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73 사랑이 선물이고 선물이 영생이다(롬6:23-7-7)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9

롬73 사랑이 선물이고 선물이 영생이다





본문 롬6:23-7-7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원래 이 내용은 2회에 나눠서 하려다가 나누기가 뭣해서 그냥 오늘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조금 길지도 모릅니다. 진리를 배울 선생이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데 하나라도 더 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우리 교회 카페 게시판에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올라왔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죽을 수 있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을 다시 살릴 수 있으니까 잠시 당신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신 건가요? 그러면 십자가는 장난이죠? 어차피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우리에게 그냥 show up 한 거잖아요. 그건 우리가 가진 말의 정의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우매한 질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 죽음 , 죄, 생명, 의, 선...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가진 국어사전의 개념과 많이 달라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가 죽는 그 죽음을 죽으시겠습니까?

이 호 쿠스모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건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입니다.

아기의 탄생, 결혼, 육신의 죽음... 모두가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죽음이라는 게 정말 끝입니까? 그러면 그건 정말 나쁜 건가요? 정말 무섭고 더러운 겁니까? 그걸 누가 결정한 거죠? 그러니까, 이미 그런 (정의에 대한)결정이 내려져 있으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죽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그건 더럽고 악한 거니까. 그걸 누가 그렇게 결정해 놓은거냔 말이에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 하면서도 금방 우리의 선악 체계“로 돌아가서 이건 나쁜 것, 이건 좋은 것,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한 의문을 가져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쓰레기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를 알고 있어도 항상 그리로 돌아간다니까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형으로 주신 세상 속 죽음이라는 건 진리와 분리된 그 피조물의 상태와 결국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영원의 나라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찰나에 불과한 역사 이면의 죽음이고,    

그리고 죽음이 시작이라니까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삽니다. 지옥에서 천국에서. 그러니 차라리 나지 않는 게 좋은 거에요. 그런데 났으면 진리를 알고 가야 되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사는데, 역사는 찰나란 말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시작이고 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는 그 죽음이 마치 끝처럼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거, 무서운 거, 더러운 거, 이렇게 자기들이 결정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는 엘리야와 에녹을 부러워 하는 거죠? 안 죽었다고. 그들이 죽었다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달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죽음과 다르단 말입니다. 육의 죽음이라는 건 영의 생명인 그 진리라는 호흡-생기, 루아흐, 성령-이 끊어지게 되면 인간의 상태는 그저 썩어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그 죽음은 시청각 교재인 겁니다. 


그 죽음에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죽음은  무엇보다 가치있고 선한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죽음마저도 선악의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우리 육이 죽는 건 나쁜 거라고 결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 마음 안에 복음,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죽음이 뭔데요?  

죽음이라는 건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성이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의 끝은 영원으로의 완성입니다. 역사에서의 끝은 어떤 이는 천국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리로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비진리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됩니다. 둘 다 완성이 된 존재로 영원을 삽니다. 영원이란 말이 그건 아니지만 편의상 그렇게 말하자고요. 한쪽을 천국이라 하고, 한쪽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자는 임종, 후자는 사망이라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선과 악의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해요. 죽음은 나쁜 거, 악, 더러운 거. 사는 건 좋은 거, 선, 깨끗한 거.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 게에요. 오늘 본문에도 ‘죄의 삯’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삯의 정체가 사망으로 나와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카리스마, 선물이에요. 은혜라는 말과 그 은혜의 선물이 영생이라는 그러한 진술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우리는 먼저 죄의 개념부터 다시 정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설교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그 전 설교나 다음 설교가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 

‘목적’, 과녁 적, 과녁을 보는 눈이 목적입니다. 과녁을 호라오 하는 눈이 없으니까 과녁을 잘 못 보고 쏴버리는 것이 하마르티아입니다. ‘하’라는 부정접두어와 ‘마르투스’ 혹은 ‘메루스’라는 단어의 합성어가 ‘하마르티아’입니다. 그런데 마르투스는 ‘증인, 증거’란 뜻으로 역시 ‘증인, 증거’란 뜻의 ‘말티온’에서 유래했습니다. 말티온은 법궤 안의 십계명이라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면 ‘하 말티온’은 ‘계명이 아닌 것, 그 계명의 진의가 아닌 것, 그게 죄라는 겁니다. 그걸 잘못 보고 그냥 법으로 알고 붙들어버리면 ’하마르티온, 하마르티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율법을 내 남편으로 잘못 붙들어 버리면 내 한 쪽 부분이 뭐라 그랬어요? 메로스(mevro"부분, 몫)라 했죠? 그 한쪽 부분이 나한테엉뚱한 남편으로 붙어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 메로스, 하마르티아‘가 죄인 겁니다. 엉뚱한 남편이 내 옆에 붙어버리는 게 죄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진리는 뭐겟어요? 진리 진리 하니까 뭐 대단한 거 같죠? 법을 깨고 선악의 법에서 벗어나는 게 진리에요. 법, 율법은 뭡니까? 호 코스모스, 세상에서 벗어나는 거. 눈에 보이는 이것, 여기에 같혀서 엉뚱한 하나님 섬기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야말로 그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진리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슴을 율법이라는 짝으로 곡해해서 붙들어버리면 거기에서는 남편과 생산하는 게 뭐에요?


