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93-라만차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이 승리자다 롬 829-30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51




롬93 라만차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이 승리자다



롬8:29-30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난 주에 아이들과 <맨 오브 라만차>를 보았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유명한 뮤지컬이라 큰 기대를 가지고 보았는데, 대작이라 규모도 대단하고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라만차는 에스파냐의 중앙에 있는 고원지대로 광야고 사막입니다. ‘맨 오브 라만차’는 ‘사막의 기사’란 뜻입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장소죠. 그 광야에 기사이고 싶어하는 한 미치광이 노인이 있습니다. 그 라만차의 기사는 세상에서 홀대를 받습니다. 그는 나타난 형상 속에서 내용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입니다.


미학적으로 ‘맨 오브 라만차’는 ‘미장아빔(mise en abym)'의 구조, 뮤지컬 안에 또 다른 극이 들어있는 구조입니다. 대단히 흥미진진한 극중극입니다. 원래 원작 ‘Don Quixote de la Mancha’는 몰락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전의 가치나 영화를 놓지 못하고 있는 에스파냐의 정체성 확인과 비판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1600년 초(전편 1605년, 후편 1615년)에 쓰여진 이 소설의 속내를 모르는 에스파냐의 왕은 소설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적응이란 것은 진화생물학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망해가고 있음에 적응하라.’ ‘어서 정신을 차리고 너희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라’는 내용인데도 왕족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많은 경우의 수를 열어 두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그 많은 문들 중에 진리의 문을 열고 그 문을 통해서 봤습니다. 저에게는 정확히 그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제 마음으로 본 라만차의 기사는 이런 내용입니다. 


돈키호테, 그는 세르반테스의 다른 자아입니다. 돈키호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 야차들의 세상에서 다른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로 보지만 그 사람에 의해 그가 보여주는 그 실체로 구원을 받는 여자가 있습니다. 알돈자라는 창녀입니다. 온 세상이 그녀를 더러운 창녀로 봅니다. 그런데 라만차의 기사만이 그 여자 속에서 돌시네아라는 순결한 숙녀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을 돌시네아라고 보아주는 라만차의 기사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찾습니다.


보이는 율법이 라만차의 미치광이에 의해서 보기좋게 박살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힘없는 노인과 풍차와의 싸움만큼이나 힘든 것이었습니다. 결국 라만차의 기사는 기독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소설에서는 구교에 의해 신교가 박해를 받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종교재판에 의해서 기사가 화형을 당하러 가게 됩니다. 그가 화형을 당하기 위해 동국 감옥을 나가는 장면이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은혜의 신교가 율법의 구교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렬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장면에서 소름 돋는 위대한 승리를 보았습니다. 동국 감옥에서 법정으로 올라가는 라만차 기사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에 꽉 새겨졌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끌려올라가 왜곡된 기독교에 의해서 죽는 겁니다.


성도는 그 라만차의 기사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을 볼 수 있는 세상 속 미치광이들인 겁니다. 다른 이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이들을 세상은 ‘미쳤다’고 합니다. ‘미쳤다’는 말은 ‘거기에 당도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창녀 안에서 순결한 숙녀를 보고 어둠에서 밝은 빛을 보며, 밤에 낮을 보고, 죄에서 의를 보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창녀도, 어둠도, 밤도, 죄도, 아래의 물도, 모든 만물이 선(아가도스)의 재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좌도 우도 없습니다. 그들에 의해 좌와 우의 세상 속에 갇혀 창녀로 살던 간음한 여자 이야기가 바로 창녀로, 간음한 자로 살던 하나님의 신부들이 순결하고 거룩한 아들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야, 너는 창녀가 아니야. 왜 자꾸 세상의 가치 기준에 너를 집어넣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있니? 아니야, 나와!’ 라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 모두가 왜곡된 말씀과 변질된 기독교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인 겁니다. 라만차의 기사, 그들이 승리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라만차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금요일에 어느 정도 설교를 준비해놓고 저녁에 뮤지컬을 봤는데 뮤지컬 내용이 설교원고와 똑같아요. 또 한번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설교에 함께 하신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미리 정하심’과 ‘부르심’, ‘의롭게 하심’ ‘영화롭게 하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미리 정하셨다(프리오리조)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울타리가 이미 공고히 세워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어요. 


‘프리오리조’는 ‘성전, 산, 성벽’의 합성어로 당신의 백성을 성전 삼아 놓은 것이 ‘미리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르심 ‘칼레오’는 히브리어 ‘카라’에서 온 말인데,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카라를 파자하면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란 뜻인데 그들은 그걸 ‘부르심’이라고 읽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불러놓고 그 십자가에 끌려오는 자만 하나님께서 건져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진리로 이해되고 마음으로 간직되면 그걸 ‘디카이오쉬네’ ‘의, 칭의’라 하는 것이고, 영화, ‘독사조’는 그렇게 마음이 된 의가 밖으로 흘러나오고 터져나오는 것, 비추어지는 것을 말한다고 했어요. 


