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영, 육신, 영..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과연 그 영과 육신, 이런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육신을 그토록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모든 인간들이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역사 만들기, 자기 역사 쓰기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뭔가를 새기고 가길 원합니다. 나를 연필로 삼아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나를 새기고 싶어 해요. 이게 자기 역사 새기기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 역사 보편의 격언이 됐어요. 어느 민족, 어느 때, 어느 장소에 가도 이것은 아주 보편적 격언입니다. 가치있는 금언. 정말 이름을 남기고 가는 그 사람이 가치있는 사람일까요? 하늘에서도 그렇게 취급해 줄까요? 그런 연유에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총동원해서 ‘나 살아있음, 나 가치 있음, 나 존재하고 있음’ 이걸 증명하는 데 올인 합니다. 나 증명하기. 그런데 그 방법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고, 대단한 명예를 얻어서 나라는 존재를 이 역사에 새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훌륭한 인격을 자랑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고, 열심히 인격을 연마하고 도야하여 ‘야, 나는 이렇게 살았어. 여기까지 성숙했었단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고, 성숙한 인간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역사가 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나 가치 있음,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스스로 살겠음.’ 이리로 수렴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교육의 커리큘럼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효율적으로 살 수 있는가? 가치있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멋진 이름으로 살다가 괜찮은 이름 하나 남기고 떠날 것인가에 맞춰져 있어요. 그게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기 구원의 내용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구원하려고 삽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해요. 사는 기술, 살아남기 위한 훈련, 끝까지 자기 힘으로 한번 살아보기, 이걸 배우고 실천하다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산 자가 되어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게 너무너무 두렵기 때문에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서 그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조금 상쇄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자기가 이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스펙을 쌓아서 그 죽음 앞에서 그걸 들이밀면서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보려고 해요. 열심있는 종교생활, 도에 지나는 선행과 구제, 청빈과 청렴, 인류에 대한 공헌과 기여, 훌륭한 학식 등등. 모든 인간이 그 죽음 너머의 어떤 삶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자신들이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쌓아놓은 그 스펙들이 그 죽음 너머의 삶 속에서 자신들을 유지시켜 주고 지탱하는 데에 쓰이는 자가발전기의 배터리 충전기라도 되는 듯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훌륭한 인격, 착한 일, 멋진 종교행위.. 이런 걸 내 스펙으로 쌓아서 내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겁니다. 그걸로 그 너머의 삶을 준비해요. 자타공인의 훌륭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배터리 충전이 잘 되어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허접한 삶을 산 사람들은 방전된 배터리를 든 초라한 사람으로 여겨져요.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란 말이 거기서 나왔죠? 대연각 호텔에서 팬티만 입고 탈출한 그 여자를 예로 들면서 그런 구원도 있다고 해요. 부끄러운 구원. 정말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요. 여기서 난 자랑스런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분 있어요? 모든 인간은 ‘내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절 구원하셨어요?’ 하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요. 예수님 옆에서 벌거벗겨 죽은 강도는 천국 변두리에서 개털모자 쓰고 삽니까? 뭐 한 게 없잖아요. 평생 강도짓만 했으니.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인간의 자가발전 충전이 신앙의 내용인 양 가르치고 배워요. 그게 차등상급론입니다. 그런 건 없어요. 천국에서도 우리의 육이 행한 것, 내가 내놓은 업적과 그 열매에 의해서 나의 가치가 매겨지고 삶의 차등이 매겨진다면 거긴 곧 지옥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도, 심지어 십자가마저도 자기 스펙 쌓기의 도구로 이용을 해요. 훌륭하고 열심있는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리저리 그 십자가, 믿음을 휘둘러 대요. 거기서 충분한 자기 만족도 얻어내고, ‘너희는 그것 밖에 안 되나? 나는 이 정도했다’ 자랑해요. ‘40일 금식 3회 실시, 1년에 5회 단기선교, 집 팔아서 헌금, 교회 13개 개척...’ 이렇게 해서 자기만족도 얻고, 거기에 부응하는 하나님과 세간의 평가도 은근히 기대해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복음은,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를 이용하는 거라고.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자가발전 충전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 십자가와 예수, 복음을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소품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사야서에 나오죠? 내가 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하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도록 지어졌어요. 심지어 사찰의 스님, 달마, 석가모니까지도. 그 말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계시하는 삶을 살게 되는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 하나님 아님. 나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소품임’ 이걸 깨닫는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된 자임. 그러니까 나는 내 자존심 챙겨야 됨’ 이걸 증명하는데 모든 노력과 열심을 다 쏟아버리면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말씀, 진리가 떠나버린 죽은 흙이 생산해내는 흙의 소산 밖에 안 나타나요. 그건 그 진리, 복음, 성령과 관계없는 타종교인들, 혹은 무신론자들,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열매들입니다. 그게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선하게 보여도 그 영이 없어도, 그 진리가 없이도 해낼 수 있는 그런 건 전부 땅이 내놓는 소산입니다.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 영을 가지고 하는 것과 그 영이 없이 흉내내는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겁니다. 그건 하나님 흉내입니다. 