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94 어둠의 저편
로마서 8:31-32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어둠의 저편>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있습니다. 어둠은 그 자체로 절망과 실패가 아니므로 그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인정하고, 그 어둠에 저항하는 몸부림을 멈추고 체념하면 서서히 그 어둠의 저편이 보인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것이 오면 안된다는 그런 저항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왜 나에게. 감히 나에게.’ 이런 생각 말입니다.
그러한 저항이 그 자신을 진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의외로 그 고통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속에서 의미를 찾기도 해요. 그러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 고통이 감사로 바뀌기도 합니다.
<어둠의 저편>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떤 삼형제가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요. 그리고 그들은 어느 무인도에 닿게 됩니다. 그 무인도에서의 첫날밤에 세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요. 하루키는 철학자에 가까워요. 그 신이 삼형제에게 제안을 합니다. 커다란 바위를 굴리면서 앞으로 나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정착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3형제는 큰 바위를 굴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막내가 먼저 기권을 했습니다. 막내는 바닷가에 멈춰 서서 ‘난 여기서 물고기나 잡으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산 중턱까지 갔습니다. ‘난 풍성한 과일이나 따먹으며 살겠다.’
참을 성 많은 장남은 산꼭대기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엔 물고기도 과일도 없었습니다. 그냥 황량한 땅이었습니다. 어둠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서니까 아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과일을 수확하는 둘째도 보이고, 힘겹게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는 막내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맏아들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난 후회하지 않아. 물고기도 과일도 없지만, 심지어 춥기까지 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저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이 고통을 후회하지 않아.‘
여러분은 어떠세요?
삶의 본질과 내용을 알지도 못한 채 열심히 물고기 잡이와 과일 추수로 분주한 자가 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그런 건 충분치 않지만 삶의 고통을 통하여 삶의 본질과 내용을 올바로 알아가며 세상의 본질을 보는 맏아들로 살고 싶으세요?
인간의 인생이 절대자에 의해 많이 털릴수록 인생이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자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악인도 광고 카피에서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려올 때는 보이는 것이 산의 진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인생들은 하나 같이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인생의 의미나 본질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꼭대기를 향해 달리기만 합니다. 누구는 막내처럼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누구는 둘째처럼 많은 추수를 해서 그걸로 자기의 고지 꼭대기를 점령하려고 합니다. 열심히 꼭대기를 향해 달리는 겁니다. 그들이 그 길에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눈에는 물고기와 추수할 곡식, 과일만 보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성에 차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고, 그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은 자기가 만족한 지점에 도달하면 사라질 거라는 굳은 신념하에 그 만족을 향해 달려가면서 고스란히 그 고통을 다 겪어요. 인간들은 절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고, 그래서 고통은 영원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악다구니를 부리면서까지 열심히 달려서 자신이 상정해 놓은 안하무인의 그 고지를 점령하려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치는 나, 그것도 내 밖에서 주관적으로 타인이 보아주는 나, 객관적인 실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들의 눈에 비치는 그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입니다. 역사 속 아담들은 하나같이 다 내 밖의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달립니다.
좋은 차로 옷을 입기도 하고, 멋진 집으로 옷을 입기도 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펙으로 겉옷을 해입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 밖의 다른 이들이 나를 부러워해주고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면 그걸 행복과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에게 ‘나’란 ‘다른 사람이 보아주는 나’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걸 죽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 ‘나’가 초라해 보이고 성에 차지 않을 때,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달아보았을 때 비참해 보이면 스스로 고통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리는 것이 진리 밖의 인간들인 겁니다. 세상이 합의해 놓은 가치기준에 달아보아 가치없름으로 평가되는 자신이 미운 겁니다.
인간 세상의 고통의 본질을 추적해보면 하나 같이 똑같아요. 심지어 하나미께 잘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하기도 해요. 그게 기특한 것 같죠? 성경은 그걸 죄라고 합니다.
그것이 인본주의고,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하는 나. 열심을 부리는 나.
구원이란 그러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는 걸 말합니다.
어차피 세상과 세상이 생산해 내는 사건들과 현상들은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허락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나를 평가하는 내 밖의 사람들조차 나의 구원의 여정에 필요한 한시적 소품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그 소품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사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고난과 고통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현상들은 진리를 보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가치없다는 평가를 받는 자신을 바라보며 아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진짜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스럽습니까?
정말 살 집이 없어서, 한 몸 누일 방 한칸이 없어서 괴로운 겁니까?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 그들 인생의 모든 것은 선의 재료로 주신 겁니다.