미리 정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맏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요8:54-55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예수께서 영광을 돌리는 이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시라고 하세요. 영광은 우리가 돌리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면 그게 영광입니다. 그것이 또 흘러나가 나타나면 ‘독사,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라고 하세요. 그분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으로 존재하면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딱 한 번 하나님이라고 불렀어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마음이 되면 그걸 ‘아브, 아버지’라고 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야지 여러분에게 그분이 하나님이 되면 그분은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두려워 하면서 열심히 섬기게 돼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그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기에 아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는 것, 기노스코’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는데, 너희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그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세요.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에서 ‘지키다, 테레오’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의 말씀을 완성해. 내 안에서 그의 말씀이 이루어져.’ 이런 의미입니다.[주. 테레오(threvw)를 텔레이오오(teleiovw 완성하다, 완전케 하다)와 혼동하신 듯. 테레오는 ‘간직하다, 지키다’] 말 듣고 잘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기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가 나온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완성이 됐습니까? 십자가에서 그의 육이 죽는 것으로 그의 말씀이, 로고스가 완성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언약의 기둥에 달려 죽으면 그의 말씀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이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의 육은 죽고, 부정되고, 삭제되고,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만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부어서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데 그 영화로움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내가 그 말씀을 완성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 완성은 테텔레스타이, 십자가에서 완성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은 미스 코리아들이 왕관 쓰고 행진하며 말하는 영광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봅시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서 띠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네가 젊어서는 율법으로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면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속수무책이란 뜻입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 어디? 십자가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독사조/ 찬양하다, 영화롭게 하다’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요? 자기가 원치 않는, 밖에서 하나님이 묶으시는 그 진리의 띠로 꽁꽁 묶여 원치 않는 곳으로, 반대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서 두 팔 벌려 죽는 겁니다. 이걸 ‘영화롭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가 ‘그 영화는 풀의 꽃이야’라고 말한 겁니다. 

풀은 씨가 없는 육체요, 꽃은 그 씨 없는 풀에 붙었다 떨어지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풀은 우리의 육체다’라고 해요. 육체는 씨를 가질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풀’이라고 쓰면 ‘씨가 없는 것,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읽어요. 


그리고 그렇게 성경에서 나오는 풀은 무화과를 가리킵니다.

당연히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요. 베드로의 말은 1차적으로 씨를 맺지 못하는 풀인 우리에게 씨를 전해주기 위해 그 풀에 붙었다가 장렬하게 떨어져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씨를 심는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떨어진다는 것은 씨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씨를 심으면 그 상대방에게 내가 부정당하게 돼요. ‘아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 사랑이구나. 내 능력이 아니구나.’ 하고 내가 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겁니다. 그것이 꽃입니다. 


그런 씨를 심는 그 죽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씨를 전해 받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꽃으로의 삶과 동일하게 그 씨를 먼지가 풀풀 나는 광야의 라만차, 즉 이 세상에서 심고 떠나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풀과 꽃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이 풀의 영광인 겁니다.


베드로는 꽃이 떨어지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풀은 마르고’라고 합니다. 율법이 죽어서 떨어져 버리면 예수가 나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아, 그렇게 해서 죽으신 것이지’ 하고 그분의 죽음이 나에게 이해되면 그 예수는 나에게서 떨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가 나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나의 육신이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의 교통과 교제와 소통 속에서는 육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들이 없어야 하는 겁니다.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풀은 마르고’의 의미입니다. 진리를 알았더니 ‘그 풀은, 그 육체는 아니구나’라고 이해되는 겁니다. 꽃이 떨어지면 풀은 그렇게 마르는 겁니다. 


그런데 꽃이 다 붙어있습니다. 아직도 그분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를 위해 죽으셨대.’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것은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 밖의 예수입니다. 









‘성도가 이미 영화롭게 됐다’는 직설법 과거입니다. 

‘영화롭게 됐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사는 성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직설법 과거입니다.

‘너희는 영화롭게 됐어! 너희는 반드시 그렇게 가!’ 이겁니다. 


그런데 의롭게 됐다는 말은 다들 좋아하면서 영화롭게 됐다는 말은 별로 안 좋으시죠?

‘아, 그렇게 돼야 하는거야? 떨어져야 하는거야?’ 하면서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본문 29절에서 바울이 성도들의 삶을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라고 한 겁니다.

그건 예수님처럼 착한 일 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삶을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정작 아무도 못 구하고 가셨어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그때부터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한 겁니다.


‘형상/ 에이콘’은 ‘이미지, 내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 바쳐야 합니까?’ 물었을 때 “동전을 가져 오라. 거기에 있는 형상(에이콘)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세요. 원래 ‘나타난 형상’은 ‘아이돌론’을 쓰는데 ‘에이콘’을 쓰셨어요. 


그때 대답을 ‘가이사’라고 하면 틀린 겁니다. ‘에이콘’이라고 밀힐 땐 보이는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적힌 글과 형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가이사’라고 답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아는 것은 가이사 밖에 없으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라. 너희가 가이사의 것이다. 가라.‘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것‘이 바로 내용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맏아들의 그 형상(에이콘)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분이 살다간 그 진리의 삶의 내용을 좇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죽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다가는 것은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 그리 착하게 사셨나요? 그렇게 버릇없는 분이 어디 있어요? 나이 많은 양반들한테 막 독사새끼라고 욕하고, 남이 장사하는 곳 다 때려부수고. 그게 착한 겁니까? 다들 미화하려고 해요. 영웅을 하나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나를 투영시켜 대리만족을 하려는 것 같아요. 예수님은 본받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신학의 아버지 슈바이처의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도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그 십자가 죽음이 삶의 내용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죽음! 성도는 그 아들처럼 말씀의 완성으로 죽어요. 말씀의 완성은 율법의 파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의 삶을 가리켜 ‘네가 나를 영화롭게 했다’고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어떤 존재가 돼야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겠어요? 너무 인생에 가치를 두지 마세요. 인권, 인권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진리로 전해 받아서 육을 삭제당하고 아들로 탄생하여 말씀을 완성하는 그 여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돼요. 성도의 목적지는 바로 거기인 겁니다. 그건 성도의 필연적 통과의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이었어요. 그러한 풀과 씨, 그리고 풀의 꽃에 관한 언약이 창세기 셋째 날의 기사인 겁니다.



창1:11-13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채소와 나무를 만든 날입니까? 셋째 날이 풀과 채소 만든 날입니까? 히브리어로 데세와 헤세브입니다. 풀과 채소입니다. 둘 다 풀싹입니다. 풀이 땅에서 이렇게 나오면 싹처럼 보입니다. 풀이고 싹입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풀이 나오는데 하나는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풀이고, 다른 하나는 씨와 열매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풀입니다.