행위라는 죄만 나오는 겁니다. 율법으로 붙들어 버리면 . 그러나 그 말씀을 진리로 붙들면? 거기에서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 구절구절이 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그 아브라함이 우리의 대표죠? 그가 하갈이라는 율법을 만나면 이스마엘이라는 죄를 낳는 거고, 사라라는 은혜의 아내를 만나면-그게 하늘의 어머니라고 하죠? ‘남자가 부모를 떠나’가 아니라 ‘부모로 떠나’거든요. 부모로 떠나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우리를 낳는 분이 하늘의 어머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를 낳는 그 어머니, 그남편, 다 같은 말입니다. 그걸 은혜로 만나게 되면 거기에서 생명만, 찬송만 나온다니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죄의 본래 이름이 뭡니까?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무의 열매를 보기에 좋은 선악과로 보게 되면 그걸 선악의 법으로 먹고 죄만 출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출산된 열매들이 어떻게 보이겠어요? 선악의 열매로 먹고 선악과만 낳아 계속 선악의 세상에서 , 율법의 세상에서 그 선한 율법의 모습, 그 행위를 낳는데 어떻게 보이겠어요? 멋지게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 죄를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상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의 죄는, 이 아담들의 율법세계에서의 죄는 멋지게 보입니다. 깨끗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하게 보인다니까요. 왜? 율법을 먹고율법과 결혼해서 율법과 낳는 행위라는 자손이 뭐겠어요? 그 열매가 뭐겠어요? 인간들이 좋아하는 그 열매란 말입니다. 물론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죕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인간 세상이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상식을 가지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건 죄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게 더 무서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래적 마음인 선악구조 속에서 선하다고 선택한 것이나 악하다고 택한 것, 그래서 안하는 거. 이게 전부 죄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공부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들을 때 우리의 두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옳게 듣건, 그르게 듣건 그 들은 것으로 듣는 족족 죄로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이 전부 어떻게 시작해요? ‘아쿠오, 너희가 들었다’ 어디에서? ‘엔 아르케’ ‘태초에’ 내가 한 이야기를 너희는 그렇게 들었잖아?라고 이야기 하세요. 그래서 뭐라고 하세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라고 내가 말했을 때 너희는 어떻게 들었다는 겁니까? 율법에서 뭐라 그래요? ‘희생제사 드려’로 듣잖아요. 우리는 그러고는 열심히 희생제사 드려서 죄 짓죠? 간음하지 마! 하면? 그거는 또 ‘간음하지 마!’로 들어요. 그래놓고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세상과 간음하죠? 살인과 간음, 배웠죠?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주시는데, 그걸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들어도 죄를 짓고, 반대로 들어도 죄를 지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들이 두 마음으로 판단해서 선하다고 판단된 걸 열심히 해도 죄고, 악하다고 생각해도 죄입니다. 그 두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한. 


그래서 새 마음 준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근성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신의 말을, 감히 상상도 안 되고 감지도 안 되는 그 신의 말을, 진의를 알아들어요? 그건 오만입니다. 못 알아 먹습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을 인간이 알아 먹으면 안 되요. 못 알아듣는 게 정상입니다. 피조물은 신의 말을 못 알아듣고 피조물 수준의 일을 해야 정상입니다.   


어떤 농부가 자기 소를 남의 배추밭에다가 묶어놓고 “너, 배추 먹지 마!” 그리고 가서 3일 있다가 왔는데 진짜 그 소가 안 먹었다면 그 소는 아픈 소, 아니면 미친 소입니다. 소는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라는 주인의 말을 못 알아 먹어야 되고, 나는 이거 먹고 싶다는 자기의 본능을 억제할 수도 없어야 소입니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 못 알아들어야 정상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 쟤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냥 가서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전해.” 그러신 겁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스스로 자, 그럴 연, 그렇게 되는 게 맞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해놓으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조물이 그런 수준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그럼 그게 무슨 하나님입니까? 그게 무슨 옴니셔스의 하나님입니까? 피조물이 당연히 그 수준이라는 걸 알면서 “너 왜 그 수준으로 못 올라 와? 너 왜 하나님처럼 못해?” 이렇게 화내는 게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니까요. 왜? 선악과 따 먹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됐다고 믿고 있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그 수준에서 하나님과 맞짱을 뜨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못 알아들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 알아들은 말로 열심히 율법과 합방하여 행위의 자손을 낳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그러니 선악과 주자마자 날름 따 먹은 겁니다.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욕구와 본능, 운명처럼 타고난 생래적 본능을 ‘에피뛰미아’라 하고, 그걸 성경이 ‘탐심’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건 나쁜 게 아닙니다. 물론 나쁜 건데 어떤 목적 하에 주어진 거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탐심, 이런 단어를 대할 때 얼른 놀부나 스크루지 영감을 떠올리죠?    

그들이 가진 거, 그건 나쁜 거,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욕심 부리면 그게 죄를 낳고 거기서 이제 

죽는거야’, 이런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에피뛰미아, 탐심은 어떤 존재의 생래적 성향을 가리켜요. 마치 호흡처럼 붙어있는 그 존재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에피뛰미아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이 우리 말로는 ‘탐심’으로 밖에 번역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 수준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호흡처럼 갖고 있는 성향, 그 성향이 에피뒤미아인데, 우리처럼 두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걸 선악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선택하여 그걸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는 그런 우리, 그런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인 성향이잖아요. 어떻게든 그걸 둘로 나누어서 하나를 택하여 나의 유익을 위해 쓰잖아요. 그게 나의 보람이건, 나의 가치이건 뭐 그런 거. 그래서 그 성향을, 그 탐심을 에피뒤미아를 나쁘다고 하는 거지, 내 마음이 하나면 그 에피뒤미아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돼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했다.” 이 말씀은 뭐죠?

똑같은 단어인데 그분은 독생자, 모노게네스, 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그 에피뒤미아는 선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7절.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들어보세요. 여기에서 탐심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에피뒤미아, 탐심, 우리가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그 성향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 존재에게서 발생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 그것이 율법으로 작용할 때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에피뒤미아, 인간들이 원하는 바, 그 에피뒤미아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바, 에피뒤미아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그러한 두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요건 해야 할 것, 요건 하지 말아야 할 것’ ‘정한 것, 부정한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즉시 둘로 나누죠? 그래서 율법은 둘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면 그들의 성향이, 에피뒤미아가 둘이기 때문에, 두 마음이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그 진리를 둘로 나누어 버린다니까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자기들의 유익에 합당하다는 것을 택하여 그걸 해버리는 거, 하나님은 그걸 죄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뭔가를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그들의 두 마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준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내가 내 율법을 주면 드러나. 한 번 줘 볼까? 줬더니 금방 둘로 나누어서 희생제사 드리고 율법 지키고, ‘이건 해야 돼, 이건 하지 말아야 돼’ 자기들이 다 나누어 놨어. 마치 아브라함처럼 ‘세 번째 그 제물 드려’ 했더니 반으로 쪼개 놨어요. ‘바탈’ 양쪽으로 쪼개 놨잖아요. 자기를 중심으로.


