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 : 26-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게 어떤 문맥으로 이어지는 건지 잘 보셔야 된단 말에요. 지금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모든 피조물들이 다 기다려. 왜? 그들이 나타나서 우리의 진의를 설명을 해줘야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과 역할, 이유가 분명해지고 우리는 비로소 가치를 얻는 게 되는데 다들 그냥 아래의 것으로만 나를 보아 나를 오해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노자가 이렇게 나가서 경치를 보고 있었더니 제자가 스승님 아름답죠? 그랬을 때 노자가 야단을 쳤단 말에요.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 순간 이 자연은 아름답지 못한 거야. 왜? 그건 아름다우라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그런 말이었어요. 나는 다르게 보고 있는데 네가 껍데기만 보고 아름답다 그러니까 진짜 그 아룸다움이 훼손 되었다, 이놈아. 이런 말이에요. 지금 그렇게 그 피조물들이 이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아들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세상의 이 육적 꼴이 우리 인간들의 가능성이라든지 하나님 앞에서의 그 교만이 꼬리를 잘려야 되는데 그게 우리 스스로 안 된단 말에요. 내가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성령이 나를 도와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뭐를 돕느냐고요?
그 꼬리가 잘려져 나가게,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그 나의 잘못된 신앙을 파쇄하고 부수는 그 도움을 주기 위해 말씀이 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단순히 이 이야기가 ‘너희들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엉뚱한 기도를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네 안에 성령이 너희들이 필요한 것들을 대신 기도해주니까 하나님은 너희들이 필요한 걸 그냥 다 공급해주신다’ 가 아닐 거 아니에요? 그 반대의 이야기면 이야기였지. 그죠? 그것들을 끊어내러 오시는 것이 하나님이야. 그래야 너희들이 아들들이 되어서 이 피조물을 비로소 그 진의대로 밝혀낼 수 있어, 라고 이야기 해놓고 너희들이 필요한 건 하나님이 대신 다 빌어준단다. 로 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반대의 이야기일 거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맞죠? 그들이 나타나야 온 세상이 진리로 해석될 수 있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뭐라 그래요? 연약함이라 그래요. 그들이 연약하여, 우리가 연약하여 그래요. 그런데 어떤 연약함이라고 그래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함이라고 그래요. 여기에서 빌 바를, 에서 ‘빌다‘는 게 '프로슈코마이‘ 인데 그 단어가 기도라고 우리가 성경이, 개역성경이 번역하고 있지만 우린 배웠잖아요. 이제 알잖아요. 그 '프로슈코마이‘ 가 뭔지. ’프로스 유코마이‘ 가 뭔지. 어디 어디를 향하여 간절히 원하는 건데 그 원함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거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그죠? 왜? 그분만이 진짜 존재였으니까. 존재도 아닌 것들이 뭔 원하느냐고요. 그분이 원하는, 피조물들에게 원하는 어떤 뜻이 있는데 그것이 흘러 내려와 그 피조물들의 원함이 되는 거예요. 맞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그게 돼야지. 내가 원하는, 피조물이 원하는 일이 나에게 이뤄지면 나는 큰일 납니다. 라고 내가 알게 되어 그 하나님의 원함을 내 원함으로 가져 그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을 올바로 깨달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겁니다. 라고 이렇게 선포해줄 때 그렇게 그러한 흐름을 '프로슈코마이‘ 라고 한다 그랬죠? 기도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그럼 그거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깨달아 진리로 이렇게 흘려주는 행위를 기도라고 하는 거네요? 그리고 이것이 맞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뜻이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거네요. 라고 하나님께 원하는 걸 기도라고 하니까. 그걸 우리가 지금 수요일에 주기도문에서 배우고 있잖아요. 정확히 그 얘기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일들. 그런데 마땅히 그 빌 바를 우리가 모른다는 건 뭐예요? 그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흘려줄 수 없는 상태. 그런데 그들은 빨리 그걸 깨달아 그 진리를 흘려줘야 그것에 의해 이 자연의 존재 목적. 이 아래 것들의 역할, 그리고 왜? 이러한 사건들과 상황들은 이렇게 일어나는지를 누군가 얘기를 해줄 거 아닙니까? 그게 아들의 일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성령은 오셔서 그 일을 돕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호 푸뉴마’가 오더니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대요. 어떤 연약함? 마땅히 뭐를 깨달아 뭐를 흘려줘야 될지 모르는 그 '프로슈코마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 연약함. 그걸 도와준다는 거예요. 성령의 역할이 그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뒷 부분을 원문으로 한번 보자구요..
‘호 푸뉴마 휘 페렌팅카로 휘 페렌에고 스데낭모스 알랄레토스 ’ 거든 요. 자, 이거 보시면 이 호 푸뉴마‘ 가 성령이에요. 말씀이에요. 우리 배웠잖아요. 요한복음에서. 요것이 우리를 도와요.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데 어떤 연약함을 돕느냐 하면 우리의 연약함.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그 연약함을 도와요. 그런데 어떻게 돕느냐 하면 성령이 알랄레토스’ 이게 말 할 수 없는, ‘스데낭모스’ 탄식. 이렇게 번역이 됐죠? 요 ‘알랄레토스’가 뭐냐 하면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갔다 와서 뭐라고 해요? 내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그러죠? 인간의 말로는 말 할 수 없는 거. 고 단어에요. 이게. ‘알랄레토스’. 삼층 천이 뭡니까?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 주신 게 뭐냐 하면 성전이에요. 모세보고 이 시안대로 지어라. 이거 하늘이야. 고게 뭐라 그랬어요? 그 성전이? 땅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 창세기에서 배웠잖아요. 땅이에요. 이 세상. 요거를 나는 하늘의 모형으로 주는 거야. 라고 했을 때, 고게 첫 번째 하늘이에요. 두 번째 하늘은 그게 말을 못하니까, 말하는 성전으로 예수가 오셔서 내가 성전이야!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그게 두 번째 하늘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하나님 나라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너희 Among 가운데에 있다, 라고 이야기 한다니까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못 알아먹고 죽여 버리네? 그러면 세 번째 그 하늘을 설명하는 어떤 분이 또 와야 되지요? 그걸 성령, 그리스도의 영, 호 푸뉴마라고 한단 말에요. 호 푸뉴마.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뭐를 알려 줘야 돼요? 사람의 말로는 말을 할 수 없는 그것을 ‘스데낭모스’, 호흡. 호흡이라는 건 여러분 히브리어에서 요 ‘해’ 라는 단어 있죠? 해. 붙으면 ‘헤트’ 이고 떨어져야 ‘해’ 인데요. 요 ‘해’, 요게 호흡, 소리, 숨 이런 말인데 호흡, 숨,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없어지죠? 그래서 자명종 시계를 그릇에다 넣어놓고 공기를 쭉 빨아버리면 소리가 없어집니다. 호흡, 이거는 말, 소리 이런 말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스데낭모스’ 는 말, 너희들이 말 할 수 없는 그 말을 말 할 수 있는 말로 주시는 거. 그 일이 호 푸뉴마,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에요. 그거를 이렇게 번역한 거예요.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간구하시느니라. 라는 이 단어도 중재하다, 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분이 중재하셔서 말할 수 없는, 너희들이 말 할 수 없는 그 진리를 말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그 피조물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아래 것들을 진리로 이해하고 깨달아 설명해주죠. 그래야. 그 문맥이 이해가 가세요?