 

 농부가 사과 씨를 땅에 심으면 땅에서 싹이 납니다. 그리고 그 싹은 풀처럼 보입니다. 그 풀싹에서는 나중에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식물인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풀싹입니다. 그것이 나무가 될지 뭐가 될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이 가능성, 그렇지만 잡초에 불과한 풀이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풀은 대부분 후자의 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풀을 육체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풀과 싹은 녹색입니다. 아람어에서 녹색, 푸르다는 텅 비었다, 라는 것입니다. 봄에 새싹이 막 올라와서 푸르게 되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것을 히브리 사람들은 텅 비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사실은 텅 빈 것이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빨은 적, 보는 자로 적외선 자외선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는 텅 빈 것입니다. 그것을 다 섞어버리면 검정이 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풀은 항상 푸른 풀로 등장을 합니다. 히브리어로 푸른 색, 녹색은 텅 비었다, 틀이 없다, 내용도 없다 이렇게 쓰입니다. 그러면 텅 비었다, 틀이 없다, 내용도 없다는 땅이 토흐, 혼돈하고 보후, 공허하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풀은 땅에 다른 이름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씨를 가질 수 없는 것, 아예 씨가 없는 것, 이것이 푸른 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혼돈과 공허의 땅에서 씨를 뿌리는 풀싹을 싹트게 한다고 하십니다. 아마르 엘로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싸는 ‘싹트다’ 인데   그 단어의 의미는 땅에서 도저히 뭐가 나올 수 없는 것 같은 어떤 곳에서 (그것이 땅입니다. 토흐, 보후) 거기에서 뭐가 탁 튀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에레츠, 땅에서 뭐가 탁 튀어 나왔는데 데세이고, 에셰브인데, 풀, 싹입니다. 풀싹이 땅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풀싹이냐 하면 자라, 제라, 똑같은 단어입니다. 뭐 만 다르냐 하면 앞에 것은 동사 뒤에 것은 명사입니다. 씨를 씨 뿌릴 수 있는, 씨를 가지고 씨를 뿌릴 수 있는 풀싹, 이것은 원래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풀싹은 씨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냐 하면 하나님이 땅에서 그 풀싹, 땅과 똑같은 텅 빈 풀싹에서 씨를 씨 뿌리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인데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면 에츠 페리 앗싸(일하다, 되게하다) . 페리 에츠는 열매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앗싸 페리(열매)가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번역을 하냐 하면 열매로 일하는 열매 나무, 왜 열매로 일하는 나무냐 하면 ‘레’ 전치사가 붙어 있고 ‘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분배하다, 구분하다입니다. 율법은 항상 나눕니다. 분배하다, 구분하다는 나눈다는 것이 ‘레’ 전치사가 ~을 위하여, 이니까 그 라메드가 가르치다, 는 뜻입니다. 분배하다, 구분하다는 그 나눈다는 그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열매로 일을 하는 열매나무가 선악과라는 말입니다. 민이 나누다, 분배하다, 구분하다의 뜻이고 그 앞에 레 전치사가 가르치다, 그리고 ~위하여 라는 전치사입니다. 분배, 나눔이 뭔지를 나눈다는 것이 선, 악, 좌, 우, 어둠, 빛이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열매로 앗싸, 일을 하는 에츠 페리, 열매나무로 씨를 가진, 씨를 흩뿌리는 그런 풀싹을 땅에서 만들어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로 생명나무, 씨가 생명이니까 선악과로 생명나무를 반드시 싹트일 것이야, 라는 말입니다.

 

채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제라 보, 이것이 ~안에  ‘레’ 전치사입니다. 이것이 알 에레츠, 땅과 함께 그 안에 씨를 갖고 있는 열매로 일을 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면 선악과 안에 생명이라는 그 씨가 들어있다, 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율법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는 이야기, 예수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으로 잘 가르쳐 좌, 우, 죄, 의, 선, 악 이것이 뭔지 민, 나눔을 잘 가르쳐 씨를 가진, 씨를 뿌리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육체 풀싹을 싹틔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통하여, 아래 것을 통하여 그 진리 위에 것을 배우면 그 선악과나무가 나에게 생명나무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나무는 전부 남성 단수입니다. 나무는 하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놓고 선악과, 생명나무 이렇게 풉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또 단수입니다. 예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선악과가 나쁩니까? 그것을 안 먹고 생명나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악과를 ‘악’자가 들어가서인지 너무 싫어하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있어야 우리는 생명나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야짜'는 하나님이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억지로 손잡고 끌어냈습니다. 그 때에 그 단어입니다. 야짜, 끌어내다, 밖으로 나오다, 나오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끌어내다 할 때에 씁니다. 에레츠, 땅에서 역시 풀싹, 데세 헤세브, 그 분배, 나눔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면 씨를 흩뿌리는 그 씨, 그 씨를 가진 풀싹이 땅에서, 이 아래의 세상에서 끌려 나온다, 라는 말입니다. 롯처럼이요. 우리는 끌려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무가 나오는데, 아싸 동사가 나오고, 나눔, 죄, 좌, 우, 선, 악을 잘 가르치기 위해 그 씨를 갖고 있는 그 열매나무( 그 열매로 일을 하는 열매나무로 그 좌, 우 나눈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치면 그 씨를 흩뿌릴 수 있는 풀싹이) 땅에서 야짜, 나온다.그러면 여러분은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엘로힘, 키 토브 그것이 선이라는 것이야, 이런 말입니다. 그것이 하야 에레브, 하야 보케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것이 셋이라고 그래 이럽니다. 그것을 삼이라고 그래 그럽니다. 이때는 아라비아 숫자 없었습니다. 그것을 셋이라고 그래, 그냥 완성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썼을까요? 이것이 숫자가 없었으니까 셋을 이렇게 썼습니다. 넷은 성전, 지성소를 가리키고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것이 정육면체입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다고 합니다. 만 이천 스타디움, 그러면 여기에 정육면체의 변이 몇 개입니까? 12개입니다. 그러면 144000입니다. 사람 숫자가 아닙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것을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일관성 있게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셋, 삼으로 첫째 날 , 낮과 밤. 어두움으로 그 빛을 그것이 뭔지를 설명해 낼 수 있으면, 깨달아 설명을 해 낼 수 있으면 그것을 오르라고 그래, 그것을 빛이라고 해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두움으로 빛을 알고 내용으로 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둘째 날에는 궁창 아래의 물로 궁창 위에 물을 알아 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 그 안에 씨를 가진 이가 되는데 궁창 아래의 물, 아래의 어두움 이런 것이 다 선악과입니다. 그것으로 씨를 맺는 씨를 뿌릴 수 있는 그런 자가 되면 그것을 완성이라고 그런다, 고 합니다. 쉐르쉬, 완성이다.