바울이 말하죠? 자기가 율법의 진의를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거라 생각했다고.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런데 진리를 알고 보니까 그 자연스러운 것이 호흡, 에피뒤미아, 탐심,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게 죄더라. 


그래서 ‘율법이 그 자연스러운 걸 죄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탐심으로 알았겠느냐?’ 그러는 겁니다. 이 자연스러운 게 나는 의라고 생각해서 열심을 부렸었다.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진리를 알고 나니까 그게 죄더라.


‘그게 탐심이라고, 율법이 하지 말라고,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그 탐심을 죄로 알아들었겠어?’

바울이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울에게 해가 됐나요? 유익한 거였어요. 그러면 죄가 뭐 그렇게 나빠요? 


바로 그게 말하는 성전, 말하는 율법으로 오신 예수가 하신 일이에요. 

옛성전은 말하지 못하는 성전이었고, 말하지 못하는 율법이었어요.

소리가 없는 율법. 문자로만 줬거든요. 


그런데 그 율법이 와서 말을 하네요. “그건 이런 거였어.”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도 한 사람도 못 알아 먹어요. 그래서 “내가 이 옛성전과 함께,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야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 번째 성전으로 서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너희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야!”라고 하죠? 성령은 뭐?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내가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 되어, 질그릇이 되어서 -질그릇은 유약을 바른 게 아니라 초벌구이 해 놓은 거니까 툭 치면 깨져요. 언제든지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 질그릇의 의미입니다. - 자칼과 네케바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세 번째 성전입니다. 


그러한 진리와 체계와 차서, 이게 성전 번제단부터 착착 체계와 차서, 이게 ‘티데미’라 했죠? 이렇게 서 있는 걸 ‘아, 이게 그거야?’하고 알게 되면 위로 똑바로 서는 것, ‘이스테미, 스타오로스,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게 언약입니다. 그 진리와 체계와 차서는 절대로 너희 법에 묶이면 안돼. 이 보이는 세상에 묶이면 안돼. 이건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여기에 묶이면 안돼. 그렇게 해방을 가르치시려는 그 하나님의 학습방법이었어요, 그게.

그걸 헬라어로 ‘도키마조’라 해요. 그 ‘페이라조’가 실패하기 위해 던지는 시험, 세상에 던지는 시험이죠? 반면에 도키마조, 하나님이 던지는 시험은 전부 실험실에 들어가서 100번 실험을 했을 때, ‘야, 이거 뭐 다 결과가 같네! 그러니까 이건 진리야.’ 할 때 그 시험, 그게 도키마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하는 시험이 아닌 거. 그런데 은혜 밖의 아담들은 도키마조를 페이라조로 받아 멸망으로 가더라는 겁니다.


롬7:14-16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내가 죄를 지으면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율법이 죄냐? 이렇게 물어요.

여태까지는 ‘그것만 죄야.’ 그래 놓고 갑자기 ‘이 율법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준 거라면 그게 죄냐?’ 이렇게 물어요. 그리고는 ‘율법은 신령한 거다.’ 그래요. 


프뉴마티코스. 프뉴마는 영, 성령이죠? 프뉴마티코스, 옳은 말, 깨끗한 말이 된 거. 신령한 거예요. 율법은 원래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율법은 신령한 거라는 거죠. 

그런데 율법을 육신에게 주면 육신들은 그걸 사용하여 죄만 낳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낳는 것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도 못해요. 자기들이 낳는 걸 뭔지도 몰라요. 바울이 그 말 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행하는 일을 알지도 못하더라.


분명 자기 안에 원하는 바가 있어요.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래, 모든 건 선악을 판단하면 안돼. 그래 모든 건 그렇게 용서가 되는 거지.’ 하는데,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금방 ‘죽음은 나쁜 거지’ 어느 새 나는 선악의 틀 안에 들어가 있다니까요.

나의 육신은 나의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행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해요.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바로 그거. 그 죄를 행하는 것이 

율법이 선하다는, 율법이 행하고자 하는 일을 완수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렇게 되는 게 맞다.’라는 겁니다. 


율법이 그거 하라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율법이 도대체 무얼 하러 왔기에 그게 율법이 선한 거라는 걸 증거하는 거야. 내가 죄를 짓는 것이-여기서 죄는 도덕적 윤리적인 죄가 아닙니다. 제발 그 수준에서 벗어나세요. 내가 설명 안해도 되게. -선악체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것이 율법이 와서 자기의 일을 완수한 결과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라는 겁니다.    



롬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7장 12-13절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도 자기가 하는 일들, 자기가 하는 일들을 죄 아니라고 하니까 계명이 와서 ‘그것도 사실은 죄야.’ 하고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받은 내가 진리가 뭔지를 알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어느 틈엔가 그리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아, 율법이 바로 나의 처음 자리를 이렇게 드러내려고 온 게 맞는 거구나.’ 하면 율법이 선한 거죠? 잘한 거잖아요.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일차적으로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이 뭡니까? ‘내가 죄인 중의 죄수 맞습니다.’는 고백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나는 잘 지켰어요.’가 아니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죄덩어리, 나는 그냥 뭘 주기만 하면 그냥 바로 선악으로 갈라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그 죄를 짓는 자다, 에피뒤미아가 나고, 내가 죄잖아요. 

‘나는 그냥 죄덩어리네.’그걸 알았으면, 내가 한 것이 다 죄라는 걸 알았으면 이제 그거 안 하면 되잖아요.  