그러한 죽은 흙들이 내놓는 것을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저주받은 흙아, 네가 내놓는 것은 전부 가시와 엉겅퀴다.” 하세요. 그러니까 진리의 영, 그 성령이 없이 인간들이 내놓는 모든 것,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내놓는 모든 것은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이스라엘, 율법주의에 묶여버린 이스라엘, 그 안에 뭐가 가득 찼다? 질려와 형극. 그게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뭔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데, 열심히 자기들의 업적, 스펙을 쌓고 있는데, 그게 다 하나님이 보기에 질려와 형극일 뿐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질려와 형극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그걸 내어놓으면서 ‘이렇게 우린 살아있어요.’ 주장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죽었다’ 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이 인생 속에서 ‘맞아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먼저 기쁘게 해드립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게 기쁨이 되셨다는 걸 알고, 그걸 알아드리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죠.’라고 자기 부정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거고, 그를 ‘살았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반드시 그들의 인생과 역사 속에서 죽여내십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날마다 살아나요. 날마다 살려고 새벽부터 공부하고, 날마다 살려고 하루를 다 써버려요. 내가 살기 위해, 내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그 죽음 앞에서 조금 덜 두려워 하기 위해 그렇게 날마다 살아서 진짜 죽어요. 그걸 네크로스의 죽음이라고 해요. 성경을 보면 ‘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의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세상에게도 쓰일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완성되면, 그걸 ‘말씀의 완성’이라고 써놓고 ‘무트, 죽음’이라고 읽어요. 그런데 그 다나토스, 무트의 죽음을 세상에게도 적용해요. 왜? 하나님의 그 말씀에 세상은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두 번째 사망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면 완성입니다. 두 번째 다나토스는 완성. 이제 더 이상 다나토스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에는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다나토스로 내려갈 때 우리가 아프니까 그게 두 번 째 사망으로 끝이 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다나토스, 진리로 완성이 되어 ‘그렇죠. 저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야 비로소 존재가 되는 피조물이죠.’라고 그 올바른 다나토스로 완성이 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에요. 무슨 말입니까? 잘 할 수 있어요. 한 번 맡겨 보세요.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그 수준까지 한 번 성장하고 성숙해 볼게요.’라고 시퍼렇게 살아서 비진리로 완성되는 이가 있어요. 그래서 진리로 완성이 되면 다나토스로 죽고, 그 다나토스가 즉시 생명으로 환원이 되지만, 비진리로 죽으면 네크로스, 완전한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문선명씨가 죽으면서 그랬다잖아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고 네크로스로 가는 겁니다. 비진리로 완성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아담들의 본성은 자기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아요. 오히려 본능적으로 남의 죽음을 통해서, 남을 죽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도록 되어 있어요. 그건 세상의 본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는 힘들죠?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와는 상대도 안되는 어려움, 고통을 당하는 어떤 이가 나타났어요. 그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고통에 내가 참여하여 그와 같이 그 아픔을 겪습니까? 아니면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고 먼저 자기를 위로합니까? 상대의 죽음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니까요. 이건 인생의 본능인 겁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명 연예인들, 재벌회장들이 막 뛰어내려 죽고, 목 매달아 죽어요. 그러면 1차적으로 드는 생각이 ‘저렇게 돈 많고 유명한데도 저렇게 죽었네. 그래도 나는 살아있잖아.’라고 남의 죽음을 가지고 먼저 나를 위로해요. 이건 인생의 본능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저주받은 아담의 본성. 절대 죽지 않으려고 해요. 자기는 말로만 ‘죽어. 죽어’ 해요. 남이 죽는 만큼 내가 살아나요. 자 그런 인간의 본능, 운명적으로 타고난 본성. 이걸 거스르며 그걸 다나토스로 죽여가는 길이 호락호락 하겠어요? 신앙생활이 그거라니까요.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해버리세요. 그래야 내 새끼 살릴 수 있거든요. 자기가 생명리하고 우기는 걸 요만큼이라도 가져오면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완전하게 그 생명을 부을 수가 없어요. 고 조금 때문에 그게 다 비워져야 돼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다 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내 것 없어요. 당신 것으로 부어주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하나님을 죽여 온 세상이 위로를 얻었죠? 온 세상이 합의하여 하나님을 죽이고 자기들이 위로를 얻었다니까요. 그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세상을 기고만장하게 살려 버렸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다 죽은 자다’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겁니다. 하나님은 그 장자 안에 우리 장자들을 넣어서 이 세상에 보내세요. 그리고는 세상에게 “뜯어 먹어라! 얘들 죽일 테니까 너희들이 이들의 죽음을 보고 위로를 얻으라. 힘 얻으라. 살 찌우라. 내가 죽이겠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항상 죽는 자로 나타나고, 그들은 항상 우리를 뜯어먹는 자로 나타나요. 시편 73편에 보면 그들은 죽을 때 때깔도 좋아요. 얼마나 먹었는지 눈알이 튀어나왔다고 그래요. 살찌우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세상의 먹이로 살게 되어 있어요. 구차하게 비리비리하게 직장도 이상한 것 갖게 되고, 가난하게 살고, 아프고...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배터리를 검사하면서 “넌 세상에서 얼마나 충전했어? 그만큼 상 준다.” 이렇게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 배터리 방전됐어? 아직 남았네. 그러면 넌 탈락.” 완전히 방전이 돼야 하늘의 에너지로 채울 수 있어요. 그게 생명이고 그게 영생입니다. 우리의 배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세상 속에서 방전이 되는 걸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기다리시지. 우리가 얼마큼 충전해서 왔느냐를 보고 상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하늘을 사는 에너지가 못됩니다. 다 땅의 것, 아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의 배터리에 이런저런 스펙을 쌓아서 충전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의 자가발전 에너지를 빼앗기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오히려. 