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79 카다크리마 ( 정죄 ) 롬 8: 1-3 1.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2

로마서 79 카다크리마 ( 정죄 )

 

 

 

롬 8: 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오늘도 이 본문을 가지고 죄와 사망의 법이 어떻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never ,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래요. 거기에서 정죄함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타크리마 에요 정죄. 그 정죄 라는 단어는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에 근거하여 죄를 선고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대해서 심판자가 자기 마음대로, 심판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죄를 정하고 선고하는 단어에요.

 

제가 여러분에게 요 몇 초를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써 있는 책들을 어마어마하게 읽어 내야 되요. 그러니까 이거를 어떻게, 사전에도 안나와 있는 의미를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를 할까? 궁굼해 하실 분들이 있을거 같은데, 설교자는 단어 하나를 여러분에게 잘못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그 문장 전체가 어그러질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장이나 그 절이 속한 책이 완전히 잘못된 의미로 전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단어 하나하나를 공부 하기 위해서, 문자를 공부하고 그 문자로 된 책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요거는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에 의해 그것에 근거하여 오- 너 죄 졌네! 그러니까 너는 죄 있어 라고 유죄를 선고하는 그런 정죄가 아니에요. 심판하는 이가 자기 맘데로, 자기 뜻에 의해 , 그냥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게 정죄에요. 카타크리마

 

다른 말로, 피조세계에 도덕과 윤리에 근거하여 우리쪽에 어떤것을 근거로 하여 피조세계의 재판관들이 판단하고 선고하는 그런류의 정죄가 아니라, 만유의 주인이시오 재판장이신 그 하나님의 판단에 의한 정죄를 말해요. 내가 아직 아무 것도 하지않은 상태에서 너 죄 있어 하고 우리를 정죄해 버리는게 하나님 이지요 그죠?

 

내가 나기도 전에 그 정죄가 나에게 임하여 내가 죄인으로 이땅에 태어 났다네요. 그것 가지고 누가 따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받아 드리지요? 아니 내가 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뭐 한번 울어 보지도 않았는데, 나자마자 나 보고 죄인이래. 그러지요? 그게 카타크리마 에요.

 

그 카타크리마의 동사형이 카타크리노 인데, 그 단어가 바로 뒤에 3절에 나와요. 바울은 자신의 해방을 자랑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했다에서 그 너가 에고 에요. 나에요 나. 나를 해방 한거에요. 바울이 자기 얘기 하는거에요. 그렇게 자신의 해방을 자랑하면서 율법이 연약하여, 연약하여라는 단어는 율법에 걸리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보고 연약하다 그러는 거에요. 율법은 어떤것을 성취할 수 없다라는 뜻이에요.

 

율법이 연약해서 육신을 통해 이룰수 없는 어떤것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뭘 하시는데 그게 뭔가하니,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모양이라는 단어를 잘 보셔야돼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그 육신에 죄를 정하는거다 그래요. 이게 3절 이에요.

거기에서 죄를 정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타크리마 , 카타크리노, 같은 단어란 말입니다. 동사형일뿐이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이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완성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거에게 죄도 없는 분에게 죄를 카타크리마, 카타크리노 해 버렸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 단어가.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마음대로, 심판자가 맘대로, 그냥 너 죄인 해 . 그러면 죄인 인거에요.

 

그러니까 정죄, 카타크리마 라는 개념 속에서의 죄는 실수나 잘못, 그런 개념이기보다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개념이 더 강한 거지요? 이 호코스모스의 세상속에서의 어떤 행위나 현상을 근거로 하여 너 죄 있어가 아니라, 어떤걸 성취하기 위해 카타크리마, 그거 죄야, 너 죄 해. 죄인 해 라고 하는게 카타크리마니까 , 요건 실수나 잘못의 개념 보다는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의 개념이 더 강한거란 말이에요. 카타크리마의 개념 속에서의 죄는. 그죠?

 

그러니까 그걸 깨달으면, 아- 그렇구나! 그러면 그게 원래 나를 죽일 수 없었던 거네.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끌고 가기 위함이었네 라고 깨달으면 용서인거고, 그냥 거기에 머물면 그게 죄에요. 우리를 죽이는 죄. 멸망하게 하는 죄.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셔야해요. 그 아들에게 카타크리노 하셨다는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 안에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만 들어가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모든 장자들이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원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장자들이, 아들이 죄 있는 세상에 내려와서 죄가 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있는 세상이라니까 , 좀비들만 전부 사는 그런게 아니라 , 진리를 담아 그릇으로 준 모형으로서의 세상, 그것이 그냥 껍데기로만 인식되어 있을때 그걸 죄라 그래요. 진짜 진의를 못보고 엉뚱한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을 죄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 죄의 세상에 내려와서 바로 그 껍데기, 진리를 담고 왔는데 로고스로 오셨네요, 그 껍데기로 오셔서 그걸 죽여버리고 진리만 남기고 가는 거란말이에요.

 

그렇게 죄가 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그 정죄와 죽음의 사건에 다 들어가 있는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란 말이에요.

 

예수의 이야기는 바로 하늘의 장자들인 우리 성도의 이야기에요. 그걸 내 이야기로 받아드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여러분은 그 밖의 예수만 섬기는 종교인일 뿐이에요. 그래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이라는 단어를 쓰는거에요. 모양, 모양이 뭐냐면, 원래 죄 아냐. 원래 죄 아닌데 죄 있는 육신에 모양으로 왔다가 그 모양 삭제 당하고 가는 거에요. 기실 죄와는 무관한 어떤 존재, 죄의 모양으로 왔지만 기실 죄와는 무관한 어떤 존재, 그 하나님으로부터 카타크리마, 너 죄인이야, 날때부터 죄인이야, 뱃속부터 죄인이야 라는, 카타크리마, 정죄를 받고 왔지만, 그 죄와 정죄라는 것을 통하여 생명과 의를 배우는 그 원래 죄 없음의 존재. 그걸 아들 이라고 그래요.