 

삼위일체 이렇게 말씀들 하시는데 그것은 세명,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되고 그냥 완성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삼, 완성, 그것을 쉐르쉬라고 그래,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혼돈과 공허의 땅, 씨를 가질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공허의 땅, 흙 여기에 하나님이 선악과의 씨를 담아서 그것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인 다음에 그것으로 이 육을 죽여 버리고 그 씨를 나타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역사의 목적이고 인생의 목적이고 말씀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 완성, 그것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선악과를 먹으면 저녁의 사람, 밤에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다도 밤에 나갔다고 합니다. 밤의 사람, 저녁이 먼저 되고 그 다음에 아침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좌와 우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뭐고 빛이 뭡니까? 빛은 그 어둠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어둠입니다. 그리고 이 아래의 세상, 어둠의 살고 있잖아요?

 

그렇게 완성이 여섯째 날에 설명이 됩니다. 1, 2, 3의 날의 이야기가 4, 5, 6의 날에 다시  한번 우리의 것으로 설명이 되고 당연히 이 셋째 날의 이완성은 여섯째 날에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자칼과 네케바, 남자와 여자라고 합니다. 그 자칼과 네케바라는 개념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든다, 라고 하고는 이것을 단수로 씁니다. 아들입니다. 내가 아들 만들 거야, 그래 놓고는 아들을 어떻게 만들 거냐 하면 자칼과 네케바로 만들 거야 그럽니다.

 자칼은 무엇이고 네케바는 무엇입니까? 이 자칼이라는 것이 네케바라는 여자에게 씨를 줍니다. 씨가 되어 들어와 이 여자가 아들이 되는 것을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셋째 날에 선악과로 그 안에 씨를 담아 너희 안에 집어넣어 너희 육을 죽이고 너를 열매 맺고 씨를 맺는 풀싹으로 싹틔울 거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와 남자 부부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항상 함께 있어야 완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자칼과 네케바는 합쳐서 하나의 일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아래의 세상에서도 그것을 우리에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렇게 쉐르쉬, 삼, 셋으로 완성이 되면 그것이 땅에서 야짜, 끌려 나온 것이니까, 하늘입니다. 삼층천, 삼의 하늘 이런 것이 거기에서 끌려 나온 씨를 가진 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성경이 호 호로노스, 하늘들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은 땅을 통해 하늘을 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모형인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을 토후, 보후, 텅 빈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만들어서 ‘텅’ 비었다, 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무엇을 만들어서 채웠다, 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에 이것을 텅 비었다, 라고 하고, 그것을 또 풀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것들을 호셰크, 흑암이라고 하고 그것들을 깊음, 태흠, 모인 아랫물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인 물을 니크베,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 아래의 물을 바다라고 한다, 고 그럽니다. 셋째 날도 이것을 바다라고 할 거야, 그럽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인 이 바다를 우리는 소망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씨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것을 알면 그것이 소망이야, 그러나 아래의 바다는 보이는 소망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 소망이다, 라는 것을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어둠을 잘 설명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게 들어내면 그것을 빛이라고 하고 그렇게 어둠을 통하여 빛이 되면 그것이 통일이고 연합이야, 라고 하면서 에하드, 첫째 날, 통일, 연합이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궁창, 라키아 궁창이라는 것을 두고 그 궁창을 두고 아래의 물을 위에 물로 알아 버리면 그 둘은 쉐니, 짝이다, 라고 합니다. 둘째, 짝입니다. 듀오랑 같은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열매로 일하는 나무 그러나 그 속에 씨를 가진 나무를 통하여 씨를 갖고, 그  뿌리는 그 풀싹, 그 풀싹이 되는 완성의 현실을 쉐르쉬, 삼이라고 합니다. 그 삼을,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그 삼을 땅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라구요? 그것이 씨니까 땅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덤 같은,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이다, 의 무덤 속에 예수님이 씨로 삼을, 사흘을 들어갑니다. 어떻게요? 밤, 낮으로 들어갑니다. 밤으로 낮을 만들어 내기 위해섭니다. 무교절에 사흘을 땅에 묻어 두었던 그 떡, 삼의 떡을 우리가 먹는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주기도문 강해 바로 아래에다가 세 떡을 구하는 친구의 이야기로 붙여 놓았습니다. 거기서 구하는 세 떡이다, 완성의 떡이다. 그 떡을 먹어야 이 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씨를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 떡 여기 까지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언약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쉐르쉬, 삼으로 완성된 하늘의 아들들이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영화롭게 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또 넷이라고도 합니다. 레비, 넷입니다. 그것은 4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삼으로 이 땅에서 그것을 그 씨를 드러낼 수 있는 자가 되면 그를 레비, 4라고 합니다.

