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80 <날파리 신앙> [본문 : 롬 8장 1절~8절]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3




로마서80 <날파리 신앙>





[본문 : 롬 8장 1절~8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오니까 ‘육신의 생각’을 내가 내 욕심으로 하는 그런, 구하고 바라는 어떤 것/ 그리고, ‘영의 생각’은 굉장히 어떤 거룩하고 성스러운 뭐 어떤 것을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은 내 육신을 에너지 삼아 이것을 움직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라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다 포함하는 거에요.

그건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고, 그건 법에 굴복하지 않는 거다 라고 그러죠?

분명히 이야기해주는 거에요. 그걸 법으로 삼아 법에 굴복한다고 행위를 내어 놓는데… 사실은 법이 그걸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법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곤충학자 ‘파브르’에 의하면은요. 그의 [날파리에 관한 연구]하는 논문에 이런 글이 쓰여있습니다. 

‘날파리들은요 맨 앞의 날파리들을 무조건적으로 흉내 내고, 따라간다’ 고… 그래요 무조건적으로!

근데, 그 맨 앞의 리더 날파리도 목적지가 없어요. 그냥 무조건 날라가는 거에요. 향방 없이… 그냥 목표도 방향의식도 없이 엉터리 리더의 몸짓과 날갯짓까지 흉내 내면서 열심히 쫓아가요. 열심히… 겉으로 보면 한 무리로 연합한 날파리 떼가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그냥 향방 없는 ‘허깨비 열심’ ‘가치 없는 열심’을 부리고 있을 뿐이라는 거에요. 날파리들은 그렇게 떼를 지어서 한 리더를 쫓아 목표도 방향의식도 없이 열심히 날갯짓 하다가 7일 안에 다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모든 것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정말 여러분 안에 진리를 갖지 못하고, 목표도 방향도 없이 앞에서 이끄는 어떤 이를 쫓아서 열심히 날갯짓 하면서 한 방향으로 몰려가다가는 ‘7의 때’에 모두 땅에 떨어져 다 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옛성전을 ‘새의 날개’라고 부르는 거 아시죠? 

‘호 호르니스’라고 부른다 말이에요. 그 ‘호 호르니스’는 ‘호로스’에서 나온 단어인데, ‘호로스’는 ‘산’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관사가 붙어서 ‘그 산’ 그러면, 항상 ‘성전’을 가리켜요. 예루살렘 성전. 팔레스타인 땅이 평지인데, 딱 거기만 700~800m로 이렇게 올라와 있거든요. 거기에다가 성전을 지은 거에요. 왜? 그게 기둥역할을 하는 <언약>이거든요. 기둥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약’이라는 단어란 말이에요.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는… 거기에다가 언약의 성전을 세운 거세용. 그래서 ‘그 산’ 그러면 거기에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 산’ 거기서 ‘그 성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호로스(산) G3735]‘그 산’에서→ [호 호르니스 G3733]‘새의 날개’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에서 [호 우라노스 G3772]’하늘’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그래서 이건 다 ‘성전’으로 써요. ‘성전’으로 읽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 단어를 그냥 같은 단어로 써 버려요. 하늘=새=산, 이렇게 같이 쓴다는 말이죠.


율법에 보면 성막과 성전이 완성될 때 그 겉에다가 큰 새의 날개를 그리라고 해요. 그러기도 하지만, 멀리서 보면 성전이 새의 형상으로 되어 있어요. 날라가는 형상으로… 그래서 ‘성전’ 그러면 ‘새’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새!

그들은 그 율법이라는 ‘옛성전’. 거기에 올라타서 자기들이 그리고 있는 그런 천국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게 날개거든요. 그들을 실어다 줄 ‘날개’라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그 날개, 율법의 날개 아니고, [내 날개] [진리의 날개] 독수리의 등 위에 업혀서 가야지. 너희는 율법의 날개 퍼덕이면서 절대 하나님 나라에 못 가!” 그러는 거거든요.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27절을 보세요. 거기에 새가 나오는데…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5절에 염려[메림나오ωG3309]로 시작해요. 이게 가장 중요한 거에요. 이게 ‘메림나오, 염려하지마’ 그래요. 

이 염려라는 단어는 [메리조 G3307]’나누다, 분리하다’ 라는 단어에서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염려는 뭐냐 하면, 이 육(푸쉬케)가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뭐라고 했어요? 두 마음이라 그랬죠? 

사도들이 계속해서 지적하는 두 마음, 그 ‘선’ ‘악’. 이것을 자기 스스로 안에서 판단하여, 자기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열심히 행하고, 자기가 악하다고 하는 것을 안 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두 마음이라는 그것을 [에피뚜미아]라고 그랬죠? 


그걸 ‘탐심’이라고 바울이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 푸쉬케가 가지고 있는 두 마음은 모든 것을 율법적 사고로 둘로 바라보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둘로 바라보게 되면 나의 수고와 염려가 생겨나는 거에요. 그걸 ‘메림나오’라 그래요. 그 ‘염려’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 염려의 내용이 뭐냐 하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이에요. 이건 다 뭐죠?

하늘의 양식으로 먹고, 하늘의 생수로 마시고, 의의 그리스도의 겉옷으로 입어야 하는 <구원의 이야기>에요. 

이거 다 하나님이 주는 거잖아요.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하늘의 생수로 우리에게 마시우게 하며, 그 진리의 말씀으로 입히는 것, 이거 다 <복음의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율법적 사고, 그 두 마음으로 메림나조, 염려하는 이들은 그걸 어떻게 하죠? 

율법주의자들, 메림나조한 이들은 자기들이 그걸 만들어 먹어야 하고, 만들어 마셔야 되고, 만들어 입어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띠를, 치마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진리의 띠, 자기들이 나름대로 진리의 띠를 만들어 해 입는 거고, 자기들이 먹고, 자기들이 마셔서, 자기들을 살 찌우고, 해갈을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더니 “내가 떡이야” 그리고, 초막절에는 “야! 내가 생수야” 그랬다는 거에요.

그들이 엉뚱한 것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의 염려와 수고가 된다는 거에요.그래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 내가 물 줄게. 생수 줄게. 내가 떡 줄게. 내가 하늘의 양식 줄게. 내가 그 겉옷 줄게. 너희에게 넘겨줄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란 말이죠 


그러면서 “공중의 새를 봐!” 그래요. “공중의 새를 봐!” 

‘보라’고 이야기 한 것이 엠블레포 에요. 

'옵타노마이 에이돈 블레포 호라오'

이 네 개의 ‘보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제가 여러 번 가르쳐 드렸죠? 그 블레포에요.


“자세히 분별해서 봐!” 엠블레포! 

“야! 그 공중의 새, 자세히 분별해서 봐!” 

공중의 새는 '호 페리오논 호 우라노스'거든요. 그 '호 우라노스'가 단수로 쓰이고 그 앞에 관사를 넣으면 <성전>을 이야기 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성전은 성전인데, 어떤 성전이냐 하면, 그 성전이 진짜 진의로 이해되어 졌을 때 <하늘>이라고 해요. 호 우라노스!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가진 자들을 복수로 쓰면 <하늘들>이라고 해요. 우리를 <하늘>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그 앞에 '새(호 페리오논)'가 붙어 있어요. 그 새, 그 성전의 그 새! 

성전인데, 그것을 내용으로 갖고 있는데, 그걸 ‘새’로 표현하고 있는 ‘옛 성전’, 그것을 봐! 

너희들을 늘 수고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있는 그 율법, 그 공중의 새를 봐! 라고 그러는 거에요.


이 새가 왜 ‘옛 성전’이냐면, 이 새가 누가복음에는 '까마귀'로 나와요.

그 새가 어떤 새인지 봐요. 참새 아니고, 제비 아니고, '까마귀'!