지금 처음 와가지고 듣는 분들은 무슨 소린가 그럴 텐데. 그거를 여러분이 문맥을 따라 잘 이해를 하셔야, 성경은 그냥 아무데나 이렇게 뚝뚝 끊어서 거기에서 무슨 자기가 좋아하는 단어나 교훈들을 끄집어내어 그걸 행하는 데에 쓰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진리를 설명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구절은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서 엉뚱한 기도를 해도 성령이 대신해서 탄식하며 기도해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이 원하는 걸 그냥 네 맘대로 구해. 이런 말이 아니라고요. 대부분 거기에 쓴다고요. 이 구절들을 . 그게 아니라 여전히 꼬리의 힘으로만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담긴 진리의 메시지를 그 진의대로 말하지 못하는 자로 사는 것을 진리의 말씀을 보내어서 말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왜?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고 계시니까. 그 아들들이 나타나는 걸. 그물에 걸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니까 당신이 일을 하신단 말이에요. 그걸 선지 서에서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리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의 열심이 아니고.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그가 진리를 말하는 자가 되면 그 사람을 가리켜 새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는 거예요. 새 언약에 일컫는 그 새 마음. 내가 너희들 마음 바꿔 줄게. 새 걸로 바꿔 줄게. 깨끗이 닦아서 다시 줄게 이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그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진리를 갖지 못한 그이는, 그들은 마음이 없다. 그래요. 그 마음이란 단어 자체가 ‘카르디아’ 심장이란 단어하고 똑같은 거예요. 죽은 자란 뜻이에요. 마음이 가졌다는 건 산 자란 뜻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가 다 마음이 있다는 이런 말, 이런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래서 바로 다음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나오는 거예요. 감찰하신다고 하니까 뭐 감찰 이런 거 생각하셔 갖고 조사하시는 이가,,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감찰이라는 거는 ‘에루나오(?)’ 찾으신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 그가 진리를 알아 자연을 이렇게, 이 아래 것들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가 마음을 가진 자가 되죠?
하나님은 ‘에루나오’ 그 마음을 가진 자를 찾으셔.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 마음을 하나님이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시니까 생각으로라도 죄 짓지 마! 그 생각을 내가 어떻게 의지대로 움직이느냐 고요. 말이라고 하면 다 말인 줄 아세요? 말도 아닌 말을 하고 있어. ㅎ 그렇잖아요. 그걸 어떻게 하라고 그걸 그 따위로 얘기하느냐고요. 생각으로라도? 생각이 내 의지에 따라서 막 떠오르느냐고요? 그 찾다, ‘에루나오’ 라는 단어는 말을 걸다, 대화하다, 부르다는 뜻도 가지고 있어요. 이 단어가 ‘레마’ ‘레우’에서 나온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찾는다는 거예요? ‘레마’ 로 말을 걸어 얘가 마음을 갖고 있네? 아니네? 이렇게 찾는 다는 거예요. ‘레마’로 말을 걸어.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보내서 당신의 아들들을 찾으세요. 그 말씀에 걸리고 부합하는 자가 아들이 되는 거예요. 꼬리가 잘린 자인 거예요. 그게 성령의 일하심이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여러분이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다는 것을 어디 있어? 어떻게 내가 인식할 수 있지? 하면서 내 감정이나 내 삶속에서 나타나는 행위 속에서 변화된 어떤 삶속에서 자꾸 찾으려고 하면 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복음을 이제 알았다는 건 나타나 인식되는 내 감정이나 나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 것들은 다른 종교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 수 있어요. 아니,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삼 천배, 만 배하고 내려오면 뿌듯해서 내려온다니까요. 행복! 몸은 힘들지만, 그렇게 내려와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한 삼사 개월 정도 다리의 뻐근함이 가실 때 까지는 그걸 생각하면서 조심조심 살아요. 변화된 삶을 삽니다. 여러분이 기도원에 한 번 갔다 오면, 3박 4일 갔다 오면 한 2주 효과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러한 감정이나 그러한 내 삶속에 변화된 행위나 이런 것에서 자꾸 내가 진리를 안 자야? 모르는 자야? 아우, 그럼 나는 머리로만 아는 거네? 자꾸 이렇게 가다보니까 뭐 서머나 교회는 그냥 성경지식만 배워갖고 전부 머리만 큰 기형아들만 있어. 이런 소리, 엉뚱한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그럼 가슴으로 내려온 건 어떻게 증명해야 되는 거예요? 도대체가?
여러분이 그걸 깨달아 알아, 그렇죠.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자원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 카리스를 나에게 부어주시는 거고 그걸 ‘아가페’라 그러고 그걸 받아야, 그걸 생명으로 받아야 나는 비로소 존재가 되는 거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죠. 라고 깨달아 알았을 때, 그 사람을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이후에 그 사람의 어떤 감정의 기복이나, 아니면 감정의 변화,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의 변화는 사람의 기질이나 환경에 따라 다 달라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어떤 수준을 정해놓고 왜 저게 안 나타나지? 그런데 그 정해놓은 게 고작 간디나 법정이나 성철이나 이런 수준이라니까. 그것까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산다고 생각을 해요. 그럼 그분들은 천국 간 겁니까? 그렇게 살아서? 타종교인들이 그런 건 더 잘 한다니까요.
복음은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라,,,물론 우리가 자아가 부인이 되고.,,이 부인 된다는 것도 또, 그래 내가 부인 됐으니까 이제는 누가 뭐라 그래도 나는 시큰둥, 그래그래 뭐, 니 맘대로 하세요, 이게 자기부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아냥거려요. 일부러 막 약 올린 다음에 너 자기부인 됐다며? 그런데 너 아직도 파르르 떨어? 그래 파르르 떠는 이 나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 이게 자기부인이지. 그걸 꾹 참는 게 자기부인이 아니라니까요. 뭘 가르쳐줘도 전부 거꾸로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는 그걸로 확인을 하려고 해요. 나는 자기부인이 된 사람인가? 이 머리로 배운 게 지금 가슴으로 내려와 있나? 어디? 어느 가슴? 무슨 마음을 찾느냐고요? 어디에서. 그걸 알아 그래요. 그 하나님, 전부. 나는 낫팅. 이거 가지면 그 사람이 마음을 가진 자에요. 그걸 왜 자꾸 감정에서 참으려고 해요? 자기감정에서? 원래 우울질로 태어난 사람은 그거 알고도 우울해요. 원래 낙천적인 사람은 개차반으로 살면서도 그냥 굉장히 행복하게 살더라고. 그런 거로 확인하려고 하지 마요. 왜 진리로 시작하여 너희들이 율법으로 마치려느냐? 왜 육체로 마치려느냐? 왜 감정이나 나타난 행위로 그걸 자꾸 확인하려고 그래?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아무튼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들에 의해서 모든 피조물이 전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재해석 돼요. 우발적으로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장중에서는. 적어도 진리를 안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그렇게 보여야 된단 말에요. 그래서 그 다음절이 ‘프러데시스’, 그러한 목적에 의해, 그러한 뜻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자, 그 하나님을 ‘아가파오’, 아! 그분이 진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 거구나 라고 알아 그 사랑을 하나님, 이게 사랑입니다. 라고 그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그 자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러거든요. 그 ‘아가파오’ 할 수 있는 그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된다. 그 선이 ‘아가토스’ 예요. 여기에서 모든 것이 헬라어 ‘파스’라는 거예요. 그거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콜’ 이거든요. 이 헬라어 ‘파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이라고 이렇게 쓰고 한글로도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 아람어에서 온 거겠죠? 그죠? ‘콜’이에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아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전환해준 하나님의 것. 그게 아래 것이에요. 우리 것. 그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걸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 우리에게 그 하늘의 것을 가르치기 위해, ‘라메드’, 가르치기 위해서 ‘카프’, 위의 것으로 전환해준 모든 것을 ‘콜’이라고 읽고 이걸 모든 것! 이라고 읽는단 말에요.