그래서 힘이 드는 겁니다. 그래야 이 저질 배터리가 방전이 되고 하늘의 진짜 에너지로 완전하게 충전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영생이고 생명입니다. 그렇게 내가 준비한 내 에너지로 충전된 배터리로 존재하는 걸 성경이 육이라고 하고, 이게 방전되어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전되어 그걸로 존재하는 걸 영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영은 꼬마 유령 캐스퍼처럼 혼령이고, 육은 고기덩어리, 이런 게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안 나눠요. 그건 헬라의 이원론이 나누어 놓은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영과 육신이 계속 반복되어 대조가 돼요. 육신, 사륵스. 영은 프뉴마인데, 이건 성경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대조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육신, 사륵스와 몸, 소마와 프쉬케를 막 혼용해서 육, 육신, 몸, 이렇게 번역을 해놔서 우리가 헷갈려요. 그러나 헬라어는 정확하게 구분해요. 성경에서 영, 프뉴마는 관사가 없으면 ‘심령, 마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의 심령은 ‘호 프뉴마’입니다. 프뉴마에 관사가 붙으면 ‘마음, 심령’이 아니라 ‘성령, 진리, 말씀’이라고 번역해요. 그러니까 ‘에이스 호 프뉴마’는 ‘내 마음 안에서’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것에 갈급한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호 프뉴마’는 ‘그 심령,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진, 그 프뉴마를 가진 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해요. 그래서 말라기 4장 마지막절에 보면, 엘리야가 와요.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엘리야로 왔습니다. 여러분도 엘리야로 오는 겁니다. 엘리야가 와서 뭘 해요? 아버지의 마음을 받으라는 거,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리는 거. 연합시키는 것. 아버지의 마음,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진리로 전해주고, 이 진리로 아버지를 대하게 되면 ‘그게 내 마음이야.’라고 아버지가 그 마음을 받아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카르디아’ 심장인데 다 마음으로 써요. 성경에는 오장육보의 심장을 묘사하는 단어가 없어요. 다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진짜 마음을 가진 자, 마음이 있는 자라고 해요. 반면에 그 마음이 없는 자, 하나님의 그 하나, 아가페가 없는 자는 두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하고,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다고도 해요. ‘그들은 이성없는 짐승이야.’ 마음이 없으면 짐승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뭔지 몰라요.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다 마음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성경이 그러는 겁니다. ‘그거? 그건 두 마음이야. 그건 악한 마음이고, 사실은 마음이 없는 거야.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야. 그 사랑, 그 진리야. 그거 가져야 심장이 있는 거야. 살아있는 자야. 그가 카르디아를 가진 자야.’ 여러분, 짐승과 인간이 뭐 그렇게 다릅니까? 돌고래와는 아이큐 차이도 별로 안 나요. 짐승들이 굴 파고 사는 거와 사람들이 아파트 짓고 사는 게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뭐가 달라요? 제비가 하나하나 모아서 2층 3층짜리 집 짓는 것, 꿀벌이 수없이 많은 다세대주택 짓는 것과 우리 건축과 뭐가 달라요? 먹이를 날로 먹는 하이에나와 거기에 양념 조금 쳐서 쪄먹고 구워먹는 우리와 뭐가 달라요? 목적은 똑같아요. 짐승과 인간의 공통된, 유일한 목적지가 뭡니까? ‘나 왕 되기’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없으면 그를 짐승이라고 해요. 진리가 없으면 너희는 이성없는 ‘알로고스(이성없는, 말 못하는)’ 짐승이다. 하나님은 그걸 ‘산 자’라고, 살았다고 하지 않으세요.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인 프뉴마가 없으면, 진리가 없으면 그냥 죽은 겁니다. 짐승. 그 프뉴마를 마음으로 가졌을 때, 그를 ‘호 프뉴마’ ‘진리, 말씀, 영’이라고 해요. 그래서 계시록에 가면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해요. 그들이 흰옷을 입고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올라오는데, 그들의 이름이 말씀이다, 해요. 왜? 말씀의 완성으로 우리가 존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프뉴마, 그 진리, 그 마음을 못 가진 그 존재를 ‘사륵스, 육체, 육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고깃덩어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가지면 ‘호 프뉴마, 진리, 영’이라고 해요. 우리보고 진리라고 하잖아요. 예수님도 자신을 진리라고 하세요. 사륵스란 단어도 원래는 육체가 아니라 영이었어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걸 ‘영’이라고 하는데, 어떤 영이냐면 ‘진리가 되지 못한, 비진리의 악한 영’을 말해요. 악하다는 건 더럽고 추악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그릇에 담아 주세요. 레마를 담아 로고스를 주시듯. 진리를 담아, 하나님을 담아 성전을 주고, 율법을 주셨는데, 그걸 그냥 표피적으로 이해하여 가지면 그게 바로 악한 겁니다. 그걸 사륵스라고 해요.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깨달아지지 못한 것. 비진리. 그게 육체, 사륵스입니다. 몸, 소마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념입니다. 그 몸을 은혜에게 점령당하면 은혜의 몸이 되고, 죄에게 점령당하면 죄의 몸이 돼요. 그리스도에게 점령당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까 몸, 이걸 육신, 육체라고 번역을 해 놓아서 헷갈리는데, ‘소마, 몸’은 그냥 그릇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겁니다. 소마와 같은 어근의 단어가 ‘소조’ 구원입니다. 몸은 무엇에 의해 구원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소마라고 해요. 골1:18 그(그리스도)는 몸인(소마)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우리가 근본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근본입니다. 그런데 다들 자기가 근본이고,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모두 이용해 먹으려고 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크리스토스 소마’ 그리스도의 소마입니다. 이 소마는 좋은 겁니다. 몸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소마가 사륵스, 비진리로 채워지면 그 몸은 육체의 몸, 죄의 몸이 돼요. 반면에 몸이 프뉴마로 채워지면, 은혜로 채워지면 그 프뉴마에 의해 흡수가 됩니다.소마가 프뉴마에 함몰됩니다. 그러면 그 몸은 멸해지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러면 정죄의 대상이 되는 몸이 없어지려면 반드시 프뉴마가 그 몸을 채워야 됩니다. 진리가, 그 마음이 채워야 돼요. 그래서 진리가 된 몸은 하나님 앞에서 진리가 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는 거고, 그 상태를 용서라고 해요. 롬 6:5-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로 살 때, 죄에게 점령당한 죄의 몸으로 살게 돼요. 그게 육신, 사륵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이 육신, 사륵스로 오셨다고 해요. 율법으로, 비진리로 오셨으니까. 세상이 율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냥 율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 사륵스로 오셨다고 하는 겁니다. 