레비가 무엇이냐 하면 넷인데요, 그 때는 숫자 4가 없음으로 ( )라고 쓰고 삼은 () 씁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 거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셋, 완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을 4로 만들려면 삼을 벌려 주셔야합니다. 이것을 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마지막 하나로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면, ‘너희들은 절대 호리이라도 갚지 못하면 감옥에서 못 나와’ 그랬습니다. 그 때에 호리는, 마지막 사분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 삼을 가지고 그 언약, 그 하나님을, 그 진리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형태로 만들어 주면 성전이고, 글로 써 주면 성경이고, 율법이고,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을 넷으로 이해를 해서 내가 마지막 넷이 되어 들어가 버리면 그것을 또 사랑이라 하고 그 사랑을 온전함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이 위에서 보면 정사각형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지성소가 또 정사각형입니다. 계시록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예루살렘이 정사각형입니다. 정육면체입니다. 그것이 네 번째 날입니다. 네 번째,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나와야합니다. 그렇게 된 자들의 모습이 등장해야 합니다. 나오는 지 봅시다.

 

창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하늘의 궁창은 라키아 샤마임, 하늘적 그 궁창, 하늘적 그 성전에) 광명들이(광명, 오르, 빛에 마임을 딱 붙이면 그것이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오르의 앞에 마임 붙여서 마오르라고 합니다. 그것을 광명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빛이 비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이루게 하라의 뜻은 징조와 시기와 연한으로 설명하겠다. 이것을 광명 삼아서 설명하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절기, 표적 이런 것들입니다. )

 

창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 마오르가 하늘의 궁창, 라키아 샤마임, 하늘적 궁창, 아래의 물, 아래의 것, 땅. 그 아래의 것으로 위에 것을 알려면 아래의 것 즉 어떤 것을 주어야합니다. 물론 이 아래의 모든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특별히 알라고 주신 것이 성경, 성전, 예수입니다. 여기에서 나를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라키아라고 합니다. 가운데에 라키아를 만들고 라고 말합니다. 이 라키아는 당연히 성전입니다. 그 라키아, 그 성전이 하늘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면 라키아 샤마임, 하늘적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늘로 이해된 그것은 그 땅을 비추는 것입니다. 해를 만들어서 땅을 비추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다 보이는 것을 뭐하려고 성경에 써 놓았겠습니까? 빛을 비추는 것, 그것이 하늘의 라키아라고 했으니까 그 성전에서 그 어떤 빛을 비추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등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등대가 무엇으로 탑니까? 등대가 여기에 있으면 등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등잔이 있습니다. 이것을 개혁 성경에서는 대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중에 계시록에서요. 여기에 기름을 끊임없이 부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에 의해서요?  기름에 의해, 감람나무 기름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등대는 무엇이냐 하면 이 감람나무의 기름, 감람나무라는 그것을 빛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람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 그러면 감람나무로 씁니다. 그것이 기름입니다. 등대를 밝히는 기름입니다. 등대가 그것을 기름을 받아 빛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람나무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 우리는 가시나무가 합쳐지면 포도나무가 됩니다. 포도나무가, 스테파노스가 무엇이냐 하면 여러 개가 달렸는데 이것을 하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스, 스테반이, 포도가 복음을 딱 전하고 죽습니다. 하나님이 포도를 딴 것을 상징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 딴다, 그리고는 스테판, 스테파노스를 따서 봐 땄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합니다.

 

 씨 없는 것들을 선악과에다가 내가 반드시 씨 넣어서 씨 뿌리게 하고 씨 맺게 하고 열매 맺게   할거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저 대접에서 기름이 하나하나 다 쏟아집니다. 다 쏟아지면 이 세상에 진리의 불은 꺼집니다. 심판입니다. 그래서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입니다. 인은 떼집니다. 그 단어가 하나님이 입을 열어 가라사대에서의 입을 열다, 와 똑같습니다. 인을 떼, 열어, 그 나팔, 말해 그리고는 빛을 비추는데 그 빛을 하나하나 꺼버립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진리가 거의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꺼져가는 등불도 그러나 끄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꺼져가는 등불처럼 그렇게 보입니다. 상한 갈대에서 갈대는 척량하는 '자', 캐논 그런데 그것을 세상은 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절대 안 꺽여, 마지막 그 자가, 그 갈대가 꺽여지는 그 때에 까지 안 꺽어, 갈 거야, 꺼져가는 그 불길 마지막 그 대접 쏟아질 때에 까지 너희들은 다 꺼진 것 같지? 안 꺼졌습니다. 그래서 간단 말입니다. 여기 이곳에도 있습니다. 꺼져가는 불빛입니다.  

 

그럼 진리를 빛으로 드러내는 그 광명은 무엇을 나타낼까요? 밤으로, 이 세상으로 낮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온통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광명을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고,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주관하다는 말이 섬기다, 라는 말입니다. 낮도 섬기고, 밤도 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밤에 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그 밤으로 낮을 알면 됩니다. 그래서 밤과 낮을 바달, 나누었다, 라고 합니다. 그 나누었다, 라는 것은 아래의 것으로 위에 것을 알면 아래의 것도 나랑 의미가 없고 위에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그분, 구별을 바달, 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밤과 낮을 바달하게 나누었다라고 합니다. 뭐하라 구요? 아래의 광명으로 큰 광명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래의 것들은, 땅에 모든 것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빛이 됩니다.

 

 이것도 빛이 였네, 그 내용은 원래 그 빛을 설명하는 것이었네, 이렇게 알게 될 것 아닙니까? 알돈자, 그것이 창녀이었는데 그 창녀를 통하여 그 돌시네아를 그 숙녀를 알게 하는 것이네, 원래의 내용은 돌시네아네, 라고 라만차의 기사처럼, 미친 사람처럼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이 어둠에 비추어 ‘너희들이 어두움이라고 하는데 이 아래는 어둠 밖에 없어,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너희들이 그 진리를 갖게 된 것이고 그러면 너희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해’ 그런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그 빛이 오셨을 때에는 이 세상이 다 어둠이라고 했습니다. 그 빛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너희들은 빛이야’, 라고 칭해주는 어떤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빛을 안에 가진 것입니다. 진리로, 말씀으로 안에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을 사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빛으로 사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제게 당신이 혹시 틀렸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제가 답장은 잘 안하는데, 제가 마음속으로 제가 갖고 있는 대답은 I don’t care 난 상관없습니다. 지금 내가 이 진리, 이 말씀으로 저는 여기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틀렸어, 라고 하면서 저를 지옥에 보낸다고 할지라도 나는 거기에서도 이 원리로 살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환경이 어떻게 주어지든지 그 원리로 살면 그 사람에게는 거기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 원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가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그 묶여있는 상태로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첫 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광명이라는 것을 작은 광명, 큰 광명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주고 그것을 밤과 낮을 주관하게 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잘 생각해 봅시다.

