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 : 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를 해줘도 잘 안 믿기죠? 진짜 정죄함이 없다는 건가? 진짠가? 이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 굉장히 많이 흔들리시고 헷갈리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서 예를 들어서 여러 차례 설명을 해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내었는지에 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른 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율법이 우리에게 법으로 오게 되면 그건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그냥 그걸로 그대로 가버리면 안 돼요. 그 죄와 사망의 법으로 죄가 무엇인지 사망이 무엇인지를 알아 올바로 잘 죽게 되면 그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는 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법으로 인지가 되면 그 법은 곧 죄를 낳게 되고, 모든 인간이 다 공히 그 과정을 겪게 돼요. 반드시 죄를 낳게 되고 죄가 뭔지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받으면 반드시 죄를 낳게 됩니다. 그것으로. 열심히 지켜보려고 하죠? 그 죄는 결국 사망으로 다나투스, 무트의 사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배웠죠? 그러나 그 사망은 은혜의 장중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진리로의 완성, 그러니까 종의 죽음이 되지만 은혜 밖의 사람들에게는 비진리로의 완성이 돼요. 그래? 이렇게 지키는 거지? 하고 열심히 지켜서 비진리로 완성이 됩니다. 그걸 멸망이라 그래요. 성경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게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후자로 간다는 게 안타까운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신 건 엄밀히 말해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비 진리를 비 진리로 완전하게 폭로해 내신 것임과 동시에 비 진리를 완성시켜 버린 거예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 점잖은 양반들 그분들은 다 비 진리, 하나님 살해범으로 그냥 폭로되어 버린 거죠? 그리고 정말 개망나니 같은 예수라는 청년이 진리로 완성되는 거예요. 무트,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그래서 진리의 완성과 비 진리의 완성이 동시에 이루어진 거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뭐 죄인, 죄인 그러니까 굉장히 무슨 표독스럽고 그런 삶을 살았을 거 같죠? 천만의 말씀. 지금 이 시대를 따지면 정말 점잖고 많이 배우고, 그분들은 다 예루살렘에 두 개밖에 없었던 정규 대학교, 무슨 대학교겠어요? 이스라엘이 신성국가니까 신학교였어요. 정규대학교가 4년제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다 거기 출신이에요. 그분들은. 예수님은? 늘 물어보잖아요. 너 몇 학번이야? 예수님이 다닌 적이 없네?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아 저놈들이 도대체 어디서 무얼 배우고 와갖고 저렇게 가르치는 거야? 너 몇 학번이야? 난 너 학교에서 본 적 없는데? 다닌 적이 없어 이 사람들은. 고기 잡고 세리로 일하고 이러는 바람에. 그런데 거기에다가 안식일, 그들이 그 점잖은 양반들이 그렇게 열심히 지키던 안식일도 어겨, 율법 안 지켜, 쌍욕 해, 뱀 새끼라고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지성인들에게는. 그러니까 어떻겠어요? 저 놈이 우리의 이 점잖은 사회를 악영향을 미치는 좀 같은 인간이라고 죽이자, 그런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그들이 점잖은 양반들이었고 예수님은 개망나니였다니까요. 죽여야 할 만큼. 점잖은 양반들이 봤을 때 저건 죽여야 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할 만큼. 그러나 그 예수가 진리로 완성이 된 거였고, 행위를, 율법을 완전히 부서 버리고, 점잖은 양반들이 비 진리로 완성이 된 거라니까요.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이 진리든 비 진리든 모든 것이 반드시 완성의 자리로 가요. 그렇게 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왜 살아야 돼요? 이런 질문들 하시던데 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품으로 사는 거예요. 비 진리는 비 진리의 자리에서 인간과 호 코스모스의 세상의 그 한계와 실체, 그리고 종국을 드러내는 역할로 소품으로 사는 거고 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 부어졌을 때 이들이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과, 독사를 나타내는 거예요. 여러분이 무슨 뭐 대단하게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 살려두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무슨 뭐 의지로 살아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거 자체가 나는 가치 있는 존재야.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그런 전제를 갖고 질문하는 거 아닙니까? 왜 살긴 뭐 왜 살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산다니까요. 이사야서에서도 나오잖아요?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하라. 그런다니까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 말씀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내 영광을 나타내려고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해! 그랬다니까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은. 진리의 완성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비 진리의 완성은 땅에서 완료가 돼요. 진리의 완성은 육의 죽음으로 끝나는 반면, 비 진리의 완성은 살고자하는 아담들의 환성과 몸짓으로 완성 돼요. 그래서 이 역사 속에서의 진리의 완성은 마지막 그 진리가 된 자의 승천, 하늘이 됨이에요. 승천은. 그가 하늘이 돼요. 호 코스모스. 옛 성전으로 아, 그게 진리에요? 하고 알면 성경이 그걸 ‘호 우라노스‘ 하늘이라 그래요. 옛 성전과 하늘이 같은 말이라니까요. 그런데 하나는 표피로 보고 하나는 내용으로 보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하늘이 되면 그가 승천, 하늘이 되었다 그러는 거란 말에요.
자, 그렇게 마지막 진리가 된 자가 승천 하면 이제 끝나는 거예요.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땅은 진리를 이제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죠? 그마저도 올라가 버리면. 그럼 이 땅은 어떻게 되겠어요? 비진리로 완성이 된다니까요. 진리를 외치는, 그거 아니잖아! 라고 진리를 외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땅은 존재할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그마저, 마지막 그가 외치고, 외치고 외치다가, 얼마나 외롭겠어요? 그 사람 참.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외치고, 외치고 외치다가 올라갔어, 하나님이 올라와라 이제. 그럼 이 땅은 비진리로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비진리, 모든 인간들이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비진리를 그거 아니라니까, 라고 이야기 할 그 존재가 없어지면 거기는 이제 태클을 걸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그럼 완전히 아담들을 위한 아담들의 세상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거기가 무슨 뭐 좀비들이 살아가는 서로 물어뜯고 피 빨아 먹고 이런 게 아니라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평화로운 곳이 될 겁니다. 비 진리의 세상은요. 그게 인간들이 원하는 세상이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공평하고 가장 평화로운 곳이 될 거라니 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원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자, 그렇게 진리를 완전히 잃은 거기, 거기가 소돔과 고모라에요. 의인이 하나라도 있니? 없지? 그런데 모든 인간이 만족하며 살았다니까요. 쾌락을 누리며 지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내가 저기 불태우러 간다. 그랬단 말에요. 하나님이. 의인이 하나도 없는 악의 땅. 성경은 그 때를 가리켜 천년이 차고 사단이 옥에서 풀려나는 때라고 그러는 거예요. 사단이 뭐 묶여있고, 어딘가에 그 용이 쇠사슬에 묶여있고, 이건 영화에서 나오는 거죠? 그게 아니라 비 진리가, 이건 분명히 비 진리로 이 땅은 완성이 돼야 돼요. 될 거라니까요. 그런데 진리를 외치는 이가 그 비 진리, 그건 아니야 라고 외치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비 진리는 완성이 될 수가 없어요. 그죠? 그걸 사단이, 사단이라는 단어는 대적자라는 뜻이에요. 그걸 히브리어를 그냥 음역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적 자, 진리의 대적 자 이걸 사단이라고 그래요. 비 진리로 완성을 하지 못하니까. 왜? 진리를 미미하지만 외치는 어떤 이가 있기 때문에 완성을 못하는 거예요. 그걸 사단이 묶여 있다 그러는 거라니까요. 그러나 어느 날 이가 확 떠나버리면 이제 태클 걸이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사단이 풀려났다고 하는 거예요. 완성시키려고. 멸망으로 완성하려고요. 자, 그렇게 되면 땅의 주인은 인간이 될 것이고 그 인간의 복지와 가치 향상과 체면과 자존심 지킴만이 목적이 되고 가치가 되는 그런 세상이 될 거란 말에요. 그게 비 진리의 완성이에요.
