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95-모든 것이 선물인 이유 롬 8 :31-32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55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지난주에 성도의 모든 현실이 전부 선물일 수밖에 없음을 공부를 했습니다. 성도의 존재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독사조는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한다, 라는 뜻이며 그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나타낸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화롭게 함’ 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엉뚱하게 내가 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엉터리 영광을 나타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롭게 함’, 독사조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성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심입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카라,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했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시작은 미리 정하심입니다.

 

 미리 정하심의 단어의 뜻이 성전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이미 넣어 놓으셔서 결정해 버리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미리 정해짐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한 미리 정해짐이라는 것입니까? 맨 마지막이 영화롭게 함이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미리 정해짐 인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성도의 미리 정해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 성도라는 구별된 무리가 미리 정해져서 이 역사 속에 존재해야하는가? 의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해섭니다. 그런데 그 영화롭게 함, 독사조의 주도권도 성도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성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됨됨이나 우리의 재주로, 우리의 성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살면 되니? 적어도 네가 이 정도는 살아주어야 아버지인 그 분이 영광스럽지?’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과 역사라는 도화지에 당신의 영광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독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영광의 발원지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그것이 내가 내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시작이고 그렇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먼저 영광을 돌리면, 아버지가 아들의 영광을 그려내면, 그 영광을 육신에 그려내는 그 아들을 통해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라고 합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미리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존재 목적입니다. 심지어 스님들이나 이슬람 사원의 선생들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선택 밖의 존재들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롬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이미 정하신 이)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나기도 전에 미리 정했습니다.)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아무 것도 안했는데 이 역사 속에 탄생도 안 됐는데 이미 미움으로 유기된 자와 사랑으로 선택된 자가 있더라, 라는 것입니다.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의 뜻)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다른 곳에서는 열심히 달려봐라 이미 우승자는 결정이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그 긍휼, 엘레모 수네, 그 사랑 그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나타내기 위해 미리 정해진 어떤 존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뭘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습니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심지어 바로까지도 그렇습니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바로는 뭡니까? 바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그려내는 도화지에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성경이 바로를 강팍하게 했다고 합니다)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그러면 누구는 지옥 보내고 누구는 천국 보내는 것이 말이 됩니까? 라는 뜻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며, 왜 악한 자라고 그를 규정을 해 놓아서 그를 지옥을 보내? 그것이 말이 돼?’ 이러한 말입니다.)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0~21절 말씀은 위에 15절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말씀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증거하는 그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이 여길 것은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는 불쌍히 여겨 그리고 사랑할 자는 사랑해, 그것은 하나님 마음이야 하나님이 주인이고 그 분 만이 신이니까’, 를 내가 인정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목적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그 나라는 주체성과 독립성을 오히려 부정당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자리가 기독교 신앙인들의 목적지입니다.

 

