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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2 -십계명 십계명2-이웃 사랑(下)

은바리라이프 2015. 12. 29. 12:21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2 -십계명


십계명2-이웃 사랑(下)


예수님의 4계명


4)사랑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중에서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 뒷부분 5계명을 예수님이 넷으로 새롭게 설명해 주셨다. 마지막 네 번째 계명은 사랑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구원의 복음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인간이 선악의 두 마음, 곧 탐심(에피뒤미아)으로 바라보고 오해한 것이 율법이므로 이를 예수님이 바르게 깨닫게 하여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 ‘완전케 하다’의 참뜻이다.

율법이 성도에게서 구원의 복음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깨달아질 때 복음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율법의 본래 내용이 사실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걸 인간들이 탐심으로 바라보면서 ‘지키면 복, 지키지 못하면 저주’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한 것이 율법주의다.


십계명, 하나님의 모든 말씀

태초에 하나님은 일곱 번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일곱 번의 말씀은 각각 구원의 복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일곱(셰바)이라는 말은 구원의 언약을 가리키며, 같은 계열의 단어인 ‘샤바’는 ‘맹세하다’, ‘삽바트’는 ‘안식, 안식일’을 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셰바(일곱)’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이해됐다.

하나님은 일곱인 구원의 약속을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주셨다. 십계명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10개의 계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십계명은 ‘계명의 십’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이라는 의미다. 성경에서 10은 완전수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이 완전한 ‘열’에 담았다는 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인 일곱을 알게 하시려고 열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애굽에서,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열)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일곱)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걸 ‘칠십’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칠십 장로, 칠십 제자’ 등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다. ‘칠십이 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장로’는 말씀을 젖으로 먹는 ‘어린 아이’에 대조되는 성숙한 존재를 뜻한다. 물론 오늘날 교회 직분으로서의 장로와는 무관하다.

성경의 수많은 계명과 율법을 포함한 모든 말씀은 구원의 약속(일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이 성경의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말씀’이다. 성경,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우주를 포함한 세상의 만물,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의 인간관계, 그 관계들 사이에서와 세상의 만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들... 모든 것이 ‘말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나며, 이 세상에서 우연적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다. 만약 그런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발생한다.(그러므로 운이나 재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용어다.) 그리고 그 ‘말씀’은 모두 ‘구원의 복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발생하는 것도 말씀이고, 다치고 병이 드는 것도 말씀이고, 인생의 흥망성쇠도 말씀이다. 그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로고스)을 통해 구원의 복음으로 깨달아진 말씀(레마)이 내 안에 간직되어야 구원이다. 믿음은 바로 성령에 의해 깨달아진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으로 말미암으며(롬10:7) 올바른 믿음은 레마에 의해서만 생성되며, 성도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로고스와 레마가 모두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어 잘 분별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로고스)이 레마로 깨달아지는 자만이 참된 성도다. 레마는 성령에 의해서만 깨달아지므로 성도가 구하고 찾을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성령인 것이다(눅11:9-13).


사랑이 곧 십일조

그리고 그 모든 말씀(열)을 하나(사랑=구원의 복음=그 복음와 사랑을 담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깨닫는 것이 십일조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온전한 십일조를 들이라고 하는 ‘창고’는 곡식창고나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히브리어 ‘벹 하 오차르’는 ‘보물의 집’이란 뜻이다. 성경에서 집은 항상 성전을 말한다. 따라서 ‘벹 하 오차르’는 ‘보물의 성전’이며, 보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질그릇인 우리에게 담김으로써 성전이 되는 성도의 몸을 가리킨다. ‘나의 집’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도의 몸이다.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신약에서 결론이 났다(고전3:16).

하나님이 십일조를 들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성도의 몸이다. 성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말씀,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론이 나는 온전한 레마의 말씀을 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걸로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까. 올바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십일조를 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도적질

바로 앞 구절을 살펴보면 이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3:8)’

‘하나님의 것’은 원문을 보면 ‘하나님’이다. 번역자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도적질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의역한 듯한데, 이는 명백하고도 심각한 오류다. 덕분에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이 소유물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했고, 자연스럽게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하게 됐다.

이 구절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도적질 했는데 그 양상이 십일조와 헌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앞선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헌물을 똥이라고 하시며 다시는 받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시는데, 금방 그걸 똑바로 잘 내놓으라고 말을 바꾸시겠는가.