 

큰 광명이라는 것은 진짜 그 마오르,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진짜 그 빛을 말합니다. 그런데 작은 광명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으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큰 광명은 해입니다. 달은 발광체가 아닙니다. 자기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달빛이 아닙니다. 해가 있다는 것을 달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밤이야, 어두워, 그런데 내가 빛을 내고 있다. 왜? 저편 저기 숨어있는 해가 있단다, 를 보여주는 것이 달입니다. 달은 반사체입니다. 그것을 작은 광명이라고 알고 계셨죠? 그렇게 알고 계셔도 됩니다.

 

그 작은 광명은 어둠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 진리가 내 안에 씨로 들어오게 되면 내가 밤을 섬기는, 밤에 진리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밤을 주관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섬기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밤에 ,그 밤을 진리로 섬기면, 그것으로 그 큰 광명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작은 것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큰 것에 충성해,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똑같은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선악과, 아래의 율법, 죄, 어둠으로 여기에 충성하여 이것으로 그것을 못 알아 들으면 너희들이 그 빛을, 큰 광명을 알겠니?’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아래의 것으로 그것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알라, 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전이나, 예수나, 역사나, 인생이나, 성경이나, 죄나, 악이나, 어둠이나 아래의 물은 큰 광명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와서 그 빛을 설명하는 것이 광명들이니까, 모형을 갖고 그것이 빛의 실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영광, 독사, 나타내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면 큰 광명, 작은 광명을 나누었다는 것은 이것과 이것이 사실은 같은 것이네, 라고 합니다. 작은 광명은 반사체이고 큰 광명의 내용을 알라고 주었으니까 그 둘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알면 그들을 ‘별이라고 그래’ 그럽니다.

 

큰 광명, 작은 광명을 만들고 나중에 그것을 별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그래, 합니다. 그 넷째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어떻게 준다고 합니까? 하늘의 별처럼 요. 그런데 하늘의 별이 되겠다고, 나를 섬기겠다고 이 성전에 나와 바다의 모래가 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십니다. 둘 다 많아 질 거야, 이런 말 아니고 하늘의 별이 되는 그 빛을 비추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모래는 선지서에서 보면 내가 그 비를 모래로 내릴 거야 하면 그것은 심판입니다. 비의 반대 개념입니다. 바다는 역시 아래의 것입니다. 바다의 모래가 되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래, 그 율법에 집을 세워버리면 망가지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세우면 안 된다고 합니다. )

 

그러니까 성도는 이 밤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둠이라는 그 풀이라는 씨 없는 육체를 입고 삽니다. 그런데 그 안에 진리의 씨가 심겨지게 되면 그를 통하여 빛이 비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빛이라고 하셨고 빛이 있는 동안에 다녀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낮은 열둘이야, 라고 합니다.

 

그 빛이 열둘, 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 빛이, 아들로 오신 그 분이 사라지면, 주님이 죽으면 너희들은 너희들 안에 그 빛을 가져야 돼, 안 그러면 너희들 밤에 다니다가 실족한다고 하십니다. 그 빛은 이 세상에 나타난 빛으로 오신 작은 광명이 이제 사라지고 밤을 사는 우리 안에 안의 빛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빛을 말씀,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를 빛이라고 그래요. 그 빛을 드러내는 것을 영화롭게 하다, 독사조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합니다.

 

코카브, 별이라는 단어가 발광체라는 뜻도 있지만 백성, 방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빛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 그것이 별, 코카브입니다. 그들이 땅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들이 땅을 비추게 한다, 라고 써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것이 창세기에서의 그 별, 코카브입니다. 여기서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안에 집어넣을 그 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개역 성경이 그것을 자손이라고 번역을 한 이유는 하나님이 네 안에 내가 씨를 넣을 거야, 너에게 자손을 줄 거야에서 씨, 제라는 원래 네 안에 생명의 말씀 집어넣을 거야인데 아브라함이 아들 주시려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아들을 줘 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자손이라고 아들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지 사실 그 씨, 제라는 진리를,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부르심을 입고 의롭게 되어서 그 안에 진리의 씨를 갖게 되면 그들은 땅으로 하늘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어둠을 빛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아래의 물로 위에 물을 알 수 있게 되고, 열매로 일 하는 나무를 통해서 씨를 전달 받아서 그 씨를 맺는 풀싹으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레비히, 넷이, 완성 되는 것입니다.

 

 너 온전해야 해 하시면서 하나님이 넷을 주십니다. 사랑으로, 에스카토스 코트란테스 마지막 호리, 이것을  갚아, 이것이 돼, 그러면 너를 온전하다고 해 줄게, 가 마태복음 5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고 이야기 하고는 마지막 사랑으로 완성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하면 그를 완전하다, 넷이다, 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숙이나, 변화나, 업적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언약의 기둥에서 부정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자랑이 되고 칭찬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비춘다는 것이지, 네가 한번 비추어 봐, 이런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런 사람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가치있다, 고 여겨주지 않습니다. 라만차의 기사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자기 부인의 현실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뿌리가 거룩한 거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지는 아니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돌감나무는 누굽니까? 나를 말합니다. 우리입니다.)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알렛데이라, 진리의 감람나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그 기름, 그 진리)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이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가지가 무엇을 맺고 안 맺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라

( 가지에게 ‘네가 왜 잘난 척이야’라고 합니다.)

