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7 무서워하는 종의 영
8:12-16
12.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벧전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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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14.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딤후1:7 |
16.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지난 주에 종의 영, 양자의 영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종의 영, 양자의 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법 수준으로 이해해서 육신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열심히 그냥 '행해' 버리면
그것이 자기를 스스로 율법으로 묶는 종의 영이 되는 거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아들로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양자의 영',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 진리를 받은 것이고,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진리로 받은 거죠. 영은 곧 말이고 생명이니까.
말씀을 진리로 받은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아들로 낳게 한 그 아들 안의 그 진리의 말씀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이를 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된 자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아고'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아고'는 개역성경에서 '인도하는'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건 굉장히 점잖은 표현이고,
'아고'는 가기 싫어하는 그런 자를 꽁꽁 묶어서 억지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고 아고 곡소리가 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광야라는 길을 40년간 그렇게 꽁꽁 묶여서 끌려다니다가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 그 이스라엘의 광야인생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40년간 어떤 일이 있었죠?
이스라엘의 1세대가 다 죽죠? 뭐에 맞아 죽어요? 하늘에서 떨어진 하늘의 양식에 맞아 죽는 겁니다.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애굽의 장자스러움'을 애굽에서 다 빼앗기고 나오는 겁니다. 원래가.
그래서 어린 양이 애굽에서 죽자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죠?
그건 하나님이 겁을 줘서 이스라엘을 풀어주려고 그런 일을 하신 게 아니라
'너희들이 어린 양 안에서 이렇게 애굽의 장자됨을 죽이지 않으면 절대 이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못 나간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자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1세대가 다 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양식, 그것으로 거듭난 자, 광야에서 난 자들만 새 사람이 되어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애굽의 수치는 다 굴러간 겁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끄집어 냈기 때문에.
그렇지만 길갈에서 할례를 함으로써 몸으로 그 수치가 물러가는 게 어떤 건지 알게 하는 겁니다.
할례란 육적 죽음입니다. 생식기를 자른다는 건 생명을 절단해 버리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걸 경험하는 게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인생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진리를 알고 아들이 되어도 그걸 우리가 몸으로 알아야 해요.
그걸 꼭 배워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고'의 삶으로 끌고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요.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 하나님이 꽁꽁 묶어버리는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꽁꽁 묶어서 당신이 정하신 목적지, 진짜 생명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가짜 생명이 죽어야 된단 말이에요. 이 육체의 호흡을 뺏겨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꽁꽁 묶어서 당신이 정하신 목적지로 끌고 가는게 진짜 자유고, 진짜 풀려나는 겁니다. 그 자유, 그 자유는 반드시 생명을 출산해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논리를 뒷받침 해주는 단어가 '종의 영' 앞에 붙어있는 '무서워하는'입니다.
'프호보스'라는 그 단어. 종의 영, 즉 율법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마음의 근저에는 반드시 그 '프호보스' 두려움이 신앙행위의 동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게 종의 영입니다. 율법적으로 뭔가 열심히 행해서 결과물을 내어놓으려고 하는 그 마음의 근저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어요. 아니라고 해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기독교인이 되셨죠?
천국 가기 위해. 바꾸어 말하면 지옥 가기 싫어서. 그러면 그게 '두려움'인 겁니다.
바울이 그를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는 지옥 가는 게 두려워서 믿는 게 아니에요.
물론 시작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한 발 더 올라 서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은혜에 감사한다, 아무런 보상도 필요없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기실 그 행위의 동기는 두려움인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그래서 결국 그 두려움을 에너지 삼아 열심히 일하다가 그걸 시킨 하나님을 미워해요. 마음 속으로 불편해 해요.
그래서 천국 가면 그 영감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주인공인 천국, 그걸 기다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해요.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진리는 죽기를 무서워해서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자들을 풀어주는 겁니다.
여기서 '죽다'가 '다나토스'입니다. 다나토스는 좋은 죽음이죠. 말씀의 완성, 무트의 죽음.
그런데 그렇게 내가 말씀의 완성으로 죽으면 나의 주체성이나 존재성은 상실되는 겁니다.
'아, 은혜, 그 사랑이지. 그게 생명이지.
내가 내어놓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게 아니지.'
이게 죽는 겁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걸 다나토스라고 하는데 그걸 인생들이 무서워해요. 그게 프호보스입니다.
인간은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두려워서 그냥 억지로 율법적 행위를 하고, 그들을 종이라고 해요.
진리는 그렇게 종,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풀어놓아 주는 것입니다.
'다나토스'의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그냥 말 그대로 육신의 숨을 놓는 그 죽음이 무서워서, 죽는 게 무서워서 종노릇한다, 그런 말이 아니라 다나토스의 죽음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육적자아가 부정되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아담 안의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그 꼬리로, 육적 꼬리로 열심히 일을 해서 내어놓는 그것에 의해 하나님은 나를 상 주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선물로 주기도 한다, 이런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다나토스로 죽어버리면 하나님께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걸 인정해 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면 불안해 한다니까요. 그걸 '프호보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도록 일하는 겁니다.
집 팔아서 헌금하고, 시간 들여서 교회에 나와 죽도록 일하고, 집은 그냥 쓰레기장 만들어 놓고.
무서워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아들이 되지 못한 자, 진리로 아들이 되지 못한 자, 진리로 아들이 되지 못한 자들의 그 열매들, 그들의 업적,
이런 건 쳐다보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종은 안 보고 아들만 보세요.
