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92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
롬8:29-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익히 너무나 많이 공부하신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내용은 또 아닙니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2회동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TV에서 충격적인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를 선정해 성형외과, 치과 등 여러 분야 의사들이 집도를 해서 미인으로 만들어내는 ‘렛미인’이란 프로였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인간의 의술에 대해 놀랐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입니다. 껌짝 놀랐어요. 의사들은 마치 <페이스 오프>처럼 새로운 얼굴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얼굴로 재탄생한 여인들은 대단한 자심감, 자긍심에 자신을 한껏 자랑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요. 일도 없는데 괜히 명동을 돌아다녀요. 사람 많은 데로 가고 싶은 겁니다. 자랑스러운 겁니다.
보편적 인간 군상이 설정해 놓은 그 미의 기준에 부족하면 부끄럽고 초라한 삶을 살다가 그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이 되자 말할 수 없는 자신감과 자긍심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참여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요.
인간들의 자기 능력 과시와 자기 계발의 의지가 얼마나 집요하며 대단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같아서 좀 씁쓸했습니다. 미인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노래를 잘한다는 기준도 변해요. 모든 건 세상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변해 갑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풍조에 이끌려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속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는 역사 속 아담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이 상정하고 합의하고 정의한 자신의 아름다움, 잘남을 추구하고, 그걸 자랑하고 싶어해요. 인간들의 추구는 단지 외모만이 아니라 사회적 능력, 도덕성, 인간성, 선행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일어나요.
이 역사 속 아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속에 있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뻥 뚫려있는 공허를 무언가로든 메꾸어 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외로우면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요. 그런데 고독이라는 건 무엇으로도 메꾸어지지 않아요. 그건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 고독은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어요. 그걸 메꾸기 위해서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올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의 능력을 쌓으며 자신의 외모를 가꿔요. 그도 저도 안되면 육신의 힘을 써서라도 자기의 비교상대우위라는 그 자리를 점거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힘 있는 이들이 모여서 폭력집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려고 해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비 온유 선행...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그것으로만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건 사실 비루한 겁니다.
토요일마다 애들과 목욕탕에 가는데 시골이라 그런지 논두렁 양아치들이 와요. 온몸에 손목 발목만 빼놓고 다 문신입니다. 그중에 60이 넘고 여기저기 칼자국이 많은 대장이 사우나에 앉으면 쫄다구들이 들어와서 열중쉬어 하고 서서 안 나가요. 뭐하는 사람이냐 물어서 목사라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매주 만나는데 말을 안시켜요. 근데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불쌍해요. 그 대장은 툭 치면 넘어질 거 같은데 괜히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요. 인간들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사실은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무서워해주면 화를 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시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 욕망, 스스로 구원에 이르고 싶어하는 저질스러운 욕구로 자기의 고독을 메꾸려고 해요. 성경은 그걸 뭉뚱거려서 죄라고 해요.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합니다. 스스로를 열심히 가꾸고 단장하고 성숙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나를 구축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걸 스스로 구원의 자격으로 삼아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 자위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너스레를 떨어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인의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정성과 열심, 그리고 자기의 변화와 성숙이 하나님께 드리는 치성이고, 최고의 정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가꾸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됐다,라는 생각이 들면 마치 얼굴 뜯어고친 그 여자들처럼 당당한 자신감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당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부린 나를 이뻐해 주세요.’라고 요구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겁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왜곡된 신앙생활로 치성을 드려 성취해낸 충만한 자존감과 비교상대적 우월감에 아주 만족하며 살아요. 그래서 그들의 열심은 더욱 더 치열해 집니다. 나중엔 집도 팔아요. 가족도 없어요. 이단들은 그걸 잘 자극해주는 실력들이 있어요.
그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일까요? 그렇게 하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해서 그분에게서 흘러내려오는 그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스스로의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아담들의 처절한 몸부림일까요?
여러분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보이지도 않고, 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추측하지 말고, 조작해 내지 말고, 보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그분을 진짜 사랑하냐구요?
혹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그 이름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어 놓은 건 아닙니까?
성경은 인간의 직접적인 하나님 사랑을 ‘불가능’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들의 치사랑을‘ 이웃을 향한 내리사랑으로 확인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온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그렇게 완성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둘은 정확하게 하나다’라고 하셨어요.
마22:36-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릐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둘째는 그와 같으니’에서 ‘둘째’, ‘듀테로스’가 ‘짝’이란 뜻입니다. 듀오에서 나왔어요. 창세기에서 배웠죠? 샤네, 짝, 듀오. 이 둘은 그냥 짝이야.
‘그와 같으니’. ‘같은 거다’는 말입니다. 이 둘은 정확히 같은 거야.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을 짝으로 하여 나타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아예 하나님 사랑의 부분을 빼버리고 이야기 하기도 했어요.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하나님 사랑이 없죠?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아무리 주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것, 호모이오스라고 하셨다 해도 솔직히 하나님 사랑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아요? 근데 왜 사도들이 그걸 다 빼버렸을까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그걸 즉시 ‘섬김, 드림’으로 재해석해 버려요.
