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90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롬81925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7

로마서 90번 말씀

 

제목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본문 롬 : 8 : 19- 25

 

(로마서 8:19-25)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 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피조물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에 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피조물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말씀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호 코스모스의 이 세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을 붙들고 있는 법칙과 원리 이 모든 게 전부 말씀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지어졌다는 것이죠. 그냥 우연히 우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생겨난 것 중에. 그런데 이 세상 만물을 나타난 모양으로만 인식을 하여 그 표피적인 것에만 가치를 먹이고 그것에 묶여버리면 피조물은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 세상에 그냥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 하나님의 그 능력의 장중 밖에서 함부로, 우발적으로 나타나거나 생겨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그 뜻을 담지도 않고 지 맘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건 다 하나님의 뜻, 그 말씀을 담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덮개도 벗고ㅡ그게 아들들의 나타남이라는 단어라고 그랬죠. 자기들의 덮개도 벗어버리고 피조물들의 그 진의, 그 피조물들의 존재의 목적과 그 역할도 그 진의대로 밝혀주고 나타내주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고 바울이 기술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이 크로노스의 세상 적 존재의 그 목적과 역할이 그 진의대로 읽혀지고 인식될 때, 그 상태를 해방 ‘아폴리 트로시스’라고 그러는데, 해방, 풀려남이라고 하고 자유, ‘엘류데리야’, 자유라 그래요. 해방, 혹은 자유라 그래요. 그게 21절과 23절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들보고 그러는 거예요. 율법에,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아래 것의 그냥 문자에 묶여버린 그들에게 너희들은 종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믂여본 적이 없어, 서로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네가 마귀새끼야! 이렇게 이야기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이 크로노스, 이 아래의 이 역사 속에서는 여전히 이 나타난 형상 안에 갇혀서 지낼 수밖에 없잖아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이상한 혼령이나 귀신 이런 거에 속지 마세요. 그런 거는 없는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지 그런 거는 없는 겁니다. 갇혀서 지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요.

 

22절에 보시면 바울은 그 상태를 ‘시노디노’, 해산의 고통이라 그래요. 그냥 그 존재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어. 알고서 그 존재에 여전히 그 아래에 이 나타난 현상에 여전히 갇혀있는 그 상태를 ‘시노디노’, 고통이라고 그래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받는 함께 받는 고통. ‘시노디노’. 피조물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당하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타난 현상. 즉 몸속에 갇혀 있는 거라고 해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갇혀서 살아야만 하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이 해산의 고통과 같은 처절한 시간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이 비 진리의 세상과 대척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바벨론 길거리에서 다 죽는다고 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알고 보니까 온 세상이 손에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어, 우리는 하나님과 한 멍에를 하고 뒤로 가는 거네? 뒤의 방향으로, 인간의 그 가치와 또 그들이 그 가치라고 추구하고 있는 그 선상에서 그들은 빠져나와 뒤로, ‘메타노이다’ 회개라고 그러죠? 유턴을 해서 뒤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런 것을 인식한단 말에요. 그것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게 아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의 그 육신과 행위, 그 율법과 그 세상의 무력함과 무용함을 이미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알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리로 되돌아가고 있는 나, 이걸 인식하는 게 고통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아, 도대체 나는 알고도 왜 이 모양이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심지어 나중에는 내가 진짜 구원받은 거 맞나? 이리로까지 간다니까요.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나 루터같은 사람도 진짜 그게 진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혹시 나 이렇게 그냥 쓰기만 하다가 지옥 보내려는 거 아닙니까? 이런 일기를 썼다니까요. 왜냐하면 지가 자기는 알거든요. 그러니까 난 구원받지 못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이렇게 써서, 자기가 설교하면 막 몇 천 명씩 돌아오고 그런단 말에요. 그러니 날 사용만 하는 건가? 이런 자괴감까지 갖게 만들어버린단 말입니다. 그게 고통이에요. 해산의 고통.

 

물론 성도는 그럴 때마다 그래서 내게는 은혜가 필요한 거지, 라고 더 깊은 은혜의 장중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그건 굉장히 큰 고통이에요. 우울하고 외롭고, 고립되고. 고립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럴 때 진리를 안 피조물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탄식! 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탄식! 아!! 이거. 장탄식. 도대체 넌 어떻게 된 인간이냐? 내가 나를 보고.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그걸 못 알아먹고 계속 그 자리에 있어? 이것. 이걸 탄식이라고 그래요. ‘씨스테나조’. 그래서 그들은 그 몸에서의 그 풀려남. 그 몸의 구속. ‘호 아플로투로시스 호 소마’ 몸의 구속. 몸에서의 풀려남. 몸에서의 해방. 그래서 얻는 자유. 이것을 간절히 열망하게 된다. 이렇게 오늘 본문이 쓰는 거죠?

 

그러나 하늘의 존재들이 이 크로노스, 땅의 시간 속에서 나타난 형상을 입고 보내야 하는 그 시간을 바울이 <참음> 이라고 써놨죠? 거기에. 참음. 인내라고도 번역을 하는데요. 개역성경이. 그게 ‘휘포모네’ 예요. ‘휘포’가 뭐, 뭐 아래에. ‘모네’가 머물다. 거하다. ‘메노’에서 변형된 거니까. 머물다, 거하다예요. 그러니까 아래에서 아래 것을 입고 머물다. 이렇게 써놓고 그걸 인내라고 써요. 성도에게 해당되는 단어에요. 이것이요. 그러니까 뭐 남편이 괴롭히는 거 그냥 이를 악물고 꾹 참다가 나중에 힘없을 때 막 두들겨 패는 게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거라고 그랬죠? 그 진리를 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아래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살라는 그 시간까지 살아있는 그걸, 그게 고통인데 살아있어야 하므로 ‘휘포모네’, 인내라고 그래요. 그걸. 참음이라 그래요.

 

자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아래의 세상에 머무는 모든 시간을 ‘휘포모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로마서 8장 25절까지 제가 한절, 한절 다 풀어드린 겁니다. 한 단어 한 단어 다 풀어드렸어요. 맥이 싹 통하잖아요? 그죠? 1장부터 8장까지 전부가 다. 그런데 24절에 보이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소망이라는 게 나오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국어사전의 개념의 그 소망이라는 건 보이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보이는 소망,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소망으로 구원 얻으셨어요? 믿음으로 구원 얻었죠? 그럼 소망으로 구원 얻었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에베소서 2장 8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잖아요? 그런데 왜 바울은 ‘에피스’, 소망이란 단어를 여기에다 써놓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얻었지? 그런데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냐? 보이지 않는 소망이 소망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알 듯 모를 듯. 성경이 말하는 그 소망은요 미래에 있을 것에 대한 막연한 어떤 기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런 것을 소망이라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닥치게 될 어떤 것. 필연적인 거예요. 안 올 수가 없어요. 분명히 닥치게 될 어떤 것. 혹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 그러나 묵시 속에 있어요. 그건.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에 완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건요. 그것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 살고 있으니까. 이 시간 속에서 그것을 모형으로 내가 간직하고 있거나 문득 문득 인식할 때 그걸 소망이라 그래요.

 

‘엘피스’라 그래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소망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에겐 소망이 있지, 무슨 소망? 하나님이 우리 천국 보내주신다는 그런 소망이요? 확실해요? 그거요? 확실해야 소망이라니까요. 확실해야.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안 돼요. 그런데 계속 흔들리잖아요? 그 소망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헬라어 스트롱 사전을 찾아보면 그 ‘엘피스’ 소망이란 단어를 딱 찍어보면 확신이란 뜻도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있어야 될 거예요. 반드시 나에게 닥칠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걸 이 땅에서 모형으로 갖고 있어. 아 이게 그거지? 라고 이걸 내가 보고 그걸 봤으면 요거, 내가 갖고 있는 요걸 소망이라고 해요.

