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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3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上)

은바리라이프 2015. 12. 29. 12:23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23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上)



들어가기 전에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내용은 이 시리즈의 앞부분에 소개해야 했지만,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어 미뤄두고 다른 내용을 먼저 진행했습니다. 이제 2회 동안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소개하고 2년여의 연재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악과’ 이야기는 특히 많은 이들이 인간 중심으로 보았고, 그래서 오해도 심했던 부분입니다.

“인간이 천국 같은 에덴동산에서 잘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

“에이, 아담, 나쁜 놈, 바보 멍청이!”

“항상 여자가 문제야. 꼭 먼저 사고를 친다니까.”

“내가 거기 있었으면 인간을 미혹한 뱀을 잡아서 확 뱀탕 끓여 먹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동화책 보듯 오해한 채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런 식의 이해에는 인간 쪽의 기대와 아쉬움만 가득할 뿐 정작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 복음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성경의 시작 부분부터 오해하면 잘못 꿴 단추처럼 끝까지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악과와 생명나무’에 대한 진지한 공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미흡한 내용이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의 확대, 또는 시각의 전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동산 가운데 심은 나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사람을 지어 살게 하셨다. ‘창설하다’는 히브리어 ‘나타’는 ‘심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에덴동산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심겨져’ 있었다. 그 뜻은 당연히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긴 나무가 동산 가운데 ‘심겨져’ 있었으니 곧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다. 이것들은 두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걸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명하셨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그 나무는 동산 가운데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하루에도 수십 번 지나다니며 보게 될 동산 가운데 떡 하니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시고 그걸 먹지 말라고 하신 건 심히 과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어떤 부모가 방 한가운데 모양도 이쁘고 맛도 좋은 과자를 놓아두고 아이에게 “너 이거 먹으면 죽여버린다.”고 했다면 그 부모는 정신병자거나 뭔가 아이를 시험할 요량일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정신병이 없으실 테니 여기에는 심오한 교훈과 시험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간교한 뱀이 여자를 흔들자 여자가 시험에 걸려들었다.


선악과를 먹기도 전에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23:33)’라고 야단치는 장면에서 보듯 뱀은 곧 사탄이고 마귀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사탄 마귀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존재’이고, 우리가 실족하고 범죄하는 건 모두 그놈들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탄 마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욥기에서 보듯 사탄은 하나님 앞에 드나들며 어떤 용도의 쓰임을 받는 존재고,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멸망할 피조물일 뿐이다.

천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던 천사가 자기의 지혜를 믿고 스스로 높아진 끝에 하나님 나라를 떠났더니 사탄 마귀가 됐다. 이처럼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해야하는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자기를 믿고, 자기 지혜를 의지한다면 그 역시 사탄이 되는 것이다. 성도는 ‘사탄 마귀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구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자기의 뜻과 유익을 챙기는 게 우선이라면 그게 사탄 마귀다.

여자는 뱀의 미혹을 받자 곧장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 선악과를 바라보았다. 사도 요한의 말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발동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여자가 아직 선악과를 먹기도 전에 이미 선악의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선악과 자체에 선악을 분별하는 효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원래 선악과를 먹은 존재로 지어졌고, 그 내용에 대한 분명한 확인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쁜 놈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나쁜 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문이 이어진다. ‘애초에 인간을 그렇게 나쁜 놈으로 만든 건 하나님이 아니신가?’ ‘사탄을 도구로 쓰신다고 했으니 여자를 미혹한 뱀도 하나님이 보내신 게 아닌가?’ 성경을 대하면 이런 식으로 궁금증과 의문이 꼬리를 물며 일어나야 한다. 그걸 묵상하고 상고하면서 파고들어야할 만큼 성경은, 복음의 강은 깊고 깊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은 동화책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모르면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게 되고, 어느 한 장면을 들어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답답해하게 된다. 그런 이들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하면서 푸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문제들, 장애물들, 고난들을 해결해 달라고 떼도 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철된 인생과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좋으신 아버지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좋은 것이다. 그 일들은 모두 합력하여 성도를 하나님 나라로 지어가는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즉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내내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강조하고, ‘저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선악과 사건’은 우발적인 일이 된다. ‘먹지 말아야 하는데 뱀의 미혹에 홀라당 넘어가 그걸 먹어버렸다.’는 식으로 이해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무능력한 영감탱이가 되어버린다.

‘어이쿠, 이 녀석들. 먹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기어코 그걸 먹어버렸네.’

깜짝 놀라서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하나님이라니. 정말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나님을 인간보다 조금 낫거나, 그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듯하다. 그런 자들이 겁도 없이 “이거 해 주세요, 이거 꼭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하면서 하나님을 해결사 취급하고, “이번 일만 잘 되면 헌금을 섭섭지 않게 할게요. 그러나 잘 안되면 확 미워하고 안 믿어버릴 거야.” 하면서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고 있는 것이다.


뱀에게 미혹된 여자

여자가 뱀에게 미혹되어 선악과를 먹었다. 여자는 선악과를 ‘먹음직도 하고(토브 : 선한, 좋은)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하마드 : 탐내다, 기뻐하다)’ 하게 바라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선악과나무를 지으실 때 ‘보기에 아름답고(하마드) 먹기에 좋은(토브)’ 모양으로 지으신 그 뜻대로 행한 것이기도 하다. 모세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탐심을 일치시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역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일인 것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선악과는 먹으라는 거냐, 먹지 말라는 거냐?” 혼란이 올 법도 하다. 적어도 하나님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금치산자의 비행 유발’의 혐의가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는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해 모두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보여주시는(계시) 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다만, ‘하나님이 먹게 하셨다’는 의미보다 ‘인간은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에 유념하면서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또 의문이 들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정녕 죽일 작정이셨는가?’ 이 의문만 풀리면 이 이야기의 궁금증이 대충 해결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일 작정이셨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계획되고, 한 치의 빈틈없이 실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이해가 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부족한 양반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이 맞다는 것에도 수긍할 것이다.