그래서 선지서에서 ‘너희들이 드림으로 망한다’ 하는 겁니다.
‘언제 나한테 드리라고 했니? 드리라는 건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먹으라는 이야기 아니었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잖아요.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섬김 밖에 없어요.
그들의 상식 수준에서는 몸이 부서져라 섬기는 길 밖에 없어요. ‘이걸 사랑이라고 하죠?’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그 섬김의 도구는 당연히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준 게 성경 밖에 없으니까.
율법으로 자신을 담금질하여 인간 중의 인간이 됨으로 해서, 아주 이쁜 여자 중의 여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녀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게 아담들의 ‘자기 구원 프로젝트’입니다. 실제로 여자들이 이뻐지고 싶은 게 남편을 위해서입니까, 자기를 보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입니까? 결국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자기 섬김입니다. 성경은 그걸 우상 숭배라 해요.
그래서 주님도 십계명을 다시 풀어주실 때 하나님 사랑의 부분인 위의 다섯 계명은 아예 언급하지 않으세요. ‘이건 너희들 것 아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 줄게. 그러시면서 6계명부터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걸 넷으로 말씀해 주세요.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증거 하지 마. 이걸 다 알아서 제대로 너희가 이해하고 흘려주면 그걸 사랑이라고 해. 그러면 너희는 온전한 거야.’
이렇게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방식의 섬김의 사랑을 ‘네가 어찌 나를 대적하느냐.’라고 말씀하세요.
재미있지 않아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수많은 이들이 성전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을 섬겼어요. 율법을 지키겠다고 적군이 칼을 들고 쫓아오는데 안식일이라고 뛰지를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목숨 걸고 율법을 지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네가 왜 나를 향해서 그 사랑을 부어? 왜 나를 대적해?’ 하신다니까요. 네가 내 사랑을 받았으면 돌아서서 흘리라는 겁니다.
(영상 18분~ 참고)성전에서 제물을 여기에 두고 여기서 그 죄 사함을 원하는 제사를 드리러 오는 이들이 있죠? 여기서 이 제물을 여기다 놓고, 이 사람들과 이 제물을 자기가 안수해서 연결을 시켜요. 그리고는 이 죄를 여기다가 전가한 다음에 태워서 ‘하나님 받으세요.’라고 드리는 게 제사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내가 언제 너희보고 이런 제사 드리라 그랬어?’ 하시면서 이 마당에 가서 전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제사장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원래 진정한 중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이 제사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서 이리로 넘어가서 여기에 지성소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이리로 사랑을 흘려보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섯 같이 드려버리면 하나님이 ‘니들이 왜 나를 마주보고 있어? 왜 나를 대적해?’라고 하신다니까요.
천간지지라는 게 있어요. 십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입니다. 십간을 하늘이라고 해요.
그리고 땅 지, 십이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이게 뭐냐면, 천간, 하늘의 10가지 기둥을 가지고 12인 짐승에 불과한 것들, 다 짐승입니다. 이것들이 나중에 용으로 대표가 되는데, 그 용이 나머지 11 짐승의 특징을 모아서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짐승의 대장. 그래서 성경에도 용이 나오는 겁니다.
용은 돼지코, 뱀 몸통, 닭발, 쥐 꼬리, 호랑이 이빨, 다 모아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짐승에 불과한 아래의 것들이 이 천(하늘의 열 계명이죠?) 열을 제대로 알아 12이 되면 그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12이 되죠? 10이 12과 하나하나 다 만나면 60이죠? 그래서 40을 불혹, 50을 지천명, 60을 환갑이라고 해요.
환갑은 ‘아 그들이 다시 그걸 깨달아 하늘이 되었구나.’ 이런 말입니다.
환갑상은 늘 같이 밥을 먹다가 그가 이리로 가서 환갑상을 제사상으로 받습니다.
환갑상은 제사상과 같습니다. 당신은 땅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축하했다는 겁니다.
요즘 오래 산다고 환갑을 축하하는 것도 없어졌는데, 그건 이게 뭔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오래 살아서 축하하는 게 아니라 ‘당신은 진리를 알았군요. 그래서 땅에서 죽었군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죽으면 병풍 뒤로 들어갑니다. 병풍은 열폭 휘장을 똑같이 본따서 만든 겁니다. 그 휘장은 언제 찢어지냐면, 그 사람의 육신의 숨이 멎어야 찢어져요. 그 비밀, 무스테리온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걸 하나님을 향해 자꾸 뭔가를 갚으려는 의도에서, 섬김으로 내놓아버리면 하나님은 네가 나를 대적한다고 하신단 말입니다. 그걸 성경이 기특하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아무리 가진 것 중에 최고로 좋은 것, 거기에는 내 몸도 들어가 있다고 쳐요. 아무리 예뻐지고 성숙해지고, 훌륭하게 변화되었다 쳐요. 그런데 그거 하나님이 다 만드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그분께 드려놓고 내 걸 가지고 와서 드렸으니까 ‘나를 이뻐해 주세요.’ 그러면 ‘너 미쳤니. 왜 내 걸 가지고 네가 생색을 내?’ 그럴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 천지만물을 왜 만들었다고 했어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내가 이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샤마임, 그 물이 있는 거기를 설명해 주기 위해 에레츠, 이 땅의 것, 이 세상을 만들어 너희들에게 설명해줄 거야.’