 

어디 내 안에 있는 기분, 감정 이런 게 아니라 나타난 모양 그걸 소망이라 그래요. 역사 속에 나타난 모양. 그러니까 그 소망이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에요. 믿음이 뭐예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며 요? 바라는 것들. 저기 있는 그것들. 내가 진리를 통하여 아, 그거? 그것을 내가 바라야 되는 거지. 그게 소망이죠? 그걸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 눈 앞에 이 땅에 실상으로 와 있는 걸 믿음이라고 그런다니까요. 내가 이를 악 물고 믿어주는 게 믿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 1절 보세요.

 

히 11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보세요. 믿음이라는 거. ‘피스티스’ 라는 건요. 바라는 것들, 그것들의 실체, 실상으로 이 땅에 나타난 실상.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표적이나 어떤 것으로, 표로 증거로 와 있는 걸 믿음이라 그런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갖고 내가 그렇지! 이거지. 이것들이 이야기하는 거. 이 믿음들. ‘피스티스’ 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거 이야기하는 거지, 라고 알고 내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피스토스’ 오미크론 시그마를 붙여서 내가 된 존재를 이야기하거든요. 헬라어에서 오미크론 시그마가 뒤에 붙으면?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피스티스’라는 믿음을 갖고, 실상, 증거들을 갖고 내가 그렇지! 그게 그거지! 라고 그걸 알게 되어 내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피스토스’라 그래요.

 

그걸 제가 예전에 뭐, 가난한 표현이지만 객관적 믿음, 주관적 믿음. 이렇게 나누어서 설명해 드렸는데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죠? 그죠? 객관적 믿음이라는 건 나와 상관없이 이렇게 밖에 증거로, 실상으로 제시되어 있는 어떤 것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해 놓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믿음은 하나님이지. 라고 이야기도 해드렸던 거죠. 그것들을 갖고 그 하나님을 진짜 알아버렸네. 그러면 그게 나의 주관적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나니, 가 이런 거란 말에요.

 

자, 이게 뭐냐 하면. ‘피스티스’라는 건 믿음의 구원의 차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로 이렇게 차서 있게 딱 딱 딱 딱 세워주시면 고걸 피스티스라 그래요. 그래놓고 믿음이라고 읽어요. 그러면 이거를 갖고, 이 피스티스를 가지고 아, 그게 그거군요. 라고 알아버리면 이것도 역시 믿음이란 뜻인데 여기에 오미크론 시그마가 붙으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거지! 라고 내가 마음을 갖게 되면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나를 또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믿음, 믿어지지도 않는 걸 그냥 억지로 그냥 ‘믿는 거야! 믿고야 말거야!’ 이게 믿음이 아니라니 까요

 

자 이렇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보이는 것 속에서 깨닫고 인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는 성전, 나타난 제사 이런 것들을 통하여 그런 성전의 하나하나 차서들 있죠? 질서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통하여 그렇지. 이게 은혜지. 그렇지 이게 사랑이지. 그렇지 이게 하나님이지. 라고 알아먹게 되면 고 차서를 갖고 내가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 뜻이란 말에요. 성경이 말하는 게. 그러면 그 성전과 제사가 믿음 되는 거고, 소망이 되는 거죠? 나타난 거니까. 그거요.

 

마찬가지에요. 보이는 이 세상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진리로 읽어 내게 되면 이 세상이 다 믿음인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랬잖아요. 이 세상천지 만물에 나의 능력과 신성을 전부 부어 놓았다, 그랬단 말에요. 그러면 이 세상은 진리의 눈으로 보면 전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으로 보여야 되는 거 아닙니까?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통하여 내가 믿음을 갖게 됐으면, 진리를 알게 됐으면 그 세상이, 온 세상이 또 믿음이네요.  호 코스모스가.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은 내 안에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서 난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나타난 이 증거들, 실상, 믿음으로 그걸 깨달아 내가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억지로 믿어야 돼! 이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그냥 믿어지지 않으니까 산에 가서 내려오지도 않고 40일 50일 60일, 남편하고 애들은 집에서 굶어 죽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그러고들 앉아 있다니까.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게 믿음이 아니고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실상. 증거. 표. 이런 것들. 거기엔 예수도 있고 성경도 있고 성전도 있고 세상도 있고. 다 아래 것으로 준 거잖아요. 그것을 통하여 내가 이게 믿음이지, 이게 구원이지, 알았으면 내가 ‘믿음’ 으로 ‘믿음’ 이 되어 구원받는 거란 말에요.

 

자, 그렇게 하늘의 진리를 차서대로, 차례차례, 이렇게 ‘티데미’, 진열해 놓은 게 ‘티데미’죠? 횡으로 진열해서 세워 놓은 거 ‘티데미’. 그렇게 해 놓은 게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성막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고걸로 그렇게 ‘티데미’ 되어 있는 걸로, 그 성전으로 내가 아, 이게 그거구나. 이 희생제사는 예수의 그 희생이요. 그 영단 번에 드려지는 어린 양의 제물이요. 유월절이요. 이걸 깨달아 알았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거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 으로 얻는 게 아니 구나를 알았어요. 그러면 그 ‘티데미’ 된 걸로 위로 요렇게 똑바로 서게 되면 ‘이스테미’라고 그랬죠? 그러면 그게 믿음으로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똑바로 위로 서게 되네! 그게. 이스테미, 그런데 그 이스테미에서 ‘스타오로스’. 십자가. 기둥이라는 단어가 나왔단 말에요.  

그러면 그렇게 이 세상에 나에게 주어진 믿음과 소망이라는 실상들로 말미암아 내가 그걸 믿음으로 가져 위로 똑바로 딱 서게 되면 그 자리에 내 십자가가 서는 거예요. 나와 관계없이 2천 년 전에 예수님 한 어떤 일이 나를 구원하셨을 거야라는 이런 전설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진리를 담아서 질서대로 차서대로 나타난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게 호 코스모스. 우주라는 거예요. 천지만물. 그래서 그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로 차용 해다가 쓴 거예요. 질서 있게 움직이잖아요. 우주는 요. 그게 각도가 조금만 빗나가거나 아니면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지거나, 아니면 어떤 법칙, 만유인력이라든지 인력이라든지 어떤 것들이 싹 빠져버리면 이 우주는 단번에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그 질서, 그 차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게 우주니까. 그 우주도 또 믿음이네. 그러니까 석가성불 산천초목 동시성불이 맞는 얘기란 말에요. 아니, 내가 진리를 알고 나니까 모든 게 다 진리네. 그렇게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품은 하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나타난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일생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통하여 또 그 진리를 알았다면. 단순히 그분이 뭐 병 고친 거 기적 일으킨 거 표적 행한 거 말씀 하신 거, 뭐 율법으로 깨달아 알아 그런 거 말고. 그걸로 아가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았으면 그 예수 그리스도도 믿음이네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하여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미쁘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건 하나님은 성실하셔! 가 아니라,

‘호 피스토스’. 호 피스티스‘ ,’호 테오스‘. 하나님은 믿음이다! 라는 뜻이에요. 직역을 하면.

