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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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8장 3절~4절]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계속해서 로마서 8장 서두를 한 단어 한 단어 한 어구를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도 이 4절 후반부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그 4절 뒷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율법이 의로 완전하게 되었다. 완성되었다” 이런 말이에요.
디카이오마[G1345 의] 라는 단어를 개역성경은 ‘율법의 요구’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그 번역보다는 오히려
“율법이 의(디카이오마)로 완전(플레로 G4137), 완성되었다” 로 해석하는 게 더 이해가 쉽죠.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야. 완성하러 왔다” 하셨을 때, 그 완성이에요.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하면 그게 뭐가 된다? ‘의’가 된다는 그런 말이거든요. 그 이야기를 그냥 여기다 옮겨 놓은 거예요.
오늘은 그 의미가 어떤 건지 관해서 그걸 집중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지난 추석 연휴기간 동안에 저희 온 가족이 다 모여서 함께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밥 먹고 나서 별로 할 것도 없고 그래서 얘들까지 다 데리고 가 갖고 ‘광해’라는 영화를 봤어요. 소설적 요소가 너무 많이 가미가 되어서 거의 픽션이죠 뭐. 그 사실성은 별로 없었어요. 그렇지만 굉장히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저희 처제가 옛날에 남가주 대표로 미스코리아 출전하러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남자 친구가 그 영화 주인공이었어요. 그래 갖고 열심히 봅니다. 하여튼 그 친구가 나온 영화는… 그 내용 중에 광해군의 대역을 하던 광대가 그 신하들의 명나라 파병과 그 대동법 시행에 대한 그 상소를 들은 뒤에 “어찌 사대(事大)의 일을 위해서 내 나라 백성 수만 명을 사지(死地)로 내 몰 수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 토지가 있는 지주들과 상응하는 그런 세금을 매기겠느냐?” 그렇게 광해군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내 백성은 내가 지킨다“ 아주 결연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 있어요. 제가 하여튼 거기서 딱 stuck이 되어가지고, 그 이후에는 그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 나요. 그것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말이죠. “내 백성은 내가 지킨다 말이죠.” “내가 내 백성의 아비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심지어 그 광해군 입에서 “내 백성”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제가… 왜냐하면
그 당신의 백성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지키겠다고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결연한 의지가 이렇게 오버랩 되어서 그렇게 읽혀졌기 때문에 참 감동적으로 봤어요.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 나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아, 저런 마음으로 섬겨야 되겠구나.
지금까진 안 그랬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결연한 마음을 품게 됐어요. 집사람이 나오면서 똑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목사는 저렇게 해야 되는 거야”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어찌 되었건 저에게 얼마간의 기간 동안 맡겨주신 당신의 백성들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저에게 그 기간 동안만큼은 제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섬겨야죠. “내가 지켜야지. 그 어떤 이단 사설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내가 지켜야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히브리어 22자의 자음 값을 제 나름대로 찾기 시작했어요.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몇 개월 동안 그 원어 공부에 굉장히 집중해서 매달렸었거든요. 근데 최근에 문자 고고학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히브리어 문자 그 연구와 학습과 파자(破字)라는 것이 이단들에게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신학적 배경이 없는 이들이 단순히 문자만을 배우고, 연구를 해서 그 문자의 그 어떤 자음 값 이런 것만을 갖고 구약의 모세오경을 자기 마음대로 풀어서 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풀어서 함부로 성경을 왜곡해 버리는 경우를… 제가 그 문자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너무나 많이 보게 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문자를 가르친다는 유명한 몇 군데가 있어요. 인터넷에도 다 올라와 있는데 거기를 제가 샅샅이 뒤졌는데 뭔가 부족해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요. 중세 유대 신비주의자들인 그 까발라 라는 카발라라는 사람들인데, 그 흐름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한국에…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해요. 우리가 몰랐던 것들이기 때문에… 근데 자세히 뚫고 들어가 보니까 아닌 것이 더 많은 거예요.
히브리 자음 값과 그 자음에 매겨진 숫자들을 갖고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그 게마트리아 라 그래요.
그래서 뭐… 666, 777, 333, 14, 14… 이런 거를 다 그러한 히브리어 자음 값을 대입해서 임의로 풀어서 소설을 써요. 까발라들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영향을 받아서 세대주의나 신비주의가 지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신기하니까 사람들이 그걸 다 믿는다니까요. 쫓아가요. 지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신기하니까 사람들이 그걸 다 믿는다니까요. 쫓아가요. 몇 개씩은 여러분들도 영향을 받고 있을 거예요.
아마… 그렇게 그러한 세대주의나 신비주의에 영향을 깊이 끼친 게 그 카발라라는 이단들인데, 그들은 결국 그들의 그 문자 해석법 그걸 가지고 타로, 타로 점 있죠? 타로 점. 거기까지 이르러요. 토라를 연구하다가 타로로 갔어요. 점으로 갔다니까요.
점이라는 게 뭐예요?? 이 세상에서의 그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한 것. Fortune telling 이라는 게…
그들의 성경해석에 관한 열정이 그러한 점에 이르러 점으로 결국 되어졌다, 라는 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묵시의 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게 아니라 진리에 복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게 아니라, 그들은 문자 그 훌륭한 문자 그 원어를 갖고 인간들의 길흉화복 그리고 인간들의 자기가치 주장 “내가 하나님이야!” 이런 거… 자기 가치 주장 그리고 자기 자존감 향상에 초점이 있었다, 라는 증거에요. 그것이요.
아무리 어마어마한 학식을 갖고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도 그게 인간에게 집중이 되거나 나에게로 집중이 되면 그게 바로 타로 점으로 머물러 버리는 까발라 같은 이단이 되는 거예요. 근데 오늘날 원어 연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학습 내용이 대부분 그 까발라들의 그것에서 흘러나왔어요.
그 아류에요. 보니까… 그리고 고작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까 올바른 신학이 정립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상태에서 문자나 원어를 접하게 되면 또 다른 이상한 괴물 같은 신학이 만들어지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른 고 서적들은 저만치 밀어 두고 그 연휴기간 동안에 성경 안에 있는 그 단어들로만 그것만 찾아서 성경 원어와 그 문자 값을 다시 하나하나 찾아서 제가 나름대로 정리를 했어요. 원어 성경 연구가 이단들에게 의해서 그 연구 자체가 가치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저한테는 보배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원래 주신 그 문자의 의미를 안다는 거는 이런 어마어마한 특권이란 말이에요.
근데 마귀는 항상 진짜 가치 옆에 비슷한 가짜 가치를 갖다 놓음으로 해서 진짜 가치를 소용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방법을 쓰는 아주 선수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 문자 연구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결심을 한 거예요. 그래서 죽~ 찾았죠. ‘내 백성은 내가 지킨다!’라는 심정으로…
그래서 고대 히브리어 자음 22자를 한 자 한 자 써 놓고 그 자음이 들어간 단어들을 제가 모조리 찾았어요.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요즘엔 소프트웨어가 발달돼 갖고 이렇게 컴퓨터로 톡 치면 다 나와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 알레프(א)거든요. 거기서 헬라어 알파((א)가 들어가 버려요. 그런 모양으로 성경이 이제 시작되거든요. 제가 그 알레프가 들어간 단어들을 전부 하나하나 다 나열해 봤어요. 스트롱 코드 1번, 히브리어 1번이 아브(אב)에요. 아버지부터 시작해요.
하나님의 집, 성전.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죽~ 한 자 한 자 찾아보는데… 아 정말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저는… 한 자 한 자 한 단어 한 단어에 성경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문자가 기록될 당시에 그 의미 값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집중하여 보면서 한 자 한 자의 그 자음 값을 재정립 해 봤는데, 문득 그 알레프라는 단어가 맨 앞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만 쭉 찾았더니 한 870개 이상이에요. 그리고 저한테는 히브리어 헬라어 그 신약 성경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놓은 성경이 있어요. 히브리어 신약 성경이죠. 원래는 그렇게 봐야 해요. 왜냐하면 헬라어가 여기서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아가페라든지 파테르라(pathvr)든지 이러한 단어 사랑, 아버지 이러한 단어를 헬라어만 갖고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라요. 근데 히브리어로 찾아 올라가면 은 정확히 그 뜻이 나와요. 뭔지가… 그래서 신약 성경도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굉장히 이해가 쉬어요. 근데 그것까지 다 찾아서 알레프라는 문자가 제일 먼저 들어간 단어들을 전부 찾았더니 수천 개에요.
거기다가 알레프가 중간에 그리고 맨 마지막에 들어가는 단어들은 다 찾았더니 새까맣게 종이가… 내가 그걸 하나하나 다 읽어 봤어요. 그리고서는 그 자음 값 하나를 제가 나름대로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정립해 놓은 신학이 있잖아요. 그동안에 공부 해 놓은 게 설교해 놓은 것이… 그랬더니 이건 뭐… 성경이 정말 이건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큐가 높은 학자들 만 명이 아니라 일억 명을 모아다 놓고 이렇게 쓰라고 해도 못 써요. 너무 과학적이고 너무 논리적이고 진짜 면도칼 하나 들어 갈 틈이 없어요.
