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76 비진리라는 특수포자충의 숙주조정, 치사율 100%
롬7:13-8:2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설교제목은 영화광고 카피를 패러디해서 붙였습니다. ‘연가시, 치사율 100%’ 이런 광고 보셨죠? 최근 이 영화가 개봉되면서 일반인에게 기생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기생충은 숙주 안에서 숙주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불한당 같은 벌레죠.
기생충은 단순히 숙주 안에 살면서 그 숙주의 영양분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숙주의 유전자까지 조작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생충이 숙주의 몸에 들어가서 자신이 유리해게 숙주의 행동양상을 바꾸는 걸 ‘숙주 조정’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댕기열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기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모기의 후각을 더 강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번식을 꾀하는 기생충도 있어요. 능력도 주는 겁니다. 또, 특수포자충이란 기생충은 감염된 쥐의 뇌를 조종해서 쥐의 두려움을 없애버려 고양이에게 쉽게 잡혀먹게도 합니다. 고양이에게 당당하게 서있는 쥐는 기생충에 감염된 쥐라고 보면 됩니다. 종숙주인 고양이에게 가기 위해서 기생충이 뇌로 들어가서 그렇게 명령하는 겁니다.
원래 쥐는 고양이의 소변냄새에 강한 공포를 느껴요. 그런데 특수포자충에 감염이 되면 그 냄새에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일명 고양이 기생충이라고 해요. 학자들은 그 특수포자충을 ‘Fatal attraction 치명적인 유혹’이라고 해요.
창형흡충이라는 기생충은 소나 양이라는 종숙주에게 들어가기 위해 개미의 뇌를 조종해서 개미로 하여금 풀잎 끝에 머물게 합니다. 그걸 양이 먹으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참고1. 창형흡충은 주로 양의 담도에 기생하는 흡충의 일종이다. 양의 담도에서 무럭 무럭 자라난 흡충은 양의 대변을 통해 알을 배출하고, 이 알을 지나가던 달팽이가 섭취한다. 달팽이 안에서 알껍질을 벗고 유충으로 성장한 창형흡충은 달팽이가 기어다니면서 흘리고 다니는 점액(slimeball)을 통해 또 다시 배출된다. 이 점액질은 다시금 개미의 먹이가 되고 이때 개미가 감염된다.
개미 안에 있는 창형흡충의 유충 백여마리 중 단 한두마리만이 개미의 신경절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신경절에 자리 잡은 유충들은 개미를 ‘조종’해 최종숙주인 양에게 잡아 먹히기 쉽도록 온도가 낮아지는 해질녘에 풀 끝에 매달린다. 그리고 낮에 해가 떠 다시 몸이 덥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이는 가축들이 주로 풀을 많이 뜯는 아침/저녁 시간에 잡아먹힐 확률을 높이고, 더운 낮에는 말라죽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참고2. 초원에서 개미 한 마리가 풀잎을 타고 열심히 기어오른다. 개미는 높이 더 높이 오르다 결국 떨어지고,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매번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개미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개미는 이 고되고 헛된 행위를 통해 무슨 이익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지금 개미는 예를 들어 영토를 더 잘 굽어보거나, 먹이를 찾거나, 잠재적 배우자에게 과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뇌는 창형흡충이라는 작은 기생충에게 점령당했고, 그 기생충은 번식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양이나 소의 뱃속에 들어가야 한다. 이 작은 뇌 기생충이 개미의 자손이 아닌 자기 자손에게 이득이 되는 위치로 개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물고기와 생쥐를 비롯한 다른 생물 종들도 이처럼 행위를 조작하는 기생생물에 감염된다. 이 편승자들은 자신의 기주생물로 하여금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주생물이 아니라 기생생물의 이익을 위해서다. (<자유는 진화한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고, 기억엔 도킨스 또한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명한 사례다. )
[출처] 창형흡충과 개미|작성자 아니]
그런데 창형흡충 중 한 마리만 개미의 뇌로 가서 개미를 조종하고 나머지는 몸에 머물러 있다가 양에게 먹힐 때는 뇌속의 기생충만 죽고 나머지 기생충들은 양의 심장(담도?)에 들어가 영원한 양식을 얻습니다. 진리를 담고 있어요.
체코의 플레브르에 의하면 특수포자충이란 기생충에 감염이 된 사람의 자살률과 교통사고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게 특수포자충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성격과 성품에도 영향을 끼치고 우울증에 걸리게도 한 대요.
특수포자충은 고양이 앞에 당당한 쥐처럼 사람을 극한의 공포 앞에서 당당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행위나 성품이나 성향, 업적이 꼭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뭔가에 지배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찮은 기생충에 지배가 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니 (사람의 행위를)너무 믿지 마세요. 타는 풀무불 앞에서, 사자굴에서 그런 거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생충에 감염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종이라고 표현해요.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이거나 의의 종, 둘 중 하나인 겁니다. 그렇게 숙주를 조종하며 숙주 안에 기생하는 게 기생충만 있나요? 임신한 어며니의 뱃속에서 10달동안 기생하면서 어머니의 식성까지 바꾸는 아기도 마찬가지로 기생입니다. 아이들이 뱃속에서 뭘 해요? 일 해서 먹고 사나요? 어머니 것 빼앗아 먹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입덧을 하는 겁니다. 그 아이가 먹고 싶은 걸 먹는 겁니다.