 

하나님은 믿음이다. 라고 써 놓고 하나님은 미쁘시지. 이렇게 써 놨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 믿음의 실체는 하나님이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뭐로? 육을 입고. 아래 모양을 갖고. 그래서 죄의 모양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위의 그분이, 진리인신 그 분이 아래의 형상으로 내려와  버리셨네? 그럼 뭐예요? 그게? 믿음이라며 요. 그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그럼 예수님도 그분을 통하여 진리를 알았으면 그분도 믿음이죠? 그럼 그분에 대하여 적혀있는 책 성경은? 믿음이죠. 역시. 아래 것은 다 믿음이란 말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5절.

 

딤후 3 : 15-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믿음은 어디 있어요? 내 안에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니까요. 그걸로 구원을 얻는대요. 얻으면? 그 믿음이 내 믿음 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그 성경 안에 그 믿음이 적혀 있다네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고 말씀 하신 거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믿음인 내가 와서 너에게 구원을 주기로 작정했어. 왜냐하면 구원은 선물이니까. 그런데 그걸 깨달아 알아요. 그렇지. 구원은 저분의 치맛자락, 옷깃만 잡아도 나에게 오는 거지. 생명은 저기서 나오니까. 라고 알았을 때 그게 그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찾아가셔서 이야기하신다니까요. 항상. 그래 네 믿음이 내가 그렇다는 걸 네가 알았으니까 믿음인 내가 네 게 됐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항상 그런 기적을 행할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든가 집에서 누가 나오든가 이런 글들이 꼭 적혀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복음을 아무데서나 막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막 길 가다가 막간을 이용해서 너 잠깐 들어봐, 이렇게 안 했어요. 항상 거기에는 성전이라는 모형들이 등장해요. 성전과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하세요. 왜냐하면 그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게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그 전에 그런 성막, 성전이 아예 없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의 집을 갖고 그 성전을 설명하셨단 말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오이코스’ 나, ‘오이키아’. 이렇게 집, 그 집 앞에 관사가 붙으면 그건 반드시 성전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어떤 집에서 누가 나오고 그 집으로 뭐 들어가고 하는 게 전부 성전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자, 그렇게 나타난 모든 것은 다 진리를 설명하는 거고 그 나타난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깨달아 내 마음에 간직하게 됐을 때 나에게 믿음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냥 억지로 나는 믿는 걸 거야! 라고 우기는 거 그게 아니고. 대부분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그냥 우기고 말아요. 나는 믿고 있어. 믿음이 뭐야? 그러면 몰라, 말은 못하지만 하여튼 믿고 있어. 그런데 불안해 미치겠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흔들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의 그 삶의 주어가 전부 믿음인 거예요. 믿음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믿어서 그들이 이렇게 되었다, 라고 안 써요. 성경이요. 믿음이 주어라니까요. 믿음이 침공해 들어오는 거예요. 믿음은 기필코 그들을 아들로 출산해내더라.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런데 그 출산을 오늘 본문이 ‘시노디노’, 해산의 고통. 왜? 아들로 낳아지는 거.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해산의 고통.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망, ‘엘피스’라는 이 단어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묵시를 나타낸 형상과 인식 가능한 법칙과 원리 속에 넣어서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 넣어두세요. 세워두십니다. 그걸 믿음이라고도 하고 소망이라고도 해요. 그러나 그걸 그냥 아래 것으로 인식해버리면 그건 소망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현실이 돼버려요. 그러면 거기에 묶여서 그걸로 희로애락을 결정짓게 된다니까요. 그렇잖아요? 그거 안의 내용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나타난 사건이나 현상에 내가 묶여버리면 그건 소망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걸 소망으로 줬는데 그걸 소망으로 못 보면 현실이 된단 말에요. 나에게. 그럼 나는 거기에 의해서 희로애락을 결정 받게 된다니까요. 그래서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소망으로 보는 거예요. 다시 재해석 돼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현실은.

 

히11 : 3-

믿음으로 -

 

믿음으로,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어야죠? 믿음으로 그러면 그냥 굳게 믿어서! 가 아니라 이 나타난 형상들, 이 믿음들로,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런 것들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았어. 아니, 그 믿음들로, 나타나 있는 그런 것들로 내가 그게 그거지! 라고 알았더니. 아니, 세상에 이게 다 말씀을 나타내고 있는 거네? 라고 알았다는 말이에요. 믿음으로 알았어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게 아니지. 라고 얘기해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게 아니지. 여기서 나타나다, 라는 ‘화이노’란 단어가 나타내다, 밝게 빛나다. 히브리어로 바꾸면 ‘오르’라는 뜻이에요. 빛. 빛이 있으라. 에서 빛. 있죠? 그 단어에요. 그런데 보이는 것은 그 빛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뭔지는 제가 조금 있다가 원문을 갖고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지금은 그냥 보이는 건 하나님의 진리, 즉 보이지 않는 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그 말만 심어두시란 말에요.

 

요 1 :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말씀. 말씀이 계셨다, 하고 이야기하잖아요?)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기노마이’, 말씀이 없이는 그 말씀을 담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이런 말이에요. 역시 이 구절도 만물의 목적과 역할이 말씀, 즉 하나님의 뜻이라, 라는 걸 밝히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거고 그들은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소망으로 받아, 마음으로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될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받았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잖아 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보이는, 나타난 그 소망. 그 껍데기가, 그거 진짜 소망 아니잖아. 그거는 보이지 않는 그 소망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그걸 알아 구원을 얻었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덮개를 벗겨주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에 붙여놓는 거예요. 그래. 그거 너희들이 알아서 구원받았잖아. 그 껍데기 벗겨서 너희들이 그 진의 설명해줄 수 있는 아들들이 된 거잖아.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엘피스’라는 단어에 정확한 용례를 찾기 위해서 제가 그 헬라어 신약성경을 아람어로 바꾸어 놓은 아람어 신약성경을 어렵게 찾았는데 그런 책들은 전부 절판이 돼갖고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소망이란 단어가 ‘티크바’라는 단어에서 나왔더라고요. 보니까. 항상 헬라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유추해 올라가서 해석을 찾아내야 됩니다. ‘티크바’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도 아주 많이 등장하는 단어에요.

 

‘티크바’라는 단어를 추적해서 올라가면 ‘카바’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묶다, 모으다, 대망하다, 희망하다, 참으며 기다림’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소망이란 단어 안에 인내라는 의미와 꽁 꽁 묶다, 라는 의미, 그리고 열망, 희망이라는 의미가 다 들어가 있어요. 따라서 그렇게 보이는 소망으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그 보이는 소망 안에 꽁 꽁 묶이게 된다, 라는 의미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거고. 그래서 우리는 그 보이는 소망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대망해야 되는 것이며, 이게 소망 안에 들어있는 단어에요. 의미예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인내인 것이고 그 보이는 것에서 풀려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자가 진짜 소망으로 사는 자라는 거예요. 이 모든 내용이 그 ‘티크바’라는 단어의 흐름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문자들을 사용하여 너희들이 아는 이 글자로 내가 내 복음을 설명해줄게 해서 이런 단어들을 써서 성경을 쓰신 거예요.

 

그 단어는 ‘파카흐’ 라는 단어로 연결이 돼요. 그 단어가 ‘눈을 뜨다, 열다, 현명하게 되다’ 이런 말이에요. 그 소망으로 눈을 뜨게 되면 그게 열리는 거고 현명함이라는 거예요. 그게 진짜 지혜라는 거예요. 그 단어를 반복해서 쓰면 ‘패카흐, 코아흐’인데요 그 단어가 구원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남, 감옥 문이 열림. 구원. 이런 말로 써요. 그러니까 소망이라는 단어는 그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반드시 그 소망을 진짜 소망으로 받은 이들은 그 구원을 낳는다는 거예요. 그 소망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카바’에서 파생된 단어와, ‘티크바’와 같이 쓰이는, 소망이라는 의미로 같이 쓰이는 단어가 ‘미크베’ 라는 단어거든요. 역시 소망이라는 단어로 쓰이는데 그 단어가 최초로 쓰인 곳을 제가 찾아드릴게요. 창세기 1장 9절 보세요.