진리를 담고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진리로 봐주지 못해요.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육체로 오셨다고 해요. 그런데 3절을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그분을 육체로 보내셨다고 해요. 그러면 율법이 연약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율법이 하려고 했던 게 뭡니까? 로마서 3장과 5장에서 배웠죠?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 때 율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성문화된 건 없었지만 하나님이 내리신 말씀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세번째 제물 준비해. 셋째 것으로 준비해.” 하니까 아브라함이 삼년된 걸 가져와서 반으로 ‘바탈’ 쫙 쪼개 버렸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카라트라는 이 선을 두고 넘어가 버리셨죠? 이건 안된다는 겁니다. 보세요. 인간은 생래적으로 에피뒤미아라는 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 나에게 뭐 가져와 봐. 내가 기뻐할 만한 제물 가져와 봐.’ 그러면 예수를 가져가야 하는데, 우리는 ‘내가 선하다, 악하다’라고 생각한 어떤 것 하나를 정한 다음에 그걸 하나님에게 쫙 쪼개서 갖다가 바친단 말입니다.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그게 희생제사고, 이스라엘의 율법지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거 안 된다고 성경 전반에 걸쳐서 말씀하세요. 그게 죄라고 하세요. 그런데 모세가 오기 전에,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야단을 안 치세요. 그게 죄인데. 죄가 있었잖아요. 로마서 5장12절에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해요. 당연하죠. 율법이 뭡니까? 우리의 그 에피뒤미아, 두 마음이 뭔지를 글로 써서 설명해준 게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너희 양심, 그 마음이 율법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 그게 왜 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써 준 게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죠?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걸 죄로 여기지 않는대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야단치지 않은 건,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한 것을 야단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겁니다. 바울이 그러죠. ‘내가 율법이 탐심이 죄라고 말 안했으면 내가 그 탐심이 죄인줄 모를 뻔 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들이 선악구조로 나누어서 ‘이건 선한 거, 이건 악한 거야’ 하면서 선한 건 하고, 악한 건 하지 말아야지‘하는 이게 하나님 앞에 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그렇게 열심히 한단 말이에요. 그게 인간의 두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게 죄야!‘ 하고 가르쳐 줘야 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걸 대표로 보여준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이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게 죄다’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성문화된 율법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주세요. 그리고는 ‘내가 아브라함에게 야단치지 않은 것, 그거 있지? 그걸 율법으로 주었잖아. 그게 사실은 죄였어.’ 하고 가르쳐 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게 나쁜 거야. 그러니까 죽여버릴 거야’가 아니라 ‘사실 나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제물을 둘로 쫙 쪼개서 그 에피뒤미아의 두 마음을 내 앞에서 내놓았을 때도 나는 그걸 나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을 차근차근 가르쳐서 결국 모리아산에 세워버렸잖아. 마찬가지야. 너희에게도 내가 이 율법으로 그 죄가 너희 마음이, 그게 뭔지를 차근차근 가르쳐서 모리아산에 세워서 너희를 다나토스로 죽일 거야.’ 이걸 알면 그 죄가 우리에게 죄가 됩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죄를 안 물었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온 뒤로는 그걸 죄라고 하면서 ‘이건 하면 안 돼!’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율법에 의해서 그렇게 우리가 죄인임을 폭로당하는데, 하나님은 죄인임을 폭로당하는 나를 나무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말씀, 율법을 주신 거란 말입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내가 죄와 무슨 상관이 있냐? 이겁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고,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해진단 말입니다. 육신은 멸해져요. 그런 방법으로 내가 진리가 되면 하나님이 그렇게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 자유, 그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주시고, 이 세상을 주시고, 성전을 주셨어요. 그랬더니 인간이 그걸 가지고 어떻게 했어요? 자기 자가발전,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었어요. 열심히 제사 지내고,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네 배터리 얼마나 충전됐어? 20%? 난 30%. 넌 40%야?’ 이렇게 경쟁하고 있었어요. 율법주의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은 그걸 하라고 준 게 아니라 네 마음, 생래적으로 가지고 나온 그거, 선악구조 속에서의 율법주의, 그게 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거 줬더니, 그걸로 인간들의 배터리를 방전시키려고 줬는데, 인간들이 그걸로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 에너지로.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어요. 뭐로? 율법으로. 이스라엘이 율법과 성전으로 못 알아먹네? 왜? 말 못하는 성전이니까. 그러면 말하는 율법, 말하는 성전, 네가 내려가서 그 역할을 다시 하라고. 그래서 본문 3절에서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아들을 육체로, 사륵스, 율법으로 보내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와서 또 뭘 해야 돼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드러내서 배터리를 방전시켜야 됩니다. 율법으로 오시는 거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들이 충전해놓은 그 스펙, 그 에너지로, 그 율법지킴으로, 그 착한 삶으로 하나님을 죽여버렸어요. 그들의 율법주의, 유대주의, 바리새인, 제사장이 예수를 죽였잖아요. 하나님을 죽인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그 율법지킴은 자가발전기 충전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살해행위였다는 게 폭로가 된 거네요.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의 일, 역할을 잘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 율법은 이런 거야, 라고 하면서 십계명의 후반부 다섯계명을 말로 설명해 주세요. 율법이 내려와서 이게 사실은 이런 거야,라고 진리로 해석까지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못 알아보고, 이 생명을 못 알아먹고 죽여버리더란 겁니다. 이게 인간 세상의 한계라는 겁니다. 절대 인간들은 못 알아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셔서, 성전으로 오셔서 그들을 완전한 죄인으로 확증을 하고 죽어버려요. 그게 너희들의 수준이야. 