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이 되어, 이건 나중에 저 창세기 셋 째 날로 가면 그걸 ‘모은다’, 라는 말로 쓰는 데,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이 된다. 선이 된다, 그랬을 때, 자 ‘아가토스’ 라는 선과 헬라어에는 ‘칼로스’라는 선이 있어요. 그런데 이 ‘아가또스’는 뭐냐 하면 진짜 ‘선’ 있죠?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 선. 그래서 하나님이 모형으로 밖에 줄 수 없는 그거, 그 묵시 속의 그 하늘, 거기는 어떤지 우리가 추측도 할 수 없고요. 그래서 성경에서 그렇게 거기에 대해서 묘사를 안 해놓고 있는 거예요. 추측도 하지 말라고. 그러나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땅이 있으니까 거기 하늘이 있는 걸 알아요. 그래서 그 눈에 보이는 하늘을 텅 비어 놓은 거예요. 어디에 하늘이 있어? 파란 하늘, 뭉게구름 떠다니는 하늘? 그 하늘이 어디 있어요? 없죠? 그 하늘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걸로 안 만들어 놓은 거예요. 땅이 있으면 거기 분명히 있다, 하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하늘의 것, 그 선, 이게 ‘아가토스’인데 그 내용이죠, 그죠? 선의 내용. 그 진짜 그거. 그거를 이 땅에 그 선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 아래 것으로 가르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그런 것들이 ‘칼로스’, 선이라고 그래요. 그럼 이 선에는 뭐가 있어요? 성전, 성경, 예수, 세상, 나 이게 다 눈에 보이는 거고 감지가 되는 거죠? 오감으로. 그러면 이거는 다 선하잖아요. 율법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율법이 선하지. 왜 나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나 또 거기에 갇히면 죽어!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에요. 이거는 그 선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기 때문에 선이야, 칼로스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 칼로스, 아래의 것으로 그 위의 것을, 그렇죠? 이걸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다 불태워버려야 되는 거죠. 이건 영원한 게 아니죠.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거죠. 라고 알아서 이것을 알면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 선이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아래의 이 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말하는 성전, 성경, 율법, 나, 세상. 이게 다 들어가 있다고요. 그런데 어디서는 세상과는 절대 사귀지도 말아~. 너희 율법에 빠지면 죽어! 이 육신은 죽어야 돼! 이렇게 막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런데 이것으로 이 선을 알았으면 이건 나쁜 거예요? 안 나쁜 거예요?: 이게 왜 나빠요? 이걸 통하여 나에게 이걸 알려줬는데. 그죠? 그거예요. 이 ‘파스’ ‘모든 것’이. 이 모든 것, 이건 나에게 ‘아가토스’를 알려주려고 하나님이 주신거야. 그렇게 알게 되면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서 나오는 거예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사람은 항상 선, 악.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모든 걸 선, 악으로 분별하여 판단하게 돼 있어요. 이거 좋은 거, 나쁜 거, 잘 생긴 거, 못 생긴 거. 추한 거, 이쁜 거. 어두운 거, 밝은 거. 그걸 좌우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거를 죄, 의, 악, 선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한다고요. 성경이요. 그런데 한번 보십쇼.
의인은 뭡니까? 선은 뭐예요? 하나님이 말하는 의와 선. 몰라요. 우리는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래의 것. 아래의 충만한 모든 것, 이것을 우리에게 죄로 주세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날 때 죄인으로 온다는 건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빛이 왔는데 세상이 온통 어둡더라. 죄라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그 죄는 나쁜 죄가 아니란 말이라고요. 창세기 1장1절부터 나오는 거에서 배웠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빛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그 깊음, 아래의 것, 그 뭘 주시는데 그걸 우리가 흑암, 호쉐크라고 하자.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어두움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그 어둠으로 이게 뭔지를 알았으면 그게 ‘오르’, 빛이잖아요. 그것이. 그죠? 그걸 빛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러면 빛과 어두움은? 같은 거네? 그러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래의 이 죄를 통하여 죄인으로 난 여러분을 통하여, 야! 이게,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구나, 이건 하나님 앞에 절대 가지고 갈 수 없는 거구나, 라고 깨달아 알았어요. 그 알은 걸 우리가 ‘의’라 그래요. 그런데 그거는, 이 의라는 건 죄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디카이오수네’, ‘짜다크’. 의라고 하는 거지 원래 이 의라는 것, 그건 우리가 모른단 말에요. 그러면 이 죄를 통하여 이 의를 안 이에게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이 그걸 나에게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이 이걸 나에게 주셨지! 라는 걸 깨달으면 그에게 있어서 이 죄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가 없는 이에게 있어서 죄의 상대적 개념인 의는 뭐냐고? 없는 거예요. 그냥 그것,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은.
그러면 그걸 갖다가 죄와 상관없다, 해서 용서, 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죄 몇 가지를 용서해주고 없는 걸로 해주는 게 용서가 아니라 죄와 아예 무관한 자로 만들어 주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이거를 알면 이걸 아는 거예요. 그러면 요 악이라는 걸 통하여 선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 아, 이게 아닌 게 이거구나, 라고 알았으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악이라는 거. 이 선으로 행하는 징검다리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네요. 이 사람이 선악과 안 먹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런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죄인으로 어둠 속에 던지는 거예요. 그게 ‘카라’ 라는 단어라고 그랬잖아요. 네? 부르시다. 너희들을 어둠으로, 흑암으로 부르셔. 왜? 빛을 가르쳐 주려고. 그렇게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이런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렇게 해서 똑바로 서버리면 그 사람을 ‘쿰’이라고 그래요. 많이 들어봤죠? ‘쿰’. 선교단 이름도 있고 여러 단체들이 ‘쿰’ 이거 많이 쓰는데. 좌도 없고 우도 없고 그냥 무관하게 그냥 똑바로 서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로 서다. ‘쿰’ 이라 그러고 이거를 자, ‘이스테미’, 여러분 많이 들어봤잖아요? 그죠? 똑바로 서다. 헬라어로 이렇게 쓰고 그리고 여기에다가 ‘아나’ 라는 단어를 붙여가지고 ‘아나스테미’가 되면 이게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여러분이 좌 우 선 악 죄 의, 여기에서 벗어나서 이거는 이거를 설명해주는 거지. 저건 이걸 설명해주는 거지, 라고 알게 되면 그를 ‘아나 이스테미’, 위로 똑바로 선 자, ‘이스테미’ 라고 하고. 이 ‘이스테미’ 라는 단어에서 ‘스타우로스’ 십자가, 언약의 기둥이란 단어가 나온 거라고 했잖아요?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쿰’, 십자가로 기둥으로 똑바로 선자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심플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거기에서 풀려나오면 되는 거예요. 뭐로? 말씀으로. 말씀. |
주님께서 성전 마당에 앉아 계실 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어떤 여자가 그 앞에 서요. 하필 거기가 성전 마당이에요. 하나님은 주님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항상 성전이나 회당에서 전하게 하셨어요. 그리고 어떤 표적을 행할 때, 길거리에서도 행했다, 집에서도 . 했다, 하는데 그 집이라는 게 전부 ‘오이키아’ 성전이에요. ‘오이코스’ 오이키아‘. 그 앞에 관사가 붙어서.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율법으로 한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거예요. 율법이 이게 죕니다. 이게 악입니다. 라고 지금 정죄를 하고 있다고요. 그 때, 주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걸 원문에 맞게 번역하면 ‘ 너희들의 죄 없음을 향하여’에요. 죄 없는 자가, 가 아니라. ‘너희들의 죄 없음. 그걸 향하여 어떤 돌이 이미 던져졌는데.’ 이거예요. 거기에 던지다, ‘발로’가 과거 명령형이에요. 우리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기도문의 모든 동사가 전부 부정과거 명령형이죠? 그건 뭐라 그랬어요? 과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제라고 그랬잖아요. 이미 일어난 거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앞으로도 반드시 일어날 거.