누가복음 12장 24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새라고 해요. 그리고, 정한 짐승은 뭐죠? 되새김질 하는 짐승이 정한 짐승이죠. 왜? 먹을 것이 내 안에 그 양식이, 진리가 내 안에 있어야 그 안의 것을 되새김하는 거죠. 그걸 못하면 부정한 것이라 하는 거에요. 진리가 밖에 있으면, 그건 부정한 거라니까요! 늘 법으로 지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늘 되새김질 하는 것이 정한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 까마귀가 부정한 짐승이라고 나와요. 근데, 이 까마귀 [오레브 H6158] 라는 단어는, [아라브 H6148] 라는 단어의 명사형이거든요. 이 아라브라는 단어가 뭐냐면 ‘덮다’ 라는 뜻이에요.


‘부끄러운 어떤 것을 덮다’. 그게 ‘장막을 치다. 덮다.’는 뜻이고  '성막, 성전'을 의미하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까마귀, 오레브>라는 단어가 나와요. ,

그래서, 그 개념을 그대로 가져다가 주님이 쓰고 게시는 거에요.


까마귀 봐! 저 까마귀=덮어 있는 장막=그 옛 성전, 그거 봐! 그러시는 거에요.

까마귀를 봐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가뭄을 예고하시면서, 

“이제 내가 말을 주지 않으면, 이제 너희에게 가뭄이 올 건데, 절대 하늘에서 비 안 내릴 거다!” 그래요.

비는 항상 (우리 이사야에서 찾아 봤죠?) ‘은혜의 비’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주를 말씀 하실 때는 하늘에서 말씀이 모래처럼 내린다고 하세요. 물이 없이… 


그러니까, 그 ‘가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 이라는 뜻이에요. 

물이 없이 목마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목마르다 할 때, 그 가뭄의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가뭄이 올거야” 그러면서, 그 유대 땅이 어떤 곳인지를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 주세요. 

그림으로 어떻게 보여주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날라주게 해요.

떡과 고기는 이스라엘 광야에서 먹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광야에서 그거 먹고 다 죽었다 그래요. 그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에너지 삼아 뭘 해 보겠다고 하면, 그거 먹고 다 죽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돌로 떡 만들어 먹어! 너 산 돌이라며! 모퉁이 돌이라며! 뜨인 돌이라며! 네가 떡으로 왔다며!” 

그렇게 해 놓고, 거기서 끝! 떡 만들어 먹고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배고픔 해결하라고 일 하라는 거 아니에요? 그거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지, 말씀! 그거 먹어야 살지. 떡 먹으면 죽지. 그러니까 떡만 먹으면…” 이런 것이 거든요.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갖다 주어서 먹게 해요. 까마귀가 뭐라 그랬어요? ‘덮다, 장막’ 까마귀가 주는 먹이는 떡과 고기에 불과한데,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구요. 그거 먹으면 가뭄의 땅에서 기근에 죽는거에요. 

그래서, 그릿 시내에서 그걸 먹으라 그러고, 그릿 시내의 물을 마시라 그래요. 근데, 그릿 시내에서 ‘그릿’이 [카라트 H3772] 라는 단어인데, 제가 여러 번 설명해 드렸잖아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세 번째 제물 그거 준비해” 그러셨거든요. 

세 번째 재물이 뭐냐 하면, 

첫 번째 제물이 율법주의 하에서의 그 제물, 성전에서 드렸던 제물, 

두 번째가 ‘예수’라는 제물, 

세번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나’! 이게 하나님께 그냥 드려지는 ‘나’거든요. 그것을 세 번재 성전이라고 그러잖아요. 그죠? 


옛 성전이 그 첫 번째 성전이고, 말하는 성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그리스도가 내게 들어와서 내 안의 성령으로 계실 때, 바울이 “너희들이 성전이잖아” 그러잖아요. 그게 세 번째이거든요.

근데, 당연히 아브라함이 못 알아먹죠. 아직 진리가 안 됐으니까… 

그러니까, 제물을 3년 된 것들 것 갖다가 놓고, 쫙 쪼개어 버렸어요.


그게 인간들의 마음이에요. ‘에피뚜미아’ 라는 두 마음. 

선, 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갈라 놓는 그 열심. 

그걸 [바탈 H1334] 이라고 그랬죠? ‘쪼개다’ 


그가 쪼개어 놨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건너가 버리시네. 같이 있다가… 

그게 뭐에요? 제물로, 그 제물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내가 이제 둘로 분리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네가 나에게 그 제물을 갖고 온다면, 나는 너와 같은 쪽에 서 있을 수가 없어. 네가 이제 나에게 넘어와야 하는데, <내 언약>으로 넘어오는 거지.” 그래서, 하나님이 홀로 넘어가시는 거에요.

“언약으로 넘어오는 거지. 네가 그렇게 쪼개고, 네 열심, 네가 준비한 재물에 의해 너는 나와 하나 될 수 없어.” 


그리고, 쫙 갈랐을 때,그걸 [카라트 H3772] 라고 했죠? 그래서 그 분리, 거기서 [캐리투트 H3748] 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고, 그것을 모세의 ‘이혼증서’라 할 때, 거기서 쓰는 단어에요. ‘이혼증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혼을 이야기 하는 거지, 단순히 뭐 살다가 이혼하고 그런 거 하지마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카라트]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이 그릿 시내, 그걸 또 요단 앞이라 그래요. 

‘요단’의 역할을 하는 그게 지금 가나안 땅과 광야가 갈리는 거에요. 근데, 어디가 광야가 되냐 하면, 말이 없는, 말씀이 없는 곳 '유대'가 말이 없는 곳, 광야가 되어버려요. 음식도 떨어지고, 물도 없는 곳, 고작해야 까마귀가 내어 놓는 떡과 고기만 먹는 곳이 그런 곳이 '이스라엘'이라 그래요. [카라트], 그릿을 건너가 버리네. 


그랬더니 거기에 그 가뭄 중에 어떤 과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과부’는 뭐에요? 

‘자칼’이라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기에 이 땅의 남편들을 모두 차압 당하고 빼앗기고, 혼자 과부로 기다리는 거에요. 

뭐를? 그 ‘도움’을 기다리는 거죠. 


그 집에 그 여자가 어떤 상태로 있었냐 하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아니 이제 죽습니다. 이 밀가루 이거 한 주먹만 먹으면, 나는 죽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난 죽은 자입니다.” 라고 자인식을 하고 있는 그 여자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라고 하는 그 여자에게 엘리야가 가서 그 집을 풍년으로 만들어 준거에요. 풍년! 거기에만 진짜 음식, 진짜 기름, 말씀이 이것이 끊이지 않아요. 열왕기상 17장을 보세요.



열왕기상 17장1-7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보세요. 이건 시내가 마르는 일이라니까요. 그리고, 건너가요. 그리고, 건너가서, 어떤 집을 만나는지 보세요. 



열왕기상 17장 16절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뭐죠? 이것이 '영생'이에요. ‘끊어지지 않는 양식’ 영생, 그거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게 까마귀, 옛성전, 율법 이야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주님이 뭐라 그래요? “공중의 새를 보라” 그거 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구절도 인용하면서 “야~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떡과 고기 갖다 줬댄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하나님이 까마귀를 시켜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실 거야.” 그런 말 하지 마라는 거에요.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그 하늘의 새를 [엠블레포]! 자세히 분별해서 봐! 그게 뭘 이야기하는 건지… “내가 거기에서 너희들에게 그런 제사, 그런 열심, 그런 도륙, 그런 도살, 열심히 하라는 거야? 엠블레포! 자세히 분별해서 봐!” 그러시는 거에요. 그렇게 해 놓고는, 그렇게 자세히 분별해서 본 사람들은 ‘그 새가 공중의 새가 심지도 거두지도 아니 하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심지도 못하고, 추수도 못하고, 창고에 양식을 쌓지도 못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요. ‘걔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안하고, 그냥 게으른데, 하나님이 그냥 거저 먹이신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율법, 그 새는 오직 주님만이 씨 심는 죽음을 죽으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율법, 옛 성전, 그 새는 절대로 씨를 심을 수가 없어.율법은… 그러니까 당연히 추수도 할 수도 없고, 추수가 안 된다는 것은 아무리 그 율법적 신앙을 가져 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곡이 못 된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 성전에 진짜 양식을 쌓을 수가 없지. 그 얘기 하는 거에요.