그게 너희의 정체야. 실체야. 너희들은 절대 생명을 포착할 수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게시해 줘야지. 너희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걸 신의 죽음이라고 해요. 왜? 신은 피조물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 신이라는 이름을 가져요. 그런데 이 신이 피조물에게 포착되기로 결정하고 내려와서 자기를 게시하면 이걸 신의 죽음이라고 하고, 그걸 십자가라는 그림으로 그려준 겁니다. 너무 신파적으로 ‘내 죄를 위해서 그분이 내려와 사람이 되어서 죽으셨대.’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건 내 밖의 십자가고, 내 밖의 예수입니다. 그래서 그게 수시로 안 믿어지는 지는 겁니다. 믿어졌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가 하는 겁니다. 그게 내 죽음이 아니면 그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요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보세요. 율법이 와서 ‘이게 죄야’ 말하지 않았으면 죄는? 로마서 5장에서 그러잖아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 어느 때는 죄로 여기지 않는데, 어느 때는 죄가 되면 이건 형평이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는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게 되면 죄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시는 겁니다. ‘내가 율법으로 왔다. 그래서 말을 했다. 말을 하는데, 율법이 지금 말로, 진리로 전하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네? 그게 사륵스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여버린 겁니다. 그게 죄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텐데, 진리가, 율법이 와서 말했잖아. 그러나 너희는 못 알아먹었지? 그게 죄야. 그러면 다 죽어야겠네요. 예! 모든 인간이 하나님 살해범으로 선고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찾아가시는 겁니다. 진리를 진리로 못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도 그저 사륵스, 육체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 육체에 죄를 정하여 죽여버린다니까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온 세상을 죄인으로 합당하게 선고해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에게 포착당하지 않아요.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그 하늘을, 묵시 세계를 포착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해요. 그러면 생명나무 실과는 거기에 있었네요. 생명나무 실과는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들 코 앞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 안댔어요.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그 생명나무 실과는 아담이 따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생명나무 실과가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그걸 먹기는커녕 인간들이 치워버렸다니까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쟁취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생명도 아닌 엉뚱한 세상의 잡것들을 가지고 ‘내가 내 생명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고,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늘날 교회란 말입니다. 진짜 생명이 왔는데도 그건 못 알아보고 그걸 치워버린 인간들이 엉뚱한 것,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세상 것들 몇 개 가지고서 이게 생명이지. 이걸로 하나님이 날 칭찬해 주시겠지, 상 주시겠지. 이러고 있는 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짜 진리인 그 생명은 내 밖에 있으면 그건 나를 구원 못 해요. 이스라엘 전체를 예수님이, 그 생명이 여행하면서 왔다 갔다 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보고 치워렸어요.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겁니다. 우리 안으로 생명이 되어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기식하는 존재, 들숨 날숨으로 존재하는 우리에게. 밖의 것이 내게 들어와서 그게 내 생명이 되면 그걸 푸쉬케라고 해요. 그걸 개역성경이 그냥 ‘육신, 육체, 목숨’이라고 막 번역을 해서 헷갈리는데, 푸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존재하죠? 존재하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들숨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죽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양식을 끊어버리면 굶어죽어요. 밖에서 들어오는 물을 끊어버리면 죽어요. 그러면 내 생명의 근원은 밖에 있네요. 이걸 푸쉬케라고 해요. 그런데 이 푸쉬케가 그 진리를 내 안에 프뉴마로,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게 ‘내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고, 그러면 밖에서 아무리 끊어도 안 죽습니다. 그걸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가? 렘31:31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새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남편은 내 밖의 존재입니다. 이 남편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그 첫남편입니다. 율법의 남편. 들어와서 자칼, 네케바가 돼야죠? 네케바 안에 자칼이란 진리가 딱 들어와서 연합이 되면 그걸 창세기가 ‘사람’이라고 해요. 남편 정도가 아닙니다.)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언약, 그 단어가 스타우로스, 기둥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를 세울건데)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이 법은 로고스, 말씀,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성경을 밖에 두면 이건 항상 내가 보고 교훈을 얻어야 될 것이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이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이렇게만 보여요. 그 말씀, 법을 밖에 두지 않고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마음에 새겨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에 새겨놓고 이젠 성경을 안 보고도 이 마음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이 말씀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건지, 수많은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의 그 율법들의 세목들, 그리고 신약의 그 많은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들, ‘이것들이 과연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인가?’를 알게, ‘아, 그 아가페, 그 사랑!’ 하나로 알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가 산 자인 겁니다. 그가 ‘마음에 그 법을 새긴 자’인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내 밖의 법에 영향을 안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법에 대해 죽은 자인 겁니다. 33절 다시 보세요.)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내 하나님이었잖아. 이제 내가 법을 마음 속에 새겨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의 자리로 내려가야 돼.’ 이러시는 겁니다. 이게 역사와 인생의 존재 목적입니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지, 너희가 왜 내 하나님이 되려고 해? 이런 겁니다. 그걸 알면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에 법을 새기고 이 땅에 내려온 몸이 있었잖아요. 말씀, 육신, 예수 그리스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육은 반드시 십자가 언약에 매달아서 삭제시켜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 성령, 진리만 남기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보세요.