어떻게? 엘로힘으로.
그래서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은 그 하나님, 하늘의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면 이제 소멸되어질 것이죠? 그래서 만든 거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가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래의 것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걸 알았으면, 이 아래의 것은 필요없는 거, 멸해질 건데 그걸 드려놓고 ‘이쁘죠?’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래서 사무엘이 그러는 겁니다.
삼상15:21-22 ‘사울아, 네가 지금 하나님을 섬긴다고 살찐 소, 제물을 남겨뒀는데, 그건 마땅히 멸할 것 중에 좋은 것 아니냐? 결국은 멸할 것, 그걸 하나님이 받고 기뻐하시겠느냐? 하나님의 말을 들으라고 했잖아. 진리를 들어야지. 누가 너한테 그런 것 가지고 오라고 하니?’
생각해 보세요. 성전 안의 제단에서 드려지던 재물이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모형으로 주신 겁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위하여 당신으로 드릴 그 제물, 그 번제단 위의 제물로 보여주신 거잖아요. 우리에게 드리라는 게 아니라.
물두멍에서 우리에게 깨끗이 씻고 오라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늘의 물, 그 말씀으로 너희를 깨끗이 씻겨서 내 백성으로 만들거야.’ 하시는 그 뜻을 알라는 겁니다. 새언약입니다. 그걸 보여주시기 위해 물두멍을 주신 겁니다.
진설병. ‘내가 하늘의 떡, 그 만나, 말씀, 진리로 너희를 먹일 거야. 그러니까 나에게 받아 먹어라.’고 주신 겁니다. 배고프니까 떡 좀 바쳐라,가 아니라.
성전의 모든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그려놓은 겁니다. ‘너희들 나에게 갖다바쳐야 할 것을 모형으로 준다.’가 아니라. 그러면 성전 안의 그것들, 티데미 된 그것들을 글로 적어준 게 성경이니까, 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써야 해요?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섬겨주신 그 진리의 내용이 뭔지 알려고 애를 써야 돼요?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예배당에만 오면 그렇게 갖다 바치려고 하는지... 자기 몸뚱아리까지 바칠려고 한다니까. 하나님은 그걸 대적한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나님 살항, 하나님 섬김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분이 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세요. 왜? 이 천하가 바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생긴 거니까. 당연히 당신의 백성이 이거보다 더 귀하죠.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창세전에 택함 받은 그 백성에게 이렇게 흘려주면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잖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이 쏙 빼버리고 이웃사랑, 그 아가페, 사랑을 그렇게 전해줘. 내가 누군지, 내가 그 사랑이라는 걸 전해줘. 그러면 그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엉뚱하게 네 것으로 나한테 와서 ‘하나님 사랑해요.’라고 갖다 바치지 마.
그럼에도 ‘주님만 영광 받으시라는 둥,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라는 둥, 주님이 다하셨고 나는 먼지라는 둥’ 그런 엉뚱한 소리들을 해대고, 어떤 이들은 그게 부러워서 ‘아 언제 나는 당신처럼 그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러고 신파극들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섬김의 신앙, 드림의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무엇으로라도 열심을 부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걸 만들어 내려고 하는 율법주의 신앙이고, 둘째는, ‘그래요, 당신이 다 하셨어요. 당신의 피, 당신의 십자가가 다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라며 그걸 그냥 우상으로 갖고 있는 것. 이 둘로 나타나요.
둘은 완전히 다른 것 같죠? 그래서 서로들 욕하고 지랄들을 떨어요.
“너희는 율법주의야!” “너희는 너무 방종해!” 이러고 있어요.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아요.
그 십자가, 그 성경, 그 성전을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사람은 반드시 율법적 열심을 부리게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걸 우상화 시켜놓고 나는 거기서 제외시켜 버리는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똑같은 놈들이 서로 대척점에 서서 서로 내가 잘 났다고 다퉈요.
주님이 다하셨고, 나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그 십자가, 그 주님을 섬기는 데, 기념하는 데에 머물겠습니다.’ 이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건 내 밖의 우상입니다.
