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 : 7- 11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제가 한국에 와서 아주 유익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다큐멘타리 ‘동행’이라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챙겨서 보진 못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합니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1%에 해당하는 극빈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취재를 해서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타리에요. 눈물 없이 불 수 없는 그런 다큐멘타리입니다.
15년이 넘은 조그만 5인승 승용차 안에서 16살 먹은 장남을 비롯한 여덟 식구가 숙식을 하는 그런 가족도 있었고, 또 사업의 실패로 고 3 수험생인 딸과 두 살짜리 젖 먹이와 함께 영하의 날씨에도 공원 화장실에서 노숙을 하는 그런 40대 가장의 이야기도 봤습니다. 그리고 가난이 싫어서 가출해버린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면서 정신지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빠를 돕는 아홉 살짜리 꼬마 아이 이야기도 봤고. IMF 경제 위기 때 서울역으로 내 몰린 6천 명의 노숙자들이 이야기도 봤습니다. 또 당뇨와 당뇨 합병증인 간경화로 이미 복수가 남산만큼 그렇게 찬 아빠를 위해서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연탄이 다 떨어져가지고, 나무를 해다가 비닐하우스 방을 덥히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모습도 봤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따듯한 밥을 먹이겠다고 구청에서 나누어준 식권을 아이 둘이 자기들이 안 먹고 아빠가 좋아하는 걸 시켜서 그걸 도시락 통에 그대로 싸가지고, 자기들은 찌꺼기만 이렇게 먹고 아빠를 갖다 드리는 그런 그림도 봤습니다.
거기에 소개되는 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처절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였어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 자식들 만큼은 굶기거나 얼어 죽이지 않겠다, 라는 그런 아빠와 엄마의 사랑. 그리고 그러한 사랑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그 감사와 성숙한 자람, 이런 것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어요. 그것들이 그들을 웃게 하더라는 것이죠. 반면에 자기 몸 하나 살아보겠다고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그런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의 모습도 왕왕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 대한 복수심으로 망가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지기도 해요. 대견한 것은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도 열심히 살더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데 전자의 아이들과 후자의 아이들이 내놓는 열심의 질이 달라요.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하고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감사의 열심을 부리는 반면, 후자의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을 부립니다.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그냥 버리고 자기들만의 안위를 위해 살기로 작정을 하면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 어린 애들이. 그런데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그 아이들이 봅니다. 그런데 후자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식들도 초개처럼 버리는 그런 악한 부모의 그림자 안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러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그 하늘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몸을 굴려대야 하는 율법주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쪽은 사랑에 반응하는 열심이고, 다른 한 쪽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 거의 후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에너지와 자원과 능력을 발휘하여 불태워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
보세요. 둘 다 똑같은 상황이에요.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는 부모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감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가정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꽃이 핍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그 가난이 부러울 때가 있더라니 까요.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게 없었으면 저들을 저렇게 묶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세 살짜리 아이가 하루 종일 삶은 달걀 하나 밖에 먹일 수 없는 그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서 배가 고픈데 그 엄마한테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해요. 카메라 감독이 넌지시 물어봐요. 너 진짜 배 안고파? 그러니까 그 때 얘기하더라고요. 배고프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 나한테 미안할까봐 배고프다는 소리를 안 해요. 세 살짜리 여자 애가. 그걸 보면서 그 아이의 양식은 다른 게 아니라 그 엄마의 사랑이구나. 라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삶은 달걀 500개보다 더 그 아이를 배부르게 하는 건 그 엄마의 사랑이구나. 홀로 고생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 매주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교 일등의 여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 그 아이를 공부하게 하는 건 무슨 족집게 과외도 아니고, 일대일 개인 과외도 아니고 그 아버지에 대한 감사구나. 이런 거. 그런데 부모의 사랑이 빠진, 냉기만 흐르는 가난은 너무나 춥고 어둡더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냉기를 뚫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는 섬뜩한 살기까지 느껴집니다. 복수심 이런 거.