돌비는 먼저 생각나는 게 뭐에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계명을 써 주신 그 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돌’이라 그러죠? 뜨인 돌, 산 돌, 모퉁이 돌, 흰 돌. 그래서 돌이 떡이 되어 우리에게 온 거에요. 먹이로… 그리고 그건 진리다 라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시잖아요. 근데 돌비에 새겨버리면 어떻게 되죠? 예수가 그냥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 되어지면 돌비에 새긴 거에요. 예수라는 몸이 그가 하신 말을 '그래? 그대로 지켜야지.' 오리 가자고 하는 이들에게 십리를 가죠. 그래 그렇게 가 줘야지… 야 왼편 뺨 때리면 오른편 뺨 대줘. 아휴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그 돌비에 새긴, 돌비가 그 돌이 한 말을 그냥 껍데기로만 보고 그리고 그 돌이 행한 그 일, 2천 년 전에 나를 위해 그 분이 죽으셨데.. 라고 내 밖의 어떤 사건으로 갖고 있을 때 성경이 나에게 돌비에 새긴 거에요. 근데 그게 뭔지를 알아 '아! 그거. 그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내 마음의 생명으로 오시는 그 예수, 그 은혜, 그 사랑, 그 능력' 하고 내 마음으로 갖게 되면 이게 심비에 새기는 거에요. 그러면 그 밖에 오리 가자고 하는 놈한테 십리 가주라는 이 법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거잖아요. 이제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거에요. 그걸 심비에 새겼다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슨 성경 지식이나 이런 거를 대단히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줄줄줄 외워서 여러분이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말씀을 떠 올려서 그래 그때는 이렇게 대처해야지 저렇게대처해야지… 이거 다 쓰레기에요. 성경은 그렇게 읽으라고 우리에게 준 게 아니라니까요. 그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단 몇 구절을 통해서라도 갖는 사람이 있어요. 그 때 그를 생명 있는 자라고 하는 거에요. 진리가 있는 자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무슨 성경신학이다 조직신학이다 해서 이렇게 풀고, 저렇게 풀고… 좋아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이해 할 수 있게 설명을 해 줘야 되죠… 근데 거기서 그냥 머무르게 되면 그 것, 그 진리, 그 사랑, 그 아가페, 그 하나로 던져주지 못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신천지나 이런 이단 같은 데 그렇게 확확 넘어 가는지 아세요? 아니 이만희가 성령이라는 그런 말이 도대체 말이 돼요? 근데 수만 명, 수십만 명이 거기에 있어요. 그것도 똑똑한 사람들이요. 뭐 추적 60분인가? 어디에 가서 그 PD가 가서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런 말 한적 없다고 그러데? 아니 나는 그 사람이 맞다 라고 얘기해 주길 바랬어요. 카메라 앞이라고 나는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주는 거라고…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이단하려면 확실히 해야지! ㅎㅎㅎ 아주 실망했어요. 근데 왜 거기 넘어 가냐 하면 이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성경 여기 저기를 비유 같은 걸 푸는 걸 보면 아주 기가 막히게 풀어줘요. 근데 기존 교회에서 그것도 감당을 못하는 거에요. 그들이 와서 추수꾼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와서… 여기 추수꾼들 있으면 잘 들으세요! 와서 그걸 들이미는데 신기한 거야 이게…그래서 가서 목사님이나 지도자들이 뭐 말씀 가르치는 얘들 물어보면 몰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더 훌륭히 보이는 거에요. 저도 만나 봤다니까요. 아주 열심히 풀어요. 그리고 아주 너무 너무 착해 사람들이요. 전도할 때만. ㅎ. 그래서 제가 듣고 그랬어요. “어~ 그래. 좋아. 좋아. 그래 그렇게 풀었는데 잘 풀었어.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그게 성경이 뭘 얘기하려고 그걸 그렇게 써 놓은 거야?”라고 하면 거기서 말을 못해요. “그래 잘 풀었어. 아주 구약 신약 넘나들면서 잘 풀었다. 근데 그게 뭐야?” 그러면 몰라요. 그러니까 신천지들이 오면 다 들어주세요. 꼼작 못한다니까요. 근데 기존 교회에서는 그걸 감당을 못하니까 무조건 이단이다 이단! 그러니까 누가 나 보고도 신천지래. ㅎㅎㅎ 기가 막혀요.
그럼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듣겠냐구요. 이심전심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다니까요. 그래… 저분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말이지 라고…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들에게만 얘기하는 거에요. 저는요… 여러분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리는 그렇게 우리를 뚫고 들어와 우리의 마음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계시하는 분이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고 칭찬을 받고… 어휴 하나님이 저런 분이었어 라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을 즐거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한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를 만든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한테 왜 자꾸 우리 수준으로 그 분을 생각하냐 구요. 그래 놓고 그거 해 드리고, 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재롱 부렸는데 기뻐하실까? 이러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은 네가 누구고, 내가 누군지 알라는 거에요. 그리고,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넌 네 자리로 내려가라는 거라니까요. 거기서 여러분이 뭘 해 오고 안 해 오는 이거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진리를 품어 안고 마음이 이끄시는 대로 착한 일도 많이 하세요. 왜 안 해요? 우리도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도 파 주고 진짜 공정무역 그걸로 조금 비싸지만, 그렇게 수입해 온 거 그런 거 사 먹자고… 이왕이면… 그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고… 왜 나빠요? 이게… 하자니까요! 그러나! 먼저 해야 할 것하고 하자는 거에요. 아니 가슴 안 아파요? 그 조그만 애기들이 세상에 발도 안 씻을 물을, 그거 그걸로 하루 종일 마시고 먹고… 에휴 그 덩치에 안 죽는 게 다행이지… 이게… 근데 그걸 보고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난 이렇게 지금 빚에 쪼들리는데도 제 통장에서 따박따박 월드비전으로 나가요. 아니 그거 하는 게 나쁘다고 그랬어요? 제가 그거 하는 거… 그걸로 내 할 일 다했다고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그러는 거지. 아!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지가 그거 아니에요? 착한 사람 되기. 그게 왜 나빠요? 하자니까요. 하는데… '생명'부터 챙기고. 생명부터 챙기고.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 여하에 관계없이 오로지 당신의 은혜로만 우리 안에 생명을 쑤셔 박으시기 위해 율법과 성전을 주신 거고, 그걸로 안 되니까 율법과 성전으로 말하는 예수를 보낸 거에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하나님의 의도였어요. “너희들은 내가 불순종에 가두어 놨어. 죄에다가 가두어 놨어. 그래 그냥 피조물이야. 그게 피조물의 한계야. 그래 세상 속에서 너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거기서 빠져 나와봐.” 가 <역사>라니까요.