 

벤, 벤허가 훌의 아들, 훌의 자손이라는 뜻이잖아요. 벤 이게 아들이거든요. 그 단어를 파자하면, 베잇하고 눈이란 말이에요. 성전이 말하다, 말하는 성전. 아들이에요 이게 , 예수잖아요 그게.

 

자- 그 정죄하는 단어는 5장에서도 쓰이는데요, 롬 5장 18절 보세요.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로운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 내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됐는데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 받았구나! 근데 뭐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있냐구?  그거는 중들도 외울 수 있는거에요. 그게 여러분의 삶속에서 지금 삶으로 살아지고 있냐구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여기서 한 범죄, 한 행동이라고 번역이된 어구는요, 죄의 하나 의의 하나 라는 말이에요.

 

십의 하나가 뭐지요? 십일조 라는 단어가 십의 하나라는 말이거든요. 그 십계명 이라는거, 열 개의 계명을 하나로 갖게되면 아- 계명 이라는거 율법, 말씀 이라는게 이거 하나, 아가페, 이거군요!라고 하나를 갖게 되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라고 한글 개역성경이 그렇게 번역을 하는거지요.

 

그러니까 죄의 하나, 의의 하나가 뭐에요? 하나라는 건 계명을 말하기도 하고 그 계명이 설명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 그분, 그 하나, 그 분을 가르치는거죠. 십계명이 아가페라는 그 하나님 사랑으로 축약이 되고 그 하나를 가지면 그걸 뭐라고 그래요? 모노, 하나, 모노 , 스테레오 말고, 모노. 모노게네스 그 단어가 거기서 나온거에요 모노가. 모노게네스 그걸 아들이라고 그러잖아요. 유니크한 썬, 독생자라고 그러잖아요. 아들이란 그 말 가지고.

 

근데 그 하나의 계명, 그걸 죄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그게 율법의 하나로 갖고 있는거지요 그게. 하나 이건 진리인데 그걸 죄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죽음이고, 의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아- 그게 아들이구나! 이말이에요 그게 18절 이란말이죠. 그게 생명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19절에 불순종과 순종의 이야기가 나오는거에요.

 

거기서 불순종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아쿠오가 듣다 지요? 너희가 이러이러한 것으로 들었으나, 산상수훈에서 배웠잖아요 그게 아쿠오 거든요. 그런데 그 앞에 파라 가 붙으면 파라쿠오; 제대로 못 듣다 라는 뜻이죠? 그걸 불순종 이라고 번역 한거에요, 여기서. 제대로 못 듣는거 . 한 사람의 제대로 못 들음으로 말미암아 , 아 저게 무슨 얘기야, 아- 열심히 하라는거구나. 그게 아담의 선악과 사건이란 말이에요. 어 그래. 선악과 먹고 이 선악의 구조 속에서, 선한거 악한것을 우리가 판단하여 선한걸 추구하라는 거구나가 희생제사 잖아요. 그게 한사람의 파라쿠오, 잘못 들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죄인이 된거같이 , 모든 인간이 다 잘못 듣게 되어 있어요, 파라쿠오 하게 돼 있어요.

 

그것처럼, 한사람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휘파코스; 올바로 주의 깊게 경청하여 인정하다 라는 단어에요.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올바로 듣고 경청하여 , 어- 그게 그거에요? 맞네요! 라고 하면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그런 분이 누구에요? 예수님, 진리로 오신 예수님 한분밖에 없다니까요. 그분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오면 그게 생명인 거에요. 파라쿠오가 박살나는 거에요 이제.

 

그러니까 정죄의 근거가 되는 그 순종과 불순종은 그 들음의 문제인거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잘못 들음의 존재, 율법의 존재로 이땅에 와요. 그러나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죄와는 이미 무관한, 그런 결국을 탑재하고 오는 거에요.

 

에베소서 1장 4절 보세요.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됐데요. 그리고 여러분은 거룩하고 흠이 없다네요. 과거 완료 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왜 이 세상에, 호코스모스 세상에 내려 오냐고? 그냥 거기에 나두면 되잖아요. 이미 창세전 이라는게 뭐에요? 생각 밖의 시간이지요? 생각 밖의 시간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기도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가 그것 밖에 없으니까. 생각 밖의 시간, 이시간이 아닌거. 영원, 아이언 이라고도 하지만, 그때 다른 차원의 거기에서 이미 우리는 아들이 됐고 흠이 없고 거룩한 자가 되었다 그러네. 그런데 이 죄 뿐인 이 모형인 세상에 그 진리, 내용만 있는 거기에서 껍질이 세상에 껍질을 입고 내려와서 , 아- 이게 아닌게 그거구나!를 배우고 가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게 아닌게 그거구나!

 

그런데 이거에서 그냥 머물러 버리고, 이걸로 일희일비하고 여기서 희로애락을 찾으면 어떻게 되지요? 그걸 멸망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그 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죄없는 이가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 받는거에요. 그냥 단순히 우리 모두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셔서 우리가 무죄한 자가 되었다는 식의 그냥 그 내 밖의 예수를 무작정 믿어 버리면 안돼요. 그건 믿는게 아냐. 그냥 객기이고 바램이고 원함이지 그걸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피스티스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은 신실 하시다, 하나님은 믿음 이시다라는 말이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그 단어가 피스티스가 뭐냐면,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의 수준에서 차례차례 번제단 물두멍 성소 떡상 향단 촛대 지성소 법궤 이렇게 차서로 차례차례 설명해 주면 진리와 체계의 차서를 피스티스라 그래요.