그렇게 보면 기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랑이요 신뢰라는 것이 자명해지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이들의 가정 속에서는 그것이 그들을 묶는 힘이 되고 어떤 가정에서는 살기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우리의 희로애락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표피 안으로 흐르는 사랑과 신뢰가 그것을 결정한다, 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것에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반응하는 아들들과의 그 관계를 가르치기 원하세요. 진짜 너희들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거기에서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발출된다는 걸 알려주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외부적인 현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간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라는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은 그 한 마음, 그 참 마음에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 모형인 세상 속에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볼 때 이 세상의 보편적 현실은 그 다큐멘타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하위 1%의 그 극빈자들의 생활과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하늘의 풍요를 담을 그릇이 못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현실을 눈 멀고 귀 먹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둡고 황량하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를 해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오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그러는 거 보면 그것으로 꽉찬 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심지어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요.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인간들의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아무리 번영과 성숙과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풍요가 아니라고 해요.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나 실상은 벌거벗었고 가난한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라는 하나님의 일갈을 보면 이 세상이 부요라고 풍요라고 자랑하는 그건, 사실은 그게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그 안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니까요. 너희들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진짜 행복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걸 알려주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환경이나 상황이나 외적 성취정도 등에 따라서 발생하는 그런 행복이나 기쁨이나 만족 같은 건 사실 허상이며 안개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어찌 보면 그건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호도하기 위한 미혹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가짜. 마찬가지로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절망이나 좌절이나 고통등도 사실은 진짜 절망이나 진짜 고통을 호도하기 위한 가짜 인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 진짜 안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알아, 그 사랑을 알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하늘의 행복이고 하늘의 기쁨이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나타난 현상계의 그런 상황이나 현실이 아니라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어떤 감정적인 그런 흐름, 이런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진짜 불행, 진짜 고통, 진짜 절망은 그런 가난, 그런 질병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아담들은 육적 환경과 육적 성숙, 육적 실패와 육적 성취가 주는 그런 감정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가치라는 건 세상의 세계관으로 판단되는 외적으로 나타난 성공과 실패, 번영과 퇴보 여하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 속에 내용으로 심어져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그 자기 계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거예요. 그걸로 슬퍼하고 그걸로 기뻐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관심들이 없어요.
생각해보십쇼. 어떤 이들의 가난과 고통, 그러나 그 속에서도 꿈틀대는 사랑과 희망의 그 모습이 당사자들이나 그 삶을 음으로 양으로 저처럼, 이렇게 접하게 된 누군가에게 그 진리의 일면을 교훈해주고 있다면 그 삶이 그저 그냥 가난하고 추레한 삶입니까? 그냥 그렇게 판단하면 되는 거예요? 그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가난은 죄래요.
진짜 가난은 죕니까? 일견 이해가 가요.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까지 이야기 할까? 그러나 그 가난이 진짜 죕니까? 아니, 이 세상은 그 가난을 악으로 규정해요. 그래서 그리로 빠지면 안 되는 것, 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 죄이며 악입니까? 가난은 꼭 어두운 것이어야 하나요?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라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걸까요? 아니, 이 세상의 삶은 찰나라 며요? 영원에 비교하면 찰나라면서요? 그런데 그 찰나의 삶이 비록 그 찰나동안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들려 쓰임을 받는다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거예요?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왜 나야?’ 그런 불만은 있죠?