근데, 어떻게 한다 그래요? 하나님이 먹이신다 ‘기르시나니’ 그 단어가 [트레포 G5142] ‘실컷 먹이다, 은혜를 베풀다, 자비를 베풀다.’이런 뜻이에요. “은혜지, 은혜! 그렇게 너희들이 메림나오, 율법적 열심으로 수고하고 애써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준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거 안 기뻐하시지. 그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거라니까! 하나님이 절대 안 기뻐한다” 그래요. 


그래서 바울이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새를 봐! 아니 그게 뭘 심니, 심지도 못하는데 거기서 뭘 걷어! 하나님이 [트레포] 하나님이 자비로 먹여야지. 그게 뭔지를 진리로 하나님이 먹여주면, 그 때 너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거야.” 그 얘기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니?” 그러죠? 이것도 그 맥락으로 이해를 해야 하죠? “너희가 그 염려로, 메림나오, 그 두 마음이 내어놓는 그러한 수고와 근심의 그염려, 그 염려를 해서 그 수고를 해서 너희들의 키를 한 자나 늘릴 수 있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 ‘키’라는 단어가 ‘성숙’이라는 뜻이에요. [헬리키아 G2244], 성숙! 

‘한 자’는 그 규빗(페퀴스), 규빗이라고 번역된 ‘페퀴스’는 히브리어 ‘아마’, ‘아라’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그대로 옮긴 건데, ‘아마’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알레프(하나님)와 멤(물,말씀,진리)이니까… 하나님 말씀, 그걸 그냥 규빗이라 했는데, 그냥 그걸 ‘한 자’… 그게 뭐 나폴레옹이에요? 염려해서 한 자나 키울수 있냐고 이런 걸 하나님이 물어보시게? 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빗 뒤에 ‘에이스’ 하나가 붙어있거든요. “그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 그게 완성인데, 그건 진리인데, 너희들이 염려하는 그 수고로 어떻게 성숙을 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가능해?”


우리는 그 성숙을 ‘성화’라고 한다니까요. 근데, 그게 진짜… 그게 성숙이에요? 

“에휴, 우리 남편 나이 들어가면서 뭐 착해지고, 고집도 없어지고…

” 늙어서 그래요. 힘 빠져서… 그리고, 점점 아는 거야. 내가 점점 힘 빠지고, 돈도 없고 그러면 저 여자가 어떻게 취급할까… 깨달아 가는거지… 그게 무슨 성숙이며, 그게 어떻게 성화란 말이에요! 그건 딴 종교인들도 다 하는 거 아니에요? 성화라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에만… 그럼 그 성화가 뭐겠냐구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 되는 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아무리 율법이라는 성전 올라타고, 율법의 날개 퍼덕이면서 아무리 날라 봐야 너희들은 향방 없는 리더따라 움직이다가 7일만에, 7의 때에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그저 ‘날파리 인생’일 뿐이다! 그러니까, 정신차려! 공중에 새를 좀 봐!” 그러시는 거에요. 그게 날라가는 새니? 내가 업어 날으고 있잖아. 내가… 


[블레포] 라는 단어가 그걸 다 설명한다니까요! 내가 자비로 먹이잖아. 그러니까 엠블레포! 잘 분별해. 잘 구별해. 그러는 거에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목적지 확인을 먼저 해야 되는 거에요. 그 목적지가 뭡니까? 피조물의 목적지,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 흉내 내겠다고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살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의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거저 부여 받아 그 분에 의해 움직여지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지여야 돼요. 그리로 날아가신다는 거에요. 우리를 등에 업고, 독수리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실어 날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육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의 그 자리…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에요.이 역사 속에서의… 



고린도전서 9장 26절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달음질하는데, 향방 없이 아무데나 달리면, 달린 만큼 제자리로 돌아와야 해요. 바울이 그 향방을 알았다는 거에요. 바울의 향방이 어디에요? 어디로 이 사람이 달려갔죠?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에 실어서 어디로 데리고 날아 가신 거죠? 어느 방향으로… <날마다 죽노라>의 향방으로 끌고 갔다는 거에요. <날마다 죽노라>, 다나토스. 매일 매일 육의 죽음의 아래에 있게 만들었다는 거에요. 그 목적지… 다나토스의 죽음의 자리. 그 자리가 우리의 목적지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본문 5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러니까 우리는 영을 좇는 자니까 영의 일을 생각해야지. 기도 많이 해야지, 봉사 많이 해야지, 교회 헌금 많이 해야지, 뭐 이런 얘기하는 건가요? 영의 생각을 한다는 게 뭐에요? 영의 생각을 한다는 게 뭐에요? 그 밑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 네 육신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죽는 거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러니까, 영의 생각, 영적인 것을 생각하고 할려고 애를 써야 돼… 이런 말을 하는 거 겠습니까? 그럼 영적인 생각은 뭐고, 영의 일은 도대체 뭐냐고요? 


육신을 좇아서… 열심히 율법의 날개짓으로 퍼덕이는 자는 그건 육신의 일 일뿐이라는 거에요. 너희들이 아무리 그 육을 갖고 열심을 부려서 그 메림나오, 그 염려와 수고로 해내는 모든 일이… 너희는 이거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하고 내놓지만, 그건 그냥 육의 일이야! 5절이에요. 


그리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이 여기서 [프뉴마 G4151]에요. 진리입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뭘 한다 그래요? 진리의, 그 프뉴마의 일을 생각한다는 그게 ‘경향’이에요. 방향성, 

[프흐로네마 G5427(포부,생각,열망)]. 진리를 좇는 자는 그 진리의 방향성 아래에 끌려가게 되는 거에요. 어떤 방향성이 있다라는 거에요? 진리가 어디로 끌고 가겠어요? 진리가… 다나토스로 끌고 간다니까요. 우리를… 


근데, 보세요. 우리는 육이 죽는 날까지 그 육의 생각, 그것도 육의 방향성이에요. 그 육의 방향성… 그 육의 방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그 육의 방향성,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진리의 말씀이 저 설교자를 통하여,그리고 내 안에서 계속 외쳐주네. 그러면 그걸로 어떻게 돼요? 그 방향성, 그 육의 생각이 그를 어떻게 해요? 아! 나는 아니구나! 라고<다나토스>로 죽여낸다는 거에요. 근데, 그게 뭐냐 하면 육의 생각, 그 방향성이 ‘다나토스, 사망’이다. 여기서 사망, 다나토스가 남성 단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육의 경향성, 그 방향성.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 그 육의 방향성이 진리의 깨달음을 통하여 “아! 나에게는 어떤 한 이의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없었으면 안 될 뻔 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거죠. 그래서 육의 경향성은 바로 그 다나토스로 데려간다는 거에요. 

그 예수의 다나토스의 죽음을 깨닫게 하여… 


그러니까, 나는 그 죽음이 아니면 안 되니까, 내 육이 거기서 부정 당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다나토스는 나의 다나토스가 되네! 그러면 그게 바로 ‘영의 경향성’이 되는 거에요. 죽음이… 그러면 그걸 ‘생명’이라고 하고,그걸 ‘평안’이라 해요. ‘평강’이라 그래요. 성경이… 왜? 이제는 내가 해야 될 것들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평안>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과 한 멍에를 지고, 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 <에이레네>거든요. “이제 드디어 그 분과 어깨동무하고,거 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 그랬잖아. 그리고, 내 멍에 메라고 했잖아. 왜? 내가 메고 있으니까, 너는 거저 갈 수 있다니까!” 이 얘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은혜로!! 그래서 그게 생명이고, 평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나토스의 죽음, 그것이 곧 우리에겐 생명이에요. 