그러니까 그 돌은 이미 던져졌는데, 이 죄를 향한 돌은 이미 던져졌는데, 이런 말이에요. 그 돌은 뭐라 그랬어요? 그 돌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돌에다가 새겨주신 최초의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 진리로 오시기 전의 예수가 그 돌로 오잖아요.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항상 그 메시아를 돌, 돌, 산 돌, 뜨인 돌, 무슨 돌, 모퉁이 돌, 주춧돌. 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돌이 던져져서 깨져야 돼요. 그 돌이 심판을 받는 거예요. 사실은 죄 때문에. 그리고는 그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간음이라는 그 죄는 그 던져진 돌에 의해 이미 용서된 거네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손에 돌을 들고 왔다. 율법이 되어서 이 여자의 죄를 지금 징벌하기 위해 징치하기 위해 돌을 들고 왔는데 돌은 이미 던져졌는데? 그 돌이 이 예수잖아요. 지금 성전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이 예수. 내가 던져졌어. 그리고 던져질 거야. 십자가에. 그런데 내 앞에서 율법인 너희들이 죄를 가리켜 죄라고 지금 하고 있는 거야?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걸 죄 아님, 죄 없음 이라고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왔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돌은 이미 던져졌는데!
간음이 뭐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신랑으로 주신 그 진리의 말씀. 남편, 그 남편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죽어야 하는 남편, 율법으로 받아들여 같이 살아버리면 그게 간음이잖아요. 하나님은 그 간음을 설명하기 위해 정실이 아닌 다른 외간 남자와 간음을 하는 여자를 시청각교재로 쓰고 계시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진리를 아는 이들은 그걸 보고 그렇지, 내가 이렇게 살았지. 내 손에 들려있는 이 돌, 이것이 바로 그 증거지. 라고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아직 그 율법을 남편으로 갖고 있기에 내가 저 여자를, 저 죄를 이 돌로 찍으려고 하고 있지? 그 돌은 이미 던져졌는데, 라고 깨달아 알면 되는 거예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두 번째 내려오는 돌 판이 ‘나’라는 그 궤, 조각 목으로 만들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데 금으로 덮어서 그 안에 말씀이 들어가니까 그걸 뚜껑으로 덮으니까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잖아요. 그게 법궤잖아요. 시은 좌잖아요. 내가 그런 자라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해서 용서받는 거지. 그렇게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뭐예요? 두 번째 돌판. 그리스도의 영, 그게 말씀으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쓰시는 거예요. 그러자 그 앞에서 율법의 짱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율법이 진리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 사라져버려요.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돌아봐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니? 당연히 없죠. 그 여자가 깨달았어요. 당연히 없죠. 왜? 이 여자도 그 바리새인들하고 똑같은 여자예요. 율법에 의해 그래요 내가 죄인 맞아요. 하고 온 거거든요. 여러분 제가 만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멈춰버리면 안 돼. 이 여자 되는 거예요. 유죄의식, 거기에 빠진 자 되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죄를 없이 해주셨습니다. 까지 가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만날 죄인이에요. 죄인이에요. 이러고 앉아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깨달아 알고 주님에게 말해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정죄합니까? 두 번 째 말씀이 나에게 왔는데.
모형이에요. 상징이란 말에요. 다.
그 때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아. 내가 너의 죄 없음을 위해 왔어. 그런데 내가 왜 너를 정죄해? 그런데 네가 스스로 죄 있다, 하고 그 선악 구조, 율법 아래 갇혀서 스스로 죄 있다, 하고 너를 자꾸 죄인으로 몰아부쳐 버리면 나도 너를 구할 수가 없어.
바꾸어 말 할게요. 내가 한 일. 그걸 진리로 깨달아 안 자는 자기를 이렇게 율법 아래에서 징치당할 자로 여기지 않아.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 이제 나가서 다시는 어두움 속에 다니지 마. 그래요. 어둠이 뭐라 그랬어요? 우리 배웠으니까 인제. ‘호쉐크’ 가. 아래의 것, 율법.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 도덕 윤리 그것에 의해 죄, 의, 선, 악. 이런 거 판단하고 그러지 마. 그게 죄야! 그래요. 다시는 죄 짓지 마. 그래놓고 어둠에 다니지 마. 그게 죄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또 간음하면 죽여 버릴 거야. 이게 아니라. 요한복음 8장 10절 보세요.
요 8 :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No body! 그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2.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둠에 다니지 마. ‘호쉐크‘로 너희는 ’오르‘ 그 빛을 안 자니까. 우리에게 하는 말이에요. 이 여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요. 성경의 독자는 성도밖에 없으니까.)
그 이야기가 창세기 둘 째 날 창조기사 속에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해석한다는 건 불가능이에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설교예화를 구약성경에서 끌어다가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창세기 1장 6절 보세요.
창 1 :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이게 무슨 얘기인지 한번 보세요. 6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물로, ‘마임. 마임’ 나오죠? 물로 물을 분별하게 하시기 위해서 물 가운데 궁창이라는 걸 만들어 놨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화면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아마르’. 이건 우리가 모르는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아마르’가 나오면 요 앞의 하나님, 진짜 그 하나님. 엘로힘은 우리에게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계시해준 고 만큼을 엘로힘이라고 그러지 *그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생략 되어 있는, 주어가 생략 되어 있는 그 하나님이 생략 돼있는 거죠. 하나님이 말씀 하세요. 뭐라고? 엘로힘으로. 너희들에게 *그 하나님을 소리로, 진리로 전할 수 있는 자로. 그 능력을 주기 위해.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라카’, 궁창을 ‘타베크’, 가운데에 있게 하세요. 물 가운데에.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되잖아요. 그죠?
하나님이 위의 물, 위의 물은 없어요. 그런데 아래의 물로 위의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아래 것을 바다, 물, 깊음 이런 걸로 쓰니까. 이제 우리가 위의 물이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물 가운데에 -가운데가 뭐냐 하면- 요걸 ‘타베크’라 그래요. 요기를.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걸 줘야 되잖아요. 그죠? 물론 요거 안에 이 아래 것 전체가 다 들어있어요. 요걸 알면 산천초목이 다 성경이라니까요. 말씀이라니까요. 석가성불 삼천초목 동시성불. 모든 게 다 말씀이에요. 물론 다 알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준 거 있죠? 성막, 성경, 성전, 세상, 나, 예수. 뭐 하여튼 아래 것, 눈에 보이는 거, 인식되는 걸로 줬단 말에요. 그러면 요걸 가운데 ‘타베크’ 라 그래요. 요걸 알게 하기 위해 요 아래 걸로 준 거.
그러면 요거를 예전에는 성전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그러죠? 내가 성전에 있으니까 나를 만나러 그리로 와라. 그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갇혀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또 솔로몬한테 그러잖아요. 어찌 내가 사람이 만든 그 집에 들어가 있겠니? 그 말이 아니라, 이 성전을 통하여 내가 나를 계시하고 설명할 거니까. 희생 제사를 통하여, 물두멍을 통하여,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할 거니까, 여기에 나 있다. 이리로 와! 그랬죠? 인간과 하나님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접촉점을 ‘타베크’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요걸 가운데라고 그래요. 물과 물의 가운데에 뭘 만들어 봤다 그래요? 궁창을 만들었다 그래요.