‘아, 희생제사 드리는 게 잘 하는 건줄 알았는데, 하나님한테 칭찬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죄라네.’ 그러면 희생제사 안 지내면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올 때 소 한 마리씩 안 가져 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이 지금 그거 알았기 때문에.


진리는, 생명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땅에다 생명나무를 심어요? 못 심습니다.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그 생명 못 심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거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안 열려 있는 게 맞는 거라니까요. 땅에는 그거 안 열려요.


땅에는 온톤 죄와 어둠 밖에 없어요. 그게 피조세계의 한계란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온통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라 하는 겁니다. 

혼돈, no structure. 그릇이 없어요. 공허, emptiness. 내용, 컨텐츠가 없어요.

땅에는 틀도 내용도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게 땅의 실체입니다.  


이 호 코스모스, 세상, 우리 육체... 이건 그냥 없는 겁니다. 

우리도, 모든 물질도 다 원자로 되어 있어요. 원자는 보이지도 않고 방만합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막 돌죠. 이 방이 원자라면 핵과 전자는 보이지도 않는데, 전기력의 법칙이라는 게 주어지니까 이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법, 말이 빠져나가면 없는 겁니다. 법칙을 빼면 우리나 세상 전체는 모두 먼지도 허깨비고 진공인 겁니다. 그러니까 없는 게 맞아요. 헛거고, 혼돈과 공허입니다. 거기에 말이 떨어지니까, “있어라” 하고 말이 떨어지니까 뭔가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nothing들이 뭘 자꾸 안다고 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어요. 

너희가 무슨 존재냐?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것을 알려주려면 그냥 흑암과 죄, 피조물, 그 없음들의 한계, 그걸로 선악과, 이게 뭔지 가르쳐서 이게 아닌 어떤 걸 가르쳐 줄 수밖에 없어요. 왜? 그건 직접 이 그릇에 못 담으니까. 


그러면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을 가르치고, 죄를 통해 의를 가르치고, 어둠을 통해 빛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게 왜 나빠요? 그렇게 해서 하나로 돼야 자유롭다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그 죄가, 어둠이 뭔지 알아먹으라고 율법, 계명, 말씀을 주셨는데 그걸 알

아먹으려고 하지 않고 지키려고만 하네? 그러면서 죄를 지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뭔지 알고 하지 마!” 했더니 그걸 지키면서 “자존심이 있지, 이건 내가 해버린다.” 이러는 겁니다. 없음, 먼지도 아닌 것들이.


오늘 율법, 율법 하니까 자꾸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계명들을 떠올리는 거 같은데, 율법은 “선악과 먹지 마!”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 십계명, 모세오경, 성경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총칭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과 계명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이 가진, 아니 인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그 생래적 본성인 에피뒤미아, 탐심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묶이면 그게 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도구가 호 코스모스요, 말씀인 겁니다. 하나님을 직접 설명 못하니까. 문자에 소리에 갇힐 수 없는 그분을 어떻게 설명해요. 인간이 뭔지를 설명해서 그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 짓지 마!’ 말씀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죄가 뭔지 알았어? 이걸 물어보고 싶으신 겁니다. ’나=탐심=죄‘ 이 공식을 잊지 마세요. 그걸 확실히

깨닫고 ‘나’와는 다른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거,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야 진짜 완성품이 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그 진짜 사람, ‘그리스도를 품은 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요. 이 그릇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품은 거, 그게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자칼과 네케바의 이야기가 나오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사람’이 되는 거. 자칼, 남편이 하나님의 역할이고, 네케바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 연합하여 사람이 되더라. 그게 목적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여기서부터 나온 겁니다. 너희들은 그 자칼을 신랑으로 담아 그 진리를 이 안에 담아야 사람 되는거야.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야. 그 남편을 기다려야 돼.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으로 나오는 겁니다. 


메시아는 창세기, 태초부터 계시된 겁니다. 그런데 엉뚱한 메시아를 자꾸 기다려요.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내 마음에 품는 것이 이 역사의 목적지다,를 창세기 1장부터 계속 가르쳐 주는데, 인간들이 엉뚱한 메시아를 자꾸 기다리는 겁니다. 


이 포로된 자리에서 구해줄 메시아, 가난에서 구해줄 메시아는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진리, 말씀.. 그러니까 그 진리를 안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해 내게 이해되어진 그 진리를 안 사람이 그리스도, 메시아를 만난 것인데, 그게 되지 않은 사람은 2000년 전에 죽은 그 예수가 메시아 아닙니다. 관계가 있어야 메시아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태 메시아 기다리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수준이 딱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나라는 존재의 구성 원소 자체가 전부 죄더라’는 걸 밝히 보여주는 역할로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죄, 탐심이라고 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게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의미에서. 그게 나라니까요. 그 율법이 오자마자 거울로 나를 딱 비춰주는 겁니다. 그걸로 전부 죄만 져. 


그러면 우리에게 그 에피뒤미아, 탐심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면 죄라는 게 성립이 안 되겠죠? 그러면, 죄가 없으면 하늘의 의를 설명할 수 없겠죠? 그러면 죄가 나빠요? 절대로 있으면 안되는 건데 어떤 존재에 의해 우발적으로 생긴 게 죄인가요? 죄가 아니면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하늘을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죄는 짓지 마세요. 그러면 경찰이 와요. ‘그러면 이제 막 살아야지’ 하면 잡아 가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렇게 사세요. 세상에서는 세상의 것, 가이사의 것 주면서 사세요. 그걸 진리로 끌어오지는 마세요.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고작 그 수준에서 성경을 경찰, 검사로 보는 겁니다. ‘이건 해! 이건 하지 마! 아니면 잡아 가, 지옥 보내’ 이렇게.


