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89 피조물은 왜 하나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릴까 롬 81925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46



롬8:19-25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창3:19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렘12:11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고후1:22, 고후5:5, 갈5:5, 롬7:24, 빌3:21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히11:1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히11:27


로마서 7,8,9장은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ㄷ 책들이 다 사라지고 단 한 장만 가지고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어느 책을 가지고 가겠는가, 했을 때 로마서 8장을 이야기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강의해 놓은 건 다 좀 틀렸어요. 그 강해로 하면 큰일날 뻔 한거죠.

그래서 지금 오래오래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수평적 시간-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적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만이 진리 안에서의 수직적인 시간, 카이로스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의 그 크로노스의 시간은 모형이고, 벗겨져야 할 껍질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그 겁질을 뚫고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투시의 안경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묵시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그 모형으로서의 역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는겁니다.

그렇게 묵시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 그 모형으로서의 역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잘 보게 되면, 

그럴 때 그 피사체의 상태 '어, 누가 나를 진짜 나의 목적대로 진자 나의 그 역할대로 읽어주네, 나를 봐주네!' 할 때 그 피사체의 상태가 '자유, 풀려남'이라고 하는 겁니다.

드디어 풀려나는 겁니다. '진짜 내가 뭔지, 내 내용을 누군가가 봐주네!' 했을 때에 그 피사체가 '자유, 풀려남'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역사 속 사건들이나 맞딱드리는 현실이나 감정까지도 진리 안에서 재해석 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됩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점차 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크로노스를 카이로스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그 은혜는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떤 탐구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능력, 엑수시아라는 하나님의 권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 엑수시아, 능력 안에 두셨다'고 하신 겁니다.


행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때와 기한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아버지가 자기 능력 안에 두었다는 겁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 크로노스 속에서 그 기한, 카이로스를 볼 수 있게 된 이들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을 존재케 하는 법칙이나 원리,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저 나타난 모양이나 인식되는 원리나 법칙으로만 이해되면 안되는 게 이 크로노스, 그 물리의 세계, 이 세계 속, 물질세계 속의 존재들이나 원리나 법칙, 그런 것의 실체입니다. 


한마디로, 이 크로노스 속의 그 어떤 것도 우발적으로나 우연적으로 생겨난 게 없다는 겁니다. 

진화? 그런 건 없습니다. 실제로 다윈 자신이 자기 친구인 신부에게 "그건 음모였다. 그건 학자로서 업적을 만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내 거짓말이 세상을 이렇게 뒤집을 줄 몰랐다."라고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유언은 죽기 전에 노망 든거다."라며 진실을 묻어 버렸습니다.


절대 우발적, 우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크로노스 속의 모형들 안에는 우리의 육신도 들어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도 이 아래의 것이고, 성전도 그러합니다. 모두 하늘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서 누군가에게 감지가 될 때 그걸 '영광, 독사'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피조물이란 말이 아니라 진리를 담고 오신 예수님이 육신으로만 이해되어지고,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기적이나, 사건, 그분이 당하신 수난의 삶, 이런 것에만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으면

그분은 우리 밖의 섬김의 대상이 되는 거고,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건 표피적으로 이해되어진 크로노스적인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절대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그리스도를 담고 왔으니까, 진리의 영을 담고 온 분이니까.

그러니까 그걸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은.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모퉁이돌이 되지만(그런데, 그 모퉁이돌이라는 건 그 돌을 기준으로 딱 갖다 세워놓으면 그것과 똑같은 돌로 계속 세워서 집을 지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어야 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거치는 반석, 부딪치는 돌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돌에 맞아 죽는 겁니다. 

율법에 '돌로 쳐 죽여라'는 말은 그 예수에 맞아 죽는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율법으로 보면 그 예수에 맞아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에서도 '그 돌이 벌써 던져졌는데'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돌과 그 돌에 관해서 적혀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하늘의 떡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봐라! (그게 마귀의 시험이었죠.)  

그게 끝이면 안돼요. "그 떡은 진리지, 말씀이지!"라고 예수님이 완성시켜 준단 말입니다.

그 돌이라는 예수는 하늘의 떡으로,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이해되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 아래 모든 것이 그 모형으로서의 그 외양 그 안에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건데 피조물들이 그 나타난모양으로만 인식되고 평가되고 이해되면 그건 사실 오해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희생제사 드려'라는 말을 그 껍데기로만 알고 계속 드리면 그건 오해입니다.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모든 것들이 그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냥 우리의 이성 수준에서 그냥 그 수준으로 이해해 버리면 그들의 진짜 존재 목적, 그들의 진짜 가치는 진짜 진리를 설명하는 건데 아무도 그 안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게 되는 겁니다.


 아닌데, 나는 그런 내용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아닌데,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데

이들이 나를 그렇게 보고 평가해 버리면 내가 거짓말쟁이가 된단 말입니다.

