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74 짝 (롬7:1-7)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0

롬74 짝


롬7:1-7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우리가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는 이 로마서 7장의 앞부분, 아니 로마서 7장 전체는 로마서를 이해하는 분수령 같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논란도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로이드 죤스도 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가렸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나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의도 신학생들의 교과서 같은 거죠?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어마어마하게 팔린 책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로마서 8장은 다 걷어다 불태워 버리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삐걱거리고 있어요.


그게 다 로마서 7장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 겁니다. 

‘이 7장은 바울이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기록한 거고, 8장은 구원받은 이후를 설명한 거다.’라는 아주 가난한 해석을 로이드 존스가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후의 신학자들이 대부분 그걸 따르고 있어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관성이 없어지는 겁니다.

7장도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를 묘사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까지 일관성 있게 인간들이 자기들의 의로 내어놓는 율법과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를 집요하게 대조하여 가르칩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헛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뉘니 데v(nuni dev)’ ‘그러나 이제는’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가 6장까지의 논제입니다.  ‘뉘니 데’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의를 준비하실 수밖에 없었다. 

롬3:21

(개역성경에는 ‘ de;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빠져있어요.)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진짜 내용이 이거다,라는 겁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그러므로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의로는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잘 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그러나 이 의는 차별이 없어요.

왜? 선물이거든요. 거저 주는 겁니다. 


인간 측에서 준비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이 6장까지의 바울의 논제입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반복하는 바울의 설명을 들은 로마교회 사람들이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 율법은 악한 거니까 지키지 말아야 되겠구나. 이리로 가겠죠? 그게 뭡니까?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법으로 받아서 지켜야 하는 계명의 수준에서 잘 지키면 그걸 죄라고 그랬어요. 바울이 지금까지 아담의 생래적 두 마음, 그 에피뒤미아의 두 마음, 그 선악의 두 마음으로 율법을 판단하여 자기들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인간들의 선한 것이라고 합의한 그 한쪽 것을 열심히 지켜나가는 걸 죄라고 했습니다. 그 진의를 모르고, 그 껍데기만 보고 열심히 행하는 게 죄입니다. 


똑같아요. 그것이 죄라는 말을 듣고 ‘에이, 그러면 안 하면 되겠네.’ 하고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면 아무 가치도 없는거야?’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라는 거야, 하지 말라는 거야?’

여전히 선악판단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이거 하라는 거였어?’ 그래서 했는데 아니래. 

‘그럼, 이거 하라는 거야?’ 이 역시 선악판단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그걸 죄라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건 안 하건 그런 것엔 관심이 없으세요.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걸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에는 관심이 없으세요. 


생각해 보세요. 여자들이 애 낳고 정결예식 행하지 않는 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안 하면 부정하다 한다니까요. 애 낳느나 죽을 고생했는데 부정한 사람까지 되어야 해요?


그래서 갑자기 바울이 이런 수사학적 질문을 해요. ‘율법이 죄냐?’

자기는 그 율법으로 자기 안에 운명적으로 심겨져 있는 그 탐심의 정체를 알게 됐는데, 그러면 된 거라는 겁니다. 


그는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어요. 

그 말은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성경해석으로, 그리고 해석에서 나온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내어 놓았는데 성경이 그걸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 그게 상 받을 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배설물이었구나!’ 하고 알아먹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왜 나쁘냔 겁니다. ‘내가 그걸 알아 먹었다. 하나님 의도가 그거였는데, 그게 뭔지를 알았는데 그게 죄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니, 사실 그게 없었으면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방법도 없어요. 바울이 행한 그거 아닌 것. 그 율법의 행함이 아닌 것이 뭡니까? 은혜고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 아니면 어떻게 그 십자가를 설명합니까? 


하나님이 이 죄만 가득한 땅에서 십자가를 설명하시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네가 한 그게 아닌 것, 네가 되고 싶은 그게 아닌 것’ 이거잖아요.

거기에 사용된 죄라는 것이 정말 나쁘기만 한 거냐는 말입니다. 

그게 바울의 논제입니다.


죄는 나쁜 겁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에게 들려서 우리의 선을 이루는데 쓰이면 그건 나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 머물면 이걸로 사망이고, 멸망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러한 순서와 차서와 과정을 거쳐서 의를 설명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남편과 아내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게 오늘 본문인 로마서 7장 앞부분입니다. 

바울이 1절에서 로마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앞부분을 직역하면 ‘율법을 안다고 하는 자들, 율법을 안다고 하는 그 무지한 형제들아’입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무지한 형제들아, 율법을 아는 게 모르는 거다.’ 

‘그게 무지다, 깨달음이 없음이야.’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율법을 아는 게 그 진리, 진의를 모르는 것이니까 율법을 알면 알수록 무지한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래요. ‘율법을 아는 무식한 형제들아’

형제라는 단어는 친구라는 단어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어려움에 봉착한 상대방을 자기 것을 털어서 구원해 내는 관계를 ‘형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낼 자’입니다. 그걸 형제라고 해요. 산상수훈에서 ‘그 형제 미워하면 안 돼!’ 하죠? 그 형제로 오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죽음으로 건져내세요.   


그렇게 죽어서, 아니 그 대신에 죽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내어 그와 내가 하나가 되면 그걸 벗이라고, 친구라고 해요. 


우리가, 제자가 아들로 완성이 되는 개념입니다. 12이 아들이라는 숫자니까. 야곱의 12아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전부 12, 12, 12이 새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자에 머물면 안되는 겁니다. 제자에는 유다도 끼어있었어요. 

수많은 제자들이 ‘나 그 떡 주러 온 게 아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도망가서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웬말입니까? 한국교회는 자꾸 제자를 만들어 내려고 해요. 진리를 설명해서 아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훈련해서 교회가 써먹기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닙니다.


형제는 친구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는 도무지 감추는 거 없이 완벽하게 다 드러내어 공유하는 상태, 이게 친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입니다. 하나님이 ‘내 친구 아브라함에게 숨길 게 뭐가 있니?’라고 하세요. 이렇게 다 드러내는 거.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알고,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상태가 벗, 친구입니다. 


‘데오빌로, 데오 필로스’ ‘하나님의 친구’ 

누가복음, 사도행전이 데오빌로 각하로 시작하죠? 두 권은 같은 책인데, 둘로 나누어 놓은 겁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설명하고, 뒤에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하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또 다른 나, 세 번째 성전인 나를 설명하는 겁니다.

‘아주 가감없이 다 밝힐게’ 그래서 데오필로스라고 하는 겁니다. 친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형제라고 불러요. 그것도 ‘이 무식한 형제들아, 율법을 아는 무식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그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걸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신파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그냥 죽어 주셨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그게 뭔지를 아셔야 됩니다. 그렇게 너무 신파적으로 보니까 그 죽음을 죽은 예수에게만 시선이 가 있는 겁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고 있어요. 


신의 죽음이란 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계시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입니다. 피조물에게 포착이 되는 건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신이 피조물에게 당신을 낱낱이 공개하기로 작정하세요. 어떻게 공개하세요?말씀으로 공개하세요. 그걸 계시 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늘이 도저히 그 하늘을 담을 수 없는 땅에게 하늘을 계시하는 겁니다.

물론 피조물이 말씀으로 온 그 하늘을 하나도 못 알아 먹어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당신의 영, 즉 진리의 말씀을 넣어서 하늘과 하나님을 그들의 심비에 새겨버리세요. 물론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내 안에 들어있는 그게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담아요? 그 수준에 맞춰서 계시를 해 주신다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계시된 당신, 그걸 진리로 주고는 그를 진리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그걸 아버지라 불러요. ‘내가 너 안에, 네가 내 안에’ 이렇게. 그것이 너희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신을 알아버린, 포착한 내 수준에서의 신이지만 그 신을 포착한 이들에게 있어서도 그 신이 더 이상 신입니까? 벗입니다. 그 개념이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절대 타자로서 감추어진 그 상태의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피조물의 수준으로 엘로힘으로 계시해 준 겁니다. 그러면 그 자에게 있어서 이 신은 친구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이 자, 이 ‘친구’에게 있어서의 신이 죽고 친구로 연합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십자가라 합니다. 


단순히 날 위해 하나님이 내려와서 죽었대! 이렇게만 이해하면 안 돼요. 그게 내 밖에 있는 예수, 내 밖에 있는 십자가잖아요. 그게 뭐? 그게 어떻게 날 구원합니까? 그게 무슨 메시아입니까?   