당신의 진리로 품은 아들만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 속 열매들은 하나님이 안 보십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
'푸호보스' 두려움이 반복해서 나오죠? 푸호보스, 그 두려움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룬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배웠죠? 사랑으로 완성을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으로 온전하게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로 완성을 하면 그게 온전이라고 했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온전하게 마음으로 가진 자들은 절대로 두려움을 근거로 하여 열심을 내는 그런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진리는 두려움, 사망의 두려움, 그 인간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몰수당하는 그 다나토스에 대한 두려움의 결박을 끊어낸단 말이에요.
'아, 이렇게 죽는 게 맞지' 두려운게 아닙니다.
'이게 맞지' 인정을 한단 말입니다.
갈4:7
그러므로 내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자, 이게 상속자, ‘클레로모노스’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요,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상속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의 생명입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껍데기는 죽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짜 생명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다나토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생활, 종노릇만 하고 있는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겠느냐,는 말입니다.
살았다는 건 죽어서 살았다는 겁니다. 아, 나는 죽은자구나, 그걸 아는 게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죽은 자고, 나를 아는 게 사는 거니까, 그렇게 산 자들은 그렇게 죽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니까요.
‘이게 내 실체가 맞아.’ 인정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프호보스’ 무서워하는, 종의 영 받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영이란 말이고 생명이니까. 영은 그런 무서워하는 종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말, 그걸 복음으로 듣고, 거기에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억지로 살아가는 그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게 종노릇하는 자들이 가는 곳을 성경이 이렇게 묘사해요.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하 피스토스, 믿음이 아닌 자들이란 의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되지 못한 자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프뉴스. 사람 죽인 자들이 아님. 산상수훈에서 ‘살인하지 말라’의 그 단어. 희생제사만 열심히 반복적으로 드리는 자들. 사람 죽이면 절대로 천국 못 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입으로 사람 죽이는 게 더 무서운 겁니다.)
행음자들[povrno"(포르노스), ‘간음하지 말라’의 그 간음. 율법을 내 남편으로 알고 그 남편과 열심히 어떤 열매를 만들어 내는 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그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이거 다 같은 겁니다.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말 하지 마’ 여기에 다 있네요. 이들이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디에 들어가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불로 가득한 곳, 뜨거운 곳. 그들은 그걸 좋아해요. 성경을 율법으로 보는 자들은 다 뜨거워. 그냥 뜨거워요. ‘냉정’이란 차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냉정해야 하는데 다 뜨거운 것만 좋아해. 기도도 뜨겁게, 예배도 뜨겁게, 찬송도 뜨겁게. 뜨거운 게 좋아? 거기로 보내줄게.)
그 불못의 현실, 이건 이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아담들의 종국을 말하는 거기도 하지만 지금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율법의 종살이, 그 세상 풍조의 그 종살이. 거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가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압박감에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서 그 무거운 짐으로 살아가는 그곳이 불못입니다.
치열하고 뜨거운 곳.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가 불못인지 몰라요. 그 불못은 진리의 생수를 닮은 그 진리의 우물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못’이라는 ‘림네’는 호수의 뜻인데,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빠져죽는 그 호수가 림네입니다.
그러니까 돼지들이, 이스라엘이 가장 부정하다는 짐승,-그래서 탕자도 세상에 나갔다가 ‘여기가 돼지우리네’ 하고 깨닫고 온 겁니다. ‘내가 돼지네. 그 돼지와 쥐엄열매, 돼지 먹이를 치열하게 경쟁하는 그런 인간이 나구나’ 하고 알고 온 겁니다.
돼지떼 안의 귀신(鬼神)에서 鬼는 모르는 신, 神은 아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좋은 말입니다. 입에 케첩 흘리는 처녀귀신, 이런 걸 떠올려서 (나쁜 말로 아는데..)
귀신은 ‘프뉴마 다이모니온’ ‘나쁜 말’인데, 그게 담긴 자들이 돼지인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의 군대가 아닌 저쪽 다른 군대. 나쁜 말을 가진 돼지떼들이 거기가 사는 곳인 줄 알고 그곳에서 열심히 하는 것, 자기 꼬리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게 진짜 사는 건 줄 알고 거기서 열심히 사는 것, 이게 엉뚱한 귀신을 품고 거기에 뚜이들어 죽은 돼지로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습인 겁니다. 그걸 림네, 못, 불못이라고 해요.
그런데 보세요. 그 돼지떼 안의 비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나를 떠나세요’라고 해요. 감당을 못해요. 왜? 죽기가 두려우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면 내가 죽기 때문에 ‘나를 떠나세요’ 하는 겁니다. 그 비진리는 그러고는 생명과 반대쪽으로, 림네로, 불과 유황 못으로 달려가더니 거기로 퐁당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게 광풍이 이는 못,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갈 때도 림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저주의 바다, 심판의 바다, 유황못, 불못을 림네라고 쓰고, 다른 경우에는 다른 단어를 씁니다. 그 림네에서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지 한 번 보세요.
눅8: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태,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진짜 잠 드셨어요[kaqeuvdw(카듀도)]. 누가복음에서 ajfupnovw(아퓝노오)는 다른 단어로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마태,마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를 요나의 표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쓰기 때문에 예수님이 요나처럼 진짜 배에서 자야 돼요.
누가복음에서는 광풍의 바다에서 제자들이 잠 든 상태고, 그들의 영적상태가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광풍이 있는 림네라는 겁니다.)