 

근데 그게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믿음이시다 ! 그러는거에요. 근데 이걸 티데미 되어 있는걸 횡으로 서있는 이것들 놓아둔 이것들을 통하여 아- 그게 그거구나 이게 진리구나, 하나님 이라고 알게 되면 그게 피스토스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오미크론 씨그마가 그 뒤에 붙어 버리면 그걸 마음으로 가진 나, 그게 되어진 나에요. 그걸 우리의 믿음이라고 그래요. 피스토스.

 

예수의 이야기가 내 얘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아들 아닌 거에요. 사단 마귀 용서 사랑 온유 은혜 선물 이 모든게 나와 상관없이 내 밖의 지식으로 와 있으면 그건 그냥 관념일 뿐이에요. 나와 아무 상관 없어요. 그럼 그건 신기루 라니까요. 아 그 사랑, 그 온유? 근데 뭔지를 몰라요 자기가. 그냥 국어 사전이 정의 해 놓은 드라마가 가르쳐준 그런 것으로만 아는거에요. 그 사랑 그 온유 이렇게. 그 모든건 내 안에서 찾아지고 적용되어지는 거에요. 그래야 내 구원과 관계있어요.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위에서 보셨듯이 우린 이미 하나님이 창세전 선택에 의해 구원 받은 아들들입니다. 맞습니까? 네. 창세전이란?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기 이전입니다. 그건 우리의 이 생각 밖의 시간이므로 거기에는 순서도 없고 기다림이 없고 흐름이 없어요. 그래서 발전이나 성숙이 없어요 왜? 그 자체로 완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가 그랬죠? 거기다가 뭐 보탤거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이 다 하셨으니까. 그게 시간 밖의 영원, 아이언, 영원이라는 거에요. 그럼 이미 완성이라는 거에요. 다른 차원에 완성돼 있는 존재가 진리인 여러분 이란 말이에요.

 

모세 바울 요한이 진리를 통하여 그걸 본 거지요? 아- 완성이야? 그래 그거를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보자가 성막 이었잖아요. 아 그거? 삼층천에 갔더니 그거?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거? 하고 그거 전하러 다닌거에요. 바울이. 요한. 아- 완성되어 있는 그거? 하늘의 진리로 보니까 그거는 거기에 이미 완성된 거네. 그러면 죄, 악 이게 나랑 무슨 관계야? 그건 완성이네 하고 쓴게 요한 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완성되어 있는 거기가 그때 당시에 요한이 갖고 있는 어떤 지식이나 배경이나 이런 것으로 그려진 거에요. 그걸 알고 그걸 본 이들이 전하고 다녔을때 아- 그거요? 라고 받아드리면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네! 그러면 그거 원래 내꺼 아니었네. 나는 아들이네. 거기에 완성돼 있는 12 대문, 12 지파, 12 사도, 그 이름이 나네! 그 아들이네, 내가 하나님의 신부 맞네. 오직 그분의 은혜에 의해서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완성된 아들 나네! 그러면 이 호코스모스 세상 속에서의 죄나 나의 행위의 모든건 그 완성과는 아무 무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 때 내가 구원 받았다 라고 하는 거에요.

 

진리이신 주님이 바로 그러한 존재에요. 시간 밖에서 완전한 존재로 살아 계신 분이 주님 이지요. 근데 그 분이 시간 안으로, 피조세계 안으로 들어오세요. 성경은 이세상 모든게 하늘의 진리를 설명하는 그릇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만물에 하나님이 들어 있어. 그 분의 능력과 신성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그런단 말이에요. 모든 천지 만물에.

 

따라서 하늘의 존재는 이세상 만물 속에서 하늘의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불가에도 석가성불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란 말이 있다 그랬죠. 석가, 석씨가, 석씨 성을 가진 이가 성불을 했어요. 부처가 되니까 모든 것에 부처가 있네! 이런 말이에요. 근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구약 밖에 없어요. 그들이 갖고 있는 진리의 내용 중에 성경과 흡사한게 굉장히 많다고 그랬지요? 왜? 어차피 말,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창조주 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종교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들것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원래 말은 하나라니까요 진리는 .그런데 그들에게 없는게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요. 진리로 완성이 되는 신약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산천초목 동시성불 이라고는 하는데 그거가 뭔지를 몰라요. 스님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그거가 뭔지를 몰라요. 거기까지는 너무너무 말을 잘해주셔. 근데 그거가 없어요.

 

그거를 야보라는 사람이 <금강경 오가해>라는 책에다가 산시산 수시수 불재하처 이렇게 써 놓은 거에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어디가서 부처를 찾냐? 야 모든게 부천데 산과 물이라는 difference 그 다름이 무슨 상관이야? 이런 말이에요. 뭔 상관이야 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뭔지를 제대로 몰라요. 그 진리가 뭔지를 몰른다니까요. 엉뚱한 것으로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진리가 뭔지를 알지 못하고 수행생활 같은것에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불교 신자에요. 교회에 와 있는 불료 신자. 차치하고, 성경은 그렇게 이세상 만물 속에 하나님과 하늘의 진리가 내용으로 담겨져 있다 그래요. 내곁에 있는 남편, 내곁에 있는 아내, 그들의 성품, 내 자식, 내 직장, 내 눈에 보이는 저 산, 저 물, 모든게 다 진리를 설명해요, 하나님만 설명 한단 말이에요.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피조물이야 이거. 그걸 설명 한다니까요. 근데 그걸 그냥 그 껍데기로만 보면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은거야. 거기서 벗어나는 거에요. 자 그렇게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천지만물을 그냥 그 껍데기로만 봐 주면 그 안에 있는 진리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나는 그거 아닌데 왜 나의 껍데기만 보고 그래. 이럴꺼 아닙니까?