물론 당사자들은 힘이 들겠지만 이 인생이라는 것이 영원에 비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먼지에 불과했던 어떤 존재의 삶이 하나님의 그 진리 계시의 사용되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그걸 독사라 그래요. 그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어떤 처지에서건 쓰임 받는 것. 그걸. 어떤 이들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결국을 예시하는 그런 역할로 쓰임을 받는다면 우리가 그걸 보고 아니,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 해? 누구는 저렇게 살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살게 하고 우리가 그걸 보고 그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이요? 아닙니다. 이 현상계의 모든 현상과 상황 등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심지어 죄와 악, 가난과 어둠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자체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죄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칩니까? 제발 생각 좀 해보세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며 요? 그럼 세상에 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의가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치느냐고요?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니까요.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럼 생명이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생명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선악의 열매를 먼저 주어, 율법을 주어 그것이 아닌 것이 생명이야, 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율법이라는 걸 통하여, 말씀 이라는 걸 통하여 마땅히 배워야 할 게 뭐냐 하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죄 짓지 마!’ 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 죄가 뭔지를 알아야 의를 알고 생명을 아는데 무조건 착하게 살아, 성숙해야 돼, 성화해야 돼, 라고만 가르치면 어떻게 그들이 생명과 의를 아느냐고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과 가르침은, 그것도 건전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 거기에 머물러 있다니까요.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 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거예요. 그 죄가 아니고 그 율법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압니까? 그러면 그건 나에게 가치 있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그게 나와 상관없는 죄가 되어 나는 용서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조건 착해지라 그러고 되지도 않는 거. 지나 먼저 그렇게 살아보라 그래요. 되나?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그렇다 쳐. 자기 마누라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렇다고. 또. 큰일 납니다. ㅎ ㅎ 아니, 그걸 기독교의 목적지 아니에요. 그냥 종교의 목적지라고요. 아담들의 목적이라니까요. 그거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
그것을 진리 안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낼 때 그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 한 거라니까요. 내가 그거 없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알게 됐겠는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진리에 차서를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깨닫는 이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가치 있는 선물이죠? 선지자들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꼭 성전 마당에 가서 설교한 거예요. 선지자들이 딴 데 안 가고. 왜? 이거 아니야. 언제 하나님이 이런 제사 드리라고 했니? 그들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율법에도 분명히 거기서 그 제사 드리라고 그랬는데 선지자들은 가서 ‘아니야, 하나님이 그 말 한 거 아니야, 사실 하나님의 진의는 그거 아니었단다,’ 라고 얘기 했죠?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 성전으로, 진리로, 그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옛 성전은 그게 죄라니까요. 거기서 안 나오면 죽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갖고 악이라 그래버렸어요. 그걸 찔레요, 가시라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라고 그랬어요. 내 말을 듣고 나오라고.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진리를 거기서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서. 그러니까 마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살려주는 돌, 산돌이 되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멸망시키는 돌이에요. 진짜 그걸 직역을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멸망시키는 돌이 되는 거예요. 그 예수는 곧 성경이라며 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사는 생명의 책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0장.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딴 책 아니고. 몰몬교 이런 거가 아니라 성경이에요. 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그 책들은 성경이라니까요.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66권이 돼요. 책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거 뭐 다 그 얘기네? 단어도 다 그 이야기이고, 아니 심지어 문자 하나가 다 그 복음만, 그 진리만 얘기하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책은 단수이고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서 그러한 세상 속 부유함이 진짜 부유함이 아니라는 것을 안, 그걸 통하여, 자주 장사 루디아나, 마가나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재물이 복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양 그것만으로 자기를, 그것에 자기를 의존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 재물은 악입니다. 그것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가난하고 부유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왕이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로 사세요. 제발. 누가 그런 게 가난이래요? 청빈? 무슨 놈의 청빈이요? 이왕이면 능력 되면 잘 벌어서 사세요. 그거는 신앙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진리를 배우셔야 된다고요.
마찬가지로 70년간의 그 포로생활을 통하여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이렇게 죄의 종, 세상의 종, 세상 풍속의 포로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구나, 라고 배우면 그 70년 포로생활이 복이에요. 그러나 아,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돕지 않아? 이건 도대체 뭐야? 왜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이렇게 겪어야 돼? 라고 그걸 그대로 표피적으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게 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의 눈으로 인식하는 그 Fact 속에서 진짜 내용인 진리의 Fact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죄 속에 살다가 죄 속에 죽는 게 되는 거예요. 가난과 부요, 성공과 실패, 잘 나고 못남, 그런 거에 상관없이 이 현상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가면 그게 곧 저주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살다가 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면 그게 복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행동해버리면 그 모든 것이 죄요, 악이 되는 거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어내면 모든 것이 복이요, 선물이요, 사랑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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