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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대대로 싸울 아말렉 전쟁 2

은바리라이프 2015. 7. 9. 22:1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19 -아말렉

대대로 싸울 아말렉 전쟁 2




모세의 기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대동하고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양손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밀렸다. 이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의자를 만들어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아말렉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많은 주석서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위로 향해 올린 모세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성경을 구원의 복음에 입각하여 해석하려는 방법론은 바람직하지만 적확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모세의 팔이 점점 무거워져 내려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채택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모세의 모습은 오히려 우리 성도의 모습에 가깝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금세 지치며, 쉽고 빠르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격려해 주신 것이다.


기도의 참뜻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의 의미를 ‘하나님께 나의 문제점이나 내가 원하는 바를 밝혀 내가 원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요구, 또는 부탁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게 기도의 목적이 아닌가?’라며 의아해할 정도로 기독교는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서도 똑같이 하는 일이다. 이는 참된 기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르는 이름만 ‘하나님’일 뿐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이다.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이 먼저 하신 것처럼 기도 또한 하나님이 성도를 향해 먼저 행하신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다. 이때 성도는 기도를 통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된다. 이를 통해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임을 깨닫게 되고, 그걸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모두 ‘기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도를 향해 기도하시는 내용이 무엇이겠는가? ‘이 땅에서 너희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집값이 올랐으면 좋겠어, 승진했으면 좋겠어. 자녀가 좋은 대학 가면 좋겠어. 너희가 건강하게 무병장수하길 바래.’ 이런 걸 하나님이 기도하시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택정하신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남 나라에 대해 잘 배우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아이온)’을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싶어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성도에게 나타나는 기도의 내용이다.


예수의 승리

이 장면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이기긴 했지만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단번으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셨다. 역시 모세를 성도로 보면 더 적절한 해석이 이루어진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는 사실도 이러한 견해를 강화시켜준다. 모세의 팔이 무거워져 내려오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쌓고,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했다. 돌, 반석은 ‘에벤’으로 예수를 가리킨다. ‘에벤’이란 히브리어를 파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가 된다. 돌 위에 ‘앉다’는 말은 ‘야사브’로 ‘살다, 거주하다’는 뜻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세가 예수라는 반석 위에 터를 잡는 모습이다. 이스라엘, 성도의 승리의 원천은 바로 그것이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칼로 쳐서 격파했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점은 성경 기자가 승리의 주체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여호수아’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다. 즉, 우리의 전쟁은 예수님이 홀로 싸우고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의 칼로 아말렉, 우리의 옛사람을 쳐서 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이고, 이것이 영적 전쟁의 실체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내가 사탄이다(막8:33).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갬으로써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시켜 주시는 것이 승리다.

사울 왕의 때에 아말렉이 진멸된 듯 보였다.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아각왕도 반토막이 났다. 그러나 사무엘하 8장에 다윗이 아말렉에게서 빼앗은 은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윗의 때에도 아말렉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후로는 아말렉이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아말렉이 멸망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때에 그들이 성경에서 사라졌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다윗은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말렉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검에 의해서만 파해질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의 때에 자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평강의 왕’이며, 다윗과 솔로몬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죽는 것이 성도의 복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운 것처럼, 내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두 세력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다. 그래서 성도가 올바른 복음을 듣게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혼돈이다. 도대체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혼란스러워 하고, 내 안에 들어온 그 말씀을 불편해 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도 한다. 그게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러다가 점점 살아계신 말씀에 의해 나의 옛사람이 밀려나면서 나는 죽고 예수만 사는 영적 승리,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된다. 신약성경에는 ‘죽음’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다나토스와 네크로스가 있다. 다나토스는 옛사람의 죽음, 자기부인의 죽음을, 네크로스는 육신의 죽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신 것은 성도의 옛사람을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하겠다는 은혜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검으로 완전히, 정녕 죽을 때까지 우리와 싸워주시는 것이 은혜다. 그 은혜에 굴복해서 자기 부인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는 것이 성도의 복이다.

조정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