단어 하나가 그 문장 전체를 설명하고 있고요. 그 문장이 그 책 전체를 설명하고 있고 그 책은 성경 전체를 하나로 설명하고 있어요.
근데 그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글자 하나하나의 생성 과정이나 변천 과정이 또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문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과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우리에게… 아니 인간들이 만들었어요. 맞아요. 자기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그걸 사용하여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담아 말씀, 율법이라는 것으로 주셨다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문자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문자라는 게 처음 쓰인 곳이 BC 3000년경에 애급이에요. 이집트. 그때가 이집트의 3왕조 때였는데,
그 때 이미 이집트의 문자는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어요. 보편적으로 그 백성들이 통용하면서 쓰인 문자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자를 몰랐던 때에요. 그때는요……
여러분, 그전에도 문자 비슷한 것들이 있었고 동시대에도 수메르어나 아카디아어가 있기는 했어요.
그러나 그건 문자라기보다는 기호, 표 정도에 불과한 쐐기 문자였어요. 이렇게, 이렇게 무슨 체크 같은 그런 글자들 보셨죠? 그게 쐐기 문자에요.
이건 곧 없어졌어요. 그리고 그림 문자만 남아서 거기에서 알파벳까지 온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성경으로 읽고 있는 히브리어를 비롯해서 그 그림 문자에서 문자가 온 거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제 계시하기 위해 아담 하와에게는 소리로 주셨죠? 소리로 주셨는데 소리는 저장이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걸 저장하여 전달할 수 없으니까 이제 그 소리를 저장하려면 소리를 그리면 되죠? 그걸 문자라 그래요.
그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 당신의 마음 당신의 뜻 그 진리를 그 언약을 저장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하나님이 문자를 줘야 되는데 그때 당시에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그 문자 그걸 갖고 있는 곳이 애급밖에 없었다고요.
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애급으로 짚어 넣으셨는지 아시겠죠? 말씀을 주기 위함이에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렇게 수시로 애급으로 들어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거예요..
그 애급을 위의 말이 아니라 위의 물이 아니라 아래의 말을 갖고 있는 세상의 모형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애급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계속 등장을 해요. 아래의 문자 아래의 말 그걸 하나님이 위의 것으로 진리로 뒤집어서 당신들 백성들 안에만 꽂아 주는 거예요. 그걸 설명해 주기 위해 애급으로 하나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근데 당시에는 왕족이나 사제들만이 문자를 배울 수 있었고 그걸 사용했어요..
그걸 갖고 자기네들끼리 편지를 쓰고 이런 건 아니고, 어디다 사용했냐 하면 신전이나 제단 있죠?
그 신전이나 제단에 돌에다가 신각 문자라 해서 하나님께 신에게 올려 드리는 신을 섬기기 위해 그 신에게 드리는 문자로 사용됐던 거예요.
그 상형문자라는 자체가… 그러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요. 써 줘도 몰라요.
그러면 그 문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기 위해선 그걸 배울 수 있는 왕족으로 궁에 들어가야겠네요.
그 문자가 있는 곳에 그래서 모세가 그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모세가 그 문자를 받는다니까요. 그 모세가 무슨 뜻이에요? 물에서 건져 낼 자에요. 건져낸 자, 물이 낸 자라는 이런 뜻도 있어요.
근데 그 당신에 모세 엄마가 그 이름을 지어준 게 아니라, 그땐 이름이 없었어요. 그런데 애급의 공주가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네요.
여러분 애급에 그 건축물 같은 걸 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애급의 목욕탕 시설이 근사하게 되어 있었던 때에요.
근데 왜 강에 나와서 목욕을 하고 있었을까요? 시원해서? 아니에요. 자식이 없는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신에게 정결 예식을 드린 거예요.
자식 달라고… 애급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게 정결 예식을 하며 깨끗이 몸을 닦고 있는데 애기가 바구니에서 동동 떠내려 오네요. 기도의 응답이죠? 그래서 날름 잡은 거예요.
그리고는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어요. 왜? 그때 당신에 애급의 18왕조 때의 모든 왕자들의 이름이 모세에요.
그리고 그가 왕이 되면 그 앞에 신의 이름을 붙여서 투투 모세, 무슨 모세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에요. 얘는… 그 공주가 붙여 준 이름이죠. 그런데 모세는 물이 낸 자죠?
그런데 모세가 나중에 애급으로 들어가서 누구와 상대를 하게 돼요? 애급의 모세.
근데 얘는 아래의 물이 낸 자 아래의 말이 낸 모세에요. 애급의 모세는…
파라오라는 자체가 태양신 ‘라아’의 아들이란 뜻이잖아요. 파라오. 아랫물, 우상의 모세, 가짜 말,
비 진리가 낸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내 준 내가 내 말을 너에게 보내 줄게라고 보냈잖아요.
그 위의 물이 낸 모세가 두 모세가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세가 이기는 거예요. 이게 역사 전체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이집트 왕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사도행전에 보면 모세가 학술과 모든 기예와 모든 걸 다 배웠다 그러죠? 왕자니까 문자를 받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기록했어요.
나중에 그 모세가 성경을 기록했단 말입니다. 그래야 돼요. 그래서 모세가 이제 그 집에 들어갑니다. 이집트 왕궁으로 들어가요.
근데 당시에 쓰였던 문자는 신각 문자, 상형 문자였고 나중에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자기네들끼리 뭔가 필요에 의해서 문자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거는 페니키아 때부터였어요. 페니키아는 가나안이에요. 페니키아 문자는 그전까지는 요 인간들이 물물교환을 했어요.
그러니까 문자는 숫자라는 게 필요 없죠? 누가 생선 하나를 갖고, 나한테 금이 있어. 내가 생선이 필요해요. 그러면 그거 나 줄래? 이거 줄게. 뭐 몸짓으로도 다 되잖아요. 다… 이렇게 바꾸면 되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게 손해인 거 같아. 그러면 숫자가 필요하고 더하기 뺄 샘이 필요하고 문자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문자들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페니키아, 그 페니키아 문자 그때 부터요.
이것도 애급의 그림 문자에서 흘러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 고대 히브리어 아람어가 다 나오는 거니까 이게 합쳐져 가지구요. 다 똑같아요.
나중에 다 보면… 그래서 히브리어 사전 찾아보면 아람어랑 다 똑같아요. 그냥.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문자를 어떻게 썼냐 하면 내가 열심히 뭔가 노력을 해서 내 유익에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데 쓴 게 문자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전에 이미 모세에게 광야에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인간들이 어떻게 이 문자를 쓰냐 하면
내가 뭘 열심히 해서 나의 유익에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그걸 ‘장사한다.’그러잖아요. 물물교환이 아니라
그 화폐무역을 위해서 교역을 위해서 만든 게 문자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쓰기 시작했다니까요. 이게 율법주의에요. 내가 뭔가 내어 놓을 테니까 당신도 거기에 상응하는 물을 줘. 이거…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는 거죠. 내 집은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왜 장사하는 집을 만들어놨냐?
거기에서 뭐 양 팔고 비둘기 팔고 그래서가 아니라… 그것은 원래 거기서 팔아야 됐던 거예요.
왜냐하면 저기 먼 데서 재물을 가져오면 얘가 오면서 털도 빠지고 점도 있고 흠도 있는 게 되니까… 그걸 뭐라 그런 게 아니라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모형으로 준 성전 안에서 너희들의 유익 거기서 진리를 알아먹으려고 애쓴 게 아니라
너희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걸 사용하니? 라는 의미였어요. 그래서 왜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어.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이 안에는 진리 말씀이 담긴 건데, 왜 너희는 이거를 장사를 해?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그 장사지 뭐예요??
신에게 내가 뭔가 섭섭지 않게 해 드리고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다 하는 게 종교 아닙니까?
심지어 기독교도 그렇게 되어 버렸잖아요. 장사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오셔서 야단치는 야단맞을 일이라는 거예요. 그거는요.
기독교가 아니라…
어찌 되었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문자에 담아서 전해주시기 위해서 그 문자를 접할 수 있는 이집트 왕궁으로 당신의 백성인 모세를 보냈어요.
그리고는 이제 그 모세를 통하여 문자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주세요. 물론 애급의 그 그림문자로 줬겠죠.
거기에서 나중에 문자의 변형을 살펴보면 고대 히브리어나 그림 문자나 비슷해요. 나중에 상(象)만 없어져요.
추상화(抽象畵)라는 게 상을 없애 놓고 내용만 어떻게 담아 놓은 거 그게 추상화잖아요. 글자도 그렇게 변해요.
상이 없어지고 그 내용만 어떻게 남는 거. 그렇게 되거든요. 하나님이 그렇게 모세에게 준단 말이에요. 그 문자로...