 

 

로마서 8장 19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아포칼립씨스가 ‘드러나다, 원래의 것으로 밝혀지다’에요. 어디 저기 있다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와 있는데 그들이 원래의 것으로 나타나면, 아포칼립씨스,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 이니라.

 

그들이 이렇게 껍데기를 갖고 진리를 안에 품은채 이 세상에 와 있는거, 이 썪어짐에 종 노릇을 하고 있는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거에요.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그 모든 피조물이 내가 진리인데, 왜 나를 진리로 봐 주는 이가 없어? 내가 진리라는 걸 누가 이야기를 해 줘야 거기서 벗어나는 거에요. 누군가 와서 개구리 왕자에게 뽀뽀를 해 줘야 얘가 왕자가 된다니까, 진짜 왕자였던 개구리가. 근데 그건 하나님의 아들들만 할 수 있어요. 그 성전을 말해 주는 그이. 벤, 그이만. 그러니까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거에요. 나를 왜 이걸로만 봐, 껍데기로만 봐. 내 안에 그 하나님이 있잖아. 그 내용이 있잖아 라는 얘기에요. 그걸 영광의 자유라 그래요. 확 풀려나면 껍데기에서 벗어나는걸.

 

22 피조물이 다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여기서 양자는 입양 아닙니다. 아들로 세우는거.)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 껍데기 벗는거 우리도 기다리는 거에요. 왜? 여전히 이거 입고 있으니까. 근데 자꾸 얘한테 지네 그러니까. 로마서 1장 19절을 보면 모든 천지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들어가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예쁘다 더럽네 추하다 아름답다 깔끔하다 이렇게 그 껍데기를 보고 그들을 평가해요. 그럴때 아니 그게 이야기 하고 있는 뭐가 있잖아. 그걸 봐야지 그걸 보고 누가 너한테 아름답다, 추하다 이거 평가 해달래? 모든 만물이 그런다는 거에요. 상징적인 얘깁니다.


진리는 성도는 그걸 보는 이들 이라는 거에요. 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납니다.

그들도 역시 율법에 의해 정죄될 수밖에 없는 자로 이땅에 오죠. 근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요. 그리고 그들안에 진리가 담깁니다. 그들은 이제 그 모든 자연과 만물 안에서 진리를 읽어 내지요? 그때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다 그러는 거에요. 근데 그걸 아무도 그 내용으로 못봐 주면, 그 껍데기들은 어떻해요? 끝까지 그것으로 존재해야 되는거지요? 그걸 멸망이라 그래요. 그걸 구속, 죄에서 벗어나는 구속 말고, 이 구속. 묶여있다 그러는 거에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도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진리로 자기를 보지 못하면 여전히 육의 몸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육의 부귀와 영화와 가난과 좌절과 실패와 성공등에 의해서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며 살게 돼요. 여러분, 그것 자체를 죄라 그래요. 그래고 그들을 정죄 받은 자 라고 하는겁니다. 근데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 오지요? 그리고는 껍데기인 세상과 육의 헛됨과 무용함과 가치 없음을 하나하나 폭로해 내세요. 그걸 도와 주는게 율법과 죄 라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에 정죄 라는게 이제 가입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어 그래? 그러면 그게 죄 있음이야 이렇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 섬김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그 율법과 성전을 통해 처절한 절망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요. 늘 슬프기만하고 고통스럽고 우울 하고 이런게 아니라 아- 나는 아니구나! 하나님 앞에서의 나는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이거를 내려간다 라고 하는거에요. 그 나라는 존재의 불가능함과 나 라는 존재의 덧없음과 그 나라는 존재가 쌓은 업적의 그 헛됨 등을 폭로 당하는 거에요. 


햐- 옛날에 그가 했던 그 일들, 얼마나 우리가 얼마나 멋있게 봐 주고 가치있게 여겨주고 칭찬해 주고 했습니까. 진리를 알고 나니까 아- 그거 아니었네. 이렇게 볼 수 있게 되는 거 있잖아요. 그렇게 육을 부정당한 이들이 진정으로 나를 살리는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런게 아니구나! 그런거 아니구나! 진짜 나를 살리는건 딴게 있구나!를 알게 되면 그들을 아들이라 그래요. 


존재를 존재 되게 하는건 절대로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그걸 알게 된 이들이 그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게 되고, 하나님! 그거 당신이 준다고 했으니까 주게요. 이게 아이테요 에요. 빚 갚으세요. 하나님! 나에게 주세요. 이게 구하라 에요. 아이테오, 제테요. 그럼 내가 줄게. 다 주께. 구하면 준다가 아니라 내가 택한 자들은 그거 구하게 되어 있단 뜻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과 연합된 그들. 그들이 하나님이 생명으로 그들 안에 넣어 주신 그 씨와 연합된 자손이잖아요. 씨란 단어 자체가. 제라, 그들이 아들 이래니까요. 씨를 가진자, 아들.



히브리서 11장 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증거는 받았어요 눈에 보이는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쫙 설명 하지요? 이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고 저사람들은 저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쪼다들을 어떻게 믿음으로 만드셨는가를 보여 주시는거에요. 그렇게 장황하게 나열하고는 그들이 전부 피스티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 그래요. 피스티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눈에 보이는걸로 차서있게 하나님을 설명하는게 피스티스입니다. 그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데요. 주었대요.