마침 광풍이 호수(림네)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
(배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눅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님을 일깨워(diegeivrw(1326, 디에게이로) 완전히 깨우다, 일어나다, 각성시키다.) 주는 거죠. ‘주님 여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게 신앙생활 아닙니까?’ 오히려 주님을 일깨워 주는 겁니다. 막 흔들어 깨웠다는 말이 아니라. 일깨워 줘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나님은 거기서 죽으라고 하는데 죽기 싫다는 거죠.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여기서 살아야 되거든요. 이걸 극복해야 되거든요. 이 어둠, 이 죄, 이 세상... 이걸 우리가 극복해야 하나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럽니다. “도와주면 내가 이길 게요. 여기 안에서.”
아니요. 하나님은 거기서 나오라, 떠나라고 하세요. 거기에 대해 죽으라고 하셨지 그걸 극복하라고 하지 않으세요. )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을 꾸짖으시니
(예수님이 바람과 물을 꾸짖으세요. 그 말씀에 의해 바다가 잔잔해 졌어요.
인간들은 대부분 그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지만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가진 사람은 그 광풍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그걸 밟고 서는 겁니다. 거기서 어떤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그 바다에 안 빠지고 예수님만 그 위에 서신 겁니다. 그 물, 저주의 바다를 사뿐히 즈려밟고 걸어가는 겁니다.)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두려워 하고
(예수가 두려움의 대상이면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겁니다. 저주의 광풍에 이리저리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외치는 게 훌륭한 신앙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게 이런 사람들인 겁니다. 믿음 없는.
예수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건 그게 나에게 부담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율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온 세상을 두려워 하는 겁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 저주의 바다, 그 광풍과 상관없는 자가 돼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움, 그 죄, 나의 이 실체, 나의 이 불가능한 모습, 폭로된 어두운 모습... 이런 것들도 사실은 여러분과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른 이들은 그 광풍에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 힘으로 거기서 살아나야 된다는 이것 때문에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데 예수님만 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그 저주의 광풍, 저주의 바다와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너무 피곤하고 잠이 부족해서 주무신 게 아닙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광풍이 이는 바다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운반하는 그 아들은 광풍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로 자는 겁니다. 잔다는 건 거기에 대하여 죽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잠은 죽음을 메타포 하죠.
‘그런데도 못 알아 먹어. 그거 몰라? 그래 그게 이거야.’
‘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그 배 안에서, 그 성전 안에서 잔다,라는 건 이거야,’라고 보여준 게 저주의 바다 속에 빠트려서 그 바다 속에서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하시고 배에서 요나처럼 주무신 겁니다. ‘신앙이란 거기에 대해서 죽는 거야, 진리를 담은 아들은 그런 거야.’라고 보여주신 겁니다.
베드로가 다음 날 참수 당하는 날인데 감옥에서 잤죠? 하나님의 아들은 이 감옥,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 죽음에 대해 죽은 자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베드로가 미련하고 둔해서 잠을 퍼질러 잔 게 아닙니다. 완전히 잔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천사가 걷어차는 모습까지 보여준 겁니다.
그게 아들의 삶인 겁니다. 그 이야기 바로 밑에 그 못, ‘림네’로 돌진해서 빠져죽는 군대귀신 들린 돼지떼 이야기가 붙어있어요.
성경은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로 기록돼 있어요. 성령이 편집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 에피소드나 탁탁 붙여놓은 게 아닙니다. 거기서 뚝뚝 떼서 교훈이나 얻어내라고 성경을 기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만을 차서 있게 설명한 겁니다.
그래서 그 림네라는 단어가 붙어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전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겁니다.
그 두려워 하는 모습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죽은 그 돼지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가 바로 유황불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자기들의 꼬리 힘으로 열심히 살면 어떤 초월자가 그 속에서 가장 왕성한 꼬리의 산물을 생산해 낸 이들의 차서를 매겨서 그들이 좋아할만한 것으로 보여주고, 보내주고, 상도 주고, 차별도 하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경연하는 경건의 경연장, 열심의 경연장, 이런 걸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 겨루어서 이겨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분주히 움직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이쁘고, 더 잘 나고, 더 돈도 많고, 공부도 더 잘 해야 하고, 자식도 잘 돼야 하고... 이런 것이 유황불못입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해요. 전부 무슨 팀이 되어 저 팀보다 우리가 잘해야지, 기도도 더 잘해야지, 헌금도 더 많이 해야지, 선교도 더 잘해야지, 더 많은 결과물을 맺어야지... 이런 식으로 해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 두려움의 불못 이야기, 이 림네 이야기가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부터 흘러내려오고 있어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씨, 하나님의 말씀, 아들, 진리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되지 못한 자들에게 오는 게 이 두려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가졌다 하는 아들이 그 두려움으로 살면 돼? 그 무서운 종노릇으로 이 신앙생활을 점철하면 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눅8:5-8
5 씨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비유강해에서 이걸 자세하게 설명했으니까 그걸 참고하세요.
오늘은 그 종의 영과 그 결과로 얻어지게 되는 두려움의 이야기가 어떻게 비유와 연결이 되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보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씨는 후손이고, 아들이고, 자손입니다. 그리고 그건 말씀,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씨, 씨를 뿌리는 자가 있다는 거죠? 지금 누가 뿌려요? 하나님이 뿌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실수로 길가나 가시덤불, 바위 위에 떨어트린 건 아니죠? 하나님이 실수하신 게 아니라 일부러 거기에 떨어트린 겁니다. 왜? 필요해서.