하나님은 피조물의 한계인 두 마음, 하나님일 수 없는 그 마음을 율법을 통해 밝히 보여주

면서 그걸 죄라 이름 하여 그 잘못된 과녁을 진리로, 은혜로 바로 잡으심으로 해서 당신과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에이레네’라고 하시는 겁니다. 둘이 한 멍에 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것, 그렇게 한 방향으로 가는 ‘벗’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겁니다. 피조물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 전체 과정, 그 진리의 차서, 체계를 ‘피스티스’라 합니다.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하면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 신실하시다’는 말이 ‘피스티스’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믿음이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시니 너희도 믿음이 되어라, 하시죠. 그러한 진리의 차서, 체계로 우리를 가르쳐서 ‘아, 이게 그거군요!’ 알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면 그걸 믿음이라고 해요. 내 믿음, 그리고 나를 그리로 끌고 가는 하나님의 열심을 피스티스라는 그 열심 속에 죄가 사용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종교에서 죄라고 하는 그걸 하지 말라고 그들과 똑같이 그걸 주셨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런 죄관 자체가 없으세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의 처음 자리를 ‘호라오’ 직시하게 하고, 진짜 영의 눈으로 보게 하고, 거기에 절망하게 만들고, 마침내 그 죄인의 자리에서 장렬하게 ‘아, 나는 아니구나. 진짜 나는 허깨비네. 먼지 맞네!’   

그렇게 장렬하게 사망에 이르게 하여 새롭게 살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생명이고, 그게 사는 겁니다. 죄는 그걸 위한 하나님의 도구인 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오, 거룩한 죄여!’라고 했습니다. ‘오, 복된 죄여’. 했어요. 알고 보니까 죄가 그렇게 좋은 거야. 16세에 사생아 낳고 한 그가 그런 걸 통해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되니까, 그 죄가 자기에게 너무 좋은 겁니다. ‘오, 복된 죄여!’

기독교가 어거스틴, 칼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런 내용은 다 삭제하고 엉뚱한 것만 붙잡고 그냥...  


그 죄가 없었으면 나를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겁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어떻게 신을 논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신도 나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죄라는 걸 육의 세상과 다르게 보는 걸 성경이 뭐라고 해요? 메타노이아, 회개.


‘아, 그게 사실이야? 그렇게 파르르 떨 게 아니었구나!’ 하고 바르게 보는 거.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걸 그렇게 보는 순간, 죄라는 게 삭제되죠? 그 죄의 삭제를 용서라고 하는 겁니다. 원래 죄 없음! 이렇게 그걸 못 보니까 계속 거기에 묶여서 교회에 와서 울고 불고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죠? ‘울고불고 신앙’.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데, 보면 다 울어. 왜? 거기서 못 벗어났거든. 자기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시어머니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남편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그러니까 오면 설움이 복받쳐서 다 울어.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데. ‘아, 그게 사실은 나를 선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었구나!’ 그걸 알면 왜 울고불고 하느냐고요. 물론 육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완전히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기쁨이 되면 범사, 모든 일이 감사할 거 아니에요? 그게 안 되면 범사가 감사가 안돼요. 


사람 죽이고도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거 감사하라고 그래요. 그게 네가 누군지 알게 해 주는 거라면 너는 그것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핫타’입니다. ‘빗나가다, 죄 짓다, 타락하다’는 뜻입니다. 하마르티아와 똑같아요. 그런데 ‘핫타’에는 ‘회개하다, 정결케 하다, 화해하다, 용서하다’는 뜻도 있어요. 말이 돼요? ‘죄’라는 단어 속에 ‘죄 사함, 용서, 의, 회개’가 같이 들어 있다니까요.

그 죄로 용서에 이르라는 겁니다. 그거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알아, 죄가 뭔지를 올바르게 알아서 이제 ‘그건 아니구나’라는 걸 알아먹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죄를 올바로 바라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신앙생활 하면서 계속 뭔가에 묶여서 소화도 안 돼요. 말씀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게 여러분을 더 묶어요. 점점. 

다시 정리 합니다.

죄가 뭔지를 아는 게 선입니다. 죄가 뭔지를 모르고 열심히 행하는 게 죄입니다. 잘 구분하셔야 해요. 그렇게 죄가 뭔지를 점점 알아가다가 ‘아, 이게 죄로구나’ ‘아, 이게 바로 나구나, 내 안에서 긁어낼 수 없는 두 마음, 에피뒤미아, 탐심이라는 거구나’ 이걸 깨닫는 겁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말씀이 없었으면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죠.

‘아, 이게 그거구나!’ 깨닫게 됐을 때 그걸 성경에서 ‘죄의 완성’이라고 해요. 죄가 죄의 역할을 완수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면, 그리고 ‘아, 이게 하나님이 원치 않는 거였네’라고 내가 인식하게 되면, 그게 바로 율법의 선함이 시인되는거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율법의 역기능이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키는 나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게 바리새인이었죠. 그걸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약1:13 사람이 시험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페이라조 안 하신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피뒤미아)에 끌려 미혹됨이니(하나님은 도키마조 하시는데 그걸 올바로 못 알아먹고 페이라조 해서 다 멸망한다는 겁니다)

15 욕심이 잉태한즉(에피뒤미아가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장성하다는 말은 ajpotelevw(658, 아포텔레오) ‘성취하다. 완전하게 완성시키다’는 뜻입니다. 죄가 완전히 성취가 되면 사망이 된대요. 사망은 ‘다나토스’. 진리의 완성의 죽음. 점점점 죽어가다가 확 죽어서 뭔가를 완성하는 게 다나토스입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할 때 그 죽음이 다나토스입니다. 날마다 죽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네’라고 완성되는 겁니다. 이걸 다나토스,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게 나쁜 게 아닙니다. 

네크로스는 우리 네페쉬가 숨이 끊어져 죽는 것, 시체.

