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죽음 본문 : 롬 8 : 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자, 바울은 7장에서 그 율법과 죄의 역할과 효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후에 8장에서 진정한 해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8장에서 죄와 율법으로 진리와 생명에 이르게 된 그런 성도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줘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8장은 진리가 된 자들아, 육의 행실을 쫓지 말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 로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은 합력이 되어서 선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니까 현상계에 나타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규정해 놓은 그런 죄라든지 어둠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그런 것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을 할 게 아니라, 그것으로 절망하거나 기뻐하거나 자랑하거나 자만하거나 그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계시된 진리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너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 마지막 절이죠? 그 어떤 것도 너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그 죄도. 그 더러움도 결국은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므로 그것도 너희들을 그것도 너희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거야.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게 바로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육의 행실을 끊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 라고 하니까 단순하게 나쁜 일 하는 걸 멈추고 영적인 일에만 힘쓰라 라는 말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문도 안 보고, TV도 안 보고, 유행가도 안 부르고 뭐 이렇게. 정확하게 말 하면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린 지난주에요 사도바울이 8장에서 이렇게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가 율법과 예수 안에서 우리의 육이 죽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공부를 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이 빼먹은 8장 1절의 그 후반부가 ‘메카타 싸륵스 페리파트 알라파타 푸뉴마’ 라 그랬죠? 육신 안에서 살지 않게 된 자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 우리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을 그때부터 안 보신다, 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죄, 어디에다가 죄를 정하니? 어디에다가 대고 유죄를 선고할까? 이런 말이란 말에요. 그걸 개역성경은 다 빼먹어 버린 거죠. 육이 죽어 없어지면 하나님은 그 육을 안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에다가 죄를 정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정죄라는 것이 없어지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1절에서. 우리는 7장에서 죄와, 사망. 그 다나토스, 그 사망. 좋은 사망이죠. 그 사망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라는 바울의 교훈을 충분히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잘 깨달아서 죽으면 그 율법의 효용이, 역할이 그런 거잖아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죠? 율법이, 성경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바잖아요. 그렇게 죄가 무엇인지 잘 깨달아서 아,, 그래 이건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고 내가 죽으면.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하죠? 말씀이 나를 죽여 낸 거란 말에요. 그게 말씀의 완성이란 말에요. 그렇게 죽으면 그게 말씀의 완성이고 그게 곧 생명이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해방이라는 게 일어난대요. 그게 2절이에요. 본문 2절. 거기에서 해방이라는 게 일어나는데 그 ‘엘류데리오’라는 해방이라고 번역이 된 그 헬라어는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다', '도덕적 책임과 책무에서 면제 되다', '노예의 자리에서 풀려나다'. 라는 의미의 단어예요. 그렇게 진리로 ‘엘류데리오’ 해방이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노예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법과 무관한 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모든 도덕적 책무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법의 노예로 안 살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엘류데리오’에요. 해방이란 단어가 그 단어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의 노예로써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막 산다는 게 아닙니다. 이제 법 위에 서서 법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해방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말에요. 방종이나 방임과는 다른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해방이 된 자들을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잡혀 있으면 죽는 거예요. 법에 잡혀 있으면 죽은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거란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 이거를 성경에서 예화를 끌어다가 성경으로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진리의 영, 즉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된 자'들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말이, 로고스가 영이요, 푸뉴마요. 생명, ‘조에’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말씀으로, 진리로 말씀이 되는 거예요. 진리가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렇게 말씀에 의해, 진리의 말씀에 의해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자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역할로 부름을 받는다. 그래요. 성경이. 그리스도가 뭐예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기름부음이란 건 뭡니까? 성경에서 항상. 기름과 금이라는 것은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덮다, 기름을 바르다. 금으로 싸다, 성전이 그렇게 되어있죠? 이거는 말씀으로 덮다 는 뜻이에요. 조각 목에 불과한 이런 피조물이란 존재를 말씀으로, 기름으로 덮어버리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그런 의미거든요. 그게 그리스도에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걸 메시아라 그래요. 그래서 진리를 우리가 들어서 진리를 내 맘에 담으면 진리의 겉옷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진리로 덮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것을. 그래서 그것을 그리스도, ‘크리스토스’, 이렇게 복수로 뭉둥그려 설명을 해요. 이름 붙인단 말에요 성경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거를 그렇게 해서 언약 안에서 ‘스타우로스’ 언약, 이게 십자가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사실은 성경에 그런 십자가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스타우로스’를 언약, 기둥이란 단어거든요. 그거를 그냥 십자가라고 번역을 해요. 그래서 쓰는 거예요. Cross 라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언약이라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메시아는 언약 안에서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어,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아, 말씀은 그거군요? 라고 다 이루어낸 다음에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군요? 이놈들이 그럼 하나님 흉내내고 있었던 거네요? 라고 말씀을 완성한 다음에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그걸 진리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였잖아요. 그래서 그거를 전해주어 그들을 살려내는 게 메시아, 그리스도잖아요. 그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총칭하여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라고 불러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인자는 누구밖에 없었어요? 예? 예수님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인자다. 그러는 거예요. 인자가 구원한다. 그런다고요. 예수님만 구원한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그분에 의해 진리를 부여받은 자들이 그 인자들이 그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여러분도 오늘날 그 역할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반드시 무얼 통과한다? 언약, 스타우로스 안에서의 다나토스, 그 죽음을 육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 그 법으로 죽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죽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거란 말에요. 로마서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 법은 같은 법이라니까요. 같은 법으로 죽고 살아나는 거란 말에요. 