그렇게 비 진리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인간들이 추구하는 세상과 가치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이렇게 드러나게 되면 그럼 이제 더 이상 소품은 필요 없어지게 될 거 아니에요? 그 때 심판이 오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만들어서 영원히 후 천년설 주장하는 그 사람들처럼 그렇게 해서 이제 영원히 사는 거야, 가 아니라 그건 진짜 천국 아냐,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싹 태워버릴 거라니까요. 그렇게 사단이 천 년간 무저갱에 결박당해있는 그 때가 바로 우리 같은 이들이 이렇게 미미하게 살아서 그거 아니잖아요? 하고 외치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요. 우리는 그 악한 자가 어떤 거짓말로 뭐라 그래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악한 자가 건드리지도 못하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여러분을 해코지 못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아니, 여러분 삶을 한번 돌아보세요. 악한 자가 아주 붙어 있는 거 같잖아요? 뭘 건드리지도 못해요? 힘들어 죽겠잖아요? 아주. 그런 말이 아니란 말에요. 비 진리는 그 진리를 건들지도 못해요. 손도 못 댄다니까요. 그 얘기 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건 그렇게 사단이 결박 되어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두 증인이 계속 이겨야 되는데 어떤 데선 이긴다고 그러고 어떤 데선 계속 맞아 죽어요, 또. 그죠? 그게 영적 현실이라고요. 그게. 두 증인은 바벨론 성 큰 성 길가에서 맞아 죽어요. 그 말은 다른 말로 사단이 결박당해서 진리가 일을 하게 되면 성도는 반드시 다나투스로 죽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두 증인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바벨론, 그 섞임과 혼합이란 뜻이잖아요? 바벨이라는 게. 그 바벨론 적 세상과 그 세상의 육을 몰수하고 차압해버려요. 진리가. 그러니까 그 증인이 죽는다니까. 그러나 그게 사는 거예요. 그 죽음이 사는 거라고. 오늘 본문 로마서가 그 얘기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사망을 죽어. 그러면 사는 거야. 이거. 그렇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우리에게 온 그 말씀 안에서 진리를 깨달아 생명의 성령의 법, 즉 그 율법의 진의에 당도하여 장렬하게 육을 죽이고 자유와 해방, ‘엘류데르오’ 라 그러죠? 이제 도덕적 책무와 책임에서 자유하게 된 상태를 ‘엘류데르오‘ 라 그랬어요. 그 자유과 해방에 이르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율법이 죄로 나를 사망으로 죽여내면 내가 그 죽음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되는 이 구원의 역설을 몸으로 살게 되는 게 성도란 말에요. 그래서 더 이상 정죄 받을 육의 몸이 나에게 없음을 올바로 깨닫고 육의 모든 행사와 추구와 시도를 멈추는 거 그게 성도의 완성지점이라니까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한다. 그러죠? 바실레이야. 바실리오라는 단어는 섬기다, 라는 단어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거기에서의 통치자는 섬기는 자다라고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섬기는 나라라니까요. 우리를. 진리로 사랑으로 섬기는 나라지. 우리가 그분에게 뭘 해드리는 나라가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진리로 완성이 되면 육의 시도를 멈추는 거예요. 선악과적 모든 행사를 멈추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에 일 하지 마. 라는 게 그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애급에서의 그 일. 육체적 성, 세상의 성, 세상의 성전 그거 쌓던 그일 하지 마. 너희들 애급에서 나왔잖아? 그리고 내가 너희를 창조했잖아. 너희들이 내가 창조하는 데 뭘 도와줬니? 여섯 째날 나와 보니까 안식일이었잖아. 그래서 안식일을 얘기하면서 그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일 멈추라고. 그걸 로마서 6장이 이렇게 설명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두 장만 앞으로 가 보세요. 6장 4절.
롬 6 : 4-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장사되었다는 건 무덤에 묻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무덤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이 어디에 묻혔는지 여러분이 알고 계셔야 돼요. 어디에요? 어디에 묻혔어요? 죽었다며? 장사지냈다며요? 함께, 그와 함께. ‘메타’. 무조건 예수라고 하면 정답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행하다, 여기 ‘페리파테오’ 는 새 생명 안에서 걸어가게 하다, 이런 말이에요. 뭐 열심히 이것저것 그냥 행위로 행하다 이런 말이 아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같이 죽어 장사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부활을 했으면 여러분이 묻혔던 그곳에 여러분의 시체가 없어야 되겠네요? 거기는 어디에요. 또? 어디서 살아났어요? 어떤 무덤을 비워 버린 거예요? 여러분이?)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완전히 소멸되어 에요. 십자가에서 이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않는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섬기는, 죄예요)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대요. 그 이유는 헌 생명 가운데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 대면서 사는 자들에게 새 생명 안에서 걸어가게 하게 (헤리파테오? 함이요. 그렇게 7, 예수님이 안식일에 죽으셨어요. 일부러. 7이에요. 7이 완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거니까. 그게 안식이란 말에요. 7이란 말에요. 7로 죽고 안식 후 첫 날, 8로 사는 거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숫자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드렸는데 요런 숫자들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셔야 돼요. 그래서 성경에 이런 숫자들이 자주 등장하는 거란 말에요. 7로 죽으면 8로 사는 게 부활이에요. 십자가와 부활이란 말에요. 그게. 십자가가 7로 완성하면 그게 곧 삶이에요. 그게 곧 부활이라고요. 그래서 7과 8은 같은 거예요. 그리고 8은 반드시 7을 전제해야 되는 거란 말에요. 옛 사람, 그 옛 하늘과 옛 땅이, 옛 하늘과 옛 땅이 어디서 나왔어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뭐로? 엘로힘으로. 그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 것으로 넘겨주기 위해 너희들에게 성전으로 내가 시작한다, 가 ‘베레시트 바라 엘로힘’, 하늘의 그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래서 거기 보면 주어도 없어요. 그 하나님은 문자에 갇힐 수가 없거든요. 그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했어요. 그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을 창조했단 말에요. 이거를. 그런데 이거를 옛 몸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이게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란 말에요. 이게. 그런데 이게, 이 육이 그 육의 예수와 함께 언약의 기둥에 못 박힌 거. ‘쉬스타오’라는 말인데 함께 육이 소멸되다, 예요. 이게. ‘힌’이라는 접두어가 붙어갖고. 함께 육이 소멸됐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그건 우리의 육, 이 몸을 멸해서 섬김의 그 죄를 못하게 하려고 예요. 직역을 하면. 그렇게 죽는 자는 죄로부터 의를 깨달아 그의 신분이 죄에서 의로 바뀌게 된다, 이런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질문하나 드릴게요. 우리가 어디서 죽어야 돼요? 지금 옛 하늘과 옛 땅, 옛 사람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옛 하늘과 옛 땅은 뭐라 그랬어요? ‘베레시트’의 맨 앞자, ‘벧’이 성전이란 단어에요. 그거요. 문자가. 옛 성전으로 하늘을 설명하기 시작해서 못 알아들으니까 말하는 성전인 예수님이 와갖고 말을 했는데 못 알아들었죠? 그래서 세 번째 성전이 오기 위해서는, 되기 위해서는, 세워지기 위해선 진리의 성령이 와야 되잖아요. 깨닫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죠? 성전으로 시작했단 말에요. 여러분은 그 성전에서 죽어야 돼요. 옛 성전에서. 그게 여러분의 무덤이어야 된다니까요.