자 궁창이 뭐냐 하면, 뭐예요? 궁창이? 시궁창? 시궁창은 알아도 내가 궁창은 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그러니까 모르면서 그냥 읽은 거예요. 믿은 거예요. 그죠? 이 ‘라키아’ 라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원래 이 단어의 뜻이 뭐를 금 같은 걸 막 망치로 두드려 갖고 얇게 펴요. 그 다음에 뭔가를 덮어. 그리고 얇게 펴서 덮을 뿐만 아니라 뭐를 기록할 의도로 얇게 펴. 그럼 그걸 궁창. ‘라키아’ 라 그래요. 한번 보세요. 성전의 모든 기명은 전부 금으로 다 쌉니다. 얇게 펴서. 고걸 ‘라키아’ 라 그래요. 그리고 이 성전은 하나님의 나라, 그 진리를 설명하는 기록하는 역할로 이 땅에 주어진 거죠. 말을 못하니까. 그래서 성전을 ‘라키아’라 그래요.
그러니까 모세를 통하여 성전, 성막을 주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에 그 ‘라키아’의 개념이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위의 물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아랫물과의 이 교집합인 요 ‘라키아’를 줄게! 그러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요걸 통하여, 요거는 물론 이걸 다 포함한다고 그랬어요. 요걸 통하여 요걸 알면 되는 거네요? 그죠? 그걸 뭐라 그런다고 그랬어요? 고걸 ‘바달’이라고 그런다고 했잖아요. 요걸로 요걸 분별해 알아. 그러면 그걸 ‘바달’이라고 그런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 ‘라키아’를 아브라함은 가운데를 쪼갰다. 그러죠? 그 때도 이 ‘타베크’예요. 고 단어가. 똑같은 단어에요. 궁창이 만들어진 그것을 사람의 그 ‘에피뚜미아’ 두 마음으로, 율법으로 이렇게 잘라버리면 뭐예요? 그게? 너랑 나랑은 이혼이야. 그거죠? 그죠?
그래서 하나님이 ‘카라트’, 건너가 버려요. 잘라버리죠. 그리고 요거를, 요 분리, 요 잘라냄을 ‘케리투투’. 이혼증서라고 써요. 이혼이라고 해요. 네가 여길 이렇게 잘라버리면 그러면 너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어. 왜?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른 존재거든. 그런데 네가 지금 네 힘으로 나에게, 나를 기뻐할 제물을, 제물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는 건 네가 지금 감히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거 아니야? 네 것으로. 그럼 너는 지금 신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처럼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 아니냐?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 건너가야 돼요. 그걸 ‘에베르’ 그래요. 건너가다. 하나님이 건너가 버려요. 건너가 버리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졸지에 이렇게 떨어져버리는 거예요. 건너가고 이렇게 잘라 놓은 걸 하나님이 언약이라고 그래요.
이 ‘카라트’가 언약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무슨 언약이에요? 너랑 나랑은 구별된 존재야. 구별된 존재니까 너는 이 아래의 것, 이 세 번째 제물로 도대체 위의 것이 뭔지 알아먹어. 그거 자르지 말고. 알아먹으면 그러면 네가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네가 나와 다르다는 걸 알면 그게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야. 라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계속 제가 반복하여 설명해드렸는데.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세기가. 그러면 보세요. 창세기 이게 ‘바달 벤 마임 마임’ 아래의 물을 위의 물로 ‘바달’, 분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운데에다가 궁창, ‘타베크’. 가운데에다가, 물들 가운데에다가 궁창, ‘라키아’라는 것을 있게 하셨다. 뭐가 이게 어려워요? 그리고는 그걸 위의 물과 아랫물이라고 하셨어, 가 7절이에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카라 엘로힘’ 부르셨어요. 하나님께서. ‘라카아 샴마임’ 하나님이 그 하늘이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거기에 물이 있다. ‘쉬 겜 마임’ 이니까.
그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요 ‘라카아’ 라는 고 성전, 거기에다가 이 하늘을 ‘카라’ 불러들이셨어. 부르셨어. 그리로는 ‘에레브’ 그것이 저녁, 저녁이 뭐예요? 덮어, 깜깜해, 몰라, 이런 말이라고 했어요. ‘에레브’가. 그죠? 그게 저녁이 되며. 왜? 아랫물은 우리가 봐서 모르는 거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호 푸뉴마를 보내서 깨닫게 해주면 아침, 깨어지다, 밝히 보다, 열다. 이런 뜻이죠. 선지 서에 보면 하나님이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신다, 라는 말이 이런 말이에요.
‘보케르’, 이렇게 하나님이 저녁으로 부르셔서 아침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 요것이 첫 번 째 날에서는 ‘에하드’, 통일이야. 그것이 하나라는 거야. 연합이라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어요.
두 번째는? 이게 짝이야. ‘쉐님’. 다시 한 번, 창세기가 기록될 때는 1, 2 이런 숫자 없었어요. 그러니까 짝. 그것이 짝이야.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면 그게 짝이라는 거구나. 둘이. 그러면? 짝이면? 그게 하나네요? 그러면 좌도 없고 우도 없네? 선도 없고 악도 없네? 어두움도 없고 빛도 없어요. 그 사람은 자유예요.
그렇게 위의 물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아래의 땅에 나타난 것으로 주신 모든 것을 오늘 분문이 뭐라고 그런다고? ‘파스’! 모든 것.이라고 한다. 그랬어요. 히브리어로는. ‘콜’이라고 쓴다. 그랬죠? 그럼 그 모든 것이 다 선이라는 얘긴데 내용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그 단어가 쓰인 곳이 창세기 2장1절이에요. 한번 보세요.
창 2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가 ‘콜’이에요. 그럼 천지와 만물은 ‘콜’. 다 뭐다? 선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라는 건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나쁜 거고 뭐가 좋은 거예요. 뭐가 아름다운 거고 뭐가 추한 겁니까? 거기에 갇혀 있으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힘들고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운,, 물론 거기서 한 순간에 벗어날 수는 없지만 올바로 알고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요. 하나님이 아래의 모든 거. 바다, 어둠, 깊음, 저녁 등의 것을 위의 것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서 아래에 묶이지 않고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자로 만들어서 하나님과 연합을 시키는 사역을 한단 말에요. 그게 호 푸뉴마, 성령의 일이야. 그게 너희를 돕는 너희의 연약함을 돕는 성령의 일이야~. 그게 너희를 돕는, 너희의 연약함을 돕는 성령의 일이야~. 이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위의 물과 아래 물이 나와요. 거기에 보면. 위의 예루살렘, 아래의 예루살렘. 위의 예루살렘은 사라와 이삭이라 그러고 아래의 예루살렘은 하갈과 이스마엘이라고 그래요. 그래놓고 두 언약이라 그래요. 두 언약은 구약과 신약입니다. 옛 언약, 새 언약. 구약 없이 신약 있을 수 없고, 신약 없이 구약 있을 수 없죠. 그러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 없어도 된다?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걸 통하여 이삭을 깨달아야 그게 은혜구나! 라고 아는 거지. 이스마엘고 하갈 없이 사라와 이삭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로 이삭을 알면 돼요. 하갈로 사라를 알면 된다니까요.
첫 째 아담으로 마지막 아담을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첫 째 아담은 모형이구나. 삭제. 그럼 내가 왜 첫 아담 속에 들어가 있는 자가 되느냐고요?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그걸 구원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러한 현실을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벧후 3 :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땅이, 땅이라는 건, 물을 설명하기 위해 물에서 나와 물로 이룬 거지. 땅으로 그 물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거야. 그거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거 모르면? 아래 물은 좋은 거. 나쁜 거. 위의 물은 좋은 거. 이렇게 갈라버리게 되면?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사람들은요 그 죄를요 이기려고 이기려고 이기려고 하다가 그 죄에 죽어요. 그렇다니까. 왜 괴로워해요? 다른 사람들의 나를 향한 판단 때문에 사람은 죽기까지 해요. 내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나의 이 오명을 죽음으로라도 벗으리라. 사람은 그 죄를 벗기 위해 죄로 죽어요. 그 아랫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걸로 윗물,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 그 사랑, 그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내가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그것 때문에 죽는다니까요. 그걸 노아의 홍수가 가르쳐주는 거예요. 아래의 물은 위의 물, 그걸 설명해주기 위함인 거야. 그래서 하나님이 비를 내려 봤어. 그러면 그 비를 맞고 내가 기식하는 육신을 죽여 버리면 돼요. 아니, 그 비가 나를 죽일 거라고. 그러면 나는 그 비를 맞아 그 물로 죽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그로 살아나는 물위로 동동 뜨는 거예요. 창세기 7장 11절 보세요.