 

창 1 :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 :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궁창 위의 몰과 아래의 물을 나누시고 그 아래의 물을 ‘미크베 마임’이라고 이름을 붙이세요. ‘미크바 마임’. 개역성경에서는 모인 물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우리가 그 단어들의 의미를 고려해서 다시 의역을 하면 소망의 물이란 뜻이에요. 소망의 물. 하나님은 아래의 물을 그 바다를 소망이라는 것을 담아 주셨다는 거예요. 우리에게요. 거기에 빠지면 죽지만 그게 뭔지를 알아 딛고 일어서면 물위에 뜬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노아의 방주사건이에요 그 아래의 물에 묶이지 않고 그 아래의 것을 통하여 위의 것을 깨달아 문을 열고, 감옥 문을 열어 이 땅, 애급에서 빠져나와 구원에 이르라, 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래 물의 이름이 ‘미크베 마임’이에요. 소망의 물.

 

이런 거예요. 첫 째 날에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둘 째 날에 위의 물과 아랫물을 나누십니다. 그런데 이 위의 물이라는 건 사실 없는 거예요. 그냥 진리에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란 거죠. 그런데 그걸 아래의 물, 바다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위의 물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도 유리바다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다시 바다도 있지 않겠고, 라는 이상한 말을 또 쓰고 그런단 말입니다. 모형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달아 알았어요. 그러면 셋 째 날에 보면 여기에 드디어 씨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 ‘제라’, 그 자손 그 씨를 품은 어떤 자들은 바로 그 위의 물,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고 이 어두움으로 빛을 안 그들이 되는 어떤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여섯 째 날과 연결시킨단 말입니다. ‘자칼’ 과 ‘레케바’로. ‘사람’ 이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거는 그거야. 그러면 안식이라, 라는 말로 설명해준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물과 뭍으로 나누지요?

 

이 물과 뭍이 뭐냐 하면은 원래 이 물은 저주의 물이라는 의미에서 이 물은 다 물러가고 하나님의 그 나라, 그 나라만 오로지 있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아래의 물이라는 의미, 그거를 그렇게만 보지 말고 이 뭍이라는 게 바꾸어 말 하면은 물이 없는 곳이라는 뜻도 되거든요. 그 물이 없는 곳을 이 저주의 물이 아니라 이 위의 물로 물을 대면, 그래서 성경에 ‘너 나에게 물 좀 대봐’ 라고 이야기해요. 이삭의 아내에게도 그러고 수가성, 사마리아의 여인에게도 그러고 ‘물 좀 줘봐’ 아니에요. ‘물 좀 대봐’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래서 물 댄 동산이란 말이 나오는 거예요. 물을 대서 그 물이 내려오면 사막, 광야가 푸른 초장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물이, 이 물이 되어. 이 물로 이해가 되어, 둘째 날에서, 되어 여기를 적셔버리면 이게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그냥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건 괴물이 사는 바다지만 이게 위의 물로 이해되면 이게 소망의 바다죠? 그래서 ‘미크베 마임’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망이라는 단어는 그런 거라니까요. 그래서 창세기에 소망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나오는 거라는 말입니다.

(아이 바쁘네! 진짜, 빨리 사가지고 여기에다가 놓고 하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돌아서서 쓰고 ㅎ 마이크도 이렇게 핀 마이크 이런 거,, 아이 답답해 아주. 그러니까 자꾸 어디였는지 잊어버리잖아요. ㅎㅎㅡ 마이크 들고 칠판으로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 불편하다는 멘트인 듯)

 

자, 따라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진리를 깨달아서 사랑으로 완성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믿음, 소망이 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나타난 것으로 준 거니까. 그걸 내 마음으로 가지면 그게 진짜 믿음, 소망이 되는 거고요. 여기 까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그러니까 그걸 사랑으로 깨달아 알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죠? 고린도 전서 13장 8절 보세요.

 

고전 13 :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믿음 소망 이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반드시 있어야죠? 그래야 마지막 진리가 되는 그 사람이 이 믿음과 소망으로 사랑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뭐예요? 믿음과 소망으로 사랑이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여기 보면 대조 되고 있는 게 부분적인 것, ‘메로스’ 와 온전한 것, ‘텔레이오스’. 여기서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가 나오는 거죠? 부분적인 것은 반쪽이에요. 나의 반 부분. 분깃 이런 거에 쓰죠?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만들 때, 하나님이 남자를 통하여 여자를 만들 때 그의 갈비뼈를 이렇게 빼잖아요? 그 갈비뼈라는 단어가 이 분깃. ‘메로스’라는 단어에요. 반쪽, 다른 한 부분. 이런 말이죠. 갈비뼈가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한 부분. 그게 그냥 반쪽으로 있으면 안 되죠? 온전한 것이 돼야죠. 그렇죠? 부분적인 것, 온전한 것.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어린아이, 이 ‘네피오스’라는 단어는 ‘파이디온’. 그러니까 성경에는 어린아이라는 단어가 두 개 나와요. ‘파이디온’, 하고 ‘네피오스’. 그런데 파이디온은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걸 쓰곤 했는데 원래 그 어린아이라는 다어가 어디에다 쓰시느냐 하면 노인, 성숙한 자. 진리를 안 자와 반대 되는 쪽에 그 존재들을 어린아이라고 써요. 그래서 바울이 그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번역해 줘요. ‘네피오스’라고. 그 ‘네피오스’가 뭐냐 하면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말이 없다. 말을 갖지 못한 자. 말을 못하는 자. 그 말을 못하는 자. 그게 ‘네피오스’에요. 그걸 어린아이라고 써요. 이렇게. 그리고 그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이라고 그러죠? 장성한 사람은 ‘아네르’예요. ‘씨’, ‘남편’. 이런 거예요. 어린아이로 있으면 안 되지. 말씀, 진리의 씨를 가져 네가 씨를 간직한 자가 돼야지. 그럼 네가 남편이 되는 거잖아. 그런 얘기죠. 그죠?

 

그래서 ‘네피오스’와 ‘아네르’를 대조하고. 이날, 우리가 이제는, 그러는데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 거야. 이런 말이 아니라. 이날과 그날, ‘알티’와 ‘토테’가 대조되고 있어요. 이날, ‘크로노스’. ‘토테’. 그날. 이런 말이에요. 크로노스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밖에 모르지만 그날, 카이로스는 온전한 것을 아는 때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날, 카이로스에 속하여 온전한 것을 아는 이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 소망, 이걸로 우리는 반드시 온전한 그 사랑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왜? 우리는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언젠가 완전히 이루어질 일이기도 하지만 아니, 이미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이 땅에서 조금씩,조금씩 확인하면서 그렇지, 그거지! 라고 크로노스에서, 이날에서, 그날을 사는 거란 말에요.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뭐, 방언, 예언.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런 거에 여전히 착념해갖고 그러면 안 되죠. 그리고 여기에서 바울이 부분적인 것, 온전하지 못한 것에 예로 든 게 뭐냐 하면. 예언, 방언, 지식이에요. 그죠? 그건 다 폐하여진대요. 싹없어진다는 뜻이에요. 불태워져서 없어진다. 예언, 방언, 지식? 온전한 것이 오면 그 부분적인 것이 없어진다. 그러는데 예언은 뭐에요? Fortune telling 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내가 깨달아  누군가에게 말로 전했을 때 그걸 예언이라고 그래요. 좋은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요? 이걸. 방언, 이건 뭐 당연히 랄랄라 거리는 게 아니라, 글로싸. 혀예요. 혀. 말이란 뜻이에요. 그냥 말인데 생명 없는  그런 이들에게서 나오는 그냥 소리에 불과한 말 있죠? 진리를 담지 못한, 내용으로 담지 못한 그 말을 그냥 글로싸라고 해요. 성경이요.