근데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그래요. 약속은 당연히 진리의 영이에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약속의 성령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똑같은 단어에요. 호 에팡겔리아. 약속이거든요.


호 에팡겔리아, 호 하기오스 푸뉴마 , 약속은 성령이다 이런 뜻이에요. 약속은 진리의 영이에요. 진리의 영.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약속의 실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내용 , 그 진리, 그 약속이에요. 에팡겔리아. 그들은 그것을 못 받았다 그래요. 잘 이해 하셔야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과 무관하게 구원 받았다는게 아니에요. 십자가 이전에 구원 받은이들도 진리, 성령의 영, 그걸로 구원 받은 거에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21장에서 진리를 아는 이가 되는 것처럼. 


근데 그때는 굳이 이야기 하자면 에피 성령의 시대라 그러지요. 엔 성령의 시대가 아니라. 에피 성령은, 물론 이게 이해를 위한 논리의 순서를 얘기 하는거에요. 에피 성령은 오순절, 신약의 오순절날 그 진리의 성령이 불의 혀, 말이에요,tongues, 이걸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 가셔서 그를 사용하시고 그를 진리로 나타내시잖아요. 그걸 에피 성령의 시대라 그래요. 


근데 그게 이제 때가 차서 카이로스, 어떤 의미있는 때가 딱 되어 버리면 그때 성령이 교회 위에 완전히 뿌려지고 그때 부터는 안 나간단말이에요, 엔 성령의 시대가 오는 거에요. 안에 진리의 성령이 들어오는거요. 이게 상징적인 이야기란 말이에요. 구약 때도 그 성령은 그 안에 들어가서 안 나가시는 거에요. 그 진리의 말씀은. 그 마음이 되어 그가 구원 받는거란 말입니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 깨달음과 증거에 의해 아- 저거 진리였구나! 라고 나타나는 것처럼,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 진리로 완성이 되어 그 아들이 되었다 라는건 진짜 그들이 이야기 했던 약속의 때에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은 교회가, 성도가, "그래 구원은 이렇게 해서 받는거야!" 라고 증거를 못하면, 그들은 전부 가짜가 되는 거란 뜻이에요. 그 약속의 때가 왔는데, 그렇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아들이 된 이가 없다? "니들은 뭐니? 가짜네?" 이렇게 되는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들이 온전치 못하다 라는 거에요. 


근데 이 카이로스의 때에 어 진짜 불의 혀같은, 말, 진리가, 영이 안에 들어오더니 진리가 되어 그걸 마음으로 가져 그 하나님을 알고 그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어떤, 그 언약의 인물이 되어 버리는.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 났어요. 그리고 이게 바로 그들이, 구약의 그들이 설명하고 간 내용이다라고 얘기해 주면 그들이 온전한 이들이 되는거에요. 아니면, 이들은 거짓말 장이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들이 이야기 하고 간 게 이건데 이렇게 완성된 이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더 쉽게 이야기 할게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에녹, 엘리아, 엘리사, 사라 이런 인물들이 구약에 우리가 존경하고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이,- 여러분 다 배웠잖아요.- 전부 진리를 설명하고 간 분들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야-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바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하여 자손이 자자손손 복을 받게된 아브라함! 

아버지에게 목숨도 아깝지 않게 자기 목숨을 바쳐 효가 무엇인지를 이땅에 보여주고 간 이삭! 

하나님과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에게도 지지않는 기도와 간구로 축복을 얻어낸 야곱! 

열심히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아와 에녹! 


뭐 이런식으로 이해를 하면 그들이 그럴꺼란 말이에요.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니들이 생각하는 그게 내가 아니라구! 내가 삶으로 살고가고 내가 내 이름으로 , 내 입으로 설명한건 그게 아니야! 근데 어떤 이들이 나타나서 아-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는거고, 이삭은 바로 그 예수를 설명한거고, 야곱도 바로 그 야곱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는지? 그 구원의 순서를 우리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 준거고. 에녹이나 엘리아도 그렇게 하나님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버리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된다라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라는 , 그런 내용으로 설명이 된 존재라고 알아주면 , '그래! 그게 나야!' 하는 그들이 온전하게 된다라는 얘기에요. 더 나아가 볼까요?


하나님, 하나님이 진리를 이 호코스모스와 세상으로 설명을 하고 계세요. 그리고 말씀, 성경, 예수를 통하여 그게 뭔지를 설명하고 계시네요. 근데 사람들이 그걸 못 알아먹고 그분은 하나님이고 내가 피조물이라는걸 못 알아먹고, 그분은 고진감래로 우리를, 인과율로 우리를,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 그런 하나님이야! 라고 우리가 오해하고 있으면, 우리의 행위나 열심과 노력에 의해 우리에게 상선벌악 하시는, 권선징악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 훌륭하게 성숙되자! 이렇게 알고 있으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은 다른 이야기 하고 계시잖아요 말씀으로.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거예요. 하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들을 도둑이요, 강도라고 하는거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훔쳐다가 엉뚱하게 써 이렇게.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러는 거에요.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구원 받지 못하면 영원히 감추어 진다. 불경한 소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서 구원 받아야 된다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그 하나님을 올바로 설명해 주기 전에는 그건 사람들,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구원 못받은 하나님 이라고 이야기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진리를 안에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얼마나 소중한 거겠어요? 그 하나님이 오해 되어지지 않는 세상, 그런 교회 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냐구요. 성경이 그 이야기 하는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육신을 주시고 그게 아닌게 바로 나야 ! 라고 설명을 하시고자 하는거에요. 그래서 이세상과 율법과 옛 성전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되는거죠?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허물어지는 거에요. 돌로 오신 예수, 돌이 뭐에요? 하나님이 계명을 써준 그 돌, 그 돌은 완전히 박살나는 거에요. 근데 그 성전이 진짜 언제 박살났어요?  AD70 년. 완성, 안식의 때에 타이터스가 완전 박살내 버렸다니까요. 그리고 금은 다 뽑아 갔어요. 진리가 없는 그냥 흙으로 된 성. 그걸 증명해낸 거에요. 