자, 그 씨는 우리를 반드시 아들로 만들어 내는 양자의 몸으로 우리에게 와야 돼요. 종의 영, 비진리로 우리에게 오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로 만들어내면 그걸 성경이 ‘짝’이라고 해요.
여기에서 백배라고 쓰인 ‘eJkatontaplasivwn(1542, 헤카톤타플라시온)’은 헤카톤(eJkatovn, 1540: 일백)과 플랏소(plavssw, 4111: 형성하다, 빚다)‘는 단어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헤카톤타플라시온은 ‘백으로 완성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씨는 백으로 완성해 낸다, 백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이라는 건 ‘완성, 뜻을 이룸, 아들, 언약의 성취’ 등의 의미로 t용됩니다. 히브리어로 성경이 기록될 때만 해도 아라비아 숫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런 것은 숫자로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안되고,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들이 어떤 의미로도 쓰여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몇 군데 찾아드리죠.
창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샘은 일백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세기 10장에서 셈의 아들이 5명 나와요. 그런데 여기는 아들이 아르박삿 한 명만 나오죠? 그리고 낳았다, ‘야라드’ 히필동사. ‘야라드’가 히필동사로 쓰이면 ‘말씀으로 낳게 하다’는 뜻입니다.
5명의 아들 중에 아들로, 진리로 낳은 자는 아르박삿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때가 ‘홍수 후 이년’.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 홍해를 건너게 한 다음에 성막을 주시고 그 성막을 완성시키세요. 언제? 2년 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냐 하면 100의 때. 그러니까 아들을 진리로 낳은 그 ‘때’가 100이다, 하는 겁니다.
셈은 히브리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해요. 히브리 사람, 그게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히브리 사람들의 대표.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돼요. 진리를 낳아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때가 100이다, 그래요. 100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약속의 후손, 이삭이죠? 이삭이 몇 세에? 100!
성경은 아브라함이 몇 살에 이삭을 낳았는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100의 의미(가 중요한 겁니다.). 이삭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런 존재, 약속의 후손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그 씨, 자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아브라함이 ‘내게 아들을 주시려나?’ 이 수준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러면 내가 그 수준으로 가르쳐 줄게, 하고 내려가서 아들을 주신 게 이삭입니다.
그러면 그 이삭을 통해서 약속의 후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됐는지를 배우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삭으로 그걸 깨닫게 되자 하나님이 “그러면 그거 이제 필요없지? 그럼 죽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그 생명, 그 아들이 뭔지를 모르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줬어요. 예
수를 줬다니까요. 그것으로 내가 어떻게 그 아들이 됐는지를 알면 그 예수가 한 일은 더 이상 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가 아들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를 죽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지, 괜히 d"P수를 왜 죽여요? 그 의미를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그 구원, 그 씨, 그 자손, 그 아들이 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아들을 주고 그 아들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했다면 그게 아브라함의 아들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온 예수는 내 아들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책에 ‘교회는 d"P수를 낳고 예수는 교회를 낳는다’는 제목을 쓴 겁니다. 예수가 교회를 낳았다는 걸 아는 그가 예수를 낳은 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 예수를 준겁니다. 약속의 후손으로.
말씀이라는 그 씨는 100으로 완성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성전을 의미하는 땅-하 에레츠는 항상 성전으로 번역. 신약에서 ‘호 게’도 그냥 성전-에서 땅의 것, 그걸로 열심히 일해서 100을 낳으면 그 사람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창26:12
이삭이 그 땅(하 에레츠)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니라
이삭은 약속의 후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어요. 그러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돼요. 그래서 그 성전을 통해서 100을 얻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100배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농사법을 개발했기에 100배가 나옵니까?
이삭이 100을 낳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이라는 씨는 반드시 그 아들로, 100으로 완성이 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길가에 뿌리세
요. 길은 뭐죠? 예수님! 예수님이 ‘내가 길이야’, 자기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의 멀리도 아니고, 그 옆에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돼요?
파라볼레가 비유죠? 옆에 떨어트려 주고 그것으로 이것을 알라고 준 게 비유입니다. 그래서 파라볼레가 거기 쓰인 겁니다.
‘파라볼레’ ‘파라 호 호도스’ 그 길 옆에 뿌려주고, 그 길을 알면 돼요. 그런데 그 길 가운데
떨어지면 그게 진리죠? 그런데 길 옆에 떨어진 걸 그냥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그걸 율법이라고 합니다. 길 가운데 떨어진 게 아니라 ‘파라’ 옆에 떨어져버린 걸 그냥 그걸로, 껍데기로, 비유로 알아버리는 그거. 거기엔 내용이 있는데.
그러면 공중의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고 해요. ‘공중의 새’는 항상 성전입니다. 성전이 날아가는 새 모양입니다. 그래서 ‘호로스 우라노스, 호르니스’는 모두 성전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니까 옛 성전, 율법의 성전이 그 율법, 그 씨는 당연히 먹어버리죠. 홀랑 율법으로.
두 번째, 반석에 떨어져요. 반석은 ‘페트라’. 그 반석은 생수를 내는 반석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성경이 율법이 되면 진리의 물로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지 못하는 물기가 없는 반석을 ‘거치는 반석, 부딪히는 돌’이라고 해요.