 

그래서 그것이 아닌 깨끗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똑같이 글로싸 라고 쓰는 거예요. 불의 혀. 성령이잖아요. 깨끗한 말, 성령이 있는 반면에 더러운 말, 비 진리가 있다니까요. 그걸 똑같은 단어로 써요. 글로싸, 방언 그렇게. 그러니까 그건 당연히 없어져야죠. 소리에 불과한 거니까. 내용이 들어오면. 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우리에게 쏟아부어주는 정보들 있죠? 제가 지금 하는 설교들 이게 여러분에게 정보로 주어지면 그건 지식이에요. 그럼 당연히 내가 진리를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건 필요 없는 거예요. 이게 무슨 제사가 있고요, 상번제가 있고요, 번제가 있고요. 그거 몰라도 돼요. 그거 왜 알려고 해요? 절기에는 뭐가 있고요. 몇 가지가 있는데요. 그럴 때는 뭘 먹어야 되고요. 그런 거를 뭐 하러 알아요? 뭐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나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하는 것들인데. 그건 지식이라니까요. 당연히 없어져야지요. 그건요. 소리.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담아 전하는 그 설교 있죠? 그게 예언이잖아요? 그걸 미련한 것이라고 해요. 어리석다. 그래요. 그건요. 불합리하다는 단어에요. 그 단어가. 불합리하다. 그걸 로는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설교를, 그런 구절을 읽으면, 설교를 우리 목사님처럼 또박 또박 잘 해야지. 그럼 안 돼요. 뭐 인간의 말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또박 또박 해도 그건 불합리한 거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번 보실래요? 고린도전서 1장 21절.

 

고전 1 : 21-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서 전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설교에요. 설교. ‘케리그마’. ‘케리스’에서 나온 거니까. 설교. 뭐 밖에 나가서 막 노방전도하고 이러는 거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전도는 설교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설교를 할 수 없으면 여러분은 전도를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아무나 가서 종이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거는 전파복음이라고 그러는데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진짜 전도는 그 길인 예수를 내 말로 전할 수 있을 때 전, 도, 전할 전. 길 도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모리아’,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이라고 번역 된 그 모리아라는 단어 있잖아요. 그것이 불합리에요. 절대 안 되는 것. 비밀. 이런 뜻이에요.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의 귀에는 그건 비밀이에요.

 

입을 다물다, 라는 뜻도 있어요. 아무리 열심히 얘기를 해도 그건 다문 입술에서 나오는 비명에 불과한 거, 신음에 불과한 거예요. 전도.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로 하래요. 고린도전서 14장 7절 보세요.

 

고전 14 : 7-

7.혹 저나

(피리예요)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여기서 생명 없는 것은 단순히 피리나 거문고를 예로 드는 게 아니라 생명 없는 것의 대표적인 게 누구예요? 사람이에요. 모든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 때 죄인으로 온다고 그러죠? 그 죄인을 성경에서는 마른 뼈라고 그런단 말에요. 생명 없음이에요. 그들이 어떠한 미사여구 또 어떠한 연구결과를 갖고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그건 전부 생명 없는 소리예요)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여기서 혀로써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글로싸’ 방언이에요.)

10.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자, 세상에 이렇게 많은 만물이 있지만 그 안에 내용 없는 만물 없듯 소리에도, 모든 소리에도 전부 뜻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말을 해도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예,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부 그 진리가 아닌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해? 헤헤 말 아닌 걸 말하는 거예요. 진리만 말이라니까요. 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해요 그것만. 그러니까 소리에는 전부 뜻이 담겨 있어요. 그걸 엉뚱하게 써서 그렇지.)

 

그런데요 제가 이렇게 지금 여기에서 진리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이 쓰지도 못하는 기계까지 동원을 해갖고 지금 열심히 여러분을 설득하려고 하고 있죠? 그런데 이게 누구의 귀에나 똑같이 진리로 들립니까? 아니죠? 몇 명의 귀에는 진리로 들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귀에는 소리예요. 그러면 이 소리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고 단어들을 막 골라서~ ~ 이런 단어 정도면 이해를 하겠지. 하고 이렇게 찾아와서 심지어 원고까지 다 써가지고 와서 이렇게 얘기를 해 줘도 그 소리가 힘이 있는 게 아니죠? 그 소리가 힘이 있다면 듣는 이들이 다 나가 떨어져야 돼요. 그 소리가 생명 있는 소리라면. 생명 있는 말이라면. 아무리 그게 진리를 설명하는 거라도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그건 진리가 이미 아닌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내가 마음으로 갖고 있는 그거. 이게 소리로 나오면 그냥 그 즉시 생명 없는 어떤 소리가 되어버리는데 이 소리를 갖고 그 소리를 듣고 어떤 이들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이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가져. 그 때 그걸 진짜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 소리에 뜻 없는 소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말하는 이 소리가 아무 능력도 없고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그냥 죽은 소리에요. 그런데 어떤 이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걸 진리로 가져 마음으로 가져 살아난다면 누군가가 그 사이에서 일을 하시는 거겠죠. 진리가 전해지고 그 진리를 이해하는 그 현장만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는 것이 명확히 증거되는 장소는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 진리가 전해지는 그 자리에 빠지면 안 돼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는 곳은 그 진리가 선포되어지는 곳 밖에 없어요. 그 누구도 여러분을 이해시킬 수가 없어요. 사람의 소리로는. 그런데 성령이 그 일을 하세요.

 

주님이 그랬어요. 성령을 내가 그일 하도록 보낸다고. 그래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담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는 소망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소망을 깨닫도록 조처를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소망이야. 라고 이렇게 인정을 해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으로 알았다고 해서 그게 그건 또 아닐 거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만큼 알면, 그래, 네가 온전해. 네가 알았어. 네가 생명 있어. 네 안에 나 있어!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 안에 갇힙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은 그 즉시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안에 그 하나님 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가 문자에도 갇힐 수 없는 내가 너희들에게 나를 계시할 수 있는, 너희들 수준만큼 나를 계시할 수 있는 건 요만큼이야. 그걸 너희들이 마음으로 가져 알면 네 안에 나 있다, 라고 해줄게. 라고 하는 거지. 아, 자꾸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디 있어요? 어디 계시냐고요? 그분이 어떻게 시간에 갇힙니까? 하나님이? 그분은 이 안에 들어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을 빌려 입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분이. 그런데 보이는 소망으로 오신다니까요.

 

제가 지난주에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하나님께서 창조라는 것을 하신 이유가, ‘바라’라는 단어를 갖고 설명해드렸죠? 창조라는 것을 하신 이유가 땅으로 하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베레시트 엘로힘 바라 에트 사마힘 에트 에레츠’ 그랬죠   여기서 ‘에레츠’. 맨 위의 거. 보이세요? 요게 뭐냐 하면은 여기 보세요. 요게 ‘베레시트’죠? 이걸 태초에, 라고 번역 했단 말에요. 그런데 이 ‘베레시트’ 이거는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그 머리, 그 진리, 그 예수. 예수가 담고 오신 거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보고 머리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요 ‘로시’가 머리라고 그랬죠? 요게. 머리를 완성으로 넘겨주시는 게 인제 이 역사에요. ‘베레시트’예요. 그게. 태초! 예요. 그 전체가 창세기 1장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창조라 그랬습니다. ‘바라’.