소문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벽돌을 만들때 거기다가 금을 다 깔았다고 소문이 나갓구요, 이 로마사람들이 와 갔고 그걸 다 부셔 버렸어요. 금 찾을라구. 자- 그들이 법계는 그냥 뒀을까요? 안에 있는건 관심도 없어. 금 홀랑 베껴 갔겠지요? 근데 그 법궤 왜 찾으러 다니냐구. 그게 아직 남아 있을거 같으세요? 그 사람들이 금 다 베껴갔다니까요 그 때. 그리고 그 법궤가 바로 나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건데 내가 여기 있는데 그걸 왜 찾으러 다니냐구! 섬길라구 그러는거에요. 그거 갖다놓고 제사 지낼려고. 신기하다! 빌면 뭐 주지 않을까? 하고!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가 그걸 다 설명하고 있다니까요. 자-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그 율법에 의해 맞아 죽으시는 거에요. 주님은 당신이 바로 진리며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러면 진리와 생명만 남고 율법으로 입고 있는 껍데기는 죽어야 되잖아요 .그렇게 율법에게 자기 육신을 내 주시지요. 죄의 모양으로 온 육신, 정죄 받은 육신은 거기서 죽는 거에요. 그럼 죄와 상관없는 자. 그리스도가 되는 거에요.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일 이란말입니다. 잠시 죄를 체휼하기 위해 입고 온 육, 그게 죄의 모양 이에요.


그 육이 언약의 기둥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자 진짜 생명인 8 팔의 날에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거에요. 우린 그 죽음이 다나토스의 죽음임을 배웠습니다. 그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이 곧 예수의 죽음이에요. 나도 아들, 예수도 아들. 같은 아들인거에요.

내 머리, 한 몸 이라는 뜻 이에요.


그러한 십자가의 진의를 재대로 인식을 하면 예수가 하신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내 관점이 Shift 되는거에요. 어디로? 나에게서 일어날 죽음으로. 예수가 날 위해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날 죽음으로 관점이 shift 되는거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구요.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삼일교회에 가서는 요 앞에꺼 까지만 할려고 그래요 뒤에꺼 까지는 못알아 들을꺼 같애서.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뭐였어요? 제가 비유 때 설명해 드렸지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요. 율법사가 나오지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에요. 


율법 대장. 율법사가 와서 묻습니다. 내가 알기론, 율법이 알기로는 영생은 율법을 통하여 뭔가를 열심히 해야 얻는 것이라고 배웠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어? 이렇게 물었어요. 율법이 예수님에게. 은혜에게 묻는 거에요 율법이.

뭘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이 질문은 예수님을 떠났던 부자 청년이 동일하게 했던 질문 이었지요. 뭘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냐?


이러저러한거 쭉 얘기해요. 그거 해 그랬어요. 저 어려서부터 다 했어요. 주님이 그럽니다. 그러면 니가 그거 다 했다고 하는데 니가 가지고 있는걸 가난한 이에게 다 주고 와봐 그래요. 거기서 가난한 이가 푸토코스 에요. 푸토코스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 성령안에서 그거 없으면 나는 죽는 자.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도 이 가난을 채울 수 없을 때, 페네스 라는건 내가 돈을 벌어서 어떻게 하든 그걸 쪼금이라도 메이크업 할 수 있으면 그건 푸토코스 아니에요. 근데 나에게는 방법이 없는 가난 있지요? 절대적 가난. 이게 푸토코스 란말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이 그 단어를 쓰신다니까요. 너 율법 다 지켰다며? 그러면 그 율법은 곧 사랑을 이야기 하는거다. 그러면 그 사랑, 푸토코스한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거 주면 그가 살거든! 그럼 니가 다 지켰다고 했으니까 그거 주고 와봐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그는 율법을 율법으로 지켰잖아요.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푸토코스한 사람에게 줄게 있다? 없다? 없어요. 그러면 그를 부자 라고 하는거에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는 부자.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자에요. 그 부자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 내가 문인데 못 들어가. 어떻게 나를 쫓아 라고 한거지요. 똑같애요. 


율법교사가 은혜의 주님께 묻습니다. 뭘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돼 있니? 그랬더니, 얘기 했어요. 사랑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 더 나간 거에요 그 부자의 이야기에서. 이 사랑 이야기 한거에요 하나님이. 너 율법으로 그 사랑 갖고 있어? 그럼 줘봐. 못 줬어요. 여기서는 율법사가 정확히 이야기 합니다. 예 사랑입니다 율법은요. 그래? 그러면 그거 해.

그랬더니 내 이웃이 누굽니까? 가르쳐만 주세요. 사랑 가서 주고 오께요.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율법사에요. 그러면 율법사가 가진 사랑은 뭐에요? 베드로식의 사랑이에요.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식의 사랑. 내가 목숨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의 그 사랑. 그래? 니가 그 사랑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거야? 이 이야기는요 그 부자 청년에게 너 가서 가난한 자 푸토코스에게 니가 가진 사랑 한번 주고 와봐. 이말이랑 똑같은 말이에요. 너 사랑 할 수 있어? 그럼 그거 해! 그랬다니까요. 그랬더니, 그래요? 이웃을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그 율법사가 말하는 이웃은 뭐에요? 푸토코스의 이웃이 아니라 페네스의 이웃 이겠지요. 그냥 진짜 가난한 자. 그 이웃. 그에게는 율법이 해 줄 수 있는게 있잖아요.