다나토스의 죽음을 히브리어로 ‘무트’죠. ‘무트 타무트’, ‘죽고 또 죽으리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너희는 정녕 죽을 거야 하셨죠? 그 무트를 파자하면 ‘말씀으로 완성되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너 선악과 먹고 너희들이 죄를 낳게 되면 그 죄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죽게 될거야. 말씀의 완성으로.’란 뜻입니다. 무트 타무트의 죽음으로 죽어야 구원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 선한 죽음으로.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하시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다, 하세요. 그러면 그분이 아버지의 뜻, 말씀을 완성한다면 어떤 죽음으로 끝나야 해요?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고 죽는 겁니다. 그 죽음이 왜 나빠요?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죽고 죽다가, 날마다 죽다가 결국은 그렇게 언약의 십자가에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하고 죽는 게 구원의 차서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가 그렇게 죽은 겁니다. 근데 그게 왜 나빠요? 그걸 보고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어요?’ 이렇게 물어봐야 되느냐고요? 


여러분,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갖고 오신 분이다, 라고들 말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의 신성이 죽은 겁니까, 인성이 죽은 겁니까?” 물으시는데 성경 어디에 신성, 인성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건 조직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지식 수준에서 만들어낸 말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오신 사람입니다. 신성은 뭐고 인성은 뭡니까? 제발 모르는 말 좀 쓰지 마세요. 그분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주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왜? 그 하나님은 세상이 듣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엘로힘으로, 그 주어로도 나오지 않는 그 하나님이 ‘아마르’ 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엘로힘으로 너희에게 맞는 하나님을, 그 수준에 맞는 하나님을 제시해 준 겁니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그분, 우리가 그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분은 아닙니다. 왜?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위격이 다르다고 하는데, 'one substance Three person'은 또 뭐냐고요. 위격이 뭔지 아세요?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는데 그게 뭔지 아느냐고요?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가지고 자꾸 그런 이야길 한다니까. 그냥 성경말씀 그대로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거’라고 갖고 있으면 돼요.


삼위일체가 있니 없니, 그딴 소리 왜 하느냐고요. 난 거기에 아무관심 없어요. 우리가 담을 수 없는 피조세계, 호 코스모스로는 도저히 감지도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우리 수준에 맞는 하나님이 오셔서 제시해 주시는 건데, 그분이 그 큰 하나님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굳이 하자면 위격이 다르다고 하잔 말이에요. 그리고 이 하나님도 못 알아먹었기 때문에 이제 진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되셔서 들어오시는데, 그걸 다른 위라고 하자고요. 

그러면 삼위일체가 뭐 어려워요? 난 신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 교수가, 세계적인 석학이었는데,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계속 물어봤더니 나중에는 “야, 그게 논리로 따지는거냐? 그냥 믿어야지.” 그래요. 그러면 왜 가르쳐? 자기도 설명을 못하고 그냥 믿어요. 뭐 페리크레시스 해가지고 뭐 셋이서... 이런 신학의 틀이 이해가 가던가요? 어렵지 



않아도 진리가 되면 그런 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누구와 논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예수님의 죽음, 그건 당연한 겁니다. 호 코스모스는 그렇게 죽어야 돼요. 왜? 진리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 기고만장한가 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내려와서 나를 위해 죽어야, 죽어줘야 된다고 우기는 게 인간들이라니까요. 이 nothing들이 하나님의 법, 그 말만 쏙 빼버리면 그냥 허깨비인 것들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마치 그게 기독교인양...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을 살게 될 성도들의 역사 속 대표이신 겁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율법으로 오셨겠어요? 그건 말 못하는 율법, 그저 서있는 옛성전, 아무도 못 알아먹어. 자연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데 진리를 말하는데, 그냥 말 못하는 이 호 코스모스, 그 역할을 하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먹어야 돼요.     


단지 그 옛성전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옛성전의 진의를 설명하시고 간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하는 율법이었어요. 율법이 뭡니까? 말씀이 뭐라 그래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다’ 그래요. 그 말씀이 어디에 적혀 있어요? 성경에.


그러면 성경 보고 ‘아이고 하나님!’ 이래요? 성경이 말하는 바, 그게 하나님이라며요?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적혀 있다고 ‘아이고 하나님’ 하면서 들어가고 나오면서 절하고 하나요?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에게는 성경이 쓰레기인 것처럼 그 예수도 쓰레기인 겁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창기들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고 먹기를 탐한 목수의 아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직접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말씀이고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어서 마귀들이 살아난다, 마귀에 불과한 우리가 살아난다’ 이런 저급한 공식을 역사에 새기러 온 게 아니라 호 코스모스의 세상, 그 율법이 죽어야 그리스도라는 영의 세계가 열린다는 걸, 피조 세계의 그 한계를 밝히러 몸소 오신 겁니다. 그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주어진 여호와, 엘로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만을 추억해요. 아니, 그게 나와 상관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그걸 알아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해 내가 누군지를 밝혀주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늘의 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추억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만큼 나에게도 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분을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그분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죽어야 하는데, 그분을 죽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여전히 살려두고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희생제사 드려야 되는 겁니다. 영단번에 드려진 그 제사가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계속 율법을 지켜야 돼요. 


율법 율법 하는데 율법은 레위기의 그 율법 아니고 ‘자기의 행위만을 의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율법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앞으로 새벽기도 안 하려고 해요. 그걸 법으로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남편 밥도 안 gi주고, 또다른 율법 만들어서 계속 지켜요. 심지어 절기도 지켜.  초막절 유월절도 지켜요. 그러면 헌금이 많이 들어오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예수님 안의 아버지를 봐야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묶여 있으면 절대 안돼요. 그건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나를 절망하고 미래의 나를 소망하면서 현재를 불안하게 살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미래에 여러분이 가야 할 그곳이 무너지 알기는 하세요? 그건 여러분이 소망할 게 아니에요. 오늘날 그게 진리로 내 것이 되어야 비로소 소망이라는 게 생기는 거지, 막연히 미래에 가야 할 그곳, 확실하지도 않은 그것. 그런 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죽었어요. 그런데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방법이 나오는데,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뭘까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 했으니 적어도 그 예수는 아닐 겁니다. 그리스도는 영이죠? 그러면, 영은 반드시 그릇이 필요하죠? 자칼과 네케바처럼. 


