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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1 - 십계명2 이웃 사랑(上)

은바리라이프 2015. 12. 29. 12:18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1 -십계명


십계명2-이웃 사랑(上)

하나님 사랑과 같은 이웃 사랑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출애굽 할 수 있었다. 이는 성도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걸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시청각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유월절 후 50일, 곧 오순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십계명은 단순히 10개의 계명이 아니라 ‘계명의 십’, 즉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열에 담았다’는 의미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 사랑에 해당하는 앞의 5계명은 설명을 해주셨고,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뒤의 5계명은 설명 없이 계명만 주셨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웃 사랑에 대한 부분을 잘 이해하고 행하면 하나님 사랑 또한 이룬 것으로 여겨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둘째인 이웃 사랑이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와 같으니’라는 헬라어 ‘호모이오스’는 ‘똑같다’는 말이다.


넷으로 축약되는 5계명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산상에서 가르쳐 주실 때 뒷부분 5계명을 넷으로 축약해 주신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여기에 대한 이해는 창세기로 돌아가서 찾아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7일 동안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7번 말씀 하셨고, 그 말씀은 하나하나가 모두 구원의 복음이었다. 빛과 어두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 등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창조의 언약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7’을 뜻하는 세바는 ‘하나님의 언약, 맹세’라는 복음을 담은 말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구원의 복음이다. 즉, 모든 말씀, ‘열의 계명’은 구원의 복음인 ‘칠의 복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깨달은 자를 ‘칠십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 3일에 틀을 만드셨고, 나중의 3일은 그 틀에 내용을 담으셨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에 안식하셨다. 처음 3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나중 3일은 우리가 할 일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이루게 될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모두 이루어 가시고, 성도는 그 은혜를 깨닫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처음 3일과 나중 3일은 각각 ‘1일과 4일’, ‘2일과 5일’, ‘3일과 6일’의 셋으로 묶여지고, 마지막 안식의 ‘7일’이 합쳐져 넷이 되는 구조다. 예수님의 4계명은 이것들의 내용을 하나씩 설명하신 것이며, 마지막 7일의 안식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완성된다.

모세오경이 4복음서가 되고, 마지막 요한복음이 사랑의 복음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정이 격렬한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였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듯이 성도 또한 그렇게 사랑으로 완성이 된다는 걸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또, 성경에서 4라는 숫자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4대, 광야 40년, 예수님의 40일 금식, 호리라도 남김 없이(이 말을 원문으로 보면 ‘마지막 1/4, 마지막 네 번째 조각’이란 뜻이다.) 등... 이제 예수님의 4계명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4계명

1)살인하지 말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21)’

‘시내산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너희가 들었다.’ 하시면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셨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바로 형제에 대한 비판이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 오신 맏아들인 형제, 예수님을 향해 “바보같이 죽긴 왜 죽느냐!”며 야단쳤고, ‘라가’, 즉 ‘바보, 멍청이’라 비난했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앞에서 “내려와서 너를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다. 이것이 바로 형제를 죽이는 일, 살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희생제사를 가르쳐 주신 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과 그 은혜를 알라는 의미에서 주신 것이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따라서 희생제사는 결국 이스라엘, 교회가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배우라고 주신 교육의 재료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의미를 알 생각은 하지 않고 열심히 제사만 드리면서 그 제사를 잘 드린 자기를 자랑하고 칭찬하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이스라엘 속에 나를 집어넣고, 그들의 형식적인 제사 속에 나의 예배를 넣어서 돌아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고,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고는 없이 ‘이렇게 하면 복 주시겠지. 이렇게 하면 나는 죄 없는 자, 의인이 되어 천국 가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희생제사만, 예배만 드리고 있다면 이것이 어린 양을 죽이는 제사고, 예수를 또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일고,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져 내 유익 중심으로 모든 걸 선과 악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죄인들의 행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바로 ‘인자로 오신 그 예수를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나지 않는 모든 예배가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계속 살인하는 일이다. 형제를 위해 죽어주신 그 은혜의 예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바보라고 모독하고 인자를 죽이는 일, 살인인 것이다.


2)간음하지 말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27)’

간음의 전제조건은 사랑과 결혼이다. 간음이란 죄는 그 관계가 어긋날 때 성립된다. 예수님이 이 계명을 설명해 주실 때 이혼에 대한 말씀을 덧붙이신 것이 그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결혼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옆구리를 째고 신부인 하와를 만드셨다. 이 그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산모가 흘리는 것과 같은)피와 물을 쏟은 후에 그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킨 것을 은유하는 장면이다.