그 돌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돌판에 당신의 말씀을 써서 줬죠? 그 말씀으로 내 마음에 새기면 ‘심비에 새겼다’고 해요. 예수님을 왜 자꾸 ‘돌, 산 돌, 모퉁이돌’이라고 하냐면 그 예수가 적혀있는 게 성경이니까 성경을 통해, 예수를 통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에 적혀있는 그 계명으로만 봐 버리면 그 돌에 내가 찍혀 죽는 겁니다.
그래서 살인, 간음하면 돌로 찍어 죽이라고 하는 건 너희들도 그 돌에 맞아 죽는다, 죽을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진리로, 생명으로, 그 생수로 이해되지 못하면 그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세 번째, 가시 떨기는 당연히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이라고 그랬으니까. 그 씨를 율법에 던져버리면, 율법으로 이해되면 가시떨기, 율법이 막아버려서 결실이 안 돼요.
그런데 좋은 땅에도 떨어진대요. 거기서 좋은 땅 ‘호 게 호 아가도스’에서 아가도스는 선입
니다. 성경에서 ‘선’은 칼로스와 아가도스가 있어요. 칼로스는 밖으로 드러나고 보이고 나타난 선, 아가도스는 ‘그 선의 실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땅 ‘호 게 호 아가도스’는 ‘진리를 담고 있는 성전’입니다. 거기에 씨, 말씀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진리고, ‘100으로 완성된다, 아들로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 씨, 아들, 성경, 말씀은 그렇게 진리로 와줘야 되는 겁니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좋은 땅에 뿌려졌다고 하지 않아요. ‘그 좋은 땅, 호 게 호 아가도스’ 그 안에 있는 씨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 ‘칼로스 카이 아가도스’, 칼로스는 아래 것, 아가도스는 위의 것입니다. 아래 것으로 위의 참 선을 알아버리면 그걸 성경이 좋은 마음이라고 해요. 새 언약에서 하나님이 ‘내가 새 마음으로 바꿔줄게’라고 한 그 마음이 이 마음입니다. 새 마음은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씨로 가진 자가 되어 말씀을 듣는데 진리로 들어요. 들리는 겁니다.)
듣고 지키어
(keep입니다. 마음으로 갖고 말씀을 들어 그 말씀을 마음으로 갖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다
(100이 되는 자, 열매가 되는 겁니다. 아들을 낳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결실하기 전에 ‘인내’라는 과정이 있어요. ‘휘포모네’, ‘휘포’는 ‘~아래’니까 ‘휘포모네’는 아랫것을 가지고 아랫것 안에 갇혀서, 몸에 갇혀서 위의 것을 추구하며 그 위의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삶 전체를 인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내는 내가, 내 열심과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끌고 가는 ‘아고’의 삶 전체가 인내, 휘포모네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이기는 자, 인내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 이런 말은 잘 견디면 상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그 인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이라는 씨에 의해서 아들이 되는 걸 씨의 생명력이라 해요. 탄생하게 하니까. 그리고 그 아들 안에 완성된 언약의 그 완성으로서의 그 진리를 소금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하시는데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거니까.
소금이라는 건 네 안에 그 하나님의 말씀, 그 계명이 언약의 성취인 사랑으로-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갖게 되면 그걸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금이 밖으로 흘려지
고 드러나는 걸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금이면 당연히 빛인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이 행위에 대해 너무 무가치하게 말해서 마치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 같다’ 하는데 그건 제 말을 곡해한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신앙의 선배들이 내놓았던 치열한 헌신의 삶은 뭡니까?” 이렇게 물어요. 뭐긴 뭡니까? 당연히 나와야 되는 거죠. 진리를 알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암에 걸려 3개월 안에 죽는다고 하면 그건 축복이고 너무 부러워요.
뭐가 두려워요? 진짜 그 나라, 내 나라로 가는데. 이런 마음,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거 전해주고 싶어서 새벽부터 죽어라고 공부해서 가져와요. 이 애타는 심정이 읽혀지시죠?
이걸 빛이라고 해요. 여러분도 그게 당연히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이 열심히 필요없어요? 내가 이걸 일부러 하는 겁니까? 무슨 유익이 있어요? 복음을 들을 사람이 있으면 불원천리 달려가는 교인들이 많은데 그분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어요? 가서 욕이나 먹지. 그런데도 들려주고 싶은 거, 이걸 행위라고 그래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마치 그것도 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들어야 해요. 들음에서 시작해서 알고 깨닫는 앎의 단계로 가요. 그러면 내 안에서 내가 됨이 돼요.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아. 그러면 그걸 누려야 되는데, 서로 성도의 교제 안에서 소통하면서 누리는 겁니다.(들음->앎->됨->누림)
그래 이거지. 이게 사는 거지. 이게 생명이지. 이게 누리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야 돼요. 그런데 “듣고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맘대로 살아도 돼. 개판으로 살아도 돼” 이게 앎에서 그친 영지주의인 겁니다. 이건 율법주의보다 위험한 겁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십자가, 나와 무관한 그 빛, 그건 우상인 겁니다. 그게 내 밖에 있으니까 자꾸 뭐라도 해야 되는 거야. 이게 종의 영입니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되게 무서워 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들 초조해해요. 나는 자기네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데 자기들은 설교 때마다 내 이름을 들먹이면서 초조해해요.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씨가 100으로 결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세요.