성도는 그걸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본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아들들에게 넘겨진 모든 것을 ‘카리조마이, 선물(주: 카리조마이는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은혜의 선물, 은사’는 카리스마)’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카리조마이(카리스마)’이라고 합니다.
본문 31절.
그런즉 우리가 이 일에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바울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미리 부르셨고, 미리 부르신 자들을 미리 의롭게 하셨고, 미리 의롭게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했다’라고 말했어요. 그것은 변치 않는 불변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뭐라고 그 원리들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겠다는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선으로 합력시켜서 쓰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거기에서 이런 것, 저런 것을 빼달라고 하겠느냐?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냐,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그런데 너희들 인생에 그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신 그 모든 것들을 너희들이 고통으로 감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너희들의 대적으로 주신 것이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사탄 마귀들이 너희들을 어찌할까봐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통이 대적입니까?
환난이 대적입니까?
적신이 대적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30절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그게 31절의 내용입니다.
32절의 ‘모든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아들을 아들로 ‘파라디도미’ 넘겨받은 아들들, 맏아들의 동생들, 곧 성도를 말하는 겁니다. 아들을 진리로 넘겨받아 아들이 된 자들, 적어도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선물로 보여져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가난 질병 사고 이별 실수 실패 나쁜 습관, 심지어 죄까지도 그것들로 인해 진리를 깨닫게 됐다면 그것들이야말로 선물인 겁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늘의 참 생명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로 인해 세상 것들을 많이 잃은 것처럼 보여지고,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로 인해 진짜 가치있는 참 생명을 얻는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면 그게 하나님의 선물, 카리스마 아니냐는 겁니다. 그것이 정말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세상을 진리로 보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겁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피조물들 안에는 여러분에게 닥치는 사건들, 현상들과 여러분의 그 현실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왜 이걸 질병으로만, 고통으로만, 아픔으로만 보느냐?
아들들아, 어서 나타나서 이것이 무엇인지 좀 알려다오. 밝혀다오.
탄식하며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 아들들이 나타나야 그 나타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아랫 세상의 피조물들이 오해를 벗을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그러한 말인 겁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뭘까요? 진리를 그 마음으로 가진 그들을 ‘마음을 가졌다’라고 해요.
마음, 카르디아는 심장이란 말과 같이 씁니다.(카르디아는 인간의 내부 생명과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의 근원) 그것이 생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 그 생명, 그 심장, 그걸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지 여러분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하나님은 겉모양에 절대 속지 않습니다. 겉은 항상 속이라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지 겉의 것에 묶여버리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타난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 자체, 나타난 것을 척도로 삼아 실망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좀더 깊이 들어가서 제가 오늘 ‘어둠, 죄, 마귀, 사단’ 등의 단어가 가진 개념을 확실하게 정의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이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가지 못하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없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지도 모르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그 은혜, 그 진리로 가지 못하고 하나님께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과 성전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그냥 섬겨버렸고, 율법을 그냥 몸으로 행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향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전과 율법을 그 용도로 주신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거기에 진리를 담아 차서대로 ‘티데미’ 진설하여, 이것으로 ‘히스테미’ 똑바로 서라고 진리를 담아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내어 준 진리의 모형들을 통해 그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것이 곧 그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눈과 귀를 막아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성경이 ‘사탄’이라고 합니다.
다이어트를 심하게 해서 몸이 허약해지면 보이는 그런 건 여러분의 머리가 만들어낸 거지 그런 건 없는 겁니다.
히브리어로 사탄, 헬라어로 사타나스인 이 사탄은 뱀이 아랫것으로 분석을 하면, 가르쳐 버리면 그걸 ‘대적자’ 사탄이라고 해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게 무슨 뜻인지 해석을 해야 되는데, 사탄이라고 하면 ‘아, 그것’ 이렇게 오해를 해요. 나중에 주님과 전쟁할 존재, 이렇게 생각해요.
사탄은 ‘대적자’란 뜻입니다.
다윗의 대적자가 다윗을 향해 ‘사탄’이라고 해요. 이처럼 성경에는 좋고 나쁜 구분 없이 서로 대적자를 향해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대적자, 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그것이 뭡니까?
진리의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바로 사탄인 겁니다. 그걸 성경이 뱀이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옛뱀이 불과 유황못에 들어가는 겁니다.
진리의 대적자, 진리를 못 보게 하는 것.
성전과 율법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에 묶여버리면 (진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성전과 율법이 곧 사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뱀인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성전으로, 율법으로 오신 그 분, 예수님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예수는 나에게 뭡니까? 뱀, 사단인 겁니다. 예수가 다른 존재인 사탄이 아니라 그 예수, 성전, 성경이 그 진리를 못 보게 했을 때.
