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75 데스페라도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0

데스페라도(무법자)



롬7:7-12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7


의외의 말을 하고 있죠?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다. 

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입니다. 그걸 거룩하다, 의롭고 선하다고 해요. 그 앞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이걸 다 엉뚱하게 해석을 할 수밖에 없어요.  


1973년 이글스가 ‘데스페라도’라는 앨범을 발표했어요. 거기에 수록된 노래 ‘데스페라도’는 제가 진리를 알게 된 이후에 힘들 때마다 듣는 영양제 같은 노래입니다. 찬송가나 복음성가보다 더 은혜를 받아요.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마치 훌륭한 스승이 던지는 한편의 설교 같습니다. 가사를 소개합니다.


<데스페라도>

데스페라도, 자신을 좀 추슬러 보는 게 어떤가?

자네는 오랫동안 아슬아슬하게 살아왔지 않은가?

자네는 냉혹한 사람이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건 알지만

자네를 즐겁게 하려는 일들이 자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네.

다이아몬드 퀸을 뽑지 말게, 친구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자네를 헤칠 수 있다네

자네의 테이블 위에는 좋은 것들이 널려있는 것 같군

자네는 가질 수 없는 것들만 가지려고 한다네

데스페라도, 자네는 더 이상 젊어보이지 않는다네 


고통과 배고픔이 자네를 자네 집으로 인도하게 될걸세

그리고 자유, 그렇지 자유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일 뿐이고

자네의 감옥은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겠다는 생각일 뿐

겨울엔 발이 시린 걸 느끼지 않는가?

하늘에선 눈이 내리지 않고 태양도 비치지 않을 거라네

젊을 때 노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자네는 모든 걸 잃어가고 있다네

그런 감정이 어떻게 사라져 버리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데스페라도, 정신 좀 차리는 게 어떤가?

자네의 담장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보게나.

비가 내릴 걸세.

무지개도 자네 머리 위에 떴다네

누군가 자네를 사랑하도록 해보게나

너무 늦기 전에 말일세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이 전부 이 모양입니다. 나름대로의 유토피아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이르기로 합의했어요. 그런데 유토피아는 헬라어로 ‘U+topus, 없는 것’입니다. ‘이런 데는 없어’가 유토피아입니다. 그걸 천국이라고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런 수준이고 그 모양입니다. 있지도 않은 걸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거기를 향해 달리고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모든 걸 잃는 저주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진리 밖의 모습이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외치는 겁니다. ‘데스페라도, 무법자! 법을 모르는 자여, 정신 좀 차리라.’는 겁니다. 


무법자라는 건 법을 함부로 어기고 악행을 일삼는 그런 악당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데스페라도, 진짜 무법자는 법이 의미하는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그 법을 지키고 있는 세상 속 아담들 모두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패가 널리는 테이블 위에 당당하게 그 패를 내놓는 겁니다. ‘이게 맞아, 바로 이거야.’ 그리고 그러한 패를 가진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가슴을 쫙 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자기를 죽이는 패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그 다이아몬드 퀸, 그게 최고인 줄 알지? 그게 널 죽일거야. 그거 자꾸 뽑지 마. 그거 의지하지 마.‘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섬기며, 신을 사랑하고, 신이 하라는 걸 열심히 해내는 게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죠? 그게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경건하고 올바른 신앙의 틀입니다.

힌두교 축제 사진을 보니 사람들이 그 신이 두려워서 온 몸을 바늘로 막 뚫고 있어요. 그래야 속죄가 된대요. 그게 종교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내리사랑이죠- 신이 우리를 위해 먼저 일을 하시며, 신이 우리를 진리로 섬긴다는 걸 아는 걸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갚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셨으니 내가 갚아야지.’로 먼저 뛰는 겁니다. 앞의 부분을 알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입니다. 그러면 ’네가 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라는 겁니다. 그걸 아는 게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자기자신을 알게 되면 자연히 신이라는 존재를 경외의 마음으로 대핳 수 있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그가 왜 죽었어요? 사람들을 미혹하는 말을 한다고 죽였습니다. 천국 가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안 것 같아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 같은 자들을 하나님과 연합시켜서 신적 존재로 만들어 영원한 하나님의 벗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율법이고 계명이고 말씀이고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지키려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바울이 그걸 죄라고 합니다. 율법을 줘놓고 그걸 열심히 자기들 수준에서 지키려고 하면 그걸 죄라 그래요. 과녁을 잘못 잡았다. 하마르티아,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 그 호 코스모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알게 되는 것, 그래서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걸 ‘차다크, 의’라고 해요.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처음자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그 영광을 찬송하지 못하고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 ‘하라, 하지 말라’는 계명에만 머물러서 그걸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힌두교인들처럼 열심히 뚫어보기도 하고, 고행도 하고, 뭘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성도는 절대 그 죄에 머물러 있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되도록 이끄십니다. 죄를 안 짓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돼요. 그들은 반드시 그 죄를 통하여 ‘차다크, 의’ 올바른 관계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관계? 하나님은 하나님, 나는 피조물. 그 관계.


