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

사도행전 30강 (사도행전 강해 책 1권 마지막 강해)

은바리라이프 2016. 1. 12. 13:56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 5;30~31)



 이번에는 30절에 있는 "하나님이 살리시고"에 주목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왔듯이 오순절 설교 때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사도행전 17장이나 다른 부분에서도 그를 비롯해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고 부활은 왜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성경의 유일한 독자인 교회가 꼭 알아야 할 것을 전하시며 설교의 내용에는 그런 부분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경에 설교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때마다 부활의 이야기가 꼭 들어갑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까? 그럼 나사로도 부활한 것입니까? 나사로는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소생이라 합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먼저 난 자"로 표현합니다. "먼저 난 자" 이제 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로 태어나는 것을 부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우리가 부활했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까?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역사와 공간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입니까? 어차피 왜곡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역사와 공간은 다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속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세상이 따로 마련되는 게 아니라 이 역사와 공간이 다른 차원의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천국이라 합니다.

우주 저 편에 마련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역사와 공간이 3차원의 세계에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며 있는데, 하나님 나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의 개념이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있는 이들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에는 이 세상의 시간대와는 다른 시간대인 영원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시간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제한된 우리의 언어를 빌려 쓴다면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대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이 된 상태입니다. 거기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수천 년 전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사실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영향을 받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아담과 하와의 그 행위가 전가된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이 통합된 영원이라는 상태에 뛰어올라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곳에서 같이 먹은 것입니다. 즉, 원죄를 인정하는 성도는 영원을 사는 존재입니다. 원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영원 속으로 뛰어올라 에덴동산으로 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원으로 뛰어올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소망합니까? 미래에 있을 부활을 영원 속으로 뛰어올라 가서 동참하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전부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사는 생명, 영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행복하고 기쁘고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고난의 연속이 영생이야? 그럼 나 안 살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영생에서 타락과 왜곡과 썩어짐이 빠져나가면 그곳을 천국이라 합니다.


 여러분이 현대 개혁주의가 만드어놓은 신학의 틀에서 한 단계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무 화가 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구원에 대한 언약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 전에 이미 준비하셨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역사 속에서 하나씩 건져내시고 있는 과정이 구속사다." 하나님이 마귀라는 존재의 타락을 감지하지도 못한다는 것, 즉 소설책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우리가 타락한 천사가 여기는 루시퍼라는 존재를 타락할 줄도 모르고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이 타락하는 바람에 인간까지 타락하고 이 역사가 엉클어졌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왜곡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지전능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은 영원을 사십니다.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평면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어느 날 천사장이 타락할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분명 의도가 있으셔서 타락 같은 것을 이미 계획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시기 때문에 그분이 무언가를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것을 작정 속에 넣어두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손해는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탄과 마귀의 세력이 어느 순간에 유황불 못으로 뚝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훅 불었더니 그렇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역사와 인생 공간을 한동안 그 존재에게 맡기신 것입니까? 그냥 바로 훅 불어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발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굳이 타락한 인간을 긴 역사를 통하여 건지시는 방법을 쓰시는 것입니까? 싹 쓸어버리고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존재로 새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무언가를 가르친 후에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 채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안 되겠구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냥 티끌이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지만 '아다마'라는 단어는 티끌입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먼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먼지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먼지로 모아서 사람을 만들었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그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전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죽은 흙이었습니다. 그 죽은 흙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존재로 살게 되었는지를, 그분이 선택하신 하늘 왕들이 이 땅에서 죽은 흙들이 토해내는 배설물과 토설물을 경험하면서 '죽은 흙은 이런 것밖에 못 토해놓는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주위 모든 관계 속에서 눈을 뜨고 '이것이 돼지우리구나. 이 세상의 힘과 가치가 다 돼지우리의 쥐엄열매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시간차를 두고 와서 그것을 다 배우고 '우리가 다시는 선악과 따 먹고 이런 돼지 같은 삶을 살지 말자'하는 때가 역사의 종결입니다. 그때 돼지우리의 더러움과 추악함이 싹 빠지고 진짜 아름다움과 기쁨과 행복함이 남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천국이 역사와 겹치기 때문에, 그렇게 오버랩되면서 더럽고 추악하고 오염된 것이 싹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문화나 문명을 다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꽃나무 몇 개을 사서 땅에 심는데, 제가 사는 동네는 돌땅에 마을을 지은 거라 땅 파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땅속에는 상상도 못 했던 수많은 생명체가 있고, 그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전혀 쓸모없는 일입니다. 지렁이도 있고 바구미들도 있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이 있을 텐데, 만약 먹이사슬 같은 것을 제하고 그것들이 우리가 보기에 무가치하고 전혀 쓸모없는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 필요가 있어서 그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심으려 한 꽃나무도 신기한 것이 뿌리가 다 살아있었습니다. 그 뿌리가 각 뿌리마다 생장점이 다 있어서 바위를 뚫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꽃봉오리를 보는데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만드신 것입니다. 진짜 의학을 깊이 연구한 의학자들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관심을 두고 이렇게 세밀하게 마드셨을까'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음악이나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는 무용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인간의 몸짓으로 만들어내는 예술 같은 것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에 가면 그런 아름다움이 다 있습니다. 자연계가 있는 곳에는 문화가 반드시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린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분의 백성,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개별적인 선택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하나의 무리를(에클레시아) 밖으로(에크)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는 하나의 집단성을 지녀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착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개별성을 추구하면서 착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개혁주의의 현 모습입니다. 교회는 '착하게 잘 살자'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자'가 아니라 도대체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지를 배워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지평까지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시간차를 두어 교회를 이 땅에 그대로 두시는 것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보는 자들이 진짜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구별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국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왜곡과 더러움과 죄와 상관없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누릴 것입니다.