창 7 : 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육 백세, 여섯 째 날의 백. 완성을 이루는 거예요. 그리고 둘, 2, 짝이라는 거, ‘쉐니’. 그리고 그 달 십칠일. 칠을 십으로 완성하는 그러한 모형이에요. 그래서 굳이 날짜까지 써놓는 거예요. 여기에다가.)
-그 날에 큰 깊음
(이게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의 그 깊음이에요. 이게 터져버렸네 이게 터져버리며)
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사십, 이 세상이니까. 광야.)
그러면 그 비를 맞아 내 육이 죽으면 열린 하늘로 하나님과 통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 죽겠다고 거기서 버티다가 보면 그 물이 나를 죽이는 거라니까요.
이 샘이 터지다, 라는 단어가 홍해가 갈라질 때, 요단이 갈라질 때 쓰였던 그 갈라진다. ‘바카’ 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에요. 그러니까 홍해가 갈라진 거, 양쪽으로 물이 갈라지죠? 그리고 요단이 양쪽으로 갈라진 거나 위의 물과 아래물이 이 ‘타베크’, ‘라카’를 중심으로 갈라진 거나 하늘의 그 깊음이 물이 터져버려서 이렇게 모든 기식하는 걸 다 죽여 버리고 어떤 택한 자 여덟 명만 살린 거나 다 같은 이야기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홍해가 갈라졌다. 물이 터졌다. 똑같은 단어를 쓴단 말에요.
그 터트리는 건 뭐예요? 이스라엘을 애급 군대로 그 물에 빠트려 죽여 버리고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로 살려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애급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홍해로 빠져 죽어. 가나안에서 보면 어떤 놈들이 살아 올라와. 거기서 빠져 죽은 건 애급 적 육신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라 까요. 그 나, 그 물로 내가 죽으면 돼요. 내가 죽는다니까 자꾸 또 뭐 어떻게 죽어야 돼?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고요. 잠언 3장 19절 보세요.
잠 3: 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20-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땅, 이 아래의 땅은 하나님의 지혜가 다 담겨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늘을 그 땅에 담아 명철로 세우신 거라고요.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 그 진리가 해양, 물을 터트려버리는 거. 이게 ‘바카’ 예요.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갈라지게 한 거예요. 왜? 말씀으로 살리려고요. 그러니까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더라. 그래요. 그걸로 죽으면. 진리의 말씀으로. 이슬하고 비는 항상 진리. 말씀을 상징하는 거니까. 그래서 홍해를 이스라엘이 물이 없는 마른 땅으로 걷는 거예요. 마른 땅, 물이 없음. 율법을 통하여 거기에서 죽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렇게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쉐니’. 짝인 거예요.
창세기 1장 8절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궁창으로 부르셨다. 그러죠? 그게 하나님이 하늘을 ‘라키아’, 궁창으로 ‘카라’, 부르셔서 그 궁창을 통해 하늘을 알게 하셨다, 라는 거예요. 그게 저녁이 되며, 저녁으로 불러 아침으로 만들어버리다. 그러는 거예요. 그 ‘쉐니’, ‘쉐니’가 ‘사마’라는 동사에서 나온건데 그게 돌아오다. 다시 하다. 이중으로 하다,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직접 하늘의 것을 못 쏴버리거든요. 여기에다가. 돌아오게 하사. 아래 것을 깨달아 위의 것으로 돌아오게 하세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탕자의 비유 아시죠? 거기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걸 알아요. 아는 자로부터 출발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지. 그러면? 그걸로 나는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갖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봤더니 나는 쾌락만을 쫓아 살고 있네? 내 육신의 쾌락. 그리고 뒤를 돌아봤더니 이 세상이 돼지우리라는 게 밝혀졌어요. 그리고 나와 함께 어울려 사는 이들이 전부 돼지야. 그리고 나와 전쟁을 하고 있는데 돼지가 먹는 돼지 먹이, 쥐엄 열매로 다투고 있어요. 아, 이게 뭐야? 이거는 절대 안식이 아니지. 이건 행복이 아니지? 이건 만족이 아니지? 라고 깨달았으면 그가 그것으로 죽었다. 고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에 가보면 15장에 가면 그가 주려서 죽게 된지라. 그래요.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그가 주려서 ‘아폴로미’,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고 해요. 원문은.
완전히 죽었다고 해요. 거기서는. 그렇게 깨달아 아는 걸 죽었다고 한다니까요. 우리 수요일에 배웠잖아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뭐로? 이 땅에는 내 이 영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라고 알아 사십일 광야인 이 세상에서 내가 본의 아니게 금식하게 되는 자로 살면 그걸 복이라고 해요. 그걸 주린 자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거예요. 그렇게 주린 자. 나는 여기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배를 불릴 수가 없어라고 알았어요. 그렇게 주리면 이 사람을 죽었다, 라고 해요. 그런데 그걸 복이라고 해요. 왜? 그렇게 죽어야 살거든. 그 단어가 그대로 쓰인 곳이 마태복음 10장 39절이에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가 ’아폴로미‘ 예요. 그 탕자가, 둘째 아들이 나는 잃었어. 죽었어.’아폴로미‘. 난 목숨을 잃었어. 이런 말이에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러면, 그렇게 죽으면 끝이에요? 다시 살아야죠. 그래서 바로 다음 절. 누가복음 15장 18절에 다시 일어나, 이렇게 시작해요. 그 다시 일어나가 아까 제가 설명하던 ’안이스테미‘예요. 위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 ’쿰‘ 이런 얘기.
그렇게 죽었더니 좌도 없고, 우도 없어. 이 세상의 그 돼지우리 거 같은 그 아래 것들을 통해 그 아버지의 나라, 거기에만 양식이 있어. 거기에는 품꾼들도 먹을 양식이 있어. 이거를 알아버렸더니 그걸 이 세상에서 죽었다고 그러고 그를 다시 위로, ‘안이스테미’, 부활한 자라고 표기를 한단 말에요. 성경이. 다시 살아나, 다시 일어나. 어디로 가요? 아버지한테 가야지. 이제. 어떻게 면목 없이. 내가 무슨 아들입니까? 아버지, 내가 아버지 집에 품꾼으로 살아도 괜찮아요. 왜? 거기 양식이 있는 거 이제 나는 아니까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한다? 그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에요. 그래서 가락지를 껴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찾는 아들은 그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거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데가 어떻게 보여줘요?