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유대인처럼 행함으로, 제사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이들은 꺽입니다.)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농사는 돌감람나무에다가 참감람나무 가지를 붙이는 것이 올바른 농사법입니다. 접붙임 할 때에 항상 열매는 가지의 성질, 가지의 속성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돌감람나무에다가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면 돌감람나무에서는 진액 만 제공하고 참감람나무 가지에서는 가지의 성질을 따른 참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농사법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감람나무는, 하나님이고 진리입니다. 너희들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잖아, 그러면 너희들에게서 맺히는 열매는 돌나무 열매가 맺혀야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이 맺는 그 열매를 흉내를 내고 있으니까 바울이 열 받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아니야, 그러면 여기에 사는 인간, 너희들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해 그것으로 이 열매가 뭔지를 알면 돼, 그런데 왜 너희들이 가지가 열심을 부려서 너희들의 열매를 맺으려고 해, 너희들이 맺는 열매는 돌 열매 밖에 못 맺는다,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맺어 봐야 너희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서 진액을 받아 그냥 살아라합니다. 그것 자체를 페로, 열매를 맺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은 열매가 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열매라고 해, 그럽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그 가지에 열매를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나도 예수 믿기 전에는 죽어라고 달려왔는데, 열심히 열매 맺으려고 했는데 예수 믿은 후에는 다 배설물이더라 그리고 지금 예수 믿고 나서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 밖에 내 놓을 답이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모태에서 건져내어, 율법의 성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도를 만드셨다, 고 합니다. 그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너희들의 힘으로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짜 열매입니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깨끗하여지는 것은, 하기오스, 말로,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감람나무에 가시나무가 접붙임을 당하면 그 전체를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거기서 포도송이가 맺힙니다. ) 스스로 (그러면 붙어있으면, 열심히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맺어진 것이 진짜 열매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어지는 것, 은혜입니다. 그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맺나니의 뜻은 되다, 많다의 폴로스도 여기서는 단수입니다. 그러면 great라고 번역을 합니다. 너희가 그러면 위대한 열매가 되는 것 이야, 라는 뜻입니다. 개수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의 뜻이 아닙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가지가 자기 가지의 것을 내면 그 가지야, 그러니까 그것을 모아다가 나중에 불살라 버릴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땔감될 거야, 라고 합니다. 이 예배당에 몇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여기에 이렇게 많은 땔감들이 있습니다. 제가 땔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씨입니다) 너희 안에 거하면(그것이 열매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너희가 위대한 열매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이것이 독사조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그 진리가 들어오면 나의 육은 부정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영광, 영화입니다.)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렇게 성도는 셋으로 죽고 넷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의 그 진리의 양식을 세 떡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삼으로 땅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떡을 우리가 먹는 것을 모형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그것을 바울은 함께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쉰 답터, 함께 묻히다, 의 뜻입니다. 그 땅에 같이 묻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이 땅에 묻혀서 그 빛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함께 묻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별 같은 너희 자손들이, 넷으로 나올 것이야, 라고 합니다. 사대 만에가 아닙니다. 넷으로 나와야하는데, 그 도르 네비아 네비히는 사대가 아닙니다. 430년은 사대가 될 수 없습니다. 숫자 개념이 없던 시대로 넷의 백성으로, 시대, 자손 이런 뜻으로 넷의 백성으로 나올 것이다, 를 말합니다.

 

창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이들의 육이 죽고 그 말을 하는 자, 넷으로, 하늘의 별로 나올 것이다, 의 뜻)

 

그러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면 나오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는 것의 히브리어는 샤렘 에본 에모리입니다. 에모리 족속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에모리는 아마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마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다의 말씀, 레마를 이야기합니다.

 

이 에모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들이 에본, 죄가 샤렘, 완성되면 그들은 애굽에서 넷으로 나올 것이다, 라고 합니다. 선악과가 뭡니까? 에본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되면’에서 ‘장성되면’의 뜻이 완성이 되다, 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육이 죽고 그 말을 하는 자로 나올 거야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 자손들, 하늘의 별들은 4로 나올 거야, 라고 합니다.

 

그렇게 넷이라는 존재의 삶을 잘 보여준 것이 요셉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하고 요한복음의 기사들의 순서가 다릅니다. 성전 정화, 그 성전 파괴의 사건은 한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 부순다, 라고 하시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2장에 나옵니다. 왜요? 그렇게 죽고 그 빛을 받은 어떤 이들, 말씀, 육신들이 이 땅에 오게 되는데 그들이 그 삶을 그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쓰는 것이 요한복음에는 맨 앞에 나오고 그 때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4의 이야기입니다. 넷들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넷을 통해서 그 3, 셰르쉬의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그 셋의 마지막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강도인데, 탕자의 이야기도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 강도가 열심히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산해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갖고 아버지께로 오는데 그것들이 다 무엇이냐 하면 점 있고, 흠 있는 알록달록한 것들입니다.  분명히 삼촌이 하얀 것 만 주었습니다. 점 있고 알록달록한 것을, 흠 있는 것을 못 만들게 하려 구요. 그런데 이 야곱이라는 강도, 실족 시키는 자(지나가다가 누가 넘어지면 딱 넘어질 때에 실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입니다.