그걸 성도의 거룩한 죽음, 다나토스, 무트라고 합니다. 네크로스는 그냥 죽음死이고, 다나토스는 완성終입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나의 죽음, 終, 완성입니다. 완전한 자기 부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왜 살려내세요? 왜 눈과 귀를 열어줍니까? 죽이려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는 건 죽이려고,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이려고 살려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 그걸 ‘살았다, 생명이다’라고 하세요. 


로마서7장은 전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52:15-

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이사야 52장은 여호와의 종의 도래에 관한 겁니다.)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그거 아니야’ 하니까 이 세상의 왕들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입을 봉하게 되는 겁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누가 오면?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 

여호와의 종이 오면 말씀 속에 감추어져서 전파되지 않은 그 진의, 그 내용이 전파가 됩니다. 말씀 속에서 듣지 못한 진의를 깨달아 듣고 보게 해주십니다. 메시아, 그리스도의 영이 안 오면, 그 전에는 우리에게 전파가 안 돼요. 말씀을 표피적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말씀의 진의는 아무에게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오면 그 진리가 전파되어 보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들이 들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못 듣고 못 보는게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이 그거 가지고 뭐라고 안 하신다니까요.


눅8:17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감춰진 것이 있다는 거죠?)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그 율법, 계명,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니? 나는 감춰 놨는데, 너희가 지금 듣고 있다고 하고, 그걸 열심히 지킨다고 하는데 어떻게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서 보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 나는 깨달았는데, 들었는데, 봤는데? 그래서 지켰는데?’ 그것 다 뺏어간다는 겁니다. 내가 말한 거, 그거 아니라는 겁니다. ‘난 감추어 놨는데 어떻게 네가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이런 말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표피 안에 진리라는 내용을 감추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표피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의 해야할 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겁니다. 



로마서 7장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7장은 굉장히 중요한 장이에요. 이 한 장 때문에 로마서 전체의 방향이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게 된단 말에요. 제가 자세하게 한 장(절) 한 장(절) 설명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로마서가 여러분 쉬운 책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 7절은 지난 시간에 이미 공부한 내용이에요.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게 맞는다면 어떻게 율법이 죄냐? 7절이었어요. 이게. 어떻게 율법이 죄냐? 


율법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고 나니까 그 율법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바울이 알았어요. 그 율법은 오히려 바울의 그 열심 있는 율법적 행위를, 로마서 10장에 나오죠? ‘나 열심히 했어. 열심히 했어’ 그런다고요. 그 율법적 행위를 탐심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죄라는 걸 가르치고 있는 게 율법, 성경이더라는 거예요. 바울이 알고 나니까. 


그런데 자기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러한 율법적 행위가 의로운 행위인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그게 그런 내용이라는 걸 내가 몰랐다면 계속 그거 하지 말라는 에피뒤미아, 탐심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 나 잘했죠? 라고 할 뻔 했다. 이 얘기란 말에요. 


탐심이라고 번역 된 에피뒤미아는 에피와 뒤모스(qumov")의 합성어라고 했어요. 그 뒤모스는 뒤오(quvw)'라는 단어에서 온 건데 그게 ‘희생제사하다, 제물을 바치다. 제사 목적으로 살해하다’라는 뜻입니다. 에피는 강조니까. 그러니까 탐심, 에피뒤미아가 뭐예요? 내가 열심히 한 거. 그걸로 열심히 했는데 그걸 죄라 그래요. 


그런데 뭐예요? 그게? ‘두오’에서 왔다 그랬으니까. 에피뒤미아라는 단어 자체가 ‘희생제사, 율법적 열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그렇게만 보고 이 두 마음으로 해석해서 죽어라고 했는데 성경이 ‘그게 죄야!’라고 이야기 하더라는 거예요. 바울이. 탐심이라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열심히 희생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 그거를 오히려 하지 말라! 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된 거죠? 그거 알았으면 된 거 아니에요? 선악과가 뭔지 알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게 되는 거니까. 율법을 통하여 '이거 아니네?' 를 알았으면 그럼 된 거예요.


그렇다면 그렇게 자신에게 열심있는 그 율법, 그 율법적 행위를 시켜 놓고 그게 무엇인지를 가르침으로 해서 자기를 진리에 이르게 한 그 율법이 왜 죄냐? 그러는 거예요. 그게 7절이라니까요. 