그래서 창세기에서 선악과 나무, 생명 나무, 이 두 나무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무는 정작 단수로 쓰여져 있는 거에요. 그걸 선악과 나무, 그걸 통하여 네가 그 선악과가 뭔지를 알게 되면 그게 생명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알기 전까지는 감추어져 있죠. 생명이… 모르는데… 그래서 감추어 놨다 그러는 거에요. 


“먹으면 저거… 절대 먹으면 안돼” 이래서가 아니라, 나무가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을 선악으로 계속 보면, 율법으로만 보면, 거기서는 생명을 못 얻는 거에요. 그걸로 그냥 죽는 거에요. 그 죄로… 근데, 그걸로 이게 뭔지를 알았으면 감추어져 있던 생명이 열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그 생명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땅에 가장 흔한 것 죄! 인간의 그 에피뚜미아의 마음, 그 마음을 글로 써 놓은 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없을 땐, 그 양심이 율법이다 라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그러니까 그걸 통하여 그 생명이 뭔지를 알고, 그 ‘선’이 뭔지를 알았으면 그 죽음이 곧 생명이다. 그 죽음이 곧 평안이다. 에이레네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나로 믿는 자는’ ‘나를’이 아닙니다.)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나’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되는데, 나중에 요한복음에 14,15,16,17장을 잘 공부해 보시면, 그 ‘나’라는 새로운 개념이 거기 잘 등장해요. ‘나’ 거기서의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세 번째 성전으로서의 나에요. 나! 나! 그러면 ‘나’가 돼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서 비로소 생명이 되죠. 살아나죠. 그렇죠? 그 전엔 죽은 자입니다. 


그러면, 그 분이 들어와서 내가 생명이 된다면, 나는 부정되는 거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나를 품어 안고, 연합하여 그걸 ‘나’라고 말씀해 주세요. ‘에고 에이미’의 [에고 G1473]로 나를 말씀해 주신다니까요. 그 ‘나’ 그러면 나는 죽은 거네요. 다니토스로 부정된 거네요. 말씀이 완성되어서, 그러니까 그 ‘나’로 믿게 되면 그 ‘나’가 뭐에요? 그게 산 거니까, 그게 부활이고, 그게 생명이야. 그 ‘나’로 믿으며… 그런 말이에요. 


너희가 그 ‘나’가 되어 그 ‘나’로 믿으면, 믿음 안에 있게 되면, 그게 부활이야. 그게 산 거야. 죽었다가 산 거니까요. 근데 그게 살았다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살아있는 나는 산 거 아니었네요.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게 죽은 게 산 거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밑에서 뭐라 그러냐 하면은 “그렇게 나로 믿는 자는 그게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것을 아는 자는 죽어서 사는 거야.” 그러는 거에요. ‘죽어도 살겠고’가 아니라 ‘죽어서 살겠고’에요. 그래서 그렇게 살아났어요.


“산 자로 ‘나’로 믿는 자는 그가 이제 영원히 안 죽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 영혼은 이제 안 죽는 거야. 그러면, 여러분은 <영생>을 사는 거에요. 영생은 오래오래 사는 게 아니라니까요. 지옥에서도 오래오래 살아요. 안 죽여요. 거기서도… 그러니까,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서 여러분이 그 성경을 사셔야 돼요. 안 그러면, 그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책이라니까요. 거기에서‘죽어서 살겠고’ 거기서 쓰인 단어가 [아포드네스코 G599]거든요. 그건 다나토스의 강조형 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죽어야 산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 육이 완전히 부정되면 무기력해지고, 그냥 막 산다는 애기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그 권능과 능력 앞에서 내가 할 말을 잃어버리는 거에요. 그걸 ‘완전히 죽는다’라는 거에요. 그걸 곡해해서 자꾸 그냥 막 살아도 되겠네요. 그런 말들을 하는데… 어디 그런 말을 함부로 해요! 아니라니까요!


이 세상을 우리가 사람으로서 살아야 살아있어야 그래야 그 진리를 배울 거 아니에요. 근데,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인지상정으로서의 도덕, 윤리나 사회법은 당연히 해야죠.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잘 해야죠. 왜 안 해요? 근데,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냥 거기서 결론 내버리고, 그 위에 더 큰 게 있는데, 그걸 말해 주지 않으면 그거 <거짓말>이라는 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거짓’. 


근데, 그걸 이야기해 줄 수 없으니까, 그냥 전부 아래 것으로만, “이거 열심히 해, 이거 하지마, 이거는 해야 돼.” 요것만 계속 가르쳐 주는 거에요. 집에서도 엄마가 그 소리해. 교회 가서도 목사님이 맨날 그 소리해. 학교 가서도 선생님이 그 소리해. 어떤 중이 나와도 그 소리해. 그건 인간 보편의 추구라니까요. 방향성이라니까요. 그거는… 그러니까, 여기서 살라면 해 주라고요. 


아니 마치 우리가 아! 하나님이 제물로 하나님께… 예수님이 하나님께 예물로, 제물로 완전히 드려 졌는데… 아니 헌금이 왜 필요해? 근데, 그게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교제하고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여러분이 헌금 안 해도 하나님이 뭐라고 안 그래요. 그러나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하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도덕과 윤리는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거기에 맞는 어떤 것을 내어 주면서 같이 가야 돼요. 그렇게 이해하시면서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유치하게 ‘신앙의 목적지다’ 이러지 말란 그런 얘기죠. 그래서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보세요.



(야고보서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여기서 욕심이 에피뚜미아에요. 듀오, 희생제사를 반복하여 드리려 하는 그 마음. 그게 뭐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다는데, 그래도 뭔가 불안해 그래서 내가 자꾸 뭔가 하고 싶어. 


회개도 해야 되고, 반성도 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되고, 헌금도 너무 많이 해야 되고, 그래야 마음이 편해. 그리고, 우리 교회는 왜 특별새벽기도가 없어? 벽돌에다 아니면 동판에다가 이름도 새겨 준다던데… 어디는… 그거 하나 갖고 있으면 예수님 오실 때 턱~ 내 놓을 수 있잖아요. 와! 이렇게 이름까지 새긴 사람이라고! 아니 그런 것도 안 시켜… 아주 그냥 불안해. 


이게 에피뚜미아에요. 두 마음. 불안한 인간의 마음. 탐심이라 그래요. 그 두 마음이 잉태를 한다 그래요. 그게 손뼉을 치다. 짝, 두 마음이 작용하여 짝!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죄를 [틱토 G5088(생산하다)] 낳아버린다 해요. 생산해 낸데요. 거기서 ‘죄’가 나오는 거에요. 죄는 그거 밖에 없어요. 성경이 금하는 죄는… 그래서 사하심을 얻을 죄,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 나누잖아요. 


죄는 죄지. 사하심을 얻을 죄,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죄. 야! 그거는 예수님이 사해주러 왔잖아. 근데 너희들이 끝까지 하나님 자리에 서서 하나님 흉내내면, 그건 사함을 못 얻는 죄지…” 

그 얘기 하는 거란 말입니니다. 


근데, 그렇게 죄가 생산되어 죄가 어떤 일을 막 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 죄가 어떤 것을 완성해 내요. 그게 ‘장성한즉’ 이거든요. 그게 완전히 [아포텔레오 G658(완전히 완성하다)]. 

어떤 것을 성취하여 끝내버리면 거기서 ‘다나토스, 사망’이 온다 그래요. 


왜? 죄가 우리에게 와서 하는 일이 뭐에요? 성도에게 와서 하는 일이… 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라면서요! 

그러니까, 그 죄가 그 일을 완성시켜 놓으면 어떻게 돼요? 

“아~ 그렇지. 그 예수의 그 죽음이 없었으면, 나는 큰일 날 뻔 했구나!”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잖아요. 그래서 그러는 거에요. 육신이, 에피뚜미아가 일을 하면 죄가 ‘틱토’하게 되고, 그 죄가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일을 완성해 내면, 우리에게 드디어 그 사망이 오는 거야. 


