 있으니 소리 질러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 킬리만자로에 갔을 때 친구들이 떨어지면 죽는데도 고산병에 걸리니까 멍하니 계속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막아! 힘들어 죽겠는데"라며 게속 가려 합니다. 그러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냥 놓아두면 다 죽을 것 같으니까 그분이 몸을 던져 십자가로 막으셨습니다. 그것을 알아들으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병 고쳐주고 소원이나 들어주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 굿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는다고 우기니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더 많이 성경에 집중해야 합니다. 모르면 물어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다 알지도 못 합니다. 구역장 성경공부를 진행해 보면 그날 한 설교도 이해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설교 짧게 해 달라, 쉽게 해 달라고 하는데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또 자꾸 저에게 적용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적용이라는 것은 설교학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움직인다는데 무슨 적용이 필요합니까?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말씀이 들어가서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용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적용이 왜 필요합니까?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고 존 칼빈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뭔데 말씀이 해야 할 일까지 넘보려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서 '그 은혜가 오늘도 나에게 들어와 말씀이 나를 끌어가겠구나'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나가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 목사님이 어떤 적용을 말씀하셨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사랑해야지' 하지만 집에 가자마자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적용을 하겠다고 합니까?
그렇다고 꾹 참는데 그것은 벼르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벼르는 것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러므로 실제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말씀 속에서 은혜에 푹 잠기십시오. 그러면 상대방이 하는 모든 행위가 가치 없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에 대한 모독이나 모욕 행위가 '내가 원래 죽은 흙인데 그 정도는 뭐 칭찬이지'라고 들리게 되면 '용서해야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 그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가르쳐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는 나누려고 마음먹고 예화 몇 개만 더 들면 네 편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 받아 간 사람은 수지맞은 셈입니다.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더 잘 가르쳤으면 하는 마음에 그들에게 설교를 줬더니 공부를 안 하고 그대로 그것을 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 후 제 설교의 다른 부분을 더 달라고 하기에 "목사님, 교인들에게 우리 교회 웹사이트 자신 있게 알려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면 그 목사님은 쫓겨날 것입니다. 거저먹은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똑같이 베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도 그렇게 엉망이라서 교인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 시대에 총체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려 하는 이들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고 싶고 상대방을 어떻게 감동시킬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그분이 썼다는 연애편지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달라고 떼쓰고 있으니, 하나님을 누가 사랑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모독당하고 있는 곳을 교회라 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사랑한다는 말조차 안 하는데, 우리는 사랑한다고 거짓말이나 살살하면서 원하는 것만 빼 먹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이나 명예 또는 인기 같은 것을 다 빼먹은 다음에 필요 없을 때 버리는 것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불가능을 이미 아시고 창세전에 아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회개와 죄사함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신 그 일에 우리는 그저 들어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은혜와 사랑을 아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모독해도 되는 것입니까? 안타깝지만 이 세대는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고 착한 일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세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수녀 내에 하나님의 부흥을 이 땅에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철장을 들고 달려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있는 마귀적 속성을 깨부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