그리고 그게 뭔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세요.
"사실은 너희들이 이렇게 문자를 만들어서 이 뜻으로 쓰고 있지만 이거는 이렇게 써야 되는 거야. 여기에는 그런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내용이 있는 거야" 라고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게 이 세상이고 그게 율법이고 그게 성경이고 그래요. 나중에 보면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모세에게 당시의 말씀을 언약을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 주시냐 하면 당시의 이집트 사람 애급 사람들은 왕족이나 제사장은 전부 사제(司祭)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이 그 문자를 갖고 무슨 뭐 의사소통을 한 게 아니라 성전이나 제단의 돌에다가 새겨서 신을 섬기는 행위로 사용했단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똑같이 그 모양 그대로 하나님이 돌에다 써서 인간에게 주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자~ 애급, 아래 물, 너희들은 세상. 너희들은 신을 섬기겠다고 나에게 너희들이 그 문자, 법을 갖고 와서 나에게 올려 주네.
진리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피조물인 너희를 사랑으로 섬기는 거야. 그게 하나님 나라야. 그게 진리야"를, 그 안에다가 함축시켜
그림으로 보여 준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모양으로 확 뒤집어서 준 거예요..
여태까지 모세는 왕궁에서 어떤 신, 태양신, 라아신, 누군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그 신을 섬기기 위해
돌에다 항상 뭘 새기는 그런 일을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는 신에게 올려 드리고 신을 섬겼는데 시내 산에 올라갔더니 자기들을 건져 낸 그 하나님
그 신 그 진짜 신은 당신이 자기 백성을 섬기기 위해 글을 써서 그들에게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법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가는 게 아니라 그게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시의 말씀을 갖고 우리를 섬기기 위해 내려오는 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하잖아요. 섬기는 게 '말을 주다,' 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그게 디아코노스[H1249]가 "나는 너에게 생명을 주러 온 거야. 말을 주러 온 거야. 너희들이 그걸 법으로 해석해서 오해해서 나를 섬기려고 그래?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자~ 예를 들어서 알레프(א)라는 문자는요. 이집트 상형 문자인 소의 그림에서 온 문자에요. 어떻게 뒤집어 주는지 보세요. 하나님이... 인간들이 그 때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축이 소였어요. 농사할 때도 필요하고 물건을 옮길 때도 필요하고 에너지원이었어요.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었단 말이에요. 힘. 그래서 인간들이 그 소라는 글자를 맨 처음 만들어 썼어요. 이건 소야. 소. 우리를 살게 하는 거야.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이렇게... 근데 그 소가 쓸 때마다 이렇게 소를 하나씩 그려야 되니까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얼마 있다가 소머리만 그렸어요. 그 머리만 그려도 소인 줄 알아요. 뿔이 이렇게 하늘로 달려 있는 어떤 머리. 소 이렇게 썼어요. 이렇게 환유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걸로 전체를 모형 화하는 걸로 하자 이걸 환유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축약됐단 말이에요.
근데 그렇게 그 소 전체 그림이 머리라는 걸로 환유가 되고 그 머리가 나중에는 소의 그 머리의 형태를 벗어나서 그냥 이런 상태가 되었어요. 뿔, 기호. 기호화된 거죠. 이렇게 보면 은 계속 그 변천 과정을 알고 사용했던 사람들은 '소' 이렇게 알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문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은요. 그렇게 그림 문자가 상을 버리기 시작한 게 BC1400~1300년 그 어간이에요. 그때가 언제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 판을 받았던 때에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뭐라 그랬어요?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 같은 거 새기지 마라 그랬죠? 근데 문자들이 당시에 다 뭐였어요? 그것들을 새겨 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걸 그 상을 버리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문자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는 그 알레프(a)라는 문자가 이렇게 되어 버려요. 하늘로 뿔이 향해 있는 그런 모습.
그 소는 힘의 상징, 생존의 수단, 운송 에너지, 이런 거를 상징하는 거예요. 인간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생명의 원동력. 오죽하면 이집트 사람들의 그 태양신 라아의 땅 적 현현(顯現)이 '소'였어요. 그들에게 소는 그러한 의미였단 말이에요. 우리를 살게 하는 거 생명의 근원. 이런 거. 그래서 맴피스에다가 살아있는 소를 이렇게 하나 갖다 놓고 튼실한 소 그리고는 금으로 그 소를 치장을 해서 그 앞에서 제사 지냈어요. 우리에게 풍요를 달라고 그러니까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400년 넘게 애급에서 본 신이 그거였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끌고 나왔는데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아니?" 이랬더니 "그럼"요 그랬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거 한 번 만들어봐." 그랬더니 소를 만들었어요. 개역 성경엔 금송아지라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로 보면 금소에요. 그것도 살아있는 소, 그 살아있는 소에다가 귀걸이에 금을 뽑아서 그거로만 치장을 해 놓은 거예요. 그리고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렇게 불렀어요. 귀걸이로 그걸 만들었다는 건 당시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귀걸이. 귀를 뚫는다, 라는 건 "나는 당신 것입니다. 난 당신에게 순종하겠습니다. 난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다." 라는 의미였어요. 그래서 이걸 귀를 뚫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도 희년이 되어도 나가지 않는 종들은 기둥에다가 언약을 상징하는 거예요. 스타우르스.
언약의 기둥에 데려가서 그 기둥에 대고 뚫는 거예요. 너는 언약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 "내 것이다."라고 주인이 갖는 거예요.
근데 어떤 때 그 종이 거기서 주인의 것이 될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서요.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밖으로 안 나갈게요.
이걸 안 종들만 언약의 기둥에 귀를 뚫은 거거든요. 근데 이 귀걸이를 갖고 소를 치장했다는 건 뭐예요?? 나는 이 세상 모든 거 그걸 이 소로 듣겠다는 의미였어요. 그게 모든 보편적인 아담들의 신관(神觀)이에요. 내가 내 걸 내놓아 나에게 유익한 걸 얻어내는 그런 것이 신이지. 뭐 이렇게...
하나님은 그걸 부수시는 거예요.
재미있는 거는요. 당시에 이집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소의 뿔이라는 건 외부 세계로 향하는 일종의 안테나 같은 거였어요.
그래서 이 안테나를 그 외부 것을 감지하여 내게 필요한 힘을 능력을 이렇게 흡수하고 얻어내는 것 그런 의미가 뿔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의 문자는 하늘로 이렇게 뿔이 향해 있어요. 처음의 문자는... 당연하죠. 그들에게도 신학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인간들이 자기들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어떤 신의 존재를 향하여 초월적 경외를 나타난 거예요. 처음에는 요... '거기서 오는 거지. 우리의 힘의 근원은 거기지.'
이렇게(V) 창조자나 그 시의 무한성 또는 천상의 힘에서 자기의 힘을 길어 올리는 그런 유한자의 인간의 올바른 자아인식. 이것이 처음에는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변질되기 시작해요. 그 뿔이 문자의 변천사를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알파벳 소문자는 어디로 뿔이 향해 있죠? 옆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이렇게...(a) 소문자 원래 이렇게 되어 있던 게 뿔이 옆으로 가요.
알레프(א)도 뿔이 옆으로 이렇게 가 있어요.
살다 보니까 기도를 해도 개뿔이나 도와주지는 않는 것 같고 거기서 내 힘이나 생명의 근원이 오는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어디서 얻어야 돼?
이 세상과 나와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 관계 여기에서 내 에너지를 길어 올려야지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결국에는 이 문자가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A) "흙에서 온 나. 내가 신이지.
나에게서 내가 마음먹는 거에 따라 나는 잘 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하는 거야. 내 열심이지 뭐. 내 노력이지 뭐."
이리로 가는 거예요. 땅에다가... 신을 향했던 이 촉수 같은 안테나가 땅을 딛고서는 인간의 발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보세요.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이 피조물이 기고만장해서 결국에는 "내가 하나님이야!" 라고 우기게 되는
이것이 피조물의 실체이며 한계라는 거예요. 문자 하나의 변천사가 그걸 다 보여 준다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죠. 그래 너희는 그렇게 가는 거야.
"그렇게 세상을 향해 아니 너 자신을 향해 그 힘의 근원, 그 안테나를 뻗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너희지만,
너희들이 소라고 생각하는 그 힘 그건 나에게서 나오는 거야. 그 소가 나야. 내가 너희를 구원할거야." 라고 해서 첫 자로 그 단어를 주시는 거예요.
근데 성경에 보면 그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지 않고 베이트 두 번째 자 베타 B부터 나와요. 왜?
그 없음으로 밖에 감지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은 문자에 갇힐 수도 없고, 어떻게 쓸 수도 없고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요...
그분을 이거라고 하자, 라고 약속한 거지. 그분은 책에 문자에 갇힐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뭘 주냐면 성전, 세상이라는 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베이트라는 게 성전, 집, 빌딩 이런 게 다 B로 시작하죠? 그 성전을 내가 너희에게 주고 그것에 나를 담아서 설명을 해 줄게.