그런데 숙주를 조종하는 정말 무서운 게 바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숙주는 멸망의 벼랑에 서서 그 멸망을 기다릴 수도 있고, 은혜의 길에 서서 은혜를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 숙주 안의 말이 그들을 멸망의 먹이로 세우기도 하고, 은혜의 수혜자로 세우기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말은 우리가 가진 세계관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에 충만하세요. 나는 천지 만물에 충만하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몸까지도. 그걸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어떤 말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그냥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보느냐, 그 껍데기에 가치를 두느냐, 아니면 내용을 보느냐, 여기에 따라 세계관, 가치관이 바뀝니다. 그게 내가 어떤 말을 가졌느냐는 것과 같은 겁니다. 왜? 그 하나님, 천지 만물에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가 어떤 말을 가졌는가? 물론 그 안에는 성경과 예수, 인생과 역사, 모든 게 포함됩니다.
이렇게 어떤 말을 가졌느냐에 의해서 그 존재의 결국이 결정됩니다. 당연히 존재는 그 말에 종속되어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그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런데 바른 복음, 바른 말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실 멸망의 벼랑에 서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그들이 가진 말이 그들을 멸망의 벼랑에 세워놓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한 멸망이 그들을 삼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다 선과 악의 두 부류로 분석이 되고 구별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도, 계명도, 죄도, 어둠도, 성전도 나쁜 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7장에서 그걸 깨고 있는 겁니다. 그 나쁜 말, ‘프뉴마 다이모니온’이 ‘악한 영, 귀신’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그건 말 그대로 ‘나쁜 말, 악한 말’입니다. 그걸 깨는 겁니다.
너희들이 성도라면, 너희들이 나쁘다고 알고 있는 그것이 너희 안에서 해놓은 일을 한 번 보라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계속 표피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그 말씀이 너희를 죽일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성경 때문에, 말씀 때문에 진짜 죽음으로,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거기엔 약이 없어요. 치사율 100%입니다. 7장에서, 제발 거기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겁니다.
차라리 예수 안 믿는다고 하는 무신론자나 타종교인, 불가지론자들이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더 높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율법주의를 붙들고 있는 이들은 방법이 없어요. 전도가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서 탈출해 오는 이들도 있지만 그 저주의 기생충, 비진리라는 기생충을 토해내지 못하면 그건 반드시 성충으로 완성되는 날에 중간숙주를 죽여버려요.
바울은 12절까지 율법과 죄와 계명이 우리 안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했어요. 그리고는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선언을 해요.
그 앞에서는 ‘다 죄다!’ 해놓고는 이제는 거룩하고 선하대요. 그러면서 오늘 본문 13절부터 본격적으로 그 죄의 실체와 효용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율법이라는 선한 것이 나로 하여금 다나토스의 거룩한 죽음, 완성의 죽음, 무트의 죽음, 그 죽음 죽게 만드는 건 나를 창피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가치없는 자로 폭로해내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만들어 주어서 그 죄의 대가로 주어진 나쁜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요.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 선한 게 단지 나를 사망으로 끝장을 내버리려고 나에게 왔겠느냐는 겁니다.
그 다나토스의 사망은 좋은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이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그 사망을 감지하게 될 때 세상으로부터 죽는 고통을 감지하게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 없음으로 폭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가 부정되고 삭제되며 자신의 세상적 꿈들이 폭격을 당해 풍비박산이 되는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의 최종 목적지는 그러한 게 아니란 겁니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어떤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13절이밝히는 그 죽음의 목적지가 뭡니까? 두 가지로 나오는데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리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해요. 그게 목적지래요. 그래야 생명이 온대요.
죄를 죄로 밝게 드러나게 해서 ‘파이노, 빛을 비추다’, 그게 뭔지 확 비추어서 그 죄가 진짜 뭘 이야기하는지를 확 ‘파이노’ 드러나게 해서 ‘죄로 심히 죄 되게’, ‘나’라는 존재를 다른 차원의 죄인(휘페르볼레 하마르톨로스)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율법이 나를 죽인 거라는 겁니다. 다나토스의 죽음은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다른 차원의 죄, 다른 차원의 죄인. 세상 속 아담들이 죄라고, 죄인이라고 합의하고 정의하고 규정한 그 죄와 죄인을 다른 차원으로 보게 해 주는 것, 그게 ‘회개, 메타노이아’라고 해요. 다른 차원으로 보게해 주는 것, 그게 율법과 사망의 최종 목적지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생명이다,라는 겁니다.
진짜 그 죄가 뭔지,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는 것, 진짜 죄와 그 내용이 뭔지를 알게 해 주는 것, 그게 목적지라는 겁니다. 다나토스의 죽음의 목적지가 거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차원의 그 죄, 다른 차원의 그 죄인이 뭘가요? 어떻게 보는 게 다른 차원의 죄로 보는 거고, 어떻게 보는 게 다른 차원의 죄인으로 보게 되는 걸까요?
요일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양심에 찔리지 않으세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아예 죄를 안 짓는대요.
그러면 우리는 전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닌 거네요. 늘 죄 짓잖아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는데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단합니까? 악한 자가 만지고 있는 것 같죠?
여기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나와요.
죄는 다 죄지 무슨? 종류가 다르대요. 그런데 한 가지 죄라니까요.