자, 믿음의 조상들이 다 어디에 묻혔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무덤이 어디에요? 막벨라 밭 굴이죠? 거기에 누가 제일 먼저 묻혔습니까? 사라, 누구죠? 우리의 어머니라. 그래요. 사라를. 그게 뭐냐 하면 교회의 대표에요. 사라. 어떤 의미의 대표냐 하면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그 교회의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이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또 우리의 대표잖아요. 다 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무덤에 묻히는 거예요. 그들이. 그 막벨라 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부들의 무덤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사 사라가 맨 먼저 묻히고 그 다음에 진짜 하나님의 신부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줄줄이 그리로 다 들어가는 거예요. 창세기 23장 19절 보세요.
19.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사라는 은혜의 자손들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라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죠? 하늘의 예루살렘, 자유자라고 이렇게 부른단 말에요. 그 땅의 예루살렘, 율법은 뭐를 낳아요? 육을 낳죠? 율법은. ‘예루살렘’은 뭐냐 하면 ‘얄라, 살롬’이니까 살롬을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평강을 가리키는 게 예루살렘인데 그 진의를 못 알아먹으면 그 예루살렘은 껍데기 율법만을 가르치게 된단 말에요. 그래서 예루살렘은 율법이에요. 땅이에요. 예루살렘은. 그걸 하갈이라 그래요. 사도 바울이. 율법이다! 그런다니까요. 시내 산이다! 그래요. 그게. 율법은 육체로 아들을 낳아요. 이스마엘은 두 비유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스마엘은 율법의 열매야. 그러잖아요. 율법의 열매, 인간들의 육의 열매. 너희들의 지혜와 힘으로 낳은 그 아들, 그 열매. 이스마엘 이라고 하고 그 아들은 종이라고 해요. 그런데 하늘의 예루살렘, 그 하늘의 예루살렘은 약속으로 아들을 낳는다고 그럽니다. 약속으로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은 자유자래요. 자유자! ‘엘루데로’ 해방된 자. 약속으로 낳은 자들은. 그러니까 사라는 모든 성도의 대표자, 즉 어머니인 거예요. 왜? 거기서 줄줄이 나오는 거니까. 뭐 그게 낳았다 그러는 거니까요. 그죠? 그게 대표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사라의 무덤이 막벨라 굴이라는 건 굉장한 큰 의미가 있는 거란 말에요. 막벨라라는 말이 양 우리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뭐라 그래요? 당신의 백성을 양 우리에서 빼내러 오셨다 그래요. 그리고 밖에서 이름을 불러서 줄줄이 빼낸단 말에요. 그 단어가 양 우리에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도 양 우리는 항상 옛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에요. 양 우리라는 단어가. 그러니까 막벨라, 성전이에요. 옛 성전. 그리고 거기를 밭이라고 그러죠? 밭 ‘싸대’는 광야라는 뜻이에요. 채소 심는 밭이 아니라. 그러니까 막벨라 광야, 광야는 뭐예요? 물이 없는 곳이에요. 상징적으로. 그걸 스테반은 교회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굴 ‘ 메아라’인데, 굴은 말씀이 없는 옛 성전. 거기를 도적의 굴혈, 시랑의 굴, 이렇게 굴이라는. ‘메아’라는 단어로 쓰거든요. 그러니까 말씀이 없는 곳. 거기에요. 그걸 굴이라고 해요. 한 군데를 찾아 드릴게요. 예레미야 7장 8절. 8.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들은 진리를 도저히 못 듣는 족속들이구나?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이게 산상수훈이에요. 이거 하지 말라, 그랬어요) -바알에게 분향하며 (그게 바알에게 분향하며, 바알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게 풍요의 신이 되어버리면. 나를 도와주는 신이 되어버리면 우상 바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알에게 분향하는 거예요.)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너희는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쫓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를) 10.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성전이에요.)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참 착각도 자유다, 하는 거예요.) -11.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 이 굴이 ‘메아라’예요. 막벨라 밭 굴의 그 ‘메아라’)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게 진리야! 라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그 성전을 도적의 굴혈이라고 해요. 살인 간음 거짓증거 하면서, 다른 신을 쫓으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쫓으면서 나는 구원받았어요, 하는 게 내 말을 도둑질 한 거지 뭐니? 도둑질 한 거지 뭐냐? 그래서 도적의 굴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랑의 굴, 시랑은 옛 뱀이에요. 들개라는 말로도 쓰지만 그게 옛 뱀이에요. 바다 뱀. 바다, 그 저주의 바다의 뱀. 시랑의 굴. 성전이 어떻게 시랑의 굴이냐? 진리가 전해지지 않고 껍질만 전해지면 그게 뱀의 말이란 말에요. 그것이. 자, 그러면 막벨라, ‘마크페라 바싸대’, 굴 ‘메아라’. ‘마크 페라싸데 메아라’ 가 뭐겠어요? 옛 성전이에요. 말씀이 율법으로 떨어지는 옛 성전. 거기가 바벨론이고 거기가 성도의 무덤인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 큰 성 길가에서 사단이 묶여 있는데 두 증인이 거기서 죽는 거예요. 거기서 죽어야 돼요. 거기서 살아있으면 안된다니까요. 로마서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죽음을 죽어라. 그 죽음에 죄와 율법이 사용됐는데 그게 뭐 그렇게 나쁘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라 그랬어요? ‘스타우로스’. ‘이스테미’, 똑바로 세운 언약. 이게 ‘스타우로스’에요. 기둥이에요, 그래서. Cross 아니라니까요. 원래가. 십자가만 자랑한다, 뭐 이런 사람들 있는데 무슨 십자가를 자랑해요. 그 내용을 알아야지. 그 십자가를 왜 자랑하느냐고? ‘이스테미’가 뭐냐 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되면 선과 악으로 치우치게 되면 이 둘이 죄에요. 기존의 교회에서 야, 선한 사람이 되자. 선을 추구하자. 라고 할 때 그 선이 뭐예요? 선과 악의 선이라니까. 그게 죄라니까요.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하나로 서면 이게 언약 안에서 ‘스타우로스’ 완성되는 거예요. 이것이. 자, 거기에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죽어야 그렇게 언약 안에서 서는 거란 말에요. 하나로 서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에브론이 그거 그냥 가지라고 그러는데 굳이 돈을 주고 사죠? 그 무덤은 성도가 반드시 값을 지불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값이겠어요? 예수님이 어떤 값을 지불하고 그 굴로 들어갔나요? 예수님 무덤이 굴이었습니다. 목숨, ‘다나투스’의 죽음을 지불하고 갔다니까요. 속전으로. 여러분이 그 죽음을 죽고 그 성전에 들어가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팔로우?) 사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거기가 비워지는 거예요. 이제 나랑 상관없는 무덤이 되는 거예요. 거기는. 무덤이에요. 거기는. 모든 이가 멸망당할 무덤인데 ‘나’와 상관없는 빈 무덤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는. 그러니까 내가 장사지낸 곳이 어디에요? 옛 성전. 어디서 나왔어요? 옛 성전. 율법에서요. 그런데 우리는 무덤을 써놓고 구정 때 가고 추석 때 가고 제사 때 가고 자주 가죠? 히브리 사람들은 무덤을 한번 쓰면 다시는 그리로 안 가요. 쳐다보지도 않아요. 율법에 죽음과 시체, 무덤을 부정한 것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절대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덤에서 나왔으면? 내가 거기서 죽었으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또 다시 율법으로 자꾸 돌아가느냐고요.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아, 이렇게 살아도 되나? 뭐 이러고 있느냐고요?