'그래 그거 죄 맞아.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죄야.' 그런데 나는 진리가 됐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나를 여기까지 그게 뭔지를 가르쳐서 여기까지 온 그 율법이 고맙더라는 거예요. 자기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죄인데 내가 진리가 되고 보니까 그게 나에게는 죄가 아닌 거예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왜 죄냐? 오히려 나에겐 너무 소중하고 기특해’ 


구원에 이른 성도, 진리에 이른 성도에게 있어서 거기까지 이르게 한 징검다리를 놓아준 율법과 죄는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것 자체가 삭제되는 거죠? 그 때 그걸 용서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단순히 여러분의 죄 몇 개를 이렇게 ‘야, 이거 없던 걸로 해줄게’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용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그거는 이 땅에서 재판관들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니, 대통령들도 사면해주고 뭐 용서해주고 하잖아요. 그런 정도의 용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말하는 용서는. 아예 죄 없음으로 선언해주는 거라니까요. 

"너에게는 죄가 없었어" 라고. (굳이 우리가 갖고 있는 단어로 이야기를 하면)그걸 용서라고 해요.  ‘몇 가지 잘못한 거 그거 없던 걸로 해 줄게.’가 아니란 말에요. 

너희에겐 아예 죄가 없었어. 


그래서 바울이 8절을 이렇게 잇는 겁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잘 보세요.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이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원문에 맞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죄가 기회가 되어, 기회를 잡아. 죄가 기회라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의 계명, 엔톨레를 가지고.  

우리가 율법, 말씀을 대하게 되면 일단 계명으로 보게 됩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계명을 가지고 ‘죄가 기회가 되어’ 어떤 기회를 만드는 겁니다.


내 안에서 모든 탐심을 완성해 버렸어요[katergavzomai(2716, 카테르가조마이) 이기다, 성취하다, 만들다, 준비하다.].

.  

에피뒤미아, 그 탐심을 완성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렇게 법에서 ‘코리스[cwriv" ~없이, ~아니면, ~외에. 따로 따로, 갈라져, 떨어져서, 단독으로]’ 분리가 되자 죄가 (다나토스가 아닌)네크로스, 죽더라! 없어지는 겁니다. 죄가 죽더라. 그렇게 내가 법에서 분리가 되자 죄가 죽더라.


바울이 7절에서 ‘나에게 탐심이 죄라고 가르쳐 준 그 율법이 죄냐?’라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 후에 그 기특한 죄가 내 안에서 행한 일을 8절에서 설명하는 겁니다.


그 죄가 한 일이 뭐냐?

죄가 기회를 만들어냈는데 어떤 기회? 살리는 기회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 죄, 그 기특한 죄가 기회를 잡아 ‘하라, 하지 말라’의 그 계명을 통해 탐심을 완성했다, 진리로 깨닫게 됐다‘는 겁니다. ..


에피뒤미아, 탐심만 갖고 있으면 죽는데, 그 죄가 성도 안에서 기필코 이걸 완성해 내더란 겁니다.그러니까 그렇게 진리로 깨닫게 만들어서 내 속에서 그 법, 계명을 진리로, 탐심을 진리로 카테르조마이, 완성해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노못’ 법이, 율법이 내게서 사라지더라는 겁니다. 

‘아, 이게 지키라는 게 아니었구나.’라고 이제 알게 됐어요. 

에피뒤미아가 이렇게 카테르조마이, 완성이 되니까 ‘이 법이 나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네!’ 법이 분리, 코리스 되니까 죄가 죽더라는 겁니다. 죄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때 바울을 붙들고 있던 그 죄가 뭐 그렇게 나쁜 것일 수 있냐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도덕적 윤리적인 실수나 잘못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나세요. 그런 건 잘 하세요. 경찰에 잡혀가지 않으려면. 성경은 그런 걸 말하지 않아요. 


죄가 기회가 되어서 계명을 사용하여 율법을 진리로 깨닫게 하고 장렬하게 전사해버리더라는 겁니다. 죄가 나에게 있어서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죄가 죽었어요? 자신 없어요?


바울이 말하잖아요. 죄가 죽었죠? 여러분에게 있어서 율법이 죽었다면서요?

바울이 그 이야길 하는 겁니다. 죄가 죽었어요. 그러니 바울에게 있어서 그 죄가, 율법이 얼마나 고맙겠어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오고 장렬하게 죽다니. 오 소중한 죄여. 어거스틴이 그랬어요. 오 거룩한 죄여!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원래 그 죄라는 건 죽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늘의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잠시 그 죄라는 걸 율법과 계명을 통해 들어 썼다는 겁니다. 본문 9절.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원문에는 ‘깨닫다’는 말도 없고 ‘전에’라는 말도 없어요. 지금 8절을 기억해 두시고 계속 연결을 시키셔야 돼요. 자, 그렇게 해서 이제 죄가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법이 없어져 버려요.



코리스, 나와 분리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돼요? 

‘난 법과 분리되어 살았다. 생명을 얻었다.’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나는 그렇게 법이 사라지고 죄가 죽고 난 다음에 나는 생명을 얻었다. 그 법과 분리되어.’

이런 말입니다. 법이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니까 난 산 겁니다. 이제 사망이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졌어요. 그 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 진리로 완성되니까 그 죄라는 게 살아났다가, ‘아나 자우’ ‘위로 살아나더라.’ 그 죄가 위의 것으로, 그 진리로 깨달아지더란 겁니다.