그리스도, 메시아는 영입니다. 그런데 그 밖에 있는 사건이 어떻게 영입니까?

그게 내 안에 들어와 마음으로 새겨져야 그게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친구 사이. 내가 너에 대해서 다 알고, 너도 나에 대해서 다 아는 그런 사이. 

그 친구 사이는 신의 죽음, 신이 그렇게 계시하는 신의 죽음, 자발적 죽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니면 어떻게 인간이 신을 알겠습니까?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서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신을 알게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꾸 추측하고 상상해서 자기 수준의 신을 우상처럼 만들고 그걸 섬겨버려요. 보세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의 신이 전부 인간이 섬겨야 하는 신입니다. 갖다 바쳐야 하고, 고행을 해야 되고, 열심히 빌어야 합니다. 기독교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그걸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고 합니다. 말씀을 흘리는 것이 섬김이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이 되셔서, 율법이 되셔서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 율법,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가짜 신, 그 율법이 되어서 죽을게. 계시해 줄게.

그렇게라도 하면 너희들이 신의 죽음으로만 탄생이 될 수 있는 그 ‘벗으로서의 아들(이것이 성도의 실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 율법이 되어 죽을게. 그러면 그 사건을 통해, 신이 자기를 계시하여, 자기를 죽여 신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벗으로 내려와야만 그게 신과 피조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너희들이 알아먹을 수 있을까?’

이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러한 진리의 현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시청각 교재입니다.

구원은 그런 거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와 예수를 섬기고 있어요.

그걸로 하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너희들과 하나가 됐는지를 알라고 줬더니 그걸 떡 하니 걸어놓고 거기에 자기의 소원을 빌고 있어요.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아가페를 설명하고 계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는 겁니다.


여호와.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그렇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그 하나님을 알아먹자는 겁니다.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구약 때도 그거 알면 되는 겁니다. 그가 십자가와 관계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걸 안 자가 메시아를 만난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 진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니까.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목 놓아 외친 겁니다. 

‘그 예수가 그리스도인데 왜 죽였어?’가 아니라 ‘그 예수는 그렇게 죽었어야 돼.’ 

왜? 그는 그리스도니까. 그렇게 와야 우리가 사니까. 

그게 사도들이 말한 ‘예수는 그리스도다!’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이전의 예수도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옛 성전, 그게 메시아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그 옛성전이 뭐고, 호 코스모스가 뭐고, 성경이 뭡니까?

그것들이 예수를 설명한 거라면서요? ‘율법과 선지자는 나에 대하여 기록한 거야’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들로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알아먹었어요.

아, 희생제사는 이런 거고, 법궤는 그런 거고, 물두멍은 그런 거였구나. 

휘장은 그런 거고, 이게 둘로 찢어진 건 그런 거고.


이렇게 그 진리, 그리스도를 옛성전으로 알아먹었으면 그게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먹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구약, 율법과 선지자들도 못 알아먹은 그게 나를 설명한 거다’라고 하면 알아 먹어야 돼요? 못 알아 먹어야 돼요? 십자가 이전에는 못 알아 먹어야 돼요.


그래야 거기서 한계가 폭로되고 예수가 죽어야, ‘그래서 신이 내려와 계시를 해야 너희와 하나가 될 수 있어.’라고 죽어야, 그 계시가 그리스도로 내 안에 들어와 진리가 될 거 아닙니까? 순전한 하나님의 열심만으로. 


그래서 그 십자가 이전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못하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진리로, ‘이게 다 이거였어, 이런 이야기였어’라고 해줬는데도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역할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메시아인데.

그러니까 이분이 죽고 ‘이렇게 해서 신은 너희에게 계시되어 네가 나고, 내가 네가 되는 친구가 되는 거야, 벗이 되는 거야’ 알려주신 다음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로, 진리로 줬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이걸 알아먹게 하는 시청각 교재였어요.

그런데 이걸 여기다가 걸어놓아야 돼요? 목에다 걸고 다녀야 돼요? 

그게 조금만 잘못 되면 나찌의 철십자가, 불교의 만자 됩니다.

그게 원래 태양신 섬기던 자들의 표식이었습니다. 


드라큐라 나타났을 때 이렇게 해보세요. 손가락을 확 꺽어버릴 걸. 그게 뭔지 걔들, 귀신들은 알아요. ‘왜 벌써 왔냐’ 하잖아요. 차라리 이렇게 하던가. 기둥이니까. 스타우로스, 언약. 그러면 조금 똑똑한 놈은 알아먹을 겁니다. 아니 저 놈이 언약을 아네. 히스테미!


그 예수가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겁니다. 그걸 마음으로 가지세요. 그런 것이 친구의 단계인데,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그래요. 그리고 설명해 주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로 내가 또 한 번 설명해 줄게. 이미 구약에서도 설명했고, 예수님도 설명해 준건데 너희들은 여전히 무식한 형제니까 내가 다시 한 번 얘기해 줄게. 그리고 구약과 복음서에 나오는 아내와 남편 이야기를 또 한 번 설명해 주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복음서를 정확히 알면 서신서는 안 봐도 돼요. 이걸 제대로 못 이해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계속 왜 못 알아 먹느냐고 책망한 게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서신서에 목을 매고 여기서 행해진 명령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자,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렇게 말을 이어요.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여기에서의 ‘사람’은 모든 보편적 아담을 통해 구원받을 성도를 일컬음과 동시에 그렇게 율법 아래로 오신 첫 남편 예수를 지칭하기도 해요. 그 첫남편 예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율법이 그를 주관하게 놔뒀어요. 


그래서 그 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그분을 못 알아봐야 맞는 겁니다. 율법의 주관을 받아요.


예수님은 이 땅의 율법 아래에 오셨어요. 종의 형체를 가지고 왔다는 건 그 율법의 종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겸손하게 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안식일의 그 진의나, 아니면 병 고침의 진의, 성도가 먹어야 하는 양식의 그 진의를 설명하기 위해 안식일에 병도 고치고, 밀도 비벼 먹게 하고, 그렇게 안식일을 어기는 일을 하시기도 했지만 그 이외의 율법은 다 지켜가셨어요. 


난 지 8일만에 할례도 받으시고, 정결예식도 행하시고,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셨어요. 심지어 동생들에게 ‘나 안 올라가’ 속이고 몰래 올라가셨어요. 십일조도 내라고 하세요. 당신이 십일조로 왔는데 십일조, 이것도 내고 그것도 내. 그 진의가 뭔지 알면 그것도 함께 내. 겉옷? 속옷? 함께 내.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율법 아래 오셨으니까.


주님은 그렇게 율법 아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약속의 자손들의 대표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 이전에는 당연히 율법의 종처럼 사셔야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해요. 그건 하나님의 각본이었어요. 


율법은 반드시 하나님을 살해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살해한다는 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선물을 모독한다는 거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내가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아야 돼? 선물을 받아야 돼?’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을 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 하의 피조물은 반드시 신을 살해하게 되어 있어요. 필연적인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깨닫는 건 불가능이니까, 다 우리 수준으로 그 신을 만들어서 섬기니까, 그래서 고작 소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행하신 것이 자발적 죽음인 겁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나를 못 알아먹고 나를 살해할 수밖에 없잖아. 이게 필연적인 너희의 수준이야. 그러면 내가 나를 너희에게 계시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발적 죽음 밖에 없잖아.’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율법인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 하나님을 때려죽인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죽음으로 몰아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십자가고, 그래서 십자가가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섬기고 있어요. 그러라고 준 겁니까?

    

그걸 예수님의 성육신이 조금 힌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셨고, 죽임을 당하세요. 그리고 어떻게 해요? 

진리의 영으로 내가 그로 가서 너희들을 죄, 의, 심판에 대하여 가르칠게. 

십자가 이전에 내가 한 말을 또다른 보혜사, 그리스도가 가서 너희를 가르칠거야, 내가 한 말을 생각나게 할거야, 하시죠?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그런데 알아먹고 못 알아먹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걸 알아먹어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는 겁니다. 그 두가지를 설명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게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남편으로서의 예수가 율법으로, 율법이 되어 율법의 공격을 받아 죽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논개처럼 적장을 품에 안고 같이 죽어요. 그 남편이 죽을 때 그 법도 함께 죽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자유, 다른 남편에게 가도 자유입니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자가 된 겁니다. 

