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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4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下)

은바리라이프 2015. 12. 29. 12:2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4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下)



선악과 먹은 자의 원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됐다. 그들은 곧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부끄럽게 여겨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원래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이제 벌거벗음이 부끄럽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즉, ‘벌거벗은 상태는 악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것이 죄의 근본이자 원형인 원죄다. 선악,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원죄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한데, 그 모든 것을 감사로 받지 못하고 자기의 두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원죄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가 심판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비판, 판단, 심판’이 모두 ‘크리마’라는 말로 같은 단어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심판받는 일이 된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 하나로 알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상고하는 자가 성도다. 구원은 우리의 죄들을 모두 용서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아예 죄와 무관한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심판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원고를 쓰는 지금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내리면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데이트 할 생각에 설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출퇴근길 차 막힐 일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똑같은 눈이 내리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은 제각각이다. 각자의 선악체계를 따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모두 이러한 식으로 평생 하나님 노릇한다. 그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은 죄인이라는 증거다.

눈은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복음이다. 우리의 모든 죄, 더러움을 흰 눈처럼 덮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더러움이 깨끗해져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덮어주시는 것이다. 업적과 공로, 행위가 아니라 은혜다. 눈은 물이고 물은 말씀, 진리다. 그 말씀, 그 진리로 우리를 깨끗케 하고,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펄펄 내리고 있다. 눈물 나는 눈이다. 모든 것은 말씀이고, 말씀은 진리, 곧 구원의 은혜가 담겨 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습니다’라고 토설하는 것은 그가 원죄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인간들의 다양하고 무수한 죄들은 실상 원죄가 밖으로 드러난 죄의 증상들이다.



선악과와 바벨탑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음의 상태, 부끄러운 상태를 스스로 면해 보겠다고 무화과나무 이파리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들은 누구에게 대하여 부끄러워 했을까? 그들이 함께 한 것은 짐승들 외에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부끄러워 한 감정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선악과 사건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의 벌거벗은 상태를 부끄럽게, 즉 좋지 않게, u악하게 생각했고, 그리하여 치마로 부끄러움을 가리는 시도를 했다.

창세기의 이 일을 두고 누디스트들이 태초의 벌거벗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벌거벗음’은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주장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옷을 지어 입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증한 일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죄한 짐승의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신다. 희생제사는 그 은혜를 알라는 것이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탑이다. 그들은 벽돌로, 자기의 열심, 업적과 공로로 돌(에벤)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대신하자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자고 하고, 아끼지 말고 뭔가를 내놓자고 한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길이 없는 귀한 가치의 선물에 대해 어설프게 갚겠다고 나서는 것은 선물을 주신 이에 대한 모독이 된다. 구원과 영생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음에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섞는 것이 바벨(혼합)이고, 예수님이 경계하라고 하신 누룩이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치마 ‘하고르’는 치마가 아니라 ‘띠, 허리띠’를 가리키는 말이다. 띠는 진리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진리의 띠를 띠우고 끌고 가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한 채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는 진리의 띠를 스스로 만들어 차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열심히 달려가고자 한다. ‘이게 진리야.’ 하면서 무수한 엉터리 진리를 양산해 낸다.



다른 복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만이 진리인데 인간의 탐심이 개입된 ‘다른 복음’이 난무한다. 구원은 당연한 거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공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한다. 이것이 다른 복음이다.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트 타무트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그것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본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은 너희가, 저희가 아닌 참된 성도인 너희가 세상의 미움을 받고, 환난을 당한다고 하신다. 참된 성도는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 세상과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를 알게 된 성도는 세상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평안은 돈, 명예, 건강, 좋은 차, 멋진 집에 있지 않고, 오직 주 안에만 있다. 세상은, 세상의 것들은 참된 평안을 주지 못한다.

또한, 주께서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다. 주님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로마군을 무찌르고 세상을 정복했는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승리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그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승리라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불순종을 하나님이 몸소 자기를 죽여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너희의 두 마음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 행복처럼 보이겠지만 참 행복은 좋으신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가? 세상을 정복하고, 발 아래 둠으로써 이기는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존경을 받음으로써 이기는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승리다. 하늘의 것으로 세상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절도고 강도다.