죽는 게 사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선악과가 생명나무 실과가 되는 거예요.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창세기의 나무는 항상 단수로 하나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한 단어란 말에요. 한 단어. 그런데 그 인자들을 쭉 거슬러 올라가보면 예수님부터 누가복음 족보에 보면 인제 그 인자의 라인이 쫙 나오죠? 우리 공부했잖아요. 맨 꼭대기에 누가 있어요? 하나님, 그 밑에? 아담. 아담이 뭐예요? 사람. 인, 그런데 거기에는 그 아담, 하 아담이라고 되어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하벤, 하 아담이 인자인데 그 아담의 그 자손. 이게 인자란 말에요. 그러니까 이 라인의 그 아담. 진리가 된 아담을 하 아담이라고 관사를 붙여요. 성경은. 그리고 그냥 인간, 보편적인 그냥 아담을 그냥 관사 없이 아담이라고 쓴단 말에요. 그런데 그 족보 안에서는 하 아담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그 아담. 이렇게 내려온단 말에요. 그 아담의 라인 위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하나님이 그 아담을 보내어 그 아담의 라인들이, 그러니까 예수로 완성되는 그 아담의 라인들이 하나님의 그 그리스도의 역할들을 하는 거예요. 뭐로? 진리, 말씀으로.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씀으로 죽어요. 어떻게? 말씀으로 죽는 게 뭐라 그랬습니까? 우리는 피조물, 하나님 아님. 하나님이 하나님임. 그러니까 하나님 흉내 내는 거 그만두자라는 거예요. 그게 말씀으로 죽는 거예요. 그게 무트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 아담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파자하면 뭐라 그랬어요? ‘알렙 달렙 메노미’, 하나님의 구별된 말씀.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라는 뜻이에요. 그게 우리 이름이죠? 말씀, 진리가 우리의 이름이래요. 단순히 그 단어를 파자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성경이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한다니까요. 그 말씀이 와서 말씀으로 또 누군가를 낳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구약에 보면 그 인자의 라인, 그 진리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라인에 누가누구를 낳다, 낳다, 낳다를 전부 히필 동사를 쓴다고 그랬습니다. 칼 동사나 소팔 동사를 쓰면 그냥 부정모혈로 낳는 거예요. 사람이 그냥 사람을 낳는 거고 히필 동사를 쓰면 그거를 낳게 하다, 는 의미가 되어서 말씀으로 낳다에요. 그래서 셈의 아들이 다섯인데 아르박삿 하나를 히필 동사로 낳았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 건진 거예요. 하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들을 낳는 거에요. 그들을 인자라 그래요. 성경이.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과한단 말에요. 그래서 그 죽음은 '좋은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죽음은 '완성'이란 말에요. 그런데 이 땅에서 그 완성을 끝, 완성, 종이라는 걸 가장 멋지게 그리고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인간의 죽음이라니까요. 인간은 그게 마지막인줄 알잖아요? 그걸 끝이라고 안다고요 인간들은. 그래서 하나님이 그 죽음을 들어 이게 완성이다,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죽음은, 그 죽음에 대한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그 죽음이 아니란 말에요. 보세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무섭고 두렵고 그런 더러운 게 되는 거지만 죽음이. 그 이후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건 하나의 문이라니까요. 그건요. 그건 무섭고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걸 하나의 시청각교재로 사용하여 완성이라는 게 이런 거야, 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죽음으로. 그래서 죽음이라는 거는 나쁜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뭐 죽음, 사망 이런 게 나오면 무조건 나쁜 거 이렇게 그래서 그 사망에 이르면 안 되는 거,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성경을 보면 안 된다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죠? 자, 그런 하 벤, 하 아담, 호 휘오스, 호 안드로포스. 인자, 그 인자의 다른 이름이 말씀이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1장 1절 보세요. 예수님이 자기를 인자라고 했는데 성경은 그분을 말씀이라고 그러세요.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 따로 말씀 따로, 가 아니라, 메타라는 전치사는 항상 연합이라는 의미예요 그 말씀이 하나님과 연합된 그분이었다. 그게 말씀이야, 하나님이다! 말씀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거 보세요. 뒤에 나오네요. ㅎ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담고 내려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고스라고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 자신, 그, 거기에 있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무'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그거는 레마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걸 어떤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는 거. 나타나게 보여주는 걸 로고스라고 한단 말입니다. 말씀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렇게 로고스, 말씀으로 예수가 육을 입고 내려오셨잖아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는 거란 말이에요. 이거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게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그 엘로힘도 그 하나님은 아니란 말에요. 왜? 그 하나님은 이 현상계에 있는 이 인간들의 이성에 포착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수준의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 엘로힘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그죠? 그거예요. 그 말씀. 보이는 그 하나님으로 오시는 거죠. 그래서 그분이 이제 말씀이에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그릇으로 담고 온 그분, 말씀. 그런데 그 말씀이 말씀을 낳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을 낳아요. 성경이 성도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거 아세요? 우리의 이름을? 왜? 우리도 진리를 받아 바로 우리는,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피조물의 한계를 이 땅에서 확증해 내고 증거 해 내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도 말씀인 거예요. 계시록 19장 9절 보세요. 계 19 : 9-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이게 누구죠? 성도입니다. 교회예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 어린 양의 신부들입니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여기서 이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에요.)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게 로고스, 알레떼이야에요 로고스는 뭐예요? 말씀이죠? 일레떼이야는 진리에요. 이들이 진리이고 말씀이다. 둘 다 복수에요. 이들이 말씀이야. 이들이 진리야, 그런다고요. 진리, 말씀 같은 거죠? 그래서 로고스 알레떼이야 그러는 거예요. 이들이 진리야. 이들이 말씀이야, 왜? 그 아래에서 예수와 똑같이 메시야의 역할을 하고 왔거든. 그들이 진리야. 그래요.)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예수님이 말 타고 오면 큰일 나는 거죠? 이게 심판입니다. 왜? 말은 이사야서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육! 육신을 타고 오면 죽는 거예요 우리는. 다 죽는 거죠? 그 이름이 뭐라 그래요?)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충신은 충성된 신하가 아니라 이게 '피스토스'예요. 믿음이에요. 그분의 이름이 믿음이래요. 그리고 진실, 최진실이 아니라, 기건 '알레떼이아'예요. 진리에요. 이게. 그분의 이름이 믿음이요, 진리래요. 그리고는)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자, 심판하시는 예수님도 말씀 이 땅에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오신 그분의 이름도 말씀. 우리, 어린 양의 신부인 우리도 말씀. 다, 우리, 그분도 진리. 나도 진리. 예수님이 내가 진리요! 그랬잖아요. 우리도 진리래요. 우리도 말씀이래요. 예수님과 우리의 이름이 똑같아 졌네요?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죠, 그러니?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예요. 진리가 진리를 낳은 거란 말에요. 그 전체를 인자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피동적으로 그냥 그 예수를 추억하고 감격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삶을 그대로 내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들이라니까요. 크리스투스라니까요. 이게 다른 거예요. 이게 같은 이야기인 거 같지만 아주 다른 거란 말에요. 이렇게 이해를 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어. 이제 내가 와서 율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너희들이 전부 하나님 살해범으로 폭로가 되어버렸네? 전 세계가, 이방인, 유대인 할 거없이 합심하여 하나님을 죽이네? 진리를 죽이네? 그러면 율법으로써, 율법의 역할과 효용,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성취된 거잖아요?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 며요? 성경이. 그러니까 율법으로 오신, 두 번째 성전으로 오신 예수가 그 역할을 끝낸 거네요. 다 이루었다. 봐, 너희들은 한 사람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 한 사람도 진리를 못 알아보네? 그리고 그 진리를 꺼버리네? 