어떤 이는 지옥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어졌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 그것이 선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 자리가 우리가 끌려가는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광이 아닌 피조물의 영광, 즉 사람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것이 율법주의이며 인본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런 자들은 열심히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가 사람의 잘남, 보편적 아담들의 자존심을 높이 향상하는 데에 자신의 시간들을 올인하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려내는 영광이 아닌 것은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것도 아버지가 원하시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들의 현실이며, 추구점이고 지향성입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영광과 대조되는 사람의 영광을 율법이라고 명확하게 기술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감지가 되는 영광입니다.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그렇지 그것이 가치지, 저것이 영광이지’ 하면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는 것으로 감지가 되게 되면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반드시 사람에 대한 칭찬이 수반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구약이고 인간들이 중심이 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경전을 깊이 뿌리까지 잘 이해하고 공부해보면 전부 구약입니다. 신약으로 연결이 안 되는 구약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은 사람들의 가치 기준에 근거할 때에 절대 영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부정당하고 부인되는 것이 어떻게 영광으로 보입니까? 그것은 실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영광은 홀대를 당합니다. 인정도 못 받습니다. 그것은 아담으로써의 나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치를 인정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것을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영광이야, 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대표가 되어 죽으신 예수의 인생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영화롭게 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하셨던 기도 있죠? 거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독사, 영광입니다. 무슨 영광이 아들을 죽이는 영광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영광입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독사, 영광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은 미리 정하셔서 영화롭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표이신 그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그를 살인자와 바꾸어서 저 것, 제일 나쁜 놈이야 라고 하며 죽여 버리더라, 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에 매달아서요.)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육으로 죽었더니 영으로 살아나서 당신의 그 형제들에게 들어가 버리셨네, 그것을 살았다, 라고 합니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이름은 말씀, 쉠입니다)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이것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받은 것, 즉 예수가 내용으로 갖고 있던 그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믿음이 낫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쳤더니 사람들이 그들이 행한 그 일을 보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데 그 기적을 보고 헤메라 수스라하여 신의 이름들인데) 그들을 추앙하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려버립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이 일을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니?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아들을 아버지가 영화롭게 했더니 그 아들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서 한 일과 그 육신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 진리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추앙하고, 그것을 기념하고, 그것을 신기해하게 여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자기들이 부각되고 자기들이 칭찬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 믿음이 부각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바로 그러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금 그 앉은뱅이의 자리에서 일어난 것 뿐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거지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앉은뱅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콜로스, 절름발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자들아 내게 오라 할 때에 그 저는 자를 말합니다. 다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저는 자는 그는 자신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불구자나 몸에 흠이 있는 자는 절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부정한 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긍휼, 엘레모수네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하는 모형으로 긍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산상 수훈에서 배운 것처럼 구제할 때에 ‘너희들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것은 오른 편이 하는 것을 왼 편에 있는 자들이 당연히 모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손이라는 단어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구제가 뭐냐 하면 오른 편에 있는 그 자들, 하늘의 존재들이 흘려주는 그 사랑 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흘려주었을 때에 그것을 진짜 구제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배고픔에서 건져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는 그 구제를,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누구의 구제 행위가 없으면 절대로 거기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자의 모형입니다. 그 때에 그 긍휼, 엘레모수네를 가진 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 3:1  제 구 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신으로 죽은 시간이며 누가가 일부러 그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긍휼을 구합니다)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은과 금은 단순히 재물, 돈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과 금은 성전에 기명이나 기구들을 만드는데 재료였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그 성전을 이루고 있는 율법을 열심히 행하면 그것이 나에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것을 비유해서 보여줍니다. ‘너 지금 은과 금을, 그 율법을 네가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하고 있는 것 아니니? 그것을 구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니?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없어. 그것은 내가 줄 수 없어’ 그것을 갖고 있는 이들을 성경이 부자라고 합니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힘든 것이 그 부자입니다.)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무엇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의 말씀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줄 것이야. 그것이 말씀이고 믿음이며 은혜입니다)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여기에서 금과 은, 그 율법, 그 율법을 행하는 나, 율법을 의지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려 했던  어떤 이가 이 성전 문 앞에서 부정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 순전히 은혜로 성전에 들어가네요. 성한 자가 되어서 들어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영광을 나타냈더니, ‘너희들이 왜 우릴 보고 신이라고 그래?’ 그럽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가 영광을 받자 영화롭게 되자 그렇게 죽었잖아’, 라고 합니다. ‘아무도 못 알아 봤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칭송을 하고 나를 칭찬을 하면 너희들은 엉뚱한 것을 본 것이다’, 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못 봐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나의 행위를 보고 나를 칭찬하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존재가 되고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호령하는 어떤 이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이렇게 잘되었다, 고 보여주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상 만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못 알아봐야 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박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너는 부정한 자라 절대 성전에 못 들어가 그러나 말씀이 너 안에 들어가면 네가 은혜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면 너 겉모습과 상관없이, 네 외모와 상관없이 너는 은혜의 사람으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이 뭔지, 생명이 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롭게 된 아들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육신과 행위를  부정당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그 사랑, 그 말씀 ,그 약속을 부각시키는 도화지로 영광을 그려내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에 동의가 되는 이들에게 도대체 뭐가 너희를 절망시키고 실망시키는 일이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강세를 두고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너희들이 진짜 인정을 한다면 뭐가 실패냐? 도대체 뭐가 너희들을 대적하여 준다는 것이냐? 이럽니다. 그것이 미리 정해져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그것을 내가 나타내는 자로 내가 사는 것인데 도대체 누가 자기를 들어 공치사를 하냐는 것입니다. 누가 자랑을 합니까? 미리 정해진 것을 그려낸 것 뿐 인데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고 안 그러면 못 받는다고 그럽니다. 왜 이 선악 패러다임 안으로 자꾸 들어가려는 것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그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시선을 돌려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 목적지 인 것이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내가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두 눈을 감을 때에‘ 하나님 저 이 정도면 잘 살아낸 것이죠?’ 라는 고백이 아니라, 그리고 후대들에게는 ‘너희도 나 같이 살아 그러면 만족과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단다.’ 이런 비결을 전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의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봐도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쓰레기입니다. 그 은혜 찬송하고 찬양하면서 떠나는 것이 성도의 마지막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전 미문에서 구원을 받은 절음발이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긍휼을 가진 어떤 이가 와서 나에게 와서 ‘들어가’, “일어나” 라고 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은과 금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그 성전, 그 율법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 ‘일어나’라고 했을 뿐인데 일어났다, 라는 것입니다.