 

나쁜 말로 강도처럼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면 그는 실족시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하나님이 너희들은 강도요, 절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강도는 어떠한 것을 갖고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알록달록한 것을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만들어 내냐 하면 단풍나무, 신풍나무를 물먹는 곳, 교미가 일어나는 곳에다가 심어 놓습니다. 양들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앞에 것 밖에 보지 못해서 양들이 길을 잃는 것은 조금 만 떨어지면 앞을 보지 못해서 선두 그룹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풍나무, 신풍나무를 물먹는 곳, 교미가 일어나는 곳에다가 심어 놓으면 그 너머로 다른 양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록달록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알록달록한 것들이 가서 교미를 해서 알록달록한 것들이 나오는 것을 갖고 아버지께로 가는데 하나님이 그럽니다. ‘누가 너 더러 그런 것 갖고 오라고 했니?’ 내 땅, 약속의 땅 벧엘에 누가 알록달록한 것 가지고 오래? 네가 네 아내 얻기 위해, 네가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데 , 네가 남편이 되고, 네가 주인이 되어 네 아내를 얻기 위해서 777 갖고 온 것, 그것 알록달록한 점 있고 흠 있는 것 내가 그것 갖고 오라고 했니? 그래서 넌 죽어야 하는 거야, 라고 하며 얍복강가에서 찾아 가셔서 환도뼈(남자의 씨가 담겨있는 그릇의 뜻)를 깹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그 셋이 이제 완성이 됐습니다. 그 씨를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 씨를 가진 자는 이 땅에서 절음발이로 산다, 고 합니다. ‘절뚝거리다’가 건너가다의 뜻입니다.

 

건너간 자는 반드시 절뚝거리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이라는 지팡이, 이것이 라메드, 지팡이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진리의 사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절뚝거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이스라엘을 절음발이들아 고침을 받아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건너가는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욕합니다. 너 왜 절어? 나타난 것 만 보는 것입니다. ‘죄인이면 어때? 의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는데, 죽었으면 어때 살려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 세상은 그것을 전부 악이라고 합니다.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가 그것을 못 믿으니까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돼, 그러면 살 방법이 없어, 라고 합니다.

 

그렇게 셋이 되면 넷의 사람들, 별들이 되는데 그들을 아들이라고 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열 둘, 거기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열둘, 아들, 영적 이스라엘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열둘 중에 요셉이라는 인물과 레위, 둘은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 받쳐진 자, 된 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 상징하는 그들이 빠지고 그 안에, 열둘 안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갑니다. 요셉의 아들입니다. 완성된 야곱을 이 땅에서 그 야곱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보여준 것이 요셉입니다.

 

창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야곱이 얍복강가를 건넌 이 후에 인생이 성경에는 안 기록이 되어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넷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양식을 주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양식을 주는 자, 여기에 가서 얻지 않으면 아무도 못살아납니다. 그 사람이 아들, 넷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 요셉은 야곱의 다른 모습입니다. 돈키호테가 세르반 테스의 다른 자아 듯이 요셉은 야곱의 다른 자아로 나옵니다.

 

넷으로 완성된 어떤 이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두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기도 해야 합니다. 넷의 자손, 아들로, 요셉의 아들로 열두 아들을 설명하기 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열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의 그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 메낫세라고도 합니다. 에프라임, 이것은 제거되다, 많은 열매를 맺다, 이것이 아들입니다. 셋으로 완성된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므낫세, 맏아들은 제거 되고 그 많은 열매라고 하는 아들들이 열매로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알의 밀알로 오셔서 죽으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하나가 제거 되고 많은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 넷의 아들입니다. 예수 아버지 이름은 요셉, 그러면 그는 반드시 그 예수를 아들을 그것을 진리로 알았으면 아브라함처럼 모리아산에 데리고 올라가 그 아들을 장사 지내야 합니다. 요셉을 장사지내는 자의 이름은 아리마대오 요셉, 그래서 요셉이 낳고 요셉이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넷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살려서 계속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여러분은 안에 빛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빛은, 그  밖에 있는 그 빛은 떠나 버렸습니다. 그를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안에 빛으로 오면 밖에서 하신 그 분의 일이나 생애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삭제가 됩니다. 없어져야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 아들을 장사지내야 자기도 거기에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장사지내지 못하면 영원히 그 아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서 율법적 신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셋으로 완성이 돼서 넷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셋은 열매로 일하는 그 나무, 선악과나무, 그러나 씨를 가진 그 나무를 통해서 씨를 받는 형국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율법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따 먹습니다. 여러분은 안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선악과 따 먹고 씨를 가진 그 아들이 오셔서 나를 죄에서 건져내셔야 만 구원 받는 것을 알았을 때에 진리로 합일이 되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스, 포도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 선악과 그 열매로 일하는 씨가진 그 열매나무를 통하여 씨를 흩뿌리는 씨 맺는 풀싹이 되어 그 생명, 그 씨를 또 전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는 어디에 열립니까?

 

 여러분이 그 진리를 말할 때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 먹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 그 말로 진리를 알면 그 생명나무에서 그 실과를 따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십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무다, 라고 합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그것을 찾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찬가지로 그 씨, 그 진리를 여러분 안에 갖고 있고 말하고 흘리면, 푸로슈코마이 할 수 있으면 거기서 생명나무 실과가 열리고 그 열매로 살아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씨를 심고 부정되어 죽는 것입니다. 라만차의 기사처럼 그렇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율법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넷의 사람들은 예수를 낳았으면 그를 장사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씨를 받아 씨를 흩뿌리고 열매를 맺는 변종 같은 풀싹, 열매가 나고 씨가 갖게 되는 그 풀싹, 그들은 그렇게 넷이 되어서 큰 광명을 증거하는 작은 광명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라만차의 기사들, 그 광야의 외치는 소리들은 세상에서 업신여김 당하다가 심지어 종교에 맞아 죽습니다. 기독교가 그들을 죽입니다. 변질된 기독교가 뭘 은혜 만 말하고 있어?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한 것이지, 본 받아서 살아야지, 그러나 그렇게 맞아 죽는 것이 옳은 삶입니다. 라만차의 기사들입니다. 그대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입니다. 라만차가 외치던 단 발마 같은 그 대사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진실은 진리는 현실에 적이다, 천 번을 쳐라, 천 번을 때려라, 천 번을 다시 일어날 테니!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이렇게 광야에 외치는 소리입니다.

큰 광명을 드러내는 작은 광명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을 밤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안에 빛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니,

아버지 하나님, 그 빛을 올바로 전하고

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참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