내가 주님이 하신 일의 진의를 마음으로 알았다면 그 예수와 그의 하신 일은 섬김과 기념의 대상으로 길이길이 보전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오는 ‘너희들이 성찬식 하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건 다 ‘기억하라’입니다. 기념하긴 뭘 기념해요. ‘내가 무슨 의도로 그걸 하라고 했는지 꼭 기억해!’라는 말이지, ‘나를 기념해!’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그 내용을 진의로 알아먹었으면 즉시 두들겨 패서 파괴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아이테오’ 구하라, ‘제테오’ 찾으라, 그 다음에 ‘크루오’ 두드려서 부수어라가 나오는 겁니다. ‘너희들이 구하고 구해서 찾으면 너희들은 섬김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던 그걸 두드려서 부술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뭡니까? 내가 문이라고 했던 예수입니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분을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집 지어 놓고 입주식을 할 때, 대목수가 문을 이렇게 다는데, 문을 잘라서 달지 않습니다. 원래 이렇게 하나로 나무를 대어놓고 입주식 할 때 톱으로 위로부터 이렇게 깨요.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박을 밟아서 깨고, 불씨 들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은 두드려서 깨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 문을 두드려서(나카) 살해할 목적으로 패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 그 씨(제라)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기 위해서 주신 이삭이라는 아들을 알았지? 그러면 가서 죽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건 너에게 더 이상 필요 없어.’ 하실 때 아브라함이 ‘맞아요. 제가 알아야 할 건 그거죠. 이삭이 아닌 거죠. 하나님이 나를 제라, 그 후손, 그 아들로 만들어 내셨다는 그 진리를 말하는 거죠.’ 했을 때, 그 자손이 진짜 약속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그걸 죽여야.
바울이 당시 율법주의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됐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런 편지를 썼어요.
갈 5:11-12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나는 너희에게 할례를 전하던 사람이다. 할례란, 택한 백성이란 표식을 스스로 자기 몸에 스티그마타, 흔적으로 남기는 겁니다. 당시는 날카로운 칼이 없었기 때문에 돌을 깨서 날카로운 조각으로 표피를 잘랐습니다. 많이 아프고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세겜이 디나를 강간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해야 동생을 준다.’며 모두 할례를 하게 하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아기들은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했어요. 할례는 ‘내 몸을 드려서라도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나는 변하고 말겠습니다.’ 하는 의지였습니다. 이게 나쁜가요? 예!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셨어요. ‘내가 할례를 그런 식으로 너희에게 주었느냐?’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구장창 그런 할례만 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겁니다. 당연히 자기도 할례, 율법을 전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했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니 내가 십자가를 전할 때 거치는 것들이 생기는 거죠.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율법으로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율법으로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아포콥토
너희들이 내가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너희들을 미혹하는, 너희들을 어지럽게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지금 있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것이 계속 하려면 아포콥토, 아예 자르라고 해. 이런 말입니다. 비아냥입니다. 베지 말고 아포콥토, 아예 싹뚝 잘라. 이런 말입니다. 그거 그렇게 좋아하면 아예 잘라버려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자유를 위해 너희가 부름받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할례만 하고 있어? 네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어? 아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그거 준 거 아니냐. 이런 말입니다.
갈5:14 온 율법은 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 하나님께 네 몸 드려서 뭐 할거야? 그렇게 좋으면 잘라!’ 이런 말입니다.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너희들, 서로 그 진리의 말슴을 흘려줘야지. 그게 하나님 사랑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푸쏘미조. 먹을 것을 공급하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너희들을 먹이고, 그런 말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그게 사랑이 아니냐? 그게 무슨 구제고, 무슨 선행이냐?
이런 뜻입니다. 근데 왜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해? 사랑으로 기쁘게 해.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생명, 생명’ 하니까 자꾸 여러분이 오해를 하시는데, 나라는 존귀한 존재를 위해서 그 하나님이 자기 목숨까지 끊어버린 겁니까? 십자가가 그런 겁니까? 하나님은 영이신데 어떻게 생명을 잃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는 것’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건 신의 자기계시입니다. 신과 인간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 신입니다. 그런데 신이 자기를 계시하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너희에게 만큼은 내가 신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너를 나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걸 신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주셨다는 게 뭘 줬다는 겁니까? 진리의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단순히 목숨 끊었다는 게 아니라. 그거에 너무 감동받지 마시라니까요. ‘나 같은 걸 위해 예수가 죽으셨대.’로 가지 말고 ‘그분이 갖고 있는 유일한 생명, 이 세상에는 없다던 그 생명이 거기 있었는데, 그 생명이 그 생명을 담은 육이 터져버리자, 언약의 기둥에서 터져버리자 그것이 영으로 나에게 전해졌다.’가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을 전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육신이 하신 일과 그분의 육신이 하신 말이 나에게 율법이냐, 아니면 어떤 감동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다가 그것이 삭제됐을 때 나에게 진리로 이해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육인 예수가 죽는 거네요? 그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명이 나에게 오는 거잖아요. 그런 이야기지, ‘나같이 이런 존귀한 아들을 위해 하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전해서 그가 생명을 얻게 하고 내가 죽는다는 건 뭡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설명하면 그 사람이 진짜 창세전에 택함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때, 그런 거구나. 저 사람이 대단하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니면 열심히 자기를 계발해서, 성숙시켜서 하나님께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 진리, 그 사랑, 그 은혜가 저를 구원한 거구나, 라고 그의 육이, 전한 자의 육이 먼저 죽는 겁니다.
그리고는 생명이 내 안에 있던 생명이 그에게 나누어지는 거고, 그게 나를 죽여 그에게 생명을 주는 거지! 내가 죽도록 고생해서 어떤 이를 구원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뭘 전도한다고, 뭐 그렇게 죽도록 고생을 해요? 다들 듣다가 안 들으면 말고 그러지.