 

 날 때에부터 소경된 자가 하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많이 물어보니까 ‘몰라요, 모르는데 나는 예전에는 못 보았는데 지금은 봐요’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꾸 누굽니까? 라고 물어보는데 모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예전에는 못 봤는데 보는 것만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고 말아요. 수많은 소경 중에 제일 착한 소경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꾸 나의 자원과 재주와 능력과 자격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짓 믿음이라고 합니다. 진짜 진리를 가진 성도로써 이 율법 즉 도덕과 윤리를 이제 ‘내가 다스려야지’ 라는 그런 상태에서 하는 것과 뭔가 두렵고 공포스러워서, 그것을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하고 노래방에 가서 술 한잔하는 것 뭐 그것 진리를 아는 자로서 뭐가 대단히 잘못된 거야.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떤 이들이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혹시 내가 전하는 그 진리를 홀대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지 뭐, 하는 것은 내가 그 도덕과 윤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성도의 자유는 그 위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말씀을) 영광스럽게(독사조)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아주 그냥 영광으로 도배를 합니다.)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제 영광을 그려내야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다, 고 하는데 이 세상은, 세상의 대표로 온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서 ‘내가 세상에서 쫓겨나면‘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여기에 속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의 대표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세상의 대표이면 세상 임금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들의, 세상의 대표로 마귀 새끼, 사탄 이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대표로, 임금으로 이 땅에서 죽으면, 들리면, 육신으로 죽어버리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세상 임금의 심판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죽을 것을 이야기 한 것이야, 라고 합니다.)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믿으라고 했으면 빛이 있을 동안에 계속 빛을 비추어 주어야지 왜 숨습니까? )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것은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했는데 사람들이 저를 안 믿었다, 그럼에도 말미암고 안 믿어? 이런 말이 아닙니다. 왜 그렀습니까? 성경에는 그 표적을 보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하는 말이 무수히 많이 나오거든요. 이 말의 뜻은 원문을 보면 많은 표적을 행했는데 원리적으로는(형용부사가 있습니다. 부정어입니다.)‘그것을 보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야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왔다고 하면서 ‘너희들은 이 빛을 못 봐, 하나님의 은혜, 그 도움이 없으면 너희들은 못 봐’, 그래서 ‘빛이 있을 때 그 빛을 믿어라’ 그래 놓고는 본인이 숨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못 봅니다.  왜? 많은 표적을 행해도 그 표적을  보고는 우리가 절대 못 믿는 다는 겁니다. 나타난 것을 보고는 절대 우리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타난 것, 많은 표적 안에는 예수라는 육체도 들어가 있습니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아무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때에, 모든 선지자의 시대 때에 나타난 그것을 아무도 못 믿고, 그것을 믿음으로 못 가져가더라는 겁니다. )

12: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누가요? 하나님이요.)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이 그것을 원리로 정해놓았다, 고 합니다. 보고는 못 믿게 말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내가 네 안에 쑤셔 넣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 분의 인생이나 그분의 십자가를 보고는 아무도 못 믿도록 하나님이 원리로 정해 놓았다, 라는 것을 이사야가 미리 성경책에 적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

12: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그러면 그 위에 원리로 많은 표적을 행하였으나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원리적으로 안 된다, 라고 써 놓은 그것과 이 말씀이 충돌이 됩니다. 그러면 봅시다. 이 관원은 알콘, 세상 임금이라는 그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임금이라는 대표로 죽었는데 그 세상 임금이라는 어떤 이들이 그것을 보고 믿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보십시오. 바로 밑을요.)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 말을 못하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율법주의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더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해도 믿을 수 있다? 천만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그 세상 임금, 알콘 이라는 자들이 믿었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의 교회라는 곳에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전부 그렇게 믿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인간 세상에서 홀대 받고 가치 없는 자로 평가 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 진리, 그 말도 못하는 자들 삶의 영광, 사람의 영광(그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이 좋아 하나님의 영광, 그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러면서도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는 자들은 가짜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에레츠)가 어떻다, 라고 하냐면 토후, 그리고 보후, 그리고 호셰크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창조했다고 하냐 하면 ‘그 땅에 것으로 그 하늘을 알면 너희들이 하늘이 되는 것이야’, 그리고 ‘그 하늘이 뭐냐 하면 엘로힘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땅을 아래의 것들을 통하여 나타내어 우리에게 주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냐 하면 토후, 혼돈 이라고 하고, 보후, 공허라고 하고, 그것을 뭉뚱그려 호셰크, 흑암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 본문 요한복음에서 ‘너희들 어두움에 다니지 말아라’, 라고 했습니다. 또 ‘여기에 붙잡히지 마’, 라고 했습니다.