 

그러면 그걸 위해서는 이제 아래에 있는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래 것으로 뭔가 설명을 해줘야 되니까, 뭔가 생겨나야 되죠? 그걸 ‘바라’ 창조라고 그래요. 그거를. 그런데 그거는 뭐를 설명하기 위함이냐 하면 엘로힘이라는 걸 설명하는 거래요. 하나님. 그런데 여기에는 요 진짜 하나님이 생략되어 있는 거라고 그랬지요? 왜냐하면 이 ‘바라’라는 단어가 남성단수인데 요게 쌍수란 말에요. 그러니까 요게 주어가 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요게 ‘사마임’, 요게 ‘에레츠’예요. 그러니까 땅의 것을 갖고 요 하늘을 알게 되면 고것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고 고것을 위해서 나는 창조를 한 거야. 고 전체를 ‘베레시트’ 라 그래.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 하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러면 요 땅을 갖고 이제 설명해주기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2절에 이제 땅은, 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자, 그 땅은 뭐야? ‘하야’, 요 ‘하야’ 라는 게요. 이 ‘하야’ 라는 동사에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건 그냥 같은 단어에요. 이건 뭐냐 하면 그냥 존재하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말소리. 내 말 소리를 줄게. 네 말 소리로. 그러면 보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소리가 필요하죠?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의 소리가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걸 소리내기 위해선 여러분은 그 씨를 갖고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씨를 갖지 못해 그 말을, 하나님의 말. 우리의 말로 줄 수 없으면 그건 존재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말이 없으면 성경이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자, 땅은 ‘토후’, 혼돈하다. ‘보후’, 공허하다. 그래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요 완성의 소리다. 성전의 소리.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전, 그 완성, 그걸 소리로 준 걸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텅 비었다, 광야야. 사막이야. 아무것도 없는 곳이야.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에요. 보세요. 자, 땅은 텅 빈 거야. 내가 너희들에게 믿음과 소망이라는 어떤 상을 갖고 너희들에게 그걸 설명할 건데 사실은 그게 실체가 아니야. 그래서 그건 사실은 텅 빈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텅 빈 거야. 혼돈이라는 게 틀이 없는 거고, 공허라는 게 내용물이 없는 거니까. 그건 텅 빈 거야. 없는 거야. 그러면 그걸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아래 것, 텅 빈 그것들을 ‘호세크’, 흑암이라 그래.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성경이 우리를, 이 땅을 흑암이라고 그러지요? 어두움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왜 어둠이라 그래요? 그게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둠이라고 그러지. 그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둠, 죄, 이런 걸 함부로 그냥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거, 도덕 윤리로만 판단해서, 나쁜 거,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 흑암이 ‘알’ 이게 전치사니까. ‘파님’, 깊음 위에 있다. 그래요. ‘테흠 파님’.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테흠’ 이라는 건 이 저주의 아래 바다, 아래 물이에요. 그 저주의 아래 물, 이 아래 것, 세상이죠? 여태까지 이제 다 들었으니

까 제가 오늘은 조금 어렵게 얘기를 해도 금방 금방 이해를 하셔야 돼요.

아랫물, 저주의 바다. 이 아래 거. 그것들의 나타난 걸 성경이 ‘파님’ 이라고 그래요. ‘파님’은 헬라어 성경에선 ‘프로소폰’ 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그래서 그걸 얼굴이라고 자꾸 다 번역을 하는데 모세가 돌 판을 갖고 내려왔을 때 칠십 장로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얼굴이 있어요?

 

하나님이 기록된 그 나타난 어떤 걸 봤다. 돌 판 본 거예요. 그걸 얼굴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게 ‘파님’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 땅이 뭐냐 하면 공허 하고 혼돈한 거야. 그건 없는 거야. 그게 실체가 아니야. 그러나 난 그걸로 설명할 거야.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아래의 그걸 흑암이라고 하는데 그 어두움, 흑암이 뭐냐 하면 그 아래 것들 그것들의 껍데기. 나타난 것. ‘파님’ 있죠? 그걸 흑암이라 하자는 말이에요. 그걸 흑암이라 하자. 그리고는 ‘루하 엘로힘’이 나오죠. 그러면 그 흑암을, 그 나타난 것의 껍데기를 위의 걸로 알려주려면 어떤 분이 일을 하셔야 된다. 그랬잖아요. 여기 ‘토후 보후’의 소리가 나왔으니까 그 소리를 진리로 전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죠. 그게 ‘루하 엘로힘’.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그 성령이 와서 뭘 해준다는 거예요? 지금. 여기 ‘맴’이 물이니까. 그 진리를 진리의 ‘파님’ 그 껍데기를, 진리의 껍데기가 이 아래에 있는 거. 진리를 담고 있는 모형들 이야기하는 거죠? 그거를 ‘라하프’, 어떻게 했다고요? 닭이 알을 품듯 품었다는 거예요. 닭이 알을 품듯 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태어난 알이 다시 태어나려고. 병아리로. 알은 살은 거예요? 죽은 거예요? 살았어요. 그것도요. 그런데 알의 생명이에요. 그건요. 그게 진짜 살려면 다시 날개로 품어 병아리로 만들어야 돼요. 이걸 다시 난다, 거듭난다. 그래요.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를 암탉이 알을 품듯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 그런데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죠? 나는 율법, 너희들을 그 진리로 풀어 생명으로 탄생케 하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원치 않은 거야. 라고 우셨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어두움으로 그 진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성령이, 르와흐 엘로힘이 알을 품어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나야죠. 이제 그것이, 어두움, 흑암이라는 것이, 그 토후보후의 그 상태가 그게 뭔지 나타나야 되잖아요.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 나타나다. 라는 말을 성경이 ‘오르’ 라고 써요. 그걸 빛이라고 해요. 빛. 그러면 바로 밑에 뭐가 나와야 돼요? 인제. 빛이 있으라가 나와야지요. (에이, 알아듣는 거야. 뭐야? 이건. ㅎㅎ 그죠? 빛이 있으라가 나와야죠. 이건 뭐 원고에도 안 쓰고 여러분한테만 들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딴 사람들은 모르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잘 들으시란 말에요.

 

빛이 있어야죠. 그럼 하나님이 그 빛을, 하늘의 그 빛, 그 진짜 빛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 땅의 어두움들 이 형상들을 이렇게 뭐로 드러내고 나타내주는 거. 그걸 빛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뭐예요? 하나님이 그 진리를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아마르’. 하나님이 말씀하셔. 라고 제일 첫 번째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하신다! ‘다바르’ 가 아니라 ‘아마르’ 라는 건 진짜 그 하나님의 말씀이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셔! 뭐로? 엘로힘으로 말씀하셔. 어떻게? ‘하야 오르 하야 오르’ 괜히 반복한 거 아닙니다. ‘빛이 그로 존재하네! 이런 말이에요. 그가 그 분이 빛으로 이 땅에 이 나타난 모양으로 그분이 거기에 들어가서 존재하셔.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한 번 더 반복한 게 뭐냐 하면 네 번째 날에서 나오잖아요. 또 빛이 나오죠? 거기엔 ‘마오르’ 라고 나오는데 그 빛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기에 와우 접속사가 있거든요. 그러므로 그분이 빛으로 존재 해. 어디에? 이 땅에.