그러나 그 아들로, 그 성전으로, 그 성경으로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구원이요, 생명인 겁니다.그가 아들을 진리로 넘겨받은 자인 겁니다. 그에게 있어서만 그 예수, 그 성경이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껍데기로 보면 뱀이고,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과 율법에 걸려넘어짐으로써 성전과 율법을 사단, 뱀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예수로 인해 넘어져서 그 예수를 뱀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가 그 성전, 그 율법, 그 예수라는 불뱀-불뱀은 물, 진리가 아닌 것, 그 반대편의 것의 뱀이란 뜻-에 물려 죽는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내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똑바로 진리로 보지 못하면 그가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될거라고 한 겁니다. 사단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마귀, 사단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뱀으로 만들어버리는 자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뱀으로 만드느냐? 그래서 너희가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희는 뱀의 자손이다.’
마23:27,33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바리새인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자들을 뱀의 아들, 독사의 아들이라고 부르세요.
이들이 율법을 몰랐어요? 성전에서 제사를 안지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오신 예수가 여기 계세요.
“너희들은 이렇게 줘도 모르니? 말하는 성전, 말하는 율법인 내가 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그냥 율법, 그냥 성전, 그냥 제사로 봐버리면 그들이 뱀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뱀으로 믿고 있구나.
사단으로, 대적으로 믿고 있구나.‘
뱀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자들, 반대로 그러한 것들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알면 그들을 하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자의 관점, 즉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그 뱀의 자손들에게 진짜 성전, 진짜 말씀,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사단으로 보이겠죠?
저것이 뭐지?
저것 사단이네?
우리 대적자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예수님, 진리를 그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그 예수를 그 진리를 바알세불, 사단이라고 불러요.
눅11:14-19
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말하기를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어요. 이건 다이모니안, 나쁜 말을 가지고 있는 자, 좋은 말, 참말,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 자를 벙어리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귀신이라고 자꾸 번역을 하는데 다이모니안을 그냥 ‘나쁜 말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원래 벙어리라는 병은 없어요. 사고로 혀를 잃으면 몰라도.
듣지 못하는 자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 듣지 못함에 의해 그 말을 못함이 연결이 되는 겁니다. 즉 벙어리란 진리를 듣지 못해서 그 말을 못하는 자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주님이 그런 자들을 고쳐주세요. 어떻게요?
바로 이 본문 위에 산상수훈이 붙어있어요. 진리의 말로 그를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로 고쳐줬다는 겁니다. 말이 터지게 만들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니까.
그런데 그곳이 성전 마당이었죠?
그 산에 올라가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잖아요.
그 산, ‘호 호로스’가 성전이란 말입니다. 그 성전에 가서 이 성전이 무엇에 대해서 그 내용을 진리를 담고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줄게, 하시곤 말씀하신 것이 그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표적이 주기도문, 산상수훈의 바로 다음에 붙어있어요.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 성전의 내용인 진리를 설명해 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살리는 것이다, 라고 하니까 벙어리 귀신이 나갔다고 해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율법과 성전을 진리로 재해석해 주시면서 그 표피적 성전과 표피적 율법들을 부정해 버리신 겁니다. 그래?T더니 그 율법과 성전, 그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이들이 그 예수를 ‘바알세불, 사단’ 이렇게 부른 겁니다.
바알세불은 Baal과 Zebul의 합성어입니다. 바알은 이방 베니게의 신입니다. 베니게의 신이라 하여 단어 자체가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남편, 주인’이란 뜻으로 굳이 파자를 하자면 ‘성전으로 오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성전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베니게의 신 바알이 되는 거고, 거기서 진리를 알면 그건 하나님인 겁니다.
제불Zebul은 ‘날개로 날다’라는 뜻입니다. 사전에는 ‘파리’라고 되어 있는데, 날개로 나는 것이 파리 밖에 없나요? ‘날개로 날다’ 그러면 날개로 나는 성전, 곧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서있던 그 성전. 그런데 그 성전으로 구원에 이르면 그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로 내 마음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그냥 섬겨버리면 그게 바로 사단, 바알세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이 성전에서 그 성전으로 오신 당신 안의 진리를 그 성전이 말하고 있는 그 진리로 말해 줬더니 그들이 ‘바알세불, 사단’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바알세불이면 어떻고 사단이면 어때요? 그것으로 내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그 바알세불도 나에게는 선물인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으로 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가 나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대적자, 사단, 바알세불, 마귀새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참 성전이며, 참 율법으로,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알세불, 사단으로 보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그 모형으로서의 성전, 지켜야할 계명으로서의 그 율법, 즉 진짜 사단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걸 그렇게 보는 것이 진짜 사단입니다. 진리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런데 거기서 예수를 가리켜 ‘바알세불, 사단’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정말 요한계시록에서 불과 유황못에 들어가게 될 사단이며 대적자가 되는 겁니다.