 

붙잡힌다, 라는 것이 뭔지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땅에서 잡기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낚아 올리는 것, 낚시 바늘을 형상화해서 만든 글자입니다. 그러면 땅을 성전이라고 해도 되고 성경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잡기 시작할 때에 나타난 아래의 것으로 진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토후, 완성을 소리로 주는 것이고 보후, 성전을 소리로 주는 것입니다. 완성을 그 소리로 하늘의 참 성전을 그 소리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내용 그 진리로, 그 하늘의 그 진리로 못 알아들으면 그 마임 그것이 혼돈, 황폐한 것이고 그것이 엠티네스, 그것이 공허한 것, 텅 비었다, 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텅 비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혼돈과 공허 그러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할 때에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틀도 없고 내용도 없다고 하지?’ 그런 의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무엇을 창조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소나무 야 있어라, 참나무 야 있어라’ 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까지도 그 이름 하나하나 부르고 있어야합니다. 나무의 종류가 얼마나 많고 미생물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땅을 이렇게 흙을 퍼서 내가 손에 들고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미생물의 수가 전 우주 존재들의 수 보다 더 많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어야 합니까? 어디 언어로 입니까? 방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창조했다는 것이지 ‘소나무 야 있어라, 참나무 야 있어라, 코끼리야 있어라 등등’ 이런 말이 아닙니다. 아담이 나중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담았는데 그것을 내용으로 못 알아먹으면 그것이 토후고 보후야 혼돈이고 공허야, 아무 것도 없는 것이야 그럽니다.

 

나중에 예레미야에 가면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혼돈과 공허고 흑암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너희들은 그 내용, 그 진리, 그 진의로 못 사네, 그러면 너희는 없는 것이야’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이 혼돈과 공허를 뭐라고 하냐면 호셰크라고 합니다. 호셰크는 하나님이 갇혀있다, 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다고 그러면 그것을 죄라고 하고 갇혀있는 그 죄를 분석하여 아래 것으로 받아, 그것을 그대로 율법을, 그 성전을, 그 예수를 그대로 표피적으로 섬기고 그것을 그대로 율법으로 행해버리면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이, 그 성전이, 그 예수가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아가페, 그 은혜, 그 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었군요, 라고 알면 그것을 오르,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뭡니까? 성전을 여러분이 성전 그대로 보고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행해버리면 그리고 희생제사 만 계속 드려버리면 그것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담은 성전이 이 그릇입니다. 성전이 뭡니까? 원래 그 진리를 담은 참인 것, 진리를 담은 것이니까 그 성전이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담은 그릇, 그러나 모형으로 나타난 것으로 준 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짓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 내용을 알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이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성전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여주고 ‘제사 지내, 율법 지켜’ 옷은 어떤 것을 입어야하고 이렇게 가르쳐버리면 그것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내가 이 어둠 가운데 빛으로 왔으니까 이 빛을 알아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의 능력으로 이 어둠을 절대 이 빛으로 못 알아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진리, 그 사랑, 그 말씀을  무상으로 뚫고 들어와 은혜로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성전, 그 율법, 그 성경, 그 예수에 그냥 표피적으로 묶여버리면 그것을 어둠에 붙들린 자다, 라고 합니다. ‘붙들리면 안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 표적을 보고 아직 죽지도 않은 이 예수를 보고 믿는다고 그러니? 너희들이 세상 임금이야, 알콘이라고 그럽니다. 너희들이 세상 임금이고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좋아하는 자들이야, 가짜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을 호 미미쿠스라고합니다. 흉내 내는 존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의 본질 그것을 아주 제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입니다. 호 미미쿠스가요.

 

그렇게 어둠에 붙들린 채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이들의 예수를 성경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행실 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의이다, 라고 합니다. 그 의를 신부의 옷, 흰 색 세마포로 입고 있습니다. 신부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린 양, 남편들도 나타났습니다.)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이것은이 아니고 이들은 입니다.)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홀 로고스 알렛띠노스, 이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자들이다, 라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역사 속에서 그 말씀을 그냥 살아낸 자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리 말씀이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르하흐, 영, 나의 말입니다.)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이제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성사가 됐습니다. 신부들도 나타났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마와 탄자가 나타났는데)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피스토스 알렛띠노스입니다. 그의 이름은 믿음이고 그 믿음은 진리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어린 양, 신랑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백마를 탄 자로 왔습니다. 충신과 진실입니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그는 공의로 싸웁니다. 율법으로 싸웁니다.)