‘아, 이게 그거였구나!’라고 깨달아지는 거.


죄가 살았고, 그리고 내가 ‘다나토스’ 완성의 죽음을 죽게 되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성도의 죽음. 그 죽음이 나에게 비로소 오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죄와 계명이 나에게 기회, ajformhv(874, 아포르메), 이게 ‘출발점, 시작’의 의미입니다. 


죄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먼저 먹고 시작하는 겁니다. 

그 죄가 나에게 기회가 되어서 계명을 그 진리로 완성해내고 위의 것으로 깨닫게 해주니 내가 완성의 죽음의 자리로 가더라,가 9절입니다. ·


이해가 가세요? 로마서 7장의 이 부분만 잘 이해하면 로마서 전체가 일관성 있게 확 풀려요. 연결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인간들이 무서워서 도저히 그렇게 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번역하는 사람들도 ‘아닐 거야.’ 했어요. 그런데 성경에 적혀 있죠? ‘서기관의 어리석은 붓이 성경을 망친다’고. 서시관이 성경 필스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단어는 여기 들어가면 안될 것 같으니까 자기들이 고쳤다니까요.


자, 바울은 지금 그렇게 나를 이끌고 완성하는데에 그렇게 징검다리를 놓아준 죄와 율법이 왜 나쁘냐는 겁니다. 그리고 10절을 이렇게 잇습니다.



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것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내 안(사망?)에서 찾았다’입니다.


계명이 내 밖에 있으면 내가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게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마음이 되면 그게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내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 이 계명이 밖에 있으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 그렇죠? 


그런데 내 안에서 그게 뭔지를 깨달아 내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내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해요. 

다시 한 번, ‘내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내 안에서 찾았다. 이렇게 하여 내가 그 ‘다나토스’의 완성의 죽음, 무트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죽음, 죄, 율법, 계명, 이런 것들이 여기에서 나쁜 걸로 쓰이고 있습니까? 좋은 걸로 쓰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의 선악 구조 속에서 그런 단어들을 대할 때, 얼른 나쁜 것, 더러운 것, 불쾌한 것으로 판단을 해버려요. 


그래서 성경 해석이 이렇게 중구난방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건 나쁜 거’ 하고 이걸 연결시키려니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거룩한 죽음입니다. 완성의 죽음. 

다나토스, 무트, 말씀의 완성,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그 완성의 죽음을 죽으신 대표적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다나토스의 죽음, 그 사망이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사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죽게 될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잔인하게 매 맞고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완성, ‘아, 그래. 하나님이 전부, 나는 nothing' 이렇게 내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될 거라는 겁니다. 그 사망이 내 사망이 되는 겁니다. 


이제 그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사망을 가져오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 예수의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절대 구원을 못 받는다’가 그것이 갖고 있는 메시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네요.’ 이걸 죽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사망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그 죽음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렇게 죽는 자가 진짜 산 자야. 이게 성경이 말하는 겁니다. 그 현실을 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15:52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성경에서 나팔소리는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 진리 선포입니다. 그래서 나팔 소리가 나면 항상 심판과 구원이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곱 나팔 마찬가지입니다. ‘나팔’에 대해 성경 여기저기 찾아드릴 수 있지만 시간관계상 그냥 그렇게 알고 계세요. ‘나팔소리=진리의 선포’.(나팔 lbe/y(3104, 요벨) 수양의 뿔, 나팔/ 희년)  그래서 나팔이 불면 여리고가 무너져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가 되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데, 나중에 있을 어떤 부활, 이런 거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썩을 것 위에 썩지 않을 것을 입혀준다는 말이 되잖아요. 나중에 살아났는데 이거 없애지도 않고, 그 위에다가 그걸 입혀주면 뭐냐고요? 그 안에 있는 썩은 거를. 그런 말이 아닙니다. 


말씀이 전파되면, 나팔이 울리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데, 

‘알랏소’, 다른 차원의 존재, 다르게 만들어진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존재입니다. ‘알랏소’ 이미 다른 존재가 된 겁니다. 


썩을 것, 호 코스모스, 율법, 우리의 육....

그 썩을 것 위에 썩지 않을 것을 입어요. 

벗는 게 아니라 덧입어요. 그리고 죽을 것 위에 죽지 아니할 것으로 덧입어요.

덧입는다는 건 그것 자체가 그것화 되어, 깨달음으로 그것화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벗으면 안 돼요. 그러나 그것화 되어버리면 옛날 것이 없어진 거니까 그걸 ‘벗었다’라고도 하지만, 그런 벗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덧입는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 거지 이걸 없애버리는 게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갖고 진리를 깨달아야지, 성경 말씀은 아니야,라고 하면 안되는 것처럼. 

덧입는 겁니다.


그것이, 이김이 사망을 완전히 삼킨 바 된다, ‘카타피노’ 흡수해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해요. 