그런데 그 죄가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고,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된대요. 그런데 여기서의사망이 다나토스, 좋은 사망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는 죄가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그게 진짜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다나토스의 죽음, 완전한 자기 부정의 자리, 처음 자리 인식의 자리로 끌고 내려가야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죄가 좋은 죄입니다.
그런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그 죄를 짓는 자는? 그 자가 진짜 멸망에 이르게 되는 자입니다. 그게 뭐죠? 말씀을 보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안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게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죄입니다. 왜? 펄펄 뛰면서 희생제사 드린다, 율법 지킨다, 착하게 산다고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사망에 이르지 모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죄라고 하세요.
그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그러면 그걸 보면 뭘 하라고 해요?
구하라. ‘아이테오’ 구하래요. ‘빚 갚으세요.’라는 말이라고 했죠?
아이테오, 빚 갚으세요.
왜 빚 갚으라고 해요?
구하라 ‘아이테오’, 찾으라 ‘제테오’. 이게 뭡니까?
왜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요? 우리가 아직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이 스스로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할거야.’라고 했기 때문에 그분이 갚을 게 있다고 표현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요구하기도 전에 한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할 일이 있어요.
‘나는 말씀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그거 주세요.’가 아이테오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는 그 죄를 짓는 자들은 진짜 사망으로 떨어질 테니까 어떻게 하라구요? 구하래요. 그러면 그들이 뭘 받아요? 생명을 얻는대요.
그런데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게 된 자들은?
우리도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율법적으로 행하는 우리를 발견하잖아요.
죄 짓고 있어요. 그들을 위해서는 뭐라고 해요? 구하지 말래요. 왜? 그 죄가 결국 그를 죽여낼 테니까.
이미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라인에 서서 그 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고 있는중이니까. 그 사망에 이르는 죄의 그 과정 속에 있는 자는 결국 완성이 될테니까.
그걸 나중에도 죄라고 해요? 아닙니다. 그래서 18절에서 ‘그렇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그게 사망에 이르는 죄이기 때문에 그걸 죄로 여기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범죄치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들에겐 죄가 죄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다른 차원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다른 차원의 죄인으로 보는 겁니다. 결국 생명에 이를 죄인, 거룩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도덕적 윤리적 파렴치한을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여기 보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자를 성경이 범죄자라고 해요.
16절 보세요.
요일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그렇죠? 그들을 범죄자라고 해요. 생명이 필요한 자. 그들을 위해 구하라는 겁니다. 아이테오. 그러면 생명을 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게 다 죄인데 그 중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고,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죄로 생명을 알게 되면 그에게 그 죄가 무슨 해를 끼치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게 다 죄인데 그 중에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어요. 따라서 그 죄로 생명을 알게 되면 그에게 그 죄가 무슨 해를 끼치겠느냐,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그 죄가 그들을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이끌어서 생명에 이르게 해 죄가 죄 아닌 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원리를 14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인 겁니다. 신령하다고 해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그런데 나는 육신이네요. 그러니까 그 신령한 율법을 나에게 줘봐야 이 육신이 그걸 항상 죄로 바꾸어 내요. 죄로 생산하는 겁니다. ‘희생제사 드리지 마’ 했더니, ‘희생제사 드려’로 듣고 계속 희생제사 지내요.
율법은 신령한 겁니다. 그런데 육신이 그걸 죄로 바꾸어내요. 그걸 ‘죄 아래 팔렸다’라고 해요. 팔리는 건 종 밖에 없어요. 내가 죄의 종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을 줘도 이걸 죄로 바꿔내는데 선수들이라는 겁니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율법을 지켰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거야.’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희생제사 지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걸 악이라고 그래요.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내가 나의 행하는 것을 나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줄 알고, 그리고 그게 나도 원하는 거니까,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이 이 기특한, 이 정성이, 그래서 했는데 그게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라고 해요.
나는 그렇게 듣고 했는데 그걸 하나님이 미워하는 거라고 해요.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갑자기 바울이 이상한 소리를 하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면 내가 반성을 해야 되는데 사도 바울이 갑자기 ‘그거 당연한 거야!’라고 해요.
왜? 율법의 목적이 그거니까.
‘너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줬겠니?’ 못 지키는 게 당연하다는 걸 하나님이 아세요.
그러면 그걸로 죄를 생산해서 ‘어, 이게 아니구나!’ 알아서 생명으로 가라고 준거잖아?
그러면 율법으로 너희가 죄만 생산해내는 게 잘한 거네. 율법이 선한 역할을 다한 거네.
이런 말입니다. 당연한 거라는 겁니다.
어두움은 빛이라는 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빛은 그 어두움을 나타내서 드러나게 드러나게 하는 거죠? 이게 창세기 1장입니다.
어둠은 빛, 진짜 빛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빛은 그 어둠을, 어둠이 뭔지를 설명하고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면 빛과 어둠은? 같은 거네요.
진리가 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율법은 우리를 더욱 죄인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고 해요.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다.’ 하잖아요.
그러나 ‘율법으로 그 죄가 뭔지를 알게 되면 그게 생명이야.’라고 해요.
‘그런데 율법과 죄가 왜 그렇게 나빠?’ 하는 겁니다.