우리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육적 공생애를 삭제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말씀을 진리로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 사건이, 육적 공생애와 그 예수가 아무도 구원 못했단 말입니다.
그 육이 삭제되어야 그것이 의미하던 진리가 영으로 침투해 들어올 거 아닙니까? 그게 예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훌륭한 이름을 남기기 위해 뭔가를 구축해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삭제당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이 일을 하시는 그 기적의 현장의 증인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는 뭐 대단한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의 육이 삭제되고 그분의 공생애 전체가 그냥 삭제되어 버리고, 아무도 못 구했으니까, 그분이 이제 그 진리로, 진리의 영으로 살아나시자 많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붙어서 죽으신 그 죽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제라, 씨를 심어놓고 죽으신 죽음이었넌 겁니다.
우리도 그러한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주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사랑이었어요.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사랑해야 돼요?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육을 부정당하고 그 안에 아버지가 사랑으로 부어주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딱 한 번 밖에 안하세요. 많이 하신 것 같죠? 아니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 그랬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말은 딱 한 번 밖에 안했어요. 언제?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해. 그러니까 그 아버지 뜻대로 죽을 거야.’ 이 말 할 때 딱 한 번 했어요.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깨지게 되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담아놓은 진리가 많은 열매가 되어, 씨가 되어 당신의 택한 아들들에게 들어갈 거야. 이게 네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야.’ 거기서 딱 한 번 말했어요.
요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주님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육체가 삭제당하고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영으로 전달해주는 거였습니다.
그게 십자가고, 그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준 것 뿐입니다. 이게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입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잘 보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내려온 것처럼 나도 저희에게 이 사랑을 흘려보내 줬대요. 그런데 그 사랑을 받은 자가 어떻게 되나 보세요.
요10:17-18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레위기를 보면 주검은 절대 만지지도, 가까이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주검 ‘hl;ben](5038, 네벨라)’는 ‘스스로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레 17:15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자는...
레 22:8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그러면 스스로 죽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주님도 ‘스스로 죽는다’고 하세요. 자살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스스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내 목숨을 붙들고 있는 이가 허락을 한 하면 스스로 죽을 수 있어요? 못 죽습니다. 그러면, ‘아 죽고 싶어. 나 죽을 거야.’ 하는 자들은 다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 죽는 게 아닙니다. 그 생명, 그 호흡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가 허락을 해야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어요.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이는 누구? 이 땅에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데리고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죽일 권한이 없어서. 그런데 빌라도는 ‘아무리 봐도 너는 정치범이 아니다.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너 죄 없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게.’ 했는데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빌라도는 죽일 마음이 없었고, 이스라엘은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때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죽는 건 ‘아 이 육은 이것 자체로 가치가 아닌 거로구나.’라고 알았을 때, 그걸 ‘스스로 죽는다’ 해요. 근데 자살은 이 육이 너무 가치 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돼서 죽는 걸 자살이라고 해요. 그건 스스로 죽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죽는 건, ‘이 육신이란 건 진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거구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나에게 주신 거구나.’ 알면, 그때는 이거와 상관없게 되죠? 그걸 스스로 죽는다고 해요. 그래서 성도도 맏아들인 예수와 똑같이 그 진리를 깨닫게 됐을 때 ‘그렇지, 이건 아니지. 이게 생산해낸 걸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어?’라고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게 스스로 죽는 겁니다.
그러면, 그 스스로 죽은 이가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근데 성경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니까 만지지도 말라’라는 건 ‘너희가 예수를 통하여 너희가 그게 뭔지를 알았다면 그 스스로 죽은 그건 이제 버리고 돌아서서 그 사랑을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그걸 기념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은 것, ‘네벨라’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일부러 그런 단어를 갖다 썼어요.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도 스스로 죽어 진리를 전하면 우리는 당연히 스스로 죽게 되는 겁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이야기 하는 거니까. 뭐라고 해요?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게 다 그런 이야기라는 겁니다. 친구를 위해서 그냥 목숨도 버리고 희생하란 말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성경은 언약의 기둥에서 당신의 육과 생애를 삭제 당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신랑이라고 해요. 율법으로 오신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첫 번째 남편, 죽어야 하는, 죽기 위해 오신 남편입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죽고 새로운 신랑이 오는데 그 새로운 신랑은 불의 혀처럼 오시는 혀, 텅, 말이라는 신랑입니다. 말씀, 그리스도의 영, 프뉴마라는 새 신랑입니다. 그 이야기가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첫 번째 신랑, 두 번째 신랑. 그건 제가 수요일날 그 새 떡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그 떡! 그걸 밑에서 주님이 새 떡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제가 설명해 드릴 게요.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다시피 신랑이라는 개념은 ‘연합’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랑이 없는 과부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제의 대상을 ‘고아와 과부’라고 하는 겁니다. 그 귀네, 네케바, 신부에게 꼭 필요한 반쪽, 그 분깃, 기업의 의미로 동원된 게 신랑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는데, 그게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 사람을 ‘하 아담’이라고 하고 남성 단수로 씁니다. 그런데 이 하 아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할 때는 ‘자칼과 네케바’란 말을 써요.
남자와 여자를 합쳐서 남성 단수로 씁니다.