근데, 오늘 본문이 그것을 ‘그게 생명이야’ 그래요. 그 죽음이 나쁜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는… 



로마서 14장 7절 보세요.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에요. ‘우리 중에’라고 한 것은 바울을 포함한 성도, 교회를 말하는 거죠. ‘우리, 교회는 그 누구도 자기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도 없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 당하는 거에요. ‘자기 안에서 죽는 자도 없다’ 그래요. ‘나’라는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없이, 살고 죽는다는 그 개념도 우리는 내가 챙겨 가질 수 없다니까요! 성도는… 아무도 자기 안에서 죽을 수 없고, 자기 안에서 살 수도 없데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도 주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 안에서 죽는데요. 그걸 위해 예수님이 ‘다나토스’로 죽고 살아 나셨데요. 그러면 그 죽음 안에서 우리가 죽었다는 거 아닙니까! 보세요.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사셨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그 일로 인하여 어떤 게 발생한다 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여기서는 [네크로스 G3498]라는 단어를 써 버려요. <진짜 죽은 자>. 그 안에 그렇게 죽어 산 자가 산 자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살겠다고 육신의 날개 타고, 열심히 퍼덕이면 그 놈이 ‘죽은 자’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분의 십자가가 그리고 부활이 기준점이 되어서, 여기에 이 안에서 죽었다가 산 자, 다나토스로 죽고, 거기서 다시 살아난 그 자는 심판과 무관한 자가 되지만, 산 자가 되어서, 그러나, 이거와 무관하게 계속 뭔가가 불안해서 계속 희생제사 드리려고 하고, 계속 어떤 행위를 의지하는 그런 이들은 ‘죽은 자’로 심판 받는다. 여기서는 굳이 ‘네크로스’라는 단어를 쓴단 말이에요. 그는 반드시 심판 받는다. 그렇지. 우리는 육의 자아를 부정당해야 되는 거지. 말씀을 에너지 삼아, 떡 삼아 개발하고 성숙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완성하셨다면서요. 근데, 이렇게 말하면, 뭔가가 이렇게 불안해서, 왜냐하면 그 안에 그 진리가 없네. 그 은혜가 없으니, 아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되죠. 목사님이… 자꾸 이래요. 저한테… 그럼 뭐 어떻게 얘기하라는 거에요? 그렇게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명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 그게 <바벨탑>이었잖아요. 혼란스러운 비 진리의 말씀. ‘바벨’이라는 단어가 그 뜻이니까. 그걸 갖고, 우리가 힘써서 하늘로 올라가자. 뭐로? 흙 벽돌 쌓아서, 그게 흙의 일이라니까요! 그렇게는 못 올라간다는 거에요. 그거는 주님이 그래요.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야!” 죽은 자의 부활은 어떤 부활? 심판 받으려고 살아나는 부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만들어 낸 생명, “야~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산 거야.아~ 이제 좀 안전해.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을 부렸고, 이런 나를 하나님이 칭찬해 주실 거야. 이게 생명이지.” 라는 건 심판의 부활이라는 거에요. 그것이…

그렇게 죽은 자의 부활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그 나라에 가서도 내가 뭘 드리면서 살 수 있을까를 기대한다니까. 거기에는 길도 다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고, 집 대문도 금이고, 난 여기서도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거기 가서 그렇게 되어 있으면… 그게 뭐 그렇게 나에게 좋은 곳일까? 아니… 거기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분이 내 면전에서 나를 마구 사랑해 주는 그 분이 있는 곳이라 행복한 곳이라니까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죠. 근데 왜 내가 자꾸 그래도 집 안이 자꾸 기울면 안 되니까, 나도 신부로서 자꾸 단장을 해야 돼 이러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면 뻔뻔스럽게 이 정도면 됐잖아요? 염소들이… 아~ 나도 노력 좀 했는데 그럼 항상 맞장을 뜰려고 한다니까요. 거기서… 그런데 면목 없으면요… 어? 이런데도 어떻게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세요? 아니, 이렇게 예루살렘에 희멀건 여자들도 많은데, 이런 검둥이 술람미 노예를 왜 이렇게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그래야 거기가 천국이죠. 그런…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는 이가 나를 꼭 붙들고, 넌 나만 따라와! 넌 내가 지켜 줄게! 끝까지! 근데 그 분이 최고의 힘을 갖고 있는 분이네. 그럼 거기가 천국이지. 그러면 들에서 자면 어떻고, 아니 들에서 자면 야영이야. 어디 가서 뭘 먹어도 소풍이 되지. 다 그렇게 되는 거지. 아무리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에 살아도 그냥 맨날 시어머니랑 시누이랑 그저 쫓아 다니면서 그거 얻어 먹으면서… 이게 천국이에요.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맨날 체해서 소화제나 먹고 그러지…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아니 다른 말로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 들이는 것을 사랑하는 거라 그러잖아요. 나에게 뭘 해 주셨는지 나를 먼저 알아야 되고, 나를 아는 그 앎, 이게 다나토스의 죽음이라니까요. 그래 그 분 아니면 난 먼지지 뭐. 이거 알면 그걸 살았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왜 이제 내가 주면 되니까. 왜? 네 것도 다 내 것이었거든. 근데, 꽉 누르면은 먼지잖아요. 우리는… 근데 그 먼지를 하나님이 당신의 말, 법칙으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게 <하나님 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하고 가는 거에요. 근데 엉뚱하게 자기들이 마치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게 영생이지 이 영생에 내가 이런 기여를 할 수 있지… 그게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너희는 반드시 심판 받을 거야! 그러시는 거에요. 마태복음 22장 23절 보세요.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너네 정말로 성경 드럽게 모르는구나 이러시는 거에요. 그게 성경이냐?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너희 같이 율법에 묶여서 여전히 그 하늘에서도 네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그런 자는 죽은 자들이다. 네크로스에요. 여기서… 그런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죽었지만, 세상에서 죽었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었기에 그들은 산 자거든 나는 그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거에요. 너희들은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어. 숨도 쉬고 있는데, 너희들은 죽은 자야! 그러시는 거에요. 거기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 왜냐면, 장가, 시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 남편과 신부인 교회의 이야기인데, 그걸 설명해 주기 위해 모형으로 준 건데, 거기 가서도 시집, 장가 얘기하고 있냐? 이미 거기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자칼인 남편과 네케바인 교회, 여자가 연합되어 완성되어 있는 곳인데, 무슨 장가, 시집을 또 가냐?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마다 그러는 거에요. 잔치에 초청을 하든, 초청을 했을 때 안 오는 놈들이 전부 뭐에요? 먹고 입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느라 안 와요. 이게 다 뭡니까? 이 땅에서 말씀을 율법으로 곡해하여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그것들이잖아요. 이미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되어 있는 거라는데, 그니까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초청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에요.다 그 얘기에요. 소도 사야 하고, 소를 하나님을 진리를 어떻게 사냐구요. 밭도 갈아야 되고, 광야. 그게 교회에요. 그게요… 그거 운영하느라 또 못 오네.