근데 거기서 빠져 나왔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닌 분이 되는 거에요. 아무도 못 빠져 나와야 돼요. 하나님이 가둬 놨는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거기서 빠져 나옵니까? 죄와 불순종에 가둬 놨다며 하나님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못 빠져 나오면 어떻게 돼요? 그걸 알았을 때 “살려 주세요! 밖에서 나를 꺼내주셔야지요!” 이게 나의 죽음이잖아요.다나토스의 죽음. 그리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에요. 먼저… 그 다음에 할 것 하자는 거에요.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담고 온 성전, 옛 성전, 율법, 예수 이것이, 사륵스, 육체에 머물러 비 진리로 그냥 사람들에게 진리로 이해 되어지지가 않았어요. 그거는 모형이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진짜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모형은 반드시 부정되고, 깨어져야 돼요. 사람들은 그 모형을 진짜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AD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성전이 깨지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돌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그 모퉁이 돌이 깨진 거고, 그 안에서 율법 돌비가 깨진 거에요. 그런데 옛 성전, 예수, 율법은 모두 뭘 담고 있었던 거에요? 진리, 하나님. 그러면 그게 깨져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영으로 들어 왔다면, 성전 예수 율법이 깨진 게 곧 뭐다? <하나님의 죽음, 신의 죽음> 이게 십자가로 우리에게 설명되어 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무 신파적으로 그리고 도덕책 윤리책으로 그렇게 보시면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나에게 생명이 그 마음이 내 마음에 새겨진 거로구나. 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온 거구나” 를 알게 되면 그게 또 나의 부정이고 나의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니까 나는 구원에 이른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그게 내 것이 되지 않으면 내 밖의 것으로 존재하면 늘 헷갈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이것하고 저것하고 이것 안하고 이거 안하고 저거 안하고 한 것에 늘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내가… 고통스럽게 그게 뭐 자유에요? 그러한 우리의 성도의 목표지점은 비 진리 측면에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거에요.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용납이 안 돼요. 기독교의 목표지점이 뭐에요? “믿음을 가진 자들아 이 세상에 이 사회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자가 되자!” 이거 아닙니까? 그럼 뭐에요? 야! 복음으로 열심히 살아. 살아있는 존재로 보여줘. 이거 아닙니까? 목적지가 잘못 돼 있어요. 그럼 그걸 뭐라 그랬어요? 하마르티아, 죄! 교회는 그걸 보여 주는 게 아니에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기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영향? 어떤 영향? 그래 제가 목사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훌륭한 삶, 청빈한 삶, 청렴한 삶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아주 잘… 여러분이 절 따라서 살았어요. 근데 어느 날 보니까 아니네~ 그랬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래 제가 그렇게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영원히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고,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OK. 점점… 저를 따라 살 거니까… 그러나 제가 육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될 지 알아요? 여러분이 저에게 아주 좋은 호감을 갖고 저를 본 받아 살다가 저에게 실망했을 때, 그 영향은 여러분을 죽인다니까요. 근데 무슨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을 미쳐요! 그런 영향 미치고 사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는…나 하나 구원받고 가는 거에요. 그것 만큼 힘든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 신앙 십자가 말씀을 갖고도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 있는 지 볼래? 이걸 증명한다니까요. 히브리서 2장 14절 보세요.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이게 사륵스에요 육체에 속했다는 거에요. 예수님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자녀들 모두 다…) 죽음을 통하여(이게 다나토스에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다나토스로 죽고 다시 삶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인정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 인정 돼 버리니까… 그게 그 안에서 우리가 죽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 진리, 여기 마귀를 없이했다 그러는데 이 [디아볼로스 G1228]는 ‘악한 말, 거짓증거’ 이런 말이에요. 거짓말. 검은색 장삼 입고 갓 쓰고 나타나 갖고 입술에 피 칠하고… 그런 거가 아니라… 악한 말, 비 진리라는 거에요.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 진리가 멸해졌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그것에서 풀려난다 라는 거에요. 우리는 그렇게 죽기가 싫어서 열심히 내 몸을 동원하여 뭔가를 했어야 됐어요. 새벽 기도도 나가서 동판에 다 새겨야 되고 뭔가를 막 그렇게 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어야 됐는데 그렇게 다나토스로 예수님이 죽어 주시고 그것이 나에게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해되어지고 나니까 “에이~ 그것 그렇게 해서 구원 받고 그렇게 칭찬 받는 거 아니네.”라고 비 진리가 디아볼로스가 멸해지자 내가 인생의 종 노릇에서 풀려 나더라는 거에요. 이것이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 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이 문제에게 먹혀 버리면 완전히 거꾸로 가게 되는 거에요. 뒤집어지게 된다니까요. 근데 대다수가 그렇게 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은 먼저 진리를 들으셔야 돼요. 들으시고 그것을 마음으로 가져야 돼요. 그리고서 그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그 행함! 그거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 돼요. 그건 진심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 것으로 카운트 안 되는 그 행함이니까… 그거는… 잘 안 되죠? 정말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어요.