너희들의 수준에 맞게... 그래서 성경이 베레쉬트, 베이트부터 시작해요.
그래 놓고 창세기 1장 1절이 타우(ת 완성)로 끝난다고요. 베이트(בּ)부터 시작해서 시작부터 타우(ת) 이게 끝이거든요.
시작부터 끝이 이렇게 되는데,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완성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태초에 엘로힘(אלהים). 엘로힘은 복수에요. 근데 창조했다. 바라[בּרא H1254] 는 단수입니다. 남성 단수.
그러니까 이 엘로힘이 주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주어가 그 하나님이 창조했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그분.. 그분이 바라, 창조를 했어요. 바라가 의미가 성전으로 시작하시는 하나님. ‘세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니까 그게 창조에요. 그렇게 써 놓고 창조라 읽는다고요. 어떤 분이 창조를 했는데 무얼 하기 위해? 당신을 계시하기 위해
근데 그 문자로도 갇힐 수도 없는 그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가 못 알아먹으니까 이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수준의
그 하나님 엘로힘으로 무얼 창조했냐 하면..
‘하아레츠 브에트 핫솨마임 에트 엘로힘 바라 베레쉬트’
‘하늘과 땅을 세상을 창조하여 위의 것과 아래 것으로 창조하여 이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가 창세기 1장 1절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해요. 당신을 계시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자하나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그것들의 변형 과정이나 변천사 내용들 이런 거를 공부를 해 보면
문자하나,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성경 전체가 다 들어가 있어요.
인간이 누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가 문자 하나에도 다 들어가 있다니까요.
문자 그러니까 너무 거창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문자라는 건 곧 그게 성경이고, 성경은 곧 성전이며 이 세상 전체를 글로 옮겨 놓은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알고 세상을 통하여 성경을 알 수 있다니까요. 둘은 똑같이 다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천지만물이 전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담고 있다고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앞에서 공부했잖아요. 우리 1장에서… 로마서 1장에서…
제가 요즘 너무나 확실히 경험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진리를 알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게 다 성경으로 보인다는 거예요.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씨방이 생기고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익어… 나무가 열매가 익으면 나무가 놔 주죠.
바람에 떨어진 거 못 먹어요. 열매가 익으면 나무가 놔줘요..
그러면 그 나무가 놔준 그것이 씨가 되어 또 다른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이렇게 된다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있고 남자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그들이 잉태를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아이를 갖고 있는 어머니의 몸이 변화되고 하는
이런 모습들이 전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거예요.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가 만나서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예수라는 아들을 낳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어미의 변화를 통하여 보여준다니까요. 그러면 그게 말씀인 거예요. 아 저게 성경이구나. 나무와 꽃, 하늘과 바람, 물과 불, 바다, 산, 모든 게 다 진리를 성경을 말씀을 담고 있네요. 자~ 그래서 요한도 “모든 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거야”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모든 것이 천지 만물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비롯되고 지어졌다.
그 어떤 것도 그 말씀과 관계없이 지어진 것이 없다.” 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이야기하죠?
그런 하나님이 “태초에 빛이 있어라” 이렇게 말을 해서 뭘 창조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영이신데 뭐 말이 있고 소리가 있어요. 무슨 말로 했을까요? 그
러면 히브리어, 헬라어? 방언? 하늘의 언어라며 그게…ㅎ 그 말이 아니라
“천지만물은 전부 그 말씀을 담고 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서 그 말씀을 읽어내면 그건 그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이니까,
그건 나에게 의미 없는 것이 되네요. 더 이상 가치일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보이는 현상계에서 진리를 앎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빠져나오게 되죠? 그걸 ‘출애굽’ 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나온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를… 그러니까 진리를 아는 만큼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거기서 나온 이들을 ‘성도’라고 하고 그들을 ‘자유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비로소 죄로부터 풀려났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말씀 성경 진리를 읽어내지 못하면 그게 전부잖아요. 껍데기가… 거기에 묶이는 거죠. 그것으로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것으로 행복해하고 근데 얼마 안 가죠. 그거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실체가 아니거든요. 그거는…
거기에 묶이면 그게 땅적인 것이고 그 땅에 묶이는 걸 뭐라 그래요? 지옥이라 그래요. 그거를요.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게 지옥이에요.
그 확실한 예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주셨어요. 아니 모세에게 문자를 줬는데 문자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네. 모세가 죽을 때까지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그걸 못 알아먹었어요. 그러면 문자를 줬는데 못 알아먹으면 글을 모르면 어떻게 설명해 줘야 돼요? 얘들한테? 그려줘야 줘. 그려준 게 뭐에요? 진리를 그려준 게 성막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하나님이 "이리로 와 이거 그대로 가서 만들어줘." 보고 알아 라고... 말을 줬는데 모르니까 보고 알아라고 이거 만들어 줘. 그게 진리잖아요.
그죠? 영 단번에 드리는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그리스도
그 제사를 상징하는 번제 단부터 시작해서 차서 있게 티데미(G5087 배치, 진열하다) 하나하나 세워 주는 게 성전이잖아요.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 나중에 휘장은 찢어지고 이 법궤는 뭐고 나중에는 이 법궤, 이 법궤가 갖고 있는 내용대로 시은좌. 이것이 여기에서 펼쳐질 것이고,
그건 예수의 육체의 찢어짐으로 될 것이고, 이걸 다 설명하는 게 성전이었잖아요. 근데 못 알아먹죠?
그렇게 성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줬는데 못 알아먹을 때 그림으로 주는 게 성전이죠?
하나님이 태초에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걸 못 알아먹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준 게 뭐라고요?
천지 세상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성전이나 성경이나 이 세상이나 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게 내용으로 갖고 있는 게 진리라는 거라니까요. 그것이...
그 진리가 뭐에요? 어떻게 줬다 구요? 근데 그게 내용으로 갖고 있는 게 진리라는 거라니까요. 그것이...
그 진리가 뭐에요? 어떻게 줬다 구요?
"하나님이 우리를 섬겨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줘야
내가 존재가 되고 그때 비로소 나는 하늘 적 존재가 되어 참 안식, 행복에 들어갈 수 있어 가 진리라는 거예요."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섬겨 드리고 이 법을 갖고 하나님께 새겨서 드리면 그걸 하나님이 기뻐해서 그거에 따라 차서 있게 상을 주는 게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걸 세상과 성경과 성전과 인간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이 아래 것들이 설명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때 그걸 통하여 알아먹었으면 그건 이제 소용없어지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도 벗어나는 거예요.
성경에서도 벗어나고 법으로 기록된 성경에서도 벗어나고 예수에게서도 벗어나요. 심지어요...
그래서 호 코스모스라고 쓰고 성경이 성전이라고도 번역하고 세상이라고도 번역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거든요.
사서삼경, 주역이 64궤로 되어있는 그림이죠? 태극기에 '8' 이거 있잖아요. 건곤이감.
그게 뭐냐 하면 당시의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우리가 얘기하는 진리 아닙니다.
하여튼 모든 이들이 그들이 진리를 안 사람들을 군자라고 부르거든요. 그리고 신선이라고도 불러요.
산신령 이런 게 신선 아닙니다. 그 신선놀음이라고도 하는 거고
군자는 대로행 이다. 뭐 사군이충 이럴 때가 이게 신과 그 진리를 안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건데...
진리가 뭔지를 설명하는 경전은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 이외에는...
아무튼 그들의 수준에서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이들이 이것을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글자를 아는 이들이 없네.
오죽하면 세종대왕이 "나랏말쌈이 듕귁에 달아" 훈민정음을 창조하셨겠어요.
그때 뭐로 설명해 줘야 돼요?
그 진리를 자기가 알았다고 하는 것들... 사서삼경을... 그림으로 설명해 주는 게 주역이에요.
그래서 그거... 두 개 끊고 하나는 연결시키고, 두 개 끊고 아니면 여기 하나 여긴 두 개 여긴 하나...
이런 걸 갖고 그림으로 "이게 뭔 줄 알아? 이게 그거야. 이게 저거야." 이렇게 설명해 준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와 성전, 진리와 세상, 복음과 율법 이 관계 이게 주역과 그들이 갖고 있는 진리의 그 내용이었단 말이에요.
그것으로도 안 되면 직접 손에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해 줘요.
윷. 도게걸윷모 뒷도? 막. 던져서 경우의 수가 나오면 "봤지? 이게 이거야." 라고 설명해 주는 거예요.
자기들이 아는 진리를 설명해 주기 위해 눈으로 보게 해 준거... 그래서 그걸 알게 되면 또 거둬들이는 거예요. 다시...
그냥 그대로 박아 두는 게 아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그래요.
그렇게 하나님이 진리를 주어 성전을...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성전도 주고 성경도 주고 예수도 줬더니...
세상이 그걸 그것을 그 껍데기 그대로만 보고 섬겨버리는 거죠.