그들에게도 똑같은 성전, 똑같은 율법, 똑같은 예수가 주어졌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바알세불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알세불 논쟁 가운데서 이러한 진리를 던지는 겁니다.
겉과 속은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진리가 되는데, 나라와 나라가 분리가 되고, 성전과 성전이 분리가 되면 어떻게 그것이 나라가 서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성전이 서는 것이겠느냐? 하시는 겁니다.
마귀가 마귀하고 싸우면 어떻게 하지? 이런 말이 아닙니다.
‘겉과 속은 하나로 이해가 되어야지. 너희는 속, 즉 진리를 내용으로 담아주었더니 왜 겉으로만 보고, 그걸 진리로 못 보느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나라가 서고, 어떻게 성전이 서겠느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성전이 무엇인지를 율법으로 그 진리를 담아 설명해 주는데,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준 것은 그것밖에 없는데 너희가 그걸 못 알아먹고 바알세불이라고 하고 사단이라고 한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냐?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은 그것 밖에 없다. 그 묵시의 진리는 이 땅에 그냥 내리 꽂힐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어떤 모형에 담아 너희에게 준 건 그 아랫것-율법, 성전, 예수- 밖에 없는데 너희가 나를 바알세불, 사단이라고하면 너희의 아들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귀신에서 풀려날 거냐? 그러니까 너희야말로 사단의 자식, 뱀의 자식, 독사의 자식이다.
요8:43-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함이로다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듣지 못하는구나.)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아비라 하는 그것은 마귀다. 그것이 율법이며, 성전이며 제사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난거다. 너희는 독사의 아들들이다.” 하세요.
여기서 욕심은 ‘에피뒤미아’ 선악의 두 마음을 말합니다. 진리가 그 hr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자기 안의 두 마음, 자존심과 남의 눈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삶을 사는 것에 이용하는 그 율법들, 말씀들이 모두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세요.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렇게 내가 진리를 말해도 믿지 않으니 너희가 바알세불이며 사단이다. 독사의 자식이며 마귀의 자손이다.”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를 구원하는 메시아도 예수 그리스도인 거고,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마귀의 아들들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그 옛뱀,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그 예수에 의해 죽어요.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예수가 옛뱀이 되는 겁니다. 물론 오해된 예수, 섬김의 대상으로 여전히 살아있는 예수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 오해된 예수, 그 뱀은 얼른 죽어야죠. 오해된 예수가 살아있으면 안되잖아요. 나에게 그 뱀이 살아있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을 뱀이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뱀으로 죽을게.”
요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라’고 하세요. 행하는 게 아닙니다. 민수기 21장의 ‘모세가 광야에서 든 뱀’ 오피스는 불뱀에 물린 자들에게 치료제로 주신 장대의 놋뱀이었습니다. 그 놋뱀은 불뱀의 형상입니다. 역시 물의 반대인 불로써의 뱀, 그건 물리면 죽는 겁니다.
뱀 ‘나하쉬’는 놋 ‘네호세트’와 같은 단어입니다.
‘나하쉬’ 아래의 것으로 그 죄를 분석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면 그게 뱀입니다.
‘네호세트’ 놋은 성전에서 성전 마당의 제단을 만들 때 쓰던 겁니다. 놋은 합금이고 섞인 겁니다. 거기에서 가면 갈수록 은, 금.. 순수한 것으로 진행되어 가는 겁니다.
섞인 것이 바벨이니까 바벨론에서 끌어내는 겁니다. 애굽에서 끌어내 순수한 그 말씀, 진리의 말씀, 진리의 나라로 끌고가는 겁니다.
놋뱀은 놋의 성격을 가진 뱀이라는 겁니다. 성전 마당의 제단의 성격을 가진 그 뱀.
율법이고, 희생제사입니다. 인간이 열심히 두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 그걸 언약의 기둥에다 달아버려요. 그러면 언약의 관점으로 그걸 보게 되면 ‘아, 이건 우리에게 열심히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에게 계시하여 희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라는 것이로구나.’라고 깨닫고 그 놋뱀을 바라보게 되면 사는 겁니다. 그걸 생명이라고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놋뱀이 반드시 반드시 여러분에게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뱀으로 왔다. 내가 성전으로 왔다. 내가 율법으로 왔다. 내가 이것으로 죽을게. 나의 죽음으로 그 진리, 그 사랑을 봐! 그러면 살아!”