여자(교회)는 남자(예수)의 옆구리를 째고 탄생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었다’는 히브리어 ‘바나’는 ‘세우다, 건축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이는 단순히 하와를 만든 정도가 아니라 ‘여자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교회를 향해 ‘너희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다.’ 했고, 예수께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렇게 남자가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옆구리를 째고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면서 탄생시키고 결혼한 것이 여자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명령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고, 이것이 결혼의 참된 의미다. 천국에 없는 결혼제도를 이 세상에 주신 것은 바로 그 관계를 알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참뜻을 아는 여자, 즉 교회는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생명을 나누어 준 그 남자, 신랑에게 감사하면서 ‘신랑을 떠나면 나는 온전한 존재가 아니네. 신랑만 사랑해야 되겠구나.’를 깨닫고 감사와 순종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했다’는 걸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한다. ‘야다’는 주로 ‘알다’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다. 따라서 ‘야다’는 ‘신랑과 신부가 동침하여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처럼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는 의미다. 이는 예수님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고 말씀하신 ‘유니온 크라이스트(그리스도와의 연합)’를 담고 있는 말이며, 우리에게 주신 결혼제도에 담긴 복음의 참뜻인 것이다.

그런데 신랑만 사랑해야 할 신부가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왜 내가 신랑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제 나는 내 주체성을 챙기고 내 가치를 높이며 살겠다.’ 하면서 자기를 주장할 때 이 결혼의 관계가 깨지고 만다. 이것을 간음이라고 하고, 완전한 한 몸이 둘로 분리가 됐으므로 이혼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은 바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은혜의 복음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와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지자 호세아가 간음을 일삼다가 노예로 팔려간 신부 고멜을 은 열 다섯,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되찾아 온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고, 간음한 신부는 교회이며, 은 열 다섯 보리 한 호멜 반은 예수께서 팔리신 은 30냥의 가치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자기의 목숨값을 치르고 간음을 일삼던 교회를 구속하신 은혜의 구속사가 집약된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우리의 신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 그렇게 전 존재를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 영생이고 구원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이)같은 분이다. 육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다. 교회의 구원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 교회의 결혼으로 완성된다. 인간의 역사 또한 그때 끝날 것이다. 이 세상이 운행되는 이유가 바로 그 결혼의 의미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를 죽여서 자기 백성을 살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절절한 사랑을 알라.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참뜻을 바르게 알 때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간음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다.


3)거짓 증거 하지 말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3)’

‘헛 맹세하다’는 헬라어 ‘에피오르케오’는 ‘위증죄를 범하다, 거짓 맹세하다’는 뜻으로 십계명의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에 해당한다. 거짓은 참의 반대말이고, 거짓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함. 또는 그런 말’이다.

이런 의미로 성경을 보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이율배반적인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선지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갈 때 사울왕의 보복을 두려워하자 하나님이 한 계책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여호와께 제사 지내러 왔다고 하라.”는 말씀인데, 천만뜻밖에도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사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짓말쟁이거나, ‘거짓말, 거짓 증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말이라는 뜻이 된다. 공의의 하나님이 거짓말쟁이일 수 없으므로 후자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말쟁이는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참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참은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롬 9:1)’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말’은 ‘알레데이아’로 ‘진리’를 말한다. 즉 진리를 말하는 것이 참말이고, 진리를 말하지 못하면 그게 바로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진리는 무엇인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오셨고, 그 진리를 담고 오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까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참뜻인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오직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부어지신 이후에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교회가 탄생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를 레마로 깨달을 수 있다. 그 진리가 생명이며, 그 진리를 아는 자가 진리에 의해 자유케 된다. 그래서 ‘알레데이아(진리)’의 의미가 ‘가리워져 있지 않음’인 것이다. 그 진리의 세례를 받지 못한 자는 본다고 하지만 소경이고, 예수는 무스테리온(비밀)이고, 걸림돌일 뿐이다. 그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그저 로고스로만 볼 뿐이다. 창세 전에 약속된 교회에게만 진리의 성령이 부어지고, 그들만이 모든 것이 가려지지 않고 밝히 드러난 진리로 깨닫고 애굽에서, 이 땅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하늘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원문으로 보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부어진 성도가 하늘이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 된다.

따라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참말,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 이들은 진리가 가려진 상태이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가치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복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인생의 매뉴얼로 취급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복음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말하므로 거짓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인 그 진리를 도적질하는 것이다. 그들을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라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8계명인 ‘도둑질 하지 말라’와 제9계명인 ‘거짓 증거 하지 말라’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해 주셨다. 두 계명은 결국 같은 내용의 계명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