성전을 주고 진리를 알아 라고 제사 희생제사 같은 것들을 율법으로 줬더니 그걸로 예수의 영 단번의 제사로 가는 이는 하나도 없고
죽어라고 짐승만 잡아서 희생제사만 드리는 거예요.
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가 뭔지를 깨달으라고 줬더니... 그 예수의 하신 일만 그리워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렇게... 주역으로 진리를 알아 라고 줬더니 그걸로 점을 치고 있네. 이렇게 산통에 넣어 다 놓고... 그래서 이 산통 깨지면 큰일 나는 거예요.
아 예수로 진리를 가르쳐 줄라고 그걸 줬더니 '놀이'를 하고 있네. 때 되면... 그러니까 진리에 대해선 인간들이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에도 그런 말이 있는 거예요. “불경을 만나면 네가 진리를 알았다면 그 진리를 찾고 있니?
진리를 알았다면 불경을 만나면 태우고 부처를 만나면 죽여라.” 이런 말이 있어요. 뭘 알고 한 말은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불경의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 금강경하고 반야심경인데 금강경은 진리, 진리, 진리… 진리를 계속 얘기하는데, 진리가 돼야 돼. 진리를 알아야 돼. 진리가 중요해. 그러는데 진리가 뭔지 설명은 안 해주고 그냥 끝! 반야심경으로 넘어가면 뭐 진리, 진리 맨 나중에 건너가라 저기에 진리가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가 그거잖아요. 그리고 끝이에요. 어떻게 넘어가라는 거냐고…
그러니까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한 말까지가 불경이에요. 못 건너가는 거라… 근데 하여튼 그들은 자기들이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진리를 아는 자들아 너희들이 진리를 알았다면 그 불경의 진리를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그거를 통해 알았다면 그거 태워 버려. 뭐 하러 더 이상 그 종이에 쓰여 있는 먹으로 쓰여있는 그걸 뭐 하러 갖고 있어. 부처? 부처를 섬기라고 줬니? 네가 부처가 된 거잖아. 그러니까 그 부처 네가 그 부처가 됐으면 네가 만난 그 부처는 죽여. 왜? 네가 됐으면… 더 이상 네가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그 부처는 그 부처 아니잖아. 그게 부처를 죽이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현상계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문자적인 그 성경에만 갇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도덕과 윤리 이런 것들로 막 행해 보는 거예요. 잘 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성경이나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이 세상 성전 이런 것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그걸 섬기는 자가 아니라 “아!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생명으로 섬기신 거구나.” 라고 깨닫게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섬김을 받은 ‘나’로 누리며 사는 거예요. 그냥… 그걸 찬송이라 하고 예배라고 그러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도대체 내가 뭔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향하여 당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셨을까…” 이렇게요.
여러분, 십자가 예수 피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룬 것 맞아요.
십자가가 이루었고 언약을 성취했고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셨고 그 피가 우리를 덮어 우리를 구원한 게 맞아요.
그런데 “그게 내 밖에서 그것들이 그렇게 해 놨으니까 그러면 이제 상관없이 지옥 보내든 천국 보내든 말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이건 그걸 섬기는 거예요. 그게 했다니까 “나는 상관없이 그냥 살아야지”. 이거…
요즘 ‘십자가, 십자가!’ 하는 사람들이 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죠. 천만의 말씀.
그게 내 마음으로 들어와서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 때까지 가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찬송이 나와야 된다니까요.
자 이렇게 한 번 설명해 볼게요. 제가 일전에 사라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그 믿음의 선진들이 어디에 묻혔다고 설명해 드렸죠?
막벨라 굴에 묻혔다 그랬죠? 거기가 성도의 무덤입니다. 값 주고 산거에요. 일부러… 나중에는 그것이 예수님의 몸값으로 주고 산 피 밭이 되죠?
그래서 일부러 밭이라는 단어를 창세기에도 넣어 놓는 거예요. 그 피 밭은 누구의 무덤이라 해요? 나그네의 무덤.
나그네는 누구? ‘나’ 교회인 우리의 무덤인 거예요. 거기가.. 근데 막벨라 라는 단어가 ‘양 우리’ 라는 뜻이라 그랬습니다.
양 우리는 구약에서 옛 성전의 의미로 쓰여요.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내 백성을 양의 우리에서 불러내러 왔다’ 그러죠?
율법의 성전에서 불러내는 거예요.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죽어요.
그래서 내 음성을 주어 내 마음을 주어 내 말을 주어 그들을 불러낸다. 그래요.
그런데 막벨라 굴이 성전이라며 옛 성전에 들어가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죽으면 우리는 이제 살아난다. 그래요. 부활을 한다! 그런단 말이에요.
근데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를 성전이라 그러네! 또 그것도 헐려야 할 성전이래요. 세 번째 것으로 세우겠다. 그래요. 하나님이…
그러면 그 성전은 또 누구? 예수.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어야 되는 거죠? 그러면 삼단논법에 의해서…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서신서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었다 막벨라 굴 안에서 죽었다. 옛 성전 안에서 죽었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우리는 무덤을 만들어 놓고 추석 때 설날 때 계속 찾아가서 벌초도 하고 만지고 제사도 드리고 술 뿌리고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그건 율법에서 부정한 거기 때문에 절대 찾아가면 안 돼요. 만져서도 안 돼요. 무덤 쓰고 잊어 버려야 돼요.
거기는…그러면 내가 거기에 묻혀서 장사 됐다, 라는 건 다시는 내가 그리로 돌아가면 안 된다, 라는 의미가 되겠죠?
내가 율법의 성전에서 죽었으면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면 된다? 안 된다? 안 돼요.
막벨라 굴에서 죽었으면 다시 그 굴로 기어 들어가면 안 돼요. 나사로야 나와라! 하면 거기서 죽었다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러고는 그 무덤을 다시 쳐다봐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으면 다시는 그렇게
내 밖에 있는 어떤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한 그분,, 그 예수에게 돌아가면 돼요? 안 돼요? 돌아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 예수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에게 오시는 거예요.
나에게 그런 귀한 일을 해 주시는 분에게 감사하며 섬기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그렇게 섬겨 주셨다, 라는 사랑을 내 마음으로 갖고
그분을 보내신 그 하나님을 앞에 면목 없이 찬송하며 예배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란 말입니다.
그걸 모르니까 오늘날 교회는 열심만 부려요. 서로 경쟁도 해. 해외에 중앙아시아에 아프리카에 교회를 몇 개 세웠는지… 이거… 가 보세요. 대부분 비어 있어요.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진리를 제대로 전해 주어 그 사람이 거기 살게 하는 게 진짜 선교지..
여러분은 다시 그 옛 성전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도가 된 이들이 그 하나님의 섬김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의 신분을 점점 깊이 알아 가고 그걸 누리면 진짜 막 살게 됩니까?
아무 생각 없이… 십자가와 관계없이… 피와 상관없이… 어디 그런 소리가 있어요. 다 해결한 거니까 난 그냥 맘대로 살아도 돼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디 그런 소리가 있어요.
무덤이 뭔지를 알지 못하고 기독교는 섬기는 종교로 이해해서 열심만 부리고 있는 이들은
옛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열심히 희생 제사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막벨라에 다시 들어가 갖고 그 막벨라 굴, 옛 성전에서 열심히… 아. 거기는 죽어 있어야 되는 게 무덤이잖아요. 근데 거기서 열심히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살아있는 척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래요? 무덤 안에서 살아 있는 척하는 거를 좀비라 그래요. 강시.
교회가 강시화 되어 가는 거예요. 지금… 좀비 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4절에서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이걸 자꾸 ‘행하고’ 이렇게 번역을 해 놔 갖고 뭘 열심히 행하여야 되나 보다고
이렇게 되는데… ‘육신을 따라 걷다’ 이런 말이에요. ‘그 길을 가다’ 이런 말이에요.
‘육신을 따라 그 길을 가지 않고 영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이들은 율법이 의로 완성이 된 거야.’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바울이..
육신을 따라가는 이들은 뭐에요? 내놓는 게 전부 육신의 열심, 육신의 행위 밖에 없죠.
그런데 육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영은 곧 생명이요. 말이라 그랬으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갖게 되어
그 영을 따라 걷는 이들은 그 율법이 인간의 행함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율법이 의로 완성된 자들이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플레로오[G4137 확증, 완성하다, 라는 단어를 거기다 쓰는 거예요. ‘그들을 의인이라 그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4절이요.
율법과 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하여 아! 이게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한 거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 율법이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와 갖고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겁니다.
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알게 되면 이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법으로서 노모스(G3551 율법)로서의 율법은 폐해지는 거예요.
어떤 곳에서는 폐해졌다 없어졌다 그러고, 어떤 곳에서는 폐해지지 않았다라고 이야기도 하는 거란 말입니다.
말씀은 그저 소리로만 보고 표피적으로만 보고 문자적으로만 그렇게 보게 되면 은 전부 그 문자 율법에 갇히게 돼요.