왜? 그분의 희생으로,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의 자기 계시로 인간들에게 오해된 그 우상으로서의 하나님은 거기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세상의 그 첫째, 그걸 ‘세상 임금’이라 번역했어요. 그 세상 임금, 그 세상, 호 코스모스의 그 율법을 다 품어 안고, 율법의 대표가 되어 세상의 첫 째, 세상 임금이 되어 죽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알았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세상 임금이 있어요? 율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성경이 복음이라고 해요. 세상 임금이 없어요. 뿔 달린 어떤 것? 3년 전에 죽은 작은 엄마? 헛 것입니다. 그 예수가 세상 임금으로 죽지 않고, 율법으로 죽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세상 임금이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존재로 여전히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겁니다.


헛것들이 죽었어요. 그게 여러분 마음에 확실하면 그게 왜 나타납니까? 나타나도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밥 몇 끼 잘 먹으면 돼요. 그 사망, 세상 임금의 사망 안에서 내가 함께 죽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주인이 나를 막 때리면서 부려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죽은 자를 어떻게 때리며 어디에 써먹어요. 이게 관계없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관계가 없으니까.


자 그렇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깨달아서 진리로 알게 되면 그게 바로 부활,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이게 ‘아니스테미(ajnivsthmi, 450: 일어나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아나’ 위의 것으로 ‘히스테미’ 똑바로 서다. 하나님이 호 코스모스로 이렇게 ‘티데미’ 차서와 순서로 설명해 주는 것을 잘 깨달아 알게 되면 언약 위로 굳게 서고, 이걸 첫 번째 부활이라고 해요. ‘아, 이게 그거였어요? 번제단, 물두멍, 성수, 향단, 지성소, 법궤, 이게 그거였어요?’ 이렇게 알게 되면.    


그리고 이 육이 완전히 삭제되는 죽음을 맞게 되면 그때 여러분은 영원으로 들어가요. 그러니까 첫 번째 부활, 진리로 그것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두 번째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되는 겁니다.


꿈꾸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들 상식으로 그려내지 말라. 사도 바울이 경계한 겁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 초보야 뭘 그리고 있니? 솔직히 여러분이 그리는 천국이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것들이 다 구비가 된 곳. 눈물 고통이 없고, 내가 편한 곳.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찬송받는 곳입니다. 그걸 벗어나지 못하는 걸 진짜 숨겨진 기복신앙이라고 해요. 여전히 나를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 하면 안되는 거고, 그 예수와 십자가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깨달아 나의 처음자리로 내려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 예수가 날 위해 죽었대!’가 아니고, 그게 예수 믿는거죠?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아, 그분이 그렇게 진리를 설명하시고 내 안에 들어와서, ‘너희는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야!’를 설명해 준 거. 이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하지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함부로 ‘예수 천국 불신지옥’ 써 가지고 다니면 오히려 여러분이 큰일을 내는 겁니다. 다 설명해 줄 수 없으면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리스도로 오신 그 예수의 모양, 그것으로 내가 구원에 이르게 될거다’라는 걸, 그 구원의 차서를 ‘피스티스’라고 해요. 그걸 내 믿음 ‘피스토스’로 갖게 될 때 우리가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이 우리 구원의 방법을 ‘디아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법에서 해방이 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말미암아 되는거야’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는 영이죠? 그래서 반드시 그릇이 필요해요. 영은 담을 그릇이 없으면 의미가 없어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아요. 반드시 그릇이 필요해요.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영을 담은 그릇이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이야. 내가 하나님이야’라고 하셨어요. 그 예수가 육을 삭제당하고 진리로 살아나신 그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우리 안으로 진리의 영, 그 프뉴마가 들어왔습니다. 불의 혀처럼 말로, 혀tongue가, 글로사가 들어왔어요. 


그 사건 자체가 우리의 육을 부인하는 겁니다.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체로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그 육신의 기능으로는 절대로 그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너희들을 그릇 삼아 내가 영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 부대, 질그릇, 토기장이의 그릇.. 이게 다 같은 말입니다. 주머니, 그릇, 부대. 우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에 그냥 새것 담으면 터져버립니다. 그릇이 깨져 버립니다. 우리가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의 그 그릇, 육체가 되어서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서 설명하실 수밖에 없다는 건 우리의 육이 거기서 삭제당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내 안에 그렇게 들어오실 수밖에 없었던 건 ‘나는 아니다’라는 선언이니까 내가, 내 육이 죽은 겁니다. 그때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그러한 성령의 강림하심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겁니다. 그걸 인정하고 그 진리의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아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그걸 알게 되면 세계관, 가치관, 행동양식이 당연히 변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윤리적 성숙은 아니지만, 그게 영지주의와 다른 겁니다.

‘이제 알았으니까 막 살자’ 천만의 말씀. 그 그리스도가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내 안에 진리가 담겨 있잖아요.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셨으니 나는 이미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나,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가 되면 이게 뭘 하건 안 하건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겠어? 하고 율법에 대해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가 너희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제시해 주는 겁니다.


이걸 왜 굳이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라고 설명을 해야 되느냐고요. 여전히 성화론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내어놓아 성화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그걸 배우는 자들, 그들을 성경이 적그리스도라고 해요. 


적그리스도는 딴 데 있지 않아요. 교회에, 기독교 안에 있어요. 적그리스도가 왜 절에 가 있겠어요? 그리스도는 여기에 있어요. 안티 크라이스트, 비슷한 그리스도입니다. 창 들고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걔를 말하는 게 아니라, type, antitype, 실체와 모형입니다.


모형으로서의 율법에 묶여버리면 그게 Anti Christ입니다. 그게 type, antitype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회는 Anti Christ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게 훨씬 좋고, 그렇게 말해주면 훨씬 듣기 좋아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이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Anti Christ적 설교를 하면 흥분합니다. 선동도 돼고 단결도 됩니다. 오래 가야 한 3주 가지만 단결도 됩니다. ‘하나 되자! 뛰자! 하자!’


그런데 자기들도 100%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성경도 말해요. 100개 지키다가 하나 안 지키면 꽝이다. 그러니까 자존심상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해보자, 그게 신앙생활이다, 합니다. 


성경 어디에 ‘해보는 데까지 해봐! 그러면 그거 계산해서 그만큼의 상 줄게’라고 합니까? 

‘하나님 같이 온전하라’ 그랬어요. 똑같이 온전하라. 그걸 하나님이 행위로 온전하라고 하시겠어요? 피조물에게 내 행위처럼 너희도 똑같이 해! 하시겠냐고요. 


그건 인간이 스스로 거는 올무입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그거의 종으로 살아요. 신앙생활이 재밌고 기뻐야 되는데 너무 수고하고 무거워. 그래도 혹시 고진감래라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시겠지, 조금 고급스럽게 ‘하늘에서 상급이 크대’ 이리로 가는 겁니다. 

  

그게 바보고 맹종하는 자들입니다. 신문 보면, 팔선녀인지 하는 무당이 전화로 시키니까    다 해요. 나주역에 가서 3개월동안 노숙하라고 하니 딸 데리고 노숙해요. 인간들이 무서워해요.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대부분 그래요. 그 하나님 심기 안 건드리려고 꾹 참고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안 됐으면 그냥 율법이라도 최선을 다해 지키세요. 완벽하게 희생제사도 지내고 종교의식도 하고. 그런데 이것도 한 하고 저것도 안 하고. 구약의 율법은 이미 다 하나님이 완성하셨어요. 그러면 자기들이 갇혀있는 그건 뭡니까? 모양만 조금 다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제사를 지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것도 안 하느냐고요?


인간들은 너무 쉬운 걸 주면 그걸 가치 없다 여겨버려요. 그리고 그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겨버려요. 도대체 날 뭘로 보고 그런 가치 없는 걸 던져주냐는 겁니다. 선악체계 속의 아담들은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자기들의 수준에 맞게 어려운 임무가 주어지면 희열을 느껴요. 다는 못하지만 나를 이렇게 여겨준단 말이야? 하면서. 


그래서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 사람들을 도에 지나게 확 돌려버리면 사람이 늘어나요. 그때 사람들이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여기 오면 멍 하니 할 일이 없어. 그러니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아무리 생각해도 시킬 일이 없네.   


율법과 은혜를 두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인간들은 반드시 율법을 택해요. 은혜는 당연하고 마땅한 거라고 여기고 가치없다고 하고, 그래서 버립니다. 사실은 그 은혜가 가치없어 보이지만 당연하고 마땅한 진리고, 율법은 인간들의 탐심이 만들어낸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땅하고 당연한 건 가치없다고 하는 속성이 있어요. 왜? 거기에는 내 가치를 입증할 만한 어떤 틈이 없으니까. ‘그냥 되어지는 것’ 이건 내가 드러날 수 있는 틈이 없어요.