거기에서 몇 명이나 그 뱀을 봤느냐, 이런 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 성경은 독자인 성도에게 구원의 원리, 그 은혜, 그 사랑을 설명해줄 뿐입니다. 몇 명이 봤느냐를 궁금해 하지 말고 내가 봤는가를 확인하십시오. 나에게 있어 그 불뱀이 그 언약의 기둥에서 정말로 죽은 뱀이냔 말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으로 오시는 것인데 그 뱀이 거기에 진짜 달려 죽었느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뱀에 물린다는 것은 성전이나 율법이나 예수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성전 마당적 개념으로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다는 것은 성전과 율법과 예수를 진리, 아가페, 그 사랑으로 보고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표피적 성전과 표피적 율법과 표피적 예수, 나의 섬김의 대상이었던 예수가 죽는 겁니다. 거기서 부정당하는 겁니다. 삭제당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겁니다.
그래서 독사에게 물리면 바로 그 뱀의 독으로 해독제를 맞아야 사는 겁니다. 뱀에게 물리면 어떤 뱀에게 물렸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뱀독의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독마다 증상이 달라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불뱀에 물린 자로 이 역사 속에 먼저 던져 넣으세요. 그들은 모두 그렇게 불뱀으로 살다가 뱀의 후손으로 유황불못에 들어가야 할 운명인 겁니다. 모든 존재가.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불뱀에게 물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도 뱀에 물린 것을 알고 놋뱀을 바라본 자만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 말씀은 ‘뱀을 죽여 장대에 달았더니 뱀에게 물린 것을 인식한 자만이 그 놋뱀을 쳐다보고 살더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아담들은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에서 가장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간디나 법정이나 타종교인들,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게 살아간 이들을 존경합니다. 많이 존경하세요. 그러나 그건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을 인간의 최선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살다 간 사람들을 롤모델로 치켜세우고 그들을 본받아 살고 싶어해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자기과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칭찬해주기 원하는 것.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진리를 알고 보니까 그렇게 나를 과시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정해놓은 그것을 충실히 행하는 그것이 죄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내가 사실은 뱀에 물렸던 것이구나.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예뻐해 주시는 게 아니구나.
그런 삶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어떻게?
그걸 죽이고 나를 살리는 그 생명, 그 하나님, 그 진리를 보면 되는 겁니다. 율법과 성경이, 예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제대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삽니다. 그것이 구원인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시작되는 시점에 모세의 뱀과 애굽 술사들의 뱀의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애굽의 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뱀에 의해 죽어요. 바로 예수를 말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7:10-12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고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만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었으면 그 뱀은 여호와의 명하심에 의해 있게 된 뱀입니다. 고대시데에 지팡이가 가지는 의미는 ‘훈육, 가르침, 인도’였습니다. 이 라메드라는 단어 자체가 지팡이란 뜻도 있지만 ‘훈육, 가르침, 인도’라는 뜻도 있어요. 여기서 이스라엘의 라마단이 나왔습니다. 자신을 훈육하고 가르치는 기간. 낮에는 굶고 밤에는 배로 먹죠.
이 지팡이가 우리를 인도하고 훈육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몽둥이로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뾰족한 지팡이로 콕콕 찌르면서 훈육했어요.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고 인도한다’는 건 나를 훈육한다는 겁니다. 라메드가 그런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우리를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해, 우리를 아들로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지팡이가 뱀으로 온단 말입니다. 뱀으로 와서 그 가짜 가르침, 거짓 가르침을 먹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술사입니다. 헛것을 가르치고, 허깨비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술사들의 술법입니다. 그 뱀이 아무리 멋져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허깨비입니다. “간디? 아이구 저 허깨비. 내가 너에게 그것 말들어 오라고 했느냐? 그래봐야 육신인 것을.”