그게 아래에 갇히는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땅에 갇히는 사람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짧은 글을 읽어 드릴 테니까 필기도구가 있는 분들은 한 번 받아 적어 보세요. 없는 분들은 회개하세요. ㅎㅎㅎ 필기도구도 하나 안 갖고 온단 말이에요. 진짜? 네. 농담이구요. 마음속에 그려 보세요. 쓸 수 있어요. 읽습니다.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 귀심염견왕손초 객몽빈경제자주 고국존망소식단 연파강사와
<광해군의 칠언시(七言詩)>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 (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 (연파강상와고주)
제가 조금 빨리 읽어서 그렇지. 천천히 읽으면 다 받아 적을 수 있는 거죠? 한글인데 뭐… 근데 소리는 인식이 됐어요. 이제…
근데 뜻이 뭔 줄 아세요? 모르시죠? 그럼 제가 뜻을 읽어 드릴게요.
궂은 비바람이 성 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 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 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帝子洲), 서울이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이게 광해 군이 인조반정 이후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쓴 시거든요. 자 이제 제가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아! 아까 그 소리가 이 뜻이구나! 를 알죠?
제가 지금 뜻글자인 한문을 소리로, 소리글자인 한글로 여러분에게 읽어 드렸더니 여러분이 소리로 인식은 했는데 뜻을 몰라요.
여러분이 성경이 우리 개역 성경이 그렇게 소리로 쓰였어요.
아니 개역 성경뿐만 아니라 글자로 기록된 모든 성경은 바로 그 뜻을 담고 있는 소리들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한글이 그거잖아요. 소리글자라니까요. 세종대왕이 한문은 필요 없는 거니까 한글 우리 것을 만들자 그래서 한글을 만든 게 아니라
한문이라는 걸 우리가 뜻글자로 쓰고 있는데 이걸 각기 제 소리 다른 소리들로 쓰고 있으니까 한 소리로 통일하자고
그 소리를 그려준 게 훈민정음이란 말이에요.
그걸 나중에 20세기 주시경 선생이 한글로 그렇게 정착 시킨 거지 그전까지 그냥 소리를 그려 놓은 거예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나라말이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내가 한글을 만든다’ 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때 당시에 중국의 이름이 ‘명’이었단 말이에요. 중국이란 이름은 20세기에 신해혁명 이후에 중화민국 중국이 생긴 거지 그 전까지는 명, 청, 한 이런 나라였단 말이에요. 근데 세종 조선 4대왕 때 무슨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요. 없다니까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가 뭐에요?
“나라 가운데 있는 말들이 소리들이 서로 달라 내가 그 소리들을 통일 시켜줄게. 어떤 이들은 한문을 이렇게 읽고 어떤 이들은 이걸 불러줘도 그리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네?
그러니까 소리글자 그런데 여러분이 그 소리글자로 기록된 성경만을 보고 그 소리로 이해를 하여
‘오리로 가자는 자에게 십 리를 가 주래.’ 그러면 그 소리를 그냥 인식을 해서 그렇게 행해 버리면 여러분 조금 아까 읽어 드린 거
‘풍취비우과성두’ 이게 무슨 말이지? 소리로 듣고 미루어 추측하여 엉뚱한 것을 하는 것과 똑같은 거라니까요.
뜻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의미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랬단 말이에요. “너희들은 몰라. 야 모세에게 내가 30일 가르쳐서 너희들에게 평생 가르치려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잖아.
그럼 내가 성막 성전까지도 줘야 됐었다. 근데 끝까지 못 알아들어서 율법의 모세는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죽었잖아.” 이야기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치는 자를 함께 보낼게. 내가 진리를 주며 가르치는 자를 함께 보낼게.” 그랬단 말이에요.
성경에서 제가 예를 들어 드릴게요.
이사야 18장 6절 보세요.
6. 산의 독수리들에게와 땅의 들짐승들에게 끼쳐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과하하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과동하리라 하셨음이니라
독수리들이 과하(過夏)하고 들짐승들이 과동(過冬)하는 게 뭐에요? 여름을 지나고 겨울을 지난단 뜻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뜻글자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 “과하, 과동? 이건 몰라도 되는 거야.” 그냥 넘어가게 된다니까요.
근데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과하가 여름을 지나고 과동이 겨울을 지난다는 건 알았어요.
한문을 아는 분들은 미루어 추측하니까…
그럼 들짐승이… 독수리가 여름을 지나고 들짐승이 겨울을 지나야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나중에 이건 설명해 드릴게요.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창세기 44장 2절 보세요.
2.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개동시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라
개동 시(開東時)는 뭡니까? ‘새벽에 동이 틀 때’ 이런 말이죠. 개동 시에 사람들과 나귀를 어디로 보냈다는 거예요?
개성 시로? 개동 시? ㅎㅎㅎ 여러분 소리의 그림으로서의 성경은 인식을 했어요.
그런데 그 의미와 뜻 뒤에는 더 깊은 곳에는 ‘진리’ 그것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걸 보지 못하고 맨 표피의 껍데기만으로 여러분이 그걸 노모스(법)으로 봐서
노미조 양쪽의 선악구조 속에서의 판단으로 여러분이 그냥 몸으로 행해 버리면 그걸 ‘죄’라고 그래요. 성경이요.
오늘 본문 4절에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 라는 것을 원어대로 직역을 하면 ‘율법의 의로 완성이 되었다’, 라는 말이라 그랬어요.
그 완성이라는 단어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사용된 거라고 했습니다.
아들이신 그 주님 진리의 씨를 품으신 주님이 율법을 의로 완성하시러 플레로오 율법의 의로 완성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완성은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은 성경은 여러분에게 ‘의’의 차원으로 읽혀져야 되는 거지. 여전히 구약 신약 다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그게 여러분에게 어떤 법이 되고 도덕, 윤리의 요구 사항이 되어 버리면 여러분은
그 예수를 예수의 죽음을 안 믿는 분들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이 의가 안 된 거라니까요.
그들을 의인이라 안 그래요. 의인이 아니면 뭐에요? 죄인이에요. 그게… 진짜 죽을죄인.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빈번히 대조되는 게 영과 육이죠?
영은 생명, 육은 사망이에요. 죄와 사망.
육이라는 것 자체가 죄라는 거 사망이라는 거 이걸 본질로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 육이 뭘 하던 안 하던 얘는 사망,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육이 우리에게서 만들어져서 당신에게 올려드리는 걸 절대 안 받으세요.
가치 있게 여기지를 않으세요. 우리 세상 속에서는 가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도 세상을 사는 이들이니까 그 여기서 잘 살려면 해야 돼요. 사람답게 살려면…
근데 기독교의 본질이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목적지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그 진리가 없는 진리로 해석되지 않는 표피적인 성경만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그게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것 마냥 이해를 하여
그걸 열심히 행하면 그게 자기의 라고 그래요. 심판의 근거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변화무쌍하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그 외모지상주의의 이 세상 속에서 외모지상주의라는 게 얼굴 예쁘게 만들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인 것인 양 모든 이들이 살잖아요.
그곳에서 내면 내적인 것 진리 지상주의로 바뀌어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진짜 내용이니까…
표피적인 세상의 변화나 세상의 가치라고 우기는 것들과는 무관하게
그 속에 담긴 진리로 기뻐하고 진리만을 가치 삼아 사는 게 성도인 거예요.
그러면 현상계를 자연인들과 다르게 볼 수 있어요.
꽃이 지는 게 왜 슬퍼요.
이 땅에 꽃을 도저히 피울 수 없는 무화과 같은 그런 저주받은 나무에 샤론의 꽃이 오셔서 붙어서 그 꽃이 떨어지므로 우리에게 씨가 생겼는데
안 그러면 씨가 생길 수 없어요. 무화과 때문에… 꺾꽂이로만 번식이 가능하거든요.
근데 ‘그 꽃이 떨어짐으로 내가 하나님의 씨를 가진 아들이 되었다.‘ 라는 것을 아는 읽을 수 있는 그들이
꽃을 떨어진 것을 보면 찬송을 하지. 허~ 슬퍼 이렇게 되겠냐고. 마찬가지에요.
간단한 예였지만 모든 진리 속에서 모든 이 현상계 속에서 그런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니까요.
사람들이 다 이건 슬픔이요 고통이요 합의한 거라고 해서 나도 그걸 슬픔으로 고통으로 갖지 않을 수 있단 말이에요.
잘 안 되지만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하는 거예요. 자꾸 잊어버리니까…
아니지. 아니지. 여기에 속으면 안 되지 이 현상계는 그냥 헛것이지 이렇게…
현상계라는 것 자체가 99.99999…프로 다 진공인데 이것이 아니지 원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모든 게 다 원자로 이루어졌는데 원자라는 알갱이 자체가 그 구성 물질이 뭐에요?
아! 전자하고 그 원자핵 그거 빼면 은 99.99999…프로가 허공이라니까요. 그냥… 빈 거라니까요.