그러니 그분이 스스로 죽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신을 알겠니?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이요. 너희들은 피조물이지? 라고 십자가, 스타우로스가 선거지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한 거예요. 거기서. 다 이루었다. 이거 하러 온 거야. 내가.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살려야 사는 거야. 하나님이 살려야 사는 거야. 스스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네? 이걸 확증한 거죠? 예수님이?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다나투스의 죽음을 죽자. 그리고는 그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고, 소리치고 죽자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이거를 너무너무 아파서 아, 아파!!너무 괴로워~~소리 지르고, 비명 지르고 훽 죽으니까 이 안에 있는 어떤 혼령 같은 게 휙 떠나갔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안 돼요. 크게 소리 질렀다는 게 뭐죠? 무슨 소리를 질렀어요? ‘메가스’ 라는 건 큰 소리로가 아니에요. 메가, Mega 알죠? 영어에? 메가스라는 건 위대한, 엄청난 말을 외치고, 뭐라고? 다 이루었다고! 다 이루었다고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푸뉴마, 영, 말이라 그랬어요. 생명이 어디로 넘겨졌다. 보내졌다. 라는 뜻이에요. 혼령이 휙 떠나갔다는 뜻이 아니라. 프뉴마, 영혼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프뉴마가 보내졌다. 어디론가 보내졌다. ( 아키헤미 가 보내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이 율법으로 보내신, 말씀을 담아 보내신 예수의 육을 언약 안에서 죽여 버리고 다 이루어내자 인간들을 아무것도 아니지? 이거 봐, 낫팅이잖아 너희들은, 그러자 그 진리가 완성된 진리가 어디론가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프뉴마, 성령, 진리의 영이라고도 번역하죠? 우리가. 그 생명, 말, 진리가 어디로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아키헤미) 다 이루었다는 선포가 일어나자.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요한복음 15장 26절 보세요. 요15 : 26- 26.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아버지로' 예요. 내가 아버지로, 아버지는 뭐라 그랬습니까? 아버지가 알렙하고 베잍이니까, 아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그걸 그렇게 써놓고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 진리를 담는 그릇이 되면 나를 아버지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육의 아버지 이야기하는 거 아니죠? 내가 아버지로 너희에게 보낼 그)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이게 푸뉴마예요. 예수님이 크게,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떠나간 프뉴마있죠? 그 프뉴마가 이 프뉴마예요. 알레떼이야 프뉴마.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 한다고 그래요. 누구? 예수. 아,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군요. 그가 담은 건 진리였군요. 그가 한 표적, 기적, 모든 게 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었던 거군요? 라고 그 진리의 영이 오면 그걸 이해시킨다는 거예요. 어떤 걸로? 그걸로. 설명하여. 그게 그거였다는 것을 이해시킨다는 것이죠.)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신다. 그래요. 누가 한 이야기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예수가 한 이야기를. 그거 갖고 죄와 사망의 법, 율법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걸 진리로 말씀하셨지만 못 알아들었잖아요. 그걸 갖고 너희들에게 깨닫게 해준다는 거예요. 진리로. 그가. 누가? 푸뉴마가. 예수님의 언약. 그 스타우로스. 그 기둥에서 어딘가로 보내진 그 프뉴마가 어디로 가더니 그 죽음이 뭔지 그분이 공생애 동안 하신일이 뭔지를 설명해준다는 거예요. 진리로. 어떻게? 너희들은 아니고, 너희들은 하나님 살해범, 하나님이 하나님. 그래서 그분이 너희들 안 살리면 너희들은 절대 아니다, 라는 걸 진리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예수가 누구인지를 ‘독사’ 나타내준다는 것이죠.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다른 거가 아니라니까요. 이 '호 코스모스'는 어떤 이에게는 껍데기로만 보여서 여기를 목적지로 삼게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게 진리로 보여서 여기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똑같은 거라니까요. 하나로 보게 된단 말이에요. 진리를 알게 되며는. 요한일서 5장 1절 보세요. 요일 5 : 6-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물과 피로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보혈의 피, 이거는 구약적 개념이죠?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거잖아요? 거저. 예수님이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게 뭐라고 설명을 해요? 생수. 물이라고 설명해요. 물이고, 바로 그 피가 생수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못 알아먹네? 그래서 물과 피로 오셨다는 거예요.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진리의 성령이 이게 뭔지 가르쳐 줘야 되죠? 그래서 그 밑에 뭐라 그러죠?)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보세요. 예수의 육은 반드시 실패해야 돼요. 아무도 구원하면 안 된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이나 그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구원되면 안 돼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쑤셔 박아주는 거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깨닫는 거지. 그걸로 알아보면 안 돼요. 그러니까 육은 실패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영이 와서 성공을 해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말씀을 갖고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무트의 죽음으로 죽어버리면. 무트라는 게 멤타오니까. 말씀의 완성이잖아요. 말씀의 표. 그걸 말씀의 완성이라고 써놓고 그냥 죽음이라고 얘기한다니까요 히브리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면 내가 그 죽음의 과정, 무트, 다나토스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나는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신입니다' . 나는 하나님처럼 살려고 선악과 먹었지만 아닌 거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알게 되면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고 그걸 '살았다' 라고 그래요. 그를, 선악과 먹은 거 그게 뭔지 알았어? 그럼 네가 생명나무 실과 먹은 거야. 라고 해주는 거예요 성경이. 그래서 생명나무 실과가 감추어져있다고 하는 거예요. 안 주려고 꽁꽁 감춰놓은 게 아니라. 그걸 아는 자만 그걸 먹은 걸로 여겨주는 거라니까요. 그게 산거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생명이 뭔지를 이 땅에다가는 설명해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땅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그것으로 그 생명을 살려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와 율법이라는 게 주어진 거라고. 사도 바울이 7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진리를 받은 이들은 그 말씀을 받은 이들은 말씀의 삶을 살아야 되잖아요.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이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단지 그분을 설명하는 모형이네요. 사실 이거는 헛 거네요. 곧 헐려야 할 모델하우스인 거로군요. 내 육을 포함해서. 이걸 증거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끌려간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진리를 삶으로 입으로 그렇게 설명하면 창세전에 택함 받은 어떤 이들이 그걸로 또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가 그의 아비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낳은 거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주신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사람이 진리를, 기름을 금을 넘겨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낸다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계 20 : 4-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예수의 증거가 뭡니까? 그리스도의 증거 아니에요. 예수의 증거. 율법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의 증거.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로고스로 주어지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래요? 율법은 우리를 어떻게 해요? 죽여 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목베임을 받는다고 그래요. 목베임을 받는다는 건 머리를 바꾼다는 뜻이에요. 심장을 쑤신다가 아니라 목베임을 받는다. 이건 뭐 단두대에다가 그냥 머리를 넣고 다 잘라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머리로 바꿔준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처럼 살려고 지들이 머리되어 살던 이들이 율법을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에 한 해서. 그 목이 잘라지고 지목을 잃어버리고 예수가 머리로 앉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죠. 십자가 이전에 내가 이 머리 둘 곳을 못 찾겠다. 내가 이 머리 둘 곳을 못 찾겠네. 왜? 전부 자기들이 머리래. 그래서 그 법을 주니까. 그게 목을 잘라버리고 예수라는 머리로 바꾸는 거죠. 그런데 그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라 그러죠? 