우리는 죽어서 사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자존심이 좀 상하는 그런 경험들을 그런 과정들을 통과해야 됩니다. 히브리서에 히브리서 기자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6장 1절 보세요.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거 좋은 거 아닙니까? 이거 지켜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버려라! 그래요 Send away! 멀리 보내 버려라! 그래요. 뭐를? 죽은 행실을 회개함, 첫 번째에요.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거 칭찬 받을 일 아니에요? 그래서 맨날 통회 자복 하잖아요. 새벽마다 나와 갖고… 어제는 이런 일 했구요. 대표기도 시켜도 꼭 그래요.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이러 이러 해서 우리가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에는 나가서는 더 잘 하겠습니다. 뭐 이런 기도한다고… 이거 잘 하는 거 아니에요? 늘 우리가 하는 거고,근데 버리래요. 멀~리 보내 버리래요. [메타노이아 G3341] 회개가 뭐에요? 회개는 어떤 일을 반성하고, 단순히 뉘우치는 차원의 그런 개념이 아니라 메타노이아는 어떤 것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아 ‘아! 이거 아니었구나’라고 그 세계관과 가치관의 쉬프트(Shift,이동)가 일어나서 유턴(U turn)을 해 버리는 거에요. 다르게 봐 버리는 거에요. 아! 난 이게 열심인 줄 알았는데, 이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 줄 알았어. 근데, 알고 나니까 아니 이게 탐심이었네. 그리고, 하나님은 그걸 교회를 핍박하고, 나를 핍박하는 거라고, 말씀을 하시네. 그러니 당연히 이 열심에서 돌아서겠죠? 그걸 메타노이아라고 그래요. 그렇게 바라보고 돌아서는 것 까지를 회개라고 해요.메타노이아. 그러면 우리가 죄라는 것을 통하여 의를 깨달았어요.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깨달아서 아 이것으로 하나님이 그 의, 그 하늘의 생명을 설명해 주시려고 한 거였구나. 이 선악과 열매를 통하여 생명 나무 실과를 우리에게 먹이려고 한 거구나 하고, 이걸 다른 차원으로 보면 <용서>네요. 그게 죄와 나가 무관하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에요. 내가 의인을 구원하려고 왔는 줄 아니?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러죠? 그 말이 직역을 하면 그거에요. 내가 죄인을 불러 그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해 주려고 왔다. 이거에요. 그러면… “그래요? 나 세리였는데, 나 창녀였는데… 아니, 하나님 그게 그거에요?”그게 용서라니까요. 그걸 회개라 그래요. 그러면 그게 뭔지를 안 그 이들이 어떻게 여전히 매번 와가지고 죽은 행실의 회개를 하고 있으면, 그거 되겠니? 그런 말이에요.

반성도 하지 말라는 그런 말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죠. 인간이면… 그러나 원리적으로… 아! 이제 반성을 해야 되고, 그리고 이런 지긋지긋한 육의 몸 이걸 빨리 벗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어야지. 그러니 하나님이 이것도 다 용서하셨다고 하니까 얼마나 감사한가!!!여기로 못 가면 울고 불고, 맨날 난리 치게 된다니까요. 그럼 그때마다 어떻게 되는 거에요? 야~ 내가 다 해결하고 죽었는데, 너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어떡해. 내가 또 여기 내려가서 또 죽어야 돼? 또 예수님을 매번 죽이는 거에요. 그게 인자를 도륙하는 거에요. 그게[프호뉴오 G5407] 살인하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 제사를 못 믿어서 영 단번에 드린 그 제사를 못 믿어서 계속 제사를 드리는 거에요.그것이… 그게 ‘도의 초보’라 그러고, 버려라! 버려라!...  


두 번째 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어휴~ 더 큰 일 났네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도의 초보래요. 그리고, 버리래요. 아! 그 하나님이 누군데, 그 하나님을 믿고 계세요? 여러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난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이 그랬거든요. “나는 미쁘다. 나는 신실하다.” 그럴 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믿음>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게 [피스티스 G4102] 라는 단어거든요. 하나님은 미쁘시다. 하나님은 믿음이시다. 이런 말이에요. 그럼 그 믿음이라는 게 그 하나님을 그 보이지도 않고 말로도 언어로도 담을 수 없어서 주어로도 다 생략이 되어 있는 그 하나님… 근데, 그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냐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말씀으로 예수라는 그 안에 담아서 보내야 할 정도로, 그리고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천지를 창조[바라בּרא H1254]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아! 어떻게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로서 인식하여 섬길 수가 없기 때문에, 신앙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려주셨죠. 로고스로… 그러면 “아! 그거에요? 그 하나님은 바로 그 아가페, 그 사랑이군요! 그 은혜군요! 그 긍휼이군요!” 알아서 그걸 내 마음으로 갖는 거죠. 그러면 내가 성전이 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성전을 히브리어로는 [아브 H2553] 라고 쓰고, 뭐라고 읽어요? 하나님의 집, <아버지> 라고 읽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진리를 담고 왔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뭐라 그래요? “내가 진리야” 그러죠? 그래 놓고, 내 안에 아버지 계신다 그래요. 그리고, 아버지가 또 내 안에 있데. 아버지와 나는 하나래요.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는 날까지 마지막 순간 단 한번 이외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안 불러요.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 그 대표가 되어 세상 임금이 되어 죽으실 때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죽으세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은 그들 안에 그 하나님을 진리로 말씀으로 갖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하나님을 내 밖에 대상으로 놓고,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 뭘 하면서 비는 거…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죠.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놈들은 하나도 하늘 나라에 단 한 명도 못 들어간다. 그랬어요. 왜? 난 그리스도로 네 안에 들어간다 그랬는데… 주여! 주여! 부른다는 것은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 단 한 사람도 못 들어간다 그랬어요. 주일날 교회 들어가면 너무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워… 주여! 주여!~ 하느라고 그냥… 여기 없으니까 저 옆 사람보다 크게 불러야 그 분이 나에게 먼저 올 것 같죠? 그냥 얼이 빠져가지고 나중에는 무슨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무슨 개구리 떼 같아. 와글 와글… 개구리는 부정한 동물이에요.ㅎㅎㅎ


세 번째는 <세례>에요. 세례는 물에 푹~ [밥티스마 G908] 물에 빠뜨려서 죽이고, 그 물이 기식하는 걸 죽이고, 그 물에서 건져 올려 살리는 것을 세례라고 해요. 밥티스마. 그러면 위의 물이 기식하는 것을 빠뜨려 죽이고 세례잖아요. 그게… 죽이고, “너는 이제 그렇게 다나토스의 죽음을 진리로 죽었으니, 산 자야” 라고 저주의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게 세례거든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더 이상 그 세례를 정말 율법으로 이거 안 하면은 구원 못 받는다 이런 가르침을 가르치면 돼요,안 돼요? 근데 영세 안 받으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있죠? ‘그거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그게 뭔데요… 

초대 교회 때 죽은 자에게 내리는 세례…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그 때에도 아직 정경이 완성이 안 됐을 때에요. 그 때는 목숨 걸고 진짜 신앙 생활 했던 때잖아요. 요단강에서 공개적으로 세례 받았으니까… 그거는 가족들에게 끊기고, 장사 못해요. 그래 난 예수 믿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 거야. 공개적으로 자기들끼리… 그것도 객기야. 어떻게 보면… 뭐하러 그래요. 그러니까 그 세례가 너무 소중했던 거에요. 그래서 진짜 진짜 확인해 보고 확인해 봐서 이 사람은 진짜다 라고 했을 때, 그 때 세례를 줬거든요. 근데, 너무 확인을 해서 기다리다가 죽었네. 이 사람이… 그러면 회의를 해서 이 사람은 진짜 같은데 어떡하죠? 그러면 세례를 줬어요. 산 사람이 시체 밑에 들어가서 세례문답하고, 세례 받았다니까요. 그러나 정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런 거 다 없어졌어요.그게 왜 필요해요. 세례? 그 세례가 뭔지 알면 성령 세례 받은 거에요. 그게 입에 거품물고 막 이상한 소리하는 게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은 진리잖아요. 프뉴마는 영, 진리, 생명이라 그러잖아요. 그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성령세례 받은 거라니까요. 그것이…그럼 그걸로 끝! 예수님이 물세례 받으실 때 나도 물세례 받은 거고,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게 우리에게 일어난 거니까요. 그런 거 거기에 너무 묶이지마 그러는 거에요.