그러면 보세요. 원래 ‘남자와 여자’는 ‘이쉬와 이샤’라고 하는데, 여섯 째날만 ‘자칼과 네케바’라고 하고 ‘남편과 아내’의 개념으로 써요. 그래놓고 ‘이건 합쳐서 하나야’라고 해요. 하나님이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걸 배우라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항상 이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되고,
남자와 여자가 잠자리에서도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에하드, 통일, 하나, 연합’입니다.
네케바라는 그릇이 자칼이라는 내용을 받으면 요철처럼 딱 합쳐지는 겁니다. ‘반과 반이 합쳐져서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반씩 나누어져 버리면 이걸 ‘독처’라고 하고, 그건 ‘로 토브’, ‘선하지 못하다, 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관계없이 그냥 홀로 있으면 인간은 물론 하나님도 악하기로 결정해 버린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아내, 신부를 만들어 내셔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면 이 남편이 아내에게 가서 아내를 아들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신랑을 성경은 또 부모라고도 해요. 이게 다 말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리의 남편이 그 진리의 말씀이고, 우리를 낳는 아버지, 어머니가 바로 그 말씀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한 군데도 없고, 전부 나를 낳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낳아주는 그 말씀을 가치 있게 여겨야죠. 공경해야죠. 자랑해야죠. 그게 사랑인데. 그게 말씀을 전하는 거고.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신랑이 신부와 연합을 하게 되면 그 존재가 아들이 돼요. 비로소 그에게 생명이 부어지게 되어 아들로 탄생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랑에 의해 신부가 아들로 탄생하는 겁니다. 따라서 신랑은 그 여자를 아들로 만드는 반쪽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부모라고도 하고.
엡5:31-32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이야기네요. 그건 하나님과 교회, 우리의 이야기래요. 그게 하나가 되어야 그것이 바로 ‘아들로,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거다’ 이걸 설명해주기 위해 결혼이란 걸 만들었대요. 신랑과 신부라는 걸 만들었대요. 이건 창세기 2장 24절을 그대로 옮긴 겁니다.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연합하여’ 다바크는 ‘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밀착)’는 뜻으로 ‘아교로 딱 붙어버렸다’는 겁니다. 남자가 떠난다는 말, bz"[;(5800, 아자브)는 ‘용서’라는 말이 있어요. 남자가 용서하기 위해 떠나는 겁니다. 어디로 떠나요? ‘에트 아브, 에트 엠’ ‘아버지와 어머니로(?)’ 떠나 여자, 이샤에게 가서 딱 붙어버려요. 딱 붙어버리면 ‘바사르 에하드’ 한 몸을 이룹니다. 에하드, 통일, 연합이죠. 그게 연합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났으니까 시댁 가지 마, 떠났으면 그만이지, 이런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떠나오셔서 붙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하늘에 계신 그 말씀을 ‘어머니’라고 해요. 새 언약을 어머니라고 하고, 그걸 아버지라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집, 성전을 아버지라고 읽는다고 했어요. 내가 그 말씀을 안에 가져 하나님의 집이 되면 내가 또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는 게 그 말입니다. 내가 또 아버지가 되어 누군가를 또 낳죠?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 말씀으로 낳은 아들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죠?
‘맏아들’ 첫째는 항상 그 나머지 것들의 대표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아들로 만들어내는 지를 보여주는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하는 겁니다.
그분이 맏아들이면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되겠네요?
예! 우리 안에 진리가 있으면 우리는 그렇게 존경받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 말씀이 찬송을 받는 자가 된 자이기 때문에 내가 그 언약의 기둥에서 파괴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맏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아버지고 어머니입니다. 나를 아들로, 생명으로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부모, 진짜 생명으로 낳는 것이 그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진리라는 씨를 가진 아들을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하잖아요. 그건 우리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서 또 그 사랑을 이렇게 전해주는 것, 그걸 아버지 사랑이라고 합니다.
엉뚱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놓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너는 아들로 낳아져라’ 그 말을 십계명에서 이렇게 쓰는 겁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나타내라, 영화롭게 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영화롭게 하다, 독사조. 오늘 본문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해. 카바드, 영화롭게 해. 너를 낳은 그 말씀, 그걸 드러내, 나타내. 자랑해.
그러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 말씀이 내 안의 생명이다, 땅에서의 너희들의 진짜 생명이다.
땅 많이 준다, 장수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래 살면 뭐할 겁니까?
그게 생명이죠. 내 안에 있는 그 말씀을, 그 생명을 흘려주는 게 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네 생명이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짜 생명은 그것 밖에 없어.’ 이런 말입니다.