여기서 영혼은 프뉴마가 아니라 푸시케예요. 육입니다. 육. 그들의 육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살아난다. 그래요. 살아서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라고 되어 있죠? 이게 ‘ 메타 크리스토스’ 인데. 메타는 항상 연합의 전치사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란 말이에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란 말에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그리스도인 되는 거니까 그게 그리스도로. 천년, 천년은 항상 완전수에요. 그래서 천 살 이상 산 사람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건 그냥 영원, 완전이란 얘기죠. 그래서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천년을 사는 거예요. 앞으로 무슨 또 천년이 오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히브리말에는 일, 천 이게 같은 말이에요. 다. 그 천년동안 왕노릇 한대요. 어떻게 왕 노릇 해요? 법이 없으니 내가 법이 되어 다스린다니까요. 그게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왕관 쓰고 하늘나라에서 막 다스리고 이런 거 아니에요.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거는.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당연하죠. 못 살아요)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이제 둘째 사망이라는 게 없어요. 다나토스의 죽음 하나면 끝이에요. 그냥.)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또 나오죠? 메타 크리스토스, 또 왕 노릇 한다 그래요. 이 바실레이아는 통치라는 말이에요. 이거와 반대말은 둘로스, 종이라는 말이에요.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치, 그들이 통치하더라. 예요. 왜? 법에 이제 종속되어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통치하더라, 예요. 영원 안에서 통치하더라. 천년 동안. 무엇으로? 그리스도로. 메타 크리스토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될 게 뭐라 그래요? 예수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려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에요. 너 아니네? 이 호 코스모스에서 이거 아니네? 이렇게. 목을 바꿔줘야 돼. 머리를 바꿔줘야 되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죄와 사망의 법이 목을 날려 버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정죄에 이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보세요. 막 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위하여 아니에요. 나와 복음 때문에, 예수와 예수가 전한 복음 때문에) 지 목숨을 잃으면 (여기서 목숨은 푸시케죠)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약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온 천하는 호 코스모스에요. 하늘과 땅 아닙니다. 호 코스모스. 호 코스모스가 뭐예요? 옛 성전이에요. 그 호 코스모스. 사람들이 원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적인 것, 나의 몸을 비롯하여. 그걸 열심히 얻으려고 하죠? 나의 가치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 이걸 신앙생활이라고들 다 착각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그 호 코스모스를 얻었다 치자. 그 푸시케, 그 육을 얻었다 치자. 그게 죽음이야. 진짜 죽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음을, 그 푸시케를 잃어버리면? 그가 구원에 이른다.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세요. 내가 죽어야 돼. 그리고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야 돼. 세 번째 것으로 세워야 돼. 이렇게 말씀 하세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야단 쳤어요. 꾸짖었습니다. 왜? 내가 다 버리고 쫓았는데 당신이 죽으면 나는 뭐냐는 거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사단아! 라고 불러요. 그건 고유명사 아닙니다. 거기선 일반명사에요. 그래서 일반명사는 항상 번역을 해줘야 되죠? 대적 자에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에 지금 대적자로 일하는 거 알아? 이런 말이에요. 이 마귀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사단아, 그게 대적자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대적이야. 내가 죽어야 된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는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나를 쫓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 쫓아야 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 때문에 자기를 그냥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하려고, 부인도 안 되는 걸 그 애를 쓰는 사람들 많죠?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니까 고난주간 같은 때, 진짜 큰 십자가 만들어 갖고 그거 짊어지고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 봤죠? 그리고 결국 어떤 놈은 거기에다가 지 몸을 박아 버려갖고 죽었어요. 작년인가 언제.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로만 보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자기가 왜 매달려요?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예요? 아닙니다. 이걸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해드리면 이렇게 돼요. 나를 쫓게 될 사람이 있어. 나, 예수 그리스도가 간 그 길을 그대로 좇게 될 사람이 누구예요? '인자'들이에요. 그리스도들. 그리스도인. 나를 좇게 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아파르 네오마이’는 '자기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인간들은 인간들의 말이 있어요. 자기의 마음. 두 마음으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에피뚜미아라는 탐심으로 갖고 있는 지 말이 있죠? 비 진리. 세상의 말. 그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이런 말이에요. 그게 자기부인이라고 번역이 된 거죠.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스타우로스. 십자가가 아니라 언약이에요. 기둥이에요. 크로스가 아니라 기둥. 언약 안에서. 아이로 될 거다. ‘아이로’가 뭐예요? ‘나샤‘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꾼 건데 이게 뭐냐 하면 파괴하다. 받아들이다 에요. 파괴하다, 세우다. 파괴해서 세울 거야. 그래요. 언약 안에서 그는 파괴해서 세울 거야. 나를 좇게 될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성도라 그래. 그리스도인이라 그래.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자기 말을 거절하게 돼. 세상의 말, 비 진리를 거절하게 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가 세상에서 죽는 거예요. 그는. 어? 나 아니네? 이렇게 되는 거니까. 우리는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야 되는 거네? 그거잖아요. 그렇게 그 말을 거절하게 되면 그가 죽고.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야. 어디서? 언약 안에서. 그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그냥 질질 끌고 쫓아가느라고.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될 성도들의 삶,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예요. 육이, 푸쉬케가 망하고 프뉴마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언약이 뭐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언약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언약이 뭐였느냐고요. 내가 예수로, 율법으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그러죠? 왜? 율법, 호 코스모스. 육은 아니다, 라는 것을 내가 반드시 증명해야 되므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이게 언약이잖아요? 그래서 파괴되고 살린다. ‘아이로’라는 단어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먼저 파괴를 경험한다니까요. 절망이에요. 절망. 뭐 이딴 게 다 있어?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왜 이 정도야? 그렇다고 그게 막 패역한 삶으로 막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토록 자기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인식을 자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 믿자마자 그냥 성자가 되어 갖고 야, 잘 한다, 잘 한다. 이게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날마다 죽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아, 이놈의 성질 그냥 그래갖고 꾹 참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하고 싶은 걸 그냥 꾹 참는 거. 날 마다 죽어야지,, 사실은 고게 사는 거예요. 아세요? 여러분? 날마다 죽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증명해내고 말거야. 내가. 날마다 죽는다. 야, 너, 나를 그렇게, 그렇게 했는데 내가 날마다 죽어서 나는 너보다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걸 내가 증명해 낼 거야! 요게 사는 거예요. 시퍼렇게 사는 거. 날마다 죽는 다는 건. 그 '다나토스의 죽음 그 안으로 던져진 자'는 단 한 순간도 그 과정의 죽음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잆다. 는 뜻이에요. 날마다 죽여 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로? 넌 아니다. Nothing 이다. 는 그 자리로.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어. 다나토스에요 그게. 나는 날마다 죽어. 