나타난 모양으로만 그것들을 보는 이들은 보이는 그 표피적인 것만으로 판단을 해서 '아름답다, 추하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거칠다, 부드럽다, 멋지다, 슬프다, 기쁘다, 등등'의 평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메시지로 담아 놓았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걸 보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지 못하고 표피만을 인식해서 그걸 내용으로 받아 버리면,

그리고 그렇게 평가하고 판단해버리면 그 피조물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진짜 그 진의로 봐주는 어떤 존재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피조물을 보이는 모양으로만 보지 않고, 성경말씀을 문자로만 보지 않고 진리라는 내용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진리라는 생명의 씨를 그 마음으로 가진, 선물 받은 그 하나님의 아들들 밖에 없단 마레요. 

아들이라는 건 그 안에 씨를 가졌다는 뜻이거든요.  그들의 눈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떨어지고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가뭄이 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뜨고 일식이 생기고 월식이 생기고, 일식을 보면서 '아! 해가, 빛이 있는 것, 해를 달이 가리면 저렇게 되는구나'를 아는 거죠. 

이 땅의 달이, 달은 반사체인데 율법이 진리를 가리면, 해가 빛을 잃는 것, 그게 심판이란 말입니다.


일식, 월식이 생기고, 노을이 지고 새가 날고, 어미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젖을 먹고, 젖 먹던 아이가 밥을 먹고, 이 모든 게 성경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진리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예수가 있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에 의해 진리로 나타나게 되는 피조물은 비로소 그들의 진의를 봐주는 그 아들들 때문에 껍데기, 허물을 벗게 되는데, 그걸 자유, 풀려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거예요.



롬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아포카라 도키아' 뭔가를 간절히 열망한다고 합니다. 이거 없으면 죽어요.

그래서 다른 것들이 안중에도 없는 상태, 열망하는 거.

무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피조물이 뭘 고대한다고 해요? ‘ajpokaradokiva(603, 아포카라도키아)’는 ‘간절한 기대 eager expectation’라는 뜻으로 정말 뭔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겁니다. 

‘이거 없으면 죽어요.’ 그래서 다른 것들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로 열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피조물들이 뭘 그렇게 아포카라도키아 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여기서 ‘나타나다’는 말 ‘아포칼립시스’는 ‘나타나다’는 뜻 외에 ‘나타내다, 덮개를 벗기다’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 진리의 씨를 가진 이들이 나타나서-나타난다는 건 그들의 껍질을 진리로 먼저 벗는 겁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아, 이건 아니구나!’라고 자기들의 그 아포칼립시스, 껍질을 벗은 어떤 이들이 나타나서- 그 피조물들의 껍질, 덮개를 벗기고 그 안의 내용을 나타나게 하기를 그 피조물들이 열망하고 있다는 겁니다. 덮개가 벗어져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 것들, 피조물들은 그 때에 크로노스의 썩어짐을 벗게 되고 카이로스의 영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물질 속에 같히면 반드시 늙고 썩게 되어 있어요. 시간, 크로노스 안에 갇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영원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아, 그 내용으로 살아버리면 그게 카이로스, 수직적인 시간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영원이라고 하고,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위로 똑바로 서는 걸 뭐라고 해요?

‘아나’ 위로 ‘이스테미’, ‘아나스타시스’ 부활이라고 해요. ‘위로 똑바로 서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다시 위의 것으로 똑바로 서지 못하면 절대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지. ‘아노텐’ 의로 다시 나야지.” 하시는 겁니다. 아래에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난 자는 반드시 (히브리 문자로)위의 입, 말씀으로 다시 낳아야 하고, 그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크로노스의 역사가 카이로스로 해석되지 못하면 절대 온전함으로 성취될 수가 없다는 걸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구절이 확실하게 밝혀줍니다.



히11:39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 ‘이브리’는 ‘건너간 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전부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이 된 자’들이 아니면 그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이 온전하지 않은 겁니다.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 약속이라는 건 약속의 실체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말합니다. 증거는 이미 받았어요. 눈에 보이는 걸로 하나님이 다 설명해 줬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약속의 때를 받아야 돼요. 그런데 구약의 사람들은 그 약속의 때를 아직 못 받았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이전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실 그게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구원의 차서, 우리 교회에게 뭔가를 설명해주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분기점, 분수령을 딱 세워놓고 그 이전과 이후로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겁니다.



눅24: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약속, 예수님이 올라가서 보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게 위로부터 입히게 되면 그게 약속이다’, 하세요. 그런데 그걸 십자가 이전이니까, 히브리서 11장에 쭉 나열된 사람들은 그 때를 못 살았죠?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을, 그 약속을 받은 어떤 이들이 ‘그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구원받은거야’라고 설명을 해줘야 그들이 참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이 약속도 못 받고,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지도 않고, 설명도 못해 주면? ‘거 봐, 거짓말이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 아들들이 나타나야 되죠? 그 씨, 그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가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진리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우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하지 못하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구원, 그 영생 주심이라는 건 이런 거야’라고 말씀하신 성경, 그리고 그걸 삶으로 몸으로 이야기 하러 오신 예수, 그리고 그 이야기의 출처인 하나님까지도 다 거짓말쟁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우리가 반드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진리로 설명해 줘야 하나님까지도 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은 왜 자꾸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하시잖아요. 언제 이스라엘이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어요? 하나님 말씀을 곡해해서 강도처럼 써먹을 때, 그때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됐어요. 