눅8:16-18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들이 뭘 듣는지 잘 생각해 봐. 그걸 너희들이 들었다면, 그래서 그게 마음이 되었다면 당연히 감추어진 것이 더 이상 감추어지지 못하고 흘러나간다는 말입니다. 그건 우리가 열심을 부려서,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백성은 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만들었다’ 하셨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생산해내는 당연한 결과.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게 아니라.
그러니 그냥 교회도 안 가고 맨날 인터넷에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얻는 게 아니라, 사는
겁니다. 신앙은 치열하게 사는 겁니다. 역동적인 겁니다.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말씀의 영향력이라고 합니다. 생명력 있는 그 씨를 가진 자는 그 씨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그걸 빛이라 그래요.
그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독사가 나타내는 겁니다.
그들은 말씀이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서 아들로 탄생이 되고, 다시 자기를 아버지 어머니로 낳아서 위급한 형제들에게 그 씨를 흘려주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등불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왜 이렇게 싸가지 없는 인물로 나오나? 그런 생각 안 드셨어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그 다음에 싸가지 없는 예수, 그 다음에 돼지 이야기, 이게 연결이 되느냐고요?
그렇게 씨를 가진 자는 반드시 등불이 되어 그 소금을 흘려주게 되어 있어요. 그 언약, 그 사랑을 흘려줘요. 이게 온전한 자의 삶이니까. 그게 내가 진리로 다른 이를 낳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나를 낳는 겁니다.
새로운 나,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거다.’ 했을 때 그 ‘나’를 낳은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있는 자, 그에게 필요한 그걸 전해주어 그를 나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걸 히브리 사람들이 형제, ‘아흐’라고 해요.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로 뭔갈 설명해 주는데 마침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어요. 이걸로 진리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는 겁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냐? 그 진리가 내 안에 그 씨로 왔다면 그게 100이 되는 거고, 그 100으로 다른 이를 100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그게 어머니의 일이고, 그게 형제의 일이잖아.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걸 마음으로 가진 그들이 어머니요, 형제지.”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눅8:19-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여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 밖에 서 있어요. 길 가에 떨어져 있는 어떤 이들의 모습인 겁니다. 원문으로 보면 ‘예수 밖에 그들이 서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머니, 아들, 형제가 될 수 없어요. 그 형제들에게 줄 게 없어요. 밖에 서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아흐, 형제)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의 새로운 설정을 합니다.
‘보소서 아들입니다’ 아들을 낳은 겁니다. 어머니로. 무엇이? 그 언약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되는 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아들아, 네 어머니다. 내가 그거 만들려고 십자가에 매달린 거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죽은 흑에 불과한 땅에 씨를 주어서 그 씨로 아들을 만들어내는 게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은 흙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서 그 위태한 상황에서 건져내는 게 형제입니다. 그런 행위를 등불이라고 해요.
‘네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감추어지고 숨겨진 상태로만 있겠느냐. 너희는 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택한, 내가 창조한 내 백성이니까 당연히 드러낼 거야.’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듣고 그 말씀을 아가페로 가지게 되면 그걸로 반드시 아들, 씨, 후손을 낳아요. 그들은 예수라는 아들을 낳고 나라는 아들을 낳으며 성도라는 아들을 낳게 하는 역할로 부름받은 겁니다.
그러한 중보자, 중개자들의 도움없이 어느날 갑자기 그냥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일 안 하기로 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이 어머니이고 그들이 형제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바울은 그렇게 아들을 낳는 어머니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4:21-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이 세상의 종들아,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들아. 이런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은 무서워서 그거라도 안하면 안되는 자들 ‘호 포보스’입니다.)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육체가 생산해내는 아들을 낳는 자들이 있고, 약속에 의해 낳아지는 아들이 있어요.)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곳.)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니 옛성전, 율법입니다)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그 진리를 어머니라고 해요)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세상에서 가짜 남편(로마서 7장 참고), 율법의 남편을 자기 남편으로 삼아 열심히 간음하여 아들을 낳는 자들은 율법의 행위를 낳겠죠?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그게 남편이 아니다’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다른 남편을 기다려요. 그래서 ‘그들이 홀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홀로 사니까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바로 자녀가 많은 자야’라고 해요. 그들이 진짜 아들을 낳는 자라는 겁니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당연하죠. 은혜의 진리를 전하면 율법주의자들이 ‘그게 신앙생활이냐?’라고 핍박해요. 항상 그랬어요.)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두 어머니, 시내산이라는 율법의 어머니와 하늘의 예루살렘, 자유자라는 은혜의 어머니가 있는데, 둘 다 아들을 낳아요. 그런데 성경이 두 언약이라네요. 당연히 구약과 신약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성경 39권은 하갈, 신약성경 27권은 사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성경 전체가 법으로 읽혀지면 구약, 그걸 통해 진리를 깨달아 아들이 되면 신약, 새로운 언약이라고 해요.
그러면 구약 없이 신약이 있을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신약으로 끝나지 않는 구약은? 없죠? 바울이 ‘그건 악이다!’라고 해요. 죽이는 거다.
그러면 당연히 구약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잘 못 난 게 아닙니다. 당연히 낳아야 할 거였어요. 그 이스마엘을 통해서 약속의 자손이 무엇인지를 알아먹도록 그 하갈과 이스마엘이 준비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하셨어요. 결국은 쫓아낼거다, 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걸 보호하세요.