그래서 날마다 죽어서 뭐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아니다, 라는 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죽는 거예요.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 거니까. 날마다 죽는다. 성도의 운명적 실존이에요 그게. 매일 죽어. 날마다 죽어.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 아나스테미, 아나 이스테미. 위로 똑바로 세우다. 이게 부활이란 말이라고 그랬죠? 아나스테미가 안 되는 거예요. 파괴가 안 되면 아나스테미가 안 된다니까요. 부활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장. 아니스테미의 그 장. 거기에 죽음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니까요. 안 죽어? 그럼 너희는 못 살아. 너희는 부활을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사는 거? 그건 죽은 자의 부활이야. 죽은 자들이 생각하는 부활이야. 야, 그건 부활이 아니라 그게 진짜 죽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고린도전서 15장이. 자, 그 아나부스타스, 그 부활, 아니스테미, 그 부활을 고린도전서 15장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보세요. 고전 15 : 31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랑을 하고 있어요. 나는 날마다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는다. 나는 날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있어요. 내가 개척한 교회에서 매일 쫓겨나, 그리고 말도 못한다 그러고. 말을 왜 못했겠어요 바울이? 말에 졸하다는 것은 야, 네 말 같지 않은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이런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런데 그 죽음이 뭐냐 하면 내가 범인처럼 범인이라는 건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냥. 범상치 않은 게 좋은 거죠? 특별한 사람을 아, 범상치 않아! 그러죠? 범은 그냥 범인. 죄 지은 범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범인. 나와 다른 그런 다른 죽음을 죽는 그런 범인. 그들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워서 죽었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히브리 역사서를 보면 에베소에서 특히 예수를 믿겠다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수의 굴에 던져져서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해요.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자랑할 게 하나 있어. 난 날마다 죽어. 그 죽음의 과정에서 난 빠져나올 수가 없어. 그런데 그건 내 자랑이야. 그러면서 뭐와 대조를 하느냐 하면 그런데 내 죽음은 어떤 범인들이 죽은 그런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다. 그러면서 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내가 다른 범인들처럼 맹수의 굴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겠다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는 그런 죽음 말하는 줄 알아? 그거 아냐. 그렇게 죽었다면 이게 나한테 무슨 유익이 되겠니? 내 부활에 그게 무슨 유익이 되겠어? 우리는 그걸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순교라고 하고 그들을 추앙한다니까요. 사도바울은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게 무슨 유익이 있냐? 그래요. 부활에. 무슨 말이에요? 그건 개죽음이다. 그런 말이에요.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은 아니다. 라는 얘기예요. 보세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죽으면 못 살아나. 진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죽음. 그 죽음은 다나토스의 죽음. 내가 말하는 그 죽음이라니까. 아니, 그 범인들의 죽음은 너희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니까. 왜? 예수를 믿겠다고, 그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수가 나를 물어뜯어 죽이고 있는데 비명 한번 안 지르면서 입 꽉 물고 참는 건 하나님처럼 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무서워요. 되더라니까요. 제가 옛날에 안기부 가서 고문 받는데 진짜 아무데나 바늘로 다 찍어서 다 멍이었어요. 그런데 진짜 이 악물고 악 소리 한번 안 질렀어요. 돼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네가 훌륭한 사람으로, 정말 훌륭한 신앙인으로 남들에게 박수를 받았다면 그거는 개죽음 죽은 거야. 그래요. 예수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준 거 아니잖아요. 그 예수가 진리를 담고 왔는데 못 알아먹었으니까. 그 예수는 실패해야 된다니까요. 실패한 예수를 추억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온 진리,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그분이 하신 일이나 그분이 표적으로 준 일이나 그게 다 뭐예요? 아,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건. 이렇게 하나님이 시작하여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거구나. 거기에서는 슬픔도 눈물도 질병도 그런 사망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곳이구나, 이걸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거니까. 그건 더 이상 우리에게 놀라운 게 아닌 거란 말이에요. 그거는. 그게 갖고 있는 내용이 너무 놀랍고 메가스! 너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더 이상 우리에게 신기하고 놀랍고 감동적인 게 되어선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게 되면요 그 예수 부인해. 안 그러면 네 아들 기름에 튀겨 죽여 버릴 거야, 당연히 부인해야죠 그러면요. 그래, 그래 나는 진리를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내 아들 살려서 어떻게 하던 그 진리를 들려줘야지 죽이던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나는 그 예수 믿는 믿음 굳게 지켜서 칭찬 받을 거야! 이걸 개죽음이라고 한다니까요. 성경에서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라는 게 고작 거기예요. 신사참배? 그거 안 한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모여 있는데 신사가 뭡니까? 거기에 진짜 신이 있어요? 개네 들은 죽어서 다 지옥 가 있어요. 무슨 신이 있어요? 거기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거요. 거기에 절 한 번 하는데 그게 뭔데요: 그게? 후미에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사진 쫙 깔아 놓고 일본 사람들이나 공산당들이 잘 써먹었던 거. 저거 밟고 지나가, 안 그러면 너희 교인들 다 죽일 거야. 그거 안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여럿 죽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게 예수입니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푸른 눈의 그 청년이 예수 맞아요? 진짜 예수의 사진이라고 쳐요. 그 예수는 밟히러 온 거라니까요. 찢기러 온 거라니까요. 침 뱉음 당하러 온 거예요. 왜? 육의 대표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밟아야지. 그리고 진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사람들 살려서 들려줘야지요. 그거 안 밟는 게 뭐 그렇게 대수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세요. 우리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을 높여준 건 전부 추앙하고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는 거라고 생각되는 건 전부 밟아 버린다니까요. 이거부터 깨셔야 돼요. 그러니까 순교라는 것도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돼요. 톡소포자충, 기생충도 그런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까요. 쥐새끼를 고양이한테 대들게 만드는 게 기생충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걸 요구하시겠어요? 그런 결단과 용기와 그런 이김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까? 성경이?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못 가도 한참 잘 못 가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 추억의 대상으로 갖고 계시면 안 돼요. 그래서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주는? 번역 해야죠? 번역 해줬잖아요 성경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한 군데도 없어요. 예수믿음 이라는 말이 로마서하고 요한계시록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피스티스 헤수스’예요. 피스티스가 뭐라 그랬어요? 진리의 체계, 진리의 체계가 뭐라 그랬어요? 율법이죠? 그걸 담고 온 예수. 그걸 진리로 믿으라는 얘기지, 그걸 진리로 가지라는 얘기지 예수를 믿어라가 아니에요. 그럼 ‘피스토스’가 돼야죠. 그런데 그걸 부인하지 않겠다고 부정하지 않겠다고 사자한테 먹히고 이런 게 무슨 유익이 되니? 그러는 거예요. 바울이.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 아니야. 오히려 극단적인 예지만 너무너무 무서워서 예수 부인하고 진리를 알아서도 아니고, 너무너무 무서워서, 기름에 튀겨 죽인다는데 그러면, 살짝 기름 한 방울만 튀어도 얼마나 쓰라리고 아픈데요? 그런데 풀무불 앞에 놓고 시커먼 사자 앞에 놓고 기름 가마,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 놓고 너 부인 안 하면 죽일 거야. 그래서 무서워서 부인했어요. 하나님, 이래서 나에게는 예수가 없으면 안 되는 거군요. 저는 이런 쓰레기입니다. 라고 하면 그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시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끌고 갈 수도 있어요. 어떤 목적이 있으셔서.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그걸 성숙한 신앙인의 목표지점으로 잡지 말라는 얘기에요. 아니라니까요. 자,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같이 그 날마다의 죽음을 죽어야 다시 사는 거야. 너희 그 죽음 죽고 있니? 