“왜 그걸 진리라고 가르쳐? 그럼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잖아.” 그런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그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죠? 하나님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원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설명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약속의 때에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 나타나서 그 구약의 자손들도 이 십자가라는 방법, ‘하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과 우리에게 영으로 오심에 의해 우리가 존재가 된 거야, 생명이 된 거야’ ‘바로 이 방식으로 저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거야’라고 설명을 해주면 그들이 비로소 참이 되는 겁니다. 

‘그래, 너는 나를 제대로 봐주는구나’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마지막 절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하나님의 아들들의 올바른 진술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손 아브라함으로 밝혀지는 거고,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모세도 그들의 인생이 담고 있었던 그 진리라는 내용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그들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되는 겁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야. 그래서 복을 받은 아브라함.’ 이거 예화로 얼마나 많이 쓰입니까? 심지어 간증에도 나와. 자기들도 그렇게 했더니 그가 진짜 예수님이었대. 유명한 의사가 그러고 다니잖아요.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도 그 열심과 열정으로 지지 않고 하나님마저도 감동시켜 축복을 얻어낸 야곱. 그러니까 목숨 걸고 강청기도 하라고 하잖아요.



요즘엔 일천번제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긴 기도가 나왔다고 해요. 일천오백번제라고. 게다가 기도할 때마다 헌금내는 거래요. 이런 걸 써먹었어야 되는 건데..


형제들의 배신에도 인내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지 않아서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은 요셉, 애굽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도구로 열심히 살다간 모세, 이미 경수가 끊어져서 태가 막혔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삭이라는 자식을 얻은 사라.     


이런 건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의 핵심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으로 누구는..’ 이렇게 믿음을 주어로 해서 다시 쓰는 겁니다. 믿음이 그렇게 했다,라고.


모세가 사람 죽이고 나온 거지, 무슨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걸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소중히 여겼습니까? 아니에요. 처가살이 40년동안 풀이 다 죽은 상태에서 그냥 하나님께 쓰임 받은 거지,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고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사라가 언제 하나님이 자식 준다고 하셨을 때 ‘믿습니다!’ 하고 자식을 낳았습니까? 휘장 뒤에서 비웃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이 확 폭로시켜 내는 겁니다. ‘너희들은 그런 존재인데 믿음이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 말은 ‘너희들이 한 행함은 그따위 것이었는데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있어 결국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어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일을 하신 하나님의 손길, 크로노스 안에서 일을 하신 카이로스의 하나님의 손길에 초점이 있는 거지, 그들의 행함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따라서 그러한 방식으로 거저 구원을 얻게 된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내용을 진리 안에서 올바로 이해해서 설명해주지 못하면 그들은 온전한 자가 안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에서 땅을 치고 있을 겁니다. ‘내가 지나가는 길손을 대접한 게 그거냐?’ 모세도 ‘아냐, 나 사람 죽이고 도망나왔어. 왜 너희들은 나를 그렇게 봐? 나의 실체를 보고, 나를 그렇게 만지신 하나님을 봐!’ 그럴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자꾸 존경하려고 해.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나’ 있거든요. 그게 인본주의입니다.


그렇게 크로노스의 땅이 카이로스의 하늘적인 것으로 깨달아지면 그 상태가 하늘과 땅이 하나된 상태, 즉 연합의 상태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이 아래의 물이 위의 물로 깨달아지고 위에 물이 있다,라는 게 아니에요. 그 진리, 그걸 아래의 물로 설명해 주니까 그냥 위의 물이라고 우리 수준에서 설명해 주는 겁니다.


아래의 물이 위의 물로 깨달아지면 그 아래와 위가 연합되는 겁니다. 성경이 그걸 짝이라고 해요. 어두움이 빛으로 이해되어지면, 어두움을 통해서 빛을 알면, 그 어두움이 그 빛이 되네? 그걸 짝, 연합이라고 해요. 짝은 반드시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창세기 1장의 자칼과 네케바의 이야기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남자는 반드시 여자 안으로 들어와 여자의 반쪽으로 붙어서 사람,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셋째 날의 완성입니다. 창세기 셋째날에 씨 이야기가 나오죠? 제라, 그 씨를 가진 자, 이것이 이제 땅에서 완성이 돼야 하는데, 그게 바로 자칼과 네케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잖아요.


둘은 반드시 하나로 연합이 되어 비로소 완전한 존재로 존재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담아서 하늘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그걸 바로 완성이라고 해요. 


이 땅, 대륙, 나라 이름은 다 여성형입니다.