우리가 숨 쉬는 것, 삼시세끼 밥 찾아 먹는 것, 하늘에서 내리는 비, 공기, 땅과 바다가 항상 그렇게 경계를 정하고 있는 것... 우리가 뭔데 이 자연과 만물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존재해줘야 돼요? 지구는 항상 자전을 하면서 공전을 해야 됩니까? 당연하게? 이 우주는 어떤 법칙에 의해 항상 이렇게 일정하게 끌려가야 됩니까? 우리 때문에?


그런데 보세요. 당연하죠? 그래서 이거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어요. 

‘아, 골기, 물, 비, 참 감사하다!’ 감사하긴, 비만 오면 1/3이 빠져.    

그런데 보세요. 마땅하고 당연한 그거 없으면 죽어요. 그러나 그 마땅하고 당연한 것 위에 세워지는 것들, 빌딩, 좋은 옷, 화려한 장신구... 이런 건 없어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가치있게 여겨.


우리에게 진짜 가치있는 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이라는 생명인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자기들의 행위나 외모가 어떻게, 얼마나 평가받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진짜 가치는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인데, 우리는 내가 드러나는 어떤 것을 자랑하고 싶어해요. 하나님은 그거 없어도 된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 생명, 그 진리가 내 안에 있느냐를 묻는데 우리는 그건 마땅한 거니까, 선물로 준다고 하니까 가치없이 여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걸 자꾸 쌓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예배당에서, 기독교가.


하늘에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도시가 손가락 하나 안에 다 들어가요. 하늘로 올라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 빌딩 주인은 누굴까? 난 여전히 월세인데 복도 많네.’ 

이게 아니라, 우리는 진리 안에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때 진짜 내 가치가 뭔지를 알게 되고, 부러운 게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겁니다.   


뭘 부러워해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네. 그래서 진리를 가진 사람을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할 때 너무 좋아요.


온 세상이 딴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 건강하고 몸으로 건전한 문화를 구축해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와 국가를 만들자고 해요.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헛것입니다. 호 코스코스가 불탈 때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 당연하고 마땅한 거, 그거 없으면 다 헛것입니다. 


생명이 있는데 죽은 시체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투탕카맨처럼 죽은 시체에 금관을 씌워 놓아 봐야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마땅하고 당연한 은혜의 진리는 무가치하게 여기고, 인간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챙길 수 있는 율법의 행위를 움켜쥐는 게 아담들의 자연스런 성향, 본성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통해 자기의 행복, 구원, 자기 가치 향상-이게 인간들이 추구하는 구원이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양식 삼아 살아요. 그런데 성도는 그거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래서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요일4:1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사랑하는 자들, 진리를 흘려주어 진리가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사랑하지? ‘야, 사랑하는 무식한 형제들아!’가 아닙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말, 복음 전한다고 다 믿지 말고 영, 말, 진리가 하나님께 속한 건지 시험해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선지자는 어디에 있어요? 절에 없어요. 교회에 있어요. 거짓 선지자가 세상, 호 코스모스에 나와 있다.)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시인하다’는 호몰로게오(oJmologevw)로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동의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걸 너무 섣불리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을 시인하는 것’ 이걸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예수로 오신 것을’이라고 해야 되는데, ‘그리스도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이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그 말이 뭡니까? 그 예수로 오신 그 그리스도가 이제 십자가를 통과하고 우리 육체로 들어와 나에게 진리를 설명하여 진리로 만들어주는 이 복음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어떻게 하겠어요? 그 역사적 예수에게만 묶여 있겠죠? 그분을 계속 살려내겠죠? 왜? 율법 지켜서 잡아 죽이려고. 


영단번의 십자가 제사가 그에겐 없으니까 계속 제사 지내야 돼. 희생제사, 율법 지켜야 된다니까요. 내 행위 내놓아야 된다니까요. 그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육체로 와 있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내가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가 되어 그 법에 대해 죽었다는 걸 ‘호몰로게오’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래요.


그러니까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자, 모두가 공평한 사회 만들자, 열심히 선한 행위 하고 구제하여 성도다운 삶을 살자.’ 이게 나쁜 게 아니라, 여기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이게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3절)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여기서도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개역성경이 그리스도를 빼먹었어요. 그리스도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 예수,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적그리스도의 영, 적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초대교회 때도 율법주의가 횡행했어요. 사도들도 거기에서 못 벗어났어요.)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그리스도가 세상, 호 코스모스, 그 성전, 그 성전으로 오신 예수보다 더 크다, 더 위대하다는 겁니다. 왜? 이건 너희에게 설명을 못해줬잖아. 아니, 해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 먹었잖아. 이 분은 들어와서 너희들의 눈과 귀를 열어버린다니까. 그래서 이긴 거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저희는 호 코스모스에 속하여, 호 코스모스로 온 그 예수에 속해버리면 그 세상에 속한 말을 하게 되고 세상은 저희 말을 들어요.)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은 우리의 말을 안 들어요.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저거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자기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뒤집어 엎는단 말이야?’ 해요. 

뒤집어 엎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있었다니까요.


제가 요즘 수메르어 아람어 라틴어 공부를 하면서 보면, ‘그들’이 있었는데 유명하지 않은 겁니다. 대다수는 항상 엉터리 기독교로 갔고, 안 유명한 ‘그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니까요. 

“아니지. 그건 기독교 아니지!” 그런데 아무도 안 들어.

알아먹는 말로 좀 주시지. 또 얘기해. 아무도 안 들어. 그런데 내려왔어요. 이렇게 지금까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걸 영 분별이라고 해요. 영 분별은 뭘 분별하는 거죠? 

그가 가지고 있는 말, 그가 갖고 있는 진리, 성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걸로 ‘너는 미혹의 영, 너는 진리의 영, 미혹의 말, Anti Christ의 말, 진리의 말’ 이렇게 분별하라는 겁니다. 어떤 능력있는 권사님들이 갖고 있는 신비한 그런 게 아니라.

‘저거 영이 아주 더러운데’ 이런 건 다 사기꾼입니다. 믿지 마세요. 영이 뭔지도 모르고 ‘영이 혼탁해. 영이 어두워.’ 이러고 있어요.)


율법주의는 항상 둘로 나누고 분리하는 습성이 있어요. 자기가 선과 악의 주체가 되어 모든 걸 나누고 분리하여 판단해 버리면 그게 곧 하나님과 분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아브라함처럼 세 번째 제물을 취하라고 했더니 제물을 그냥 뚝 ‘바탈’ 잘라버려. 이게 인간의 생래적 본성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내 선악 구조 안에서 갈라버리는 겁니다. 


그래놓고 ‘이거 했으니까 나 잘 했죠?’ 이게 가인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물 뒤로 넘어가 버리죠? 그때 ‘카라트’의 분리가 생깁니다. 이 단어를 ‘이혼증서’라고 씁니다. ‘그렇게 되면 너롸 나는 이혼이야’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걸 깨달아 ‘아, 그거군요. 이렇게 나누면 안 되는 거군요. 우리가 선악의 주체로 살면 안 되는군요.’ 이걸 알게 되면 넘어가는 겁니다.

하늘의 열 계명, 하늘의 열로 땅의 12, 아들로 완성이 되면, 60갑자가 10과 12로 섞여버리면 ‘환갑’이 되어 여기를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환갑상은 제사상이라고 해요. 10으로 12, 아들로 완성된 거. 


그래서 제사장의 제사도 마찬가지죠. 제사장이 제사를 어디서 드려요? 회중을 마주보면서 성소에서 드렸어요. 제사장은 마땅이 이게 뭔지를 알아 이렇게 예배를 하는 겁니다. 지금 이게 맞아요. 여기서 같이 부르짖으면 안됩니다. 

그게 구약의 옛성전의 제사입니다. 넘어오는 겁니다. 여러분도 넘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선포해 주는 겁니다. 흘려주는 겁니다. 이걸 아가페, 사랑이라고 해요.


그렇게 자르면 안됩니다. 내가 선악의 주체, 하나님처럼 된다는 거니까. 그건 안됩니다. 

‘네가 하나님이냐? 네가 준 걸 내가 받아야 돼?’ 

‘너와 나는 다르다.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피조물이잖아.’

그걸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이라고 해요. 원래 부부유별이니, 군신유의니 다 하나님과 우리 이야기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끌어다가 도덕과 윤리로 써먹은 겁니다. 