덧입으면 사망이 없어져요. 더 이상 사망이 아닌 겁니다. 진리가 가차없이 흡수해 버려요.

그게 다나토스, 사망이야. 좋은 사망이에요. 


그래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데, 

이건 ‘사망아, 약 오르지 메롱, 나 못 잡지.’ 이런 말이 아닙니다.

이 다나토스의 죽음은 좋은 겁니다. 이김의 사망. 

예수님이 그 사망을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썩을 것은 원래 썩지 않을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내용으로 담고 있고,

죽을 것은 죽지 아니할 것을 설명하고있었다는 겁니다.


죽은 예수는 죽지 아니할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설명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다나토스,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죽음.

그러나 그 자체에 묶여버리면 썩고 죽는 것이 되는 거고, 그것으로 ‘아, 그게 그거였어?’라고 알면,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것으로 덧입은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고린도전서에서 또 뭐라고 해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진리로 옷 입었느니라. 그걸 부활이라고 해요.

고린도전서 15장이 부활장이잖아요.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그리고는, 그 사망으로 우리를 가르치는데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죠?

쏘다, 켄트론[kevntron(2759, 켄트론) 몰이 막대가, 찌르는 것, 쏘는 것. 켄테오(kentevw: 따끔하게 찌르다)에서 유래].


유대학교, 서당 같은 데서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콕콕 찔렀어요. 선생이 제자에게 자극을 줄 때 쓰는 지팡이, 막대기, 하나님이 우리를 자극을 주어 가르치게 하는 지팡이와 막대기. 스트롱코드 2759에는 하나님의 자극이라고 쓰여 있어요.

  

하나님의 자극,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이 사망으로 무얼 가르치니? 그런 겁니다.

뭘 가르쳐요? 사망의 쏘는 것. 켄트론. 사망이 가르치는 것은 죄입니다.

그 죄를 오늘 본문 롬7:9절의 ‘죄는 살아나고’에서 ‘살아나고[아나자오 ajnazavw 다시 살다.]’ 위의 것으로 이해시키는 것, 이게 켄트론, 자극을 줘서 사망으로 가르치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죽음을 죽으면서 그 죄를 배우는 겁니다. 

‘이게 선악과구나. 이게 죄구나.’ 배우는 겁니다. 쿡쿡 찔러서.

그런데 그 죄가 무얼 가지고 우리를 가르쳐요? 죄의 권능, 죄의 힘, 죄가 가지고 있는 그것, 율법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사망아 네가 쏘는 게 어디 있어?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 있어? 여기서 사망은 ‘하데스’라고도 합니다. 음부.

네가 정복한 건 뭐야? 


그런데 ‘하데스’에서 ‘데스’는 에이돈, ‘보다, 듣다’. 이걸 못하는 걸 하데스 지옥이라고 해요. 

그 하데스가 뭘 정복했어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갖다 주는 겁니다. 

사망아, 다나토스야. 네가 가르치는 건 죄야, 하데스야. 

못 알아 듣고, 못 보는 하데스. 네가 정복한 건 뭐니? 하나님 나라잖아.


우리가 처음부터 못 알아듣고 못 보고 해서 ‘야, 이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 건가?’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부어 ‘이게 아니구나.’라고 하여 열렬히 뛰던 우리를 죽여버려요. 


다나토스, 죽여버리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고, 그 다나토스의 예수님의 죽음, 그 사망이 우리에게 탐심이며, 그게 죄라는 걸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가 무얼 도구로 쓰느냐 하면, 율법을 도구로 쓰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건 아무 것도 없네?

그래서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끝이에요. 감사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니까요. 


‘사망아 약오르지? 이젠 나 못 건들지?’가 아닙니다.

그걸 사도 요한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일5:1 -4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그 예수의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진리였다는 걸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그의 계명을 keep, 내 안에 마음으로 간직할 때에. 하나하나 다 지켜낼 때가 아니라 그 계명들을 마음으로 갖고 있을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열심히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걸 내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랑을 흘릴 수 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을, 사랑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증거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올바로 그분을 사랑으로 전달해 주는 걸 ‘그분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왜 무겁게 지키려고 해? 마음으로 가져.)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호 코스모스가 그냥 이런 세상, 


마귀들이 사는 이 세상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보이는 것으로 세워준 모든 걸 세상이라고 해요. 

그걸 이기는 게 뭡니까? 진리로 깨달아 믿음으로 갖는 것.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거기에 머물면 안돼요.)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김이라는 게 뭡니까? 행위에요, 믿음이에요?

그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게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호 코스모스를 정복, 극복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내용이 있었구나.

이게 세상을 이기는 겁니다. 나가서 주의 군사로 싸우는 게 아니라. 어디 가서 누구랑 싸워요? 마귀새끼는 내 안에 있는데. 


요즘 여름이라고 청년들이 단기선교 많이 나가는데, 더운데 뭐하다가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그 진리 가지고 가서 차근차근 잘 설명해주고 오는 게 선교입니다.