 요즘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책을 읽는데, 그 안의 그림을 얼마나 세밀하게 사진으로 찍어놓았는지 직접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리나'하고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운데, 그것들도 인간의 욕심이나 자기자랑이나 인기를 위해 사용될 때 그 아름다움은 추악함이 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고, 예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다 우리의 욕심이나 자기자랑이나 자기 숭배에 쓰이면 남을 두들겨 패고 자신을 높이는 엉뚱한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라고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게 되면 나의 자랑과 인기와 쾌락과 만족이나 유익을 위해 쓰는 것을 지양하게 됩니다. 그때 그것이 진짜 내 것,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선하고 착한 것, 깨끗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천국에서 영원을 사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집니다. 우리가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과 성품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것이 우리에게 부어져 발휘될 때 하나님이 누리는 안식과 행복과 평안이 우리에게도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움과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세상에 치를 떨고 가야 합니다. 역사와 인생을 통해 '아 하나님이 아니면 나라는 존재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은 좀비들의 세상에 불과하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자체가 죽은 흙들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땅에 하나님이 일반 은총을 부으셔서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분의 백성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한 명만 있었어도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그 도시에 의인 다섯 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만을 보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들을 이 세상에서 확 빼는 날, 그곳은 불타 없어집니다. 그럼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에 대해 자꾸 실망하고 세상에 정이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이 세상 것을 얻어내고 성취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이 땅을 살 만한 세상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이슬람이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불교 같은 데서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가 자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꾸 세상 살맛이 안 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내 삶에 이것만 제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이것만 있으면 내가 참 괜찮은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깊이 눈을 팔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왜 이런 것을 나에게 허락하셨을까'에 울분을 토해내면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럼에도 부족하고 더러운 것이 다 사라진 진짜 완벽한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몸과 슬픔과 눈물이 없는 구원을 나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느끼는 감정으로는 그것이 불행할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기쁨 속에서 하늘의 기쁨과 행복인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번지르르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고 나의 소유를 털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있으면 잘 누리십시오. 그런 것이 기독교의 신앙의 목적지라면 법정 스님이나 성철 스님 같은 사람이 최고일 것입니다. 평생 청렴결백하게 살았고 쓴 책의 인세는 전부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천국에 갑니까? 예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는 착한 일은 모두 자기 가치, 자기 착함 챙기기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자기 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영광 챙기기로 얼마든지 하나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착하다" "선하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악함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런 일을 하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라며 특별한 임무를 맡긴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을 바라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에, 아닌 것 같아도 우리는 열심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실패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런 일을 내 중심으로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폭로시키십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청춘을 불사르며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야학으로 정신지체아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폭로시키시는데 "네가 정말 이 아이들을 사랑하니?"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8년 동안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함께 봉사하던 친구들 모두 그러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곳에 있는 것이 어디 나가서 놀러 다니는 것보다 쾌감이 더 컸습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데모도 하고 감옥도 가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스스로 굉장히 의로운 일을 하다 온 사람처럼 여기며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이 아니라 무언가를 열심히 해내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이 독사요 마귀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불의, 간음, 토색 안 했고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그것으로 구제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것으로, 그들은 스스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다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독사 새끼야"라고 하십니까?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저 세리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행위가 독사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해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종교 행위를 참 잘하고 있어'라고 행각한다면 바로 우리가 독사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며 점수를 주고 있다면 그것이 지옥으로 우리를 끌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진지해지되 너무 열심은 부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근거로 하는 열심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진짜 마약중독자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러운 중독자가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과 매주 두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설교했고 당연히 아이들은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건가?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이렇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상태에서 건강한 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주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언급했듯이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더럽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공부를 하면서 성적도 잘 받는 아이들이 있고, 반대로 계속 게임하고 공부는커녕 겨우 숙제나 하고 자기 방은 치우지 않고 화장실은 공용인지 가정용인지 헷갈릴 정도로 더럽게 쓰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후자 쪽이지만 제가 확 풀어놓기 전에는 저희 집은 오히려 전자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이가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합니다.