그래서 사라와 사라의 자손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믿음의 조상들이 전부 줄줄이 그리로 들어간 거예요.쉽게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를 무장해제 시키고 죽여 내는 곳이어야지 사람과 사회를 보다 깨끗하고 성숙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에요. 참 듣기 언짢으시겠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죽으시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뭐라 그랬어요? 옛 성전이에요. ‘얄라 샬롬’. 진리를 가리키는 건데 못 가리켜. 달을 봐, 그랬더니 손가락을 봐가지고 말이죠. 예? 진리를 가리키는데 진리를 못 보고 껍데기만,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율법이란 말에요. 그게. 그 한 복판에서 죽으시는 거예요. 골고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산입니다. 옛 성전 한 복판에서 제물로 죽는 예수. 어떻게? 율법에 의해, 율법에 대해, 율법으로 죽는 거예요. 죄인으로 죽는 거예요. 죄로 죽는 거예요. 그 막벨라 밭 굴이 바로 애급이요, 예루살렘이요, 소돔과 고모라요, 바벨론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광야, ‘싸데’에서 이스라엘이 이르렀을 때 다 죽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이 그냥 괘씸해서 죽여 버린 게 아니라 당연히 죽어야 되는 거예요. 광야에서 뭐가 떨어졌는데? 만나, 말씀이 떨어지니까 그들의 육이 죽더라니 까요. 악악거리면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던 그 육이 광야에서 죽더라는 거예요. 거기가 바로 애급이었거든요. 그들은 애급에서 어린 양과 함께 죽어서 나온 거예요. 어린 양이 죽어서 그들이 시퍼렇게 살아 나온 게 아니라 어린 양이 죽고 그 죽음을 아는 자들이,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죽음을 아는 자들이 아, 나는 그렇게 죽은 자구나! 알면 그 애급에서 나오는 거라 라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교회라는 곳에서 그들을 죽여 버리는 거라니까요. 말씀으로. 이걸 알면 너희들이 거기서 나오는 거야를. 우리 보고 몸으로 경험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으로 나를 시퍼렇게 살리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복음이냐고요? 그게? 죽지 않으면 못 나와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예수의 죽음이 뭐예요? 내가 죽은 자라는 걸 폭로하는 거라니까. 내가 되어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요.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으면, 죽은 자가 아니면 그거, 죽은 자라고 알지 못하면 거기서 못 나와요. 그러니까 교회, 인생, 역사 모든 게 다 성도의 처음자리를 확실하게 제시하고 증명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도대체 뭔데 그걸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이렇게. 너희들은 이거야. 죽은 거. 하나님이 생기 안 부으면 그냥 ‘아다마’, ‘아파르’잖아? 그냥 흙이잖아? 이거 가르쳐 주시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아, 그렇구나, 나 죽은 거구나? 원래. 내 안에 그 진리 없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거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아는 그 자를 살았다, 라고 한다니까요. 그래 넌 인제 살은 거야! 그걸 ‘엘류드로우’, 해방이라 그래요. 자유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게 생명이에요. 죽음이 곧 자유고. 죽음이 곧 해방이며,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이 세상과 인간들을 살리겠다고 신앙생활들을 한다니까요. 그건 넌센스입니다. 그건 종교놀이에요. 놀이.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철저하게 처음자리로 돌려 버리세요.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존재화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빼버리고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주인이 돼서 살면 그게 곧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니까. 그거 알라고 이 역사와 인생을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없음’ 이라니까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과 인생을 통해서 당신 백성들의 그 처음자리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확인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계시록 11장 6절 보세요.
계 11: 6- 6.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보세요, 두 증인. 교회 성도가 권세를 가졌어요. ‘엑수시아’, 말씀을 받고, 전하는. 그 ‘엑수시아’ 와 ‘두나미스’의 권세로 말씀을 전하는데 증인의 삶을 사는데 두 증인이라는 건 두 사람씩 이렇게 다 같이 가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어 ‘나’가 되지요? 그래서 두 증인이에요. 그래서 두 촛대라고도 하는 거예요. 비추는 거. 비추어 내는 거. 죄가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그 두 증인이 하늘을 진리를 증거하는데, 어떻게 됐다 그래요? 하늘이 닫히네요. 오히려. 그리고 비를 막아 버린대요. 비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고. 물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피로 받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뭐죠? 제사의 제물이에요. 그건 은혜의 물, 생수를 가리키는 거고 생수는 곧 진리다, 라고 예수님이 설명해주시잖아요? 진리의 성령이라고. 그런데 물을 전했더니 피로 받아. 그게 애급의 첫 번째 재앙이었어요. 애급은 그렇게밖에 못 받아. 그게 재앙이야. 진리로 줬더니 법으로 자꾸 가져가.) -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성도가 진리를 전하게 되면 그게 재앙이 돼서 땅을 치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거 비 진리라고 자꾸 태클을 거는 거예요. 그리고 못 알아들어. 은혜의 비가 막혀버려. 비가 안 와. 하나님이 보내시면서 그러잖아요. 이사야를 보내면서 가서 못 알아듣게 해.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가서 못 알아듣게 해. 못 알아듣게 하라는 게 아니라, 네가 말씀을 전해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못 알아듣는지를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세상은 절대 못 알아듣는다.) 7.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급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어디? 예루살렘, 소돔, 애급. 바벨론 다 같은 곳이네요. 그죠?)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사흘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죽음, 무덤 속의 그 시간이기도 하죠. 우리가 그렇게 죽어요. 그럼 사흘 반 동안 죽어있더라는 건 여러분의 인생이 날마다 죽는 죽음 안에 있다는 거예요. 사흘 반 동안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사흘 반을 그냥 시체로 너부러져 있어요. 거기서 장사된 거예요. 그런데 굳이 장사하지 못하게 세상이 막는다고 그래요. 왜? 장사를 하면 그리로 다시 가면 안 되거든. 그러기 때문에 장사 못하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못 묻히게 하는 거죠?)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보세요. 진리를 올바로 전하면 사람들이 괴로워해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요. 바벨론이라는 건 저 세상이 아니에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의 비 진리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섞인 혼합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예요. 