아시아, 아메리카, 코리아, 오세아니아, 브리타니아, 인디아.. a로 끝나면 전부 여성형입니다. 아메리카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여성형으로 변형된 겁니다. 하늘만 남성입니다. 


그러니까 땅, 여자가 하늘의 그 씨, 진리를 받아서 그 아들로 태어나면 그걸 연합이라고 해

요. 그걸 생명이라고 해요. 엄밀히 말해서 땅이 씨를 받아 어미가 죽고 아들이 되는 겁니다. 아들로 태어납니다. 땅, 육, 모두가 하늘의 씨를 받아 진리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고, 이 세상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땅의 것 조금, 하늘의 것 조금 내놓아서 연합되는 게 아닙니다. 땅은 하늘로 완전히 함몰되어 들어가야 돼요. 삭제당해야 돼요. 


따라서 크로노스의 죄와 악으로 카이로스의 의와 선을 배웠다면 그 땅의 죄와 하늘의 의가 하나가 되느 겁니다. 그걸 알게 되면 당연히 땅의 죄가 삭제됩니다. 그걸 용서라고 해요. 땅의 어두움으로 하늘의 빛을 깨달아 알았다면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되죠? 그러면 땅의 어두움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냥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은 이 어두움인 이 땅에 살면서 그 어두움이 없는 하늘, 빛만 있는 세상을 여기서 산다니까요. 그것과 관계없기 때문에 그걸 연합이라 해요. 어두움의 삭제.


그렇게 되면 그 존재는 선과 악, 좌와 우, 어두움과 빛... 이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죠? 아담의 상태. 좌 우로 치우치고, 선악으로 치우치고, 빛과 어둠으로 치우치는 선악과 패러다임 하의 아담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가운데로 서게 되는 자가 되고, 그걸 부활이라고 합니다. 선, 악과 아무 상관없는 상태로 사는 겁니다. 착한 사람 되는 게 기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시가서 5편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카이즘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A B C D C B A의 구조. 확장되어 가다가 가운데에 주제를 놓고 다시 축소되어 가는 겁니다. 복음서도 이런 구조입니다. 그래서 쭉 펼쳐져 가다가 가운데에 핵심적인 걸 놓고 다시 그걸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운데가 주제입니다. 성경의 가운데는 시편, 시가서입니다.


그러니까 시가서 5편이 성경 전체의 주제, 그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전부 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관점으로 시가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시가서 5편 중 첫 번째인 욥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의 시작, 아주 초보적인 단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욥을 본받자’가 아닙니다. ‘41장 이전의 욥처럼 살면 지옥 간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을 들어쓰지 않고 아브라함을 들어서 ‘믿음은 이런거야. 하나님의 씨를 받은 하나님 백성은 이런 거야.’ 하고 설명했단 말입니다.


너무 버거워서? 아닙니다. 그건 구원의 초보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욥은 아주 율법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는 잔치를 벌이고도 제사를 지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매일 같이 제사를 지냈어요. 무슨 결벽증 있는 사람처럼.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죄를 멀리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 죄를 가지고 하늘을 알라고 했더니 그걸 자꾸 멀리만 해. 그러고는 ‘나 잘 했죠?’ 했어요.



욥1:4-5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해서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나 같으면 잔치 다시는 안 할 거 같아요. 잔치 때마다 사람 수대로 짐승을 죽여서 피를 내어 제사를 지내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아세요? 잔치 한 번 하면 꼭 아버지가 불러다가 이렇게 제사지내는 겁니다. 정말 제사를 열심히 지내면 죄가 용서됩니까? 그러면 히브리서는 찢어버려야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욥을 본받아야 할 욥이라고 일단 그렇게 시작해요. 성경은 이런 욥의 상태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되는가를 보여줘요. 


율법적인 사람들은 반드시 크로노스의 세상 것에 묶여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욥입니다. 성경은 그걸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욥을 고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이런 걸 보고 ‘하나님 나라에 사탄도 있나?’ 묻는데, 성경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요. 사탄, ‘사타나스’는 비진리, 대적자, 진리의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비진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가를 욥을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과 사탄이 짜고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것처럼 보여요. 하나님은 이렇게 그냥 막 갖고 장난쳐도 됩니까? 아들까지 다 죽여버리고 재산 다 뺏어버리고 독종까지 나게 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 갖고 장난치는 이야기는 아닐 거 아닙니까?


비진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욥에게 그가 원하는 세상의 풍요를 다 허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의인답게 살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하면서 “그거 한 번 다 뺏어보세요.“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죠? “그래. 가서 다 뺏어 봐.” 우리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해 주고 싶은 겁니다.   