진짜 세상의 구제, 세상의 사랑, 세상의 관심, 율법이 줄 수 있는거, 줄 수 있다니까요. 누가 이웃 입니까? 그랬어요. 그때 주님이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주는 거지요.


이 비유의 주인공인 사마리아인 이라는 단어의 의미. 이거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마리테스는 히브리어 쇼므론에서 온 단어거든요. 근데 사마르가 기본형인데 그 단어가 깨어 있는 자, 파수꾼, 울타리를 치는 자에요. 울타리가 뭐냐면 예루살렘 성벽 있지요? 안과 밖을 나누는거 거든요, 구별짓는 자. 좋은 의미에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사마리아인이 누굽니까?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멸망 돼 가지고 피가 섞여 버렸지요? 유대주의 에게 유대주의 밖에 이방적인 것, 이것 아닌 어떤 것의 피가 수혈된 거에요. 근데 누가? 유대인이 이걸 보고 개라 그랬다니까요. 좋은 거에요? 나쁜 거에요? 좋은거라구요 이게 성경에서는. 그래서 항상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대조 되어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항상 개라고 욕 먹는다니까요. 그래서 거기로 지나다니지도 않아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율법주의가 진리의 땅을 지나다니겠어요? 깨어있는 자들의 땅을 지나 다니겠냐구요. 그 얘기 하는 거에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 되냐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간다 그래요. 카타바이노, 예루살렘은 야라와 샬롬의 합성어라 그랬죠. 그러니까 평강, 평화, 에이레네를 가리키는 거에요. 그걸 가르치기 위해 가리킨게 성전 이었죠. 예루살렘 이었죠. 예루살렘이에요 그게.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인 거에요. 그게 내려 왔어요. 어디로? 예리호, 여리고로 내려 왔어요. 예리호는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를 가리키는 거에요. 달, 달, 예리호가. 하나님 이라는 그 분이 있어요.근데 그 분은 피조세계가 담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그 분이 존재 한다는걸 어떤 존재가 담고 내려왔어. 그 하나님을 담고 내려온 하나님. 그러나 그 분은 아닌데 하나님을 담고 왔어요. 이 분을 알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거야 라고 얘기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분을 보면, 달을 보면 해가 있다라는걸 알듯이. 이 분을 보면 하나님을 아네. 그래서 하나님입니다.

 

예루살렘이 카타바이노, 내려와요. 어디로? 예리호로. 달,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에요. 그 발광체는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 눈이 멀어 버려요. 저기 있는 그 분! 자- 예루살렘에서 예리호로 어떤 분이 내려 오는 거에요. 거기에서 생기는 일이란 말이에요. 근데. 예리호, 여리고 라는 이름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주 특이한 사건이 여리고에서 3번 일어납니다.


처음은 당연히 여호수아 2장에 하나님이 시킨말을 그대로 외쳐서 철옹성 같은 성이 안에서 밖으로 무너져버리는 그 사건요. 역사서를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요 보통 성은 밖에서 부수고 들어가기 때문에 밖에서 안으로 넘어 지잖아요? 근데 이 성이 역사서에 안에서 누가 민거처럼 안에서 밖으로 무너졌데요. 누가 밀었을까요? ^^

무너졌어요. 어떻게? 말에 의해 무너져요. 그들이 어떤 행위도 못하게 하세요. 망치질 한번 못하게 하세요. 하나님 힘든데, 안에서 밀기 힘든데, 내가 도와 주께요 라고 깨면 안돼.

그냥 외치는 거에요. 그 말을 외치는 거에요. 그 함성에 무너짐니다.


2번째가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쓴물을 소금, 언약이지요, 소금을 쳐서 단물로 만들어요, 진리로 만들어 내지요. 언약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아- 이게 단물 이구나! 율법이 진리가 되는게 여리고에요. 


신약에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누구를 만나요? 소경 바디메오를 만나요. 바는 아들이에요. 바라바 하면, 아버지 아들, 가짜 아버지 아들이에요 그거는.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와서 가짜 아버지 아들 대신 죽는거에요. 그래서 바라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는거지요. 바가 아버지에요. 디메오는 더러움, 어두움,이런 뜻이에요. 더러움의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내가 더러움 이라는걸 알아요. 그래서 내가 그 분의 긍휼의 여기심을 못 받으면 나는 죽는다는걸 알아요. 그래서 바디메오가 뭐라고 그러냐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래요. 내 눈 좀 띠어 주세요가 아니에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신의 긍휼이 없으면 나는 죽습니다.라고 더러움의 아들이 이야기 하니까 그의 눈이 떠지는 거에요. 그래서 호라오 하게 되는거지요. 여리고는 그런거에요.


자- 하늘의 샬롬이, 예루살렘이 이땅에 그걸 가르치기 위해 카타바이노, 내려옵니다. 뭘로? 예리호로 내려와요.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에요. 예수님의 성육신 생각하면 돼요. 내려오는데 그걸 어떤 이는 알아보고 어떤 이는 못 알아보는 이야기에요. 이거는 우리의 이야기로 제가 설명해 드렸지만 똑같이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라니까요. 한 번 보세요. 그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사람이 예리호로 내려오는데 강도가 나타납니다. 자- 강도는 뭐지요? 수없이 들었으니까 이제 알지요? 율법주의의 바리새인,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에요. 한 군데 찾아 드리죠.