19:12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죠?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그 이름을 자기 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분이 대적하여 싸우는 그들은 이 분의 이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좀 전에 나왔던 그 신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이 백마는 나중에 빨간 말, 적마가 되고, 흑마가 되고 흑마는 기근이며, 적마는 죄입니다. 청황색 말이 됩니다. 시체가 푸르게 되면 청황색입니다. 멸망의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의 의미는 그렇습니다. 말이 육체입니다. )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이거 시편 21편에 나오는 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성전, 율법)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

(율법아 성전아 그 예수를 진리로 남편으로 받지 못한 자들의 고기는 너희들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보십시오. 성전이 예수이고 예수가 말씀이고 그 말씀이 율법입니다. 다 똑같은 것인데 그것을 문자로 만, 표피로 만 보게 되면 그 예수가 심판의 예수, 육체의 예수, 말 탄 예수가 됩니다. 그 말 탄 예수는 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거짓 선생,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전해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그 짐승이라는 단어가 덫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 덫, 그 짐승, 그 거짓 선지자, 거짓말에는 절대 안 속는다는 것입니다.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예수입니다. 오해된 예수, 곡해되어진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이것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죽으매 모든 새가(율법, 성전이)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언제가 일어날 미래의 아마겟돈 전쟁 이런 것 아닙니다.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시간과 관계없는 성경은 아무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일입니다. 여러분의 육신과 시간 안에서 말입니다.

 

이사야 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그 말이라는 것, 말을 타는 예수가 나오고, 철장을 들고 있습니다. 그 말은 육체라고 합니다. 그것을 영이 아닌 육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나타난 모양대로 믿고, 그것을 소문으로 듣고 섬겨 버리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십계명 일번 내 앞에서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들은 대부분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길 거야, 이런 말입니다. 무슨 다른 신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길 거야, 그것은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에 관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요한 계시록 13:1~18절에 나옵니다.

 

계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바다는 창세기 셋째 날입니다. 아랫물을 모아 이것을 얌, 바다라고 한다, 라고 했습니다.)

한 짐승이 나오는데

(짐승은 오해 되어진 예수라고 생각해 보세요. 거짓말을 가리킵니다.)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이름이 있기는 있는데 참람된 이름입니다. 오해된 말씀입니다. )

 

계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수준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여러분은 성부, 성자, 성령을 알고 계시죠? 이것이 오해되면 계시록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용, 짐승, 바다라고 합니다. 역시 짐승인데 땅하고 같은 것입니다. 성령은 이 성자를 설명해 주는 분이니까요. 지금 이것을 여러분이 이렇게 대조하여 이해를 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용, 성자-짐승, 성령-바다. 알지도 못하는 용 찾아서 삼만리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있지도 안은 것을 두려워 떨지 말고요. 그것은 여러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진짜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그 아들과 그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멸망에 빠지면 그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입니다. 오해 되어진 그 존재 그것을 용, 짐승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디 딴 곳에서 준비하고 무저갱의 쇠사슬로 묶여있는 영화에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여러분을 진짜 죽이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가짜 말입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2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준 그 목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름 만 바뀌었습니다. 용, 짐승입니다.)

계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안 죽었습니다. 진짜 아들은 죽었는데 여기는 죽게 된 것 같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손에 못 자국도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도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났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 분이 살아서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카페에 올린 질문에는 주님이 오른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지 않느냐고 질문하시는데 맞습니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 주셨느냐 하면 당시의 여자들 만 부활한 예수를 봤습니다. 근데 못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살아났으면 알아 봤어야 했습니다. 근데 여자들이 와서 주님이 부활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여자들의 말은 거짓말 보다 더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내 말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손과 옆구리를 보면 그 분인 줄 알겠지’, 라고 합니다. 보고 믿겠다는 마음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오더니 아무도 못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지금 까지 전했던 복음을 다시 설명해주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4복음서의 내용을 다 쓸 수 없으니까 평강 에이레네 라는 단어 자체가 그 진리 그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됨이라는 뜻으로, 주님이 에이레네를 설명 해주었더니 뭐라고 하냐 하면 성경이 예수님이 옆구리와 손을 보여 주었다, 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 그 손과 그 옆구리, 그 십자가라는 것은 이 평강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에이돈 하지 않고 호라호 했다, 깨달아 알았다, 라고 합니다. 그것을 봤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손과 옆구리를 깨달아 알아, 십자가 언약의 의미가 뭔지를 깨달아 알아 그 분이 주님인 줄을 알아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이것이 원리이다 그러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너희들이 그 죄를 용서하는 자가 되는 거야’, 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팔의 날에, 부활의 날에 완성된 자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깨달아 아는 자, 호라호 하는 자입니다. 도마도 똑같이 옆구리하고 손을 보면 내가 믿을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똑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고는 ‘옆구리와 손을 보아라 ’ 그러자 도마가 바로 거기서 ‘주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해 버립니다. 옆구리와 손을 봤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 하시냐 하면 ‘너희들이 본고로 믿느냐?’ 이렇게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너는 믿었다’, 라고 하십니다. 너는 호라호 했구나, 라고 완료로 씁니다. 내 말을 듣고 네가 나를 보네, 깨닫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본고로 믿는 자 보다 보지 않고 믿는 그가 복 있는 자야 ,라고 결론이 맺어집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봤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말입니다. 앞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았냐 하면 그 옆구리와 손을 진리로 봤습니다. 깨달아 알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손과 옆구리에 못 자국 있니? 그것으로 믿으려고 했니? 나를 찾으려고 했어? 그런 자들은 지옥에 가면 많다, 나를 흉내 내려고 하는 자들. 호 미미쿠스입니다.