‘지금 너희의 신앙생활 속에서 내가 욥처럼 다 뺏어버리면 너희 같으면 어떻게 하겠니?’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사탄의 모함이 아니라 욥의 신앙이 그 수준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크로노스적 시간에 머물면서 그 물리적 세계 속에 갇힌 인본주의 속 아담, 그것이 이런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주를 받은 사탄이 욥의 재산과 가족을 몽땅 쳐버립니다. 이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내가 검으로 왔다. 뭘 자를 지 알아? 이거 자르러 왔어.’ 했을 때 말씀하신 항목이 거기에 다 들어가 있어요. 예수님도 그거 자르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잘라버렷습니다. 그때 욥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났은즉(모태는 항상 어머니의 자궁, 옛성전을 가리킵니다)

적신이 나욌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라 


어마어마한 고백이죠? 그런데 모태에서 적신이 나와서 다시 그 옛 성전으로 들어가는 게 진리입니까? 인간은 그 적신으로 다시 돌아가면 죽습니다. 그 적신은 반드시 삭제당하고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고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율법주의 아래에 갇혀있는 이들은 이 육신이 굉장히 가치 있어요. 이 호 코스모스 아래 세상이 굉장히 가치 있어요. 그래서 모태에서 나온 적신이 적신대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겁니다. ‘그 몸 갖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뺏어간 거 있잖아요, 지금.


자식들, 재산, 뭐 이런 거. 그걸 하나님이 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취해가셨다고 해요. ‘이건 자기에게 너무 가치있는 거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취해가셨다.’라는 건 ‘하나님이 그게 정말 내 생명과 관계있는 소중한 것이라서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다시 취해가실 만큼 가치있는 거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지고 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거 가져가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오셔서 가져가실 건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생명, 그 진리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만 데리고 가세요. 하나님이 왜 여러분의 재산, 자식을 갖고 가십니까? 어디에다 써먹을려고? 그런데 인간은 그게 가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 하나님이 가져가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깨져야 할 거지, 우리가 본받아 고백해야 할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사탄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하실 때는 ‘그 몸도 쳐 봐라’ 하세요. ‘욥이 지금 적신으로 나한테 온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그 몸뚱아리도 치면 이제 뭘로 올건지 한번 보라’는 겁니다. 


대신에 ‘생명은 내 거다. 그건 건들지 마라’ 하세요. 하나님이 찾는 건 그겁니다. ‘그건 내가 준 게 맞아.’ 나머지도 사실은 하나님이 준 거죠. 그런데 ‘그건 내가 생명으로 준 건 아니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져서 낭패를 당한 거라고 충고해요. ‘네가 죄를 져서 그런 거야!’ 이게 다 굉장히 우리의 선악 논리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이 한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니까요. 도덕 윤리로 읽어보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것도 이들이 한 이야기죠?    



그들은 죄의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가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의 우리 육, 나의 유익, 그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원인이라는 엉터리 신앙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의 흥망성쇠 뿐 아니라 그것의 연장선상으로 구원도 주어진다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왜곡된 개혁주의 신앙관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임이 폭로가 됩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졋다고 나를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내가 지나가는 여자에게 음욕을 품었습니까? 재물에 대해서 탐욕을 가졌습니까” 막 따집니다. 똑같죠?


진짜 아니라면 그 까짓 것 가져갔는데 왜 따집니까? 관심이 있었으니까 따지는 거죠. 그게 율법주의의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언제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십니까?’ 이게 인과율에 사로잡힌 크로노스의 세상 속 아담들의 율법주의입니다. 복음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구원은 인과율에 의해서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취되는 겁니다. 


지금 욥은 은연 중에 자기 마음 속에 ‘내가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그렇게 열심히 죄를 멀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면 안된다’라는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진리를 설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이 땅입니다. 세상입니다. 어둠입니다. 그 속에는 죄도 있어요. 그 땅을 그냥 땅으로 인식하면 그걸 죄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우린 그 땅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크로노스의 것으로 하늘의 것, 초월의 것을 깨달아 알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무조건 어두운 거, 땅의 것, 이건 악한 것, 하면 안 될 것, 가요는 부르면 안되는 것,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런 거는 불러도 되는 것. 하나님은 그걸 통해서 하늘의 것을 알라고, 진리를, 당신을 내용으로 담아 이 땅에 주셨어요. 그게 성전, 성경, 예수였고, 세상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무조건 악하다고 해버리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걸 성경이 마귀라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러는 겁니다. 그 말은 너희가 마귀 새끼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 그건 너희들이 악하다고 하는 그것 안에 들어가 계신 그 분인데, 그러면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네? 그러면 너희 아비는 마귀야.’ 


그게 율법주의, 선악과 패러다임 하의 그 인본주의, 율법주의를 향해 일갈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야, 너희 하나님은 바알세불이야!’

그렇겠죠? 바알세불이 어디 있어요? 

바울도 그래요. ‘무슨 우상이 있냐? 그런 건 없는 거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굳이 그런 이름을 들먹이며 이야기 하시겠어요?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그거 바알세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희들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너희들 앞에 있게 하지 말라.’ 그건 다른 신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그게 우상 섬김인 겁니다. 