살찐 송아지. 세상의 것으로 살찌우려고 했던 이 육적 아들, 그 소의 아들은, 살찐 송아지는 죽고 거기에서 잔치가 벌여지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아버지와 진짜 살아난 아들이 관계를 맺어 연합되는 거예요. 그걸 돌아오다, ‘쉐니’ 라 그래요. 그렇게 나가서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 돌아오면 그걸 ‘접다’, 라고도 하고, ‘데칼코만’. 그러니까 아래 거나 위의 거나 같은 거.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쉐니’, 그게 짝이야. 그게 짝이야. 그러니까 성경이 뭐라 그러는 거예요? 아, 제발 나갔다가 와~. 그러는 거예요. 큰 아들처럼 나가지도 않고 그냥 나는 뭐든지 다 잘했는데요? 착하게 잘 살았는데요? 그런데 왜 아버지는 날 위해 송아지 안 잡아주세요? 그가 안 죽었는데 어떻게 잡아줘요? 그러니 나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뭔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너희들 죄 지으면 하나님이 벌 할 거야. 그거는 너희들이 도덕적 윤리적 그런 책임과 도덕과 의무는 반드시 너희들의 의지를 발동하여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전부 무거운 짐들을 지고 아이고, 그 영감탱이는 천국에 진짜 없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영감은 그냥 내가 힘이 없으니까 이렇게 져주지만 거기는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에요? 그 하나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다고 또 오늘 나가지 마세요. 한잔 하자. ㅎ ㅎ
나가봐야지,,,. 그러지 좀 말란 말에요. 다 제가 욕먹는 거예요. 그러면. 이 웬수들이 말이야ㅎ,,
정리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파스, 콜, 선, 아가또스 (이건 재료), 아니 그거의 모형’ 이에요. 나타남이에요. 그런데 그 모든 것으로 선에 이르지 못하고 그것을 선과 악이라는 것으로 나누어서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것에만 머물러 버리면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그러한 사람들은 그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 법 그렇게 좋아하면 그 법으로 심판해줄게. 그러면 끝장나는 거예요. 내 안에서 죄도 없어지고 선도 없어지고 좌도 없어지고 우도 없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그 좌와 우도 별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 인식이 되는 거예요. 다.
프로젝션이라고 하는데 내 안에 그게 없을 때, 그게 문제가 되지 않을 때, 내 밖에서 그게 나에게 인식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전부 모여 갖고 특히 여자들 말에요. 밥 먹으면서도 남 욕해, 빨래하면서도 남 욕해. 그놈의 전화비는 누가 대는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끊임없이 폭로당하고 있는 거예요. 내 안에 그거 있다. 그런데 저게 보이네? 저걸 마구 욕을 해서 내 안에는 그거 없다, 라는 걸 증명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 그 좌와 우가 없으면 그렇지 뭐,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럴 수 있어~ 이렇게 된다니까요.
어떻게 해서든지 저걸 벌을 줘서 나의 이 만족을 챙기리라. 그렇게 유치하게 안 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걸 유죄의식이라고 한다니까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그 여자가, 바리새인들하고 그 여자가, 간음죄로 잡혀온 여자가, ‘너 죄 있어’, 율법이에요. 이게. 그죠? 율법에 의해서 죄로 정죄된 거니까. ‘너 죄 있어’, 유죄의식, 그런데 나는 너 같은 죄 안 지었어. 그건 무죄의식. 이건 정확히 같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돌이 이미 던져졌는데? 하면 그거는 그것으로 그 위의 것을 깨달아 알라고 준 거 아냐? 그럼 뭐야? 죄가 뭐야? 죄가 뭐야? 의가 뭐야? 그거를 죄 무의식이라고 해요.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너 정죄하는 사람 있어? 아뇨. 나도 너 정죄 안 해. 그럼 너 여기 왜 있니? 죄가 뭐야? 물어보시는 거예요. 돌이 던져졌는데 죄가 뭐야?
성도는 진리의 말씀 안에서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자리에 굳세 서서 나타난 현상들을 선으로 깨달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존재일 수 없다, 라는 것을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으면 돼요.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마. 어두움에 다니지 마. 내가 이미 던져졌어. 돌로 너에게 던져졌어. 그리고 널 품고 죽었단다. 그걸 알면 네가 빛이야. 그러니까 너는 세상을 비추어라. 어둠이라 그래놓고 또 빛이라고 해요. 그거 알면 빛이야. 네 안에 그 생명 없으면 넌 어둠이지. 그러나 그거 있으면 네가 알았으면 그게 빛이야. 모든 것은 합력되어 선으로 가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무 나타난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너무 나타나는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가난, 장애, 외모, 학력. 불편하죠. 그러나 그건 못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지, 그게 못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로 위의 것을 알았으면 오케이~. 왜 자꾸 과거에 매여서, 그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내가 지금 더 나은 상황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미래에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과거에 매여서 아파해.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불안해해. 여러분은 지금을 사셔야 되는 거예요. 지금.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와서 이렇게 교제하고 있는 지금. 지금은 살만하죠? 요즘 말고 지금. 살만하니까 여기 앉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지금. 이 지금을. 과거와도 상관없고. 이미 돌이 던져진 과거와도 상관없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미래, 그것도 이미 내 현재로, 지금으로 끌어안아 지금 이 순간! 응? 지금 이 순간~~을. ㅎㅎ 열심히 그냥 지금, 지금, 지금 살다보면, 그러다 가면 되는 거예요.
왜 과거로 살고, 과거에 묶이고 왜 미래로 불안해하느냐고요? 지금 사시라니까. 너무 유명해지려고 하지도 말고. 유명이 뭐예요? 응? ㅎㅎ. 아 진짜 도울 김용옥의 흉내 대가는 저기에 계신데 내가 갑자기 도울 김용옥이 된 거 같은데. ㅎㅎ. 여러분, 한자가. 영국 학자들이 한자를 열심히 연구해보니까 한자는 전부 창세기 1장에서 10장까지의 내용을 갖고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공부해보니까 완벽해요. 창세기 1장에서 10장의 이야기를 갖고 한자를 풀면 다 떨어져. 그러니까 문자라는 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진리를 설명하게 위해 주신 거예요. 원래 이 한자가 동이족 거잖아요? 지금 중국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올챙이 문자 썼습니다. 동이족은 우리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 나주, 전남 나주 지방에 거기 왜국이라는 데가 있었죠? 그게 신라와 백제에 의해서 강 건너로, 바다 건너 쫓겨난 게 왜놈이에요. 그러니까 그들도 저 한자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한자가 하늘을 상징해요. 첫 글자가. 그래놓고는 땅의 어떤 존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존재는 요렇게 위로 서야 돼요. 두 이자가 원래 그래서 요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이루어져요? 세 번째 글자가 이거에요. 제단, 제물. 그러면 이로써 하늘, 사람, 땅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요것이 하나가 되면 이걸 왕이라고 해. 이것이, 글자가 이렇게 간다니까요. 그럼 한번 보잔 말에요. 제단에 제물에 하늘을 말하는 밭, 이 밭 전자가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원래가, 원래 요렇게 되어 있다고요. 이게 밭 전자가. 이게 뭐냐 하면 샘이라는 뜻이에요. 우물. 동산 중앙에서 우물이, 샘이 터져 사방으로 물러가는 걸 밭 전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 보고 너 밭 갈아, 밭 갈아서 뭐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성전이 뭔지 제대로 알면 너 사는 거야. 그렇게 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 밭, 성전에서 하늘을 말할 수 있는 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제단의 제물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네요? 그럼 그걸 복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한번 보잔 말에요. 여러분, 유(有), 라는 게 뭐예요? 있다, 있음. 이런 거. 나타난 거, 아래 것, 우리가 오늘 하루 종일 공부한 거니까. 나타난 거. 이게 있음이죠? 이걸로 우리는 없음을 알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이 있음으로 없음을 알아야 되는데 이 있음의 반대말은 아니 불자입니다. 여러분. 없음. 없을 무(無),가 아니에요. 이거는. 진짜 있는 건데 우리가 담을 수 없어 모르는 것을 無라고 한단 말에요. 그래서 무소유(無所有)는 이거를 가진 자들을 노자가 자기도 뭔지는 몰라요. 그 사람이 써 놓은 게 없어. 거기에 대해서. 그런데 이렇게 돼야 된다! 그랬어요.