부부유별. 하나님인 그 신랑이 옆구리가 뚫리고 그 아내가 되어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내 안으로 자기가 들어가요.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안 자는 ‘아, 하나님 그렇군요. 저는 아니네요. 제가 무슨 하나님입니까?’ 그리고 점점 죽는 겁니다. 여자에서 아들이 되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래 맞아. 그게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거야.’ 하시며 내게로 내려오는 겁니다.

이 성전을 사이에 두고 예수라는 성전에서 그리스도로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부로 오지만, 부부유별로 오지만 우리가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쪽으로 내려와 아들로, 벗으로 연합되는 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여자는 점점 나이가 들수록 남성화되어 하나님에게 가는 거고, 남자인 하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세요. 그래서 남자들이 유약해지는 겁니다. 눈치 보고, 밥 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게 맞아요. 사업할 때도 50 넘으면 여자가 나가서 일하고 남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게 나아요. 그렇게 된다니까요. 실제로.


진리를 잘 알면 세상적으로 이용해서 돈도 벌 수 있어요. 그렇게 안 하는 것 뿐이지. 관심이 없으니까. 뭘 굳이 그렇게까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 진리를 담은 몸이 된 이들이 다른 남편을 맞는 사람이에요.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칼, 진리의 남편을 다시 받아 네케바, 그릇이 되어 하나가 되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 거기에는 신의 죽음, 자기 계시가 전제된 거고,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뭐 어려워요. 내 밖의 예수와 나는 연합이 될 수 없어요. 그렇게 역사 속에 세워둔 십자가는 내 것이 될 수 없어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걸 깨달아 아시란 말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그 이야길 해드리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해요? 새로운 남편에게 가서 뭘 하라 그래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게 성경에 나오는 열매 이야기입니다. 열매는 어떻게 맺혀요? 

꽃이 피었다가 지면 거기에 씨방이 생기고, 그게 열매가 되는 겁니다. 씨를 담은 열매.


그러니까 열매가 많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사건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그 떨어진 꽃이 씨가 되어 ‘제라’ 약속의 후손이 되어 그 씨가 담긴 열매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 일을 우리가 또 해요. 

내가 또 꽃이 되어 떨어지고, 그 씨를 심고, 진리를 심고, 그 아들이 또 열매가 되어 열매 맺는 자가 되는 겁니다.



벧전1:21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성도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새 남편입니다.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영광을, 자기를, 자기의 것을 계시로 나타내신 ‘독사’,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디아’ 말미암아 믿는 자니. 그 그리스도가 그거 가르쳐 줬잖아. 그게 성도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그 진리를 너희들이 이제 받아들였어. 그게 맞다라고 인정했어.)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이게 프뉴마, ‘영, 말’입니다.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했으니까 너희의 말이, 영이 깨끗해 진거라는 말입니다. 섞인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Anti Christ가 아니라는 겁니다.)

거짓이 없이

(당연하죠. 이제 거짓말, 거짓 증거 안 해도 되죠. ‘이게 그거였어!’라고 알았으니까. 뭘 하라고 해요?)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랑은 뭐? 산상수훈 배웠죠? 이제 제대로 된 걸 전체로 전해줄 수되었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어질 씨는, 우리가 심으려고 하는 세상 것, 내 행위들, 이런 것들입니다.  

그걸로 거듭나는 게 아니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썩지 아니할 씨, 제라로 거듭나는 거다. 썩지 아니할 씨는 뭐죠?)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게 썩지 않는 씨래요. 이 진리, 그리스도가 씨라는 겁니다. 이게 심겨지는 겁니다. 

우리에게 예수라는 꽃이 떨어져서. 그런데 그 꽃은 ‘아, 이거 떨어지면 안되는데.’ 그러면서 여기 갖다놓고 여기에다 예배드리면 어떻게 돼요? 그게 조화(造花)입니다.

꽃은 떨어졌는데 역에 갖다놓고 ‘안 떨어졌어. 안 죽었어.’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조화, 그게 우상, 에이돌론입니다.)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이고, 풀은 마른대요. 그리고 꽃은? 모든 것의 영광이 꽃에 있는데, 하나님이 풀들에게 보여준 영광, 하나님의 계시, 진리가 그 꽃에 있는데 그게 떨어진대요.)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이게 ‘씨로 심는다’는 말입니다. 주의 말씀이 풀, 꽃, 씨, 이렇게 연결돼요. 그 씨 가졌느냐는 겁니다. 그 씨 가지면 씨를 가진 그 존재를 뭐라고 해요? 아들, 남자, 씨가 있는 것.

씨가 없는 것은? 여자. 그렇게 아들이 되는 겁니다. 


성경은 한 가지 이야기 밖에 안 해요. 이렇게 남자, 여자, 부부를 통하여 그거 설명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해요?)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게 복음이야. 그 ‘풀 covrto"(5528, 코르토스)’이라는 단어가 ‘풀, 안 뜰, 씨가 없음’이란 뜻입니다.

 

안 뜰에서 뭘 해요? 성전 안 뜰에 번제단이 있이 있고, 거기서 희생제사를 드리죠? 정결예식, 물두멍, 손 닦는 거, 자기들의 힘으로 희생제사 드립니다. 율법이죠? 

안 뜰, 씨 없음, 이게 풀입니다. 

풀, 율법, 행위.. 어떻게 돼요? 말라 죽어요. 이건 죽는 겁니다. 놔두면 죽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꽃을 심으면 됩니다. 

어떤 능력자가 그 풀에다가 꽃을 붙여버립니다. 

어차피 씨가 없기 때문에 씨를 심으려면 꽃을 먼저 심어야 됩니다. 붙여야 됩니다.


그 씨로, 꽃으로 오신 분이 누구? 씨가 없는 곳에 꽃으로 오신 분? 예수, 샤론의 꽃, 광야의 꽃. 물없는 곳에 꽃이 붙어버렸네. 그러더니 십자가에서 떨어져 버렸어. 

그러더니 진리로, 항상 있는 말씀, 그리스도, 진리의 영으로 씨가 되어 심겨져요.


그 씨를 담은 이들이 열매가 되고, 그들이 또 그 씨를 심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해요. 

‘그게 복음이야.’라고 말해요. 복음이야. 이건 이사야서 40잘6-8절 말씀을 그대로 갖다가 쓴 겁니다.



사 40:6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구약도 똑같은 말 하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말이 뭔지 몰라요. 그 풀에 불과한 우리에게 샤론의 꽃이 붙어서 그가 자기를 계시하고 떨어지므로, 하나님을 말씀으로 계시하고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씨가 심겨진 겁니다. 그 씨가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예수 믿는가, 안 믿는가? 이건 여러분도 나도 몰라요. 뭐 어떻게 믿는 게 믿는 겁니까? 그리고 ‘난 믿어요’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내가 믿어줘야 됩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내용, 그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라는 꽃은 반드시 떨어져야 돼요. rm 씨가 내 속에 심겨져야 됩니다. 

그러한 첫 남편의 죽음과 새 남편의 도래를 예수님이 이런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9:14-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들인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아들들이)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는 금식할 것이니라 


율법이 물어옵니다.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과 제자들은 왜 안 해? 

금식은 뭐죠? 율법이고,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율법에는 ‘대속죄일에 1번 금식하라’고 했는데, 장로들의 유전으로 1주일에 2번 했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구제했어요. 그래놓고 ‘잘 했죠?’ 했어요. 


우리는 그 금식 하는데 당신들은 왜 금식 안 해요?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신랑이 와 있다. 아들들에게 신랑이 와 있다.”

이 신랑을 만나면  그들이 진짜 아들이 되는 거잖아요. 신부가 신랑을, 네케바가 자칼을,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들이 진짜 아들이 되는 거잖아요. 


“혼인집 아들들이 신랑이 있으면 신랑이 주는 걸 먹어야지. 구약의 율법으로 너희들이 지금 ‘난 안먹어요.’ 금식하면서 그걸 너희들의 영의 양식이라고 착각하고 그걸 먹고 있잖아.”

그렇죠? 그러고 있죠?


‘야, 이렇게 금식하면 하나님이 우릴 구원해준대.’가 율법주의죠? 

그러면 그들이 그 금식을, 그 율법을 양식으로 먹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금식한다’ 그러는 겁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세요. 