하나님은 진리라는 내용을 담아서 세상과 땅을 주셨습니다. 빛이라는 내용을 담아 어두움을 주셨어요. 그런데 그걸 내용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나쁘다, 악하다, 더럽다고 판단해 버리면 그 안에 내용으로 담긴 하나님이 악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그 세상 임금으로 죽을게’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그 세상 임금, 그 율법으로 죽을게. 그래야 너희가 진짜 아버지, 그 진리, 그리스도의 영을 만날 수 있잖아’ 이렇게 말하신 겁니다.


욥기 36장에 엘리후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욥기 36장15절에서 ‘하나님은 고통이란 걸 사용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고, 그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귀와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거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해요. 


‘당신들은 이 고통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것 안에도 메시지를 담아서 무언가를 전달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왜 이거에만 묶여서 이것이 옳으니 그르니,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느니 안 되느니,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왜 크로노스의 사건 속에만 묶여 있느냐’는 겁니다.)

‘당신이 뭘 잘해서 그런 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다.’


그런 건 사단이 주건, 뺏어가건 하나님은 ‘I don't care.' 아무 상관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온통 교회가 거기에만, 하나님은 아무 상관 안 한다는 그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이 참으로 찾으시는 그 생명에는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이 사단에게 시켜서라도 ’야, 그거 쳐서 가져가, 다 가져가‘ 하는 그것만 다들 안달복달하면서 붙들고 있다니까요.


엘리후가 ‘땅의 자원, 땅의 회개로는 절대로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못을 박아버려요. ‘하나님의 죄 사함은 이 크로노스의 땅의 것들, 땅적 차원의 열매와 노력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걸 천명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드디에 38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세요. 그리고는 뭐라고 하세요? 그게 우리가 공부하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욥38:1

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알지도 못하고 누가 이렇게 까불어?)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진리의 띠로 허리를 묶고 내 말 잘 들어. 그리고 대답해.)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욥39:1

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알죠. 나열한 것 중에 욥이 아는 게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이 진리로 담은 그 내용, 그거 아니? 하시는 겁니다.)

욥38:32

32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열 두 궁성(12궁도: 궁수 염소 물병 물고기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은 3개씩 되어 있죠? 그걸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놨는데 그걸 따라가면 그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12 궁성. 


‘내가 거기다 무슨 이야기를 심어놓은 건지 알아? 그런데 그런 거 하나도 모르면서 뭘 가지고 나를 탄핵하겠다는 거냐? 네 율법적인 사고, 네 이성, 그 수준 가지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네가 탄핵하는 거냐?’ 

‘선악과 따먹은 알량한 네 뇌로 나를 지금 가늠하고 나를 판단하느냐?’

‘내가 천지만물 안에 심어둔 그 메시지, 그 진리가 뭔지 알아?’


모르죠. 그러면서 제사만 열심히 지내고 있었다니까요. 

다 듣고 나서 욥이 그럽니다. 하나님이 이제 말씀하셨으니까 뭔가 알았을 거 아니에요?



욥42:3-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욥이 드렸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을까요? 아무 것도 모르고 제사만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걸 흠향하시고 복을 주셨겠어요?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아무 상관 없는 거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이건 오역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잘 번역해 놨어요.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샤마, 내가 말하겠다. 대답해라. 내가 묻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들어라. 그리고 대답해.)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여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호라오 합니다. ‘아, 주님은 이런 분이군요.’ 

그 천지만물에 담긴 그 진리를 설명해 주시자 ‘아 그렇군요. 하나님 그런 거였군요. 제가 몰랐습니다. 모르고 인간의 지혜로 까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 그 진리를 네가 가졌다면 이제 그걸 누군가에게 흘려주고 그들을 용서해야지? 네가 기도하면 쟤들도 산다.’ 하시는 겁니다. 친구들도 똑같은 놈들이라는 겁니다. 네가 기도하면 저들도 산다. 이게 우리 이야기입니다. 중보자의 역할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버린 진리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그 진리를 독백처럼 이렇게 흩날리는 걸 ‘시편’이라고 합니다. 시편은 시로 된 책이 아니라 독백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저들은 왜 저렇게 살아요?’

‘세상은 왜 이래요?’

‘하나님이 들려주신 건 이건데, 왜 저들은 아직도 저래요?’

이러한 독백, 이것이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걸 진리로 가진 이들이 진리 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잠언입니다.

그러면 그 씨를 가지고 이제 해 위의 진짜 해. 그리고 그 진짜 새것-성경에서 새것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새것입니다. 완료-을 안 이에게 해 아래 이것들은 ‘아, 이건 다 모형이네. 그러니까 해 아래 새것은 거기에 없는 거네.’로 이해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허무 vanity'라고 하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네.’

‘난 이 껍데기가 같이 있는 건줄 알았는데 그 새것, 그 진리를 알고 나니까 헛되고 헛되네.’

이게 전도서입니다.   


그걸 알았어요. 헛되고 헛돼. 그래서 이제 그 하늘의 것에 내가 연합이 되면 그걸 짝,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짝, 아가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여자를 내 비둘기라고.. 짝이란 뜻입니다. 짝, 내 비둘기야.