엡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퀴리오스. 주님)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너희를 낳은 그 부모, 그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약속 안에서의 최고다. 나머지 계명은 모두 이리로 수렴된다.)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그게 선이야. 그게 잘 되는 거야. 그게 네 생명이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런데 그걸 율법으로 전해주면 아비라는 작자들이 자녀들에게 짐을 지우는 일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겁니다. 주의, 그리스도의 교양과 훈계로 그들을 양육하라, 노엽게 하지 말고, 짐으로 힘들게 하지 말고. 주님은 고르반을 들어서 그러한 율법과 진리로 설명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마15:2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파라도시우스, 전통적인 율법)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떡 먹을 때 손 씻으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떡을 먹을 때 너희들이 깨끗하지 않으면 너희는 그 떡 못 먹는다는 의미로 준 율법인데 그들이 손만 씻고 있었습니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너희들 그게 부모 공경하는 거냐? 그게 너희들을 낳는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열심히 부모 공경하는 거야? 그건 부모 훼방하는 거야!)
[註. 훼방하다 kakologevw(2551, 카콜로게오) 비방하다, 저주하다. 카코스(악한, 나쁜)와 로고스(말씀)가 합쳐진 단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내가 드려서 나에게 유익하게 될 것을 내가 드리기만 하면 그게 그 아버지가 원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보세요. 갑자기 떡 먹을 때 손 씻는 이야기에서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까지 왜 오겠어요? 이건 주님이 ‘율법의 이야기를 진리로 이해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너희들이 그걸 그냥 드려버리는 걸로, 너희들이 손이나 씻는 걸로 그렇게 이해를 하고는 너희들은 그 부모를 공경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게 말씀의 전부라고 한다면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 하시는 겁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보세요. 사람의 계명, 율법입니다. ‘교훈, 도덕과 윤리로 가르쳐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헛되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많아요?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듣고 깨달아! 손만 씻지 말고. 그렇게 자기 안에 들어와서 자신을 아들로 낳아주는 부모로서의 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한 그 상태를 ‘의’라고 하고, 그 부모를 자랑하고 전해주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 독사조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했다(프로오리조)’는 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 울타리를 미리 쳐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프로’ ‘이전’이란 전치사와 ‘호리조’라는 동사의 합성입니다. 호리조는 ‘울타리를 치다, 결정짓자, 경내’ 이런 말입니다. [주: 어떤 주석에는 프로오리조가 프로(prov, 4253: ~전에, 앞에)와 호르코스(oJrivzw, 3724: 결정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미리 결정하다, 예정하다, ~의 운명을 미리 정하다'를 의미한다고..]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경내에 두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진짜 중요했던 게 뭐였냐면 성전이 아니라 성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돌아오자마자 재건한 게 성벽입니다. 성벽은 뭐냐면,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이렇게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쳐놓고 여기는 하나님 백성, 밖은 이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걸 매우 중요시하면서 성벽이 무너지면 이것부터 지었습니다. 미리 정하셨다는 건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백성들을 이미 이 울타리 안에 넣어놓으신 겁니다. 그래놓고는 이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시는 겁니다. 이 울타리 안으로 말씀을 의지하여 들어오라고.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와라, 들어가라’ 그런 말을 많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어떻게 한다고 해요? ‘의롭게 한다!’
그러면 ‘의롭다’가 뭡니까? 디카이오, 의롭게 하다. 명사는 디카이오쓰. 헬라어에서 오미클론 시그마가 붙으면 항상 ‘존재’를 말해요. 이걸 ‘의, 공의’로 쓰는데, ‘좌와 우가 없이, 그것과 무관한 자로 똑바로 서버리면, 선과 악에 관계없이 똑바로 서면 그걸 의라고 해요.
그리고 그 ‘의’의 내용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디카이오스’는 ‘하나님’이라고도 해요.
그리고 그 의와 연합된 자를 ‘의인’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그 디카이오스, 이 의를 그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에 갖게 되어 선악, 좌우, 죄와 의, 이런 거에 상관없이 되어버리면 그를 의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를 ‘디카이오쉬네’ 의라고 해요. ‘-쉬네’는 내가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상태, 그래서 그게 내 안에 있으면 그게 나잖아요. 그 상태를 디카이오쉬네라고 해요.
자, 다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디카이오, 의롭게 해버리시면, 그 의롭게 하는 게 뭐냐면, 우리 안에 이 ‘디카이오스’ 의를 집어넣으신 건데, 그 의는 말씀으로 좌도 없고 우도 없이 똑바로 위로 서있는 그것, 하나님입니다. 그걸 내가 받게 되면 내가 ‘디카이오쉬네, 의’가 되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의를 가졌어요. 그래서 ‘이게 그거구나.’라고, 좌도 우도 없는 걸 드러내는 걸 뭐라고 해요?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보이게 나타내는 걸 ‘영광!’.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은 당연히 영화롭게 되ㅣ어 있어요. 그 일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롭게 하다’가 그 말입니다. 하나도 안 어렵죠?
뭐, 좋은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육을 부정, 삭제당하고 그 진리, 그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다 과거시제입니다. ‘의롭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번복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고, 전하고 하면 조금은 자기를 자랑하고 싶잖아요.
내가 너보다 많이 아니까, 그래서 내가 너에게 말해 주는 게 아니겠니?
진짜 제대로 전하면 그 사람이 나를 존경해주는 게 아니라 나를 그렇게 만드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어 있어요. 대신에 열심히 노력한 건 치하해 줘야죠. 고생했다고.