하나님을 도적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설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해 진리를 말하지 못할 때 거짓증거,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도적질 하는 일이다. 그래서 바로 뒷부분에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한다’고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말3:13). 십일조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말’,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다.


생명책과 심판의 책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따로 분리된 책이 아니라 하나의 책이다. 생명책과 심판의 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뜻, 구원과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깨닫는 자에게 성경은 ‘생명책’이 되며, 성경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하는 여러 권의 책으로 보이는 자에게 성경은 ‘심판의 책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책’은 단수고, ‘심판의 책들’은 복수다(계20:12).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떡의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되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돌로 사람들을 쳐서 죽이는 것이 모두 말씀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조각을 내어 따로 떼어 읽고 오해한 때문이다. 말씀을 토막 내면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이는 사망의 율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랑 하나로 결론이 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분의 십자가 공로가 또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말씀하시고,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든 것이 십자가 희생, 십자가 공로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자기를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고, 희생이다. 그리고 그 내용과 과정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고,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고, 생명이고, 사랑인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랑’

그리고 성도라는 성전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에 이어 ‘사랑하라’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로써 성도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호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다 갚고 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호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는 ‘마지막 1/4’을 뜻한다. 그래서 4복음서의 4번째가 ‘사랑의 책’ 요한복음이고,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다. 사도 요한의 서신서인 요한 일서, 요한 이서, 요한 삼서 또한 모두 사랑을 주제로 담고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진리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성도 또한 4번째 조각인 사랑으로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 정사각형의 성전이 된다(계21:16).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4족장의 연대기는 바로 그걸 가르쳐주는 시청각 교재다. 4족장 중 요셉에게만 하나님이 요셉의 밖에서 나타나지 않는데, 그건 하나님이 사랑으로 완성된 요셉의 안에 내주하시며 함께 동행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인생 또한 성도가 인생동안 완성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 사랑, 아가페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그 사랑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거래를 할 뿐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 ‘내가 너를 제법 사랑했으나 네가 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갚지도 못하므로 나는 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겠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감히 내 사랑을 무시해? 너를 미워하고 저주할거야.’ 이것이 인간들 수준의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라 고작 주고받는 거래고, 팔고 사는 매매일 뿐이다.

인간은 선악의 두 마음인 탐심에 따라 자기의 이해득실에 기반한 선악을 판단하면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를 구분할 뿐이다. 그건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죽도록 사랑’ 운운했던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인간은 사랑을 흉내낼 뿐 참된 사랑은 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성도에게 어떻게 나타날까? 여기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고 기대한다. 맞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의 좋은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의 택하신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영원의 참생명이다.

하나님은 잠시 후에 불타 없어질 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성도에게 광야 40년의 인생을 살게 하시고, 그 속에서 각양 고난과 환난과 대적을 통해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징계(파이데이아)는 ‘교육, 양육’의 뜻도 함께 가진 말이니, 징계처럼 보이는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성도를 아들로 만들기 위한 교육과 양육의 목적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징계처럼 보이는 그 일이 실상은 성도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이다.

허리에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육을 입고 있는 우리의 두 마음(탐심)은 즐거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더 먼 곳, 영원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우리를 도살할 양처럼 취급하시는 것이 사랑이다. 자기 부인의 죽음(다니토스)을 죽게 하심으로써 영원한 멸망의 죽음(네크로스)를 피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심산의 축복과 에발산의 저주를 모두 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심산에만 이스라엘 지파를 세우고 에발산에는 이방인을 세운 것이 아니라 두 산에 각각 6개 지파씩 세웠다. 축복과 저주가 모두 12지파(12는 아들의 수), 곧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랑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은 바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친구라고 칭해주시는 가장 큰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 사랑을 알게 된 성도만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 좌편의 염소는 아버지에게서 자기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을 얻어낼 때만 기뻐하고 감사하겠다 한다. 그걸 주지 않으면 줄 때까지 부르짖고 떼쓴다. 밥까지 굶어가면서. 그러나 우편의 양은 아버지가 주시는 모든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모든 말씀(성경, 사건과 사고, 현상 등) 속에서 그 사랑을 깨닫는 자가 참된 아들이다.

그렇게 아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 참된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한다. 그것이 성도의 이웃사랑이다.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하는 선행과 구제가 사랑의 진의일 수 없다. 그것들도 하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르게 깨달아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며,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