그 그릇은 바로 ‘나’,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내가 그 진리를 담은 질그릇이 되어버리면, 그리고 나는 질그릇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알아버리면, 그때 그 법이 나에게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가. 그 그리스도를 담은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해요. 그리스도는 메시아, 메시아를 만난 자.


과거의 그 예수님, 그분의 하신 일을 추억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뭔지를 내가 알아서 그것이 진리를 담고 온 어떤 모형이었다면, 내가 그것이 담고 있는 걸 알았다면 그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약속의 후손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준 건데, 아브라함이 그걸 알아버렸죠? 그러면 그 아들은 더 이상 필요 있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고 남편이 사는 게 출애굽기 4장의 피남편 이야기입니다. 그게 구원이다. 예수는 그 아들의 모형이었으니까. 이삭도 예수의 모형이었고. 내가 그 진리를 알아버리면 내가 그 예수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택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역사 속 예수를 계속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죽었습니다. 그 세상은 죽어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다른 것으로 왔잖아요.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왔어요. 그 예수를 추억하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하나님, ‘나’를 위해 그 수모를 당한 그 하나님, 여전히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나’가 뭔데.. 진리를 담은 하나님은 당연히 죽으셔야 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없어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왜?)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진리인 그리스도)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는 ‘나를 그로 보낼게’. 왜? 내 얘기는 못 알아 먹으니까. 함께 생활하면서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니까. 그러니 옛성전은 당연히 없어져야지, 가야지! 어디로? ‘문 밖으로’라고 쓰여 있어요. 문밖으로 내가 가야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너희에게 올거다. 내가 간다는 건, 이 호 코스모스의 대표가 되어 간다는 건 너희들 전체를 내가 지금 부정해 버리는 거니까. 그게 부정이 안 되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가 너희에게 오겠니? 어떻게 그게 너희 것이 되겠어? 그러니 내가 가는 게 유익이야. 그러세요. 그리고는 내가 그로 올게,라고 하세요.     


그가 와서,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 하세요. 왜? 세상 죄가 되어 죽었으므로 호 코스모스를 책망하시는 겁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가 뭐라는 거죠? 예수님이 옛성전으로 와서 율법으로 말을 했는데, 그 진의를 못 알아먹고 계속 희생제사 지내면서, 율법 지키면서 진리인 그분을 죽였잖아요. 그게 죄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내 말이 뭔지 알아먹었으면 안 죽지. 그런데 그건 안되는 거거든. 그게 죄야. 의에 대하여도 책망할 거야,)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이건 ‘아버지로 가니’, ~께로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브, 하나님의 성전. 내가 성전이 되면, 그리스도 성령을 담은 성전이 되면 내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때 이걸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고 하신 겁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하신 겁니다. 



내가 아버지로 가면 이전의 역사 속 예수는 필요할까요?

진리를 설명해 주는데, “직접 아버지로 가서 너희가 더 이상 이 예수, 나를 보지 못하는 게 의야!” 하시는 겁니다. 

“나를 보지 못해야 의야. 나를 자꾸 살려내려고 하지 마!”

그건 사탄이라고 그랬죠?


“왜 나를 못 죽게 해? 왜 나를 자꾸 추억하면서 나를 살려내어 나를 섬기려고 해?”

그게 베드로였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랬어요. 

“나를 못 봐야 그게 의야.” 그랬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으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왜? 아직 내가 아버지로 오지 않았으니까. 말을 하다가 ‘그만 하자. 어차피 못 알아 들을 거.’ 그러신 겁니다. 왜? 아버지로 오셔서 다 알려줄 거거든요. 

그런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그래요.   


세상 임금, 이 임금이라는 말이 첫째, 대표라는 겁니다.

세상은 뭐? 호 코스모스. 예수님이 뭘 지러 왔다 그래요? 세상 죄를 지러 왔다 그러죠?

그러면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의 대표가 누굽니까? 이 세상에 죄인 중의 괴수로 온 분이 누굽니까? 그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 갔으니까 예수! 

여기서 세상 임금이 누구? 마귀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으로 내가 심판 받을게’라고 하면 예수님이 세상 임금으로 심판을 받은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할 수 있어요?


그걸 내가 이미 알았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심판 못해요. 그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 임금, 그게 사실 나죠? 죄인 중의 괴수가 나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나는 자격 없어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심판 받았잖아요.’

이걸 아는 나를 하나님이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생명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해요.


요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여기에 ‘엑소’ 문밖,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문밖으로 나가는 걸 ‘엑소’, 이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던져지리라고 해요.

포도원 농부들이 아들이 오니까 울타리 밖으로 던져 버렸죠?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옛성전 문밖으로 던져지리라, 그래요.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자 그 세상 임금으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던져질테니 내가 땅에서 그렇게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수 있어. 왜? 그게 씨 심는 죽음이니까)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세상임금이 누구? 자기란 말입니다.)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야, 율법은 그리스도가 영원하대. 그러니까 넌 죽으면 안되는 거잖아?)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봐버리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온 

그 하나님으로 보고 그를 섬기려고 하면 이 분은 죽으면 안 되는 겁니다. 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바리새인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 때려 죽였잖아요? 그리스도는 죽으면 안 된다며? 

나는 가서 그리스도로, 아버지로 와야 되는 거지. 지금 너희들은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그런데 내가 안 가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계속 남아서 가르친다고 그거 알아듣겠어? 그럼 내가 가야지. 나를 죽여야지. 내가 너희들이 되어, 이 호 코스모스의 모형이 되어 죽어야 그 진리가 오롯이 밝혀지고 드러날 거 아냐? 이러시는 겁니다.


마24:4-5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이름은 말씀)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진리의 성령으로 오시는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옛 성전의 역할을 하는 그를 그리스도라 하며 다들 그 예수를 섬기는 시대가 올텐데, 그게 마지막 때야. 그게 심판이야. 그게 언제? 지금!