근데 하나님이 어떤 법칙에 의해서 색깔도 띄고 딱딱하기도 하고 물렁하기도 하고 이런 걸 갖는 거 아니에요.
근데 그 말씀, 법칙이라는 게 빠지면 헛것이라니까요.
이게 다… 이 헛것들을 찢고 세우고 다듬고 이러면서 이왕이면 예쁘게 사세요. 근데 아니 근데 한번 생각을 해 보시란 말이에요. 뭐냐고 그게…
그렇게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 어떤 것도 말씀과 관계없이 지어진 게 없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거라면
세상을 진리로 읽어내는 사람에게 그 껍데기 그 껍데기가 가진 가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
그 이야기를 요한이 다른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요한 3서 1장 1절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여기서 사랑하는 자, 앞에 사랑하는 자는 ‘사랑이 된 자’ 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로 받은 자. 사랑하는 가이오.
가이오라는 사람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데 진리를 전해 줬더니 진리가 된 모양이에요.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걸어간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랑하는 가이오! 너는 안 될 줄 알았는데 네가 됐다네. 어떤 이가 와서 너에 대해서 얘기하는 데 네가 가진 진리가 진짜라는 걸 내가 알았다.
그것보다 기쁜 게 어디 있니. 그 씨를 전해 준 아비로서 아들이 그 길을 간다는 데 그 진리 안에서 그렇게 간다는데 그것보다 기쁜 게 더 어디 있어.
가이오야. 고맙다. 내가 참 기쁘다.” 라고 편지를 쓴 게 요한 3서에요.
근데 거기에 “네 영혼이 잘 된 것. 그렇게 잘 된 것처럼 그래 범사도 잘 되고 건강하기까지 해야 된다. 내가 원하는 거다.”이 말을 썼겠어요?
진리 얘기하는 그 사도가 응? 이게 3박지 축복이냐 구요. 이게…
여기에 영혼이 잘 됨, 범사가 잘 됨, 강건 이거 세 개 중에 헬라어 원어의 젤 앞에 나온 건 범사가 잘 됨이에요. 헬라어는 가장 중요한 걸 맨 앞에 둔다, 그랬죠? 범사가 잘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들이 다 잘 되기를 바라는 거구나. 그래 갖고 그렇게 해 갖고 이거 뭐 카드나 이런 데 잘 써 주잖아요. 그렇게 이해를 하는 데 여기서 범사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히브리어 ‘코르(H3650 모든)’를 번역한 단어인데,
코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묵시 세계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이는 것으로 이 세상에 준 모든 것들 있죠? ‘이 모든’ 이게 코르에요.
역사 하늘과 땅 이런 거 다, 호 코스모스 세상 ‘이 모든 게 잘 됐으면 좋겠다.’ 의 ‘잘 되다’ 이게 성공, 일취월장, 승승장구 이런 말이 아니라 유도[G2137]라는 게 유[G2095 좋은] 라는 부정사에 호도스[G3598 길] 길이에요. 호도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유’는 좋은, Good ‘네가 진짜 이 모든 그런 것이 너에게 그 좋은 진리로 읽혀졌으면 참 좋겠다. 내가…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게 현상계가 다 진리로 읽혀지게 되면 유 호도스 그것으로 그 참 길, 참 진리로 읽혀지게 되면 그걸 강건이라고 하는 거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읽혀지면 어떻게 돼요? 이게 푸쉬케가 ‘영혼’이라고 되어 있는데 육신이에요. 푸쉬케 기식하는 푸쉬케.
“이 푸쉬케가 역시 유도 좋은 그 진리의 길로 들어서면 그렇게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 육신 영혼이 잘 됨같이 네 푸쉬케가 (푸쉬케 자체로는 멸망입니다) 그 푸쉬케가 유도 좋은 길에 들어선 그것처럼
네 모든 범사가 그 모든 것들이 푸쉬케가 진리가 됐는데, 이 세상 모든 게 다 진리 아니니?
그 좋은 진리로 너희에게 읽혀지게 되면 좋겠어. 그게 강건이라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근데 너에게서 그게 되었다, 라고 하니… 내가 이 아비가 얼마나 기쁘겠니. 가이오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고요.
구원받은 사람은 병도 안 걸리고 범사가 다 잘 된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 경험상 알잖아요. 다들 착해가지고 “내가 믿음이 없어서…” 다 이래요. 성도의 대표적인 표지는 고난이에요. 뭘 범사가 잘 돼요? 범사가 잘 되긴…
성도는 이 모든 현상계의 것들 거기에는 예수도 성경도 교회도 목사도 설교도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통하여 진리를 읽어내면 돼요.
어떤 분이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 그러는데, 그러면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뭐 이런 식으로 질문 하셨던데… 아니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어떤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걸 말씀이라 그래요. 그럼 그 말씀이 일을 합니다.
성경이 여러분 안에서 일 안 합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일하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짐처럼… 한다니까요.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그런 성경 말씀이 일을 해요. 일 안 해요. 그거는요 진리가 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일을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만물 속에서 진리를 읽어내는 이들이 진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다 그거네. 그렇게… 그래 그거네. 어디에나 진리가 있네. 석가성불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네. 어디에나 진리가 있네. 이렇게…
그래서 하나님도 다윗을 통해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주께는 흑암과 빛이 하나야. 일반이야 그러죠? 흑암과 빛이 어떻게 일반이에요?
그런데 다윗이 알았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서 죄가 뭔지를 알고 나니까
에휴 이게 바로 아들의, 무죄한 아들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영생의 내용이었구나. 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는 다윗이 이야기하는 거에는 주께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네요.(시편 139편 12절)
그냥 하나네요. 그걸 통하여 이걸 알면 그게 바로 선이네요. 선악과를 통하여 그게 뭔지 알면 그게 생명나무 실과네요. 다윗이… 그걸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율법을 먹고 하나님의 의를 마음으로 낳는 이들인 거예요.
죄를 먹고 생명을 잉태하는 자들이 성도인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가 죄인으로 먼저 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죄를 먹고 그걸 깨달아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 죄가 그게 뭐가 나빠요. 선과 악. 이건 또 뭐에요? 선은 뭐고 악은 뭡니까?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규정해 놓은 거 말고, 성경이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선과 악이 뭐에요?
악이라는 걸 통해 선을 알게 되면 여러분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을 가르쳐 주기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우리에게 던져 준 게 선과 악이라는 선악과 열매라는 거에요.
그럼 그걸 알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라 했으니까 거기에 얼마든지 안 묶일 수 있다 구요.
물론 그걸 모르고 그 악한 지경에 계속 머무르면 그걸로 지옥 갑니다. 나쁘지 않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걸로 선을 안 이들에게 있어서 악이 뭐 그렇게 나쁘냐고…
아니 창세기에도 나오잖아요. 어둠을 파님(H6440) 나타내기 위해 빛이 나왔어요.
그는 어둠을 나타내게 빛이라는 빛의 내용이 어둠이네? 그럼 어둠과 빛은 하나네요.
그걸 알았으면 근데 그걸 모르고 어둠은 나쁜 거 빛은 좋은 거라고 이걸 노미조 해 가지고,
열심히 이걸 여러분의 육신으로 행해서 하다 보면 여러분이 그게 어둠 속에 있는 거예요. 그걸로 죽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율법은 의로 완성됐어. 어디에게서? 아들에게서.
근데 그 아들은 아들 안에는 우리도 들어가 있잖아요.
우리 안에도 율법은 의로 완성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용서고 그게 자유지 뭐에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데요.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우주를 하나님이 왜 그렇게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놨을까?
가지도 못하고 이거는… 가보지도 못할 거예요. 그죠? 뭐 몇 광년으로 하는데,
이 빛이 1초에 33만 킬로미터인가요? 뭐 하여튼 중요하지도 않지만, 아 그 속도로 달려서 1년을 가는 거리가 광년인데,
아니 가까운 행성도 뭐 수백 광년 수천 광년이래요. 얼마나 먼 거냐고. 근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이 수천억 개가 있다고
그러면은 그 은하계가 도대체 얼마나 큰 거예요?
근데 우주를 은하계를 옆에서 보면 이렇게 비행접시같이 생겼는데 지구가 요 구석에 있어요.
그걸 위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나선형으로 되어 있거든요. 이게 한 바퀴 우주년 이라고 하는데…
이걸 돌면 이게 돌아가 갖고, 늙으면 은 가운데 블랙홀로 들어가서 이게 싹 죽는 건데… 지구가 여기 끝에 이다, 라는 건
이제 이게 한 바퀴 밖에 안 돌았다는 뜻이에요.
아 근데 그렇게 크고 엄청난 이 우주, 지구가 여기 끝에 있다, 라는 건 이제 이게 한 바퀴밖에 안 돌았다는 뜻이에요.