너무 물로 봐요. 이 교회는 목사 권위가 너무 없어요. ㅎㅎ
그 영광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 다음주에 대단원의 결론을 내드릴 게요.
하나님의 백성이 나타내야 할 영광은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진리의 말씀을 흘러내는 것과 그 진리의 말씀이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부인되는 자기 육신으로 이렇게 축약이 되는 겁니다. 그게 ‘독사조, 영광을 드러내다, 영화롭게 되다.’입니다. 그걸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1:23-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거듭난 것, ‘ajnagennavw(313, 아나겐나오)’ 위로 다시 난 것은 썩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그게 씨다. 너희에게 씨가 있다.)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
그 말씀이 씨로 내 안에 들어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대요.
내가 풀이고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진다’고 해요. 그러나 ‘말씀만 세세토록 있다’고 해요.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씨’인데 그 씨가 너희에게 들어가면 너희의 육신이 마르고 너희의 꽃이 떨어진다고 해요.
떨어진다, 에크핍토는 ‘스스로 떨어지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죽다’ 그 꽃은 누구? 나에게 붙은 예수 그리스도. 다음 주에 설명할 게요.
성경은 풀이란 개념을 ‘씨가 없음’이란 뜻으로 써요. 진짜 풀이 씨가 없나요?
그런데 굳이 그런 개념을 성경이 동원해서 써요. 풀은 씨가 없다.
그런데 풀이 뭐래요? ‘우리’라고 해요. 그러면 풀이 씨를 갖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사과나무를 심었어요. 봄에 잎이 나고 파릇파릇 나무가 살아나요. 그런데 씨가 생기려면, 열매가 맺히려면 꽃이 피어야겠죠? 꽃이 피고 그 꽃이 떨어지면 씨방이 생기고, 그 씨방이 열매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씨가 생기려면 반드시 꽃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이 예수님을 ‘들의 꽃’이라고 해요. 들은 물이 없고 씨가 없다는 뜻의 상징이니까. 이 꽃이 풀에 와서 붙는 거죠? (나중에 로마서로 또 설명할 거니까 그때까지 참으세요.) 꽃이 풀에 붙으면 당연히 씨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씨는 반드시 꽃이 (스스로)떨어져야 돼요. 떨어져야 씨가 생기고, 거기에서 생명이라는 열매가 생기게 됩니다.
이걸 성경이 무화과로 설명해 줍니다. 무화과란 ‘꽃도 아닌 것, 열매도 아닌 것’이란 뜻입니다. ‘꽃이 없이 과일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화과란 열매 자체가 열매가 아니라 꽃입니다. 그래서 열매없는 나무의 대표로 무화과가 쓰인 겁니다. 그 안에 바삭하게 씹히는 건 수술 머리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는 심어놓으면 자기만 커져요. 인간들과 똑같아요. 나누기 싫어하고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커지는 것이 무화과입니다. 무화과는 항상 꺾꽂이로 번식을 시켜줘야 해요. 누군가의 손에 항상 닿아져야 합니다. 무화과는 씨도 없고, 꽃도 없는 것이 열매인 척하는 그런 나무입니다.
근데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 나무가 있었어요. 나무는 단수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아니라. 나무 하나입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겠죠? 그걸 따먹고 금방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라는 걸 깨닫고 하나님을 탄핵했어요.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옷이라도 입혀놓았어야지.’
그게 선악 구조 속의 아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띠-‘하고르’ 치마가 아니라 ‘띠’입니다.-를 해 입어요. 그래놓고는 ‘그 나무 뒤로 숨었다’ 그래요.
선악과라는 건 열매도 아닌 것이 열매인 척 하는 무화과나무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고작 그거의 잎사귀로 너희의 부끄러움을 가리려할 텐데 그걸로 내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올 수 있을 것 같아?’라는 걸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이렇게 꽃도 없고 열매도 못 맺는 이걸 하나님이 포도원에 심으시고 ‘내가 너에게서 반드시 포도송이를 딸거야.’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게 가능해요?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는 것도 이상한데, ‘내가 기다린다. 열매를 따고 말거야.’라고 하세요.
이건 우리 이야기입니다. 씨도 없고 열매도 없는 것에 꽃이 가서 붙어 그것이 떨어지면, 다른 말로 우리가 진짜 씨를 받게 되면, 그 예수는 떨어지는 꽃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늘 만개해 피어있으면 안돼요. 그건 조화(造花)입니다. 인간들이 조작해놓은 예수.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에서 지우는 걸 너무 불경스럽게 생각해요. 그래서 늘 살려놓아요. 그러면 그분은 안 죽은 예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늘 희생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어 있어요. 아니면, 거기다가 그냥 살려놓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다하셨어요.’ 이러고 앉아 있는 겁니다. 둘이 똑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의 영광이 모든 영광, 사람(안드로포스)의 모든 영광은 이 꽃 같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다는 거죠? 여러분은 씨 심고 떨어져 죽으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독사, 영광입니다. 다음 주에 결론을 맺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그렇게 떨어지는 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활짝 핀, 만개한 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이렇게 늘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더 잘게 부수게 하셔서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뭔지,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것이 뭔지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전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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