바벨. 섞인 말을 갖고 있는 이들이 괴로워한다니까. 뭐야 저거? 우리끼리 99%가 다 손 잡고 가고 있는데 왜 저런 말을 해? 괴로워)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 이 서머나 교회 없어지면 목사들이 제일 좋아할 거예요) 11.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완성의 시점이죠.)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구름은 항상 비를 머금은 구름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파란 구름. 노란 구름 하얀 구름 이거는 비로 취급도 안 해요.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에요. 다. 구름을 타고, 말씀이죠? 은혜의 비. 그 말씀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승천, 하늘이 되니.)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땅에서 그거 구경하면 멸망입니다. 자, 이렇게 두 증인의 증거 이것이 온전한 것으로, ‘텔레오’. 증거를 마치네. 이렇게 되어있는데. ‘텔레오’ 라는 단어는 마치다, 라는 말이 아니라 완성된 증거라는 말이에요. 완전한 증거. 텔레오 그것이 전해지면 무저갱, ‘아비소스’ 아비소스 그러니까 무슨 지옥, 어디 뭐 용이 갇혀있는 곳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무저쟁이라는 말은 한문에는 그런 말이 많지만 끝이 없는 갱. 굴. 아비소스는 바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에요. 저주의 바다, 진리가 아닌 거. 거기에서 그걸 갖고 가르치는 자가 짐승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갖고 진리가 아닌 비 진리로, 율법으로 그 성경을 가르치면 그가 거짓 선지자. 짐승이에요. 예수님을 그 아래의 물, 바다, 그 율법으로 이해를 하면 그 예수가 짐승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은 그리스도, 진리를 품고 왔는데 그분을 율법으로, 법으로 문자적으로만 보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리고 그분을 추억하고 그분의 한 일을 잡고 그리워하게 되면 그분을 짐승으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데 그 아비소스에서, 그 아비소스하고 비슷한 말이 뭐예요? 하데스! 하데스가 뭐라 그랬어요? 물이, 말이 없는 곳. 지옥이라 며요? 거기가? 말이 없는 곳. 말을 못하는 곳. 참 진리가 없는 곳이 하데스에요. 불이 막 활활 타고 야차들이 삼지창 들고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진리가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거기가. 하데스. 아비소스에서 그걸 갖고 가르치고 이게 진짜라고 그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가 짐승인데 그 짐승이 ‘아나 바이노’, 위로 올라온다. 그래요. ‘아나’ 라는 건 ‘에피’와 달라요. ‘에피’는 이렇게 어디 위에 공간적으로 위에 있으면 ‘에피’의 전치사를 쓰지만 ‘아나’라는 것은 위에, 탈공간적 단어란 말에요. 그러니까 위의 것, 위로 난다라고 할 때 그 위. 자, 저주의 바다, 아비소스, 거기에 묶여 있는 게 사단이라고. 대적자라 그래요. 용이라 그래요. 그게 뭐예요? 비 진리에요. 그걸 아래 거로만 보면. 근데 이게 ‘아나 바이노’ 위로 올라오면 뭐예요? 진리로 올라온다니까요. 그러면 그 진리가 그 완전하게 ‘탈레오’ 전해지면 그 진리가 ‘아나 바이노’ 위로 올라와서 어떻게 한다? 그 육과 전쟁하여 그를 죽인다는 뜻이라니까. 저기 어디 지하에 있는 용이 어느 날 살아올라 와 갖고 우리와 막 싸우고 이게 아니란 말에요. 그건 영화란 말에요. 그런데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도살해 버려요. 공개적으로 처형하다. 이런 뜻이에요. 누구예요? 예수의 죽음을 죽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죽음으로 죽여 내더라는 거예요. 그 ‘아비소스’의 짐승이 ‘아나 바이노’, 위로 올라오니까. ‘텔레오’, 진리가 완전히 전해지니까. 그것이 육을 어떻게 죽여 내요? 공개적으로 제물로 죽여 내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죽여 낸다니까요. 그것이. 그들의 죽음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가에 있다 그래요. 큰 성은? 설명해줘요. 성경이. 바벨론이다. 그래요. 길 가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는 우리가 이번 주 수요일에 공부할 기도 해! 너희들은 기도할 때 길거리에서, 회당과 길거리에서 기도하기 좋아한다. 그 어구가 나오죠? 그건 성전마당이란 단어에요. 그거요. 옛 성전마당에서 죽는다는 거예요. 그들의 시체가 거기에 있대요. 삼년 반 동안. 그러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그렇게 죽는 거예요.
교회는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그거 원하면 절에 가세요. 절에. 거기는 그거 하는 데 맞아요. 원래 진짜 불교는 또 그거 아니지만 지금은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아니면 뭐 무당을 찾아가던가. 그 사람들은 진짜 그거 해주려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교회는 여러분의 그 소원을 짓밟아 뭉개는 곳이에요. 육적 소원을. 그래서 그거 아니다, 라는 걸 가르치는 곳이란 말입니다. 율법의 대표, 옛 성전의 마당. 성전마당에서 뭐해요? 희생제사 드리잖아요. 거기에서 그가 죽는 게 뭐죠? 율법에 대하여 죽는 거예요. 율법으로 죽는 거예요. 죄가 되어 죽는 거라고요. 말씀이 그를 죽여 낸다고요. 그의 증거가, 삶으로 증거하는 그의 삶이 그를 그렇게 죽게 만들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장사되는 거예요. 장사된다는 건 그리로 다시는 안 돌아간다는 거니까 세상이 장사 못 지내게 막는 거예요. 여기가 맞는다고. 거기 보세요. 거기가 소돔이다, 거기가 애급이다, 거기가 예루살렘이다. 그래요.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될 곳.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오자마자 홍해를 닫아 버리는 거죠? 못 돌아가요. 내가 광야에서 너희들 죽이면 죽였지 다시는 그리로 안 돌려보낸다. 롯이 소돔을 돌아보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의 성전, 다시는 돌아보면 안 돼요. 골고다에서 그렇게 제물로 죽은 예수, 다시는 추억하면 안 돼요. 기념해도 안 돼요. 성경에서 기념하라는 말은 그런 말 아닙니다. 기념하는 게 뭐 제사지내는 거 아니에요? 그거.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살아서 여러분 안에 들어와 있다니까요. 진리로. 그런데 자꾸 제사지내려고 해요? 성도는 그렇게 사흘 반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죠? 그게 성도의 인생이에요. 날마다 죽음 아래에 놓여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마침내 사흘 반이 끝나면 생기, 푸뉴마, 진리죠? 영, 생기를 받아, 즉 진짜 호흡을 받아 아들이 (?) 되어 올라가는 거. 그게 우리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누가 낳고 누가 장사지내죠? 예수의 아버지 이름은 요셉! 예수를 누가 장사지냅니까? 아리마데 요셉. 성경은 그냥 괜히 필요 없는 말 함부로 써 넣지 않습니다. 오셉이 낳고 요셉이 장사지내고,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예수를 낳고 그 율법의 예수를 완전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여야 되는 게 누구예요? 나죠. 내 얘기 하는 거예요. 요셉은 그래서 완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니까요. 요셉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이에요. 요셉의 이야기가. 그러면 그 요셉, 그 나는 어디서 죽어야 돼요? 소돔, 애급, 예루살렘. 요셉이 어디서 죽었어요? 그래서 애급에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게 바로 막벨라 밭 굴이다,를 가르쳐주기 위해 해골이 되어 그리로 들어간다니까요. 반드시 애급에서 죽어야 돼요. 어린 양 어디서 죽었어요? 애급에서 죽었다니까요. 유월절 어린 양은. 그런데 진짜 어린 양은 어디서 죽었어요? 예루살렘에서 죽었어요. 계시록에 그게 같은 곳이다. 그런단 말에요. 그런데 그 죽음은 우리를 대표하는 죽음이라면서요? 여러분은 어디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율법에 대하여 죽는 거예요. 옛 성전에서 죽어야 된다니까요. 이 육에서 죽어야 된다니까요. 창세기 50장 15절 보세요.