선교라는 말 자체가 설교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된 사람이 무슨 선교를 가요?


그러한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이김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본문 11절이 이렇게 잇습니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무슨 말인가? 또 죽여요? 계속 죽어. 뭐가? 벌써 죽었다며?

자, 죄가 기회가 되어 계명을 갖고 나를 속였어요. 우리가 속잖아요.

그건 인간들,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당연히 속아야 돼. 당연히 선악과 먹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내가 속으면 어떻게 돼요? 누군가 죽어야죠? 

그런데 여기에 ‘나를’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3인칭 단수. ‘그것이 죽었다.’

죄가 기회를 갖고 계명으로 나를 속였어요. 왜? 누굴 죽이려고? 메시아를 죽이려고.

그래야 유리가 구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못 알아먹어야 그분이 죽어요. 

알면, 한 사람이라도 알아먹으면 그분을 못 죽여요. 하나님은 안 죽어요. 

아는 이가 있는데 하나님이 왜 죽어요?


그런데 이분이 죽어 우리가 구원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으면 안돼요. 아니,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죄가 기회를 갖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는 바람에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그가 율법이 되어 죽었다. 그게 11절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이해 못하고 번역을 하게 되면 번역자가 이렇게 첨가를 하고 만들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죽었다’고 번역된 ‘아포크테이노’는 ‘공공연히 살해당하다, 도살당하다, 제물로 죽다’ 이런 말입니다. 그건 딱 한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율법이 되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 법이 죽었잖아. 그러면 너희에게 죄가 해당되니?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완벽한 신의 계시, 그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이잖아요. 

인간은 불가능, 하나님이 계시하셔야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어,가 신의 죽음이니까 그 십자가, 스타우로스는 반드시 서야 되는 거고, 그 자리가 말씀의 완성의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신의 죽음의 자리, 그 자리는 반드시 와야 하기 때문에 율법과 그로 말미암게 되는 죄가 먼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창세전 언약이었죠. 내 아들의 피로 너희를 살릴거야. 

피는 물, 물은 진리의 성령, 진리의 성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러니까 피를 선정적이고 신파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십자가, 피. 철철 흐르는 피...

다 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이런 말이 있는 겁니다.



출 35: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이걸 안식일에 일하면 다 죽여라.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사람들은 안식일 날, 토요일이면 아무 것도 안 해요. 엘리베이터도 안 눌러요. 기다려요. 딴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겁니까? 

미국에서 겪었어요. 왜 안 누르고 있나 했더니 자기는 안식일이라 일하면 안 된대. 그럼 나는? 이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주일에 짜장면도 안 사먹고, 영화도 안 보고, 이런 사람들 많죠? 재건파나 이런 데선 아직도 그래요. 예전엔 토요일 저녁에 왔다가 주일 하루 종일 교회에 있다가 월요일에 집에 갔어요. 버스 타는 것도 안 된다고. 

서머나 교회에서도 주일에 청년들이 볼링 치러 간다고 광고했더니 어떻게 주일에 볼링 치러 가는데 목사가 말리지도 않느냐고 왕창 교인 끌고 나간 사람도 있었어요. 이게 그런 말이에요?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여기서 ‘엿새동안 일 하다’에서 ‘일하다’는 ‘메라카’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가리키는 겁니다. ‘주의 사자, 하나님의’를 뜻하는 ‘말라크’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 일을 6일동안 해. 그런데 7일째 뭐가 와요? 죽음이 와요. 안식이 되면, 창세기 7일째가 안식일이죠. 


7이 되면 죽음이 와요. 그 죽음은 무트, 완성의 죽음입니다. 6일 동안 말씀 듣고 배우고 전하면 7일째는 완성의 죽음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모두 죽여라’에서 ‘모두’는 번역도 안 됐지만, 단수입니다. 누군가가 죽을 거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와서, 안식일에 와서 그 일을 하고 죽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꼭 그 일을, 메시아가 할 일을 안식일에 하신 겁니다. 

왜? 죽으려고.

여기 이렇게 그가 와서 7일째 일을 하고 죽을 거야. 

무슨 일? 말씀 전하는 일. 그 일 하고 죽을 거야. 그래야 너희들이 살아.  그래야 창조가 완성이 돼. 그래서 7입니다. 죽는 겁니다. 그리고 언제 살아요? 8에 살아요. 안식 후 첫날. 


엿새동안 열심히 하나님 말씀 전하고 7일째 그 말씀의 완성으로 죽는 이가 옴으로 해서 너희의 출애굽이 완성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6이라고 보자고요. 왜? 십자가에서 창조가 완성되니까. ‘다 이루었다’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엿새 동안 예수님이 와서 일을 하세요.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 들어요. 수제자까지 도망가요. 엿새동안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돼요. 6일동안, 이 역사 내내 인간들의 무지와 한계가 폭로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7일째에 그분이 죽어요. 안식일에 진리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완성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인생 내내, 6일 내내 ‘하나님이 전부, 나는 nothing' 이걸 알게 되고, 

7일째에 장렬하게 내가 삭제되고 하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 ‘나’가 사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부활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경 내내, 창세기 1장부터 이 약속이 적혀 있어요.