이거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부활이야.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이에요. 그래서 거기서는 육을 부인을 안 해요. 그냥 입은 거라 그래요. 입었으니 너희들이 썩어지고 후패할 걸 그냥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악한 동무들의 말에 속지 마! 속지 마! 거기서 악한 동무라고 번역이 된 푸후데이로‘ ’에도스‘. ’에도스‘가 습관적인 예법, 습관적인 도덕. 이런 말이니까. ’에도스‘. 그리고 ’푸후데이로‘ 가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 예법. 이거예요. 악한 동무가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 예법은 ’크레스토스‘, 자비로워야 하는 교제를 ’호밀리아‘ 교제거든요? 교제가 뭐예요? 진리를 갖고 서로 흘려주는 게 교제란 말에요. ’호밀리아‘ 자비로워야 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호밀리아‘ 교제를 ’카코스‘ 악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거예요. 습관적인, 그걸 부패했다고 해요. 성경은. 습관적인 예법, 관습, 도덕은, 그걸 가지고 진리를 논한다고 하는 자들은 진짜 자비를 이야기하는 교제를 '카코스', 악하게 만들어. 그래요. 그걸 뭐 악한 동무가 어쩌고, 저쩌고 해놨는데. 그러니까 깨어서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라, 그래요. 그럼 여기서 죄가 뭐예요? 너희들이 죽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믿겠다고 맹수에게 먹히고 사자 굴에 들어가고 한 그거, 그런 거, 죄라는 거예요. 그건 죽음 아니야. 그건 죄야. 의를 행해! 그래요. 어떻게 행해요? 의가 뭐예요?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의'를 준비하셨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라 그러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하는 거. 그게 의를 행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네러티브 속에서. 그거 해. 그게 사는 거야. 그래요. 그리고 마가복음 8장으로 다시 가면 35절이 이렇게 이어지죠? 막 8 : 35- 누구든지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이게 푸시케라 그랬어요, 그 푸시케를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그러는데 완전히 멸망하다, 에요. 완전히 멸망하다, 그럼 완전히 멸망할 거야. 푸시케를 구하려고 하면. 그런데 우리는 전부 이 푸시케를 구원하려고 한다니까요. 이 푸시케의 위상을 높이려고 신앙생활 한다니까요. 그리고) 나와 복음 때문에 (‘헤네카’는 때문이에요. 나와 복음 때문에) 잃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래요. 이걸 오히려 부정당하고 부인당하고 심지어 개망신 당하는 그런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걸 잃는 게 구원이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푸시케는 프뉴마와 반대되는 개념이죠? 영이라고 번역해도 돼요. 사륵스도 영이에요. 원래가. 그러나 이제 진리와 상관이 없는 껍데기로서의 영이 사륵스에요. 육이라고 하는 거죠. 육, 영 이런 거는 우리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사실은요. 푸시케도 영이라고 해요. 육이라고 육신 이라고 하지만. 푸시케가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 이 육신은 들 숨, 날 숨으로 살죠? 호흡으로 살아요. 들숨이 뭐냐 하면, 밖에 있는 깨끗한 공기를 (깨끗하지도 않지만 하여간) 그걸 들이마셔야 내가 살고 날 숨으로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뿜어내는 거예요. 그럼 결국 나를 살리는 건 내 밖에 있네요? 이거 막아버리면 나 죽으니까. 나를 살리는 물, 나의 70%를 이루고 있는 물, 밖에 있죠? 내 안에서 생산 돼요? 아닙니다. 이거 없으면 죽어요. 음식, 마찬가지 이렇게 생명의 근원이 내 밖에 있고 그게 끊어지면 나는 죽은 자가 되는 걸 푸시케라 그래요. 프뉴마는? 너희 안에서 생수가 솟아나리라 그러죠? 안에서 물이 생산되다 네요? 그리고 그 프뉴마는 호흡이라고도 하네요? 그 안에 있다는 거예요. 호흡이. 진리가 너희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럼 뭐예요? 진리를 생명으로 내 안으로 마음으로 갖고 있는 걸 프뉴마라 그래요. 그걸 영생이라 그래요. 이건 누가 뺏어갈 수 없으니까. 그걸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프뉴마, 영이에요. 그와 반대되는 개념이 푸시케에요. 그러니까 진리가 되지 못하고 이 푸시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이 푸시케의 위상을 높이고 여기에서 뭔가 쇼부를 보려고 하는 그게 푸시케의 구원이에요. 그리고 이 푸시케가 갈 천국 거기를 열심히 소망하는 것. 이것도 푸시케의 구원이죠. 그 푸시케의 구원,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가 그런 말이에요. 푸시케를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와 내 말, 예수님의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푸시케가 죽으면, 목 베임을 당하면 그는 구원에 이른다. 그 말이에요. 35절이. 그러니까 죽음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절망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예수 믿으면 절망도 없고 외로움도 없고 고독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난도 없고 그렇게 가르치는 건 100% 사기에요. 되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리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소곳이 구하는 거.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를 보십시오. 전부 푸시케의 유익만 구하고 푸시케의 구원만 원해요. 그걸 무당 잡교라 그래요. 푸시케를 계발하고 푸시케를 성숙시키고 푸시케를 변화시키고 푸시케의 가치를 향상시켜 푸시케들이 공평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푸시케의 세상을 구현하는 게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버렸죠? 그것도 건강한 기독교의 목표.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 소위 진보개혁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그런 푸시케들을 위한 어떤 것.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도 칭찬해줘요. 참 좋은 교회, 올바른 교회가 나왔다. 세상이 알아보는 교회는 교회 아니에요. 세상이 칭찬해주는 교회는 뭔가 잘 못된 거예요. 그들은 그게 뭔지 몰라야 돼요. 성도가, 교회가 하는 일을 뭔지 몰라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은 감추어 놓았다는데 어떻게 세상이 박수 쳐주느냐고요? 모든 종교가 다그 푸시케를 위한 푸시케에 의한 푸시케의 행위를 목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거 원하는 거 내가 완전히 멸망시킬 거야.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아 생각해보세요. 그 푸시케, 그들에게 좀 좋은 옷 입혀주고 그들의 평균임금을 높여주고 열심히 데모해서 교회가 촛불 들고 나가서 그들에게 밥 조금 많이 먹게 해줬다고 해서 그 푸시케가 프뉴마 됩니까? 푸시케는 그렇게 해서 그냥 죽어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하세요. 이왕이면 재산 많이 남겨서 그냥 자식들 쌈질하게 만들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면서 사세요. 인지상정으로.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나 훌륭한 신앙인지요?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건. 진짜 중요한 건 그들에게 프뉴마, 진리의 말을 넘겨주어 그들을 프뉴마로 살려내는 거 이게 진짜 우리가 신경 써야 될 거 아닙니까? 거기에 먼저 매진해야지요.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전부 푸시케의 일에 여념이 없는 거예요. 혈안이 되어 있는 거죠. 그거 밖에 아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그건 세상도 칭찬해주니까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열심히 하게 해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누가복음에 가서 그 연결부분을 설명합니다. 9장 25절. 눅 9 : 25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가 호 코스모스라고 했습니다. 율법, 세상, 인간, 푸시케 다 그 안에 들어가죠?) 온 천하를 얻었어요. 그런데 그 얻는 게 뭐라 그래요?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 멸망 받는 거라 그러고 빼앗기는 거라 그래요 예수님은. 그게 뭐 유익이냐? 그렇게 호 코스모스를 얻는 게 잃는 거야. 완전히 멸망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유익이 있니? 그래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수치라는 말이죠)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호 코스모스, 푸시케 그 호 코스모스를 얻게 되면 멸망에 이르든지 해를 입게 된다,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유익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게 그들에게 유익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주님이 26절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예수와 예수의 말, 로고스죠? 그 말을 진리로 전해지지 않으니까 율법으로 받아들이겠죠? 나와 내 말을 수치, ‘에파이스키노마이’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를 수치로 놓아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하고, 가 무슨 말이에요? 수치로 가지면, 수치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완전한 거 있죠? 율법은 완전함. 사랑이라는 완전. 그 하나로 완성이 돼야 그게 완전이죠? 테텔레스타이가 완전이잖아요? 그게 히브리어로 ‘타밈’인데 그 ‘타밈’ 그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는 전부 수치라 그래요. 그러면 그걸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아가페로,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법으로 가지고 있으면 수치로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를 완전하지 못한 자, 수치로 놔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이 그걸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걸 수치로 놔둘 거야. 