그 죄를 잘 가르쳐서, 그게 뭔지를 잘 가르쳐서 그게 아닌 거, 생명과 선과 의를 알게 해 주는 거, 이게 율법의 기능과 효용, 역할이잖아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성경이 그냥 죄 ‘하마르티아’라고 말하니까 자꾸 죄, 죄, 하는데 죄를 짓는 게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폭로시키는 겁니다. 드러내는 겁니다.
‘너희들 하나님 아니다! 왜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살아?’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준 율법을 지키면 너희가 하나님일 거 아냐? 그럼 나는 뭐니?’
그 말씀 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못 지켜야 피조물이지.’
그렇게 율법을 통해서 죄가 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알게 되는 것, 그게 내 육이 죽는 거잖아요. ‘나 하나님 아니네.’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세상 속에서는 그게 쪽 팔린다니까요. 아주 부끄러워요.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그러나 그게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그 완성의 죽음 자체도 스스로 하는 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게 17절입니다.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보세요. 우리는 죄보다 못한 먼지들입니다. 너희가 그걸 못해서 너희 안에서 죄가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피조물의 죄성이 너무 집요해서 하나님이 죄를 시켜 도와주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그거, 다나토스의 죽음을 못하니까 네 속에 있는 죄가 그거 행하고 있다.’
‘악역은 내가 할테니 너희 죄인님들은 나를 밟고 생명으로 가라.’는 겁니다.
그게 죄인 중의 괴수로 오신 예수님이 한 일이잖아요.
멀쩡하게 율법 잘 지키고, 희생제사 잘 드리며 지내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오세요.
그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자로 폭로가 됐어요.
원래 죄인이지만 율법이 그 일 한 겁니다.
‘너희는 죄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랬어요. 그들을, 온 세상을 하나님 살해범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리고는 뭐라 그래요? ‘나를 밟고 생명으로 가.’
죄가 그 일 한 겁니다.
우리를 하나님 살해범으로 몰아세운 게 우리를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만든 거라니까요.
‘너희는 먼지, 쓰레기야’ 이렇게. ‘그러니까 나를 밟고 가.’ 그게 십자가입니다.
왜 그렇죠? 왜 우리는 그렇게 죄에게까지 도움을 받아야 돼요? 18절에 그 이유가 나와요.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자는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내 속에서 죄가 일을 해서 나를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건 내 안에 선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래요. 그걸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을 수 없어요. 그래서 죄를 시켜서 ‘야, 가서 좀 도와줘라.’ 그런 겁니다. 율법을 시켜서, 예수를 시켜서.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 거룩한 일을 행할 능력이 피조물에게는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일을 했더니 전부 악이야.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만 했어요.
희생제사 죽어라고 드리고, 열심히 간음하고, 열심히 ‘거짓 말’ 했어요.
나는 선한 일을 하려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걸 전부 싸잡아 악이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그렇게 나의 최선이 악인데, 어떻게 나에게서 선한 것이 나옵니까? 이사야서 64장 이야기처럼. ‘우리의 최고의 의는 더러운 똥걸레다’ 그러죠? Filthy rag.
18절에 쓰인 ‘선’이란 단어가 앞의 것은 ‘아가도스’고 뒤의 것은 ‘칼로스’입니다. 의미가 달라요. 우리 말로는 똑같이 선인데 다른 의미입니다.
‘아가도스’는 진짜 참선, 하늘의 그것, 진리의 내용인 그것.
칼로스는 그것이 오게 되면 선하다 인정받는 그 선을 말해요.
즉, ‘아 저거 참 선하네. 선하게 이루어졌네.’ 하고 인식이 가능하면 칼로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진짜 그 선은 아가도스라 해요.
그러니까 그 진짜가 없으니까 율법이 이루려고 하는 그 선한 칼로스가 당연히 안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진짜 선이 없는데 어떻게 칼로스, 율법이 이루고자 하는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니?
너희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켜? 그 아가도스가 없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아?
‘네오스’라는 게 ‘진짜 새것’이라는 겁니다.
New, 네오스, 진짜 새것이 있으면 ‘카이노스’ 새것이 돼요.
그 진짜 새것이 있으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카이노스의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진리, 그 새것, 그 아가도스가 전제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말 하는 겁니다. 그 아가도스, 그 선이 없으므로 너희들은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 안에는 아가도스의 선이 없어요. 그 아가도스의 선이 없으니 칼로스의 선도 요원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도와주는 겁니다.
선이 있으면 그것으로 선에 이르면 되는데 선이 없으니 죄의 도움을 받는 겁니다.
율법의 도움, 예수의 도움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밖에 살아날 수 없는 존재로구나.’를 아는 걸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예수, 그 율법을 통하여.
그렇게 해서 바울이 깨달아 안 것이 있어요. 율법의 선한 것을 자기는 악한 것으로 갖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그게 이제 피조물의 한계, 나의 처음자리구나! 그게 21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그게 악으로 존재하더라)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런 말입니다. 그 선을 행하려고 나는 열심히, 그 율법, 그 말씀, 그걸 가지고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내 안에 있는 악으로 인해 죄만 짓더라는 겁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는 나에게 그게 악으로 존재하더라. 이게 피조물이다.’ 그 말입니다.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기자신의 연락을 추구하더래요. 그게 22절입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이걸 무슨 속사람, 겉사람의 속사람으로 생각해서 ‘그래,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 이렇게 이해를 하시는데, 진짜 여러분의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까? 아니, 속사람은 뭡니까? 뭔지는 아세요? 그 속사람 아닙니다.