창 50 : 12- 12.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13.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 이거 보세요. 막벨라 밭 굴, 꼭 같이 쓰죠?)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급으로 돌아왔더라 26.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급에서 입관하였더라
애굽에서 장사된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 그래요?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어디로? 막벨라 밭 굴로 올라가라는 거예요. 난 애급에서 이렇게 죽었어. 맞아!, 이게 예수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 맞아. 그리고 이 죽음이 바로 막벨라 밭 굴의 성도의 죽음이란다. 그러면 다시는 이 애급에 들어와선 안 되겠지? 내 해골도 여기 있음 안 돼. 내 해골 메고 올라가.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곳이니까. 그런데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곳인 걸 가르쳐 주기위해 하나님이 그리고 넣는다니까요. 하나님이 언약 하신 거예요. 내가 그리로 넣을 거야.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무덤 속으로 애급으로 하나님이 집어넣는다니까요. 뭐하라고? 죄 지으라고. 성 쌓으라고. 세상의 성. 성전 지으라고. 자, 예수가 애급에서 어린 양으로 죽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 즉 이 교회로 밀어 낸 것과 같은 그림을 요셉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 삶을 우리가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애급에서 죽으면 그게 사는 거니까 거기가 빈 무덤이 되는 거란 말에요. 그거 구하라는 거예요. 율법에서 구하라는 게 뭐예요?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이해되는 거. 깨달아지는 거. 거기에는 인간의 육적 행위가 요만큼도 개입할 수 있는 틈이 없어요. 성도가 예수를 낳고 그 예수를 성도가 장사지내죠? 그러면 다시는 그 율법의 예수, 애급의 어린 양에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 주세요. 고기 주세요. 했을 때, 그 고기가 유월절에 먹었던 양 고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는 만나로 밤에는 고기로. 이 얘기가 그 고기는 밤의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너희들이 낮에 달라고 그래? 그래 줄게 그래놓고 심판해 버려요. 이사이에 끼기도 전에. 아, 준다고 그랬잖아요? 그래. 야, 그런데 그건 밤의 고기라니까.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달라고 해? 그래. 줄게. 죽여 버려요. 못 돌아가는 거예요. 거긴 못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의 죽음이 나를 죽여 내지 못하면, 그게 내 죽음이 아니라면 예수는 개죽음 당하는 거예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예수의 죽음은 그 예수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거라니까요. 그 죽음이 내 죽음이 돼야 예수님이 가치 있는 죽음을 죽으신 거란 말입니다. 교회에서 그 일이 일어나야 되는데 정반대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죠? 여기 사람이 서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개역성경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마이’. 다나투스, 죽음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절대 ‘호라오’, 불 수 없어. 이런 말이에요. 반드시 죽어야 돼. 너희들은. 그랬단 말에요.
그렇게 피조세계의 존재라는 게 그 없음이라는 자기의 실체, 처음자리를 찾게 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오롯하게 드러나는 게 되는 거잖아요? 그걸 성경이 안식이라 그러는 거예요. ‘싸바스’. 존재가 자기의 자리에 제대로 앉게 되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대우를 받고 피조물은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거예요. 사랑을 받는 거예요. 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싸바스’라 그래요. 그러니까 예배라는 건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분의 일을 칭찬하는 거라니까요. 진심으로. 여러분이 뭐 바치고 드리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성도의 완전한 자가 자리의 복귀. 무트의 죽음이라 그랬습니다. 그게. 그 복귀가 되면 그 상태가 안식이 되는 거예요. 피조물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일도 없게 되고, 피조물인 인간이 낳자마자 안식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기여할 일도 없게 되고 하나님도 더 이상 그들을 역사 속에서 죽여내야 하는 그 일을 안 할 수 있는 완성의 자리. 그게 안식이란 말에요. 그걸 십자가가 했잖아요. 너희들의 실체 알았지? 그럼 뭐 해야 돼? 아, 하나님의 그 희생을 너희들이 받아먹어야 되는 거야. 이거요. 십자가잖아요. 그게. 언약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7이라고 하는 거예요. 7은 좋은 숫자이지만 죽음의 숫자이기도 한 거라니까요. 그게. 완전히 죽으면 7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사는 거다. 그래서 안식 후 첫 날 8에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다나투스의 죽음을 잘 죽어 안식이 되면 생명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렇게 죽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못 본다, 하고 말씀 하시고 난 바로 그 다음 주에 어떻게 돼요? 8일 나오죠? 성경에서 팔일 째 되는 날. 팔일 째 되는 날, 이런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 그게 팔일 째 되는 날, 여드레 후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8이에요. 다. 8이 뭔가를 이야기 해준다니까요. 누가복음 9장 27절로 다시 가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말이라고 했어요. 이게.)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이게 하신 후도 아니고 ‘로고스’, 말씀이 팔 이라는 빛. ‘헤메라 옥토’ 가 팔이라는 빛, 팔이라는 그 나타남, 낮, 이게 되자.)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프로슈코마이‘ 뭐라 그랬어요? 진리를 흘려주는 겁니다. 어디로 올라가요? 그 산, 성전이에요. ’호 호로스‘. 성전으로 올라가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해주자, 다 상징이에요. 여러분. 이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성경이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게 있어서 이런 단어들을 쓰는 거란 말에요 기도하실 때) - 용모가 변화되고 (‘프로쏘폰’ 이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파님’인데 하나님의 그 진리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날 때, 그걸 뭐 얼굴이라고 다 번역을 해놨는데, ‘파님’. ‘프로쏘폰’, 그것이 변화 됐대요. 다른 것으로 보여 졌다, 라는 거예요. 너희들 죽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호라오’ 할 수 없어. 분명히 이야기 해줬어요. 그리고 말씀, 로고스가 팔이 되자 그들에게 성전에서 ‘아나 바이노’ 위의 것으로 설명해주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호 호로스로 올라갔는데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의 ‘프로쓰폰’, ‘파님’이, 나타남이 다른 것으로 보이더라는 거예요. 뭘로 보였겠어요? 진리로 보이더라는 거예요. 올라갔더니 막 이상한 사람으로 변한 게 아니라) -그 옷이 희어져 (옷이 뭐죠? 배웠잖아요? 겉옷이란 단어인데, 진리의 말씀이 희어졌다. 이것도 제가 계시록이나 이런 데서 다 찾아 드려야 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흰 옷. 희어졌다. 이게 뭐냐 하면 진리로 되는 거예요. 희어지고 - 광채가 나더라 (이게 빛이에요. 빛.)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 중에 나타나서 (독사는 뭐죠? 하나님의 진리를 이제 밖으로 나타내는 거죠.) -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별세, Departure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거 Exodus 라는 단어예요. Exodus 가 뭐예요? 출애급기, 이름이 Exodus 예요. 모세가 엘리야가 영광으로 바로 이 Exodus를 말하고 간 사람들이란 말에요. 예수가 그 길을 갈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증거로 살고 간 그들이 나타나서 함께 셋이 어우러져 그 일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 여기에서 무슨 뭐 8일 후에, ‘메타’는 후에가 아니라 연합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8이, 말씀이 8이 됐다. 그런 말이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변화가 됐는데 진리로 보였는데 자, 그 빛. 8, 그 8과 같이 되었다, 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성경에 이렇게 8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나? 그것만 제가 조금 찾아드리고 마칠게요. 출애굽기 22장 29절 보세요.
29.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찌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찌며 (장자들 다 내게 갖고 와, 예요) 30.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그렇게 장자를 갖고 와. 어떻게?)
-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 일만에 내게 줄찌니라 팔 일만에 내게 줘. 어미와 함께 있으라는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미로 젖을 먹이죠? 젖은 항상 말씀이죠? 말씀으로 젖을 먹이게 되면 7로 죽어요. 아까 계시록에서 봤잖아요? ‘아나 바이노’ 바다의 ‘아비쏘스’ 의 짐승이 ‘아나 바이노’ 해서 위로 올라오면 그게 7로 우리를 ‘다나투스’ 큰 성 바벨론에서 죽여 버린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8로 내가 받을게. 그거예요. 내 아들로 그를 8로 받을게. 왜? 산 자니까. 이제. 그래서 히브리 남자애들이 8일 만에 할례 받는 거예요. 인간의 생식 능력이나 육적 생명이 완전히 삭제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력자로, 그게 죽는 거지만 사는 거니까. 영원으로 사는 것. 그래서 8일에 할례를 받는 거. 베드로 전서 3장 20절 보세요.