근데 제 마음에 딱 드는 생각이 뭉클 하더라 구요. 울컥~ 아버지, 선생님 그러면서 하니까… 자기들에게 큰 사랑과 도움을 줬대는 거죠. 그런데 다른 거 다 떠나서 제 마음에 딱 드는 생각이 그거였어요. 내가 죽어도 우리 교인들이 저렇게 벌초하러 올까? 저렇게 아… 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당신이 그런 생명의 진리를 전해 줘서 이렇게… 물론 저는 그냥 화장을 할 거에요.ㅎㅎㅎ.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떤 개혁주의 목사님이 그러더라구요. 화장을 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부활 시킬 때 못 찾는다고…ㅎㅎㅎ 아니 먼지로 존재를 만드는 분이 그걸 못 찾겠어요? 화장하세요~ 깔끔하게… 아니 인간들이 그 정도라니까요. 그 마음~ 날 그렇게 그리워해 줄까? 벌초 하러 올까? 날 스승이라 생각 할까? 이런 거… 그게 이름 남기고 싶어하는 자가 똑같이 보여요. 그게…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죽여 가세요… 그리고 거기서 발생되는 우리의 행함 같은 거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세요. 그냥 그 마음, 그 진리 마음에 가졌니? 이거 확인하는 거에요.
그랬더니 지킬게요. 내 이웃이 누굽니까? 지킬게요 그랬어요. 예수님이 나중에 뭐라 그런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누가 거반 죽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물어 보셨어요. 그건 “너는 거반 죽은 강도 만난 자이지… 그 몸으로 누구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것으로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그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이 이야기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뭐에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요. 하나는 죽도록 일하는 여자, 다른 하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예수님 앞에서 말만 들은 여자. 누가 율법사냐? 하고 물어 보시는 거에요. 하나님이 자 내가 비유로 말해 줬어. 이제 현실에서 한번 너희들이 골라 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냐? 마르다가 예수님을 먹이려고 했어요. 그 분을 섬기려고 했다니까요. 열심히 일 했어요. 근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뭘 계속 이야기 해 주고 있고, 걔랑만 이바구하고 있는 거에요. 이뻐 하는 거에요. 화가 난 거죠. “주님 너무 걔만 이뻐 하지 마시고 제가 하는 일을 보십시오! 걔도 저와 같은 일을 하라고 말해 주세요.” 그래요. 자! 오늘날 교회들이 우리에게 하는 얘기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뭘 말만 듣겠다고 저러고 있어? 이러고 있다니까요. 근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하면 “얘야, 얘가 잘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들렸니? 내가 너한테 밥 달래? 누가 너한테 나 섬겨 달래? 나에겐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어. 그런 건 나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에게서 중요한 건 내가 가져온 이 <생명>을 누가 받으려고 하느냐? 그 자가 나에게 소중한 자야.” 그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10장 41절 보세요.
누가복음 10장 41절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게 이렇게 번역해 놨는데… 이 단어가 직역을 하면 ‘그러나 너에게는 한 가지가 <결핍> 되어 있구나’ 이런 거에요. [크레이아 G5532] ‘족하니라’가 결핍이라는 단어에요.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면서 뭘 막하고 있는데, 날 섬기겠다고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설명이에요. 이게… 많은 일에 염려를 하고 있는데, 너는 그 하나가 결핍되어 있구나. 많은 일을 하느라고 그 아가페, 그 마음으로 가져야 할 그 하나를 못 갖고 있구나. 그런데 마리아는 그 하나를 가졌다. 그녀는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게 42절이에요. 여러분이 그걸 가졌냐구요? 아니면 여러 많은 것을 행하느라 그 하나의 크레이아, 결핍 그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 많은 일에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불 태워 버릴 거 그렇게 열심히 해서 살기 좋은 세상, 공평한 세상 만들어 놓으면 뭐 할거냐구요. 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하자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 그게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 하나를 가지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빠진 이 세상은 이 진리를 못 알아 먹어야 맞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실제로 사람이 들고 나는 거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듣다가 어떤 이가 나갔다. 중요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천만에요! 혹자는 그러죠. 아~ 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주 쌀쌀맞게… 전화 한 통해서 잡지. 아뇨! 어차피 이걸 못 들어내면 나랑 진리를 사이에 두고 관계를 맺은 게 아니잖아요. 영원 속에서는 그 분과 나는 아무 상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 그건 영원 속에서 아무 관계가 아니에요. 부모, 자식 마찬가지에요. 진리가 안 되면 그냥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나랑… 그래서 굉장히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차갑게 보여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게 맞아요. 진리로 나와 소통하는 그 이가 내 가족이라니까요. 그래서 들어오는 이들도 별로 안 반가워요.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ㅎㅎㅎ 끝까지 남아서 이걸로 나와 소통하는 이가 우리의 가족인 거에요. 근데 뭘 들고 나는 거에 우리가 그렇게 예민해야 됩니까? 아무 상관 없어요. 중요한 일이나 중요한 일 할아버지. 교회에서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요. 말씀 가르치고 배우는 거 이외에…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지금 계속 와서 문제지만…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의 시선에 묶여 있어요. 이 죄인들만 가득 차 있는 이세상에서의 각자의 시선들이 있는데… 이것이 모아져서 총합이 되면 시대정신이라는 세상의 눈이 돼요. 시선이 되고, 거기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고, 평가가 되어진다니까요. 사람 존재에 우리는 거기에 끌려 다니고, 그리고 신앙의 가치도 거기에 두네요. 천만의 말씀… 우리를 바라보는 제 3의 시선이 있어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그 시선은 이 땅에 가시와 엉겅퀴 보지 않아요. 내가 보낸 것, 그 하늘의 것, 너 그거 가지고 있지? 그걸 찾으세요. 쓰레기 같은 것 갖고 오지마. 내가 보낸 것, 내가 준 것, 내가 내 아들에 담아서 보낸 거 있잖아. 그거 줘. 그걸 찾는 제 3의 시선이 있다니까요. 그 시선을 의식하면 그게 내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시란 말이에요. 그거 있으면 된 거에요. 자유! 법으로부터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는 거에요. 왜? 그 죄의 몸이 멸해졌으니까 다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이 반복하여 이야기 하잖아요. 육신의 일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게도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다. 그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그걸 갖고 와서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어떻게 하겠냐구요. 그걸 내 마음 속에 진리로 가져야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현듯 일어나 갑자기 소름 돋으며 박수칠 수 있는 그 사람이 천국을 사는 거에요. 그거 가지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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