그러니까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그 아가페, 사랑, 진리로 하나로 완성하여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아, 그분의 사랑. 그게 다구나! 이렇게. 그 완전, 수치의 반대말. 완전이라는 단어가 신명기에 나와요. 18장 14절 신 18 :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 이게 완전, ‘타밈’이에요. 타밈이 히브리어는 모음이 아무 필요, 가치가 없다 그랬습니다. 자, ‘타밈’ 하면 ‘타우 멤’ 이거든요. 그걸 뒤로 바꾸면 어떻게 돼요? ‘멤타우‘ ’무트‘에요. 완전이라는 말과 죽음이라는 말이 같은 단어라니까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죽어서 완전하게 되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원전하라는 게 뭐예요? 죽어서 완전케 된다는 뜻이에요. 무트로 죽어 살아나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그렇게 죽어서 살아나는 자가 아닌, 수치들은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 14.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길흉을 말하고 복술을 말하는 게 뭐죠? 오늘날 기독교가 그거잖아요. 인간들의 길흉, 무슨 적용, 어플리케이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복 받을 수 있는가? 이게 길흉과 복술이지 뭡니까? 그들은 그걸 듣는대요. 무당의 말 이런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푸시케의 유익을 위한 말을 너희들에게 절대 용납하지 않아, 그래요. 절대 용납하지 않아. 인간의 존재가치 확립과 향상에 관한 그런 길흉의 말, 복술의 말 그건 너희들에게 용납하지 않아. 너희들은 진리를 듣게 될 거야. 그건 너희들의 푸시케와 아무 상관없어. 그들이 완전한 자야. 죽어서 사는 자야. 누가복음 9장 27절 보세요.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게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도 있다니까 그냥 막연히 추측해서 야, 그 때, 숨이 끊어지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본 제자들도 있구나, 이렇게 상상해서 생각하는데 그 말이 아니라, 직역을 하면, “내가 진리로 말한다.” 그래놓고 “여기 사람들이 서 있다. 죽음, 다나토스,를 ‘디오마이’, 맛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그 통치라는 게 무엇인지를 ‘호라오’. 깨달아 알 수 없는 자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런 말이에요. 다른 말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구나! 우리가 하나님 아니구나! 그거를 ‘호라오’ 할 수 있는 이들은 반드시 다나투스의 죽음을 맛보더라. 그렇게 된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게 진리야.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호라오’ 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맛 봐야 돼요. 이 땅에서 여러분이 그 죽음을 맛 봐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며요? 지금. 그럼 죽음도 좋은 건데 그 죽음의 증상인 다른 것들, 뭐 그거 갖고 너무 파르르 떨 필요 없잖아요? 너무 통곡하고 정말 할 필요도 없잖아요? 다 그거 경험하게 해주려고 하시는 건데. 그러니까 잘 견디시라는 말입니다. 그건 성도에게 날마다 반드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다나토스예요. 무트.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죽음을 스스로 죽는 죽음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성도들이 죽는 죽음 그거 스스로의 죽음이래요. 남들이 죽이는 죽음 아니야. 그래요. 그거는 얼마든지 너희들의 가치를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죽음이잖아. 그런데 그것조차도 허락이 안 된대요. 스스로 죽는 죽음이 뭘까요?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면, 아, 아니구나. 이 육은 이렇게 지맘 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거로구나, 지가 살아서 하나님, 머리가 돼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그런데 얘가 왜 이렇게 안 죽지? 너무 절망적일 때가 많죠? 그 때, 어떻게 우리가 남들은 전부 이 푸시케를 살리고 이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앙생활까지도 동원하는데 우린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거야? 도대체. 아니, 어떻게 내가 죽어야 된다는, 이게 죽는 게 옳다고 어떻게 인정을 하게 되죠? 성경은 그걸 ‘엑수시아’, 능력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걸 하나님이 주신다고 한다니까요. 요한복음 10장 17절 보세요.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여기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라고 하는데 이 ‘팔님’이라는 단어는. 목숨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고 새로운 것. 이에요. 내가 새로운 것으로 얻기 위하여 푸시케를 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말이에요. 여러분이 야, 어떻게 이 육이 이렇게 안 죽느냐? 어떻게 여전히 지만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 여전히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또 법으로 삼아 이렇게 지를 위해 살아?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 하나님 제발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무엇이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진리 밖에는 없을 거야. 하나님 내가 이 진리를 이렇게 듣고 있는데 하루속히 이것 좀 죽게 해주세요. 라는 그 고백! 이게 푸시케를 버리는 거잖아요? 남들은 다 이걸 위해 사는데 하나님이 사랑을 나에게 부으시면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새로운 다른 차원의 생명을 얻기 위해 ‘팔님’, 내가 푸시케를 버린다. 이런 말이에요. 그건. 18절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게 아니라, 누가 나를 너, 예수 믿으면 죽여 버릴 거야, 하고 이렇게 죽이는 그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거래요. 왜? 어떻게? 나는 버릴 권세, 다시 얻을 권세. 엑수시아를 얻었대요. 엑수시아가 뭐라 그랬어요? 말씀을 담게 되면 내가 권세, 권능, 능력이 생기는 거라 그랬죠? 이걸 전해주는 걸 ‘두나미스’의 능력이라 그래요. 그 엑수시아가 나에게 주어지니까, 하나님이 주시니까 내가 그걸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생기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게 나에게 그런 은혜가 허락이 되었다고요?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셨대요. 엑수시아, 진리를 주셨대요. 그랬더니 내가 버릴 권세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이것 좀 어떻게 죽여주세요. 이렇게. 그게 다시 얻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게 다시 얻을 권세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진리이신 그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죽었다는 거예요. 그 죽음이 바로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다는 거예요. 로마가, 너희들을 잡아 죽인 게 아니라 그거, 단순히 그것만을 그린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죽는 그 죽음. 스타우로스. 언약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이 바로 다나투스의 죽음을 같이 함께 묘사했던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누가 줬다 그래요? 이 계명은 내 아버지께서 받은 거야. 그래요.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성전. 그걸 아버지라고 읽는다. 그랬죠? 내 안에 들어온 진리, 그것이 나에게 그 능력을 주더라. 그래서 여러분이 아침마다 일어나면 또 나는 왜 여전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지? 이렇게 통회자복이 나오는 거예요. 일찍 빨리 죽었으면...이렇게.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또 무슨 사자 굴에 들어가 죽고 그런 거 너무 사모하지 마세요. 그거 너무 추앙하지 마세요. 진짜 죽는 죽음은 그거 보다 몇 천배 어려워요. 선악과 먹은 아담이 그걸 목구멍에서 토해내는 건 그거 보다 몇 천배 어려워요. 맹수 그거는 한 순간 물어뜯기면 되는 거지만 이건 평생 가는 거기 때문에 힘들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차라리 날 좀 죽여주세요. 난 힘들어서 못 살겠네요 라는 탄식이 나온다니까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걸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겁니까? 이 고백이 나온단 말입니다. 무슨 예수 믿는다고 늘 시시덕거리고 기쁘고, 기쁨 충만, 성령 충만? 그렇지 않아요. 그건 미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으로 깨달아지면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이지만 거기에서 해방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2절이에요. 해방. 그래서 이 이야기 밑에 어떤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엑소더스의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성경에 변화산 이야기. 모세, 엘리야, 예수가 별세, 엑소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죠? 이 이야기 바로 밑에서. 다른 옷을 입고. 희게 변한 다른 옷을 입고. 산상수훈에서 배웠으니까 대충 눈치가 채실텐데. 다른 옷을 입고 별세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건 제가 다음 주에 한번 설명해드릴게요. 자세히, 구체적으로. 푸시케는 밖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숨을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하면 죽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이 코 끝 잠깐만 잡고 있어도 다 고기 덩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와 상관없이 그 호흡을 내 안에 진리로 갖고 있으면 그게 영생이란 말입니다. 