호세아서 6장 9절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 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이스라엘집이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이 강도떼 제사장들이 사람을 오히려 죽이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옛성전을 하나님이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른거죠.



요한복음 1장 1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다.


자- 다른데, 알라코덴, 반대편에서 넘어가다, 이게 나타나다에요. 예수님은 문으로 밖에서 들어가지요? 그래서 그들을 건져내야 되니까. 그죠? 근데 다른데서 나타나는 자는 누구에요? 안에서 나오는 놈들이에요. 담치기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자, 제사장 밖에 없어요, 레위인 하고 제사장 밖에 못 들어간다니까. 그 들이 뭐라고 그래요? 절도며 강도라 그래요. 그리고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전부 절도며 강도다 그러죠? 또 예수님 보다 먼저 온게 뭐에요? 율법. 절도며 강도. 


하나님이 진리를 담아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율법주의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그 하늘의 진리를 두들겨 패서 완전히 죽여 버려요. 거기서 거반 죽었다라는게 그냥 죽었다에요. 근데 왜 거반 죽었다고 그러냐면 죽었는데, 아주 죽지 않은거, 이상한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부활을 전제로한 죽음이라는 뜻이에요. 거반 죽은거. 거기를 레위인과 제사장, 아니나 다를까. 이 둘이 지나갑니다. 근데 절대로 거들떠 보질 않아요. 왜? 율법주의는 진리를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너무 나약해 보여. 너무 인간의 자존심을 묵살하는것 같애.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사마리아인, 깨어있는 자라는 어떤 이가 오더니 어- 저 죽음이 뭐야? 하고 그리로 가는 거에요. 저 죽음이 뭐야? 그러더니 어- 이게 진리구나 라고 깨달아요, 어떻게 알아요? 기름 포도주 뭡니까? 말씀 이잖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포도주는 생명, 기름은 진리, 그걸 그 분의 죽음에 붓는다 그래요. 상처라는 단어가 트라우마 거든요.

 

트라우마는 사실 19세기에 프로이드가 만든, 의미를 부여한 말인데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

19세기에 나오는 단어고, 트라우마는 그냥 상처에요. 어떤 상처냐면? 죽일라고 때린 어떤 사람에 의해 입은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해요. 헬라어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죽일라고 한거요. 율법이. 


근데 그 죽음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렇게 되면 진리를 깨달은거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죽음이 내 죽음 이라는걸 아는 거지요 이제. 어- 그 죽음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이렇게 된거지요. 그러면 내가 그 예수 죽인거 맞네요. 그래서 자기라는 짐승위에 그를 태우고 그래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들어가실 때 뭐 타고 갔어요? 새끼나귀! 그 짐승을 붉은빛 짐승, 나귀라는 단어 자체가 뜻이 붉은빛 짐승이에요. 근데 붉은빛 짐승, 붉다라는 단어는 성전을 붉게 칠했지요? 그리고 아담이라는 단어가 붉다 라는 뜻이거든요. 흙으로 만든 붉은 흙. 죄에요 죄. 


그래서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 라는건, 성전, 인간, 호코스모스 이세상은 죄 덩어리라는 거에요. 거기에 그들을 살릴 예수가 타고 그들이 되어 죽으러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가, 원어에 보면 자기라는 짐승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자기라는 짐승에 그 분을 태우고 가는 거에요 성전으로.

뭐하러? 죽이러. 그 예수가 죽어야 그가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이러 가는거에요. 마찬가집니다. 성도가 이 땅에 아들로 와요. 아들로 오는데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해요. 어- 나 아니네! 이렇게. 그지요? 예수님이 그대로 보여 주는 거에요. 강도 맞는거에요. 율법에게 죽어 가지고. 


다나토스의 죽음이 그 죽음이라니까요. 거반 죽어. 거반 죽어야 그 사마리아인이 보이는거에요. 율법이 죽어야, 율법이 살아있으면, 자기가 개 취급하던 사마리아인이 다가 왔을때 절대 못 만지게 합니다. 근데 내가 그 율법에 의해 맞아 죽어 트라우마가 생기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 때 은혜가 그를 만질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진리로 붓지요 우리에게. 그리고 율법, 짐승으로 오신 그 분이 나를 태우고 나를 죽이러 가시는 거에요 , 어디로? 십자가로. 


내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 라니까요. 그러면 그 일을 하러 온 그 예수,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정죄 받은, 카나크리마의 그 예수, 그에게 내려진 정죄라는게 나쁜거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잠시 그 죄인의 과정, 이걸 겪기 위해 정죄되는 그 과정속에서의 그 정죄가 뭐 대단하게 나쁜겁니까? 그래야 여러분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까요. 그게 아무것도 아니어야.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가서 너도 이같이 해라. 너도 죽을꺼야 이런 뜻이에요. 먼저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아라. 그러면 너도 그렇게 될꺼야. 그러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걸 알았는데 정죄가 나에게 뭘 할 수 있냐구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되지 않는다 그러는 거에요. 심판의 정죄. 없어지는 거에요 이제. 아예 없어지는 거에요. 왜? 그게 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걸 복음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기쁘세요 그게? 복된 소식인데? 그게 기쁘셔야되요. 그게 예수 믿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정죄도 사실은 우리를 의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군요.

하나님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위축돼 살았습니다. 너무 갖혀 살았습니다. 하나님! 자유하게 하옵소서. 그 자유가 전염되어 정말 기쁨의 함성이 터지는 서머나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