네 번째는 <안수>죠. 안수도 버리라 그래요. 안수는 뭡니까? 제물에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에게 내 죄를 내가 안수하여 전가시키는 거에요. 이게 율법의 안수입니다. 그러면은 이 제물이 내 죄를 쭉 빨아들인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무흠 해졌네요. 그 제물과 내가 바뀌어진 거죠? 그러면 이 제물이 내 죄가 되어서 죽고 나는 사는 거죠? 예수가 그렇게 했잖아요. 근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제사는 필요 없죠. 그 제사가 필요 없으니 안수도 필요 없네요. 그거 하지마 그러는 거에요. 근데 요즘 교회에서 횡행하는 안수는 뭘까요? 이렇게 이해하고 싶어요. 엄마 손은 약손. 이럴 때 여기서 무슨 원적외선인가 뭔가가 나와서 치료를 해 준데요. 이렇게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끼리 따뜻한 마음으로 이렇게 쓰다듬어 주며 기도해 주는 거는 OK! 그러나 여기서 무슨 마치 능력이 나와가지고 뭐 머리에다 손 얹고 등허리에다 얹고 이거는 자기 죄를 자꾸 나눠 주는 거에요. 다른 이들에게… 아니 성경이 그러잖아요. Send away! 버려라!그런다니까요. 근데 그렇게 해야 폼도 나고 그러니까 계속하는 거에요. 안 버리고.. 


다섯 번째가 드디어 <죽은 자의 부활>이에요. 그거 버려라 그런단 말이에요. 죽은 자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준 부활은 산 자의 부활입니다. 그 산 자의 부활은 반드시 그 다나토스를 겪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거에요. 근데 그것도 겪지 않고 “왜 우리가 못해? 할 수 있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지 뭐 해야지, 뭐 해야지…” 하고 “하나님 잘 했죠?”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걸 “죽었다” 라 그래요. 죽은 자들이 한 일은 하나님이 아무 가치도 없게 본다고요. 죽은 자의 부활. 그거 버려! 그래요.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부활은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서 죽었던 자들이 “아! 이게 죄고 이게 죽음이야. 어떻게 그런데 이게 내 귀에 들렸지? 야~ 큰 일 날뻔했네” 하고, 산 게 그게 <첫 번째 부활>이에요. 계시록에 나오는… 그들이 그 첫 번째 부활을 통과하지 않고는… 근데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과해야 첫 번째 부활이죠? 두 번째 부활, 완전한 완성으로 못 간다니까요. 둘째 사망, 둘째 부활 이거는 ‘완성’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제 없는 거에요. 그 끝은… 그러니까 그 부활은 이 땅에서도 지금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 일어나죠… 사람은 날 때부터 죽은 자로 난 다면서요. 성경이… 다 죽은 거라면서요. 에스겔에 나오는 그 마른 뼈다귀라면서요. 우리가… 근데 생기, 말씀이 들어가니까 그들이 산 자가 되더니 군대가 되잖아요. 그럼 다 죽은 거네요. 여기는… 아닌 거에요? 근데 여러분이 살았네. 그게 그럼 부활이지 뭐에요. 근데, 이 부활을 거치지 않고는 나중엔 그 부활로 못 간다는 얘기에요. 근데, 이걸 거치지 않고 언젠가 올 거기에서의 나의 삶 이런 거에만 관심이 있는 건 그게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에요. 그들은 심판 받을 거라는 거에요.진리로 이 땅에서 한번 죽고 다시 산 경험이 없이, 자기가 주인공이 된 어떤 그 부활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면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에요. 던져 버려라! 그것도. Send away!


마지막이 <영원한 심판>이죠. 그 교훈의 터는 절대 닦지마! 영원한 심판. 왜? 영원한 심판은 우리 하나님이 당해 버리셨거든요. 세상 임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니까 그가 세상의 대표, 임금으로 죽는 거잖아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는 거니까 그래서 세상 임금이에요. 그래서 그 분이 그랬다는 것을 믿으면 나와 그 세상 임금은 아무 상관이 없어 왜? 나에게서는 이미 그 세상이 죽었으니까… 근데 그분이 안 죽으면 여전히 세상 임금이 나를 끌고 가는 거에요. 근데 그 때는 그 세상 임금이 마귀가 돼요. 비 진리가 된다니까요. 그 분이 영원한 심판을 당했기 때문에 나에게 이제 심판이 무관해졌어. 왜? 나는 그 안에서 죽었거든요. 어디다 심판을 받어! 내가 없는데… 내 안에는 그리스도만 사는데… 그러니까 그걸 알면 하나님이 어디다 심판을 할 수가 없어요. 요거 얄미워서 요거 인생 10년 동안 그렇게 살다 왔니? 이 나쁜 놈아! 그래도 너는 땅콩 다섯 대는 맞아야 되겠다. 근데 때릴 대가 없어졌어. ‘나’가 없어졌어. 그 안에 그리스도만 있어. 그걸 아는 이는 절대 정죄를 못 받아요. 그래서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 그러는 거에요. 근데, 그 심판을 미끼로 겁주면서 당신들 이거 안 하면 심판 받아요. 저거 해야 심판 안 받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거 하지마 그러는 거에요. 그런 거 하지마! 요한복음 5장 24절 보세요.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보세요. 내 말을 들어야 영생을 얻는다 그래요. 그는 내 말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은 자라 그래요. 이미… 왜? 그 말이 생명이고, 영이라 그랬으니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에크 G1537, ~로 부터] 사망으로부터,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에 이르렀다 이 말이에요. 그게 다나토스에요. 

25. 진실로 진실로 (내가 진리로 진리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이 그렇게 부활한 거죠? 그러면 이게 산 자의 부활이에요. 근데 그들은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는 단 말이에요. 그 죽음을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산 자라고 하니까, 우리도 산 자… 그게 산 자의 부활이란 말이에요.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자~ 여기는 다 무덤이에요. 세상이 전체가 다 무덤이죠? 왜? 죽은 자들이니까 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 원래 다 죽은 자들이니까 무덤이죠? 근데 무덤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 진데요. 근데 그 음성을 듣고 나오는 이가 있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이 세상에서 혹은 이 세상을 조금 더 확대한 천국관 그걸 갖고 여전히 세상에 묶여서 안 나오는 이들이 있는 거에요. 그 말이 떨어지는데 나사로처럼 나와! 그러니까 그 굴에서 그 옛 성전에서 나오는 이가 있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사라처럼 막벨라 굴에 묻혀서 다나토스로 묻혀서 거기서 나오는 이가 있는데… 그 굴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 나오는 이들이 있는 거에요. 그들을 죽었다 그래요. 죽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 아들의 말씀을 못 듣는 자들을 네크로스, 죽은 자라고 그래요. 죽은 자! 그래서 그 네크로스라는 단어가 쓰이는 겁니다.

재미있는 게 word play가 하나 나오는데, 주님이 그런 word play를 하신 거겠죠.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 라고 하죠?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이 [포이에오 G4160, 되게 하였다. 간직하다] 된 자’. 선이 된 자.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서 그게 선이 된 자에요.말씀이 이루어지면 그걸 포이에오라고 하거든요. 그 선이 된 자는 생명의 부활이고, 그것이 산 것이고, 생명인 것이고…