그러니까 시가서 다섯 개는 하나님의 그 말씀, 성경 전체를 그냥 알기 쉽게 풀어놓은 겁니다. 이걸 교훈적인 도덕과 윤리로 읽어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가치 속에서 진짜 가치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되고,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되고, 세상 속에서 그 묵시의 완료를 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율법을 그냥 행해 버리면, 예수를 그냥 섬겨버리면, 어떻게 믿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그냥 믿어버리면, 세상의 가치에 장악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겁니다. 주님은 그걸 멸망의 가증한 것, 우상숭배라 하세요.


막13:14-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서지 못할 곳은? 성전)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다니엘서에 나오는 겁니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멸망의 가증한 것, ‘브델뤼그마(가증한 것)’는 우상을 말합니다. 지긋지긋하게 싫어. 

[쉭쿠츠/ 브델뤼그마는 '몹시 싫은 것, 가증한 것, 우상'을 의미하며, 항상 우상 숭배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되며, 하나님 보시기에 밉고 가증한 것이라는 뜻으로서 우상 그 자체를 언급할 때나 또는 우상 숭배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을 언급할 때 쓰인다.]


그동안에는 이 율법, 그리고 율법으로 보이는 도덕과 윤리로서의 성경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매일 큐티하는 걸내 낙으로 삼았어요. 오늘도 난 지켰습니다.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나니까 그 삶 자체가 얼마나 큰 위선이며 죄인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성전의 자리에 그것이 이제 내게 지긋지긋하게 싫은 것, 우상 ‘브델뤼그마’로 보이면 유대에 있는 자들아! 그 산, 진리의 참성전으로 도망가라!는 겁니다.


‘그 성전이 선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서 있으니까 이제는 마지막 때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 뭐가 서있건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은 그거 없애버린다고 하셨는데. 그건 이미 자기 역할을 끝내고 돌 위에 돌 하나 남김 없이 전부 파괴됐잖아요. 


돌 위에 돌. 예수. 그 껍데기로서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AD70년, 완성의 해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타이타스에 의해 박살이 났어요.


예루살렘은 산성이었기 때문에 로마군대도 못 쳐들어 갔어요. 원래는 베스파시안이 공격하다가 전쟁 중에 황제가 되는 바람에 아들이 꽁꽁 둘러싸고 포위해서 그 전쟁을 완결시켜 버려요. 거기는 산 위, 반석 위에 지은 거니까 물도, 먹을 것도 없어서 자식을 잡아먹었어요. 요세푸스의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먹다가 누가 보면 또 싸움 나고.. 그냥 귀신들의 소굴이었어요.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겼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너무 소중하게 여겨서 성전 벽돌 사이에 전부 금을 깔아놨다고 헛소문을 퍼트려서 다 깨버렸어요. 법궤도 다 벗겨 갔어요.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 찾아서 뭐할건데. 다 박살났어요. 그걸 왜 찾아. 그 역할들은 이미 끝났어요. 


그렇게 이 세상을 모형하는 옛성전, 그 예수까지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박살나고, 진리의 영이 오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성전으로 만들어 놨다니까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러분은  그 아랫것, 그 율법은 바로 그렇게 지긋지긋한 우상으로 보여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에 있는 자들아, 율법주의 속에 빠져있는 자들아, 그 산, 참성전으로 도망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도망 와 있잖아요. 율법주의에 치여 가지고 하나님이 롯에게도 ‘그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세요. 소돔과 고모라에 있지 말고 도망쳐. 


창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산으로 rh' (2022 하르) hr:h;h; 관사-명사  남성  단수-방향표시,  그 산으로 


온 세상 천지만물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예수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당신들을 진리로 설명해 주기를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그들을 진리로 읽어낼 수 있는 그 눈을 가졌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의 희로애락, 흥망성쇠에서 좀 자유로워지세요.


제가 여기에 히브리어 몇 개 적어놨는데요.

 tyviarEB] 베레쉬트. 성경의 첫글자입니다. 이 안에 성경이 다 들어 있어요. 

B 베, 히브리어 두 번째 글자.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일부러 우리에게 첫 번째 글자를 안주세요. 


r 로쉬가 머리, 그 머리를  t 완성해서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그런데 머리는 예수.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죠? 예수님 자신이 머리, 말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 



성전으로 시작해서-그 성전은 이 세상에 진리를 담아주신 모형 전체. 그걸 성전이라고 해요. 이 아랫것으로 시작해서-그 머리, 그 말씀을 완성하여 넘겨주는 게 성경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이 ‘베레쉬트’ 안에 모든 성경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한 자 한 자 나눠도 그렇고,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성전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이 분석해서 완성하여 우리에게 넘겨주신다, 이것도 됩니다.


‘바라’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가지고 고걸 분석하여 완성해서 우리에게 넘겨주신다. 

그런데 창조라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성전으로, 아랫것으로 시작해서 우리에게 주는데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그 성전, 이 아랫것들, 이걸 성경이 ‘창조‘라고 해요.