‘호 에소 안드로포스’ ‘인간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법을 쾌락으로 쓰고 있더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뭔가 하나님이 시킨 어떤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거기서 대단한 희열을 느껴요. 그게 ‘쉬네도마이’ ‘즐거워하다, ~와 함께 기뻐하다.’는 말입니다.
이게 좋은 말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나와요. ‘너는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을 하며 그것으로 연락하는구나’ 그게 재미있니, 즐겁니? 너희들 가치가 올라가니까 얼마나 기뻐? 연락해요. 이 안드로포스, 인간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법을 오히려 내 쾌락의 도구로 쓰는 겁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육신은, 육을 가진 피조물의 한계는 하나님의 법을 그 진의대로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요. 자기 자신의 선악관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도저히 행할 수가 없어요. 내 안에서는 그 선이 항상 져요. 악이 승리를 해요. 그건 당연한 피조물의 한계, 피조물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무리 경건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요. 아닙니까?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요. 기가 막히게 잰다니까요. 항상 내가 이겨요. 그런데 그 ‘나’가 선악과를 입에 문 아담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그런 아담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지체 속에 한 법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둘이서 율법과 진리로 싸우네?
그런데 이 둘은 하나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진리가 아니라 율법으로 간다는 겁니다. 항상 지더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거든요. 내 가치를 높여주려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요? 방법이 없어요.
이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게 옳습니까? 아니,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해도 이런 존재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면 안되는 거죠. 뭐 하러 이런 존재를 살려두느냐고요. 무슨 가치가 있다고. 능력도, 자격도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게 정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정말 우리의 실체와 한계를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아, 하나님이 나 구원 안 하시는 게 맞구나.’라고 먼저 인정을 하게 돼요.
그리고 ‘내가 왜 구원을 받아야 돼? 이런 쓰레기가.’ 여기로 먼저 가야 된다니까요.
여러분이 말씀을 올바로 들었으면 .
그렇잖아요.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고, 자기만 위해서 살아요. 자기만 하나님 되고 싶어 하는 게 이 피조물,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왜 구원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조리 멸망시키기 위해서 주신 거구나. 이리로 먼저 가셔야 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서 주셨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게 되면 1차적 반응이 그렇게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하나님이 구원 안 하시는 게 옳아. 그게 정의, 공의야.
그렇죠? 지금 바울이 그리로 몰고 가는 겁니다.
‘죄가 다 도와줘야 할만큼 너희는 쓰레기야. 그러면 너희는 죽어 마땅하잖아.’
절망이죠?
그렇게 완전한 절망이 되었을 때, 내 옛 하늘과 옛 땅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야,
율법 아래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려야 그때 비로소 은혜가 일을 시작할 수 있어요.
은혜, ‘카리스’가 뭡니까?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 무상으로 쑤셔 박아주는 것. 그걸 은혜라고 해요. 갚을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에게는 은혜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돼요. 은혜는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완전한 절망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겁니다.
완전한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은혜를 감사하겠어요?
그런 자들은 자꾸 자기 안에 있었던 작은 것을 점점점 침소봉대 해서 ‘이것 때문이었구나!’로 간다니까요. 인간은 100% 그래요.
지금 완전한 절망으로 몰고 가요. ‘난 아니구나.’
진리를 알고 난 이후에도 이 과정은 계속 겪게 돼요.
나라는 존재와 그 수많은 불가능한 ‘나’들이 모여 만든 게 세상입니다.
호 코스모스, 그 세상이라는 게 정말 구원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멸망받아 마땅한 먼지라는 걸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렇게 숨 쉬고 있느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비로소 ‘살았다’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게 산 거에요.
그러니까 ‘절망=은혜’입니다. ‘사망=부활’인 겁니다.
절망이 은혜입니다. 그 절망을 모르는 이가 어떻게 은혜를 알아요.
절망을 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은혜와 진리를 논해요?
그게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절망하는지 보세요.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 나는 이 다나토스,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용한 자로구나.
말씀이, 하나님이 전부고, 나는 공이며 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어떻게 내가 나가?
못 나가는 게 맞아. 누가 날 구원하랴. 없어! 이 세상에는 없어! 그런 말입니다.
누가 날 구원해? 없어! 그런데 갑자기,]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열심히 열심을 부리는데 내가 이 육신을 갖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걸 곧 죄의 법으로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이라고 열심히 하는데 자꾸 죄의 법이 돼. 이 법들은 같은 법입니다.
말씀을 받으면 ‘그래, 이게 정말 말씀을 받은 성도다운 삶이지.’ 하면서 열심히 하는데 자꾸 죄의 법이 되는 겁니다. 육이 살아있는 한.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나에게 감사의 선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7장 마지막 장이 그렇게 끝나는 거죠.
어떤 선물을 주셨는지 볼까요?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뭐죠?
율법이 그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걸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여전히 예수에 머물고, 율법에 머물면 그게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내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버렸네요.
어떻게? 1절을 보면 예수를, 그 율법을 그리스도, 진리로, 마음으로 받고 있게 된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대요.