‘악을 행한 자’는 여기는 ‘행한 자’라는 단어가 들어가요. 선은 되는 거지, 뭘 행하게 되면 그게 ‘악’이라는 거에요.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래요. 그가 얻어 낸 생명은 심판이야. 이런 말이에요. 계시록 20장 12절을 보세요.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에서 그거는 생명이다 이런 말이에요.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건 생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근데 다른 죽은 자들, 네크로스 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느냐 하면 또 다른 책들에 적힌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 그래요. 이건 같은 책이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을 하나 주셨어요. 하나! 한 권이에요. 그거는… 성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쓰신 것. 이사야에서 나오잖아요.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이 말하시고 성령이 모으셨다 그런다 구요. 근데 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네. 하나님, 그 사랑, 그 아가페! 근데 그 사랑으로 이해 못 하면, 이게 다 부스러기가 된다 그랬죠? 그래서 유다가 떡을 못 받고 걔만 조각이 아니고 부스러기를 줬다고 성경에 써 있어요. 그 부스러기들을 받고 그게 내 양식이야 하고 먹는 이들은 율법으로 그걸 받으면 그 책들로 심판 받는다 그래요. 왜? 그 책들이 적힌 그대로 너희는 행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그 생명, 그 책을 <생명>으로 알아 그 생명, 그 하나를 네가 네 마음으로 가지면 너는 그걸로 사는 거야 그게 네 생명이야 그래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이 성경이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생명으로 박혀요… 아! 오늘도 집에 가서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이렇게 결심을 유발하게 하는 부스러기로 들려요? 아주 중요한 거에요. 이건…. 근데 자꾸 어플리케이션(적용)으로 말해 달래요.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래. 죽여달라는 얘기 아니에요. 그거… 날 죽여주세요… 좋은 죽음 말고… 근데요. 잘 보십시오. 13절을 보면,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젠 네크로스 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심판, 그 행위, 책들로 심판을 받을 네크로스, 진짜 죽은 자들이 어디서 뛰어 나오는지 보세요.튕겨져 나오는지…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바다는 뭐에요? 위의 물을 설명하기 위한 아래의 물이죠? 근데, 그건 같은 물이잖아요. 원래 이것을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거는 이 땅에 어떤 것으로도 줄 수 없으니까 아래의 것은 사용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 위의 물 그것이… 그 바다를 이렇게 진리로 이해시키면 덮으면 그게 여호와의 영광이다라고 그러는 거에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러는 거에요. 그러면 그 바다에서 네크로스가 나온다는 것은 뭐죠? 그 호 코스모스의 세상과 그 성경, 예수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아가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로 자꾸 무엇을 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부담을 갖고 그 염려와 수고를 하게 되면 그들이 죽은 자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바다가 네크로스를 토해내더라는 것입니다. 왜? 심판하라고… 심판하세요! 하면서 토해내는 거에요. 

그리고 사망과 음부가 또 네크로스를 토해내네요. 여기서 사망이 단수 사망이에요. 다나토스인데…어? 다나토스는 좋은 거 아닌가?예~ 근데 단수의 다나토스는 예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그 말씀의 완성으로 다 이루었다 하고 [무트 H419, 죽음, 말씀의 완성]의 죽음을 죽으셨잖아요. 그걸 다나토스라 그래요. 그 죽음이 내 죽음이어야지. 그 죽음이 나와 아무 상관 없이 “그래, 그 분이 그렇게 죽어서 나를 살렸다네, 그러니 내가 이제 그 죽음, 그것을 힘입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열심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지…” 이 얘기 하셔야 되는데… 그렇게 들고 뛰어버리면 그 사망을 잘못 이해한 거에요. 그 사망은 반드시 나의 사망이 돼야 된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서, 들고 뛰는 것은 OK! 그럼 더 열심히 뛰지~ 아 그럼 우리 교인들 중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리도 몰라 갖고, 그냥 자기의 의를 쌓으려고 저렇게 열심히… 이런 거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더 열심히 한다니까요. 우리 교인들이… 근데,그 사망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내 밖에서 이천 년 전에 그냥 한번 존재한 거에요. 그리고는 그게 나를 살렸다고 그냥 막연히 믿어. 그건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거든요. 그게 아니에요. 

아!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어!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죽여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계시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내가 그 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이 나와 벗이 되기 위해 그렇게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는 말이에요.그것이… 그것, 그 방법밖에 없는 거야. 나는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게 그렇게 내 죽음이 되어야 그래야 그 사망이 진짜 가치 있는 사망이 되는 거에요. 근데 저 내 밖에서 그냥 내가 기념하고 내가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그대, 그 사망! 그래 놓고 십자가! 십자가!하는 그 인간들. 그거는 아니라는 거에요. 그거는 나와는 관계없는 십자가라니까요! 오히려 그게 십자가를 우상화시켜 만드는 거에요. 그건 성화주의 보다 더 나쁜 거에요! 그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이라도 하지… 이거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저기다 세워놓고, 그러니까 우리는 맘대로 살아~ 이게 뭐에요? 이게…. 아무 관계없이 어떤 영향도 안 받고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내 죽음이 되어야 해요. 근데 그 사망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 사망이 네크로스를 토해낸다라는 거에요.

그 음부는 뭐죠? [하데스 G86]=하(부정접두어)+데스(에이돈, 말하다) 말이 없는 곳. 당연히 진리가 없는 곳이니까 네크로스를 토해내요. 그럼 거기에 심판이 일어난다는 거에요. 심판이 일어나면 이제 둘째 사망, 다나토스가 이게 우리의 그 생명에 사용된 거잖아요.예수의 죽음도 그렇고, 우리의 다나토스도 그렇고, 그러면 이제 완전히 완성이 될 그때에는 이게 사망과 음부가 불에 던져지는 거에요. 비 진리와 그 사망, 예수의 사망,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사망. 그래서 그 나라에는 다시 눈물이 없겠고 사망도 없고 고통도 없고 이런 말을 하는 거에요. 단순히 거기서 안 죽는다 그게 아니라… 그게 두 번째 사망이라는 거에요. 이제 완료, 완료의 다나토스… 진짜 완료의 다나토스가 오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모두 불못에 다 들어가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잘 죽어서 피조물의 자리로 싹 내려가서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고 하나님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이 날파리 날개짓 이것으로는 그 어떤 목적지로도 도착할 수도 없고 방향도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 아니 그 독수리 날개 위에 얹혀 주세요!” 이렇게 가는 거에요. 자꾸 죽어라 죽어라 그러니까… 그냥 어휴~ 우리 목사님은 자꾸 고통 당해야 된다 그러고, 핍박 당해야 된다 그러고, 힘들어야 된다 하는데… 나는 왜 이리 안 힘들지? 그 얘기하는 그런 고통 아니에요.그런 고난 아니라고… 신이 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내는 거라니까요. 이 삼차원을 사는 이 악마 같은 인간들이 지들끼리 부대껴서 만들어 낸 비늘 같은 게 고난 고통이라는 거에요. 아니 내가 잘못해서 만들어 내는 이 현상계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은 그런 거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걸 통해서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요. 깨달을 수 있지만, 제가 말하는 고통 고난 이런 거는 그게 아니라… 그 예수의 애통, 그 예수의 고난, 그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내 것이었군요. 하고…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있던 네가 피조물의 자리로 이렇게 내려가는 그 과정. 그게 고난이고 애통이고 그것이 진짜 우리의 죽음이라는 거에요. 죽음… 그것은 나에게 감정적으로 고통으로 감지가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가는 그것 자체가 죽음이라니까요. 우리에겐… 근데 자꾸 우리는 내가 또 중심이 되어가지고, 내가 아프고 내가 기쁘고 내가 환히 환호를 지르고 이런 걸로 또 이해를 하는 거라… 휴… 그러니까 나는 왜 안 아파요? 이런 거 안 아파도 된다니까요. 그러나 죽는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애통이라는 단어를 유월절이라는 단어로 쓰는 거에요. 그 유월절이 나의 유월절이면 그게 <애통>이야 이런 말 하는 거에요. 그 예수의 죽음이 바로 너의 죽음이야. 네 육이 거기서 그렇게 죽지 않으면 너는 절대 그 세상에서 못 나와. 그래서 예수가 네가 되어 죽은 거야. 그게 이해가 되면 그게 내 육의 죽음이네요. 그렇군요… 그 방법밖에 없었군요… 이게 애통이라니까요. 이게 고통이라니까요. 그걸 죽음이라고 한다니까요. 그 죽음을 잘 죽으세요. 기쁘게~ 그 현상계가 주는 그런 고통과 아픔과 시련… 네~ 이 세상이 생산해 내는 것은 그런 거밖에 없다라는 거 확실히 깨달으시고, 그 나라를 빨리 소망하세요. 그러면 돼요. 너무 거기에 또 묶여 있지도 마시고… 하나님이 방학을 주시면 잘 누리고 쉬시기도 하시고 그러세요. 개학하면 또 열심히 끌려 가고… 그렇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지만, 쉴 시간도 주신다고… 그렇게 끌려 가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그것을 비우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데… 하나님 육이라는 이 장막이 참 우리를 괴롭힙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 속에서 그 자리로 더욱 더 풍성하게 맛 보게 하소서.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