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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18- 아말렉 전쟁

은바리라이프 2015. 6. 5. 00:56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18- 아말렉 전쟁

대대로 싸울 아말렉 전쟁 1

 

 

 

남방의 아말렉

목이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신령한 생수를 마셨다. 사도 바울의 해설처럼 반석은 그리스도였고, 생수는 성령이었다(고전 10:4). 그런데 그 은혜로운 사건 직후에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 왔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으로부터 비롯된 민족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민수기에서 열 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살핀 후에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13:29)”라고 보고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이후 가장 먼저 아말렉과 부딪히게 된 것이 그들의 거처가 남방인 탓도 있을 것이다. ,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자기 땅을 지키려는 수비적인 공격일 수 있다. , 르비딤에서 큰 물이 흘러나온 일이 그들을 부추겼을 수 있다. 당시 물은 큰 이권이자 분쟁거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막대한 양의 은금 패물도 그들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직전에 애굽인에게서 원하는대로 은금패물과 의복을 취한 바 있고(12:36), ‘아말렉이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는 신명기 25장의 내용으로 보아 약탈을 위해 들이닥쳤다고 보는 것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어찌됐건 하나님이 강력한 애굽의 전차부대를 홍해에서 한꺼번에 수장시킨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니 아말렉 족속 쯤이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싸움은 홍해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아말렉 전쟁에 담긴 뜻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표면적인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성도는 성경을 겉으로 보이는 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항상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 구원의 복음을 발견해야 한다. 아말렉 전쟁에 담긴 구원의 복음을 찾아보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는 전쟁이 없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이며, 성도는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존재다.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무덤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무덤문을 열고 당신이 택한 백성을 꺼내겠다고 하신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구원이다. 현실 도피가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의 완전한 전환을 말한다. 그걸 슈브라고 하고, ‘돌이키다, 회개하다라고 한다. 출애굽은 그러한 성도의 실존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그림이다.

세상과 짝하여 타락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죄의 종의 상태다. 모든 인간이 이 자리에서 출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만 출애굽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 세상에서 마귀의 종으로 살 때는 갈등이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세상에서 빠져나오자 전쟁이 일어났다. 애굽의 병거들이 달려들고, 아말렉이 쳐들어왔다. 이러한 일들은 먼 옛날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전()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사건은 내가 겪는 일이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때 성경이 나를 구원하는 생명의 책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은 나를 심판하는 심판의 책이 될 것이다.

 

성도를 공격하는 옛사람

아말렉이 쳐들어온 시점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실 때, 즉 성령을 받은 때다. 아말렉은 바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주장하는 존재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일 때는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에 무감각하여 아무런 갈등이 없다가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게 되자 비로소 두 본성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어둠의 세상에서 우리가 어둠일 때는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내 안에 빛이 들어오고, 그 빛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책망하시자 바로 그때부터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싸운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라함’인데, 이 말은 ‘먹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양식’을 뜻하는 ‘레헴’과 같은 계열의 단어다. 라함은 성도의 인생에 나타나는 고난, 또는 전쟁의 실체가 말씀을 먹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라는 걸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영적 전쟁의 본질은 기독교인과 이교도, 하나님과 사탄 마귀의 싸움이 아니라-사탄이나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성도의 안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이 다투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검으로 나를 죽여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새창조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데, 성도가 “나는 못 죽어요,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 영적전쟁의 실상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이 그 때문이다. ‘사탄’은 ‘대적자’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인 것이다. 따라서 잠잠히 상고해보면, 참으로 내가 사탄이며 죄인 중의 괴수가 맞는 것이다.

 

내가 대대로 싸우리라

아말렉은 바로 ‘나는 못 죽어요’하면서 달려드는 나의 옛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도의 새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데, 육체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은 영의 평화를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영적 다툼이 일어나는데, 이 영적전쟁의 현실을 ‘성도의 고난(또는 환난)’이라고 한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겪는 힘든 일, 고생스러운 일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의 ‘들립시스(고난)’는 오직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겪는 일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성숙한 자, 거룩한 자가 되지 못하는 일이나, 문득문득 ‘이러고도 내가 구원받은 성도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내 옛사람, 아말렉이 끈질기게 도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리라’는 하나님의 다짐은 성도의 인생 내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사람을 하나님이 끝까지 죽여가시고, 그리하여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하시겠다는, 참으로 은혜롭고도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