그런데 ‘많은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야 할 예수를 여전히 섬기고 있으면 계속 희생제사 드릴 수밖에 없어요. 몸이 부서져라, 1년에 몇 번씩 단기선교도 가야 하고, 가서 열심히 보람도 챙기고, 올 때 사람들이 다 울어주거든. 어딜 가든 감사의 인사를 보내주고, 편지도 보내주고, 1년 내내 나는 뭔가 했어. 뿌듯하게 사는 겁니다.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진짜 진리를 알고 가자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예수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예수가 안 죽은 겁니다. 

아니, 호 코스모스는 날마다 죽어. ‘다나토스, 무트’의 죽음으로 죽어. 그 죽음이 완성이니까. 그렇게 해서 진짜 사는 건데 그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고 죽으셨는데, 그거 아니고 살아있는 예수를 자꾸 섬기면 그 사람에게 예수는 어떤 예수라는 겁니까?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예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걸 짐승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서 성경은 마귀의 책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는 죽고 그리스도로, 진리로, 내가 그 진리와 하나가 되어 이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 예수만 계속 섬기고 있으면, 예수는 아직 안 죽은 거고, 영단번에 드려진 제사도 안 드려진 거고, 제사도 계속 드려야 하네요. 율법적 행위도 계속 하고. 

그러면 뭡니까? 성경은 죽었다고 하는데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자. 그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아닙니까?


예수가 세상임금, 죄인 중의 괴수로 죽어서 ‘나’라는 그 세상, 그 죄인 중의 괴수가 그 임금 안에서 죽고,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의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것,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이 구원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 예수가 그를 죽인단 말입니다. 


계13:2-3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러분이 그 율법에 여전히 묶여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용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 예수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죄인 중의 괴수, 세상 임금인 ‘내’가 되어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었어요. 그러면 나에게 세상 임금이 있어요? 그런데 뭘 두려워 하세요? 왜 여러분에게 마귀나 사탄이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해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면서요. 


그런데 왜 세상임금의 종이 되어야 해요? 죽었다면서요? 안 죽었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세상임금은 성도들에게만 죽었어요. 그래서 자유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임금 아래에서 율법의 종노릇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세상 임금이 내가 되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나를 더 이상 심판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은 이제 나랑 아무 상관없는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생래적 한계인 에피뒤미아, 탐심을 올바로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세요. 그리고 그 율법은 그들의 죄를 폭로해 냅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근사한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폭격당하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맞게 돼요. 날마다 죽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완성이라 하세요.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말씀이, 율법이 바로 그거 이루려고 한거야. 다 이룬 거야. 그 죽음이 예수의 테텔레스타이의 죽음인 겁니다. 


역으로 예수님의 그 ‘다 이루었다’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걸 마음으로 깨닫게 된 자는 그러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있는 거죠? 

‘난 아니구나. 그거 없었으면,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지 않았으면 난 큰일날 뻔 했네!’

둘은 동시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걸 아는 걸 자기부인이라고 해요. 열심히 허벅지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화내지 말아야지. 용서해야지.’ 요게 죄 짓는 겁니다.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골고다의 십자가가 한 방에 그려내는 겁니다. 그 십자가 속에서 바로 그걸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이제 내 것이 되어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냥 모형으로 날려보내도 된단 말입니다. 그거 안 들고 다녀도 돼요. 

세상의 임금, 짐승, 용 같은 건 여러분을 괴롭히는 어떤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밤에 이상한 거 보는 건 밥 잘 안 먹어서 허해서 그래요. 없다니까요. 모르니까 당하는 겁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모르면 당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서기 전, 구약시대엔 어떻게 구원받아요? 그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아요. 그 진의를 십자가로 설명해 준 것 뿐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진리 깨닫잖아요. ‘아, 그거. 그 예수, 그 십자가. 모리아 산에서 죽여야지.’ 그렇게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실체인 그거, 십자가는 못 보았죠? 증거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 하나님이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 실체가 직접 왔는데, 우리가 그거 안 됐는데 그들이 헛소리 한거 아냐? 이게 히브리서의 논리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온전하지 못 해.’ 이랬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인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안 되면, 진리가 안 되면. 


그래서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를 봤다.” 하신 겁니다. 내가 담고 있는 진리를 그가 봤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하 벤 하 아담’ 그 인자의 라인이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무트’로 끝납니다. 와우 계속형, ‘그리고 죽었더라’. 그들이 다나토스, 무트의 말씀으로 완성되는 죽음을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으면, 다나토스에 이르면 어떻게 돼요? 진짜 사는 겁니다. 예수가 바로 그 죽음을 죽은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력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죽어가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만 찬송받는 것,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가득 찬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죽으시는 분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그런데 하나님이 왜 죽느냐니요. 안 죽으면 안되는 겁니다.


죄가 나고, 내가 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그 죄를 밖으로 터져나오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만 그걸 감지해요. 다른 이들은? ‘나 잘했죠?’ 합니다. 성도만 그 죄를 낳아요. 그리고는 ‘아, 이게 죄야? 율법에 탐심이 죄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몰랐을 뻔 했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구나!’ 나의 사망입니다. 다나토스. 그러면 사는 겁니다.

그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완성하여 사망을 낳고,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요, 거기서 사는 거야, 생명이야’ 하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쭙잖은 얕은 수준에서 갖고 있던 그건 빨리 깨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이해가 가요. 그거 붙들고 있는 한 자꾸 이걸 튕겨낼 수밖에 없어요. 그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 왜 율법, 에피뒤미아가 죄를 낳게 하시고, 그 죄가 사망을 낳고, 그 사망이 곧 우리의 선물이며 영생인지 아시겠죠? 다음 주에 우리 신랑과 남편을 통해서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인간의 귀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열심히 성실하게 차곡차곡 쌓아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참생명 하나님의 선물을 온전히 받아 영원으로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여 사는 그런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