 

계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경배라는 말이 푸로스쿠네오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누가 주님과 더불어 싸우겠습니까? 와 똑같은 말입니다.)

계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큰 말, horse가 아닙니다. 참람된 말을 하는 )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마흔 두달은 삼년 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이것이 큰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참람된 말이, 그들을 죽이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계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율법으로 곡해 된 말씀은 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까지도 미혹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훼방, 말을 깨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이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수시로 선악구조 아래로 내려가 그 말씀을 또 곡해한다니까요.)

계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반드시 우리를 이겨야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아무도 못 알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은 이 땅에서 내가 들려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계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그것을 그대로 같이 그들과 살아야 되니까 인내라고 합니다.)

계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예수님을 말합니다.)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생긴 것은 어린 양인데 말은 용의 말입니다. 아래의 물로 빠뜨려 죽이는 말입니다. 여자를 빠뜨려 죽이는 그 용이 그 입에서 불을 뿜습니다.)

계13: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그 예수를 예배하게 하니,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안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계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요즘에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이 임하옵소서.’ 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계13: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선택 밖에 자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죽었다가 아닙니다.)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섬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계13: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것은 뭡니까? 신명기 6:4절 이하에 쉐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절기 때 마다 외우는 것이 신명기 6장4절 이하입니다. 쉐마, 너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너희 이마와 손에 새겨라 그럽니다. 그런데 전제가 마음에 새기는 것이 이마와 손에 새기는 것이야, 그런데 요즘도 유대인들은 격문을, 지갑 같이 생긴 것을 붙이고 다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격문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너희들은 차는 격문과 옷 술 만 크게 하는 구나, 언제 하나님이 그것 차고 다니라고 했니?’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 표를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 이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마와 손에 표를 받았는데 율법으로 그 말씀을 받아 여기다가 그냥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계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장사를 못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 끼리 만 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들과는 소통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진리 이해 못하면 다이모니온, 마귀입니다.)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오해 되어진 성경의 말, 진리의 말, 예수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수라

(수라는 것은 고대시대 때에는 원래 아라비아 숫자가 생기고 나서도 1~9 까지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인도에서 0 이라는 것이 인도에서 만들어지기 전까지 7,777은 7이라는 숫자를 4번 표기했는데 7707은 0이 없어서 표기를 못하니까 77*7이라고 쓰고 *을 읽지 않고 띄어서 읽었다.(목사님 설교 중에 7707을 문자로 설명한 것을 편의상 이해하기 쉽게 *라는 표기를 했을 뿐 *는 의미 없는 빈자리의 표식이다) 이것을 비워 놓았는지 안 비워놓았는지 모를 것 아닙니까?  7777도 이렇게 쓰고 이것이 빈자리야, 라고 하고 놓은 것이 *이라는 말입니다. 숫자라는 것은 항상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의 수는 말이라고 바꿔 읽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7이라는 안식을 설명해주기 위해< 7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10이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못하는 위에 것들 5과 5를 나누어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마, 라고는 말을 했습니다. 다른 신은 뭐고 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위에 것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다섯으로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살인 하지마 , 거짓 증거 하지마, 간음 하지마 등 이런 것으로 설명을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 그것이 위에 것을 하는 거야, 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4로 설명을 해주신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 사람들이 완성을 해 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3으로 완성을 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주님은 둘로 설명해주고 이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야, 라고 설명해줍니다. 이 7은 완성이 되면 이것이 8이라고 합니다. 8과 7은 같은 이름인데 이것이 완성이 되면 그것이 8입니다. 8은 7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9는 그 단어 자체가 완성을 향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10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1~10 까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가 다 이야기를 담고 있죠? 이것을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짐승의 말, 짐승의 수, 사람의 수가 뭡니까? 사람과 짐승의 수준의 말을 666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원어로 어떻게 썼느냐 하면 키 크세 스티그마라는 없어진 문자를 씁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육백육십육으로 읽는데 원문에는  그것을 이렇게 만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말, 짐승의 말을 그 수를 세어보라, 라고 하는 말이 만져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이 단어는 이 문자는 히브리 사람들이 뱀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글자들입니다. 너희들이 그의 수를 그 율법, 그 육체로 알아 버리면 만져 바라 그러면 그것이 뱀이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777의 흉내는 비슷하게 내지만 거기에 그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가짜 말인 거야, 라는 것입니다. 666이 생긴 것도 다 뱀입니다. 히브리 문자들 새김이 다 그럽니다. 원래 뱀이라는 단어가 애굽에서 상형문자 이니까 이렇게 썼습니다.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완성 그래서 이것이 밖으로 나오면 이것이 크리토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 강대상에도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로 올바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뱀인 것입니다. 다 꼬리를 풀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내용은 진리와 비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며 그 분은 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만을 충만히 부어 우리를 살릴 수밖에 없는가? 를 제대로 알아 그 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선악의 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두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데 굳이 이름을 붙이면 두마음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두마음을 품은 자들아’ 라고 부르면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 두마음은 선, 악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았을 때에 선, 악, 어둠, 밝음 이렇게 나눕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럽니다.