“내가 그거 주러 왔잖아. 내가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담고 있잖아. 그래서 신랑이, 첫 번째 남편이 왔다. 그래서 말해 주는데 너희들이 금식을 하고 있으면, 금식을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내가 주는 걸 먹어야지.” 


그런데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습니다. 예수의 말은 못 알아먹어야 맞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한 가지 방법을 내놓은 게 뭡니까? 

“너희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와. 그래야 먹을 수 있어.” 하시는 겁니다.

그 신랑을 빼앗기면 뭐가 와요? 그리스도가 오죠? 씨, 진리가 와요.


그러면 ‘아, 이렇게 금식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더 이상 이거 안 먹겠죠?

‘율법을 안 먹고, 행위를 안 먹고, 이게 나의 영의 양식이 아니라는 걸 알면 그게 금식이야.’

그러는 겁니다. 네가 신랑을 빼앗기면 그 씨가 올 거니까 그때는 네가 금식할거야. 그때는 네가 금식할거야. 지금은 금식 많이 먹어라. 제 말이 아닙니다.



사58:6-7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스스로 숨지 아니한다는 건 말, 내가 가진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 전해주어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못 입은 자를 ‘진리의 겉옷’으로 입히고, 하늘의 양식으로 구제하는 것이 금식이 아니냐.


이 말은 그리스도라는 진리, 그 씨가 너희에게 당연히 발생되는 사랑 아니냐. 그게 금식이야. 율법 안 먹는 거, 세상 거 안 먹는 거.


주님이 이렇게 설명해 주지 않았으면 이 금식도 뭔지 모르는 겁니다. 

‘너희가 이사야가 말한 그 금식하게 될거야.’ 어떻게 하면? 예수라는 꽃이 떨어지면.

그러니까 그 꽃은 떨어져야, 죽어야 합니다. 


로마서9:29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앨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저게 의야!’라고 좇아간 이스라엘은 그 법이 이야기하는 그 바, 그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돌은 한 돌입니다. 그런데 그 돌로 말미암아, 그 계명에 적힌 그 돌로 말미암아, 계명,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게 그거예요’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먹으면 그게 진리의 생수를 뿜어내는 반석이 됩니다. 


그러나그냥 율법으로 붙들어버리면 거치는 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네 위에 떨어져 가루도 안 남게 부숴버릴 거야. 


그러니까 둘은 하나입니다. 나무도 하나고, 진리도 하나입니다. 

그걸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입니다. 두 마음으로 보면 죽음이고, 한 마음으로 보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짝을 지어서 설명하세요. 그 짝은 원래 하나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나쁘고 좋아. 이렇게 우리에게 판단하라고 짝 준 거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걸 하나로 보는 것이 모노게네스, 하나를 가진 자, 진리를 가진 자입니다.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게 이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줬어요? 자기들끼리 좋아서 짝 지었지. 하나님이 짝을 지어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한 걸 자기들 맘대로 선 악으로 구분하여 ‘이건 하고, 이건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하면 그거 하나님이 용서 안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놓은 걸 네가 왜 분리해? 왜 네가 선악으로 판단해버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나. 이렇게 하나가 아닌 나와 예수로 존재하면 그게 죄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요. 여러분이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 자칼과 네케바,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과 신약, 땅과 하늘, 위엣것 아랫것, 물과 물, 예수와 그리스도, 육체와 땅, 영, 첫남편 두 번째 남편, 거짓과 진리, 밤과 낮, 빛과 어두움, 다윗과 솔로몬, 성막 성전, 선악,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 다 짝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를 통하여 다른 하나로 완성을 해가시는 방법으로 그 둘을 통해 하나를 설명한단 말입니다. 그걸 창세기 1장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언약이 담겨있는 겁니다.


‘저녁 ‘에레브’가 되고 아침 ‘보케르’가 되라‘입니다.

저녁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그걸 통해서 아침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땅은 혼돈과 공허 밖에 없었습니다. 그 ‘에레브’가 어둠입니다. 어둠, 저녁, 그 어둠 ‘에레브’가 되고 그걸 깨달아 ‘보케르’가 되게 할게. 그러면 그게 ‘욤’이야. 


‘욤’은 ‘날’이라고 번역했지만 그게 ‘덮음’이란 뜻입니다.  

그게 ‘덮음의 은혜’라는 거야. 

밤. 너희에겐 선악과부터 내가 설명해줄 수밖에 없어. 

먹었어? 밤이야. 그게 뭔지 알면 그걸 ‘빛’이라고 해. 

그러면 뭐야? 너희들이 잘 나서 내가 너희를 내 벗으로 여겨주는 거 아니잖아. 

그걸 덮음의 은혜라고 해. 그게 ‘욤’이야. 

그러면 그게 연합이잖아요.


그래서 첫째날, ‘욤 에하드’라고 명명하는 겁니다. 

그때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어요. 이걸 1,2,3,4,5,6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욤 에하드’ 이게 연합의 덮음이야. 이게 맨 처음 나온 겁니다. 그래서 첫째날이라고 번역해 놨어요. 이게 연합의 덮음이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어두움을 밤, 빛을 낮이라 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 낮을 날이라고 해요. 그리고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돼. 이게 욤 에하드, 연합의 덮음이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밤이 나빠요? 이 밤에서 그 빛, 낮을 알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낮처럼 살라는 게 아닙니다. 살 수도 없지만.


두 번째 창조가 뭡니까? 

휘장, 궁창을 가운데 두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죠?

그리고 이게 두 번째 욤, ‘욤 쉐니’라고 해요. 이건 짝이라는 말입니다. 

아랫물은 위엣물을 설명하는 겁니다. 

‘아랫물을 가지고 위의 물이 돼라.’

‘호 코스모스, 율법, 성경, 성전을 가지고 진리로 가라. 그러면 그게 짝이야.’


성막과 솔로몬 성전이 달라요. 성막에는 법궤가 조각목에 금을 씌운 거지만 성전에는 감람나무에다 금을 씌워요. 감람나무는 항상 하나님을 상징해요. 이게 짝입니다. 

“그 성전으로, 그 아랫것으로 너희가 위의 것을 알았어? 그게 ‘욤 쉐니’ 짝이야.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밤이 되고 아침이 돼. 그게 욤 쉐니야. 짝의 덮음이야.“ 


여기에 무슨 서수, 기수가 있겠어요? 숫자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어요. 의미로 준 겁니다. 

그러면 셋째날은 뭡니까? 이게 중요해요.


창1:11-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풀은 씨가 없는 것)과 씨 맺는 채소와 각가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씨 가진 나무들과 풀이 지금 대조되고 있죠?)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니

(열매 맺는 나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많은 열매 이야기 하는 거죠? 그 열매가 뭘 가지고 있어요? 씨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두 번째 남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자 풀, 너희는 마른 풀이 되어야 돼. 아니, 마른 풀이야. 씨가 없어. 너희 안에는 하늘의 것이 없어. 그래서 내가 꽃을 달거야. 샤론의 꽃으로 붙여버릴 거야. 꽃이 떨어지면 너희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될거야. 


이게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걸 ‘셋째 날’이라고 했는데, 

‘셋째날’이 아니라 ‘욤 쉐르시’ ‘셋째 층’이야.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고 하죠?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와서 뭐라고 해요? 

첫째 하늘은 ‘보이는 성전’ 호 우라노스.

둘째 하늘은 예수. ‘내가 하나님 나라다’ 하시죠? 

셋째 하늘은 진리.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이제 새 성전이 되잖아요. 


셋째 하늘. 바울이 그 진리를 알았을 때 ‘내가 셋째 하늘에 갔다 왔다.’고 말해요.

그리고 ‘사람의 말로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하고, ‘이게 참말이다. 알렛데이아. 진리야.’라고 합니다. 그러면 셋째날이 뭡니까? 이게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첫째 날과 넷째 날이 짝이고,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이 짝이고, 셋째날과 여섯째날이 짝이죠? 그러면 이게 어떻게 완성이 되어야 해요? 


자칼이 네케바 안으로 들어가고, 자칼이 그리스도가 되어 씨로 들어가야죠? 그래서 씨 가진 열매가 되어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안 되면? 그냥 풀입니다. 그거 먹으면 죽어요. 열매 못 맺으면. 

그러면 여섯째날이 뭡니까?



창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 단수입니다. 이게 사람, 하늘의 사람이야.) 