죄를 안 묻는다고 그러죠? ‘카타크리마(정죄)’를 못해요. 죄를 안 물어요. 물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죠? 개역성경은 그 뒤의 이유를 쏙 빼먹었어요. 그래서 어정쩡하게 됐어요. 본문에 보면 그 뒤에 이렇게 붙어있어요.
‘네 카타 사륵스 페리파테오 알라 카타 프뉴마’
‘육신 안에서 살지 않게 된 자들은 이제 영원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빼먹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무슨 말이겠어요?
‘그래서 정죄하지 않는다’.
너희 육신은, 율법의 종인 너희는 이 세상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네 카타 사륵스 페리파테오’ ‘육신이 없어졌다, 육신 안에서 이제 안 살아’라는 뜻입니다.
원리를 말하는 겁니다.
육신이 있지만 우리의 육신은 이제 하나님이 안 보고, 영 안에, 말씀 안에 있는 나로만 보신다는 겁니다. ‘육신이 없는데 율법은 나를 어떻게 종 삼을 것이며, 육신이 없는데 무슨 죄를 누구한테 물어? 진리에게, 영인 나에게 물어?’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너희들의 육신은 그렇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히 절망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너희를 살려낼 건지를 보여줬잖아. 그러면 너희 육신은 이제 삭제된거야. 없어. 그런데 어떻게
‘카타크리마’ 죄를 어떻게 물어?
죄를 물을 육신이 없는데. 너희는 영이잖아. 진리잖아.
그래서 계시록에서 우리를 말씀이라고 불러요. 우리 이름이 진리래요.
내가 영이란 뜻입니다. 무슨 혼령이 따로 있고, 혼 따로 육 따로,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바울이 8장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했다.’ 하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 율법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올바로 깨닫고 나니까 그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더라는 겁니다. ‘아,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살아나는 거로구나.’
이 죄와 사망의 법, 이걸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알고 나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 하실 수밖에 없는 거구나.’를 알게 됐어요.
이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는 겁니다. 다른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고, 어떤 이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런 겁니다. 죄는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 나빠? 그러는 겁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육신에, 율법에, 죄에만 머무는 그게 나쁜 거지. 그걸로 생명을 알고, 선을 알고 의를 배웠다면 그걸로 된거야.’ 그러는 겁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보세요.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땅이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승천이라는 과정이 필요해요. 다른 말로 ‘천국 간다’. 예수님이 승천하세요.
예수님이 율법으로, 이 땅에 흙으로 오셨다가 하늘로 가시잖아요. 승천.
그리고 어떻게 오세요?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세요. 말씀으로 오세요.
이건 여러분 안에서 정확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리의 영으로 다시 오는 걸 ‘파루지아’라고 해요.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걸 성경이 재림이라고 번역해 놨는데. 먼 미래의 어느날 그렇게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실 거라고.
그런 모습으로 안 오세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서요. 그건 뭐고 이건 뭐냐고요.
제발 그런 관념으로만 갖고 있는 기독교를 깨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천국 가셨어요. 하늘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승천을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다나토스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니까 그가 하늘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파루지아, 감춰진 것을 밝히 나타내는 겁니다.
‘감추어진 게 나타나다’가 파루지아입니다.
그게 바로 흙에서 출발한 성도의 세상살이입니다.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말씀을 받아요.
말씀은 뭐죠? 하늘, 샤마임은 그 위에, 거기에 물이 있다, 거기에 말씀이 있다, 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랫물과 위의 물을 항상 나누어서 말해요.
그래서 말씀을 은혜의 비라고 하고, 율법을 사막, 모래, 물이 없는 광야, 부스러기..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흙이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필요해요.
말씀을 받아요. 말씀은 온 세상에 충만한 그 하나님을 말해요. 진리를 말해요.
대부분의 아담들, 흙들은 그 말씀을 피조물의 수준의 것으로 받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고, 이런 변화를 그냥 그거로만 인식해요. 이 크로노스의 시간은 아무 의미없는 시간입니다.
이건 시간에 끌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의미있게 되는 걸 카이로스, ‘때가 차매, 때가 되매, 때가 이르러’ 그 ‘때’는 전부 카이로스입니다. 의미있는 시간. ‘아, 이게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라고 우리에게 깨달아지면 그건 능동적인 내가 그 시간을 능동적으로 갖게 되는 겁니다.
그걸 왕이라 그래요. 대단하게 뭐 이 땅에서 소유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들, 아담들이 피조물의 수준으로 이 말씀을 받아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그렇게만 보는 것처럼 말씀도 그렇게만 봐요.
그래서 나타난 현상에만 목매여 일희일비하게 되는 겁니다.
슬퍼하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쪽팔려하고,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나 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껍데기, 현상으로밖에 이해를 못하니까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현상만 자꾸 개발하려고 하고, 이걸 어떻게 발전시키려고만 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갖고 그 흙들의 가치를 높이는데 매진을 해요. 그래서 결국은 훌륭한 흙이 되어 끝나요. 그 훌륭한 흙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런데 어떤 구별된 흙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똑같이 말씀을 받아요. 은혜의 비를 맞습니다. 세상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성경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역사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원리와 원칙으로 주어진 그 말씀을 받고 그들이 흙으로 폭로가 돼요.
‘아, 나 하나님 아니네? 내가 흙이네, 진짜?’
생활과 사건과 교훈과 깨달음 등 모든 것들이 나라는 존재를 철저하게 흙으로 폭로하고 해체시켜 버려요. 그걸 무트의 죽음, 말씀의 완성이라고 해요.