안식일, 7이라는 게 뭡니까? 창세기 1장의 7이라는 숫자는 안식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숫자입니다. 7의 기간에 10의 계명을 갖고 12이 되는 게 성도의 구원의 서정입니다.

그래서 7, 10, 12가 성경에 많이 나오고, 이것들의 배수들은 전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칠칠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이 계속해서 그 계명, 십을 갖고 말씀 하심으로 제자들을 아들, 12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칠칠절의 시작에 뭐부터 해요? 밀을 비벼 먹는 겁니다. 무교병부터 먹고 이 절기가 무엇인지를 시작해서 그 안식, 칠칠절을 완성하고, 이제 그분이 완전히 죽어 12이 부름을 받아 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아버지가 일하니까 나도 일 해.’ 하시는 겁니다.

왜? 죽으려고. 자기를 계시하시려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완성의 칠의 날에는, 내가 하던 일을 멈춰야죠.

우리의 율법적 행위를 멈춰야죠. 왜? 하나님이 이루셨다는데 뭘 도와요? 거기에다가.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 5:12

12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제 칠일은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에 일하지 마.’ 그러면서 애굽 이야기를 해요. 

‘애굽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애굽의 일을 해?’ 그 이야길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했잖아. 왜 네가 그 창조에 뭔가 기여하려고 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의 이야기로 또 바꿔요. 



출20장:10-

10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내가 완성했는데, 창조는 내가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애굽에서 있었을 때의 그 애굽적 일, 세상적 관점의 육적인 일, 율법의 일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넌 안 죽은 거잖아. 너는 엿새 동안에 열심히 하다가 다나토스, 무트의 죽음을 죽어야 돼. 그래야 내 나라에 들어와서 네 할 일 안 할 거 아냐.’

 

‘그런데 지금 칠일에 칠일에 뭘 한다는 건 네가 안 죽은 거잖아. 안 죽은 자는 신자 아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 들어왔다면서, 칠일에 들어왔다면서 여전히 이 말씀을, 계명을 법으로만 보고 거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 어떻게 되겠니?‘


그건 안 죽은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돼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알고 가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이 되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면 그걸 성취하기 위해 쓰인 죄와 계명이 그렇게 나쁜 거냐?’ 하시는 겁니다.



고전2:6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관원이란 말은 통치자, 왕, 세상의 왕, 우리 l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된 자들,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자들의 지혜, 그건 선악구조, 선악체계의 율법입니다.)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nobody!)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한 사람도 못 알아먹어야 그 하나님이 죽어요. ‘너희들이 알아봤으면 그를 죽였겠니?’ 이 말이 아니라. 베드로가 죽지 말라고 했더니 사단이라 그랬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너희들이 못 알아먹는 게 당연한 거야. 그래서 죽인 거야. 하나님을 하나라도 알아먹었으면 못 안 박지. 알아먹는 놈 있는데 왜 박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못 알아먹어요. 생각조차 못해요.)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으로, 진리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영, 말, 진리)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기 전에는 몰라야 된다는 겁니다.)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뭐가? 진리의 영이, 그걸 알게 하려고)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진리는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오기 전의 모든 인간은 전부 못 알아먹고, 선악구조 속에서 율법으로 행하는 죄인임이 선언되고 폭로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쓰이는 죄와 율법이 왜 나쁘냐?’ 7장에서 이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8장에서 ‘그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그 진리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래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거야.’라고 이어지는 겁니다.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언약,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게 호 코스모스, 성전, 율법, 예수, 성경, 인생, 역사, 이런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자체를 가지고 선하다, 악하다, 깨끗하다, 더럽다,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왜 거기에 착념하느냔 겁니다. 그걸로 내가 할 말이 있잖아. 그 말을 들어야지. 왜 그걸 가지고 선하다, 악하다, 뭐하다 그래?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이 결론을 이렇게 내는 겁니다.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고(하기오스, 깨끗한, 순결한)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거야.


누구에게? 성도에게. 그러면 그것 자체가 선이라면 여러분이 죄와 관계가 있어요? 없습니다. 제발 정의의 사도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배트맨, 스파이더맨, 이런 거 너무 많이 봐서 전부 배트맨 되려고 해요. 


그걸 깨달은 자들에게 있어서 죄가 삭제되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영광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안식과 자유와 용서를 허락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어주신 겁니다. 


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라 그랬으니까. 죄가 뭔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런데 왜 교회가 계속 죄만 짓고 있느냐고요. 


세상은 도덕과 윤리, 사회법, 양심으로 스스로 자정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메시아라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율법주의라고 해요. 


그리고 그 패가 가장 좋은 패라고 의기양양하고 있어요. 