남자와 여자를

(‘이쉬’도 아니고 ‘잇샤’도 아니고, 아담도 하와도 아닙니다. 자칼과 네케바, 남편과 아내, 굳이 번역하면 신랑과 신부) 

창조하시고(그들이 하나가 되니까 사람이 됐어요.)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큰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진리로 네가 자칼을 품으면 그게 사람, 아들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온 천지만물이 다 진리를 설명한다는 걸 알거야. 이게 다스리고 정복함입니다. 너희들에게 다 정복될 거야. 꽃이 피는 것도 떨어지는 것도 진리,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진리, 모든 게 다 너희에게 정복될거야. 이게 진리를 가진, 씨를 가진 사람, 아들의 모습이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네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이게 너희 양식이야. 씨 가진 거. 진리)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새는 옛성전)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씨 없는 것. 그거 먹으라고. 그거 먹고 어떻게 되라고? 죽으라고.

열심히 식량 아닌 거 먹고 죽으라고.

밤12시에 라면 서너개 계란 5개 넣어서 끓여 먹고 밥 한 공기 먹고 아침에 일어나면 불쾌하죠? 포만감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왜 그랬지?’ 후회합니다.


그것보다 더한 겁니다. 

먹어. 풀 줄게. 씨 없는 거 줄게. 땅의 짐승들아 그거 먹어. 그게 완성이야. 각자의 자리에서의 완성. 그러면 일곱째 날이 돼요.


창세기는 1장1절, 첫 글자, 첫 문자부터 다 이 진리인 복음만 말해요. 

씨, 많은 열매. 너희는 그거 먹어야 자칼 네케바, 사람이야. 그런데 왜 내가 이야기 하는데 금식해? 그거 이야기 해주는데 왜 안 먹느냐고? 엉뚱한 얘기나 하면서 딴 금식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반드시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지고 있어야 돼요. 

행위와 마음, 둘 중에 하나를 가지셔야 돼요. 

전자는 멸망이고 후자가 생명입니다. 


생명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이 짝으로 설명하시기 위해 놓아둔 걸 절대로 가르지 않아요.

거기에서 죄와 악을 다르게 보는 마음이 생겨 정죄와 판단과 심판을 안 하는 겁니다. 

그걸 용서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 진리 알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예수 봤다고 하는 겁니다.

보긴 언제 봐요? 그 진리 보면 ‘그 십자가가 내 거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아니구나’ 아는 겁니다, 율법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몇번 용서해 줘야 해요?’ 묻는 베드로에게 ‘70에 7을 해.’ 하는 겁니다.

‘70번씩 7번. 칠칠 49, 490번 해.’가 아니라.

‘70에 7’이 뭡니까? 칠십 이레에 용서는 일어나는 거라고 하시는 겁니다.


칠십 이레는 뭡니까?

다니엘서 9장에 보면, 하나님이 역사 전체를 칠십 이레로 나누어 주세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69이레입니다. 그리고 와서 반, 삼년반을 쓰고 가세요. 

그러면 나머지가 삼년반이죠?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한 때 두 때 반 때, 삼년 반, 천 이백육십일이 나오는 겁니다. 


이 역사를 그렇게 이야기 해요. 

그 말은 69일의 반을 삼년반에다 넣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서 일어난 일, 십자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역사 내내 일어나는 거야.’ 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 3년 반 동안 일어났던 일이 너희에게 일어날 일이야. 그게 삼년반입니다. 이 70 이레, 일흔의 칠 기간 동안에 그 진리를 씨로 받으면, 그리스도로 받으면 용서가 되는 거야.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후인 이 삼년 반의 때에만 구원이 있다고 착각을 해요. 왜?

그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 나를 위해 발생한 거라는 걸 지우지 못해서 그래요. 


그 이전은 어떻게 구원을 받아요? 

이게 해답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 예수에게 감사하느라 여전히 율법에 묶인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감사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감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걸 털어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율법에 묶인 자들이 ‘몇 번 용서해 줄까요?’ 물어보는 겁니다.

율법에는 4번인가 용서하라고 하죠? 베드로는 ‘7번쯤 하면 내가 칭찬받겠네요?’ 하는 겁니다. 이게 율법주의죠?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 대고 그러는 겁니다.   

“용서는 70 이레 동안에 일어나. 그 진리만 알면. 그런데 네가 무슨 용서를 하니?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그 용서야? 70 이레의 용서지.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그 용서지.” 

‘491번째는 가서 죽여도 된다’가 아니라.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요. 기름은 메시아,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건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의 모형이고, 우리의 모형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아무도 못 죽이는 골리앗에게 갑니다. 세상 임금인 사울도 못 죽여요. 

왜? 같은 편이니까. 그게 사울이고, 그게 골리앗입니다. 안 죽여요. 못 죽여요.


그런데 기름부음 받은 아이, 꼴 같지 않은 볼품없는 아이가 하나 가는 겁니다. 

사무엘이 하나님 말 듣고 기름 부으러 갔는데 이새는 그를 안 불렀어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편파적으로 차별 안 해요.

그런데 얘는 워낙 아니라 안 불렀어요. 


사무엘이 ‘다른 애는 없냐?’고 하니 아버지가 “하나 있긴 한데 걔는 아니에요.”

결국 그 꼴 같지 않은 애가 기름부음을 받아요. 

‘나’입니다. 질그릇이 진리를 품어 안아요.

기름부음 받은 자. 열매 맺을 우리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무얼 갖고 가요?



삼상17:38-39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아닌 세상 왕의 갑옷. 그건 행위와 율법의 옷입니다. 그거 입으면 안됩니다. ‘놋 투구’. 놋은 성전 마당의 기명을 만들던 재료가 놋입니다. 섞인 것.

구리와 아연, 구리와 주석을 섞으면 놋이 됩니다. 그래서 성전 마당, 율법을 섞은 것. 이렇게 모형을 해서 놋으로 만드는 겁니다. 놋이 지성소로 들어가면 금이 됩니다. 섞인 것에서 순수한 것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성전입니다. 

놋 투구는 구원의 투구가 아닙니다.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해요?)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이 일이 그대로, 이 그림대로 일어난 게 맞아요. 그런데 문자는 그렇게 안 쓰여 있어요.

다른 문자들을 여기에 써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해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 씨가 이제 율법에게 가는데, 아무도 못 이겨요. 세상 임금도 못 이겨요. 


그가 뭘 가지고 가요?

막대기.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hF,m'(4294, 맛테)). 시편23편의 지팡이(fb,ve(7626, 셰베트))와 막대기[hn:[ev]mi(4938, 미쉬에나) ].

왜 성경에 지팡이가 그렇게 많이 나올까요? 

  


*히브리어의 지팡이 

lQem'(4731, 막켈) hF,m'(4294, 맛테) hn:[ev]mi(4938, 미쉬에나) 

&l,P,(6418, 펠레크) fb,ve(7626, 셰베트) 




이걸 파자하면 ‘하나님이 아랫것으로 가르치는 위의 것’이란 뜻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j'n:(5162, 나함) 후회하다, 위로하다]’는데 이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에서 뱀이 되죠? 

그런데 애굽 술사들의 지팡이 역시 뱀이 되는데,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가 그 뱀을 잡아먹어버립니다.   


뱀이 말을 하러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에게 못 알아듣는 말로, 우리를 놋뱀, 불뱀이 되셔서 덥썩 물러온 게, 율법이 되어 우리를 물러온 게 예수잖아요.



그래서 ‘내가 뱀이 되어 장대에 달려야 돼’ 하셨잖아요.


그 진짜 하늘의, 이 땅의 뱀을 먹으라고 하늘이 보내신 그 뱀, 그것의 진의가 지팡이입니다.

그게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 시작에 그 뱀이 다른 뱀을 먹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준 지팡이가. 그 지팡이가 우리를 안위하는 겁니다.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 막대기를 그가 가지고 있어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리고 시내에 가요. 돌이 있는 물.

이 시내 lj'n"(5158, 나할)라는 ‘단어가 유산, 분깃, 몫 ql,je(2506, 헬레크)’이라는 단어에서 온 (‘나누다, 분배(할당)하다’는 ql'j;(2505, 할라크)와 연관있는)시내라는 단어를 써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산, 문깃, 몫, 생명으로 주실 어떤 것이 담겨있는 물, 강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가서 매끄러운[qLuj'(2512, 할루크). 이 말은 할라크(ql'j; , 2505: 매끄럽다, 부드럽다)에서 유래] 돌 다섯을 가져와요. 


매끄러운. 이게 ‘제비뽑기 위한 돌’이란 뜻인데, ‘매끄럽다’는 의미는 사실 없어요. 