가인을 통해 셋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가인을 죽이면 안 돼’라며 보호하듯이, 그 셋, 약속의 자손, 그 셋이 오기 위해 죽은 그 하벨, nothing이라는 그 존재가 뭔지를 알면 가인은 그걸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아래의 것으로만 이해해 버리면, 자기의 제사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면 그건 그냥 죽어야 할 가인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 아랫것, 율법은 사실 다 필요한 겁니다. 세상의 것, 광풍이 이는 바다, 호 코스모스의 세상, 죄, 악, 어두움, 더러움은 필요한 겁니다. 왜? 그걸 통해서 하늘의 것을 설명해줘야 되거든요.
세상에는 하늘의 것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걸로 하늘의 것을 설명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알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돼요. 그걸 용서라고 해요. 그게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자는 겁니다. ‘큰일이네. 이거 어쩌지?’가 아니라 ‘이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거야.’하고 풍랑에 대해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갈이라는 이 땅의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죄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이 내어놓은 모든 게 사실은 하나님께서 쫓아내기를 원하시는 엉터리 열매, 이스마엘 같은 것이라는 걸 아는 자들이 이삭을 낳는 겁니다. 그들이 올바른 씨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마엘로 이삭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그 이스마엘로 쫓겨나는 겁니다. 율법이 되어 쫓겨나는 겁니다.
따라서 진리를 씨로 가진 아들들은 풍랑이 이는 아랫물의 저주 속에서 두려움으로 살면 안됩니다. 그 저주의 아랫물을 진리의 윗물로 덮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용서라고 해요. 풍랑이 이는 아랫물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폭로해내고 그래서 그것으로 ‘아, 나는 이런 존재야’라고 알게 되면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폭로해내고, 그 속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뭔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시청각 교재입니다. 그러니까 어둠도 진리를 알게 되면 사실은 나!ms 게 아닙니다. 죄? 진리를 안 그들에게 도대체 죄가 뭡니까? 원래 그들은 그것과 상관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자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선악과나무가 뭐냐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풍랑의 정체, 그 아랫물의 그 광풍이 이는 바다의 정체, 림네의 정체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렘31:35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바다를 격동시켜서 아래의 것으로 풍랑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는 건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뭘 소리치고 싶어서 너희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로 그 말을 들으면 되는 거지. 그러면 그건 이미 나와 아무 상관 없는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바다를 그냥 치워달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그럽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든지 이걸 극복할거야’라는 건 ‘나는 여기에서 대장 될거야’ 이거랑 똑같은 거거든요. 사실은 무서워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1등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을 일깨우며 ‘이게 신앙이잖아요’ 이러는 겁니다.
그때 주님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게 믿음이야?’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 풍랑과 상관 없는 자로 그냥 서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를 아들로 탄생케 만드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라 해요.
그건 제가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릴 건데, 오늘은 그냥 ‘그 말씀이 우리를 낳는 부모다, 예수가 바로 우리 부모다, 그 진리가 우리 부모다, 나를 아들로 낳게 하는 부모다’라는 것만 마음에 잘 새겨두시면 돼요.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부모에게 순종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 부모가 너를 아고의 삶으로 끌고 가서 결국 ‘스타우로스’의 십자가, 언약의 십자가에
매달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도망하지 말고 그 부모에게 순종해, 쫓아 가. 쫓아가서 어떻게 해요? 죽어!
엡6:1
1 자녀들아 주 안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이것이 의, 디카이오쉬네다, 끌려가서 죽어라. 그게 의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최고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이죠? 성경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것, 최고의 명령이 그 부모 쫓아가서 죽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성경, 그 약속 안에서 최고의 것이 부모에게 순종하여 그 부모가 아고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그걸 쫓아가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없애 달라 그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걸 신앙생활의 내용이라고 아는 이들이 무슨 신앙인입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징계, 파이데이아는 ‘교육, 양육, 훈련’ 즉 ‘아들 만들기’입니다. 이 ‘아들 만들기’는 하나님 백성이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아고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게 인내, 휘포모네)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너희 아들은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영의 아버지, 내 안의 진리입니다. 그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아들 만드는 양자의 영, 그 아버지, 그 진리. 육신의 아버지도 너희를 자식 만들기 위해 징계하고 야단치기도 하는데, 너희는 그 말은 듣잖아? 하물며 너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 내가 아들 만들기의 그 삶으로 너희를 인도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것도 따라야지. 아니면 너희는 아들 아니다.
그 아고의 삶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아래의 것, 광풍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 꼬라지를 하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니까요. 그건 무서워 하는 겁니다.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해보세요. 그 무서운 분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그는 아들 아닙니다. 혹시나?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됩니다.
죄도 악도 고통도 고난도 행복도 기쁨도 모두 그 아담 안의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새로운 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의 나, 그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재료들이란 말입니다. 적어도 아들들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게 다, 이스마엘, 가인까지도.
그러면 여러분은 그 풍랑에 대해 죽은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을 세상의 종으로 묶는 그런 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 아들 만들어내는 그 영 안에서 자유하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좋아 내 형제들에게 흘려주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면, 그렇게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치열하게 헌신하시라니까요.