벧전 3: 20-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로 구원을 받는 자는 몇 명뿐이다. 진리의 물이 세상 속 아담들에게는 율법의 물, 심판의 물이 되는 거예요. 물이 쏟아졌더니 그걸로 살지 못하고 전부 거기에 빠져 죽네? 성경에 빠져 죽네? 교회에게 맞아 죽네? 그런데 그 물로 그 진리로 은혜의 비로 받아 사는 자가 있는데 몇 명이래요. 그 단어가 ‘홀리고스’예요. 거의 없다. 거의 없다. 거의 없다! 그런데 그 거의 없는 와중에 구원을 받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여덟 명이다, 가 아니라, 그런 말은 없어요. 그들이 8이다. 노아의 여덟 식구, 그래서 여덟 식구인데. 그 여덟 식구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래서 상징이란 말에요.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지. 여기서 말하는 그 여덟 식구가 아니라 그들이 팔이야. 그들이 산 자야. 그들이 완성된 자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에 에이미 동사가 쓰였어요. 그들이 팔들 이었다. 이런 말이에요. 비 동사라니까요. 그게. 그들이 팔이더라. 기식하는 푸시케는 그 물에 맞아 죽고 그걸 진리로 깨달아 살아나는 거예요. 영으로. 진리로 살아난느 거예요. 그게 구원이에요. 미가서 8장으로 가보세요. 5장으로 가보세요.
미가 5: 2 - 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게 뭐예요? 이 ‘요람, 요람 옴 케넨’ 인데요. 이게 상고는 우리 생각 밖의 시간을 가리키는 거예요. 생각 밖의 시간은 뭐죠? 영원이에요. 이 시간은 우리 생각 안에 우리가 만들어 낸 거예요. 이거는. 생각 밖의 시간 상고의,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이고 이런 말이에요. 영원이고. 태초에, 이러는 뭐 베레시트가 아니라 ‘케뎀' 이에요. '케뎀’ 은 뭐라 그랬습니까? 동쪽이라 그랬죠? 동쪽이란 단어예요. 동쪽은 뭐예요? 항상 그 단어 자체가 대적 자니까 하나님의 대적 자들은 항상 동쪽으로 쫓겨나죠?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인, 그리고 세상의 문명은 전부 동쪽에서,,그럼 이 세상의 대적 자는 뭐예요? 세상의 반대쪽은? 영원! 하늘의 것. 그분은 영원의 존재이며 그 하늘의 존재다, 이런 말이에요. 육적 세상의 존재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게. 상고에, 태초에니라.) 3.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에 의해서 이제 남은 자가 돌아오는데) 4.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 먹인다, 목자, 라는 거죠? 그분이 목자다. 먹인다. 말씀으로 먹이는 거요.)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평강, 에이레네, 이러는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메고 같이 한 방향으로 연합되어 걸어가는 그걸 형상화 하여 그린 게 ‘에이레네’ 평강이라는 단어죠. 그가 우리의 평강이 될 거다.)
-앗수르 사람이 (앗수르 사람은 진리에 대적하는 존재예요.) -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일곱 군왕과 여덟 목자는 누구예요? 7이라는 목자, 우리를 7 동안에 말씀으로 먹여서 우리를 죽여 내는 목자에요. 그게 목자에요. 앞에서 지금 우리를 먹일 거다. 그러죠? 그 7이라는 목자. 그리고 여기서 무슨 여덟 군왕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여덟 군왕은 여덟 명의 뭐, 왕이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쉐무네 네시크’, 아담이에요. 아담은 사람. ‘네시크’는 기름을 바르다. ‘쉐무네’, 여덟이에요. 여덟. 그러니까 사람에게, 아담에게 기름을 발라 살려내는 팔(8). 7 동안 먹여서 말씀을 부어서 죽여 그들에게 기름이 발려지면 ‘쉐무네 네시크’, 아담. 그 아담이 팔로 사는 거예요. 그걸 여덟 군왕 이렇게 번역을 해 놓은 거죠. 뭔지 모르니가. 왕이라는 말도 없고. 군도 왕이고 왕도 왕인데 군왕은 뭐예요? 사도행전 7 장 8절 보세요.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할례가 뭐라 그래요? 언약이라 그래요. 언약. 그런데 약속의 자손을 낳아서 팔로 할례 하여 열둘로 완성하는 거. 열둘의 아들로 완성하는 게 팔이에요. 그게. 할례. 언약이에요. 그것이 언약.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서도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나실 때에 계속 팔, 팔, 팔 나오죠? 계속? 거기도. 팔, 팔, 팔, 팔일 째. 왜 꼭 팔일 째 나타나신 것인가? 팔, 팔, 팔, 팔이 뭔지 설명해주는 거예요.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팔로 부활하셨어요. 안식 후 첫 날.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안식 후 첫 날에 예배드리는 거예요. 산 자들이라. 팔로 살아나셔서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팔로 오시는 거예요. 마가의 다락방에. 그런데 거기 도마가 없었어요. 그래서 도마가 아, 난 못 믿겠어. 어떻게 죽은 양반이 다시 살아 나냐? 그랬단 말에요. 당연하죠. 그거 어떻게 믿어요? 그랬더니 아, 내가 그 손에, 그리고 옆구리 창 자국에 내 손을 넣어보고, 만져보기 전에 난 못 믿겠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팔에 또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이야기했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 전체를 한마디로 축약한 거예요. 왜? 그걸 또 다 쓰려면 앞에 쓴 걸 다 써야 되니까. 성경에. 그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히브리 사람들이 쓴단 말에요. 복음이란 얘기에요. 평강이. 에이레네가 뭐예요? 하나님이 이루실 그 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요. 예수님이. 말씀하셨더니 도마가 손가락에 넣어봤다고 그래요? 안 그래요. 그 말은 없다니까. 우리가 이 말을 그냥 표피적으로만 읽고 사람들이 그림을 그렇게 그렸단 말에요. 예수님의 손에다가 손가락 넣어보는 도마, 옆구리에다가 이렇게 손을 넣는. 명화들이 그렇게 그려냈다니까요. 명장들이. 그러니까 그렇게 된 줄 알아요.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그리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네가 본고로 믿느냐?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건 의문문이 아닙니다. 너는 보고 믿네?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단어가 ‘호라호’ 라니까요. ‘에이돈’,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고요. 내가 평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어떻게 네가 그 말을 듣고, 옾타모나이, 에인돈, 블렛보 이거는 그냥 보는 거라 그랬죠? 그러나 호라호는 깨달아 아는 거예요. 깨달아 알아서 보는 거. 예수님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네가 어떻게 내 말을 듣고 ‘호라호’ 해서 믿네? 이렇게 도마처럼 보지 못하고, 거기서는 ‘에이돈’이에요.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이가 바로 복 받은 자야. 라고 이야기 한다고요. 이게 팔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팔이야. 그래서 팔, 팔, 팔의 결론이 바로 그거예요. “네가 어떻게 말을 듣고 진리를 깨달아 알아? 어떻게 ‘호라호’ 하니? 이렇게 ‘에이돈’ 하지 않고, 보지 않고 믿는 이가 바로 팔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무 의심 많은 도마, 뭐 이런 거 그러지 마세요. 다시 누가복음 9장으로 가세요.
눅 9 : 29-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되니라 자, 그 팔이 되니까 예수님이 다른 존재. 내용으로 보이더라는 거예요. 이 말이에요. 여러분도 그렇게 죽으면 다른 존재, 팔이 된다니까요. 산 자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평생 죽어야 돼요. 팔은 여러분이 이미 운명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거고 여러분의 인생 내내 과정으로 7의 삶을 사는 거예요. 죽는 자. 그래서 여러분을 산 자라고도 하고 매일 죽는 자라고도 하는 거예요. 마가복음 16장 12절 보세요.