아 근데 그렇게 크고 엄청난 이 우주. 근데 거기에서 그 수천억 개의 별 중에 저 구석에 있는 조그만 지구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Seoul이라고 했던 곳, 알지도 못하는 거기에 예배당도 없는 서머나 교회에
그것도 2부 예배 1부 예배도 아니고… 여기 온 나를 그 하나님이 구원해 줘야 돼요?
아니 그 은하계가 하나가 아니고 그게 또 수천억 개가 있는 게 우주에요. 근데 그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며 요.
하나님이 우주를 쓸데없이 왜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놨겠어요. 가보지도 못하고 로켓트 만들어 갖고 연구도 못하고 할 거를 너무 낭비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로켓트 만들어서 탐사하고 이러라고 그걸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도대체 내가 너희에 비교해서 너희의 이성과 상식 수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한 번 가늠 좀 해 보란 거예요.
적어도 그걸 만든 분은 그것보다 크신 분 아닙니까?
그런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먼지보다 못한 그 하나님이 나를 볼 때 이건 먼지도 아니죠.
야! 그런 네가 나에게 뭘 해준다고 해서 그게 나의 나 됨에 뭐가 어떤 영향이 올까?
그리고 내가 너를 왜 구원해야 되니? 네가 뭔데?
그럼 그걸 알게 됐을 때 그러네 하나님이 그 크신 하나님이 왜 나를 봐야 돼?
그리고 내가 함부로 그분에게 자해까지 하며 “소원 안 들어주면 나 40일 굶을 거야.” 협박까지 하면서 그 분께 뭘 요구한다는 그 자체가 난센스네.
그럼 난 구원 안 받는 게 맞는 거잖아.
그 큰 하나님은 나를 보지 않아도 상관없는 거잖아. 라고 알게 되면
거기에서 비로소 뭐가 일을 시작해요? ‘은혜’라는 것이 거기서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기독교의 핵심사항 은혜,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너에게 섬김을, 생명을 부어주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럼 너는 누구를 의지해야 돼? ‘나’
그럼 그걸 뭐라 그래? 사랑이라 그래.”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거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근데 이 인간들이 자꾸 자기 것을 그냥 자기들이 합의해 놓은 가치 있는 거라는 것을 갖고
그, 그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분에게 갖다 들이대면서 이걸로 상을 달라고 하네. 자꾸… 그리고,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취급해 달라고 그러네?
그게 종교 아닙니까? 그것이요. 기독교는 이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쏟아부어 하늘 적 존재
하나님과 연합시킨 하늘 적 존재로 만들어 내신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 사랑을 마음으로 가져
그 아버지 진짜 내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는 거예요.
희생제사 아무리 드려봐야 하나님이 그거 안 받는다 그랬잖아요.
아니 선지자들이 이 땅에 와 갖고 왜 죽었어요. 전부 성전에 가서 막아서고 뭐라 그랬어요?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라고 말하면서 덧붙인 말이 뭐에요?
“언제 하나님이 이런 제물, 이런 제사드리라 그랬니?” 그랬다니까요.
아니 근데 율법에 보면 은 제사드리라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선지자들은 와 갖고 그게 그 말이냐? 아니 예수님이 와서 그랬다니까요.
“희생제사 드리지 말라 그랬잖아.” 언제? “엔 아르케. 태초에…”
그래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희생제사 드리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셨다는 건데… 언제 그랬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낸 거예요. 가르치는 자들을.
“그게 그 말이 아니었어. 사실은… 이 제사를 통하여 예수라는 그분의 그 제사를 알아먹으라는 거였어.” 라고 하면서
“이 제사 드리라고 한 거 아니잖아” 라고 했더니 다 죽여 버렸다니까요.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행하고 독려하고 장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이며
집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는 거고 적어도 남자는 남편을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 여기 하나라도 있어요? 여기요?
근데 그걸 전부 그냥 소리로 읽어 가지고 그걸 부담으로 갖게 되니까 그분이 미운 거예요. 무서운 거에요. 안 되는 걸 자꾸 하라 그러니까…
애써 해 보는 걸 하나님이 기특하게 여기실 것 같으세요? 아니라니까요.
그걸 통해 너는 나를 알라는 거에요. 진리가 뭔지를 알아 ,율법을 통하여 의가 뭔지를 알아, 그걸 예수가 완성했잖아.
그거 보고 그걸 깨달으라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큰 애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 애가 전화가 왔어요. 아버님 생일이라고 축하한다고 그렇게 전화를… 기특하더라고요. 그런 거 기억 못하잖아요. 아이일 때. 그러면서 자기 엄마가 이제 미역국이랑 다 끓여놨는데 식탁에 앉아서 기도를 할 참이었는데, 자기가 기도를 하겠다. 그래서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모여 앉아서 기도를 했어요. 그 아이가 기도를 하는데 생일축하 뭐 이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으며 어떤 것에 열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고 어떤 것으로 여태 아파했으며 우리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 목사로써 아버지가 가치로 갖고 있는 게 뭔지를 기도를 하면서 다 얘기를 해 주는 거예요. 그때 제가 자기 엄마가 이제 큰 얘와 엄마는 best friend에요. 진짜 그러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엉엉 우는데 같이 막 울었어요. 왜냐하면 내 아들은 나를 알고 있구나. 이 마음 때문에요. 이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은데
내 아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구나. 그리고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구나.
그래서 내가 그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나도 여기서 허투루 살면 안 되겠지 하고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하니까…
얼마 되지도 않지만 장학금도 받았다고 그러니까 내가 그게 너무 기특해 가지고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게 아비의 기쁨이에요. 만일에 걔가 아버지 제가 지난 일 년 동안 죽도록 일해 갖고요 선물을 이런 걸 샀습니다, 라고 멋진 선물을 보냈더라면 그렇게 기쁘지 않았을 거예요. 그게 뭐에요? 얘가 일 년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 뭐 얼마나 된다고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거겠어요. 저에게 그거보다 “우리 아빠는 이런 사람이에요. 이런 걸로 아파하는 분이구요. 이런 거에 열심인 분이에요. 이럴 때 행복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우리 아빠 힘주세요.” 그러더니 마지막에 “아버님 힘내세요!” 그러고 전화를 끊는데 아 이게 아비의 마음이지.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요구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껌 팔아서 무슨 뭐 대단한 선물 같은 거 가지고 아버지 제가 이거 아버지 드리려고 사 왔어요. 그거 하나님 안 기뻐한다니까요.
그 아비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드리는 거예요.
제가 예전에 훈련소에서 자대배치를 받는데 신병들한테는 그때가 제일 두려운 순간이잖아요. ‘어디로 가나 어느 부대로 가나 전방이냐 후방이냐 내 고참은 어떤 놈들일까’ 그 불안한 마음으로… 근데 꼭 새벽에 떠나 갖고 새벽에 떨어뜨려 놔요. 더 불안하게… 근데 저희 아버님이 그 보안 사령부의 보안 대장의 짚차를 하나 각출을 해서 논산에서 저를 쫓아오기 시작했어요. 전 몰랐어요. 전… 아버지도 군 생활해 보셨으니까 아는 거예요. 그때 내 아들이 젤 힘들고 불안할 거라는 거… 그러나 내가 나타나면 혹시 이 아들이 또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냥 지프차를 타고 쫓아온 거예요. 열차를 어디서 내리나 나중에 거기에 열차에서 내려서 또 트럭 타고 한참 들어가야 되거든요. 트럭을 타고 가는데, 어떤 차가 계속 쫓아와요. 그리고 부대로 들어가는 걸 딱 보더니 그 짚차가 돌아서 갔어요. 아버님이요. 끝까지 쫓아 와서 거기다가 오이소박이, 뭐 제가 좋아하는 것 들 다 가고 오셨는데 그거 주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거예요. “아들아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들지 아는데 내가 너와 함께 가고 있다. 너는 내가 지켜. 내가 쫓아가고 있다.” 오신 거예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그 말을 들었는데, 아! 그때 트럭 뒤에서 나를 쫓아왔던 그게 우리 아버지였구나. 그거를 알 고 나니까 그 아버지가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걸 알아드리는 걸 우리 아버지가 원하는 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이렇게 힘든 거 알아 그러나 내가 왜 너희들에게 이렇게 너희들의 인식 밖에서 너희를 쫓아가는 줄 알아?
너희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너희를 놔두는 거야.
그러나 내가 이렇게 너희를 쫓아가고 있다니까
아들아 내 백성아 너희는 내가 지킨다 하고 쫓아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걸 여러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하나님 안 쫓아왔으면 내가 어떻게 될뻔했나..
세상 속에서 그거 겪으면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어 가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거 모르고 그냥 뭘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들 하니까
아버지가 그거 원하지 않는다니까요.
그 아버지의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 그게 내 마음에 들어와 나와 연합이 되면 내가 하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거 배우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뒤쫓고 계십니다.
아니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우매한 이 이성이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더 깊이, 넓게, 더 높이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자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083 율법을 먹고 의를 낳는 사람들 (완)|작성자 은혜받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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