‘이젠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나?’가 아니라.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벧후2:17
17 이 사람들은 물없는 샘이요
(물없는 샘은 유황불못입니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광풍, 세상 풍조에 다들 밀려가요)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사는 게 이런 건 아닐거야’라고 ‘겨우’ 예수 믿겠다고 피해온 자들을 육체의 정욕, 에피뒤미아, 격동시켜 내는 율법을, 거짓말을 전해서 더 죽여버리는 겁니다)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자유를 준다고 거짓말 하는데 아들이 아니에요. 멸망의 종들이라니까요. 그 거짓말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자유를 준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실상은 율법의 종으로 만들어 내는 자들, 그게 물 없는 샘입니다. 그게 길 가고, 가시덤불입니다.
영어에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힘든 고통을 참으면 더 강해진다)'라는 격언이 있어요. 고통이 크고 힘들지만 죽이진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예 죽여버려요. 그 고통은 죽이는 고통이야. 격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겁니다.
다나토스의 죽이는 고통. 아들 만들기, 그 아고의 삶은 아들 만들기를 위한 겁니다. 그걸 알면 거기에서 풍랑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1등 못하면 어때요? 사람들이 나를 좀 낮게 평가하면 어때요. 좀 아프면 어때요? 그걸 통해서 많이 배우잖아요.
지금 몸이 안 좋아 수지치료를 받는데 무지하게 아파요.
고문을 받는데 돈 들고 줄을 서요. 나를 살리기 위한 고통인 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의미가 달라요.
미국 시민권자 아이들이 고난을 통해 뭔가 배워보겠다고 한 해에 200명씩 한국 군대에 입대한대요.
성도도 그런 고통, 그런 고난 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시는 아들 만들기의 작업, 아고의 삶, 인내의 삶이란 걸 확실히 안다면 지지 말고 살아야죠. 그게 ‘휘포모네’ 인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에게 이렇게 살 수 있는, 아니 유일한 살 길을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이해되는 것도 기적이고, 그것으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 기적의 한 가운데 우리가 있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끝까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자유를 누리며
우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견디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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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것 ;그 안에 있는 씨는(호계 호 아가도스)
착하고(칼로스)좋은(아가도스)마음(카르디아καρδία)으로 말씀을(로고스)
듣고(아쿠오άκούω);진리를 듣고 씨로 갖고 깨달아 알아
지키어(카테고-keep,마음으로 가져, 카타2596-아래+에코2192-소유하다,붙잡다,간직하다)
인내로(G5281-휘포모네.인내ὑπομονή)
- 아래 것을 가지고 아래 것 안에 갇혀서 그 위에 것을 추구하며
그 위에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전체의 삶.
즉 아래에 갇혀 그 위의 진리로 알아 버렸는데 내 육은 여전히 아래에 있으므로
그 삶이 정말 힘든 겁니다.
내 열심 내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끌고가는 내인생 전체가 인내의 삶
아고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인내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해~!하나님이 상줄게~’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결실하는(칼폽호레오καρποψορέωG2592) 자니라.(열매,아들로 낳음)
말씀이라는 것에서 아들이 되는 것을 씨의 생명력,탄생이라 합니다.
(씨=아들,후손,자손,말씀,성경입니다.씨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며,일부러 좋은 밭,길가 밭,
가시떨기 밭,바위위에 있게 하고 떨어 뜨리시는 건 일부로 그렇게 하신겁니다.
반드시 그씨는 양자의 영으로 완성이 됩니다.진리의 영으로 만드시는 데 이를
‘백’‘아들’이라 합니다.백은 빚다,완성하다,100으로 완성하다(백배))
그 아들안에 완성된 언약으로의 완성 그 진리를 소금이라합니다.
소금은 너희안에 그 하나님의 말씀,계명이 언약의 성취(사랑)으로 갖게 되면 소금이며
이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빛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소금이며 빛이다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소금이면 빛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위는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아 내가 산자임을 인식하면 그 사랑으로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은혜로 생김니다.
그래서 설교준비의 어려움속에서도(올바른 진리의 말씀선포)그 깨달음의 사랑,애타는 마음
이 생기는 데 이걸 ‘빛’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게 필요 없는 겁니까.
일부러 하는 겁니까.무슨 유익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비진리에 의해 욕을 먹으면서도 들려주고 싶은 진리의 말씀....그걸 행위라 합니까?
마치 그런 것도 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들음에서 시작해서 앎으로 그 다음에 내안에서 됨이라는 단계로 옵니다.
그리고 그걸 누림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서로 교제와소통하면서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거야’‘이게 생명이고 사는거지’라고 감사와찬양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고 앎에서 끝난 방종한 삶을 영지주의라 합니다.
이는 율법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며,더 위험한 것입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신,십자가,그 피 그 건 우상입니다.
내 밖에 있으니까요.자꾸 뭐라도 해야 되는거야 라는 사고가 바로 종의 영입니다.
씨가 100으로 결실이 되면...
(눅8:16-18)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 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겟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너희들이 무얼 듣는지 잘 생각해봐.
그 걸 너희들이 들었다면 그 마음이 되었다면 언약의 소금이 되었다면...
당연히 감추어 질 수 없고 당연히 흘려나오게 되는 거야‘
우리의 열심과 인위적으로 해 낼 수 있는 것이 나니라 하나님이 내 백성을 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만들었다.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열심히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공허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에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여기 쪼끔,저기 쪼금.....’
신앙은 사는 겁니다.
역동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겁니다.
이 걸 말씀의 영향력이라 합니다.앎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 씨를 가지고 있는 자는 그 말씀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걸 빛이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이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서 아들로 탄생이 되고
다시 자기를 아버지로 어머니로 낳아서
위급한 형제들에게 그 씨를 흘려주는 소금과빛으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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