 그때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게임을 하는 것과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부하는 것 중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선할까? 인간의 선악의 기준, 세상의 판단 기중으로 보면 열심히 부모님 말씀 듣고 공부하는 아이가 착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정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세상으로부터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은 아이가 '그래,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어려서부터 예배도 잘 드리고 늘 기도로 살았더니 이렇게 되었어'하며 실제로 많은 복을 받습니다.


 반면 어떤 아이는 늘 게임만 하고 학교에서도 지지부진하게 살다가 '아, 이제 내가 이렇게 살면 진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삶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어.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진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들이 다 부럽지? 성경에서는 그런 것이 다 똥이라고 했는데 왜 그런 것들이 부러운 것일까?' 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나중에 예수의 십자가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을 꼭 붙들게 됩니다. 두 아이 중 하나님은 어떠한 삶을 선이라 평가하실까요?


 우리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착하고 선한 것입니까? 착하고 선함이라는 것은 인간이 도덕과 윤리로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것을 착하게 여기실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인마 김대두를 착한 자로 받아들이십니다. 평생 살인만 한 그이지만 인간 세상의 부질없고 덧없음을 배웠습니다. 그럼 그것이 선입니다. 그럼 그에게 맞아 죽은 인간은 무엇입니까? 그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다면 천국에 간 것이고 아니면 그냥 죽은 흙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러한 것이 다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공평하게 존귀한 존재라는 그것이 악입니다. 인본주의에 따르는 자들은 피해를 입은 자들을 챙기려고 합니다. 다 죽은 흙인데 말입니다. 죽은 흙을 똥 속에 집어넣든 불속에 넣어 태우든 그것이 왜 불공평합니까? 결국 사회 정화나 사회 개혁의 이념이 잘못된 점은 모든 인간이 존귀하고 평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이 다 존귀합니까?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그분의 백성, 교회만 존귀합니다. 그들만 부활한 것이고 나머지는 죽은 흙이 어떠한 처지로 떨어질 것인지 보여주는 지옥의 불쏘시개입니다. 그들은 그냥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택한 백성을 이성과 인격을 지닌 상태로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는 반역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시고, '너희가 원래 저렇게 죽은 흙이었어'를 가르치기 위해 지옥을 존재하게 하신 것이며 그것을 천국에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가족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바로 '내가 생명으로 여겼던 죽은 흙이었구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갖고 있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내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부활의 몸을 입고 지금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다 놓게 되는 것입니다. 돈, 명예, 가족을 다 놓게 되고 그것들이 지옥에서 다 불타고 있을 때 '그래, 저런 것들이 다 죽은 흙이었는데 내가 너무 집착하고 있었구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돈과 명예는 되는데 내 것인 내 부모와 자식은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내 것,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귀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때로는 이 세상에서 차갑고 냉철하며 검을 든 자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에 갔는데 진짜 생명처럼 여겼던 가족이 지옥에서 불타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이 무슨 천국입니까?


 그런데 내가 예수 믿었다고 우리 가족이 다 예수 믿지는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오라는 것입니까? 왜 "내가 너희 가족 관계에 검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잘라내라고, 객관적으로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죽도록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인 것입니다.

선풍기 아줌마 얼굴 속에 들어가서 살이 되어 버린 콩기름과 공업용 유지가 하나님의 메스로 잘려져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인생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폭로되어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행복의 근원입니다."라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소원을 이루는 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잘 배우십시오.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당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이 왜 나면서부터 악한 것인지 상황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을 폭로당하고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배웁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 계획 세우고 내 소원 이루고 내가 원하는 모든 환경을 갖추면 하나님을 조력자로 부리는, 말도 안 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정화나 개혁이라며 이 지옥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어서 좀비들을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잘 배우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십시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영향력을 미쳐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세상의 짠맛을 유지하겠습니까? 빛과 소금이며 언약의 주체이신 예수가 우리 삶 속에 드러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이며, 우리 안에서 개나 돼지의 습성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폭로당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나는 개나 돼지가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낫다."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나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라며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마귀의 세상에 있는 그들에게 밥 산 숟가락 퍼준다고 어찌 그것이 하나님께 선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추악함과 연약함을 알리려고 그 환경을 허락하셨는데,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으로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찌 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선, 참된 것을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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