다이아몬드 퀸. 하나님은 그들을 데스페라도라고 부릅니다. 무법자, 법을 모르는 자. 

그게 뭔지 모르는 자, 그건 진짜 이김이 아닙니다. 


‘허벅지 찔러가며 세상이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 것, 이게 성도의 삶이다, 이게 이기는 거다?’ 천만에요. 그거 차라리 못하고 ‘나는 예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가 이김입니다. 우리의 이김은 뭐?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돼요. 

그걸 믿으면 여러분이 진리를 가진 게 되는 거고 여러분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가진 그리스도인 역할을 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다나토스의 죽음을 이 역사 속에서 또 죽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무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진리의 씨를 심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역할을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머리와 연합되어 머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머리와 연합되면 그게 또 머리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여자들을 항상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죠?

그래서 가톨릭에서 요즘도 써요. 그 수건이란 단어가 ‘휘장’이란 단어입니다.

예수님 죽으셨을 때 찢어진 휘장, 그걸 쓰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너희의 머리는 남자니까’라고 하면서 그걸 쓰라고 해요. 남존여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의 머리가 남자라는 건 하나님 백성, 신부들, 여자들아, 너희는 머리 아니다. 


‘내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 남편이 진짜 머리고 나는 머리 아니다.’ 이걸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겁니다.

그런데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자들아, 너희는 머리에 쓰면 안 된다.’ 그래요.


보세요. 그러면 이 휘장이 언제 찢어졌어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 찢어졌어요. 

그리곤 지성소가 확 드러나 버렸어요. 다섯, 다섯 개로. ‘아, 이거, 다섯 개가 이거였구나.’

그래서 다윗이 다섯 개 갖고 가서 율법을 죽이는 겁니다. 골리앗, 찢어졌어요. 

왜? 다윗의 물매 자체가 [l'q,(7050, 켈라) 휘장이란 단어입니다.


다섯 개의 휘장, 찢어진 것 가지고 간 겁니다. 진리로 완성된.

찢어졌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안 쓰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은 안 써도 된다는 건 뭡니까? 내가 머리라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에 대머리는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네 머리 위에 누가 있다는 걸 너는 네 신체로 부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신 사람 중에 엘리사, 바울도 대머리였습니다.


엘리사에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려서 곰을 불러 찢어 죽였습니다. 

그건 ‘야, 대머리. 넌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인데 네가 무슨 선지자냐?’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의 신체적인 결함을 지적한 게 아니라. 


‘야 대머리, 넌 부정한 자인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예언해?’ 그런 겁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들을 쓰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자는 머리이기 때문에 대머리여도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휘장이 찢어졌고, 수건이 찢어졌어요. 

왜? 예수의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그래서 우리가 뭐가 되었다는 겁니까? 머리가 됐어요.

그래서 이제 전할 수 있게 됐어요. 이제 그렇게 전하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걸 온몸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겁니다. 행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꺼내든 패가 ‘정말 이것만은 확실하다?’. 아닙니다. 그것부터 누리세요.

Let somebody love you.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게 좀 가만히 있으세요.


애들이 이쁘다고 뽀뽀 좀 하려고 할 때 자기가 하겠다고 들고 뛰면 열 받잖아요.

하나님이 사랑하게 좀 놔두세요. 뭐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성경이 말하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가르쳐 줄게.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해. 마음으로 간직해. 진리를 네가 keep 해.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거야.’ 

제발 들고 뛰지 마세요. 그래서 모세가 그런 겁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좀 보라!’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이 버둥대면 끌고가는 사람이 지쳐서 죽어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감동 오는대로 열심히들 하시되 그게 짐이다, 싶르면 스톱 하세요. 봉사, 헌금, 선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보에도 십일조, 이렇게 나와 있는데, 십일조라는 말은 없어요.

열 개의 계명이 하나로 이해되어질 때 그걸 십일조라고 해요.    

너희들 내가 열 개 줬으니 하나는 꼭 나에게 바쳐. 그렇게 하라고 십일조 준 게 아닙니다.


열 개를 하나로 이해하면 여러분 자체가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다 이해하고 냈으리라 믿어요.그런 데에 너무 부담갖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돈 좀 아껴서 가족들과 휴가도 가고 즐겁게들 사세요. 너무 교회에 갖다 바치고, 그러지 말고.


그러니까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자유하세요.

그분을 누리시고 그걸 좀 자랑하세요. ‘아 맛있다, 아 시원하다!’ 이렇게.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겁니다. 너무 묶이지 마세요. 너무 뭘 잘해 보려고 하다보면 괜히 다른 사람 상처주고 그런다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자유롭게, 그 말씀이 자유하게 하면 그냥 온몸으로 선포하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자유롭게 살아계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저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예쁜 짓을 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의 선은 흠집이 나고, 하나님의 작품은 부수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이렇게 역사를 통과시키시며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진짜 찬송이 우리 안에서 터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