새 영 새 마음

성경은 선악의 두 마음을 탐심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든 죄는 여기에서 발생하는데, 그 두 마음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즉 원죄다. 하나님이 외모가 아니라 중심, 곧 마음을 본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며,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야단치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위는 그럴 듯하지만 속마음은 ‘자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 의를,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을 중시했다.

이는 비단 바리새인만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모든 인간,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뚫고 들어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인본주의, 율법주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이 그러한 죄인들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 하나로 보는 것이 구원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우리의 두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새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직접 내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뜻을 새 마음의 심비에 새겨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 은혜 아는 것이 선악과를 주신 뜻이고, 인생을 사는 이유다. 그걸 아는 자의 삶이 잘 사는 인생이다.



선악과 율법

선악과나무는 동산 ‘가운데(타웨크)’ 심겨져 있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던 둘째날에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라고 하셨다. ‘가운데’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 사이, 즉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를 말한다. 하늘을 알라고 땅에 주신 하늘의 것들이 가운데, 타웨크에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전이고 예수였다. 그러나 땅의 인간은 피조물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 진리를 알라고 주신 하늘의 것들을 오해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씀은 율법으로 오해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선악과나무처럼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알라고 준 성전은 오해되어 율법의 성전이 됐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오신 말씀이자 두 번째 성전인 예수님은 배척하고 죽여 버렸다. 동산 가운데 있던 선악과나무 역시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담고 있었다. 선악과나무가 역사 속에서 율법으로, 성전으로, 예수로 계속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 타웨크에는 궁창이 있었고,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한다. 진짜 하늘을 알라고 눈에 보이는 하늘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 ‘호 우라노스’를 성전이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왔다는 말은 자신이 세 번째 하늘, 즉 세 번째 성전이 됐다는 말이다. 진리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성전, 말하는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하시는 것은 성전 된 자기를 죽이라는 것이고, “다시 세우겠다” 하시는 건 교회, 성도를 세 번째 성전으로 세우겠다는 말씀이다.

동산 가운데 선 선악과나무는 율법, 성전, 그리고 예수와 같은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나무로 달리는 것이다. 그 나무가 죽자 거기에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그것이 생명나무 실과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의 완성은 예수님이 그 나무에 달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무트 타무트(정녕 죽으리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완성된다.(무트는 말씀의 완성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참뜻은 ‘그걸 먹고 죽어서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생명나무를 감추신 뜻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시는 이유는 ‘사람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봐’라고 하셨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산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늘의 생명을 받아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 인간은 원천적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굳이 그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시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된 자는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어진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기 위해 그 나무에 접근하는 자는 멸망당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못하는 인간, 죄인들은 반드시 생명나무 실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따먹겠다고 나세게 되어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겠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룹들과 화염검이 저주와 심판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육 당할 자가 많으리니(사66:16)’

그룹과 화염검은 하나님의 굳은 의지의 표명이다. 죄인들에게 생명나무는 저주와 심판의 나무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어 그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으려고 하는 모든 죄인들의 저주를 그 나무에서 해결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저주의 나무에 달려 그 나무를 두루 돌던 화염에 타시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저주와 진노가 그분에게 쏟아졌고, 예수님은 그 저주의 칼에 맞아 아버지와 끊어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죽으셨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 이제 그 저주의 나무는 은혜의 나무로, 참된 생명으로 성도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이것이 ‘신령한 은사(카리스마 프뉴마티코스)’,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생명나무 실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그분이 깨닫게 해주시는 말(레마)이 성령이고, 생명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예수로, 또 다른 보혜사로 우리에게 오셔서 그분이 하신 그 일이 뭔지를 가르쳐 주시면, 그리하여 그걸 깨달은 자에게 그 레마가 생명, 곧 생명나무의 실과다.

선악과나무의 역할은 ‘먹고 죽어서 깨달음’으로 완료되며, 이는 곧 생명나무로 거듭나게 된다. 둘은 한 나무였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예수의 공로로 성도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힌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맺으시는 열매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고, 그의 공로로 우리도 그 열매를 먹고 생명을 얻은 자가 되고, 우리 안에도 그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그 열매의 총칭은 한마디로 사랑(아가페)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 사랑으로 깨달아진다면 그에게도 생명의 열매는 맺힌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