그걸 갖고 계시냐고요, 여러분? 그 육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는 건데 우리는 푸시케를 위해, 푸시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푸시케의 만족을 위해 예배하고. 푸시케에 진짜 만족 기쁨을 위해서 구제도 하고 푸시케들의 세상. 푸시케들의 천국 이걸 위해서 별짓들을 다 하는 거예요. 아니, 우리도 그런 것 좀 하자고요. 하는데 교회의 목적으로 삼지는 말자고요. 무슨 사회운동이다, 구제다 헌신이다 이런 거는 그냥 사람이 사람의 세상에서 살 때 필요한 거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하는 일로 여기시면 돼요. 성경에는 그런 종류의 구제나 그런 종류의 헌신, 그런 종류의 사회운동 이런 거 얘기 안 해요. 그걸 다 헛일이다, 그래요. 아래에서 난 자들은 반드시 위로 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다 멸망의 고기 덩어리에요. 거기에는 관심도 없고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그 푸시케들이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게 그게 도대체 뭡니까? 그래서 성경이 아래에서 난 것은 반드시 위로 나게 하라. 그러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건, 위로 난다는 게 뭐예요? 입 위로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에게서 아기가 아래에서 나잖아요? 그러면 위의 입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 아빠 해봐. 아빠 해봐, 라고 해서 애기가 아빠라고 엄마가 가르쳐 준거나 아빠가 가르쳐 준 그 말을 똑같이 하면 아, 내 아기가 아빠 했네? 우리 하나님이 그거 듣고 싶어 하는 거라니까요. 진리를 계속 말씀해주는데 못 알아들어.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아, 그거요? 하고 "아버지!" 라고 하면 그게 진리니까. 그래 그거!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를 이 땅에 보낸 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는 거예요. 아버지. 진리를 아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 그래 교육이라고 그러잖아요. 아기 낳아가지고 가르치지 않고 저 산에다가 이리나 곰에게 맡겨 놓으면 걘 이리예요 그건요. 사람이에요 그게? 그렇게 산다니까요. 뭐 늑대소년 그런 거 나오잖아요. 걘 늑대에요. 그건요. 그래서 위로 낳아야 된다 그건 ‘아노뗀’, 거듭남이라고도 번역을 하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다 예요. 왜 인간의 기관 중에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에 쓰이는 기관에서 배설물이 함께 나오는지 아세요? 인간들이 생명이라고 내어 놓는 모든 건 바로 그 더러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걸 암시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뭔가 좀 잘 못 만든 것 같지 않으세요?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생명의 탄생의 기관에서 왜 배설물이 나오게 만드느냐고요? 그리고 사람들은 왜 거기에만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들만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요? 그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더러운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서 그렇게 있으면 그 더러움으로 넌 배설물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넌 위로 낳아야 된다는 거예요. 진리로 나야 된다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그 육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 난 그 진리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성전, 둘, 인간의 수라 그랬죠?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2가. 두 마음이니까 선, 악. 인간의 수에요. 둘로 와서 셋으로 사는 거예요. 둘로 와서 죽고. 인간으로 죽고 셋,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화 되는 거예요. 영, 진리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보세요. 요 8 : 2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어떻게 위에서 났어요? 우리는 부정모혈로 아래에서 났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났단 말에요. 그 얘기 하는 거예요. 성령이 뭐예요? 말, 진리, 생명. 나는 위에서 났어. 그렇게 낳아야 돼 너희도. 뭐로? 진리로! 진리의 성령으로.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해준다?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걸로 여겨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호 코스모스가 내 육체도 포함하는 거니까. 너희들에게는 그게 삭제된다는 거예요.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에다가 정죄하니? 어디에다가 유죄를 선고해? 이런 말이에요.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여러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그냥 꾹 참는 거, 그게 성숙한 신앙생활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고 싶은 거 맘대로 막 하고 살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렇게 살게 되지도 않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요즘 저에게 아, 목사님 말씀을 듣더니 그 시로도(초보)가, 목사님이 그러는데 이제 막 살아도 된다 그랬어. 그러면서 막 대한대요. 가족들에게도 그러고 자기에게도 그러고, 그 사람은 아직 초짜예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 메가스, 진리의 성령을 안 사람이 야, 인제 개차반으로 막 살아도 되겠네? 어떻게 이게 됩니까? 그리고 꼭 핑계를 나를 핑계를 대갖고.. 꼭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그런 걸 먼저 법으로 주셨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하고 안 하고의 '행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콘서트하면서 느낀 게 바로 그런 거였어요. 아, 이 분들이 진짜 원하는 게 따로 있었구나! 한 번 탁 터트려주니까 그냥 그래, 그거! 하고 나오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 그거 안하느라고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며 칭찬을 했을까요? 자기를. 야, 너 아직도 그거 해? 나는 벌써 옛날에 끊었는데,, 웃기고들 있는 거죠. 사실은 그거 좋아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겠어요? 내가 하나님 나라 가면 보자, 내가! 그건 벼르는 거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진리가 된 사람은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그냥 그 속에서 진리를 오히려 찾아내요. 그리고 결국은 내가 즐기던 이런 것도 진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지. 그걸 안하고 꾹 참으면서 넌, 왜 아직도 그 수준이야? 이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그건 죽은 거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수준을 따집니까? 아니 누구를 정죄해요? 진리는요 자기를 보게 되어있다니까요. 요거 보기에도 바빠요.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지. 얘(자기) 보고 얘 걱정하기에 더 바쁘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남 참견들을 다 하고 다니는지 말이죠. 누가 교회를 새로 개척한다는데 뭐 벌써 개척하면 되느냐? 왜 안 돼요? 아니 아직 회개도 안 하고, 회개가 뭐예요? 사실 그거 질투하는 거죠? 아, 나는 옛날에 어마어마하게 잘 나가서 굉장히 부러웠는데 그런데 쫄딱 망해서 얼마나 내가 고소했는지. 그런데 다시 재기를 한단 말이야? 절대 안 돼! 이거지 뭡니까? 진짜 무슨 교계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함이에요? 교계의 정의가 뭔데요? 완벽한 성자들이 목회하는 게 교계정의입니까? 어차피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거긴 그냥 친목계에요. 그럼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회를 한다는데 왜 그렇게 난리냐고요? 그리고 혹시 거기서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면 야,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들어서도 진리를 전하시는구나. 역시 호 코스모스 인간, 육, 푸시케는 낫띵, 하나님이 전부! 깨달으면 되지. 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책을 반납하네 뭐네. 시간들도 많아요. 도대체 보면 전부 삐리삐리 한 애들이 모여 갖고 그거 하고 앉았더라고요. 괜히 질투 나가지고 말에요.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날 보라고요. 자기 자신을 보라고요. 그리고 이 교회를 신경 쓰라니까요. '여기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이 푸시케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저 말씀으로!' 그런데 남의 교회 신경 쓰고 난리에요. 왜? 그거예요. 그게 그렇게 죽고 다시 사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진리만 남고, 나와 내가 관심 두고 살았던 이 호 코스모스적 세상이 조금씩 죽어서 말씀이 완성되는 그런 삶을 사는 자.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죽음, 그 다나투스, 그걸 ‘디오마이’ 맛 봐야 하나님 나라, 그 바실레이아, 하나님의 통치를 ‘호라오’, 비로소 볼 수 있는 거예요.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좋은 죽음' '잘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죽어야 산다는 이 역설이 이해되어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어떻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고통이라고, 고난이라고 그렇게 손가락질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 우린 그게 복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견디게 하옵소서.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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