12.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 자 팔로 사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보였다고 그래요?)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이 말이에요. 진리를 알기 이전의 예수는 이 예수와 다른 예수라니까요. 깨달아 모르는 예수.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시자 이들이 알아먹었어요. 그런 뉘앙스로 쓰는 거예요. 못 알아먹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설명해주잖아요. 말씀을 설명해주시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아, 그분이네! 그랬더니 없어져버렸어요. 그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이렇게 줄여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내 보여주시니까 그들이 알고 가서 제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그래요.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 다른 것으로 나타내주셔야 돼요. 그런데 그분이 흰 옷을 입고 광채가 났다 그래요. 그 빛이라는 단어는 성전의 등잔에서 나온 단어에요. 같은 단어에요. 그게. 진리를 나타내는 빛이죠. 에베소서 5장 13절 보세요.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을 받는 게 뭐겠어요? 죄예요. 어둠. 죄가 빛으로 나타나요. 아, 이게 죄야? 이렇게 나타난다고요. 빛으로. 그런데 그렇게 나타나니까, 이게 죄야? 라고 깨달아 아니까 아, 이게 빛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빛과 어둠은 같은 거라니까. 죄와 의는 같은 거라니까요. 진리가 되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로 서면 책망 받는 모든 게 빛으로 나타나니까. 엥? 이게 빛이네? 이걸로 내가 사는 거네? 라고 알게 되더라는 거예요.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빛을 그 광채를 발하시는 거예요. 그 광채를 발하시는 예수를 알아보는 이들이 팔이에요. 팔. 그리고 등장하는 게 모세와 엘리야죠. 모세는 당연히 율법의 상징이고 예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반드시 광야, 애급, 예루살렘, 소돔, 옛 성전, 거기서 죽어야 돼요. 그래서 모세는 거기서 죽어야 돼요. 그리고 여호수아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가 율법으로 광야, 교회, 예루살렘에서, 애급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약속의 땅,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내가 약속이 돼야 내가 약속의 땅이 된다니까요. 하나님의 처소. 엘리야, 엘리사에게 겉옷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죠. 그랬더니 엘리사가 뭘 해요? 쓴 물을 단 물로, 진리로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고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서 완성되는 거란 말에요. 다 그 인물이에요. 그래서 여호수아서 1장에 보면 “여호수아야, 모세가 드디어 죽었다! 이런 말을 써요. 드디어 죽었다.” 하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죽었어! 저 강건하고 눈도 여전히 그냥 좋은 저 육이 드디어 죽었다!” “ 저 안 죽으려하는 저 육이 드디어 죽었다. 이제 네가 들어가라.” 어ᄄᅠᇂ게? 예수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호수아, 그런데 죽은 예수네?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예수니까. 누구요? 그리스도란 말에요. 모세는 여호수아로 들어가고 엘리야는 엘리사로 들어가고 예수는 그리스도로 들어가네! 어떻게? 세상에서 사라져서. 죽어서. 그러면 사는 거예요. 그게 Exodus 출 세상 출애굽. 출 나. 그래서 Exodus라고 해요. 불 말과 불 병거 타고 죽음을 보지도 않고 어디로 사라진 엘리야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성경은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라는 말에요. 그 셋이 바로 이 빛, 율법을 다른 모양으로 보여주고 그 겉옷을 희고 광채 나는 바로 그 진리로 보여준 그들이란 말에요. 그렇게 죽는 거예요. 에녹도 그렇게 해서 사라져 버리잖아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 사라지더라. 땅에서 다신 보이지 않더라. 그게 그 말이란 말에요.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살고 있지만 그게 자꾸 안 믿겨지고 흔들리니까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해드리는 거예요. 같은 이야기를.
그래서 어느 순간 아, 그래 그렇지. 그렇게 그 그릇하나 가지고 가면 돼요. 성경 다 몰라도 돼. 레위기, 민수기 이런 거 골치 아픈 거 읽지 말아요. 뭐 하러 읽어요? 그거? 요한복음 하나만 가지고도 진리를 알면 안 읽어도 돼요. 아니 성경이 단어 하나가 가진 의미가 문장 하나가 가진 의미와 같고 그 문장 하나가 책 내용과 똑같고 그게 전체 성경의 내용이에요. 거꾸로 책의 내용이 문장 하나에 다 들어있고 그 문장의 내용이 단어 하나에 다 들어있어요. 파자를 해보면. 히브리어 스물 세자 그 안에 의미가 다 들어있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책을 그렇게 쓰느냐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자연이, 내가, 내 몸이 또 그대로 얘기해주고 있어요. 사람의 인생이 또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항복을 안 해요? 그걸 순종이라고 한다니까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거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7의 인생동안에 여러분은 잘 죽으시면 돼요. 그래야 정죄 받을 몸이 없어지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그 몸을 자꾸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징징대며 하는 이야기가 그거잖아요? 이것 좀 어떻게 좀 살려주세요. 기독교 백주년 무슨 행사 때, 제목이 그거더라고요. 살려 주옵소서! ㅎ 죽여주옵소서!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진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만큼 신앙생활이 힘들어요. 간혹 사람들이 힘들어요, 힘들어요, 뭐 글도 쓰고 메일도 보내고 이야기도 하고 하는 사람들 보면 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직 살만 하시군요. 진짜 힘들면 악 소리도 안 나와요. 그걸 어디다가 뭐 힘들어요. 외로워요? 악 소리도 안 나온다니까요. 그 자리까지 가요. 그게 죽음이에요. 아직 멀었어요. 더 죽으셔야 돼요. 그런데 그게 사는 거라니까 인정하고 수긍하고 가는 거예요. 정말 힘들어보시면 정말 아픔이, 고통이 뭔가라는 걸 알게 되시면 오히려 자유로워져요. 거기까지 내려가 보세요.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해야 되는데,, ㅎ 항상 침울하게 나가. ㅎ 그러니 교회가 부흥이 될 리가 있나? 으쌰, 으쌰 하면서 나가야 되는데. 하, 그럼 내가 하려고 하는 일들도 그거 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다 실망들 해갖고. ㅎ 여러분 그렇게 나를 알면 그만큼 하나님이 보인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건 내가 너를 통하여 나를 보여줄게, 하는 말이지. 우리가 무슨 뭐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뭐 어떤 것 중에 공유하는 게 있고 비공유하는 게 있고,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내가 나를 알면 그만큼 아, 하나님은 그런 분이겠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라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거지. 하나님이 가진 것을 여러분이 공유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칼빈이 한 얘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존재이고, 이 세상은 여러분을 어떻게 만들 수밖에 없는지를 처절하게 경험하세요. 처절하게. 그럼 그 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보여요. 옛 하늘과 옛 땅, 그 모형이 뭔지를 확실히 알아 그게 날아가 버려야, 사라져 버려야 여러분에게 비로소 솟아날 구명이 생기는 거예요. 마지막 결론 계시록 21장 1절 보세요.
계 21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럼 하나님이 소멸시키고 정죄하고 심판할 그 땅이 내게서는 사라졌네? 그러니까 그 불 심판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여기를 어떻게든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려고 그런 노력하려고 하지 마세요. 나를 어떻게든 훌륭하고 성숙한 자로 만들어 내려는 그런 시도, 좋은 시도지만 그걸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마시란 말에요. 그건 사라져야 할 거란 말에요. 바다도 다시 있지 않아요. 그래서 하늘의 물, 그 진리만 남는 거예요. 그게 사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되어 영원을 사십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빠지면 우리는 정말 영원을 삽니다. 과거도 나에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고 미래의 그것도 이미 나는 현재로 당겨서 삽니다. 이게 영원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그곳. 우리는 이제 이 시간 속에서 이 곳을 나가면 또 이 순간을 잊겠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 되고 나의 마음이 되어 영원을 살게 되는 그곳, 하루 속히 우리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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