 

진리는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빛이 어둠이고 어둠이 빛이네, 라고 알며 죄가 의이고 의가 죄이네,’ 라고 볼 수 있으면 그를 진리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둘로 딱 나누어 버리면 그것을 노미조한다고 합니다. 노미조의 명사형이 노모스입니다.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그 마음, 그 원래의 인간들의 마음, 노미조 하는 마음이라면 그것이 두마음입니다. 그것을 에피뚜미아라고도 합니다. 탐심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이야, 를 보여주는 것이 노미조하는 것이니까 율법, 말씀은 무엇을 그려 놓은 것입니까? 너희들의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죄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율법, 그래서 바울이 그럽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죄를 깨달아 알라라고 주었더니 그것을 열심히 행해버리면 어떻게 하냐 말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뱀으로 곡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에 보면

 

계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깨달은 자는 그들의 말씀을 한번 만져봐, 라고 합니다. 그것이 뱀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다섯 번째 날에 뱀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물은 아랫물입니다. 다섯째 날이니까 둘째 날하고 짝입니다. 둘째 날에는 위에 물과 아래 물로 나뉘어졌으니까 아랫물의 이야기를 하겠죠?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하며 에서 생물은 네피쉬입니다. 번성하게 하다는 우글거리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아직 진리가 뭔지 모르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입니다.)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새는 라키아, 성전이 있으라) 하시고

창1:21 하나님이 큰 바다 물고기들(큰 물고기는 탄임 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용, 뱀 이런 뜻입니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네피쉬)그 종류대로(민이라는 단어인데, 그 앞에 ‘래’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가르치기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민은 분배하다, 분리하다의 뜻으로 썼고, 분배하고 분리하는 두마음, 에피뚜미아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각기 종속, 과목, 광문, 개 이렇게 나누어서 생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파자를 하면, 분배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 용이라는 것이 오해되어진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만들고 우글거리는 인간들을 그 안에다가 놔두더라는 것입니다. 분배하고 나누는 그 죄가 뭔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큰 뱀, 큰 물고기 앞에 큰이라는 단어가 가돌이라는 단어인데 큰 광명, 작은 광명할 때에 큰, 위대한를 뜻하는 가돌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나쁜 뱀이라면 카탄(작은 광명)이라는 단어를 써야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뱀이 뭡니까? 위대한 아래의 큰 것이 뭐죠? 라고 하며 고래? 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고래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단어가 뱀, 짐승, 들개이라고도 선지서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위에 물을 가르치기 위해서 궁창을 만드시고 아래의 물과 아래의 물에 교집합으로 궁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궁창에 성전, 나는 새를 두시고 그 아래의 물속에 뱀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궁창, 그 나는 새, 그 성전과 아래의 그 뱀으로 그 위에 물을, 진리의 물을 알아버리면 괜찮은 것입니다. 뱀이 나에게는 더 이상 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그 뱀은 놋 뱀이 되어 죽은 것입니다. 성전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성전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되지만, 그 성전을 곡해해서 그 안에서 제사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만을 쏟아내게 되면 그것이 뱀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서 내 마음에 갖지 못하면 그 예수의 하신 일과 그 예수의 말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그 예수가 뱀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뱀, 놋 뱀이 되어 죽어 언약의 기둥에 못 박힌 뱀이 아니라 살아있는 뱀이 되어 여러분을 죽이는 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까지 그 뱀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뱀이 우리에게는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뱀이 품고 있는 그 내용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그 뱀 안에 넣어서 기둥에 매달아 다 죽였다, 라고 하는 겁니다.