 

그럼 뭐예요? 자, 이 땅에 있는 모형들이 어둠이라고 그랬어요. 조금아까. ‘호세크’. 그거를 그게 이거지. 라고 이렇게 나타내 주면 그걸 빛이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둠 속에 살아요? 빛 속에 살아요? 어둠 속에 사는데, 모형을 입고 있으니까. 크로노스에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둠이라 그런다고 했잖아요. 아까 ‘호세크’, 사는데, 그 속에서 그게 뭔지를 말씀으로 알아 빛을 사네? 그래서 그거를 나타내줄 수 있으면 그 사람을 세상의 빛이야! 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뭘 어두운데 가서 많이 비춰줘, 구제 많이 해, 선교 많이 해. 이런 말이 아니라. 왜냐하면 네가 빛이지. 왜? 넌 역시 어둠이야, 몸뚱아리 안에 갇혀 있는데 그걸 말하네? 그러면 그 어둠이 뭔지를 나타내는 게 빛이니까, 그럼 네가 빛이야.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요? ‘라’, 하나님이 보세요. 뭘 봐요? 그 하나님으로 해석된 그들만 봐요. 그러니까 진리로 드러난 그들만 본다, 라는 거예요. ‘라 엘로힘’. 하나님이 보신다. 가 아니라 그분이 ‘엘로힘’ 으로 보신다. 이거 아니면 안 본다는 거죠. ‘에츠 오르 토후’ 이건 ‘토부’ 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단어죠? ‘선’이란 단언데,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요, 잘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두움을 깔아 놓았어요. 왜? 그걸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그래서 ‘르와흐 엘로힘’ 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빛으로 드러내세요. 그래서 그 빛이 드러나요.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하셨다, 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그게 빛으로 드러나면 하나님은 그걸 ‘아이, 보기 좋다’. 이게 구원의 이야기예요. 이게 성경전체의 이야기라니까요. ‘아이 보기 좋다.’ 왜? 땅 아래와 하늘 위의 것이 하나로 됐잖아요. ‘아, 보기 좋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이라는 단어를 ‘토브’ 라고 쓰시는데 이게 뭐냐 하면 뱀의 성전이에요. 뱀. 여러분 이 뱀이 원래 이 단어가, 원래 이집트어로 읽혔습니다. 여기에서 온 단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밖으로 나오면 요걸 완성이라고 그러죠? 이게 ‘타후’ 예요. 완성. 그런데 그 완성이 요렇게 어딘가에 갇혀서 덮여있는 거예요. 그걸 뱀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이집트 때의 뱀은 나쁜 짐승이 아니라 신이었다니까요. 그래서 이집트 파라오들이 전부 여기에다가 뱀 달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 그 뱀을 나쁜 걸로 쓰셨다기보다는 하늘의 왕을 설명하기 위한 세상의 왕으로 쓴 거뿐이지 그걸 나쁘다, 라고 쓴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면 이 뱀의 성전, 이걸로 그 하늘의 성전을 알았으면 이건 진짜 하늘 왕의 성전이 되는 거죠? 그랬을 때 이거를 ‘선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 서신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 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 어느 것도 악한 게 없다. 그래요. 그럼 모든 것이 선하지 당연히,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거니까. 뱀도 선한데. 그 단어를 선이라고 쓰는데. 그래서 이걸 갖고 이 울타리, 이 율법의 껍데기를 싹 제해버리면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너희만 볼 거고 ‘라’, 그리고 너희는 선하다 칭함을 받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선이야. 아직 선악과 따 먹기 전이고, 그런 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그냥 이렇게 설명한다니까요. 그런데 못 알아먹잖아요. 못 알아먹으니까 그래, 그러면 그 어두움이 뭔지 그 땅이라는 게 뭔지 아래물이라는 게 뭔지 너희들 수준에 맞게 설명해 줄게.

 

자, 선악과 먹어! 여기부터 시작하자. 이렇게 된 거란 말입니다. 아담이 그냥 우발적으로 확 따 먹어버린 게 아니라. 계속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선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한다고요?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간단하게 하고 마칠게요.

 

이 ‘다바르’ 라는 단어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묵시와 역사가 만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성경, 예수, 성전입니다. 교집합이에요. 이것이. 요거를 창세기 15장에서 요 부분을 ‘타베크’라고 해요. 가운데라고.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너희들은 가운데에 서라 그래요. 예수님도 가운데 서신다. 그렇게 얘기하죠? 그런데 요거를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 그래요? ‘타베크’ 가운데를 잘랐다. 그런다고요. 그거를 ‘바타르’ 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건너가세요. ‘아라브’ 라고 그래요. 그거를. 건너가면 여기에 아브라함, 여기에 하나님. 제물은 여기. 그리고 이런 금이 그어지죠? 이거를 ‘카라트’라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너 출애굽 해야 돼. 그러잖아요. 창세기 15장 보세요.

 

너 지금 그게 애급에 있는 거야. 너 출애굽 해야 된다. 그게 아모리족속의 죄 인거야. 그러면 출애굽하면 이리로 넘어와야죠? 그럼 아브라함이 세 번째 제물이 ‘솨라시’ 라는 말이요, 세 번째 제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니, 삼 년 된 무슨, 삼년 된 뭐라 그러잖아요? 그냥 세 번째 제물이란 뜻이에요. 세 번째 제물이 뭐냐 하면. 첫 번째 제물, 성전 마당의 희생 제물들. 두 번째 제물, 예수. 세 번째 제물, 산 제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산 제물. 첫 번째 두 번째 제물로 내가 산 자가 되면 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가 되는 거요. 하나님이 그 세 번 째 제물을 취하라. 그랬어요. 네가 그 세 번째 제물이 되어라, 라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를 때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요? 삼 년 된 거 갖다가 쪼개버렸단 말에요. 뭐로? 율법으로.

 

이게 율법이란 말에요. 사람의 에피뚜미아, 두 마음으로 하나님께는 항상 선과 악으로 이렇게 드려야 되는 거죠? 라고 쪼갰을 때 하나님이 아니야, 그게 애급이야. 너는 네 백성과 함께 애급에서 430년 있다가 다시 와. 어떻게? 유월절 어린 양, 셋 째 제물로 나에게 와!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건너오면 그걸 ‘건너다’, ‘히브리’, ‘아라브’. 건너왔다.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건너가시고 아브라함은 나중에 건너가게 되죠? 응? 어떻게 건너가게 돼요? 아, 이 제물은 나를 이리로 건너가게 하는 그 세 번째 제물이구나. 라고 율법으로 진리를 알았을 때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알았을 때, 건너갈 수 있어요. 이 제물이 뭔지 알았을 때. 그 때 그거를 ‘다바르’ 라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둠과 빛을 나누셨다, 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어둠으로 빛을 알게 하셔서 이리로 건너오게 하신다는 언약이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 어두움이, 그리고 이 낮이 하나님이 나누어서 이렇게 껌껌하고 밝은 거구나, 가 아니라, 성경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도 없어요. 아무 관심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 밤은, 자 빛은 날이라 칭하고, 자 보세요. 여기 칭하다 는 말이 요게 ‘카라’ 라는 말이거든요. 요거만 잘 알아두시면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 제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비비 꼬지 마시고 5분만 참으세요. ㅎㅎ 그냥 어쩔 줄을 몰라 가지고 그냥 , 지금. 이 카라라는 단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호칭, 이름을 붙여서 우리를 불렀다. 이런 말이 아니라 내 쪽으로 하나님이 너, 이기 건너와, 라고 불렀다는 얘기에요. 그걸 그냥 개역성경이 칭했다고 하니까 호칭했다고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요 빛을 날이라고 칭했다 그러죠? 불렀다고 그랬죠?