제비뽑기, 투표는 뭐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투표는 사람의 뜻을 모아 합의하는 겁니다. 사람이 뽑는 걸 투표라고 해요.


제비는 하나님이 결정한 걸 사람이 확인하는 거죠?

자, 하나님이 결정한 어떤 걸 가지고 다윗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분깃으로 줄 어떤 것이 담겨있는 그 물, 강으로 가서 돌을 끄집어내는데 다섯 개입니다. 


다윗이 이 돌을 던졌다고 하죠? ‘칼라 [l'q;’가 ‘(내)던지다’는 뜻만이 아니라 ‘새기다, 조각하다’는 뜻도 있어요. 어떤 것이 새겨져서 던져짐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깨질 수 없는 어떤 것이 심판을 받은 사건이 뭡니까? 십계명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왜 다섯인가?

물매 [l'q,(7050, 켈라)는 ‘칼라 [l'q;’에서 온 단어인데, ‘투석기, 휘장’이란 뜻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을 뜻합니다. 휘장은 열 폭. 거기서 열폭 병풍이 나왔습니다. 


원래 병풍은 어떤 걸 가리고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죽음이 항상 병풍 뒤로 들어가는 겁니다. 가리고 막기 위해 만들어놓은 열폭의 어떤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입니다. 


그 휘장이 열 개, 열의 계명이죠? 계명은 진리인 지성소를 막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휘장을 예수의 몸이라고 하고, ‘막고’ 있던 그것이 찢어졌습니다. 

어떻게 찢어졌을까요? 반씩, 다섯 개씩. 



다섯은 뭘까요?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을 앞의 다섯 개만 주시고 뒤의 것은 제목만 주세요.

앞의 다섯은,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망령되이 일컫지 마, 내 이름, 부모를 공경해. 이 다섯은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뭔지를 모르는데 그 이름이 뭔지는 어떻게 알며, 망령되이 일컫는 게 뭔지는 어떻게 알아서 그걸 안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이 맞아요? 하나에 님 붙인 게 그분의 이름 맞냐고요. 

그러면 하느님은 맞아요? 그것도 우리가 붙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이건 하느님이건 다 좋아요. 그걸로 싸우지 마세요. 국어책에 하느님으로 되어 있다는 둥.. 아니, 우리는 몰라요.


그 모르는 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뒤의 것은 우리에게 안 주셨어요.

뒤의 것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을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사랑, 아가페로 끝내버려요.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모든 게 그 안에 들어있어.’라고 해요. 


그러면 뭐죠? 이건 너희들이 못하는 거잖아. 그럼 내가 이야기 한다고 너희가 할 수 있겠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니?


이름이란 곧 말씀인데 그건 우리가 못 알아먹는 겁니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뒤의 다섯 개를 하면 그게 바로 위의 것을 하는 거야.


살안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간음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면 당연히 간음하고, 그걸로 거짓증거 하고 엉터리 말을 던질테니까 사랑도 안 되겠죠, 


그런데 그게 뭔지 알아 진리로 깨달으면 ‘아, 이거예요? 희생제사 드리지 않는 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거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네요. 그리고 하나님을 나를 낳아주시는 부모로,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를 낳아주시는 부모로 공경하는 거네요.’ 이렇게 알아먹는 겁니다. 이것이 다섯 개입니다.


이 열 개는 주의 이 다섯 개로 찢어진 휘장,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찢어져서 

뒤의 다섯 개로 남아 진리로 우리에게 넷, 코드란테스로 주어진 그걸로 이 율법 열 개가 깨지잖아요.


그러니까 다윗, 기름부음 받은 자가 그걸 주머니에 넣어요. 주머니는 추를 넣는 주머니고, 추는 성경에서 항상 말씀을 상징해요. 그래서 큰 거, 작은 거 넣지 마. 말씀은 항상 일정해야지, 똑같아야지, 그래요. 


거기에 넣어. 추 넣는, 말씀을 넣는 주머니가 뭡니까? ‘나’입니다.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의 몸.

내가 그렇게 되어 가면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골리앗이라는 율법이 깨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매, 휘장, 그 휘장이 찢어져 다섯 개로 던져지자 그가 죽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십자가에 묶여있으면 안됩니다. 이해가 가시죠?

그런데 왜 자꾸 그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알아먹는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니까요.


다윗이 뭐 뭐 가져 갔어요? 주머니, 막대기, 돌(계명, 말씀), 물매(휘장).

예수님이 제자들을 열둘과 칠십으로 보내죠? 70명이 아니라 70으로 보낸 겁니다. 그게 완성입니다. 열둘, 아들로 보내는 겁니다. 숫자를 맞춰 보내는 게 아니라.


열둘로, 칠십으로 보내면서 뭘 가지고 가라고 해요? 지팡이, 전대, 은전, 두벌 옷. 

그걸 ‘가지지 말라’ ‘메데이스 아이로’. 이 말은 ‘씌우지 마라’입니다.

‘가지지 말라’가 아니라 ‘그거 안 가져가면 안 돼’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두 마음으로 그 말을 딱 대하면 무슨 마음이 먼저 드냐면, 

‘그래, 그렇게 나는 가난하고 겸손하게 선교를 가야 하나님도 기뻐하셔.’라고 해석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메데이스 아이로’를 ‘가지지 말라’로 보는 겁니다.

 

다윗이 그거 갖고 가서 율법을 부수었는데, 그걸 진리로 가져가서 전하는 역할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그걸 안 가져가면 어떻게 해요? 

‘은’. 은은 항상 구약에서 속전입니다. 가지고 가야죠.

‘주머니’. 가져가야죠. 내가 진리를 담은 그릇인데.(*주머니 phvra(4082, 페라) 페라는 70인역본에서 3회, 외경 유딧(10:5; 13:10,15)에서만 곡식 등을 넣는 '부대와 자루'에 대해 사용) 

 

‘두 벌 옷’. 속옷과 겉옷. 속옷을 달라는 이들에게 겉옷을 줄 수 있는 짝. 두 벌이 아니라 ‘뒤오. 둘, 짝’. 옷을 짝으로 가져 가. 가리는 걸 가져 가. 어디로 가라고 해요? 유대인의 집으로. 율법주의에게 가서 그거 깨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릴 게요. 

그러니까 선교 가면서 ‘우리는 자비량 선교입니다. 성경에서 주머니, 전대, 옷, 가져가지 말라 그랬잖아요.’ 하면서 진짜 한 벌 갖고 가는 애들 있어요. 돈도 안 가져가서 쫄쫄 굶고 고생해요. 돈 보내주세요. 가서 잘 먹고, 진짜 하나님의 진리 잘 전하고 오라고 그러세요. 


바울이 텐트를 만들었는데, 텐트는 장막이고, 성전 짓는 자의 모형으로 텐트를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거 안 만들면 못 먹고 살아서 그거 만들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희는 나 먹일 의무가 당연히 있는 거야.” 그래요. 


편하게 가서 선교해도 돼요. 왜 자학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일주일을 버텼다.’ 그 만족감.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나를 이 고생시키는 영감탱이. 그런 것에서 자유하세요. 성경은 그런 말 안 합니다. 그런 걸로 사람들 막 평가하고 그러지 마세요. 


제대로 된 진리를 전할 수 있다면 편하게 가서 하고 오세요. 뭐하러 고생하고, 피부병 걸리고 그래요? 엉뚱한 봉사활동을 선교라고 착각해요. 

성경은 절대 그런 얘기 안 해요. 자유하세요.


이렇게 우리는 첫 번째 남편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진리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거고, 율법이라는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를 발견해야 되는 거고, 우리 안의 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한 마음을 배우면 되는 겁니다. 그게 신의 죽음, 그 은혜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걸 알면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분을 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은 찬송가를 부르는 걸 찬송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산에서 시원하고 깨끗한 옹달샘을 발견하고 마셨다고 해요. 너무 좋아. 칭찬해주고 싶고, 찬송하고 싶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요? 그릇에 떠놓고 거기다 대고 빌면 돼요?     

‘아, 시원해!’ 맛있게 먹고 다른 이에게 전해줘요. 그걸 찬송이라고 해요. 

그게 진짜 섬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거 떠놓고 거기다가 빌고 있어요. 그건 우상섬김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복음을 알았으면 ‘아, 좋아!’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진리가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그거 확인하시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자가 됐습니다.

그거 맛있게 먹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누리라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걸 가지고 엉뚱한 행위를 낳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선물한 그 자유가 무엇인지를 잘 누리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풍성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내어놓는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