이제 문제는 ‘죽음’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장나는 인간 편에서 ‘정녕 죽으리라’는 살벌한 형벌에 대한 해결이 없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도 아니고, 좋으신 아버지도 아니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는 뜻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녕 죽으리라’는 히브리어로 ‘무트 타무트’이며 ‘네가 죽고 또 죽으리라’는 뜻이다. ‘죽다’는 말 ‘무트’는 ‘멤’과 ‘타우’라는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자음의 의미를 합성하면 ‘말씀, 진리(멤)의 완성(타우)’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모음은 무의미하다. 애초에 자음만의 나열이었던 구약성경에 모음을 단 것은 주후 500년 이후의 맛소라 학파였다. 그들은 히브리어의 발음 보존을 위해 모음을 달았다.

따라서 히브리어에는 자음이 중요하며, 자음 각자가 고유한 의미가 있어 각 단어가 통용되는 의미 외에 본질적인 의미도 함의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레츠’는 ‘땅’이란 뜻의 단어인데, 파자하면 ‘하나님이 낚기 시작하신다’는 뜻이 된다. 저주의 바다라고 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물고기 같은 인생들을 흩뿌려놓고 창세전에 약속된 자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는 장(場)이 바로 땅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에벤(돌, 반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글자들을 볼 때 즉각적으로 그 속에 담긴 진의까지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 속에 담겨 있는 ‘말씀의 완성’은 어떤 의미일까? 신약으로 가면 우리 성경에 ‘죽음’이라고 번역된 말이 ‘네크로스’와 ‘다나토스’가 나온다. 상이한 뜻의 두 단어가 공히 ‘죽음’이라고 번역되어 있어 구분하기가 어렵다. 네크로스는 우리가 잘 아는 일반적인 죽음, 곧 육신의 죽음이다. 반면에 다나토스는 자기부인의 죽음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날마다 죽노라’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서 죽어야 할 죽음이 바로 다나토스의 죽음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지 않았던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로구나.’ ‘나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그저 마른 뼈고 죽은 흙일 뿐이로구나.’라는 걸 알 때 그를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었다’고 한다. “저는 죄인이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할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라고 세리가 기도할 때 그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것이고, ‘자기부인’을 한 것이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다나토스의 죽음, 자기부인의 죽음이다. 그렇게 죽은 자가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칭해지고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걸 또, ‘위로부터 거듭났다’고 하고, ‘부활’이라고 한다.

세리의 반대편에 있던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칭하고, 세리와 창기와 비교하여 의로운 자기를 칭찬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죄성의 발로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자기부인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을 부정했다. 그들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죽을 죽음은 네크로스의 죽음 밖에 없다. 그들은 스스로 ‘산 자’이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다. 그런 자들이 심판의 날에 ‘죽은 자의 부활’을 하고 영원한 심판에 처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산 자’.

“바리새인, 나쁜 놈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율법주의를 돌아보라. 스스로 선악판단의 주체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처럼 되어, 날마다 타인과 사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는 것이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다. 오늘날 기독교인과 가장 가까운 성경인물이 바리새인이라는 연구 결과는 무얼 말하는가?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선악과 먹은 자이므로. 그 속에서 오직 성도만 바리새인에서 세리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의 과정을 겪으며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모두 먼 훗날 사후에 겪는 일이 아니라 인생 동안에 이루어야 할 일이다. 천국은 먼 하늘 너머의 어떤 곳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이루어져야 할 나라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악과를 먹인 것은 이처럼 ‘먹고 죽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처럼 되어 열심히 선악을 판단하면서 잘난 척 실컷 해보다가 ‘아, 이게 진짜 죄로구나!’를 깨닫고, 자기 부인의 죽음을 죽으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니고, 하나님만이 참하나님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뼈저리게, 확실하게 함으로써 참된 천국 백성으로 지어져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또 죽어서 ‘자기 찬양, 자기 숭배, 자기 의 쌓기’를 멈추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자로 돌아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담, 오실 자의 표상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여자가 선악과를 먹을 때 아담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왜 말리지 않았을까? 말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도 함께 먹어버렸다. 애초에 하나님의 경고를 직접 들었던 아담이니 그의 책임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외로 아담이 아닌 여자를 책망하고 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죄는 여자가 진 것이고, 아담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성경의 이러한 기술은 이 장면의 복음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아담은 죄를 지고 죽고 된 여자, 인간을 위해 함께 죽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성경에서 성도는 여자, 신부로 불리고, 오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자, 신랑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가든다고 하시고, 어린 양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인 교회의 신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 죄인의 대표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담에 대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고도 하고, ‘오실 자의 표상(롬5:14)’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먹게 만드시고, 신랑도 여자와 똑같은 저주의 상태로 떨어지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죄인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신랑으로 주시고, 그 아들을 여자와 같은 저주의 상태로 밀어 넣어 대신 죽여버리고, 정작 죽어야 할 여자를 살려내시는 십자가 복음을 이렇게 설명해 주신 것이다.(계속)

조정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