그런데 ‘창조하다 ar:B;’는 3인칭 남성 단수동사입니다,

그리고 주어인 엘로힘은 남성복수입니다.


주어와 동사가 서로 수가 안 맞아서 엘로힘은 바라의 주어가 될 수 없어요. 

바라의 주어는 숨어 있어요. 이분이 누구인지 이야기 해줘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몰라요. 무(無)로밖에 인식을 못하는 분이라 성경이 아예 주어를 생략해 버려요.


‘아마르’라는 단어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할 때도 주어는 항상 생략되어 있어요. 

그러면, (엘로힘이라는) 이 주어는 여기에 그냥 놔두고요.

그 하나님, 그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진짜 그분이 시작을 하셨어요.

이 아랫것으로 설명하고 분석하여 우리에게 넘겨주기로 시작을 하셨어요. 


그래서 뭔가 눈에 보이는 걸 만들어내야 돼.

그래서 그걸 ‘바라, 창조’라고 해요. 그 바라를 통해서 뭘 준다고 했는데, 그 진리의 내용이 뭡니까? ‘누군지 모르는’ 하나님이죠? 그게 엘로힘입니다. 우리의 수준에 맞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아랫것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그분.


그래서 그걸 하나님이 태초에 ‘엘로힘’으로 그 하나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를 하셨는데,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에레츠’ ‘그 하늘들과 그 땅’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그것은 잘 모르니까 땅으로 내가 설명해 줄게, 하시면서 2절에 ‘땅은’ 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 땅으로 이 하늘을 알면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게 되겠죠? 그게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 땅의 것으로 이 하늘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땅이 악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여기에 묶이고 여기에 멈춰버리면 그걸 ‘죄, 악’이라 하셨지, 땅 자체를 악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은 어둡고 혼돈이고, 공허였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채워줄게, 빛으로 보여줄게.’ 

그걸 알라는 거지, 너희들이 선악과 따먹고 이건 악한 거, 필요없는 거, 너희들이 뭔데 그러느냐는 겁니다. 욥이 그렇고 세 친구가 그런 겁니다. 율법주의가 그러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소라는 단어가 3개 나옵니다. 

‘a알레프’를 설명해 드릴게요. 애굽에서 430년을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신 하면 떠오르는 건 소 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의 ‘라아’라는 신의 땅적 현현이 소였습니다. 그래서 소로 설명하는 겁니다.


알레프라는 소, 바카르라는 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바카르는 ‘일하는 소’입니다. ‘성전에서 부수고 다시 세우기 시작하는 하나님’이 바카르. 알레프는 우리가 모르는 이 소를 아래의 것으로 이 위의 하나님을 알면 그걸 토르라고 해요. 이 ‘토르’라는 소를 비둘기라고도 해요. 


요나도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도 내 짝으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그 니느웨 성에 구원받으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그 인간들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내가 너같은 놈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려낼 것이다. 요나야, 네가 내 짝이 될 것이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가 끝까지 하나님께 투덜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겁니다.


이걸로 위의 것을 알아버리면 이 토르가 됩니다. 토르가 토라,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아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 토라, 성경을 통해서 알아 ‘아, 하나님이 이렇게 해서 이 아래를 창조하신 거구나’라고 알면 그 피조물들을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이거고, 이게 이거고’ 이렇게. 그게 ‘아담이 만물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말의 의미인 겁니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너희들의 이름, 너희들의 내용은 이런 거야’ 이게 우리, 그 아들들이 하는 일입니다.

돌, 에벤 @b,a이 ‘하나님 a + 아들 @b,=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써놓고 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에벤이 ‘아버지 b,a +아래(것, 에 계신) @ =아래로 오신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네요.


아버지와 아들, 성경은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이야기 하지 육신적 아버지와 아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알면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유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 호 코스모스, 이 아래의 세상에서, 이 시간에서 자유러워질 수 있어요. 거기에 묶이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것으로 희로애락이 결정되는 데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진짜 강한 자는 세상이 강한 척 할 때, 자기 앞에서 거들먹거릴 때, ‘그래, 그러면 너 강한 거 해’ 하고 약자가 되는 게 진짜 진리를 안 센 자입니다.


세상이 ‘이게 강한 거야, 이게 가치야’라며 우리를 미혹하려고 할 때, 시험에 들게 할 때, 진짜 참된 가치를 아는 자는 조용히 낮은 자리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웃는 겁니다. 웃는다고 또 때려? 또 주워주고. 잘 안되죠. 그러나 진리는 그만큼 가치있는 겁니다. 이 육적가치에서 풀려나게 할만큼 가치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말씀을 배워서 그리로 한발 



한발 가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는 진짜 가치 있는 게 뭔지 잘못 판단하여 그걸 향햐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 화 내고 분내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주어지면 기뻐서 희희낙락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자기자랑 앞에서 그냥 묵묵히 웃으며 만두를 주워줄 수 있는 그 생활이 우리에게도 경험되어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