 

막 13: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안에 말씀으로 있습니다.)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요즘에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만희를 비롯해서요.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내 밖에 있으면 죽여야 할 뱀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빨리 잡아다가 죽여야 합니다. 섬겨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니까 다 거기에 가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온 예수는 죽어야 하는데 여태 살아있어 내 밖에 두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면 이단에 빠지라고 해도 못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하여도 믿지 말라, 하고 주님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갖고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2000년 전 골고다에 아직도 거기에 박혀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에 말이 전부 용의 말이 되어, 뱀의 말이 되어서 나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말이 됩니다. 내가 그 짐에 깔려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로 올바로 깨달아 안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자유하게 만들어주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렵고 공포스럽게 만들어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하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니까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공포정치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뱀이 품고 있는 내용을 알아버린 우리는 그 죄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악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심판과 저주의 무거운 짐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그리고 그들은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을 나타난 모습 그대로 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 안에 내용이 있는 것이구나, 라고 이렇게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용으로 보지 못하고 나를 절망하게 하는 사건으로 보면 그 사건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모든 내용들은 합력되어 나의 선을 이루는 재료이니까 범사가 감사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기쁘기 만하고 평화롭지   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4: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이것이 율법을 지켜라, 라고 하는 말입니다.)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파스 알렛데이아, 다 선하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사건이나 현실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이 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깨끗해진다, 악과 어둠과 더러움이 아니라 ,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자들은 깨끗하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바의 베드로를 보고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한 것들을 전부 모아서 베드로에게 다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먹습니까?’ 라고 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도도 율법주의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내가 그것을 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부정한 것이라고 너희에게 주었지. 그 부정한 것이라고 나타난 것 안에 내용으로 깨끗한 것을 알라고 주었잖아, 그러면 너는 진리를 전하는 자 아니니? 그러면 그것을 정한 것으로 봐야지. 너는 여태껏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선, 악으로 그것을 나누어서 나는 부정한 것이니까 못 먹습니다, 라고 하고 있니?’라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요즘 어떤 사람들은 갑각류도 안 먹고 돼지고기도 안 먹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을 또 가르치고 다니는 박사의 모임에는 벌떼처럼 모입니다. 그래야  건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아무거나 맘 편하게 잘 드십시오. 소화 잘하고 운동하시면 됩니다. )

 

고후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세상에는 또 신이 있습니까?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신은 세상에 내려오신 오해되어진 신, 예수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되어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영입니다.)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는 말이 사실은 (스코토스 푸호스 랍포라는 단어인데 어두움이라는 단어가 소유격이고 푸호스라는 빛이라는 단어가 목적격입니다.) ‘어두움이라는 빛’이 그것을 비추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어두움은 빛을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둠의 빛이 그것을 비춰 주면에서 그것은 예수라는 얼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프로소폰은 나타난 예수라는 뜻입니다. 나타난 예수의 그 영광을 진짜로 보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어둠의 빛이 빛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안자들에게 있어서 그러면 어두움은 무엇이고 빛은 뭡니까?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롯한 아래의 모든 것은 그 안에 내용으로 보고 이해하게 되면 선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만 그 표피적인 것에 묶여버리면 그것으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 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몸으로 겪어 내야할 여러분의 시간들도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 그것을 껍데기로 받아버리면 여러분은 그것에 의해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죽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용으로 알아 버리면 그것이 빛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우리에게 나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되어 선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세상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나를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상황일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저 사람 실패했네, 나쁜 사람이네 하고 손가락질 한다 할지라도 그 상황 속에서, 지금의 이 상황이 나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화지로 쓰고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결과라면 그것이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대단하게 뭘 잘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나는 너희들을 그렇게 쓰기로 결정했어,’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고, 비난을 하거든 오히려 기뻐하세요. 왜요? 진리는 세상이 절대 못 본다고 했습니다. 못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야 내가 진짜 이구나, 라고 확인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세요. 많은 이들이 여러분에게 박수해 주면, 주님이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과연 그러하더라’ 그러셨습니다. 오히려 못 알아듣는 이가 많아야 ‘내가 진짜지’ 라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옛날에 그 사람들이 나를 잘 가르쳐 주었으면 조금 더 일찍 이리로 왔을 텐데, 첫 만에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듣고 싶어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싫은데 왜 앉아 있었겠어요. 내 마음이 그것을 좋아하니까 거기에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귀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못 듣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난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그 무엇이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여러분을 끈을 수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의 이야기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어둠도, 실수도, 실패도 심지어 죄와 악 까지도 여러분이 그것을 선물로 받아버리면 그 즉시 그것은 나에게 부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의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용서라고 합니다.

 

그것이 뱀의 머리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뱀으로써의 내 머리가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그 여인의 뒤꿈치로 그 피를 빨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 네 뱀의 머리가 깨어지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시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뱀의 머리를 밟아서 부숴야 하는 데가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의 머리입니다.

 

뱀의 머리가 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가 나에게 붙습니다.

 

계시록에서 모든 성도의 현실을 목 베임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밟아서 깨버렸습니다. 그 진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만 나는 생명의 피니까요. 그러면 내 머리가 깨지는 겁니다. 뱀인 내 머리, 곡해 되어진 율법으로서의 그 말씀이 깨져버리는 것입니다.