‘말씀이 전부고 나는 아니네?’ 이게 죽음입니다. 말씀이 실체고 너는 空, 먼지, 아파르다.
그게 처절한 절망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부활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죽음이, 절망이 곧 생명이고 부활인 겁니다.
하늘이 무너졌더니 비로소 솟아날 구멍이 생겨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야 비로소 솟아날 구멍이 생겨요. 하늘이 안 무너지면 하늘인 척 하는 땅에 갇혀버려요.
예수께서 내가 생명이고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지고 죽은 그 다나토스의 그 예수가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겁니다.
죽음이 부활이고, 죽음이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곧 죽을 거면서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때 그를 가리켜 ‘내가 땅, 흙 맞네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붓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흙일 수밖에 없네요.’ 이걸 고백하는 자를 ‘호 우리노스, 하늘’이라고 해요.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그 하늘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삼층의 하늘이 있죠?
일층천은 옛성전. 하늘을 설명하는데 눈에 보이는 걸로 세워서 줬잖아요.
이층천, 둘째 하늘. 예수. 말하는 성전으로 오셨는데 또 못 알아먹네.
삼층천은 뭡니까? 진리!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주니까.
바울이 ‘삼층천, 세 번째 하늘을 가봤다’ 해요. 거기 갔다는 건 하늘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말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해요. 그게 하늘입니다.
천국 갔더니 멘션이 있고 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정신병 있거나 사기꾼입니다.
그렇게 하늘이 되면 ‘이게 하늘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면 감추었던 하늘이 나타난 거죠? 이걸 파루지아, 재림이라고 해요.
성경을 동화책처럼, 무협소설처럼 상상하시면 안돼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사라졌다가, 뭐 이런 걸로.
이 일들은 모두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상관이 없으면 성경은 여러분 밖의 법의 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 승천, 재림 같은 것들을 언젠가 일어날 일, 현재의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 거룩한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도래하게 하는 게 뭡니까?
율법입니다. 죽음이 먼저니까. 율법이 뭘 도구로 써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으니까 죄를 도구로 써요. 그러면 그 율법과 죄가 뭐 그렇게 나쁜 거냐고요.
그때 그에게서 죄가 삭제되는 겁니다. 아니, 죄와 원래 상관없음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용사’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정의해 놓고 합의해 놓은 국어사전의 개념들로 이해하려고 하나까 자꾸 추측해서 소설을 쓰게 되는 겁니다. 그건 올바른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를 도와준 그 죄는 오히려 감사한 겁니다. 뭐가 나쁜 겁니까? 함부로 남을 정죄할 필요도 없고, 그런 마음도 안 생겨요.
그냥 말씀, 성경을 가지고 그 율법과 죄에만 묶여서 그런 것만 금하고 그런 것만 목표 삼아 열심히 행하기만 하면 그게 흙의 행사라는 겁니다. ‘여전히 물을 못 받은 흙’.
그렇게 되면 너희는 흙의 나라, 지옥으로 간다. 성경에서 계속 그걸 경고하잖아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건, ‘흙에 진리의 영이 부어지지 않으면 넌 그냥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라는 경책이면서 ‘네가 흙이라는 걸 알아. 너에게는 물, 진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면 그게 생명이야. 그런데 왜 하나님 흉내내고 그래?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도 됩니다. 이게 언약을 담은 은혜의 말씀이기도 한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율법에 머물러 버리면 그게 먼지. 흙입니다. 그걸 아파르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을 아담이라고 하죠?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뜻이고, 우리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담을 파자하면 ‘하나님의 구별된 말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아담이란 말 자체가 ‘너희가 진리야.’입니다. 그게 아담, 우리의 창조 목적이기도 해요.
‘아 내가 진리를 알아 그 진리로 사는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내 자리가 있구나.’
그게 아담이 해야할 바고, 삶으로 살아야 할 바입니다. 그걸 찬송이라고 하고, 영광을 돌린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담이 어디서 나와요? 흙으로 지었다고 하죠? 그 단어는 아다마입니다. 아다마는 ‘하나님의 구별된 말씀을 ‘말하다’‘입니다. 아담에 하나가 더 붙어있는 거죠. 그 아다마를 그냥 ‘흙, 땅’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구별된 말씀을 말하다, 그걸 흙, 땅이라고 했어요. 거기에서 아담이 나오죠? 그러면 이 진리의 말씀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완성품, 진리인 아담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냥 땅, 흙, 티끌, 이렇게 번역해 놓았는데, 아다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아다마에서 나온 먼지, 아파르로 아담을 만든다고 해요. 그러면 아파르가 먼지죠?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말하는 것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행위가 아닙니다.) 아담, 하나님의 구별된 말씀인 아담을 만드는데,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데, 거기에 도구로 쓰인 게 아파르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느냐면, ‘땅, 흙에서 흙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만들려면 반죽을 해야 되니까 이걸 모아서 아파르라고 하고, 이 아파르로 아담을 만들었다.’라고 해요. 열심히 공부한 주석가들만 이렇게 얘기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혼용해서 써버려요. 아다마, 아파르, 아담. 다 다른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아담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흙이 처음 받았을 때 그 진리는 무엇으로 주어지게 됩니까? 율법으로 먼저 주어집니다. 율법으로밖에 인식이 안 돼요. 피조물은 그 진리를 못 담는다니까요. 그걸 아파르, 먼지라고 해요.