그러니까 아래의 뱀, 옛뱀을 죽여서 삼켜버리는 건 하나님의 명대로 오신 뱀입니다. 하늘의 뱀. 지금 우리는 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뱀이라고 하니까 ‘징그럽다, 더럽다’ 하지만 당시 애굽에서의 뱀은 힘이었습니다. 파라오들이 왕관에 뱀을 달고 있었어요. 더럽고 무서운 게 아니라. 최초의 성경 수신자들이 이해할 때 뱀은(뱀의 이미지는) 힘, 권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 좌우, 선악, 어둠과 빛에서 벗어나-그게 구원이니까-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꾸 그게 선명해져서 ‘저건 악이고, 이건 선이니까 우리는 이쪽에만 서있자’ 이걸 잘 가르치는 거라고 하는데, 결국 그게 진짜 죄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걸 확실히 구분해서 한쪽을 따르는 걸 훌륭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유리의 동력으로 살고 싶어 하고, ‘살 수 있다’ 자신하는 그 바다의 물고기, 바다뱀이 바로 우리인 겁니다. 그 바다뱀을 하나님의 명을 받은 뱀이 삼켜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뱀에게 먹혀죽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신 후에 꼬리를 잡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 잡으면 죽습니다.
출4:2-4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여기 등장하는 지팡이가 라메드, 야곱이 평생을 절뚝거리며 짚고 다니던 하나님이란 지팡이입니다. 이걸 땅에 던집니다. ‘뱀의 꼬리를 잡다’에서 ‘잡다’ 하자크는 ‘정복하다, 그래서 치유하다’ 이런 말입니다. 뱀의 꼬리를 묶고 정복하여 치유하는 것, 어떻게? 머리로
그 지팡이 가지고 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갔더니 그 뱀이, 그 지팡이가 애굽술사의 뱀을 먹어버리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뱀이 나쁜 겁니까? 그 뱀으로 진리를 알면.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예수의 오심이 무시무시한 심판인 겁니다. 무서운 살육의 뱀, 심판의 뱀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런데 메리크리스마스가 웬말입니까? 온세상이 잔치를 벌여요. 자신이 도륙되는 현장인데.
왜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안 모이냐고 그래요. 모여서 열심히 노세요. 삼삼오오. 그걸 왜 교회의 행사로 그런 걸 합니까? 교회가 그 크리스마스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날은 콘스탄틴 대제가 태양신의 축일을 성탄절로 지정해 버린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그 크리스마스 트리의 태양을 상징하는 오나먼트를 보며 태양신을 기념하느라 참빛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모형으로 준 태양을 기념하며 자기들끼리 잔치 벌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걸 빌미 삼아 한몫 챙기는 거고. 그래서 우리만 맨날 적자야. 대목은 다 놓치고.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태양신의 표식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크리스마스를 만들었으면 표식은 무엇으로 만들었겠어요? 자기들이 가장 친숙한 표식으로 정한 겁니다. 거기서 나치의 철십자가도 나오고 불교의 만자도 나온 겁니다.
옛날 로마의 신상들은 모두 태양을 얹고 있었습니다. 그 표식이 그대로 십자가가 된 겁니다. 신상 위의 태양. 그러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붙들고만 이?T으면 그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기도원 같은 데서 그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면 무슨 능력이라도 받는 것처럼 다투고들 하는데 그런 건 마귀도 비웃을 일입니다.
이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동안 머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애굽의 태양신 라의 시나리오와 똑같은 겁니다. 그걸 애굽에서 나온 그들이 잘 아는 신화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 아는 것으로 내가 복음을 설명해 줄게’ 하고 하나님이 그걸 들어서 구원이 뭔지 설명하시는 겁니다.
애굽의 라도 인간들에게 인식이 불가능한 신이었습니다. 그걸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소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신의 형상으로 소를 만든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400년간 보아온 것이 그거였거든요.
그런데 그 시나리오에 의하면, 태양신 라를 대적하는 땅의 신이 있는데 그게 바로 뱀이었습니다. 땅속에 사는 큰 뱀. 그래서 태양신 라가 그 대적자, 사단을 죽이러 내려오는데 무엇으로 내려오냐면 양으로 내려와요. 이건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양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때 양을 뱀에게로 인도하여 가는 대변자가 뱀입니다. 뱀이 내려가서그 큰 뱀을 세 토막을 내서 죽이고 평화가 와요.
하나님이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그거니까 내가 그걸로 그 진리, 그 평화, 그 안식을 너희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마.’ 하시며 양, 뱀, 이런 것들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적으로서의 그 용이나 뱀은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율법으로서의 성전, 예수, 성경, 세상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그걸 바다라고도 부르고, 어두움이라고도 부르고, 깊음이라고도 부르고, 저녁이라고도 부르고, 밤이라고도 부르고, 죄라고도 부릅니다.
아들을 보내서 진리의 영으로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세요.