이걸 가진 자, 그 하늘의 그 진리를 가진 자가 무소유한 자에요. 그런데 끝까지 내가 가진 거 이거 다 버리는 게 무소유야, 라고 한 건 죽을 때까지 그 소유에서 못 벗어난 거란 말에요. 그걸, 거기에서 벗어나서 이게 그거지 뭐. 라고 알게 되면 그까짓 거 뭐. 아, 장삼, 가사 장삼, 여러분 그거 백만 원도 넘어요. 굉장히 비싼 거예요. 목사들 가운이 비싸듯이. 그럼 그것도 없어야지. 그 무소유가 아니란 말에요. 그거는 끝까지 묶여 있는 거란 말에요. 그건 요. 그러면 뭘 입으면 어때? 누가 뭐 루이비똥을 갖고 다니면 어떻고? 그거 뭐? 왜 거기에 묶여 갖고 그걸 질투하고 시가하고 저걸 안 갖는 게 선이야, 도덕이야, 청빈이야 이 따위로 얘기하고 앉았느냐고요? 그게 뭔데요? 그게 너무 갖고 싶은 거예요.
자, 이 유로 요걸 알아야 되죠? 그런데 사람은 이 하늘을 자기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하늘을 하나님이 삐칠 별, 삐쳐, 아래 것으로 줘요. 그러면 그걸 달이라고 해요. 해를. 하나님이 *그걸 해라고 상징하시고 그걸 모형한 거, 반사체, 이건 발광체니까, 이게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는 밤의 세계에서는 이거 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실체는 아니라고요. 이게요. 그런데 이것이 이 해를 가려버리면 그걸 일식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해가 빛을 잃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이라니까.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모르고 이것으로 이걸 그냥 가려버려서 율법으로 알아버리면 이게 심판인 거예요. 그러면 자, 이 육, 이 아래 것. 이것들로, 불교에서도 그러잖아요. 색즉시공이요. 색은, 나타난 건, 그거, 그거를 이야기하는 거지. 공즉시색, 여기에 나타난 거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라고는 설명을 못해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의 그런 경전들이 진리의 그런 면모들을 담고 있어야 맞아요. 왜? 출발점은 하나여야 되니까. 비슷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라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해답을 신약으로 갖고 있는 거는 기독교 밖에 없단 말에요. 그러면, 이걸 갖고 아래 것으로 저녁을 말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래 것으로? 죽는 거예요. 그것이요. 그걸 알면.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유명함을 추구한다니까요. 우리는 이 없음, 이걸로, 그 진리로 그 저녁을 말 할수 있어야 돼요. 이 세상을 말 할수 있어야 된다니까요. ‘에레브’를. 그러면 그걸 아침이라고 그래요. 독해를. 그러면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렇게 유명해지려고 해. 유명한 게. 일부 때, 그 위대한 탄생? 거기서 지금 뭐 두각을 나타내는 홍동근이가 왔었는데 동근이가 가면서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자꾸 욕심이 생겨요. 오래 저한테 배웠으니까. 그리고 이 메일을 한 열 페이지씩 써서, 깊은 아이에요. 그 애가. 자꾸 욕심이 생긴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나라도 생겨. 꼭 일 등해. 그리고 헌금 많이 해. ㅎ
이 세사에서 그렇게 유명한 자 되고 뭐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있음의 세계에 묶여서, 우리가 육을 갖고 있는 한 추구를 하게 되죠. 그걸 갖고 싶어요. 유명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알고 가자는 거예요. 알고. 이렇게 되면 멸망이라는 거예요. 그게 불편해야 돼요. 그러니까 저한테 와서 상담한 거 아니에요? 목사님 불편해요. 이것이. 사람들이 그냥 몰려들어서 사인해달라고 하는 이런 게 불편해요. 불편해요. 그럼 돼요. 그럼 이것으로 이걸 알면 이거와 이거와도 상관없는 자가 그냥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선악으로 나눠 갖고 아, 나는 이 세상을 위하여, 인간들의 민주, 평화, 통일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라.
얼마 전에 그 아웅산 수치 여사. 버마의 민주화투쟁을 위해서 이십년간 가택연금 되었다가 노벨평화상 받으러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불교가 자기를 이렇게 견디게 해줬대요. 나에게 이렇게 힘 있는 자로 살게 만들어 줬대요. 아니, 불교도 사람을 그렇게, 그런 존재로 만들어 주더라니 까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잊고 사는 그 자가 악이다. 그래요. 그런데 민주주의 아니라니까요. 사람의 뜻을 모아 그것으로 나라를 세워버리면 그게 곧 사탄의 나라에요. 민중이 주인이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진리가 주인이 돼야지. 그래서 그분을 그렇게 살게 한 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살게 한 게 불교래요.
이게 뭐예요? 사람은 아니다. 사람으로는 안 된다. 이게 불(佛)가 그거라고요. 그런데 이걸 갖다가 달러랑 비슷하니까 불, 그래서 일 불($), 이 불. 그러는데 이게 아니 불자란 말에요.
사람이 아니므니다. ㅎ 사람으로는 안 된다, 가 불교인데 어떻게 이 불교가 그 사람을 사람으로는 된다, 라는 의지를 갖게 만드느냐고요.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못하고 여기에서 그냥 법으로 묶여버리면 불교나 힌두교나 다 똑같아지는 거예요.
우리는 달라야 되잖아요. 예수를 믿는다면서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요? 그렇게 해서 그 진리로 내 마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되면 속세면 어떻고 뭐 노래방에 좀 가면 어떻고, 왜 몰래가요? 첩보작전 하는 것처럼. 아 뭐 어떠냐고? 네? 주일예배 끝나고 아내와 함께 정종 한 잔 따듯하게? 뭐 어떠냐고요? 또, 그냥 (?) 계신데,, ㅎ. 그분은 안 돼요. 참으세요. ㅎ ㅎ.
아니, 그런 것들이 우리의 거룩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고작 그런 것이? ‘아니, 그런 거 안 한다고 저 산속에 들어가 갖고 수도원 짓고 거기에서 자기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살면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걸까요? 여러분의 자식이 여러분을 떠나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모 가슴이 미어터진다니까.
아니, 죄는, 그 마음은 여기에 있는데 산에 올라간다고 이 마음이 어디 딴 데로 도망가느냐고요? 그러니까 올라가서도 그게 어떻게 안 되니까 그냥 산에 있는 애들은 내려오고, 절은 아래로 내려오고, 아래에서 해보던 사람들은 또 산으로 가고. 기도원 짓고 이러면서 그냥. 또 바꿔. 얼마 있다 또 바꿀 거야. 우리 동네, 우리 집 앞에 절이 세 개가 있어요. 바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갖고. 그런데 한군데는 교회하고 절하고 같은 층에 있어요. 아니 나는 그 사람들보고 둘이 합치라고 얘기하고 싶어. 어차피 같은 얘기하고 같은 거 기도하고. 머리 깎고 안 깎고, 그거 밖에 없는데. 뭘 따로 따로 집세를 내고 있느냐고요.
기독교가 적어도 그거와는 조금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면 돼요. 그리고 그 하나님 꼭 붙들고 당신 없으면 안 되는 거, 제가 압니다. 그리고 가면 돼요. 시건방지게 뭐, 아, 난 머리로는 아는데 왜 내 행위로는 안 나와? 그거로 확인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왜 내 감정이 이렇게 북받치듯 풍성해지고 감사로 넘쳐나지 않을까? 늘 그러면 그거 미친 사람이에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진리로 행복하시라고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하나님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늘의 것을 알면 모든 것이 다 선이고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인데
우리의 선악을 가르는 이 두 마음은 그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이렇게 악한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만드신, 아니, 그 안에 담긴 하나님도 악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호 푸뉴마, 그 진리의 성령을 검으로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루속히 우리에게 남은 꼬리를 마저 잘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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