 

그러면 보세요. 요 빛은 뭐라 그랬어요? 아래 것, 어두운 것들이 지금 그게 위의 것이구나, 라고 이렇게 이해되어지는 고것이, 빛이, ‘오르’ 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고건 뭐예요? ‘욤’ 이라는 게 뭐냐 하면, ‘주다’, ‘진리를’. ‘진리를 주는 그날’ 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뭐예요? 하나님은 그 빛을 진리를 주는 그날로 부르신 거고. 요 ‘코세크’, 밤을, 그러니까 흑암이죠, 흑암. 요 ‘코세크’ 흑암을 밤으로 부르셨어. 왜? 이 아래에 있는 흑암을 밤으로 불렀어. 그런데 이 밤이란 단어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 가르치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밤이에요. 이 세상이 밤이라니까, 지금.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더니 어두웠다고 그랬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밤으로 부르셨어요. 우리를. 왜? 그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를 살리려고. 그래서 그 흑암들을 밤으로 불러내셨어요. 왜? 그걸 빛으로 드러내어 진리로 주려고. 그러면 그게 뭐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거고. 그게 연합이라는 거야~. 라는 말이에요. 하, 어디서 이렇게 맞아요~ ㅎ. 합격, ㅎㅎ. 얼른 끝내라는 거예요? ㅎ 종을 치고 있어. ㅎ

 

자,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2장 16절 보세요.

갈 2 : 16-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행위가 아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거지요! 라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이들이 저놈들은 어떻게 저렇게 변하는 것도 없이, 성숙되는 것도 없이 저래? 저거? 계속 죄만 짓고 있네? 그래, 너희들 말대로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신앙생활 하다가 죄인이 된다면 그 그리스도가 죄 짓게 하는 분이냐? 이런 말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뭘 헐었어요? 성전, 예수를 헐었다니까요. 율법을 헐었다니까요)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배운 거 여기 다 있어요)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3 :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경을 설교한다고 하고 항상 적용으로 마쳐 ㅎㅎ)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러니까 우리는 이 아래 것, 율법, 성경 그걸 갖고 그래 이걸로 죽으면 되는 거지, 라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는 거예요. 그래서 뱀이 와서 그러는 거예요. 너 이거 선악과 먹잖아? 그럼 네가 선악을 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가 만나야 되는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이면 안 돼요. 그럼 우린 죽습니다. 네가 선악과 먹으면 너는 그 선악의 하나님 만나게 돼. 그러면 정녕 죽으면 돼. 율법을 여러분은 처음 만나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 와서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처음부터 율법으로 보게 돼 있어요. 당연히. 그러면 그걸 갖고 죽으면 돼. 제가 옛날에 에베소서 강의한 거 있죠? 똑바로 사세요! 이거. 하도 그냥 무슨 신비주의 기복주의가 온 세상을 들썩이게 하길래 그거 아니다, 기독교는 사는 거야. 라고 하려고 똑바로 사세요. 그거를 열심히 읽으시고 죽으세요. 그리고 로마서를 들으시면 그렇지. 이렇게 사는 거지라고 알게 되는 거라니까.

 

그래서 뱀이 그러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 죽으면 돼.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선악과 먹으면 무트, 타무트. 진짜 죽어. 그러면 살아. 이렇게 말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요? 음~ 먹지 말아야지. 입을 꼭 다물고. 그러면 그거 없이 어떻게 하늘의 의를 알아요? 아래의 어두움, 흑암이 없이 어떻게 그 빛을 압니까? 우리 창세기에서 봤잖아요. 지금. 모른단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거 갖고 그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그렇지 그게 은혜지. 이게 자유지. 풀려남이지. 그렇게 알아야 돼요. 그런데 대부분 어디서 머무느냐 하면 그냥 전설, 전설 따라 삼천리에요. 신화, 아, 그 예수!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 예수를 믿으면 산대! 어디서 봤어요? 어디서 봤어요? 38년 된 병자. 누굽니까? 이스라엘에 가데스 반야에서 가난안에 들어가기 까지 38년 걸렸거든요. 왜냐하면 가데스 반야까지 가는데 2년 걸렸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실패하고 38년 돼.

 

그런데 눈앞에 38년 된 병자가 있어요. 그래? 잘 됐어. 내가 이걸로 설명해줄게. 이게 이스라엘이야. 이게 율법이야. 얘야. 너 낫고 싶니? 당연히 낫고 싶죠. ㅎㅎ 그러면 낫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 그 앞에 계신데 낫게 해주세요. 그래야 되는데, 저기요, 저 아래요 저 물을요 천사가 한번 내려와서 확 동하고 가면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가는 놈은 산대요. 이게 전설이었거든요. 실지로 그러지 않았어요. 전설이었단 말에요. 그리고 제일 먼저, 요이땅 했는데 제일 먼저, 바람이 불어서 뭐 동했다고 쳐.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간 놈은 멀쩡한 놈이라니까. 어떻게 병자가 거기를 제일 먼저 뛰어 내려가서 퐁당 들어가느냐고요? 전설인 거예요. 그게 널 구원해준대? 네 병을 낫게 해준대? 네 그런대요.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집어넣어 주세요. 저 전설 속으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얘야, 내 말 들어. 일어나서 가! 그 말 들으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전설을 믿고 있어. 2 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가 다 해결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그럼 우린 나은 거야. 그래놓고는 불안해서 만날 덜 덜 덜 덜. 진짜 그런 거예요? 그걸 알아야 된다니까요. (알았어요. 끝났어요. ㅎㅎ)

전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바로 그런 안식. 그런 자유를 좀 누렸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이게 성도의 삶이지. 이게 진짜 자유지. 이렇게. 고향, 마치 고향 집, 고향에 온 것처럼. 우리 애들이 워낙 이 한국에서 적응을 잘 못해가지고 어제 우리 남가주에서 같이 찬양 팀을 하던 우리 영이 형제가 여기 미군부대에 군인으로 와 있거든요. 그래 갖고 에스코트를 받아서 미군부대에 데리고 갔어요. 그 안에는 진짜 미국이더만요. 호텔도 있고, 뭐 학교에 미식축구장. 식당. 진짜 오리지날 서브웨이 버거킹, 다 있어요. 그 냄새도 미국이에요. 거기는. 저는 알잖아요. 미국 냄새가 어떤 건지. 그리고 한국에서 수입할 수 없는 모든 게 다 있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막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 말이 통해. 그래 애들이 안 나오려고 해요. 거기서. 그래서 밥을 먹었어요. 밥을 뭐 거기 음식이 싸니까. 그런데 그 싼 거 그걸 그렇게 맛있게 먹어요. 치토스 너무 먹고 싶었는데 거긴 막 자판기에 있어. 그게. 미국 게. 그러니까 막 너무 좋아가지고 애들이요. 고향에 온 거 같아요. 그런데 담하나 딱 넘어서 나왔더니 찬바람이 또 쌩 쌩 부네. 남의 나라야. 오면서 또 언제 가요? 저기.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 때, 그렇게 이방인 같이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말이 통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오면 여러분이 그게 즐거워서 가기 싫고. 이래야 되는 거라니까. 그런데 어

떻게 여기를 빠져요? 여기 오셔서 그 본향,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이라도 조금씩 맛보고 그걸 소망으로 계속 붙드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하늘의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 땅의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그 하늘로 이해되어 질 때에 이 세상에 악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렇게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 그것을 하나로 깨닫게 되는 그 용서의 자리,

그 사랑의 자리, 은혜의 자리 그 자리로 우리를 하루 속히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