‘씨를 심고 죽어라! 들어가라!’ 하세요. 그리고는 그 아랫것들 속에 숨어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그들을 그 아래 뱀의 자리, 바다의 용의 자리, 무저갱 속의 그 짐승의 자리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눈이 떠진 하나님 백성들의 눈에 진리로서의 성경, 그 진리로서의 성전, 그 진리로서의 예수, 그 진리로서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사단이나 바다나 어둠이나 죄나 악이나 선이나 밤, 이런 것과 무관하게 하늘의 존재로 살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용서라고 해요. 그러면 당연히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어떻게 그걸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나,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 있겠니? 다 선물이야. 선물. 그걸로 알면 돼. (조심스럽지만) 너희 죄도 너에겐 선물이야. 그것 없이 어떻게 생명나무를 알겠니?’
잘 이해하셔야 해요. 제가 10년간 단계를 밟아 오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 아무한테나 가서 선악과가 사실은 선물이래. 죄가 우리에게 선물이래. 그러면 안됩니다. 줄 사람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을 때 주세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겠습니까? 빨리 돼야 줄텐데. 그런데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또 지금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요.
이렇게 우리가 ‘아 그런 거구나! 저 어둠의 저편에는 그 진리, 그 빛이 있는 거였구나.‘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게 되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뭐라고 불러요? 우리의 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들이 우리도 사단이라고 불러요.
마10:25-27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집 주인’ 성전의 주인, 하나님입니다.
“그 껍데기만 보는 자들은 너희들을 바알세불이라고 부를 거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그 껍데기가 벗겨지는 날이 온다. (어떻게 하래요?)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빛으로 말하고,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성전 위에서 이야기해 준다.”
그러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감추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숨은 것은 반드시 내용으로 알려주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껍데기로만 보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은 그 내용들이 환하게 드러날 때 그 진리에 반하는 사단의 무리가 되는 겁니다. 대적자의 무리.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겁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어요? 다 예배당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성소에서부터 심판한다’고 하신 겁니다. 적그리스도, 거짓선지자가 절에 있겠습니까?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왜 절에 가있겠어요. 거기엔 석가모니가 있지. 안티크라이스트, 거짓선지자, 그리고 거짓말하는 마귀의 자손들 다 교회에 있어요.
주님의 말씀, 즉 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래의 것들을 가지고 말씀해 놓으신 것을 가지고 빛으로 말을 해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고민을 좀 해봐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렇게 어두운 데에서 어두운 것을 가지고 그 빛을 이야기 해주는 그들을 별이라고 해요. 그 광명을 이야기하면.
빛, 빛 하니까 너무 어렵게들 생각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세상, 이러한 것들을 어둠이라고 하세요.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뭔지 알았어요. 그런데 똑같은 성전입니다. 어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걸 빛이라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두움을 보고 ‘이것이 빛이네’라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겁니다.
어둠 안에, 이 육신 안에 사는데 이제 내가 뭔지를 알았어. 그러면 내가 빛인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비추어라, 하시는 겁니다. 다른 거 아니라니까요. 뭐 대단한 걸 받고 여기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들을 비추는 자들, 광명, 별, 코카브.
단12:1-3
1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미가엘’은 ‘전쟁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책에 기록된 자’의 ‘책’은 생명책입니다. 성경. 그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면 그것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 나에 대해서 녹명된 것이니까. 그런데 그 책이 그저 예수의 이야기이면 그건 내 책이 아니잖아요. 그때는 심판의 책이 되는 겁니다. 그저 66권의 책들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면 ‘생명’이라고 해요.
아담 !d;a은 사람이란 뜻이고, 파자하면 ‘흙에서 구별해놓은 진리’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입니다. 사람, 진리가 된 자.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를 ‘말씀’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아담이 어디에서 나오냐면 ‘아다마 hm;d;a’에서 나와요.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를 소리로 내는데 이 소리에서 진리가 된 자들이 나오는 겁니다. ‘하 h’가 소리니까.
그런데 아다마와 아담 사이에 아파르 rp;[가 있습니다. 아파르는 ‘티끌, 먼지, 모래’라는 뜻입니다. 이 아다마 땅에서 아담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데 중간에 무엇으로 아담을 만들어 내냐면, 성경은 아파르, 티끌로 만들어 낸다고 해요. 티끌, 아파르는 ‘아래의 것으로 말하기 시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입니다.