그런데 율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아담을 만들려고 진리를 줘야 하는데 얘들이 진리를 못 담아. 그래서 아파르를 줘요. 이걸로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진리로 깨달아 알아 하나님의 구별된 진리, 말씀, 아담이 되었어요. 이게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아파르로 들어서 진리로 아담이 되었으니 도중에 이 율법으로 받았던 그건 이제 지워야죠? 그런데 그게, 율법주의라는 게 잘 안 지워져요. 그래서 예수님이 열둘을 제자로 보내면서 ‘너희들 율법주의 유대인, 이스라엘에게 가서 그 율법주의, 먼지라는 걸, 그들이 받지 않으면 그들이 먼지니까 그들을 박박 문질러 지워버려.’ 라고 하신 겁니다.
마10:5-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면서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안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꼭, 반드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아파르, 먼지’에 머무는 거죠? 그러면 그들은 먼지야. 율법.
먼지에 속한 먼지니까 어떻게 하라? 떨어버리래요. 이 말은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기식하는 걸 다 죽여버렸다.’에서 ‘죽여버렸다’는 그 말과 같습니다. 사포로 박박 문질러서 아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게 ‘먼지로 떨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말 안 받으면 먼지, 아파르로 떨어버려.
우리는 그게 잘 안 지워지죠? 그러니까 여기서 ‘평생에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세요, 또 들려주세요.’ 하면서 그거 떨어버리는 겁니다.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그 선악체계 속의 아담의 근성, 그 먼지 떨어버리는 겁니다. 빡빡 밀어서.
잘 안 되죠? 그때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자를 하나님 당신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건져내셨습니까?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또 한 번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먼지로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려면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되는 겁니다. 감격, 찬송..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아야지, 내가 자꾸 하나님께 뭘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니까요. 자꾸 하나님을 사랑한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랑할 거냐고요. 자꾸 드리고 섬기겠대. 그러니까 선지서에서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이 드림으로 망한다.’ 드리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너희는 드림으로 망한다. 자꾸 드려, 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 감정, 애정을 여러분 안에 가지라는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감정적인 애정으로 사랑하겠습니까?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건 허상, 헛거입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이슬람의 알라, 힌두교의 소, 다 하나님입니다. 동양학에서는 환인. 제왕운기, 삼국유사에서 보면 환인이 하나님을 번역한 말이라고 해요. 다 하나님을 부르고, 섬기고,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시키는 어떤 걸 올바르게 사는 인간의 삶이라고 말해요. 모든 종교가 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정을 갖고 진짜 사랑해요. 그러면 그 사랑이 뭐냐고요? 그건 조작하고 만들어낸 가짜입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그런 사랑하라고 그러겠어요? 그런 가짜 사랑. 얼마든지 감정으로 조작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라고 하겠어요? 있지도 않은 걸 사랑하는데 진짜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걸 잘 받아서 그래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사랑 안 받으면 저는 존재도 아니네요. 흙, 아파르네요.’하고 알면 ‘그래, 네가 나를 알아 주는구나!’라고 말해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뭘로 그 하나님을 섬길 겁니까? 우린 그걸 너무 몰라요. 오죽하면 무당들이 섬기는 삼신도 하나님입니다. 무당도 하나님 섬겨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말을 여러분 안에 갖고 계십니까? 어떤 말이 여러분을 조종하고 있습니까? 그 말의 숙주 조정에 의해서 치사율 100%의 저주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갈 수도 있어요. 여러분을 이끌고 가는 말이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입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돼야 자유가 있습니다.
그걸 말씀 속에서 확인하세요. 기생충도 중간 숙주 안에 있다가 ‘아, 여기는 내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구나.’ 하고 중간숙주를 죽이고 목숨 걸고 종숙주에게 간다니까요. 기생충만도 못해요? 왜 이 호 코스모스에 갇혀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냐고요?
율법에, 호 코스모스에 갇혀있으면 안돼요. 그러면 기생충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 당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주시고, 당신이 준비한 천국이나 주시고, 내가 알아서 당신 섭섭지 않게 해드릴게.’ 이게 기생충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여러분을 품고 있는 과저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중간숙주를, 율법을 죽이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묶여 있으면 안돼요.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여기에 다 묶여 있어요. 기생충처럼 능력이나 이런 것만 빼먹으려고 해요. 그걸 종교라고 해요. 치사율 100%. 연가시보다 무서운 비진리입니다.
너무 뭐 하려고 하지 마시고, 진리가 이끄는 대로 그냥 사시면 돼요.
우리가 이제 4개월 후에 예배당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디로 갈까요? 못 가면 해산할 게요. 뭐가 걱정입니까? 그냥 노후준비 하세요.
자, 그 율법을 뚫고 나와서 진리라는 영원한 종숙주 안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사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먼지입니다. 아파르입니다. 쓰레기입니다.
진리릐 말씀으로 그걸 떨어버리라 하셨는데, 먼지로 떨어버리라고 하시는데, 그냥 여전히 먼지로만 이렇게 삽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 말씀만이 생명이라는 그 진리의 말씀이 새록새록 정말 참 진리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전부이고, 우리는 nothing입니다. 그 은혜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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