‘아래의 것’은 ‘성전, 입, 말’이란 뜻도 있으니까 아래의 성전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그게 율법인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아담을 만들어내려면 율법을 줍니다. 그래서 율법을 ‘티끌, 먼지 모래‘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먼지로 그들을 털어버리라‘ 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아직 아담이 아닌 아파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율법, 아파르에다 집을 지으면 어떻게 돼요? 무너진다는 겁니다. 여기다 지으면 안돼요. 아담이 성전입니다. 진짜 성전. 성령이 내주하시는 진짜 성전. 그러니까 ‘이 티끌, 이 먼지가 바로 내 자리였구나. 그런데 그 티끌, 먼지에 물을 받아 진리의 물을 대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담, 하나님의 아들,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파르에 물이 대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희에게 비를 모래같이 내릴 것이다’ 하세요. 그러면 죽어요. 율법으로 내려오면 죽는 겁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건 땅에서 먼지 티끌을 모아 아담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땅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읽는 사람은 그렇게 읽으세요.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이 안에서도 복음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아파르에 머물면 죽는 겁니다.
여러분은 별입니까? 30촉 전구입니까? 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나 여건이나 스펙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어요. 왜 남의 눈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이나 남이 평가해주는 나의 모습에 일희일비 합니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면 어때요? 적어도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여러 해 공부했으니까 이제 조금씩 달라져야 합니다.
왜 복수를 해요? 왜 교회에서, 당회에서 싸움이 일어나죠?
‘니가 나를 물로 보냐?’ 이런 생각 때문 아닙니까? 남이 나를 물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비춰지고 있다 해도 내 안에 그 진리, 그 생명이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아들은 온 세상, 천하보다 귀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진리가 없는 세상의 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다 태워버릴 것들이니까요. 소품들이 하는 이야기에 절망하고 슬퍼하고 그런다니까요. 그들은 그저 땔감이 될 인생들입니다. 그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리고 나의 과거가 뭐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하고, 더럽고, 비루하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으로 내가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카리조마이’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미래의 일을 그렇게 걱정하세요? 사후가 즌비되어 있는 여러분이 왜 노후를 걱정하세요? 사후가 불확실 하니까 노후도 걱정되는 것 아닙니까?
다 거짓말인 겁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에 묶이면 여러분은 현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늘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것만 이루면 행복할 거야.’
‘그 미래로 가면, 저것만 이루면 행복할 거야.’
그리고 그 미래로 가면 또다른 미래가 보여요. 그렇게 현재에 만족할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불안에 덜덜 떨다가 조바심 내다가 록펠러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죽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 하실 겁니다. ‘저렇게 갈건데 살면서 다 누리다가 가지.’
그렇게 1주일만 놀아보세요. 재미있나. 그것도 금방 고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그 진리 아니면 절대로 현재를 만족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걱정하는 미래가 여러분 뜻대로 주어져도 여러분은 행복하지 않아요.
잠깐, 아주 잠깐 행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서 시선이 그리로 모아지면 또 불안해해요. 그러면 단 한 순간도 안식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다른 평안, 평강을 주었다고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현재에서 그걸 누리셔야 해요. 지금을 사세요.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마시고 지금을 만족하시면서 한 발 한 발 가시면 되는 겁니다.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사건들을 묵시와 진리 속에서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그 어둠의 저편을 보게 되면, 그 모든 것 뒤에 하나님의 그 뜻을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시간과 그 사건과 무관하게 사는 진짜 하늘의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그 시간에 묶여버리면 그걸 ‘땅의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걸 지옥이라고 해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옆의 사람이 이 정도 수준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이 정도의 학벌과 교양과 외모가 되면 나는 비로소 행복할거야.”그게 되나 보세요. 천만의 말씀. 그때까지 늘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게 된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신 그 사람이 나의 선을 이루는데 가장 적합한 친구이기 때문에 준 겁니다.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면 돼요. 그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우리는 남의 시선에 비춰지는 내 옆 사람의 스펙을 걱정해요. 왜냐하면 그게 사실은 나거든요. 다른 사람 찾아봐야 그게 다 그거입니다. 지금 그 현재를 살아가세요. 가장 가까운 여러분의 벗, 그 친구. 그가 여러분의 반쪽입니다. 지금 그 사람을 누리셔야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그 사람을 기대하지 마세요.
가나안 너머의 그 풍요를 보셔야 합니다.
질병 너머의 그 치유를 보셔야 합니다.
고난 너머의 그 천국을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 예수의 오심이 정말 축복이요, 선물입니까? 아니면 무서운 뱀의 출현입니까? 제발 알고들 흥분하세요. 남의 생일에 술 먹고 들떠 노는 사람들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함께 흥분하지 마세요.
다음 시간에 그 예수를, 율법을 , 성전을, 세상을 바알세불로 이해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요한계시록과 창세기를 넘너들며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 아버지가 나를 위하시는데 무엇이 나를 대적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이 나의 대적으로 주신 것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의 선의 재료들입니다. 그 주어진 것을 온 맘 다해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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